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청수리 3165, 3217-3번지, 낙천리 912-1번지
청수리는 4·3 이전 1구(본동, 신연동, 정인동)와 2구(수룡동, 연화동, 월광동, 자료동, 다리왓)로 나누어져 있었다. 1구와 2구는 거리가 멀어 다른 마을처럼 지내다가 2구는 1956년 한경면이 분면될 때 수룽이(수룡동)·여뀌못(연화동)·쉐뻬든밭(우골동)을 합쳐 산양리가 되었다.
청수리는 4·3 기간 토벌대와 무장대에 의한 주민학살이 번갈아 벌어졌기 때문에 주민들은 마을에 머물기를 두려워했다. 피신할 만한 곳은 큰 오름이나 곶자왈이 없었기 때문에 주변 들녘이나 굴에 숨어 지내야 했다. 청수리 주민들의 희생은 대부분 1948년 11월 23일 해안마을로 소개한 이후에 발생했다. 그 이전 청수리 주민들이 희생당한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1948.04.16. 문달윤(男 19세)은 친척 문달수를 찾던 경찰에 의해 저지지서로 연행된 뒤 총살당함.
•1948.05.09. 금악국민학교 교장으로 있던 이병화(남 42세)는 퇴근해서 귀가하는 도중에 무장대에 납치, 피살됨.
•1948.05.30. 응원경찰이 청수2구(현 산양리)를 기습해 주민들을 청수국민학교로 집합시킨 뒤 김창권(男 30세), 박두화(男 33세)를 끌고 가서 총살함.
•1948.11.04. 무장대가 청수2구를 습격해 고달연(59세), 고경화(19세) 부자를 경찰가족이라며 납치, 살해함.
•1948.11.23. 토벌대는 청수2구에 소개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1구로 소개했다.
•1948.11.25. 현성구(男 18세) 토벌대에 총살됨.
•1948.11.28. 강태호(男 28세) 토벌대에 총살됨.
•1948.12.05. 김경봉(男 38세) 토벌대에 총살됨.
•1948.12.05. 한림면 중산간 마을에 대대적인 소개령이 내려지자 청수리 주민들은 다시 해안마을인 고산리로 소개했다. 청수리 주민들은 소개지에서 더 많이 희생되었다. 고산리로 소개한 주민들은 고산국민학교에 임시숙소를 짓고 생활했다. 그러나 소개 첫날부터 학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희생자들은 대부분 청년들이었고 토벌대는 이들을 무장대라는 이유로 학살했다.
•1948.12.06. 강인방(남 23세)이 고산국민학교에서 고산지서로 끌려가 총살됨.
•1948.12.07. 강창인(남 27세)를 비롯한 11명이 고산국민학교에서 고산지서의 호명을 받고 총살됨.
•1948.12.08. 고성근(남 17세)을 비롯한 5명이 고산국민학교에서 생활하던 중 고산지서 경찰의 호명을 받고 끌려가 총살됨.
•1949.01.16. 강인백(남 26세)과 강정구(남 18세), 강시경(남 35)은 고산리로 소개하면 죽인다는 소문 때문에 소개하지 않고 청수리 큰넝곶에 숨어 살다가 토벌대에 발각되어 총살됨. 강영숙(남 18)은 고산에서 소개생활 중 토벌대에 학살됨.
•1949.02.06. 임성대(남 29)와 임성재(남 24), 임성칠(남 28. 고산리 한청단장)은 고산리로 소개후 한청단원으로 활동하다 무장대와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바닷가 엉알 굴 속에서 경찰들에게 학살됨.
•1950.08.20. 강경옥(남 32)을 비롯한 강재고(남 38), 고도호(남 25), 고성권(남 25) 문무경(남 50), 문성사(남 24), 박원돌(남 42), 이정팔(남 18), 이호남(남 19) 9명은 예비검속된 뒤 대정면 상모리 섯알오름에서 총살됨.
2020년까지 확인된 청수리의 희생자는 모두 95(남 84, 여 11)명이다.
1948년 11월 소개되었던 청수2구(지금 이 마을은 산양리이다)가 1949년 5월 복귀하면서 같은 해 6월경에 마을을 둘러 쌓았던 마을성담의 일부이다. 앞ᄆᆞ르는 이 동네 지명이다. 증언에 따르면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었고, 성담은 폭 2m, 높이 3m 정도였다고 한다. 초소막에서 근무하면서 이상 기미를 보이면 지서에 연락하여 본부에 타전하면 군경이 동원되는 체제였다. 주민이 밭일하러 갈 때에는 지서장이 발행하는 통행증을 소지해야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2007 한경면역사문화지)
현재 해당 번지의 과수원 일대에 성담 흔적이 많이 남아 있고 청수리 3217-1번지 동쪽 경계선에는 길이 30m, 높이 1m 정도, 청수리 3165번지에는 길이 10m, 높이 3m의 성담이 남아 있다. 한 주민은 앞ᄆᆞ르 부분이 풍수학적으로 허하다고 하여 마을을 보호하는 방사탑과 같은 의미에서 이 성담을 남겨 두었다고 한다.(2020 개정증보판 제주4·3유적Ⅰ)
남아 있는 성담은 밭 경계인 곳도 있지만 경계가 아니라 밭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모양으로도 쌓아졌다. 밭 가운데로 성담을 쌓아도 경찰이 시키는 일이라 말 한 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청수리 3217-1번지의 소유자인 고정술(女 1934년생)씨의 증언에 따르면 청수리의 성담은 1차, 2차로 쌓았는데 그 사이는 약 70m 정도 된다. 2차 성담은 길 건너 밭(낙천리 912-1번지)으로 연결되는데 이곳은 허물어진 곳이 많고 높이가 1m 정도로 낮아져 있어 얼핏 보면 일반적인 밭담처럼 보인다.
고정술씨는 마을에 남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직접 이 성담에 설치된 막(초소)에서 보초 근무를 했었다고 하며, 저녁부터 날이 완전히 밝을 때까지 대여섯명이 초소에서 교대로 2시간 정도씩 근무를 했는데 인기척이 나면 암호를 불러 피아를 구별했었다고 한다.
《작성 2026.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