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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예찬
아 7:1-9
1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2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3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4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에 있는 연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5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6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7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8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9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아 7:1-9 / (신랑) 어찌 그리도 귀여운가요. 아가씨! 귀한 집 손님! 신발 신은 그 발이 어찌 그리도 귀여운가요. 둥그런 그대 허벅지 예술가의 정교한 작품. 바로 그것이라네. 2) 그대 배꼽은 향긋한 포도주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둥그런 술잔. 허리는 나리꽃에 둘리운 밀단. 3) 그대 젖가슴은 쌍둥이 암사슴 두마리 새끼 노루와도 같아. 4) 그대 목덜미는 상아로 만든 망대라. 그대 두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에 있는 연못 같아라. 그대 코는 다메섹 쪽 바라보는 레바논 망대 같아. 5) 그대 머리는 갈멜산같이 우뚝 솟아 있고 그대 땋아 내린 머리칼은 심홍빛으로 빛나 임금님도 그 아름다움에 빠져 버렸다오. 6) [가슴이 벅차다오] (신랑) 아리따워라, 그대 아름다워라. 그대 사랑, 어찌 그리도 가슴 벅찬지! 7) 종려나무처럼 우아한 그대. 그대 젖가슴은 종려 열매 같아라. 8) 나 종려나무에 올라가 그 열매 따먹으리. 그대 젖무덤은 포도송이 같아라. 그대 숨결은 능금 향내이어라. 입맞추는 그대 입은 달콤하고 맛깔진 포도주이어라. 9) (신부) 그 포도주 내 임에게로 흐르게 하리. 입술로, 이 사이로 흐르게 하리.
이 포도주는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을 움직이게 하느니라
술람미 여인은 사랑의 갈등을 이겨내고 사랑을 회복한 기쁨으로 춤추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더욱 성숙한 사랑으로 승화되는 사랑을 노래합니다.
귀한 자의 딸아(1-5) 술람미 여인은 평범한 시골처녀였지만 솔로몬과 결혼하여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술람미 여인의 발에서부터 넓적다리, 배꼽, 허리, 유방, 목, 눈, 코, 머리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올라가며 그 아름다움을 예찬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에게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발끝부터 머리카락까지 아름답게 보십니다. 이는 술람미 여인이 상징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된 것을 말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과 지극한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가 되어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6-9) 신랑 솔로몬은 신부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이 자기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종려나무는 성경에서 번영(시 92:12), 승리(계 7:9), 기쁨(레 23:40)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당시 근동 지역에서 우아함과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종려나무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신랑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극찬하며 기뻐합니다. 이에 신부는 포도주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흘려보낼 것으로 화답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된 우리를 “사랑아”라고 부르십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결혼제도 안에서 마음껏 사랑하며 기쁨을 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기뻐하시며 사랑하시듯 우리도 그 사랑을 기뻐하며 화답해야겠습니다.
적용: 당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습 3:17). 당신은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참 사랑을 찾고 계십니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요? 누군가에게 가장 귀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때가 아닐까요? 그때 그 순간에 나 자신의 볼품없음, 부족한 그 어떤 모습도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귀하게 여겨주고 표정으로, 말로, 행동으로 채워지는 감동은 사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귀한 사람이며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 성 경 >
포로가 되는 사랑
아 7:1-13 / 조정현 목사
아가서에 보면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들이 많이 나오지만 오늘 7장 말씀은 포로가 되는 사랑, 즉 매이는 사랑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포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5절에 보시면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라고 노래합니다.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에게 완전히 매였고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그녀의 자주 빛이 나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꽉 매이게 된 것입니다.
옥합을 깨드린 마리아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길 때에 자신의 머리털을 사용했습니다. 얼마나 지극한 사랑의 표현입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매이는 모습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시면서 무엇에 매이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즉 포로가 되는 사랑,..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는 예수님에게 이런 사랑의 포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바로 그런 매이는 사랑, 포로가 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는, 부끄러움이 없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성경에 어떻게 사랑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발, 허벅지, 넓적다리, 가슴, 목, 눈, 코 등... 여인의 몸을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부끄러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창세기 2:25에 보면 아담과 그의 아내가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에도 서로가 숨기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죄는 감추는 것이고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부끄러워서 나무 뒤에 숨어 버렸고, 서로를 바라보며 부끄러워서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게 되는 그것이 바로 죄의 모습인 것입니다.
매이거나 포로가 되는 사랑은 서로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한마디로 숨김이 없는 사랑입니다. 아가서 4:7에 보면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보면 서로에게 부끄러운 일들을 많이 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부끄러움을 위해서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짊어져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혀 감추시는 것이 없습니다.
히 12:2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러워서 숨어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딤후 2:15에 보시면 “너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술람미 여인에게 부끄러움이 있었다면 자신을 솔로몬에게 온전히 맡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십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도... 또 내 고민과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생각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을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술람미 여인처럼 우리를 그대로 받아 주실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4에 보시면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그렇고 실제적인 삶의 모습에서도 그렇고 우리는 결코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의 순결함과 거룩함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모습 그대로 나아갈 때에 나를 처녀처럼 순결하게 해주시는 사랑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 내가 부끄럽다고 해도 다시 한 번 주님 앞에서 정결한 처녀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큰 기쁨이 있는 사랑입니다.
매일 사랑의 포로가 될 때에 우리에게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매이는 사랑 즉, 깊은 사랑에는 큰 즐거움이 있습니다. 마치 부부가 서로를 알아가는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에 큰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시 43:4에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누구를 노래하고 있습니까? 극락의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그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그런 큰 기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서 또 내가 행복해져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그 기쁨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들 중에 사랑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바로 기쁨입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면 부부간의 사랑에서 오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스바냐 3:17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너무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받게 되는 그 기쁨으로 말미암아 내 슬픔을 내 아픔을 내 현실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랑입니다.
9절까지에 나오는 솔로몬의 사랑의 노래에 응답하고 있는 내용이 10절 이하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의 노래입니다.
10절에 보면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라고 노래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아예 내 것이 없다. 라고 표현합니다.
12절에 보면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고 또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13절에 보면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서 쌓아둔 것들이 많아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어야 합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위해 온갖 것들을 준비해 놓은 것처럼 우리도 준비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고, 롬 8:32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행 17:25에서도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이렇게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나의 인생을 아예 송두리째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아가 7:1-13 / 강준민 목사
들어가는 말: 사랑의 최고봉은 친밀한 사랑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세기 2:24-25)
1. 친밀한 사랑은 자신을 드러냄으로 깊어집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 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전서 2:24)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6:19)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고린도전서 6:18)
2. 친밀한 사랑은 자신을 내어 주는 연합으로 깊어집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 신하리니" (이사야 43:4)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소서 5:2)
1) 서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십시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세기 2:23)
2) 서로 사모하고 서로에게 헌신하십시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아가서 7:10)
3) 친밀한 사랑을 위해 은밀한 장소를 소유하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아가서 7:11)
4) 열정적으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요한계시록 3:15)
5) 사랑의 분위기를 준비하십시오.
나가는 말
친밀한 사랑의 극치는 자신을 내어 주는데 있습니다.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아가서 7:1-9 / 이장우 목사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기도 하고 하나로 보기도 합니다. 두 부분으로 나누면 1~6절까지 친구들, 7~9절 상 반절까지 남자. 다음 주에 볼 9절 하 반절부터 13절까지는 여자가 부르는 노래로 표시를 합니다. 다른 번역은 오늘 본문 전체를 남자의 노래로 표시합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남자의 노래로 보면서 남자가 여자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다 아름답다고 한 내용을 보겠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한결같지 않습니다. 늘 변하고 흔들립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한다고 하여도 그 사랑은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사랑도 잠시 잠간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면 상대방의 단점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다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해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단점마저 매력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콩깍지가 벗겨지면 단점이 드러날 뿐 아니라 장점이라고 생각한 것조차도 미워지는 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사랑은 결코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랑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요한일서 4: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세상의 노랫말 중에 사랑이 없는 노래가 없을 정도로 사랑의 노래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참 사랑이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그 참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 사랑을 알지 못하면 아직도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안다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셔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아는 과정은 자신의 죄가 어떠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 죄가 일반적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죄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우리가 화목제물을 마련하여야 하는데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보내셨습니다. 화목제물로 용서가 일어나는 것을 구약에서는 율법과 제사제도를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과 제사마저 자기들의 의로 삼고 있었던 자들이 화목제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 버렸지만 그 죽임당한 분이 죽인 자를 용서 하시고 사랑하시는 내용이 성경의 사랑입니다.
사도행전 9:16~19절입니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바울이 율법 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을 때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이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멀어버립니다. 아나니아 선지자가 바울에게 안수하자 바울의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집니다. 그 비늘 같은 것을 모세의 수건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세의 수건이 벗겨져야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3:13~18절입니다.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바울의 눈에 비늘 같은 것 곧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 있을 때에는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구약에 예언된 새 언약인데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가려진 눈으로 행한 일은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 없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수건이 벗겨지고 나니 주의 영광을 봅니다. 십자가로 나나타난 그 주님의 영광이 영원한 영광임을 주의 영으로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이 나타나면 우리가 주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뿐 아니라 주님도 그 안에서 우리를 사랑으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도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완성의 빛으로 보면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내용으로 봐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어떤 변호사분은 술람미를 하늘의 참된 지혜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아도 괜찮은 것은 지혜가 솔로몬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미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속하였다는 말을 합니다. 상호 소속된 사람입니다. 둘이 하나가 된 사랑을 말합니다. 너와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안에 내가, 내 안에 네가 있습니다.
이 일을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루십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있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일을 십자가로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적용하여 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일하신 결과로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고 찬양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한 그 사랑도 알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게달의 장막과 같은 자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도 자신의 죄가 어떠함을 알고 그 죄가 용서 받고 가려짐을 받는 것이 참된 복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행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그 사랑의 완벽함만 자랑합니다.
본문 1~9절입니다.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꿰미 같구나” 술람미는 귀한 자의 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랑하기에 그 출신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출신마저 귀하다고 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과거의 추함과 더러움조차 주께로 인도한 일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귀한 것들이 가득함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그 귀함이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자들은 발끝에서 머리까지 다 아름답습니다.
첫 번째 발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다 아름답게 보이지만 본문에서 성경에서 신체의 부분들을 말한 내용을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 보겠습니다. 이사야 52:7절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예루살렘을 구원하여 주신다는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소식은 이어지는 고난 받은 종의 노래로 인하여 구원이 일어나기에 복음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고난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랑이 신부를 아름답다고 하는 발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고 전하는 그 발이 아름답습니다.
두 번째 넓적다리입니다. 넓적다리가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꿰미 같다고 합니다. 넓적다리는 허벅지를 말하지만 넓게는 생식기가 있는 전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문자대로만 보면 성적인 아름다움으로 말한다고 보기에 아가서로 부부의 사랑을 에로틱하게 그려서 논란이 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넓적다리로 표현된 단어는 아브라함이 자기 종에게 자기아들 이삭의 아내를 데리고 오라고 맹세시킬 때에 나타나는 단어입니다(창24:2,6). 그리고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가 침을 당한 곳을 전에는 환도 뼈라고 번역을 했는데 지금은 허벅지 관절이라고 합니다(창32:32). 그리고 이 허벅지 곧 야곱의 몸에서 후손들이 나왔다고 합니다(창46:27). 그러므로 넓적다리 곧 허벅지가 아름답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자기 힘이 침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생식의 능력이 아니라 약속의 능력을 보여주는 상처 입는 넓적다리가 아름답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음 같다고 합니다. 배꼽이라는 단어는 아가서에서 단 한번만 나옵니다. 그러므로 배꼽을 아름답다고 비유하는 내용을 보면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담은 둥근 잔과 같다고 합니다. 섞은 포도주는 포도주에 향료나 꿀을 섞어서 잔치 때에 마시는 귀한 포도주를 말합니다. 그리고 허리의 아름다움을 백합화로 두른 밀단과 같다고 합니다. 허리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이 리브가가 임신하였을 때에 나옵니다. 허리를 태라고 합니다(창25:23).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인데 두 국민을 말하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라고 한 이 내용은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로마서 9:10~16절입니다.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ㄷ)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ㄹ)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말 1:2 이하)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ㅁ)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이유를 이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가 왕의 사랑을 받는 일은 일방적인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랑을 말함으로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계시를 위한 언약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에 단지 섞어질 육체적인 아름다움만을 말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여 노래하여도 그 사랑을 받은 자격이 전혀 없는 술람미가 그 사랑을 받는 것은 로마서 9장이 해석을 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다고 합니다. 유방이라는 단어를 가슴이나 품으로도 사용합니다. 이사야 66:10~11절입니다. “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11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11절에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12절의 ‘품에서’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의 ‘유방’과 같은 단어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마치 어린 아이가 어미 품에서 젖을 넉넉히 빨고 만족한 상태에 있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12~14절을 봅니다.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14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시편 131편입니다.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단어의 연결은 아니라도 의미적 연결이 됩니다. 아가서의 남자와 여자로서 그 품을 그리워하고 아름다워 하는 것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말하지만 자녀가 어머니의 품에서 만족하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품속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4~5절입니다. 목과 눈은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머리가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메였다고 합니다. 왕이 머리카락에 메였다는 표현을 보면서 저는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 식사하러 갑니다. 이곳에 죄인인 한 여인이 와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후에 향유를 붓고 그 발에 입 맞추기를 쉬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이런 예수님을 속으로 비난합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입 맞추지도 않았고 기름을 붓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먼저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머리카락에 예수님이 메인 것입니다. 이것은 여인이 먼저 용서와 사랑을 받았기에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습니다.
본문 6~9절입니다. “봉독” 여기서 새롭게 등장하는 신체부위가 키와 콧김과 입입니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입은 좋은 포도주 같다고 합니다. 콧김이라는 같은 단어가 성경 처음에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2: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술람미 여인의 콧김이 사과 냄새 같다고 하는 말은 제대로 된 생명의 기운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콧김 곧 생명의 기운이 나오는 것이 생명 된 신랑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입은 좋은 포도주 같다고 합니다. 참으로 좋은 포도주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주신 그 포도주입니다. 그 포도주를 자신의 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이유는 예수님의 그 사랑에 흠뻑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교회가 완벽하게 아름다운 때는 오직 그 사랑 안에 머무는 때입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신랑이 가장 아름답게 보십니다. 스스로 자기를 단장하고 나오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죄인인 한 여인은 그 사랑을 받았기에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다 사랑스럽습니다. 이 사랑을 받았고, 받고 있고, 영원히 받을 자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교회된 신부입니다. 이 신부는 그 신랑을 사랑함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신부된 교회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할뿐 아니라 그리스도도 신부를 향하여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라고 합니다. 이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은 ‘마라나타’를 인사말로 하고 삽니다.
솔로몬의 사랑 예찬에 담긴 영성
아 7:1-9 /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목사(조직신학, Th. D.)
1. 참 된 사랑은 갈수록 견고해진다(아 6:1-14).
2. 이제 사랑이 회복 되고 춤추는 아름다운 신부를 보며 솔로몬 왕이 아내(신부)를 향해 바치는 극찬의 고백송이다. 이에 담긴 사랑의 의미를 살펴보자.
1) 아내의 귀한 신분 예찬
(1) 아내는 귀한 자의 딸이다. 솔로몬이 볼 때 아내는 신분이 귀한 자였다. 귀하지 않은 신부(배우자)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배우자는 다 귀하고 사랑스럽다. 혈통적, 육체적, 세상적, 귀족이어서가 아니다. 솔로몬 왕의 아내가 되었으니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인가! 사랑하면 사랑하는 자의 집 지붕 까마귀까지도 사랑스러운 법이다(愛及屋烏). 하물며 그 처가 집은 얼마나 귀하게 여겨지겠는가! 그러니 귀한 자의 딸이라는 이야기이다.
(2)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귀하다.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실제적 특권은 얼마나 귀한가(롬 8:15). 하나님의 자녀는 솔로몬의 신부보다도 왕의 자녀보다도 귀하다.
2) 아내의 육체적 아름다움 예찬(2-9)
(1) 발
솔로몬은 신발을 신은 사랑하는 이의 발을 찬양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적 아름다움과 외적 아름다움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의 내적, 외적,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이 아름답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듯 가끔 어린 자녀의 발을 씻겨보라. 사랑스런 자녀의 발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신발을 신은 사랑하는 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는 이가 신발을 신은 발을 신약 성경은 복음전파의 아름다운 발로 묘사하고 있다(엡 6:15).
(2) 넓적다리
누군가 다리는 신(神)의 날개로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솔로몬은 사랑하는 이의 다리의 아름다움을 예술가의 작품 같다고 극찬한다. 넓적다리(환도뼈)가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술꿰미 같다는 칭찬을 보라! 다리는 두 다리가 연합하여 선다. 신앙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 연합해야 비로소 균형이 잡히고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3) 배꼽
배꼽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당연하다! 배꼽은 하나님이 어머니를 통해 주신 생명을 달고 나온 곳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 배꼽을 통해 이 세상에 신고하였다. 배꼽은 건강과 풍성함을 의미한다.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은 배꼽을 통해 복부의 건강미와 풍성함을 칭찬한다. 예수님은 생명을 얻되 풍성한 사랑을 주시러 이 땅에 오셨다. 신앙은 영성이 늘 건강하여 그것이 삶의 풍성한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 믿고 초라해졌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그렇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4) 허리
솔로몬이 신부의 허리를 칭찬하다. 백합화로 두른 밀단('아레마트'/a mound of wheat= 추수 후 타작 마당에 쌓아놓은 곡식단을 말함)은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하고 풍요로운 모습인가! 허리에 사람의 힘과 능력과 풍요로움이 있다. 성도의 허리는 사랑의 하나님이 세우신다. 예표론(豫表論)적으로 성도의 삶에 풍요로움이 따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5) 유방
젖가슴을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다고 칭찬하다. 유방은 아름답고 고우며 부드럽다. 또한 유방은 생명의 역동성과 균형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늘 따뜻하고 부드럽게 다가온다. 신앙은 유방처럼 균형 가운데서도 살아있는 삶의 역동성을 나탄내야 한다.
(6) 목
목은 상아 망대 같다고 예찬하다. 목은 불변을 상징한다. 목이 변하면 큰일 난다. 하나님 사랑은 불변하며 신자의 믿음도 불변해야 한다. 또한 목은 머리와 몸을 이어준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과 복락과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인도한다. 성도들도 교회와 세상에서 목이 되어라! 목처럼 견고하고 불변하며 상아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운 믿음이 복되다!
(7) 눈
눈이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에 있는 연못 같다고 칭찬하다. 헤스본은 ‘요새’ 또는 ‘현명함’이라는 뜻을 가진다. 헤스본은 본래 아모리 왕 시혼의 도성이었다(민 21: 26; 신 4:46). 하지만 이 성은 르우벤 지파의 차지가 되었으며(민 21: 21-26; 수 13:17) 레위 지파의 므라리 자손에게 준 땅이었다(수 21:26; 사 15:4). 이곳에 당대 최고 권력자요 최고 토목기술자요 조경학자요 하나님이 베푸신 최고 지혜의 소유자였던 솔로몬이 꾸민 아름답고 화려한 연못이 두 군데나 있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아름답던 술람미 여인의 눈은 이제 솔로몬의 눈에는 연못처럼 맑고 아름답고 현명하며 강력한 요새 같은 변하지 않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신앙은 아름다운 눈처럼 빛이 나야한다. 얼굴의 중심은 눈이다. 눈에 모든 게 담겨있다. 또한 눈은 몸의 등불이다(마 6:22; 눅 11:34). 빛나지 않는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8) 코
술람미 여인의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다고 했다. 목이 상아 망대 같다면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았다. 목도 육체의 망대요 코도 육체의 망대이다. 그런데 코는 목과 다른 기능이 있다. 코는 목과 달리 냄새를 맡는 기관이다.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분별을 상징한다. 성도는 진리를 분별하고 늘 미혹의 냄새들을 구별해내야 한다.
지금도 시리아의 수도인 다메섹은 고대 아람 왕국의 수도였다. 이스라엘 왕국의 최대 라이벌 아람의 다메섹을 감시하기 위한 망대는 어느 곳에서든 눈에 띠게 솟구쳐 올랐다. 망대가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진다. 만일 사람 얼굴의 코가 무너지면 얼굴의 모든 게 무너진다. 이렇게 망대를 닮은 코는 기품과 순결을 상징한다. 즉 코는 견고한 기품의 상징이다. 술람미 여인의 코는 그렇게 아름다웠다. 신앙의 삶도 반듯한 코처럼 기품과 순결을 반드시 동반해야 함을 기억하라!
(9) 머리와 머리털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비단처럼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은 바로 그 술람미 여인의 머리카락에 매였다. 갈멜산은 팔레스틴 지역에서 헤르몬산 다음으로 높아 남동쪽으로 24Km나 뻗어있는 아셀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자주 빛은 주로 왕들이 입던 옷의 색이었다(삿 8: 26). 왕의 신부다운 술람미 여인의 길고 아름답고 매혹적인 머릿결을 나타낸다.
이렇게 머리는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교회가 지닌 질서와 위엄을 보여주고 머리털은 교회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교회는 주님의 아름다운 몸 된 교회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머리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머리는 인간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종합상황실인 것이다. 종합상황실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이제 솔로몬 왕의 기쁨과 즐거움은 더하여 졌다. 그 노래 속으로 더 들어가 보자.
(10) 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키를 중동 지방의 대표적인 나무인 종려나무 같다고 예찬하다. 대추야자나무로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종려나무는 번영과 아름다움과 승리와 풍성한 열매의 상징이다. 사람은 모두 자신과 남의 키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키는 성장하며 자란다. 크게 자려면 7미터가 넘고 풍성한 열매를 제공해주며 그 잎사귀를 유대인들이 초막절 절기에 장막을 짓는 데 사용한 종려나무는 술람미 여인의 크고 아름다운 키를 칭찬하며 비유하는 데 아주 적합한 나무였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키가 자라듯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 13) 신앙이 자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믿음은 끝까지 승리하여 믿음의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성도들은 모두 천국에서 승리의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계 7:9).
(11) 유방의 모양
술람미 여인의 유방 모양은 열매송이, 포도송이 같았다. 탐스러운 유방은 포도송이처럼 반드시 복 된 사랑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풍요의 열매를 상징하는 사랑스런 유방처럼 믿음은 말씀을 따라 신앙의 아름다운 영적, 육적, 질적, 양적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12) 숨(콧김)
숨(콧김)에서는 사과 냄새가 났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입맞춤을 하며 반드시 사랑하는 이의 향기를 맡게 된다. 연인들은 그 날카로운 사랑의 첫 향기를 잊지 못한다. 믿음도 유사하다. 향기가 없는 믿음은 소용없다. 신앙은 당연히 향기가 뿜어져 나와야 하고 향기 있는 식물은 언젠가 열매를 거두게 된다.
(13) 입술
술람미 여인의 입술은 좋은 포도주 같았다. 말씀은 입으로부터 나온다. 입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입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예수님은 영혼을 살리는 신령한 음료요 영적 생수였다.
성경은 싱거운 책이 아니다. 본문이 말하는 육체도 단순한 육체적 예찬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본문을 통해 육체의 비유에 담긴 하나님 사랑의 영적 보석들을 읽고 묵상하며 찾아보자.
사랑하면 모든 게 아름답게 보인다. 신랑은 사랑스런 신부가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이 아름답게 보인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체가 아름답게 보인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와 그 자녀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정말 우리 각자는 그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는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아 7:1-9 / 기쁨의 교회
솔로몬 왕은 본문 말씀에서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녀의 신체의 여러 부분들(발과 넓적다리, 배꼽과 허리, 유방, 목, 눈, 코 등)을 예를 들어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이 아가서를 기록한 본질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보다 우리의 중심과 우리의 마음을 중요하게 보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외모나 육체는 결코 영원한 것이 못되고 풀과 꽃과 같이 다 시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가서에서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지만, 이것은 아가서를 기록한 본래의 목적이 아닙니다. 아가서의 가장 본질적인 목적은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결국 우리 신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가서는 철저하게 모형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아가서의 앞부분에도 예수님께서 술람미 여인을 칭찬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가서 1장 9-10절, 15절, 2장 2절, 14-15절, 4장 1-5절, 7-15절, 6장 4-9절 등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때 술람미 여인을 칭찬하신 것은, 주로 그녀의 성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주로 그녀의 사역과 사역에 대한 그녀의 자세들을 칭찬하십니다. 이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술람미 여인이 교회에서 어린 영혼들을 돌보는 가운데 예수님의 사역에 동역하는 자로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술람미 여인의 사역과 사역 자세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칭찬하고 계신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아7:1]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귀한 자의 딸아”
술람미 여인은 본래 시골의 포도원지기의 딸이었고 얼굴도 검었고 시골뜨기 처녀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받아 솔로몬 왕과 결혼했기에 이렇게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우리는 죄인이었고 결코 존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귀한 왕자와 공주가 되어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우리의 이런 존귀한 신분을 한시도 잊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옆의 분과 이렇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존귀한 왕자/공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이 땅에서의 신분입니다. 이 신분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었거나, 본래 우리가 이런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그 일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존귀한 신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성경에서 “발”은 복음을 전하는 발을 의미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는 발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발은 복음을 전하는 발을 의미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예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통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도였을 뿐 아니라, 교회에서는 연약한 지체들을 잘 양육하고 또 세상에 나아가서는 주님의 귀한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사람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발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은 복음을 전하는 발입니다. 우리가 로렌 커닝햄 목사님이 쓴 『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라는 책을 다 읽었는데, 그 책에 보면 로렌 커닝햄이 어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음 전도자의 비전을 주셔서, 그것을 어머니께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가정 형편이 무척이나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두 가게에 가서 로렌 커닝햄에게 좋은 구두를 사주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복음을 전할 그의 발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발인지를 로렌 커닝햄에게 시청각적으로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어머니였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발은 복음을 전하는 발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아무쪼록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의 권능이 부어져서 여러분과 제가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어서 예수님께로부터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발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칭찬받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넓적다리는 우리의 몸을 지탱해 주는 기둥과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잘 걷기 위해서는 넓적다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넓적다리가 잘 단련된 사람은 오래 동안 지치지 않고 잘 걸을 수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의 넓적다리가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 꿰미 같다”는 말을 우리말 성경은 “장인의 손으로 정성 들여 세공한 보석과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인의 넓적다리의 근육이 잘 발달되어서 튼튼하고 강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넓적다리가 얇은 것이 미인의 조건이지만, 그 당시에는 넓적다리가 튼튼한 것이 미인의 조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것의 모형론적 의미는 술람미 여인이 전도훈련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복음을 전하고 금방 지치는 사람이 아니라,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도 전혀 지치지 않는 신자였음을 교훈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칭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7:2]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배꼽’은 모태에서 아이가 어머니의 영양 공급을 받는 통로입니다. 따라서 모형론적으로 “배꼽”은 우리 신자가 주님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적 생명을 공급받는 능력을 상징합니다.
“섞은 포도주”는 포도주에 향료 등을 섞은 것을 말하는데, 매우 맛있는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가득히 부은”과 “둥근 잔”은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내적 생명을 풍성하게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여 주시는 능력을 받아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이렇게 칭찬하여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과 저도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할 때에,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오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능력으로 사역을 잘 감당함으로, 예수님께 이런 칭찬을 받으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여기서 허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배, 몸, 자궁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인데, 풍성한 생산력과 열매를 말합니다.
[히7: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밀단은 추수를 한 후에 타작마당에 쌓아놓은 곡식단을 말합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보리나 밀을 추수한 후 백합화로 밀단 허리를 묶어놓고 타작마당에서 수확의 기쁨을 감사하여 춤추고 노래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라는 말은, 술람미 여인이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다시 말씀드려서, 세상에서 전도하는 것과 교회 내에서 양육하는 데 있어서,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녀를 이렇게 칭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7:3]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엄마는 태어난 아기에게 유방으로부터 나오는 젖을 통하여 영양을 공급합니다. 따라서 “유방”은 모형론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암사슴”이라는 것은 늙어서 젖을 낼 수 없는 사슴과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된 말이고, “쌍태 새끼”라는 것은 두 배로 영양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목사로서 저에게 가장 큰 기도 제목과 소원 가운데 하나는, 저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충만하여 성도들을 영적으로 충만히 먹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독서도 하면서, 몸부림치고 애쓰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이 전도한 영혼들이나 교회의 어린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풍성하게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녀의 “두 유방이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다”고 칭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부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렇게 말씀이 풍성하여, 다른 성도들을 흡족히 먹일 수 있는 축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7:4]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에 있는 연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목”은 복종하는 의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한 자들을 “목이 곧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의 목이 “상아 망대 같다”라고 말합니다. 상아 망대라는 것은 귀한 것일 뿐 아니라 견고하고 튼튼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술람미 여인이 참으로 귀하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예수님께 온전히 복종하는 신자임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칭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에 있는 연못 같고”
“눈”은 모형론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엡1:18-19]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런데 예수님은 술람미 여인의 눈이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에 있는 연못과 같다”고 말합니다. 헤스본의 바드랍빔 문은 그 당시 매우 깨끗한 물이 나는 휴양지였고(민21:25-26), 그 문 곁에 있는 연못은 깊은 속을 다 볼 수 있을 만큼 깨끗하고 투명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술람미 여인이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를 잘 분별하는 깨끗하고 지혜로운 분별력을 가지고 있음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코는 냄새를 분별하는 몸의 기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코”도 모형론적으로 술람미 여인이 가지고 있는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코는 특별히 영적인 대적들, 사탄의 세력들의 역사를 꿰뚫어보고 그것으로부터 자신과 교회를 보호할 수 있는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같다고 했는데, 레바논 망대는 이스라엘의 가장 강대한 적이었던 앗수르의 수도 다메섹으로부터의 공격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라는 말은 술람미 여인은 사탄과 그의 세력들의 역사들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방어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이런 칭찬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기쁨교회 성도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에 대한 정확한 분별력뿐 아니라, 우리의 대적 사탄의 세력의 역사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분별하고 잘 방어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7:5]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머리”는 모형론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말합니다. 갈멜 산은 경치가 아름다웠고 특별히 아름다운 산꼭대기로 유명했습니다. 따라서 “머리는 갈멜 산 같고”는 술람미 여인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참으로 아름다운 생각이었음을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생각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지킴으로 영적 전쟁에서 늘 승리하는 여인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칭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아가서에서 머리털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말한다고 여러 번 말씀 드렸습니다. “드리운 머리털”은 깨끗하게 빗겨진 머리카락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자주 빛은 과거에 왕이나 귀족들의 옷의 색깔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병사들이 예수님께도 자주빛 옷을 입힌 것입니다. 따라서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라는 표현은, 술람미 여인이 왕과 같은 단호한 결단을 가지고 예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매이었구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도 여러분에게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셔서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에게도 정복당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뜨겁게 사랑하고 자신에게 온전히 헌신하고 있는 신부들에게는 정복당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아7:6]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화창하다”는 것은 “매력적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신자는 예수님의 눈에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일 뿐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참으로 즐겁게 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로 부족하여 연약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우리의 마음을 귀하게 보시고,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을 너무나 아름답게 보시고, 우리에게서 기쁨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아7:7]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종려나무는 야자수 나무를 말하는데 이 종려나무는 20미터 정도 자라는, 키가 큰 나무입니다. 술람미 여인의 키가 커서 솔로몬 왕이 이렇게 말한 것인데, 이것의 모형론적 의미는, 술람미 여인의 신앙이 장성한 사람의 신앙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칭찬한 것입니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유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매송이 같다는 것은 그 능력이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아7:8]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예수님께서 이런 장성한 신앙인들은 영적으로 강하게 붙들어 주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이렇게 유방에 대해 세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만큼 우리가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먹이는 사역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여러 번 강조하여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술람미 여인의 콧김이 사과 냄새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콧김은, 술람미 여인의 속에 있는 내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술람미 여인의 마음 속에 있는 내적 생명이 예수님과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냄새를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칭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7:9상]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아가서에서 “입”은 항상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술람미 여인과의 교제를 통해 좋은 포도주가 주는 것보다도 더 좋은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셨기 때문에, 이렇게 칭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마지막 시대에 최선을 다해 예수님과 동역하는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과 저도 술람미 여인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분별력과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함으로, 예수님께로부터 이렇게 칭찬받으시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