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이 식을 알아차릴 수 없는 것과 같이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질문에 고 김성철 교수님이 답변하신 내용입니다. 읽어보면 도움이 될 거 같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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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교수님의 중론 입문서 중론 논리에 의한 해탈, 논리로부터의 해탈 을 읽던 중 관육정품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관인연품이나 관거래품은 책의 상세한 해설과 함께 그 의미를 고찰하고 곱씹어가며 거의 이해했지만 관육정품의 눈에 대한 고찰은 제게 어렵더군요. '눈이 눈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눈이 실재하는지 검증은 불가능하다.' 라는 것과 동의어로 이해해도 되는 것일까요? 만약 위 질문이 맞다면 또 다른 질문은 중론에서 '눈이 눈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라는 명제를 해석하는 방식은 어찌하여 '눈이 실재 할 지도 모른다.' 같은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단호히 "눈은 실재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것인가요?
답변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작년 초에 출간한 제 책 <중관학특강 - 색즉시공의 논리>, pp.66-70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적이 있는데, 아래에 이를 인용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개념의 실체성 비판 예시 - 눈은 실재하지 않는다.
<반야심경>을 보면 없을 ‘무’자가 많이 나오는데 그중 ‘무안이비설신의’라는 경문이 있습니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의식도 없다.”라는 뜻입니다. 중국 선승 중에 조동종의 종조인 동산 양개(洞山 良价, 807-869) 스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조동종은 조산 본적(曹山 本寂, 839-901)과 동산 양개, 두 분 스님이 창시하신 종파입니다. 동산 스님은 어릴 때 출가를 했습니다. 동진(童眞) 출가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갓 출가한 어린 동산 스님께서 <반야심경>을 봉독하다가 ‘무안이비설신의’이라는 대목에서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은사 스님에게 여쭙니다. “스님, 눈이 여기 있는데, 왜 없다고 합니까?”라고 물은 겁니다. 그런데 은사 스님은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평생 <반야심경>을 봉독했지만 한 번도 그 경문의 의미를 따져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 스님은 “나는 너의 스승이 될 수 없구나.”라고 생각하고서 어린 양개 스님을 오설산(五洩山)의 예묵 선사(禮默 禪師)에게 보냅니다. 큰 인물은 어린애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맹자도 “대인이란 어린이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고 했습니다. 대개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어떤 체 하기’를 좋아합니다. 없어도 있는 체, 몰라도 아는 체, 못나도 잘난 체 등등. 그런데 항상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 대해 정직한 사람은 학문적으로도 대가가 되고, 수행자로서도 큰 도인이 됩니다. 동산양개 스님은 어릴 때부터 순직(純直)한 마음을 가진 분이셨다.
그러면 지금부터 눈이 왜 없는지 중관논리에 의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어째서 눈이 없다고 했을까요? <중론>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는데,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눈이 스스로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여러분이 자기 눈을 보려고 해보세요. 자기 눈이 보이는가요? 안 보입니다. 그래서 눈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명확합니다. 나의 손, 발 그리고 바로 아래 콧날은 보이지만 내 눈은 안보입니다. 그래서 눈이 없습니다. ‘무안 …’인 이유에 대한 논증의 전부입니다. 비유한다면, 우리는 칼로 여러 가지를 자릅니다. 무도 자르고, 두부도 자르고, 감자도 자릅니다. 그러나 칼로 자르지 못하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뭘까요? 바로 그 칼의 칼날입니다. 또, 손가락으로 천장, 마루, 벽 등 온갖 사물을 가리키는데 가리키지 못하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뭘까요? 바로 그 손가락 끝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눈은 절대로 내 눈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설명은 <중론> 제3장 관육정품(觀六情品) 제2게송에 근거하는데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습니다.
한역: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 눈]을 볼 수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범문: 실로 보는 작용[능견(能見)] 그것은 자기 스스로인 그것을 보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보지 않는 것, 그것이 어떻게 다른 것들을 보겠는가?
한역에서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눈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반야심경>의 경문 ‘무안(無眼) …’인 이유입니다. 너무나 간단한 말이지만, 그 의미는 명료합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 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에 설득되지 않고, 아마 “거울에 비춰 보면 되지 않느냐?”라고 반박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추면 검고 하얀 내 눈동자가 비춰 보이기에 눈의 존재가 확인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것은 눈이 아니고 색(色)입니다. 안근이 아니라 색경(色境)입니다. 다시 말해, 시각작용이 아니고 시각대상입니다. 십이처(十二處) 가운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六根)은 지각기관이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은 지각대상입니다. 그래서 거울에 비친 눈은 시각대상인 색(色, 형상)이지 시각기관인 안(眼, 눈)이 아닙니다.
안(眼, 눈) ― 색(色, 형상)
이(耳, 귀) ― 성(聲, 소리)
비(鼻, 코) ― 향(香, 냄새)
설(舌, 혀) ― 미(味, 맛)
신(身, 몸) ― 촉(觸, 감촉 )
의(意, 생각작용) ― 법(法, 생각내용)
다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불교용어로 풀면 눈은 능견(能見)이고 시각대상은 소견(所見)입니다. 여기에서 능(能)은 작용, 소(所)는 대상을 의미하는데, “눈이 자기 스스로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능견은 능견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진짜 눈은 능견이고 거울에 비친 눈은 소견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눈도 나에게는 시각대상인 소견일 뿐입니다. 진정한 ‘불’이기 위해서는 뜨거워야 하고, 진정한 ‘물’이기 위해서는 축축해야 하듯이, 진정한 ‘눈’이기 위해서는 ‘보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눈에는 보는 힘이 없습니다. 시체의 눈에도 보는 힘이 없고, 남의 눈의 보는 힘 역시 나에게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눈이 자기 스스로를 볼 수 없다.”고 하듯이 보는 힘을 갖는 눈은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눈이 사라지기 때문에, 앞에 보였던 대상에 대해서도 시각대상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소견도 사라집니다. 큰 방을 염두에 두면 내 앞의 방이 작아지지만, 큰 방을 떠올리지 않으면 그 방에 대해 작다고 말할 것이 없듯이, 능견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그 대상에 대해 소견이라고 이름 붙일 텐데, 능견이 존재하지 않기에 소견 역시 사라집니다. 그 전까지 시각대상이라고 확고하게 생각했던 것이, 중관논리적으로 분석해 보니까 시각대상이랄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위에 인용한 <중론> 제3 관육정품 제2게(한역)에서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라고 반문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반야심경>의 ‘무색성향미촉법’이라는 경문 가운데 ‘무색 …’, 즉 “시각대상도 없다.”라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 시각작용에 대해 논파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보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있는 것은 콸콸 흘러가는 변화일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책상을 봤다가 저 천장을 봤다가 다시 이 책상을 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굵게 본 것입니다. 엄밀히 본다면, 이 책상을 봤다가 저 천장을 봤다가 다시 이 책상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본 책상이 아까 그 책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상이 조금(2, 3초 정도) 낡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제행무상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모든 것이 과거로, 과거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항상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책상의 모습이 아까 본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같은 책상으로 착각하고서, 아까 그 책상을 다시 본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삼법인(三法印) 가운데 제행무상의 이치에 비추어 보아도 “내가 무엇을 본다.”는 말을 못합니다.
우리가 “눈이 있다.”고 알고 살았는데, 중관논리로 따져 보니까 눈이 눈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눈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눈의 존재가 사라지니까 시각대상도 무의미해지 것입니다. 또 제행무상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통찰하더라도 “무엇을 본다.”는 말을 할 수 없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노고에 고마움이 느껴집니다..
위 본글의 논지에 대결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깜량도 안 되고..혹 참고가 되려나 몰겠는데 한번 질러나 봅니다..생각나는 데로 아래 단어의 한자를
찾아 봤더니 ,한자만 보면 무슥한 우몽도 쉽게 와 닿는데 지식인엔 벼라별 삽질도 많더군요..
표상 (表象)
현상 (現象)
.... 코끼리상----이는, 우몽이 보기엔 相 과 닮았어요. 요즘 우리 이바구에 많이 등장했죠..
형상 (形象, 形像, 위 중 우몽 갠적으론 形像이 맞다고 보임. 이건 걍 패스)
상상 (想像)
....모양상----코끼리와 사람이 만났죠? 코끼리를 처음 본 사람들이나 애기들은 집에가서 한번 더 떠올려 보는 모습이 전 想으로 보입니다..
이하는 생략합니다
이상 (理想)
허상 (虛想) 허상 (虛像)
인상(人相)
......
금강경의 약견제상 비상에 상은 相으로 우몽은
기억나는 데
우몽만 몰랐던 것인지 심히 조심스럽습니다 -,.-;;
눈을 감으면 형색이 없습니다. 눈을 뜨면 형색이 있습니다. 눈을 뜰때 들리지는 않으니 눈은 귀가 아닙니다.
눈과 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다는 건 눈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봄과는 별개로 눈과 형색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봄이 없을때도 눈과 형색이 있다면 실체적으로 있는 눈이 실체적으로 있는 형색을 본다고 할 수 있겠죠. 눈이 눈을 볼 수 없으니 눈은 없다는 명제는 봄과는 별개로 눈은 있다는 실체적 사고방식에 기인한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눈이 눈을 볼 수 없으니 눈은 없다는 명제가 맞을러면 귀는 귀를 들을 수 없으니 귀는 없고 코는 코를 맡을 수 없으니 코는 없고 혀는 혀를 맛볼 수 없으니 혀는 없고몸은 몸을 감촉힐 수 없으니 몸은 없고 식은 식을 알 수 없으니 식은 없다는 명제도 맞아야 하죠. 귀가 귀를 듣는다는 것부터 말이 안되니까요..
법계유심님 말씀대로 봄과는 별개로 눈과 형색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눈은 (실체적으로)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눈은 봄, 형색이란 관념 없이는 상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건 상대적 관계 속에서 나온 관념입니다. 관념적으로 혹은 속제의 의미에선 눈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생불멸 불상불단 불일불이 불래불거 도 진제로서 같은 논리입니다. 반야심경의 무안이비설신의를 풀이한 것이 중론의 관육정품입니다.
관육정품
3-8) 耳鼻舌身意 聲及聞者等 當知如是義 皆同於上說
귀, 코, 혀, 몸, 생각과 소리나 듣는 놈 등의 이치도 모두 앞에서 설한 것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위 본글에 반야심경의 무안이비설신의가 나오는데 맥락에서 나온 것이지 괜히 나온 게 아니잖아요..
화엄에 어느 땐가 이바구도 된 거 같은데..
사리자 시 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증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이렇게 나오는데 대체 뭔
문제가 보이는지..눈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로 추석명절을 보낸다면..역시 간첩!!
노고를 아끼지 않는 법무님을 간첩이라 했으니 그 이윤즉..중관의 용수마하살께서 반야경을 몰라서 눈이 눈을 볼 수 없으니 기실 우리가 뭘 본다는 것도 맞지 않는 다는 나름 세밀한 논지 또는 비유를 하셨겠습니까우몽이 보기엔
용수마하살님은 반야심경을 척 그대로 말씀하신 듯 보입니다..무안이비설신의의 또 다른 비유지 ..더 헤적거려 봐야 헤적거림을 또 헤적거려 헤적거리는 것이 주인이 되고 또 객이되어 ..주인은 주인의 입장도 맞고 객은 객의 입장도 맞고..적당히 방세 좀 깍고 잘 자는데 시바~ 바퀴벌레도 나오지 따신물도 안나오지..열이 뻗쳐 주인장을 불러서 아침부터 또 한댓거리 하고 .. 무당파니 소림파가 그리 생긴 것 아니 것소..
'무안이비설신의'
연기법으로서의 실상인 '공'을 드러낸 구절이죠.
안이비설신의는
사물인가 사건인가?
안이비설신의는
존재인가 현상인가?
안이비설신의는 사건으로 있고 현상으로 있다.
김성철 교수님께서 타계하신지 1년이 다 되어가네요.
그분의 중론 관련 서적을 고맙게 받아 읽었던 독자로 선생님의 타계소식을 듣고 먹먹했는데 그분의 글은 살아서 우리 화엄에서 다시한번 꽃피고 있네요.
너무 일찍 가셨어요. 참으로 아쉽습니다.
본인이 의사쌤이셨는데도 자신의 심장병의 위험을 간과하셨던듯해요.
슬픈일이죠.
맞습니다. 안이비설신의는 현상으로 있을 뿐입니다. 저도 김성철 교수님이 일찍 돌아가신 것이 불자로서 참 안타깝네요
한때 잊지않기님이 올려주셨던 [승조의 조론]에 반해서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승조의 조론을 엮어내셨던 송찬우 교수님도 2015년 65세의 연세에 타계하셔서 너무너무 가슴이 먹먹했었는데
김성철 교수님도 겨우 67세를 넘기지 못하고 떠나시니...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빛나는 시간이 너무 짧기도 해라.
슬프고 슬프다ㅠㅠ
하나마나한 말인데 ..교학이든 학문이든 그에 따른 용어가 있는데 ..우몽은 그런 것에 다가가는 두뇌가 안 되어서 지금 이모양 이꼴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인물은 귀한 듯 널렸고 우몽은그런 인물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존경스러워요..
잊지않기님은 스스로도 마귀할멈 같이 생긴 것으로 스스로도 아니 마귀할멈은 평균 수명이 100세죠
전제) 일체는 단지 <이름으로서만> 존재한다.
그 자체의 실재성이 없다.
ㅡㅡ>
목적) 모든 <이름=단어>가 왜 구라인지 밝힘으로서, 위 명제를 증명하겠다.
ㅡㅡ>
수단) 중론 출동.
주의사항 :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어떻게든 목적에 도달하겠으니,
<이게 말이 되냐 안되냐><억지냐 아니냐>등의
사.소.한. 문제는 못본척하자.
아이들이 밤늦게 안잘 때, 호랑이 온다고 해서 잠을 재웠다면, 호랑이가 오는지 안오는지 같은 사소한 문제는 스킵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 되시겠다
(딴지일보 말투가.. ㅡ..ㅡ;)
안타깝다..그러고 보니 법무아님은 눈꽂님과 잊지않기님의 사진은 못봤지 싶다. 글타고 눈꽃님이 미인박명이라는 말은 아니므니다..걍 직이게 생깃슴..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