골수 좌파 지식인의 증언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송남헌>이라는 사람을 두들겨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송남헌[宋南憲, 1914.4.11~2001.2.20] 한국의 독립운동가, 현대사 연구가. (중략) 광복 후 군사정부에 의해 좌익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는 통일운동을 사회운동으로 확산하는 데 힘을 기울이며 현대사 연구가로 여생을 보냈다.> 이 정도면 극우보수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완벽한 '좌빨' 아니면 거의 '빨갱이' 수준이다.
특히 5.16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2년 간의 옥살이를 하였으니 그가 어떤 입장인지 알만하다. 그런 그가 <해방 3년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의 26페이지를 그대로 복사해 옮긴다. 이 글에는 <만주군 박정희 중위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되는 과정>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송남헌은 친북좌파가 말하는 이른바 <수구꼴통>이 아니라 오히려 '박정희 죽이기'에 앞장 서는 강만길이 추앙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사람이 쓴 글이니까 좌파든, 우파든... 특히 좌파나 민중사관론자들은 이 내용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을 쓴 때가 1994년 10월 15일이니, 박정희 대통령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박정희는 만주군 내의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
(위에서 다섯번째, 아래에서 세번째 줄 주목. 이 씨는 다음 날 (2월 10일) 저녁 부대간부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중위, 신현준 대위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씨는 자기 신변을 밝힌 뒤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광복군 임명장을 박중위와 신대위에게 주었다. 이래서 그들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됐다.)
(아래에서 네번째 줄 주목 : 이 국내 진공에 관한 비밀 거사에 참여한 바가 있었던 조선출신 군인 가운데는 朴正熙(박정희) 전 대통령도 있었으며....)
기왕 시작했으니, 아래도 한 번 읽어보자.
백범 김구 선생의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한 단락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백범의 증언과 이기청 씨의 증언을 비교해 보자.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도 증언하기를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와 큰절을 하였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그는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사실이었다." (출처 : http://bookstore21.net/korean/815/park-oss.htm)
애국자愛國者
(인용) 우리 민족이 해방된지 1년 하고도 두어달 지난 1946년 가을이었다. 아직 대한민국 건국 이전이지만 국토 경비를 위해 미 군정청이 창설한 태능 육군사관학교(아직 4년제 육사가 시작되기 전의 단기과정)에서는 제 2기생 교육 중이었다. 사관학교장은 이치업 육군 대위였는데, 그는 명색이 국군의 간성을 교육하는 육사교장이면서도 자신은 물론 주변의 누구도 애국가를 알지 못해 답답한 끝에 아이디어를 냈다. 생도들에 애국가 가사를 쓰라는 문제를 내고 시험을 치루었던 것이다. 생도 전원이 백지 답안을 제출하였는데 딱 한 명의 생도가 애국가 4절 가사를 정확하게 써냈다. 그가 바로 박정희 생도였다.
이치업 교장이 박정희 생도를 불러 애국가를 어디서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박정희는 대구사범 졸업 후 교편을 잡는 동안 학생들에게 몰래 애국가를 가르쳤다고 대답했다. 가사는 현재와 같으나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이별의 노래)'을 차용해 불렀을 때였다. 안익태 곡의 애국가는 그 뒤 일이다. 이렇게 해서 육사에서 비로소 애국가가 불려지게 됐다. (이치업.스티븐 엠.딸프 공저 '번개장군' : 2001 원민)
이치업 당시 교장의 이 증언은 문경의 그의 제자들의 증언으로 확증된다. 이영태(李永泰)는 스승 박정희가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음악시간에는<황성옛터> <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주셨다"고 증언한다. 그는 이낙선(5·16군사쿠데타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 (조갑제의 ‘박정희’ 79쪽).
첫댓글 소중한 정보
잘 읽어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낭만 자격님~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날 되세요~.
병신육갑 광복군 근거 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