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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ㆍ동무ㆍ서무ㆍ삼문ㆍ명륜당>(서울 文廟 및 成均館<大成殿ㆍ東廡ㆍ西廡ㆍ三門ㆍ明倫堂>, 보물 제141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우고 정종 2년(1400)에 불에 탄 것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었으나, 이 역시 임진왜란으로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묘(文廟. 공자를 받드는 묘소)는 대성전(大成殿)을 비롯한 동·서무(東·西廡) 등 제향 공간구역과 명륜당을 비롯한 동·서재(東·西齋) 등 교육 공간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의 관계를 바탕으로 지방 향교(鄕校)를 포함한 문묘에는 몇 가지 형식이 있는데, 서울 문묘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을 뒤에 두는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 형식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성전(大成殿:위패를 모시는 전각)은 선조 34∼35년(1601∼1602)에 지은 건물로,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孔子)를 주벽(主壁)으로 증자(曾子)·맹자(孟子)·안자(顔子)·자사자(子思子) 등 사성(四聖)을 좌우에 배향(配享)하고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그리고 우리나라의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이황(李滉), 이이(李珥)를 비롯하여 18현(十八賢)을 종향(從享)한 전각(殿閣)이다.
전각 규모는 앞면5칸·옆면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두 옆면과 뒷면 벽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낮게 벽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건축 기법을 느끼게 한다. 지붕의 곡선 흐름에 따라 벽면 기둥도 살짝 안쪽으로 휘어진 형태로 만들었다. 대성전 현판 글씨는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친필로 전해진다.
동무와 서무(東·西廡)는 대성전 앞에 마주해 있고 대성전과 동시에 창건하여 공문(孔門) 제자 69분의 위패를 포함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 112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가 해방 후 전국 유림대회의 결정으로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그 밖의 94현의 위패는 매안(埋安: 위패를 땅에 묻음)하여 지금은 비어 있다.
삼문(三門)은 대성전의 남쪽에 위치한 제례 등의 행사에 사용되었던 정문인데, 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나오도록 했으며, 가운데 문은 성현들의 넋이 드나드는 문이다. 동삼문(東三門)은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임금이 친히 석전(釋奠)에 참석할 때 출입하던 문이다. 평상시에는 닫아놓고 임금이 오실 때만 열기 때문에 어삼문(御三門)이라고도 한다.
전사청(典祀廳)은 성종 3년(1472) 대사성 李克基 요청으로 대성전 서쪽에 제사 음식을 차리는 동향6칸, 대학당(戴學堂)은 하급 관원들의 관청인 수복청(守僕廳)으로 남향4칸, 제기고(祭器庫)는 태조 7년(1398) 제사용 그릇을 보관하는 북향6칸 등 부속시설을 따로 설치하였다.
묘정비각(廟庭碑閣)은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각으로 태종 10년(1410)에 변계량(卞季良)에게 작성하여 비를 세웠다. 비각은 중종 6년(1511) 서향1칸 규모로 건립되었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인조 4년(1626)에 이정구(李廷龜)가 비음(碑陰)을 기록하게 명하고, 이를 이홍주(李弘冑)가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하여 비각을 복원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은행나무(成均館 大成殿 銀杏-,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7호)는 신삼문 좌우에 있는 은행나무 두 그루로 수령 측정 결과, 두 그루 모두 450±50년의 노거수로 수형이 아름답고, 승정원일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적 기록에도 그 식재 시기와 보존상태 등과 관련된 내용이 확인되고 있으며 일부 외과수술은 이루어졌으나 원형이 크게 변형되지 않았으므로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ㆍ동무ㆍ서무ㆍ삼문ㆍ명륜당>(서울 文廟 및 成均館<大成殿ㆍ東廡ㆍ西廡ㆍ三門ㆍ明倫堂>, 보물 제141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우고 정종 2년(1400)에 불에 탄 것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었으나, 이 역시 임진왜란으로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 서울 문묘 및 성균관(서울 文廟 및 成均館, 보물 제141호) 1. 명륜당 明倫堂 2. 대성전 大成殿 3. 동무 東廡 4. 서무 西廡 5. 삼문 三門 6. 동재 東齋 7. 서재 西齋 8. 존경각 尊經閣 9. 육일각 六一閣 10. 향관청 享官廳 11. 진사식당 進士食堂 12. 제기고 祭器庫 13. 수복청 守僕廳 14. 진사청 進士廳 15. 비천당 丕闡堂 16. 묘정비각 廟庭碑閣 17. 탕평비각 蕩平碑閣 18. 하연대 下輦臺 19. 서울 문묘 은행나무
문묘(文廟)는 대성전(大成殿)을 비롯한 동·서무(東·西廡) 등 제향 공간구역과 명륜당을 비롯한 동·서재(東·西齋) 등 교육 공간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의 관계를 바탕으로 지방 향교(鄕校)를 포함한 문묘에는 몇 가지 형식이 있는데, 서울 문묘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을 뒤에 두는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 형식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명륜당(明倫堂)은 대성전의 뒤편에 위치해 있는데,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하였다. 주로 학문을 익히고 연구하는 공간(試讀)으로, 왕세자까지 교육한 조선시대 최고 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 시험 장소(科場)로 사용되었다. 총 18칸으로 3동을 하나로 연결하여 지었다. 가운데 마루로 된 중당과 그 양옆에는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 날개채(翼室)로 구분하는데, 중당은 옆면에서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익실은 팔작지붕으로 중당보다 조금 낮게 구성되어 위계(位階)를 나타내 주고 있다. 지붕과 처마의 높낮이와 전체적인 건물의 균형이 우리나라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명륜당은 성균관(成均館)이라 알려져 있다.
박문약례(博文約禮)는 論語 제9편 子罕 10장 내용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으로 박문[博學於文]은 문헌을 통해 널리 배우고 익힌다는 뜻이며, 약례[約之以禮]는 이미 익힌 것을 다시 예로써 요약한다는 뜻이다. 덕화만방(德化萬邦)은 성인의 가르침의 덕(德)으로 변하여 세계만방에 펼쳐진다. ‘명륜(明倫)’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며 명륜당의 내부 현판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子)한 것이며, 정면 외벽 현판 글씨는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동재와 서재(東·西齋)는 명륜당 앞에 마주하여 남북으로 20칸 길게 배치되어 있는 학생들의 기숙사 공간으로 건물 앞뒤로 툇마루를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존경각(尊經閣)은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효시(嚆矢)로 성종 6년(1475)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명륜당 북쪽에 건립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 등을 보관했다.
육일각(六一閣)은 영조 19년(1743) 향관청 서쪽에 건립했으나 지금은 명륜당 동북쪽으로 이건 하였다.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들의 기본 소양인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례(六藝)로 문무(文武)를 겸비하기 위해 수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록청(正錄廳)은 태조 7년(1398) 명륜당 동쪽에 남향8칸으로 지어졌다. 성균관 관리의 관직인 학정(學正)과 학록(學錄)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성균관 관원들의 사무실이다.
향관청(香官廳)은 재관들이 재계(齋戒)하고 향(香)과 축문(祝文)을 보관하던 곳으로 성현(成俔)의 건의로 성종 4년(1473) 명륜당 동북쪽에 남향10칸 규모로 건립되었다.
진사식당(進士食堂)은 동·서재에 기숙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전용식당이다. 태조 7년(1398) 명륜당 동쪽 남향 총 33칸 규모의 건물로서 칸을 막지 않고 길게 터서 수 백 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든 독특한 구조다. 성균관에서는 북을 쳐서 유생들에게 시간을 알렸는데, 북을 한 번 치면 침상에서 일어나고, 두 번 치면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으며, 세 번 치면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였다. 아침, 저녁 두 끼 식사를 할 때 마다 원점을 하나 씩 찍어주었는데 이는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하는 역할을 하였다.
비천당(丕闡堂)은 성균관의 별당으로 대사성(大司成) 민정중(閔鼎重)이 진언하여 헌종 5년(1664)에 지어졌다. 재생(齋生)들의 학습장소 또는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親臨)하여 과거를 시행할 때 제2시험장소(第二科場)로 사용되던 곳이다. 규모는 명륜당(明倫堂)과 같이 남향으로, 중앙에 정청(正廳)이 있고,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는데 모두 25칸이다. 비천당(丕闡堂)은 주자(朱子)가 성인(聖人)을 찬(贊)한 글 중 ‘비천대유(丕闡大猷: 큰 계책을 크게 밝혀) 억사흥정(抑邪興正: 사악함을 억누르고 정의를 지킨다.)’라는 글귀에서 인용된 것이다. 1988년 8월 건평 184.4㎡의 규모로 다시 복원하였다.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은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향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생들의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서울 문묘 일원의 보물 및 현대건축물을 제외한 지상시설물 포함하여 2011년 7월 28일 사적으로 지정 하였다.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 - 朱子 -
부모와 자녀는 친함이 있도록 하며(父子有親), 정부와 국민은 의리가 있도록 하며(君臣有義),
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도록 하며(夫婦有別), 어른과 젊은이는 차례가 있도록 하며(長幼有序),
벗 사이에는 있어야한다(朋友有信).
널리 배우고(博學之), 자세히 묻고(審問之), 신중히 생각하고(愼思之),
밝게 변별하며(明辨之), 힘써 행하라(篤行之).
말은 참되고 미덥게 하고(言忠信), 행동은 도탑고 공손하게(行篤敬),
성냄을 다스리고 욕심을 누르며(懲忿窒欲), 잘못을 바로잡아 착함으로 나아가라(遷善改過).
의리를 바로잡을 뿐(正其義 不謀其利),
이득을 도모하지 않고, 도리를 밝힐 뿐, 공적을 꾀하지 마라(明其道 不計其功).
자신이 싫은 바를 남에게 하지 말고(己所不欲 勿施於人),
행하고도 얻음이 없거든 자신을 되돌아보라(行有不得 反求諸己).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은 숭양서원(崇陽書院), 악록서원(岳麓書院), 응천서원(應天書院)과 함께 중국 4대서원의 하나이다. 940년 唐나라시대에 이발(李渤)이 그 형 이섭(李涉)과 함께 이곳에 은거하며 독서를 하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백록(白鹿)을 길렀다. 그런데 이 사슴이 십 리 밖의 마을에서 주인이 필요로 하는 서적과 문방사우를 구해 돌아올 정도로 영민하였기에 이발(李渤)을 백록선생(白鹿先生), 거처를 백록동(白鹿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5대10국 시대 서원의 전신인 여산국학(廬山國學)이 설립되고, 宋代에 地方子弟들을 교육하는 서원이 되었다. 그리고 남송(南宋)시기에 이르러 주희(朱熹)가 부흥시켰다.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가 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백록동서원을 본떠 만든 것인데 조선 중종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을 제사하고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세운 서원이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李滉 退溪) 요청으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사액을 받았다.
△ 순천관의 위치, <개성전도>의 부분, 1872년, 35.8×25.4cm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에 자리를 잡은 성균관 대학교 구내에 1998년에 건립한 600주년 기념관이 있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대학교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성균관 대학교는 600주년을 조선시대 한양으로 성균관을 옮긴 것이 1398년이고, 이때부터를 성균관 대학교의 역사로 본 것이다.
성균관, 개경에서 한양으로
우리 역사에서 최고 교육 기관의 명칭으로 ‘성균(成均)’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298년(충렬왕 24)에 국자감을 개칭한 국학을 성균감(成均監)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감을 성균관이라 개칭하였다. 공민왕 때인 1356년(공민왕 5)에 관제의 복구로 국자감으로 환원시켰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현재에 이른다. 공민왕 때는 신진사대부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성균관의 기능이 강화되었는데, 이색,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등이 이곳 출신이었다.
성균관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고려후기였으므로 성균관도 당연히 수도인 개경에 있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1394년에 한양 천도가 단행되면서, 성균관도 자연스럽게 수도로 옮겨졌다. 1395년부터 3년여의 공사 끝에 1398년 현재의 종로구 명륜동에 조선의 성균관이 위치하게 되었다.
가장 중심이 된 건물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대성전(大成殿)과 성현을 모신 동무(東廡), 서무(西廡)였으며, 학생들의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었다. 성균관의 중요한 시정(時政)을 기록하던 정록소(正錄所)는 현재의 대학교 행정실에 해당하고, 식당, 약방, 재정의 출납을 맡은 양현고(養賢庫) 등의 건물도 갖추어졌다.
성종 때에는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과 반궁제(泮宮制)의 필수적인 요소인 반수(泮水)가 설치되었다. 중종 때인 1544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던 윤탁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명륜당 앞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성균관의 역사가 유구함을 잘 입증하고 있다.
인재 양성을 위한 최고학부는 중국 주대(周代)에 천자의 도읍에 설립한 벽옹(辟雍)과 제후(諸侯)의 도읍에 설립한 반궁(泮宮)의 제도에서 기원하여, 성균관에도 반수를 설치한 것이다. 벽옹은 둥근 연못, 반수는 반원의 연못이다. 성균관 주변을 반촌(泮村)이라 하거나, 반촌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반민(泮民)이라 칭한 것도 성균관의 반수에서 유래한다. 반촌은 조선시대의 대학촌으로 시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당시 유생들의 해방구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의 대학로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반민의 기원은 고려 말 안향이 개경 성균관에 기부한 노비들이라고 하며 조선 개창 후 태조가 성균관을 한양으로 이전할 때 그들의 후예들도 한양으로 함께 이주하면서 반촌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초에는 150인이었으나, 1429년(세종 11)에는 200인으로 증원되었다. 이 중 반은 상재생(上齋生) 또는 상사생(上舍生)이라 하여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로서 입학한 정규 학생이었으며, 나머지 반은 기재생(寄齋生) 또는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는데, 대부분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선발된 자들로, 부친이나 조부 찬스를 쓴 사람들이었다.
성균관 유생들의 삶과 꿈
2010년 성균관 유생들의 삶과 우정, 정치적 야망을 다룬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 방송되었다. 조선시대 성균관의 구체적인 생활상과 함께 이곳에 들어간 유생의 개성 넘치는 모습이 펼쳐졌고, 이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성균관 유생의 모습은 드라마에 비친 모습 그대로일까? 드라마는 남장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만큼 묘한 사랑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면서 매우 발랄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조선시대 성균관은 그처럼 낭만적인 곳은 아니었다. 과거의 1차 시험에 해당하는 소과(생진과)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가 들어와 관리로 나아가는 최종 관문인 문과 시험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드라마만큼 낭만적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치열한 고시 경쟁이 기다리는 살벌한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국대전』에는 성균관 입학생의 자격이 규정되어 있다. 과거 1차 시험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자, 서울의 사학(四學) 생도 중 15세 이상 소학 및 사서와 오경 중 1경에 통한 자를 성균관에서 수학하게 했다. 특별 전형도 있었다.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로서 ‘소학’에 통한 자나 관리 중 입학을 원하는 자를 일부 선발했다. 유생의 정원은 건국 초에 150명이었으나 세종 때 200명으로 늘었다. ‘신래희(新來戱)’라는 신고식도 있었다. 먼저 들어온 유생이 신입을 골탕 먹이는 의식이었지만 성균관 생활에 빨리 적응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유생은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재와 서재에 거주했다. 학생회에 해당하는 재회(齋會)가 있었고 학생회장인 장의(掌議)를 뽑았다. 유생은 음식과 학용품 등 생활용품을 지급 받는 국비 유학생이었고 자부심도 컸다. 『논어』 등의 유교 경전을 비롯하여 『근사록』, 『성리대전』, 『경국대전』, 『통감』 등 과거 시험 과목과 문장력을 기르는 공부를 주로 했다. 현재의 쪽지시험이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 해당하는 일강(日講), 순과(旬課), 월강(月講)은 유생을 긴장하게 했다. 시험 성적은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4단계로 나누었는데 요즈음의 A, B, C, F 학점과 유사하다.
출석도 중시했다. 약방(藥房)에 단 북을 한 번 치면 잠을 깨고, 두 번 치면 세수, 세 번 치면 식당에 갔다. 군대의 단체 생활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유생들은 아침, 저녁 식사 때마다 식당에 비치된 명부인 도기(到記)에 서명을 하고 서명을 하면 원점(圓點) 1점을 얻었다. 원칙적으로 원점 300점을 취득한 자에게 관시(館試·성균관 유생만이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준 문과 초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원점은 영조 때 이르면 50점으로 완화됐다. 빡빡한 생활 가운데 휴식도 있었다. 매월 8일, 23일은 정기휴일로 세탁을 하거나 부모를 찾았다. 일부는 성균관 인근의 대학촌인 반촌에서 공부와 시험에 지친 스트레스를 풀었다.
관직 진출이 곧 졸업
성균관에서의 졸업은 문과 시험의 합격을 의미했다. 식년시의 경우 3년마다 한 번 시험을 치니까 실패하면 3년을 기다려야 했다. 왕이 성균관을 방문해 문묘에 참배할 때 치는 시험인 알성시나 제주도에서 올라온 감귤을 하사받을 때 실시하는 황감제(黃柑製) 등 특별 시험도 있었으나 선발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16세기의 개혁파 학자 조광조는 중종이 성균관을 방문했을 때 실시한 알성시(謁聖試)에서 왕을 사로잡는 답안을 제출하여 초고속 승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한때 연락(宴樂)의 장소가 되었던 성균관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601년에 성균관 중건 공사가 시작되어 1606년까지 대성전, 동무, 서무와 명륜당 등의 건물이 다시 세워졌고, 1626년(인조 4)에는 존경각, 식당, 양현고 등의 건물도 중건되었다.
〈대사례도(大射禮圖)〉, 조선 시대, 비단에 색, 259.8×59.7cm, 덕수 326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대사례도(大射禮圖)를 통해 본 성균관 대사례
영조는 1743년 영조는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 시범을 보이는 대사례(大射禮)를 성균관에서 실시했다. 대사례 실시 후에는 육일각(六一閣)을 설치하여 대사례에 사용하던 궁시(弓矢), 웅후(熊侯:곰 과녁), 미후(麋侯:사슴 과녁) 등을 보관하도록 했다. 활쏘기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육예(六藝) 중의 하나라 하여 이름을 ‘육일각’이라고 한 것이다. 육일각은 명륜당의 동북쪽에 위치한 남향의 두 칸 건물이다. 영조는 당쟁의 종식을 선언하는 탕평책을 실시하면서 탕평비를 성균관에 세웠다. 역대 왕세자의 입학식도 성균관에서 있었다. 성균관에 원자학궁(元子學宮)을 지었으며 왕세자가 8세가 되면 입학시켜 성균관의 위상을 높였다.
조선의 최고 시험인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는 일은 성균관 유생들의 최고 목표였다. 과학화 정보화의 수준만 다를 뿐이지 그들의 고민과 꿈 또한 오늘날 대학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재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려는 조선왕조의 의지는 성균관이라는 교육 기관으로 구현되었고, 이곳에서 배출된 유생들의 활약은 왕조의 기대와 의지를 충족시켜 나갔다.
△ 현재 고려 성균관의 대성전(大成殿), 순천관은 현재 고려박물관(고려 성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선조 때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서울 문묘 은행나무(서울 文廟 銀杏-, 천연기념물 제59호)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6m, 가슴높이 둘레 12.09m에 이르는 웅장한 나무로 가지 발달이 왕성하고, 유주(乳柱)가 잘 발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성균관대 근처에 있는 문묘(文廟)의 명륜당(明倫堂) 경내에 서 있는데, 임진왜란(1592) 당시 불에 타 없어졌던 문묘를 다시 세울 때(1602)에 함께 심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은행나무(Ginkgo)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불교와 유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공손수(公孫樹)·행자목(杏子木)이라 하며 잎의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한다. 높이는 5~10m이나 50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열매가 살구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살구 행(杏)자와 중과피가 희다 하여 은빛의 은(銀)자를 합하여 은행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 종자를 백자(白子)라고 한다. 바깥껍질에서는 악취가 나고 피부에 닿으면 염증을 일으키는데, 이는 열매의 껍질에 은행산(ginkgoic acid)과 점액질의 빌로볼(bilobol)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1519년(중종 14)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倬)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杏亶)는 고사를 따른 것이라 한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서울 文廟와 成均館, 사적 제143호)의 문묘란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말하며, 성균관은 나라의 인재를 길러내는 조선시대의 으뜸가는 교육기관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과 성균관 문화유산정보/ 글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 조선의 교육기관: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vod/view.do?contentsSeq=12733&categoryType=5
탕평비각(蕩平碑閣)은 영조 18년(1742)에 당쟁의 폐단을 막기 위해 성균관 유생들에게 내린 글을 새긴 비(碑)로 성균관 입구 북향 1칸 규모로 지어졌다. 일명 어서비각(御書碑閣)이라고 한다. 비문에 “두루 화합하고 편당을 짓지 않은 것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고[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편당 짓고 두루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고 적혀 있다.
하마비(下馬碑)는 삼문 밖의 탕평비각 오른쪽에 있으며 “높고 낮은 모든 사람은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리라[大小人員皆下馬]”는 뜻이다.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은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향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생들의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서울 문묘 일원의 보물 및 현대건축물을 제외한 지상시설물 포함하여 2011년 7월 28일 사적으로 지정 하였다. (출처: 서울특별시 소식지 2022년 8월 3일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29))
서울 문묘 은행나무(서울 文廟 杏子木, 천연기념물 제59호)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6m, 가슴높이 둘레 12.09m에 이르는 웅장한 나무로 가지 발달이 왕성하고, 유주(乳柱)가 잘 발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성균관대 근처에 있는 문묘(文廟)의 명륜당(明倫堂) 경내에 서 있는데, 임진왜란(1592) 당시 불에 타 없어졌던 문묘를 다시 세울 때(1602)에 함께 심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은행나무(Ginkgo)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불교와 유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공손수(公孫樹)·행자목(杏子木)이라 하며 잎의 모양이 오리발을 닮아서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한다. 높이는 5~10m이나 50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열매가 살구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살구 행(杏)자와 중과피가 희다 하여 은빛의 은(銀)자를 합하여 은행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 종자를 백자(白子)라고 한다. 바깥껍질에서는 악취가 나고 피부에 닿으면 염증을 일으키는데, 이는 열매의 껍질에 은행산(ginkgoic acid)과 점액질의 빌로볼(bilobol)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1519년(중종 14)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倬)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杏亶)는 고사를 따른 것이라 한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