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자주 사용한 말이 있습니다.
<<
마음이 그와 같이 일어난다면, 사실이 그와 같이 드러나고 알려질 것이다.
>>
그렇죠?
황벽님의 지적은, 현실은 괴로움이다 천국이다 이런 말 하기 이전에 더 범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죠?
{{
무상, 고, 무아임을 알려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사실이 그와 같이 무상, 고, 무아로 드러나고 알려질 것이다.
}}
위와 같은 취지는, 이런 저런 경험하고 불교 공부 한참 하던 30년 정도 이전, 제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해당 논점으로, 후배들과 이야기하기도 하구요.
기본적으로 불교에서는 그런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면에서 긍정합니다.
그리고 그러함을 가장 간명하게 경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개념이, 방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방편이다. 희론을 끝장낸다.
.
희론을 끝장낸다? 그런 말이 나오니까, 중론 반야부가 생각나죠?
방편이라는 개념이 반야부와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이게 불법 자체가 화엄이라서 말이죠... 하핫
지금 주제는 얼마전 황벽님과 잠깐 오고간 대화에서도 다룬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어쨌든 후배들이 딴에는 나름 고민해서 지적하는 건데, 너무 간단하게 대답하니까, 순간 벙쪄서 다음 류의 질문을 던졌던 거 같아요. 저는 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대응하구요.
방편이라구요? 진리는 없어요?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술수예요?
오히려 진리가 있다면, 무아가 아니라 유아이고, 무상이 아니고 항상할 걸? 무무상, 괴로움, 무아...이 언명 자체가 이미 스스로를 배척할 준비를 하는 언명이야, 아니야? 부정의 언명이 그런 것이거든? 불교는 처음부터 붙잡을 게 없도록 안배되었어. 상좌의 언명이든, 대승의 언명이든...
반박을 잘 못하죠. 보통 그래요. 그래서 다음 말을 했던 거 같아요.
내 대답에서 벙찌는 부분이 있다면, 이제 골몰할 문제가 생긴 건데...하핫
방편은, 대단히 심오한 개념입니다. 연기가 방편이라서 그래요. 연기의 다른 이름이 방편입니다. 연기의 여러 모습 중 하나가 방편이란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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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파랑새가 필요한 편이죠? 눈 앞에 파랑새가 있기를 바래요. 뭐... 나쁘지 않아요, 당연한 거죠.
너무 간명해서 얼빠지니까, 조금 더 포장하면요. 다 과거 적었던 말인데, 다음의 말도 가능합니다.
반야부식으로다가.
무무상이기에 무상하다, 무상하다면 무무상이다... ... 괴로움이 없기에 괴롭다, 괴롭다면 괴로움이 없다...
법 즉 사실은, 방편이다, 그렇다고 방편을 떠난 사실이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청정한 부처님 불국토가 방편으로 드러난 것이라 하는 것이다.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하자면요. 과거 적은 글 중 다음 취지의 표현이 있습니다.
<<
연기는 세계를 담는다.
연기는 세계를 담은 수레이다.
수레는 그 무엇이든 능히 담는다.
기독교든, 불교든, 베단따든...
연기를 보는 자는, 연기를 담은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연기라는 수레를 본다.
하지만 수레가 담은 내용물을 떠나 수레가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불은 그 조건에 따라 이름이 붙는다, 나무에 타면 장작불, 기름을 태우면 호롱불...
연기가 그와 같다.
>>
불자는 연기를 아는 자이고, 그 연기의 모습 중 하나가 바로 세계를 자아내는 겁니다.
한 이십년전에 화엄과 관련해 거의 소책자 분량의 글을 적었던 거 같은데요.
이게 생각할게 엄청나게? 엄청나게까지는 아닐지라도 여하간 많습니다.
바로 아래 본글 꼬리말에 적었듯, 파고든다는 거는 골몰한다는 거고, 파고들면 즉 골몰하면 통달합니다.
골몰할 때는 구체성을 띄어서 진행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법 즉 사실입니다. 개념을 쓰더라도 구체적 진행이 요구됩니다. 꼭 언어적 생각이 수반되는 것만은 아니긴 한데요. 개념이 아닌 착안점 같은 거... 그런 거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말을 하는 거니까요, 타인과의 교류는 다 그런 거니까...
[ 불은 그 조건에 따라 이름이 붙는다, 나무에 타면 장작불, 기름을 태우면 호롱불... ] 이거 아함이나 니까야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불은, 조건에 따라 이름이 붙습니다.예를 들자면요. 예수가 조건인 불이면, 기독교등이라 이름합니다. 부처님이 조건인 불이면, 불교등이라 이름합니다. 브라흐마가 조건인 불이면, 베단따등이라 이름합니다.
불교는요. 세계의 성립과 소멸을 봅니다. 꿈을 봅니다. 연기는 꿈을 담아요. 세계가 꿈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기독교 불교 베단따 등 이름을 떠난 세계가 따로이 있겠어요?
구체적인 그 세계, 꿈을 떠나 연기를 논할 수 있겠어요? 아니겠죠?
자... 사실과 유일한 참된 관점이란게 어떤 의미일까요?
과거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칸토르 집합론에서 무한집합의 두차원이 있어요. 무한이 있지만, 무한의 무한도 있다... 둘은 같은 차원이 아니다...
이 세계는 무한합니다. 꿈이 무한합니다. 무한해서 꿈입니다.
제 글을 보세요. 무상, 고, 무아를 부정합니까? 긍정합니다. 또한 무상 고 무아를 말하지 않는데, 무한의 무한을 엿볼 수 있겠습니까?
좀 더 쉽게, 무상 고 무아를 논한 불교가 아니고서야, 기독교 불교 베단따 등 그 모든 것이 자아내지는 것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에서 그럴 수 있어요?
베단따가 그럴 수 있나요?
진리니 사실이니 유일한 참된 관점이니 하는 일체의 말 즉 희론들은, 무한에서 꿈에서 가능한 겁니다. 무한의 무한에서는 그런 말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여러번 다음의 말을 했습니다.
<< 샤마니즘을 탈피한 유일한 것, 그것이 불교다. 이거는 정말 인간의 작품이 아니다. >>
모든 인간의 꿈은 샤마니즘으로 환원할 수 있습니다..
오직 불교만, 석가모님 부처님만 샤마니즘을 담으면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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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꿈인데, 불교조차 꿈인데, 왜 우리 불자가 불법을 지켜내려 하는가? 보존하려 하는가?
불교라는 꿈이 사라지면, 꿈을 여읠 방법을 잃습니다. 우리는 무한에 갇히고, 무한의 무한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한인 꿈의 입장에서, 소위 진리를 논할 수 있는 이 세계, 불교라는 불의 이름에서 우리 불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이 꿈을 포함한 모든 꿈에서 사실과 유일한 참된 관점, 이것이 불교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일체는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이다. 그것은 바로 여기서 확인된다. 와서 보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평등하고, 일체 중생 그리고 그 꿈을 차별 없이 품는다. 이것이 자비다.
>>
근래 논점 중 하나, 관을 통달한다는 거는 정말 단순하지 않습니다. 연기의 모습을 통달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불교는 정말 일체 수준의 중생에게 그에 부합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중생은 한량 없으니 불법도 한량이 없습니다.
신들과 인간 그리고 한량 없는 중생을 유익하게 하시는 참된 스승, 오직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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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00:30 새글
"불교라는 꿈이 사라지면, 꿈을 여읠 방법을 잃습니다. 우리는 무한에 갇히고, 무한의 무한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제가 화엄에 머무르는 이유는 선정과 같은 고난이도의 수행을 알지못할지라도 방문객님의 불법 대한 설명은 늘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보이기에 그 빛나는 통찰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물론 너무 어려워서 접근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지만요.. 위의 인용문 같은 경우요..
첫댓글 댓글로 흘려보내기엔 너무나 깊고 아름다워 이리로 모셔왔습니다.
어디서도 만나지 못할, 고급지고 깊고 광대하고 화려한 세계가 그려지고 있네요.
부분이 전체를 담아내고, 전체가 부분을 포섭하며 겹치고 겹쳐 드러나는 화엄법계를 일단에서나마 설하시려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앗~
숨결님 댓글도 따라올라갔네요 ㅎ
그냥 두는게 좋을거 같아 살려두겠습니다.
아마 누구라도 숨결님과 같을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