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저지리 산36번지
벳바른궤 가는 길 : 저지리 산36-9번지의 동쪽 끝 부분의 도로에 주차 해 놓고 배 모형 전시한 곳에서 올레길14-1코스을 따라서 30분 가량 걸어 들어가면 벳바른궤 안내판이 보인다. 이 일대는 저지곶자왈 지역이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저지곶에는 무장대가 활동하는 지역이었다고 한다.
저지리는 4·3 이전인 1922년 당시 1구 수동, 움부동(→월림리), 중동(샛골), 동동(작지가름), 북동과 2구 남동(석수가름), 명이동(메눈동네→望伊洞→明理洞), 만고동(滿庫洞)으로 나누어진 큰 마을이었다. 저지리는 토벌대와 무장대의 주요 충돌 지역이었고 4·3이 일어나기 전부터 사건이 자주 이어졌다. 그 까닭은 마을에 지서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산간마을에 지서가 있는 곳은 성읍리와 저지리뿐이었다. 저지지서는 저지리를 비롯해 청수, 조수, 낙천, 상명, 금악 등 한림면(지금의 한경면은 당시 한림면에 속해 있었으며 1956년에 분리되었다)의 중산간 6개 마을을 관할했었다. 저지리의 성전동과 신흥동은 4·3 이후에 형성된 마을이다.
저지리 내에서도 1구와 2구의 명이동은 사정이 달랐다. 지서가 있던 1구는 지서의 영향으로 젊은이들이 경찰특공대원으로 활동하는 등 우익 성향을 보였다. 상대적으로 1구에서 산쪽으로 2㎞ 가량 떨어져 곶자왈과 인접한 명이동은 피신한 사람이 많았고, 무장대의 영향력이 미치면서 좌익 마을로 인식되었다. 주민들이 ‘명이동에서만 희생자가 99명이나 되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표현이다.
제주의 마을 시리즈 『저지리』(1991)에 따르면 저지리에서는 본동과 산 쪽에 가까운 명이동이 서로 적대적인 상황이었다고 한다. 본동에서는 1948년 4월 7일에는 양석구·고정삼씨는 문도지오름에 소 보러 갔다가, 이봉씨 부부는 유채 베러 갔다가 죽창으로 살해당했으며 김귀원, 김태종, 고창윤 씨 등도 희생되었다. 5월 13일에는 김인하(순경), 문명조, 박용주, 문인 씨 등이 사망했으며 5월 30일에는 강임생씨가 피랍된 후 사망했다. 명리동에서도 4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책이 나온 것이 1991년이므로 그 후 확인된 희생자가 더 있을 것이다.
저지리의 첫 사건은 1948년 2월 9일 이 지역 출신 청년들이 지서로 몰려가 돌을 던지면서 발생했다. 이후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는데 4·3 초기 주요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04/05 ; 저지지서 경찰과 경찰보조원이 명이동을 급습해 무장대 혐의자 현봉희(25 남)의 처와 이달우(30 남)의 가족을 감금함.
•04/07 ; 무장대가 저지지서를 습격해 방화함. 고창윤(17 남), 김귀현(22 남), 김태준(28 남)이 무장대에게 피살당함. 梁모씨는 창에 찔려 창자가 튀어나왔으나 살아나 1990년대까지 생존.(1991 제주의 마을 시리즈 저지리)
•04/08 ; 저지지서 경찰이 명이동을 급습해 조일화(20 여)에게 남편 이달우(30)의 행방을 추궁하다 딸(1)과 함께 학살함.
•04/12 ; 저지지서 경찰이 고시홍(58 남. 현봉희의 장인)을 연행한 뒤 학살함.
•04/20 ; 저지지서 경찰이 무릉리 친척 집에 피신해 있던 이달우를 연행해서 총살함.
•05/13 ; 무장대가 저지리를 습격, 경찰 김인하(28 남)가 교전중 사망. 문인(58 여), 문명조(65 남), 박용주(58 남)가 무장대에 살해됨. 이 날 학교도 불에 탔음.(1991 제주의 마을 시리즈 저지리, 2007 한경면역사문화지)
5월 13일 무장대의 습격 후 경찰은 저지리에 응원경찰(전남부대) 40명을 파견해 주둔케 했다. 응원경찰은 명이동 주민들이 임시 수용되었던 남동공회당을 임시숙소로 정하고 작전에 나섰다. 응원경찰의 주둔으로 무장대의 활동은 자취를 감춰 마을은 일시적으로 평온해졌다. 그러나 이들 응원경찰은 상명리, 청수리, 금악리 등 관할 지역을 휩쓸고 다니며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해서 또 다른 피해를 초래했다.
1948년 11월 23일에는 명이동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졌다. 명이동 주민들은 지서가 있는 저지1구나 청수1구로 소개했다. 그러나 곧 이어 12월 5일에는 저지1구에도 소개령을 내렸기 때문에 해안마을인 고산리 등지로 2차 소개를 당했다.
명이동 주민들에 대한 학살은 고산리에서도 이어졌다. 소개 이틀만인 12월 7일 양중빈 등 10여명이 고산중학교 동쪽 밭에서 집단학살되었다. 또한 소개 가지 않고 한수기곶 등지로 피신했던 주민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이들 중 저지 지경에서 학살된 사건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8년 12/○ ; 박유능(24 남)은 소개하지 않고 마을 옆 명이동곶에 숨어 있다 토벌대에 발각돼 학살됨.
•1949년 01/19 ; 현인호(35 남)와 현권팔의 아들(2)은 명이동 인근에 숨어 지내다 토벌대에 발각돼 학살됨.
•01/○ 고군평(14 고사진 아들)은 한수기곶 궤 근처에 숨어 있다 토벌대에 발각돼 학살당함.
•03/29 ; 고사진(61 남)은 동척회사 주정공장에 수용되어 있다가 풀려난 후 소를 돌보다 한청단원에게 피살됨.
•05/29 ; 김순정(14 여)은 용선다리못에 물 길러 갔다오다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함.
1949년 봄 중산간마을 복구가 시작됐다. 저지리 소개민 중 일부는 조수리로, 다른 일부는 청수리로 가서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저지리 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조수리와 청수리에 가서 살기 시작한 한 달 후 저지리 주민들은 저지리 남동에 성을 쌓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2020년 현재 정부가 인정한 저지리 4·3 희생자는 108(남 87, 여 21)명이다.(2020 개정증보판 제주4·3유적Ⅰ)
궤는 작은 규모의 바위굴을 뜻하는 제주어이다. 저지곳자왈은 도너리오름에서 분출한 용암이 흐르면서 만들어진 작은 용암동굴로 ‘볏바른궤/볕바른궤/벳바른궤’라고 한다. 뜨거운 용암이 흐르는 동안 용암의 표면은 식으면서 굳어져 암석이 되고, 내부로 뜨거운 용암이 계속 흐르다가 용암 공급이 끊어지게 되어 내부 용암이 모두 빠져나가 버리면, 암석 내부가 비어서 빈 공간이 남게 된 것이 궤(용암동굴)이다. 저지곶자왈에는 볏바른궤 외에 쳇망궤등 여러 개의 작은 용암동굴이 있다. 용암동굴은 만장굴과 같이 규모가 큰 동굴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천정이 낮은 소규모 동굴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천정이 낮은 소규모 동굴이 어느 한 순간 천정이 무너져 함몰되면, 빗물이 잘 침투하는 '용암 함몰지'라고 불리는 지형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볏바른궤(볕바른궤)는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터널형 용암동굴(궤)이다. 여러 개의 가지가 동서방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동굴 입구에는 돌담을 쌓았고, 입구에서부터 약 2m 정도까지의 공간에서 근현대의 것으로 보이는 옹기 파편 등 그릇 유물과 탄피도 발견되었다.(뉴스1 170403) 옹기는 된장을 담거나 물을 보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생활도구였으므로 이곳에서는 피난생활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저지곶자왈의 볏바른궤는 생태적 가치뿐만 아니라 제주 4·3의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곶자왈은 울창한 숲과 궤, 동굴이 있고 가까이 마을이 있어 주민들의 피난처뿐 아니라 무장대의 근거지 때로는 토벌대의 주둔지가 되기도 했다. 아름다운 저지곶자왈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지역 주민의 가슴 아픈 역사가 간직된 곳이다. 생활했던 흔적이 남아 있고 탄피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토벌대와 무장대의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으나, 누가 이곳에서 피난생활을 했는지 언제 어느 부대가 전투를 했는지에 대해선 밝혀진 것이 없다.
《작성 2026.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