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과 저쪽을 떠돌며 살았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죽고 비가 내린다
날씨는 회상하기 좋은 날
하나의 지붕이 가고
또 다른 지붕이
온종일 비를 맞는다
지붕 아래 또 다른 지붕을 내려다보며
울기 좋은 날
어깨가 젖는 줄도 모르고
-『경향신문/詩想과 세상』2023.01.30. -
설 연휴에 김미소의 첫 시집 <가장 희미해진 사람>을 정독했다. 시인은 괴물이라 불리던 어린 시절과 시각장애를 앓게 된 열네 살, 가족이 함께 살 수 없었던 열일곱 살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스님이었던 아버지와 내 앞에서 화를 내고 돌아서 우는 어머니, 할머니 손에서 자란 동생들 사연까지. 처음에는 말하지 않으려 했다면서도 가슴 아픈 성장사를 시로 쓴 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마음의 상처를 극복해 어제와 다른 내일을 꿈꾸고 싶기 때문이라 한다.
시인은 시로 연 세상에선 행복할까. “범종 밑에서” 비를 피하는 작은 개구리는 시인의 자화상이고, 범종은 스님이었던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이다. 한 지붕 아래 살고 싶은 바람과 달리 “이쪽과 저쪽을 떠돌며”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지붕이 무척 그리웠을 게다. 아버지의 지붕이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아버지는 “온종일 비를 맞”고 있다. 회상하기 딱 좋은 날, “어깨가 젖는 줄도 모”른 채 운다. 이제 아버지는 가족의 지붕이 돼줄까. 그냥 마음이 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