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가입했습니다.
특별히 수화에 관심이 있으며 하나님에 사랑을 여러분께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이글을 읽는 분들중에 하나님을 믿든분과 믿지 않는분이 있을텐데.. 저는 이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특별히 장애인 선교에 대해 어려움이 많다는 사실...
이글을 읽고 마음이 동하여진 분들은 기도로 장애인 선교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군산 농아인교회 목사님의 미국 방문기입니다.*
일정기간 : 2003년 5월 27일 - 2003년 8월 14일까지(약 3개월간)
일행 : 없이 혼자 다님
방문지역들 : 미국내 35개 주 이상, 30여개 도시, 40여개 단체 방문
이동방법 : Greyhound 버스 2개월 Pass를 구입(59만원)하여 2개월간 무제한 버스탑승
농아인단체 방문방법 : 미국농아인관련단체 주소록을 얻어 주소를 보고 찾아다님
3개월비용 : 비행기(JAL) 88만원+버스패스 59만원+1일평균 8천원 식비
숙박 : 야간버스에서 앉아서 잔다. 주1회 한인교회 신세지다. 숙박비 안 듦
세면 : 버스터미널 화장실에서 세수, 양치, 머리감기, 팔다리만 씻기
식사 : LA를 제외하고 모든 음식은 햄버거나 샌드위치로만 먹다. 주말 한국음식(교회)
관광 : 그랜드캐년을 제외하고 관광은 극도로 제한함
사진 : 디지털카메라촬영 - 시디9장 분량 (약4Gb)
영어 : 못함, 뻔뻔하게 대들고 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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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미국으로 떠나야만 했을까? (미국 투어의 동기)
너 월급 얼마야?
한 2년 전 부터 후배 농아인 전도사를 만나면 짓궂은 질문을 하곤 했다.
“너 월급 얼마야?”하고 물었다.
가히 이 질문에 반가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나도 그리 예상을 하고 질문을 ‘반드시’ 하고 싶었다. 물론 대답이 어쨌든 간에 나는 상관이 없었다. 들어보지 않아도 빠듯한 농아인교회 살림으로 국가가 정해준 최소한의 생계비에 못 미치는 생활비로 연명(?)하다 시피 하는 농아인교회 목회자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보통은 나의 질문에 50-70만원의 수준으로 자신의 월급을 밝히지만 개중에는 25만원, 15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고 사는 후배 전도사도 있다.
나는 곧이어 묻는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내가 물어보던 대부분의 전도사는 이 질문에서는 대답을 못한다.
내 후배라면 갓 30을 넘겼거나, 혹은 아직도 20대 후반에 있는 창창한 젊은이들이고 이들이 장래 한국 농아인 목회를 선도해야할 재목들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들은 현재 자신의 현실을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하고 있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사역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하면 우리 농아인교회가 재정적인 독립을 하고 목회자들이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사역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 농아인선교 1세대 선배 목회자들이 현재의 농아인교회를 설립하고 2세대인 우리들이 선배님들의 업적위에 보다 낳은 농아인 선교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지만 2세대인 나는 지혜가 부족하고 어리석으며 나와 내 가족을 위해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하고 있단 말인가?
“너 월급 얼마야?” 이 말은 나에게 있어 수 년 동안 후진들의 미래에 대한 염려로 마음 한구석을 채우고 있었다.
용기……. 그리고 책임감
어떻게 하면 우리 군산농아인교회와 나와 연결된 30여개의 농아인교회들을 위해 작으나마 보탬이 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했고 그 고민은 마음 가운데 부담이 되어 나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내가 속한 농아인교회 조직에는 30여명의 농아인교회 목회자가 있지만 30여개의 농아인교회 가운데 건청인(농아인이 아닌 일반인, 건강한 청력을 가진 사람) 목회자는 내가 유일하다. 이 유일함이 나로 하여금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으로 느껴진 때는 작년 2002년 여름을 지내면서이다.
많은 분들이 미국에서 “용기있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나는 부끄럽다.
용기가 있다고 영어도 못하면서 미국행을 결심한 것도 아니다. 나는 부끄럽게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한다.
다만 무언가 해놔야 한다는, 무언가 더 배워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나의 등을 힘차게 밀었다. 내 속에 용기가 있는 게 아니고 [용기]는 나의 등을 밀고 있었다.
마지막 족속, 농아인선교
이집트에서 선교를 하는 동기 목사나,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사역자, 그리고 북한사역을 하는 분들과 또는 한인 목회의 2세를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들도 본인의 사역지가 땅끝이라고 말씀한다.
농아인들의 선교에 있어서 큰 문제는 “의사소통을 위해서 수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십만명이 선교사로 해외에 나가있지만 그 선교사님들 가운데 한사람이라도 그 나라의 수화를 할 수 없다면 그 부족, 그동네, 그 지역 농아인은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곳이 이집트가 됐든, 이스라엘이 됐든, 아니면 북한이 됐든지 간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복음은 한낱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다.
더군다나 수화는 나라마다, 언어마다 다르기 때문에 한가지로 통일시켜 전할 수도 없는 실정이 농아인 선교에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현재 한국인으로서 1만 2천여명의 선교사가 해외에 파송되어 사역을 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농아인 선교사는 단 1%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세계 7000만 농아인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전해야 하는 복음은 누가 해야 하는가?
사회적인 법으로는 선거 때나 방송에서 의무적인 수화통역을 해야 한다. 하지만 선교에서는 의무적인 규정이 전혀 없을뿐더러 전혀 관심을 두기 어려운 계층으로 숨겨져온 것이 사실이다.
7000만 농아인에게 복음이 전해진 후에 비로소 주님이 오신다.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7000만 영혼은 단 한번도 예수님을 듣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군산농아인교회는 1994년부터 중국 2000만 농아인영혼 구원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15개 안팎의 농아인교회로 성장하였고 교인수고 약 1500명 정도로 성장하였다. 30여명의 군산농아인교회 농아인성도들이 2000만명의 중국 농아인을 위해 기도하며 일하고 있다.
1993년 1월 어느 여름날에 만난 하나님
난생처음 외국을 나가본 때를 잊을 수 없다.
1993년 1월 한국은 매우 춥던 그 시절, 필리핀은 한국의 한여름 날씨였다. 나는 필리핀에서 새까맣게 타서 돌아왔다. 당시 내 콧등은 3번이나 벗겨질 정도로 햇살이 따가왔다.
필리핀 선교지(농아인 아님)를 팀원들과 돌아보며 마음에 강한 진동 같은 감동이 밀려왔다. 내가 필리핀 사람들을 위해 선교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근데 의문이 생겼다. 아버지께 다짜고짜 대들면서 물어보았다.
“내가 만일 필리핀이 아니라 아프리카로 갔다면 거기서도 내가 아프리카 사람을 선교하기 위한 마음을 주셨을 것 아닙니까? 도대체 내가 가야할 곳은 어디란 말씀이십니까?”
내가 이성적은 감동에 의해 필리핀 사람들을 보고 선교하고자 함이 나의 딜레마였다. 아프리카로 갔다면, 혹은 시베리아로 갔다 해도 그들을 선교 해야 한다고 당장 나섰을 나였다. 하지만 냉정하게 아버지께 물었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해 주시길, “철희야, 너는 네가 가고자 하는 곳에 사람을 보내라(뿌려라).”
1월. 그 무더운 여름날 나는 세미한 음성을 듣고 다급히 사람을 찾아나섰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사람의 선교헌신자를 선교지에 보내지 못했다.
2002년 8월, 진짜 더운 여름날.
보내기 위해 내가 배워야 한다고, 배움은 50까지 혹은 그 이상이라도 배워야 한다고 마음에 감동이 굳어졌다. 나는 미국으로 가기로 했다.
나는 한국 농아인교회 목회 2세대
미국은 뭔가 한국과는 다른 것이 틀림없다. 어떤 것이 다르고 어떤 부분이 한국 농아인 선교와 목회의 미래에 적용을 시킬 수 있는가를 배우자.
1세대 선배 목사님들이 이미 60여 년 부터 한국 곳곳에 농아인교회를 설립하였고, 현재까지 유지시켜 주셨다. 이네 나같은 2세대와 후진들이 세워진 농아인교회를 한차원 업그레이드 해야 한다.
나는 적어도 내가 맡고 있는 군산농아인교회만이라도 한차원 다른(‘높은’이 아닌) 목회 업그레이드를 해서 다음세대에 넘겨줘야 한다.
그렇다 나는 한국 농아인 목회 2세대 목사다.
언제까지 손을 벌리고 살아야 하는가?
한국 농아인목회 선배님들의 노고와 수고를 익히 잘 보아왔다.
내가 수화를 접하고 배운지 18년이 되었으며 농아인목회로 부름 받고 목회사역을 시작한지 13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서른 다섯의 젊은 목회자다.
그렇다. 나는 젊다.
젊은 때부터, 아니 어린때부터 나는 군산농아인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갓 졸업도 하지 못한 신학 4학년의 병아리 전도사 때부터 나는 여기 군산을 맡아 나름대로 정성을 쏟아 일을 해왔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며 나의 가족들은 고통을 받아왔다.
가장인 지위를 망각하고 가족의 생활이나 건강은 안중에 두지 않고 오로지 농아인들의 신앙과 삶을 위해 뛰어다녔다.
내 몸무게 최근 10년 사이에 51kg을 넘어본 적 없이 지금도 49-50kg을 유지하고 있다.
일을 많이 해서 그럴까...?
2002년도 8월 24일은 내 일생에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농아인 선교를 한다고, 농아인 선교지 개척을 위해 중국 사천성에 있을 당시에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쓸쓸히 요양원에서 장남인 나의 얼굴도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중국에서 아버지의 부고 전화를 받고 눈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내 안에 있는 나에게 한마디 했다.
“쉬고 싶어...”
그래 나는 가족의 생계와 관심을 뒤로하고 농아인을 돌보는 일로 대리만족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가?
아니 더 구체적으로, 나는 우리 군산농아인교회를 [현상유지]시키기 위해 그동안 8년이라는 시간을 무던히 노력해 왔던가!
정말 내가 젊고 활기찬 2세대 목회자가 맞단 말인가!
“그렇구나, 나는 언제까지 우리 군산농아인교인들이 아닌 다른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손을 벌려서 [생존]을 해야 하는가? 생존문제를 벗어나 [사역]을 하며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
앞으로 30년은 더 목회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앞으로 30년은 더 많은 후원과 생존을 위해 손을 벌려야 하는 것...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나의 등을 밀었다.
“너 월급 얼마냐?”를 물었을 때 당당히 우리교회가 힘이 있는 모습을 자랑하고 싶다.
나는 내 일평생을 손을 벌리고 사는 것 보다 나눠주며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뭔가 배워야 한다.
뭔가 생산적인 선교가 되어야 한다.
무엇이 있을까....
미국에 가보자.
더 이상 나의 가족을 죽이지 말자.
이미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냈다.
또 다른 나의 가족들이 있다.
일산에 사는 누나, 잠실에 사는 동생, 그리고 군산에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처와 아이들.
땅바닥을 보며 살지 말자.
더 이상 나의 가족들과 내 주변에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담을 주지 말자.
목회의 생존을 위해 그들에게 손을 벌리며 심적 부담을 주지 말자.
더 이상 사랑하는 나의 모든 가족들을 죽이지 말자.
미국에 가보자.
우리보다 먼저 수화가 정립되고, 우리보다 먼저 복지 정책이 나아보이는 미국에 가보자.
설령 내가 군산농아인교회의 재정적 자립을 위한 방안을 찾지 못한다 해도 상관이 없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공부를 해야 하니 공부하는 연장선상에서 나는 길을 재촉해야만한다.
3세대, 4세대 후배들이 나를 보며 배울것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철희니까!
나는 젊다!
햄버거만으로도 살 각오가 되어있었다.
버스에서 먹고 자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려 노력했다.
영어를 조금 배워서 갈까...라고 했다면 나는 평생 미국, 아니 외국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영어 몰라도 간다.
총질, 폭동, 위험들이 나를 위협한다 해도 나는 간다.
나는 젊으니까!
그래 미국으로 가자!
2. 미국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미국 투어의 성과)
이재덕집사님과 미국의 큰마음
LA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막연히 지도에 표시만 하고 출발한 무모하고 무식한 길이었기에 갈등과 두려움이 시간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2003년 6월 14일 첫 장거리 버스를 타게 되었다.
‘처음’은 다 설레고 두렵고 떨린다.
너 댓 시간을 버스 기다리며 샌드위치로 밥을 때우던 때에 멀찌감치 식사를 하시던 한 빼짝마른 동양인 한분이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세요?“ 한국말이었다.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내가 출발한 LA라는 도시에는 한국인이 60만명이 살고 있으니 길바닥 아무데서라도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인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예...” 별로 정성없이 대답을 했다. 그분도 별로 정성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분은 자기 가슴의 개 뛰어가는 그림을 가르키며, “난 그레이하운드 기사예요.”
“아, 예...” 다시 성의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내게는 여행을 시작하는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이 더 급했다.. 60만명이나 되는 한국인을 만나는 사람마다 성의있게 대답하기 쉽지 않은 마음상태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분은 내게 아주 귀한 도움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를 펴들고 내가 미국에서 보고자 하는 것들을 이야기 했다.
식사를 중단한 그분은 내게 “훌륭합니다.”를 연발하며 여정을 아낌없이 칭찬해 주셨다.
방금까지 썰렁하던 내가 매우 친절하게 가다갔다. 오로지 정보를 얻기 위해서... ...
미국 그레이하운드라는 고속버스 회사에는 약 5000여명의 기사가 있다. 그중 한국인은 유일하게 바로 내 앞에 앉아계신 이재덕 기사님이다.
이재덕 기사님과 몇 마디 나누며 큰 도시 별로 없는 일정을 빼고 부랴부랴 일정에 약간 수정을 더했다.
“목사님, 기왕 오신 김에 미국에서 [큰마음]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난생 처음 듣는 큰마음이라는 말.
각 글자들은 익히 써왔고 알고 있는 말임에도 ‘큰마음’은 내 맘을 떠나지 않고 배움의 자세를 늘 일깨워주는 자각제가 되어 나의 미국 여정을 도왔다.
버스 여정이 모두 끝나고 2개월 후에 이재덕 집사님을 다시 만나기까지 그 말을 단 하루도 잊지 않았다.
“장하십니다. 장하십니다. 정말 장하십니다.... ...”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며칠전에 이재덕 집사님이 해주신 말이다.
참 뿌듯했다.
드넓은 광야에 내리 꽂는 번개와 가도 가도 푸른길
미국은 참 넓다. 너무 너무 넓다.
별 소득없이 8시간을 걷고 1시간 시내버스를 타고 온종일 샌드위치도 못먹고 힘겨웠던 Kansas city에서 출발한 야간버스에 올랐다. 결국 15시간을 버스로 달려갔는데도 만나볼 목사님들을 보지 못한 Minneapolis로 가는 길이다.
몇시간을 달렸을까. 하늘에는 별한점 없고 우중충 했는데 갑자기 주변에서 우르릉 쾅쾅하며 번개와 천둥이 쉴새없이 쳐댄다.
넓고 넓은 대지에 소가 기댈 언덕조차 없는 대지에 수직으로 내리꽂는 번개들이 두렵고 신기해 보였다. 난생 처음 보는 수직 번개가 버스 가까이 쳐도 버스는 유유히, 아니 뻔뻔스럽게 달리고 있고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곤히 잠들어 있다. 익숙하다는 듯...
텍사스 주의 휴스턴에서 달라스로 가는 내내 사막인줄만 알았던 텍사스의 광야는 사람손으로 정성을 들여 심은 것으로 보이는 수목림과 한국 소 다 풀어놔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 같던 지평선이 보이는 초원들이 내 마음을 넓혀 주었다.
좁은 버스 공간에서도 쉴새없이 창밖에 펼쳐지는 미국적 대지를 감상했다.
미국에는 미국인만 사는 줄 알았지만 내가 버스에서 본 미국의 서민들은 대부분 맥시코계 히스패닉이 주를 이루고 형편이 어려운 흑인들의 무심한 얼굴들이 엄청나게 많이있다.
그들의 얼굴에선 ‘큰마음’을 찾아 보기란 쉽지 않았지만 “큰 곳”에서 사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참 큰 나라다...
농아인을 위한 도서관과 농아인 동성애자 지원센터
LA를 출발하고 첫 도착지인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3년 전 단 한번 만난 초등학교 동창의 도움으로 신세를 지고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을 헤메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기 전날과 떠나는 날 아침을 잊을 수 없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기 전날에는 San Francisco Market St 1800번지에 있는 세계최대 동성애자 인권단체 건물에 갔다. 샌프란시스코 거리 곳곳에 무지개 깃발이 바로 그들의 깃발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다. 매년 봄마다 펼쳐지는 100만명의 동성애자 퍼레이드는 그 행사 자체만으로도 관광 상품이 될 정도로 유명하다.
Market St 1800 5층짜리 건물 앞에서 고민했다. “들어가, 말어?”
이 건물 401호에는 농아인 동성애자를 위한 지원센터가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곳인줄도 모르고 왔다가 황당했다.
아무리 목사래도 배우러 왔으니 나한테 해꼬지는 안하겠지... 라고 마음을 굳게 먹고 가볍게 문을 들어섰다.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오줌미 마려웠다. 1층에서 안내를 보고 있는 할머니한테 4층 농아인 센터를 확인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특이한 화장실... ‘남자’, ‘여자’, 그리고 ‘UNISEX'.
잠시 유니섹스에 대한 혼란함을 정리하고 전자사전을 뒤졌다. “남자 여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그렇구나 지네들도 자기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 못하는 인간은 여기로 들어가라는 거구나...
실례가 될 것 같아 거기는 못들어 가고 긴장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시원하게 물을 뺐다. 물론 시원하고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401호의 농아인 동성애자 센터에서도 친절한 농아인 남자의 안내로 한시간여를 예약 없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도 게이일까가 궁금했지만 묻지는 못했다. 게이일 것이 확실하다. 나의 선입견에 비추어 그의 모습과 귀걸이 등등의 생김새로 보면...
다음날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는 날 오전에 부랴부랴 샌프란시스코 시립도서관을 찾았다. 시립 도서관 안에 1층 한쪽을 크게 공간을 마련하여 농아인을 위한 도서관을 마련해 주었다. 각종 농아인 관련 도서와 관련 비디오 자료가 아주 많이 있었고 농아인 여직원도 한명이 상주하고 있었다.
이후 미국 어디를 가도 이와 같은 농아인을 위한, 농아인과 관련된 도서관은 갈로댓 대학교를 제외하곤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농아인과 관련된 도서관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매우 놀라고 감동적이었다. 나도 한국에서 농아인 관련 도서관을 세우고 싶다. 물론 관련 도서도 부족한 실태이지만...
나는 갈로뎃 대학교에 갔다.
미국 정치의 심장 워싱턴DC에는 세계에서 유일한 사립 농아인 대학교가 있다. 갈로댓박사의 아버지 갈로댓박사는 농아인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아들 갈로댓 박사는 농아인 대학교를 설립했다.
미국에서 가보고 싶었던 농아인 관련 단체 중에 손에 꼽고 너무나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학교 구석 구석을 다녀보며 디지털 카메라의 밧데리가 다 닳아 교체할 정도로 찍어보았다.
전 세계 농아인 유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는 이 대학교에서 한국인 유학생은 다만 4명 정도뿐이다. 후진을 양성하고 싶다.
아직도 한국의 농아인 고등학교에서는 진학지도보다는 직업보도 중심의 교육이고 직업보도 중심의 교육도 20년전, 30년전에 가르치던 목공, 수예, 인쇄 등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이다.
어떤 놈이 책상에서만 교육계획안을 짠게 틀림이 없다.
하바드나 MIT로 유명한 보스턴을 가서 어느 큰 대학을 들어갔을 때다. 대학 안에 장애학생 지원센터에서 직원을 붙잡고 예약 없는 인터뷰를 강행하게 되었다.
“농아인 입학생들은 보통 어느 전공을 선택하게 되는가?”라고 질문했지만 직원은 아주 난감해하며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어느 학과라도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그 학생들이 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주로 어떤 직종에 취업을 하는가?” 라고 재차 물었다.
다시 직원은 곤란해 하며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들이 원하는 어떤 직장이라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 날정도로 부러웠다.
학교에 농아인 학생이 입학을 하게 되면 장애 유무와는 관련이 없이 입학을 시켜주는 학교 제도나, 농아인 학생이 대학에 입학을 하면 반드시 수화통역인을 고용해서 해당 농아인 학생이 공부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지원해 주는 법적인 뒷받침이 부럽다.
미국 농아인들은 어느 학과든,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었다.
물론 우리 한국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은 농아인 학생들이 다양한 학과로 입학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다만 내가 마음이 급해서 느려 보일 뿐이겠지.
한국에도 농아인 전문 교육기관이 필요하다. 책상에서 세운 학교가 아닌....
한해 예산 80억원
워싱턴DC 약간 북쪽에 Silver Spring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이 지역에는 한인들도 다수 밀집하여 살고 있기도 하다.
이 작은 도시에는 워싱턴DC를 포함한 몇 개의 사설 수화통역센터 중에 규모가 좀 큰 단체가 있다.
이 단체를 예약하여 방문하고 약 1시간 반 동안 다양한 설명과 인포메이션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단체의 벽에는 ‘올해의 수화통역사’ 라든지 유명인의 수화통역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다. 그중에는 현재의 부시 대통령, 클링턴 전 대통령, 영부인들과 힘있느 정치인, 그리고 비디오 자료를 통해 헤비메탈 그룹사운드의 수화 통역하는 모습 등을 보여주었다. 수십명의 직원이 늘 농아인의 통역 호출에 대기하고 있고 활동하고 있다.
농아인 스스로 비용을 부담하는 수화통역임에도 수화통역사들은 늘 바쁘게 일을 하고 있다. 통역은 시간당 $20-$30 정도로 매우 높은 편이고 수화통역사의 생활도 아주 넞넉한 사람이 많다. 어떤 수화통역사는 인기가 좋아서 자주 수화통역을 의뢰받는 경우 한달 월급이 500-600만원 정도 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긴장하는 마음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단체의 1년 예산을 물었다.
“600만 달러...”
한화로 80억원이다.
약간 규모가 크기는 했어도 단 하나의 수화통역센터 1년 예산이 대한민국 전체 수화통역센터의 예산에 몇 배나 된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규모있는 농아인 복지 시설을 설립하고 싶다. 어느 누가 봐도 정말 멋지게 일 해 볼 수 있고 농아인들이 자긍심을 갖게 되는 그런 시설을 설립하고 싶다.
굳이 나 자신이 소유하지 않더라도 한국에는 그런 시설이 들어서서 농아인의 복지와 인권을 위해 일해줘야 한다. 물론 곧 될줄 믿는다. 대한민국은 역시 힘이 있는 나라다.
미국의 농아인교회는 $1 짜리 물을 팔고 있다.
내가 미국 가게된 궁극적인 목적은, 나이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도 교회를 위해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하면 독립할 수 있을까? 미국 농아인교회는 어떤가?”라는 취지에서 미국행을 결정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본 미국의 농아인교회는 재정적 규모는 조금 달라도 비슷하게 외부 후원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아니, 도리어 미국 현지의 일반 교회들이 문을 닫는 현실과 그 빈 교회를 한인들이 무상으로 받아서 사용하는 기적(한인교회입장)같은 일이 있기도 한 곳이 미국이다.
워싱턴 D. C에서 본 장면이다. 샌드위치라도 사먹으려고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을 때 신호등에 걸려 대기하게 되었다. 보통은 신호등에서 대기하게 되면 낯선 흑인이 다짜고짜 차창을 닦아주고는 돈을 요구하는 게 보통이고, 그 요구에 되도록 1달러라도 주는 미국인이 있다. 돈을 주는 미국인은 차창을 닦아 주었다고 고마워서, 혹은 수고했다고 돈을 주는 것이 아니고 위험하기 때문에 자신의 안전을 위해 돈을 준다.
하지만 내가 대기한 그 신호등에서는 다른 광경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농아인 것 같은 여자 한명이 가슴에 작은 글씨를 쓰고 손에는 한국에서 1000원 안팎하는 물병을 들고 판매를 하는 것이다.
단 $1 이다.
그 글에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농아인교회 기부금모금 Daef church... Donation..."
그 미국인 농아인교회는 어떤 영유로 기부금을 모아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미국 농아인교회가 단 $1 짜리 물을 팔아서래도 수익을 남겨 농아인교회가 하고자 하는 일에 보탬이 되고자 했다는 것이다.
LA에서 A/G 농아인교회 한곳을 방문했다. 그곳은 예배형식이 엄격했던 다른 농아인교회와는 달리 열정적이고 뜨거웠다.
목사님의 나이는 많아 보이지만 사모님의 수화 찬양과 아들의 멀티미디어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주일 오후 2시부터 뜨겁고 감동적인 예배를 4시까지 드렸다. 참여한 교인은 젊고 힘있어 보이는 성도가 많은 40여명이 되어 보인다.
하지만 이 농아인교회 역시 오전에 일반교회가 사용하고 오후에서야 농아인들이 장소만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많은 목회자들이 주중에 Job를 갖지 않으면 생활이 곤란하고 교회는 자체 헌금으로는 전혀 목회자의 생활을 맞춰주지 못하고 있었다.
강주해 목사님의 도움으로 시카고의 ‘농아인을 위한 비디오 선교회’를 방문하였다. 4-5억원 정도의 방송장비를 갖춘 규모 있는 설비와 조직력이 나를 감동케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다시 이곳의 재정 운용 방안, 특히 운영비 수입에 대해 문의를 하였다. 답변은 간단하다. “DONATION"
어떤 방법으로 농아인교회는 재정적인 독립을 할 수 있을까?
우리 교회는 언제 외부 후원을 받지 않고 외부 후원을 해줄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미국에는 미국사람만 살지 않는다.
미국 서민들이 종종 이용하는 그레이하운드(GreyHoundBus)를 타보면서 신기한 것을 느꼈다.
미국에는 미국사람만 사는 게 아니구나...
평소 영화를 보거나 보도를 접하게 되면 미국은 오로지 영어를 사용하고 인종은 백인과 흑인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LA만 하더라도 맥시칸(히스패닉, 스페인계) 인구가 전체 인구의 40%가 넘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레이하운드 버스 안과 밖에는 스페인어로 안내문이 있고 광고도 스페인어로 한다. 심지어는 TV에서도 스페인어 채널은 따로 있다.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운 맥시칸들은 스페인어로만 이야기 한다. 길을 몰라 맥시칸 아주머니 두 사람에게 문의를 했지만 그들의 대답은 “No English"라고 말한다. 수천만의 중국인은 중국어를 사용하되 광동어와 대만어, 그리고 본토 중국어(보통화)를 사용한다. 아프리칸은 자기 나라말과 부족 말을 더 중시하고 그들만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뉴욕시를 12시간 동안 배회하고 걸어 다니면서 아프리칸 타운을 지나게 되었다. 도저히 영어라고 생각되지 않는 언어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백인들을 불쌍하다. 샌프란시스코는 중국인 때문에 못살겠다 말하고, LA는 한국인 때문에 못살겠다고 말한다.
뉴욕시에는 유태인 농아인 지원센터가 따로 있고, 샌프란시스코에는 동성애자 농아인을 위한 지원센터가 따로 있다.
미국에는 절대 미국인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마워서 사랑하게 된 사람들
무턱대고 미국을 가서 막무가내로 미국을 다니다 보니 적어도 한주에 한번은 얼큰한 국물이 생각난다. 이 때 지나는 나그네를 기꺼이 받아주시고 가족으로 대우해 주신 분들이 고맙다.
나의 일정을 체크해 주시며 서로 연결시켜 주시려던 분들이 너무 고맙다. 따뜻한 밥과 친절한 한국어로 안내해주시는 분들이 고맙다.
M지역에서 들은 말인데, 목회자가 새로 온 사람을 도와주면 도움만 받고는 떠나버린단다. 목회자는 그 일이 자기의 소명이 아니겠냐고 애써 위로하신다. 나도 자나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분들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적어도 한주에 한두 번 이상은 몸을 씻을 수 있었으며 한주에 두어 번은 그리운 얼큰이를 먹을 수 있었다. 평생 잊지 않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나의 재산이다.
샌드위치 사먹으려다가 굶어죽겠다.
미국에서는 ‘지하철’에서 샌드위치를 판다. 땅속에 있는 지하철이 아닌 샌드위치 체인점 이름이 ‘지하철(Subway)'이다.
처음 지하철 샌드위치를 사먹을 때였다. 물론 후에도 나는 햄버거와 샌드위치로 대부분의 끼니를 때었다. 미국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음식이겠지만 한국에서도 잘 먹지 않았던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3개월 동안 원 없이 먹었다. 내 평생 먹은 햄버거의 절만은 3개월간 미국에 있으면서 다 먹었을 것이다.
샌드위치를 사먹는 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정말인데) 미국식 샌드위치 주문방법을 몰라 혼줄이 났다. 등에는 식은땀이 나고 얼굴은 벌게지고 입은 더더욱 열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 샌드위치 먹지 않고 애를 먹었다.
샌드위치의 주문은, ①6-7종류 이상의 빵을 고른다. 빵은 유럽식 바게트 빵이 주종이고 잘못고르면 매운빵도 있었다. ②빵을 고르면 사이즈를 정한다. 6인치와 일반적인 12인치가 있다. 12인치면 가족들이 먹을 양이다. 엄청난 양이라는 사실만 말하고 싶다. ③빵의 배를 좍~ 갈라서 엎어 놓고 내용물을 고르란다. 치즈냐? 햄이냐? 터키(칠면조)냐? 등등의 내용물을 선택한다. ④다음은 야채를 선택한다 10여 종류 중 자신에게 알러지 반응이 없는 야채만을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 이부분에서 잘못 고르면 온통 오이피클만 먹게되며 오이피클은 대부분 시큼하고 종류는 4종류가 있다 그중 한가지는 매운 오이피클이다. 나는 주문을 마치고 오이피클은 따로 빼고 먹었다. 너무 시큼시큼해서. ⑤소스를 선택한다. 약 8종류의 소스는 한국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소스가 대부분이고 아무 이름이나 보고 부르면 소스를 얼마나 넣을지 물어본다. ‘little bit'이라고 했더니 새똥싼 것처럼 조금 준다. ⑥ 음료수를 묻는다. 나는 미국에서 3개월 동안 Cock(콜라) 이외에는 마셔본 음료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어디서부터 영어가 막혔을까? 나는 1번에서 주문부터 콜라를 주문하기 직전까지 온 등어리에 식은땀이 나고 얼굴을 시뻘개진다.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샌드위치가 맛있어서라기보다는 가격으로 만만하고 버스 기사들이 대부분 햄버거집,아니면 샌드위치집 앞어서만 세워주기 때문에 별다른 선택권이 없다.
이후에도 일부러 샌드위치 가게로 갔다. 거기에서는 미국 문화와 영어를 더 잘해야겠다는 각오가 새로워졌다.
나는 한국인이다. 임마!
3개월간 버스로 여행을 하면서 만난 여행자들 중 많은 숫자가 유럽, 특히 독일 청년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아시안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고 그 아시안은 틀림없이 중국인이다.
가끔은 일본인도 만나보기는 하지만 단 한사람도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본적이 없다.
여행중 만나는 많은 사람은 나의 출신에 대해 많이들 궁금해 했다.
나는 당당히 “I'm came from Korea. I'm a Korean"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시안을 제외하고 만나는 모든 미국인은 나에게 코리안이 어쩌구 하며 다시 질문한다. “뭐?” “뭐?“ 나중에 알고보니 미국 사람들은 한국인을 잘 모른다. 내가 북한에서 왔는지, 남한에서 왔는지를 묻는다.
“너희는 잘 생각해 봐라. 너희가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한국인들 가운데 북한사람이 얼마나 있느냐? 북한 사람은 사회주의이고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므로 해외에 나와있는 코리안의 대부분의 한국인은 남한 사람이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영어가 짧아 그렇게 하지 못한게 아쉽다.
한번은 중국인이 내게 중국어로 “차가 몇시에 출발해?” 라고 묻는다.
나는 당당히 중국어로 대답한다. “응, 10:50 출발이다.”
그 중국인은 내가 같은 중국인으로 보았던 것이다. 중국어가 조금은 서툴러도 중국에는 워낙 사투리가 많다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 할수도 있다. 아니면 중국인이지만 미국에 오래 살아서 중국말을 어눌하게 하는 중국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당당히 중국어로 말했다. “난 한국인이다.”
미국 약 30여개 도시 35개 정도의 농아인과 관련된 단체와 사회복지 시설을 방문했다. 내가 방문한 대부분의 농아인 관련 단체들은 한국인 방문자가 처음이란다.
나는 어쩌다가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그 단체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나를 통해 한국을 조명해 볼 것이다. 나는 당당히 그들에게 말한다.
한국 남자들은 대부분 태권도를 잘한다고, 또 한국 수화통역자들은 일본수화도 잘한다고(50% 비슷하니까 50점 먹고 시작한다는 의미), 나는 약간의 미국 수화와 함께 중국 수화를 쫌 한다고 말하니 많은 사람이 혀를 내두르며 놀란다.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외국어를 몇 개씩 하는가보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외국어 공부를 해두자.
그래서 당당히 말해야 한다. “나는 한국인이다.”
한인교회와 한인목회의 딜레마
주일에는 한인교회 몇 곳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하나같이 한인교회는 힘들어 보였다.
미국 처음와서 나가는 교회에서 목사님은 방도 구해주고 운전면허증도 따게 해주고 몇가지 통역과 자녀들의 한글교육까지 다 해주면 어느새 자리 잡았다고 말도 없이 떠나버리고 만다. 성도들이 교회 출석 잘 안하거나 교회활동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한마디 거들면 얼른 다른 교회로 가버린다. 성도들이 많이 있어도 목사님 혼자서 열심히 일을 하면 하루 3-4 시간을 자며 교회를 보살피고 있었다. 특별 5일 새벽기도회 2일 남았으니 꼭 나오라고 신신당부 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이 그리도 애처로워 보이던지, 무고한 목사님과 전도사님을 수렁에 빠치고 사임시키면서도 죄책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본인들은 본인들이 무늬만 신앙인인지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깨닫도록 설교로 감화 시키려 하면 무늬만 신앙인인 집단으로 다시 떠나버리는 게 현실이다.
듣기로는 90%의 목사님부부가 직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중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자기 가족만을 교인으로 돌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Family Church)
어느 자매가 한말이 생각난다.
“천석 부자는 천가지 고민이 있고 만석 부자는 만가지 고민이 있다.”
한국에서와는 또 다른 양상의 한인 교회들...
내가 미국 25년 살았는데 처음 봅니다.
버스라는 교통매체로 미국 전역을 다니는 한국인이 그리 흔하지는 않는가 보다. 만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서로 짜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나에게 해주는 말이다.
“내가 미국 25년 살았는데 목사님처럼 여행하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물론 본인들도 그렇게 버스를 타고, 아니 자기 차를 타고도 미국 전국을 동그라미를 그리며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속으로 생각하곤 한다. ‘몰랐으니까 출발했지요...’
내 나이 서른다섯.
이후에도 다시 하려할까? 아니 다시 할 수 있을까?
자신은 없다.
하지만 일생 가장 기억에 남는 유익한 여행이 될 확신이 있다.
욕심을 부려 본다면 나보다 젊은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 한국의 미래가 달린 젊은 사람들이 한사람이라도 더 세게적인 안목을 얻기 위한 도전을 멈추지 말았으면 좋겠다.
중국 백두산 밑에서 만난 여대생은 혼자서 3개월간 중국 일주를 하고 있었다. 중국어 한마디 못하는 여학생이 혼자서... 그리고 나는 그렇게 혼자서 중국을 여행하는 또 다른 여대생을 중국 남방에서 만나봤다.
그 젊음과 그 열정이 부러웠다. 젊은 사람들 좇아가려니 허리가 휜다.
우와~ 냄새 때문에 죽겠다.
미국에서 피부색이 한국사람보다 진한 사람들 가운데는 몸에서 아주 역겨운 냄새가 난다.
어느 인터넷의 글에서 보면 그 냄새를 흡사 [짬뽕냄새]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는 치즈의 고약한 냄새라고 말하는데 역시 짬뽕 냄새와 많이 흡사했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탔을 때 주변좌석에 히스패닉이나 흑인들이 앉아 있으면 그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 없이 냄새가 난다.
‘99년 사랑의 클리닉(황성주박사)의 이비인후과(당시 김도일선생)에서 선교사 자격으로 축농증 수술을 받은 이후 주변의 냄새에 너무 민감해져서 전에는 맡지 못했던 냄새들이 나의 코에 많이 느껴진다. 수술 후 좋아진 점도 많았지만 역한 냄새가 많이 난다는 것은 불편하다.
미국에서 그 역한 냄새로 밤을 지샌 적이 약 4일 가량 있다.
야간버스를 주로 타고 다니는 나로서는 하루가 편하기 위해 버스에서 푹 자야하지만 냄새가 나는 밤은 시간이 더디 가고 잠도 안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속된다.
냄새를 일으키는 그들 스스로는 그 냄새를 인지하지 못하겠지.
그리고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나의 냄새로 인해 내 옆에 앉았던 많은 사람들이 잠을 못잘 수도 있었겠다.
나는 버스만 60일을 타고 다녔다.
사회적인 지혜를 갈구하다가 얻은 영적 지혜
미국간 나름대로 큰 목적이 있었다. 농아인선교의 재정적 독립방안을 보러, 농아인 복지의 상황을 보고 싶어서 등등의 목적을 가지고 갔다.
그러나 모든 일정을 마치고 LA에 돌아왔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추구하는 목적과 의도들이 [사회적 목적] 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작 하나님은 나를 ‘사회적 목적’에서 [영적인 목적]을 얻게 하시기 위해 미국으로 불러 주셨다는 진한 감동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그곳으로 보내셨구나.
시카고에서 뜻밖에 참석한 [KOSTA](한인 유학생 선교대회)와 LA에서 참석한 [워십 컨퍼런스]를 통해 내가 정말 우선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해주셨다.
사회적인 목적을 소홀히 하지는 않지만 우선되어져야 할 것을 알려 주신 하나님을 알았을 때 나의 3개월여 미국 여행이 너무 값지고 유익했음은 두말이 필요 없다.
내가 정작 잃어버린 신앙의 기본을 잃고 목회를 위한 목회만을 하고 있었음을 수정하자. 예배를 위한 예배 드림을 수정하자. 영적 회복을 위해 힘을 기울여야 한다.
내 영을 깨우자.
3. 미국투어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 (미래의 각오와 계획)
후원 재정확보의 효과적 방안 모색
“주세요” 보다는 “드리세요”로의 전환하는 일을 하고 싶다.
미국투어를 통해 얻은 지혜가 하나 있다. 같은 농아인 목회를 하고 있는 선후배 농아인 목사님, 전도사님들의 생활이 너무 어렵고 힘이 든다. 미래도 불투명한데다가 사역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재정력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대형교회와 농아인교회를 연결해 주어 농아인 목회자가 생활고로 인해 목회를 방해받지 않도록 해주고 싶다.
‘받음’에 대한 열등의식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맡겨주시는 세상에서의 직무를 잘 감당하기 위해 주시는 모든 주시고자하는 것을 받아 열심히 섬기며 충성해야 하겠다.
모든 일은 기도보다 우선하지 않아야 하며 영적 회복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됨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선교와 복지 프로그램 강화를 위한 프로그램 개발
향후 10년 이내에 군산지역에는 농아인을 위한 전문 복지회관을 설립하고자 한다. 한국의 실정상 장애인종합복지관은 항상 농아인이 소외되었고 농아인을 위한 프로그램도 개발되어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 일이 교회에서 이루어 진다면 교회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설정될 것이다.
욕심을 내자면 우리나라에 있는 많은 농아인교회들이 복지관형 선교방향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되기를 바란다.
후배들과 함께 하는 세계테마여행
일리노이주의 강주해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워싱턴 DC에서 황창호 목사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그 외에도 많은 농아인관련 목회자와 성도들이 말한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미국 여행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처음이라는 말이 나 자신에게 뿌듯한 오만함을 주기보다는 내가 처음이어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
욕심을 부리자. 언젠가는 후배들을 데리고 전 세계 농아인 복지단체와 농아인교회, 농아인선교단체와 농아인선교지를 돌아보고 싶다.
나는 길을 닦는 사람이라면 후배들은 일을 하는 사람이겠다.
후진양성을 위한 장학재단 설립
워싱턴DC에 있는 세계 유일의 농아인 대학인 갈로댓대학교에는 2003년 7월 현재 한인 유학생이 4명뿐이다. 다른 외국의 어느 나라와도 비교 할 수 없을 아주 적은 숫자임에 틀림이 없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학생들이 한국 농아인사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미래를 꿈꾸는 가운데 그들에게 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싶다.
장애인 교육에서도 농아인교육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교육수준을 벗어나고 있지 못한 현실을 후진들이 개선해 나아가며 그들이 한국 농아인 사회를 이끌어갈 재목이 되어야 한다.
후진을 양성 할 수 있는 장학재단이 필요하다.
농아인교회 자립을 위한 목회 컨설팅
“너 월급 얼마야?” 라고 물어서 자신 있게 대답하는 후배가 단 한사람도 없다, 월급이 적어서 대답을 못하는게 아니다. 목회자의 생활을 최저생계비에도 못 맞춰 주는 농아인교회의 현실이 마음 아파서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정한 최저생계비(약70만원)의 절반 받는 전도사도 많이 있다는 사실은 지혜를 간구하는 나로서는 할 일이 많다는 의미다.
주님이 주신 지혜를 모아 농아인교회의 자립을 위한 목회 컨설팅을 하자. 물론 어리고 젊은 지금이 아닌 좀더 지혜를 많이 허락받는다면 시간이 조금 더 지나야 하겠지.
어쩌면 나와 한 교단에서 일하는 26개 농아인교회들 가운데 유일하게 나만이 농아인이 아닌 담임목회자라는 사실이 그 책임감을 더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혜를 구하자.
작은 농아인교회의 밝은 [미래]?
2003년 한해는 우리나라에 비가 너무도 많이 왔다. 날이 우중충한 이유로 마음까지 우중중해져서는 안된다.
10년전만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농아인 관련단체 중 농아인교회들이 최고 우위를 차지하고 일을 해왔지만 급속히 발전하는 사회에서 복지 시설과 복지 재정이 늘어남에 따라 정부지원이 되지 않는 종교시설, 즉 농아인교회들은 제자리 걸음을 치고 농아인 사화단체들은 성장을 가속해 왔다.
우리나라의 농아인교회는 농아인사화단체의 속도만큼 따라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고 그로인해 사회단체와 농아인교회간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갈 것이다.
한국에는 교회가 5만여개 있다. 성도는 1200만여명이 있다고 한다.
“한가족”이며 “한지체”인 성도들이 그 미래를 가지고 있다.
가족의 힘을 모으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를 위한 기도는 후진들에게 까지 이어지는 과제이며 끊이지 않는 영적 과제이다.
기도하자.
첫댓글 너무나 좋은 글이네요 이글이 삼년만 빨리 저에게 왔다면 모든걸 포기하구 갈수도 있었을텐데 조금 늦게 도착 했네요,,,
감사합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이를 만난다는게 이렇게 반가운줄 몰랐습니다.^^ "물고기두마리"님도 기도해주실꺼죠?^^* 그리구..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빠른때 일수도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