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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사랑고백
아 7:10-8:4
10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11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12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13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
8:1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고
3 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
4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아 7:10-8:4 / [나 오직 그대 것] (신부) 나, 내 임의 것 그토록 날 그리워하는 그대, 내 사랑! 11) 오, 내 사랑아 우리 함께 들로 나가요. 거기서 우리 밤을 지새워요. 12) 아침 일찍 일어나 포도원으로 가요. 포도순이 자라났는지 포도 꽃망울 피어났는지 석류꽃이 피어났는지 찾아보기로 해요. 거기서 내 사랑 그대에게 드리려 해요. 13) [어서 오세요] (신부) 향기로운 자귀나무 향기 맡아 보세요. 온갖 향기로운 열매가 우리 집 문 앞에 열려 있네요. 내 사랑 나 그대 위해 이것들을 장만했어요. 햇과일, 묵은 과일 모두 있어요. 8:1) [그대가 내 오라버니라면] (신부) 얼마나 좋을까요 어찌 아니 좋을까요? 그대 내 사랑이 내 오라버니라면 어머니 젖가슴 같이 빤 오라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더라면 아무런 걱정 없이 그대에게 입맞출 텐데. 길거리에서 그대 만나 2) 어머니 날 기르시던 친정집으로 임을 데리고 들어가 내 사랑 그대에게 드리련만... 달콤한 포도주 내 임께 드리련만... 석류로 담근 술 내 임께 따라 드리련만... 3) 왼팔로 팔베개 하여 내 머리 누이시고 오른팔로 나를 꼬옥 안아주시네. 4) 예루살렘 아가씨들아 약속해 다오. 방해하지들 않겠다고 우리 사랑 방해하지들 않겠다고 약속해 다오, 제발.
신랑의 사랑 고백을 들은 신부는 이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이를 통해 두 사람 사이에 더 완전한 사랑을 갈망하고 둘만의 시간 갖기를 원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10-13) 신랑과 신부는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서로에게 속하는 사랑입니다. 다른 곳에서 사랑을 찾지 않고 서로에게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연합합니다. 그리하여 참 즐거움과 만족을 누릴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내 사랑하는 자야!”라고 부르며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합니다. 안정된 곳에서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신부의 마음입니다. 성숙한 사랑은 상대에게 속하기를 기뻐합니다. 자기중심에서 상대편의 마음을 헤아리고 용납하는 사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성도의 영적 성숙은 자기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자기 뜻이 아닌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를 기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둘만의 시간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장소와 시간을 원하는 것입니다. 한편 성경에서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포도원의 포도나무에 움이 돋고 있다는 것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를 위한 열매가 새 것과 묵은 것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새 것은 앞으로 들어갈 천국에서 누릴 축복이고 묵은 것은 이 세상에서 누리게 될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8:1-4) 술람미 여인은 일시적인 사랑의 위기를 극복하고 신랑인 솔로몬에 대하여 한층 성숙해진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제 술람미 여인은 더 완전한 사랑을 이루고자 갈망합니다. 첫째, 솔로몬과 자신이 아무 거리낌 없이 친밀한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오누이와 같이 지내는 것(1), 둘째, 그의 교훈 듣기를 원하고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하는 것(2), 셋째, 신랑의 따뜻한 사랑을 받는 것(3), 넷째,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단둘만의 시간이 지속되는 것입니다(4). 이와 같은 진정한 사랑은 순간 순간 서로를 향한 세심한 관심과 배려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완성될 것입니다. 성도는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너무도 부족한 자신을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적용: 당신은 어디에 속하기를 기뻐합니까? 주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나요?
인생이란 황금 그릇에 채워질 수도 있고, 질그릇에 담겨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황금 그릇에 담겨져 있다고 해서 더욱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며 질그릇에 담겨져 있다고 해서 보잘 것 없는 것도 아닙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 나는 이것을 담을 아름다운 그릇이 되리라'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삶의 매혹된 사람인 것입니다. - ‘흔들림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한 모습이다’중에서
< 설 교 >
남편을 사랑으로 초청하는 아내
아가서 7:10-13 / 이상호 목사
술람미의 고백입니다. 결혼의 위기를 극복한 남녀는 이제 성숙한 사랑의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본문입니다.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모하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속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모한다고 하시면 최고로 성숙한 사랑의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10절)
내가 그에게 속하면 그분의 사모함을 알게 됩니다. 여인은 확실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분의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은 그분의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하니 모든 것을 그분에게 드리겠다는 헌신의 고백입니다. 신부의 고백입니다. 나는 나의 신랑에게 속하였다는 고백으로 나는 오직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속했습니다. 그가 나를 사모하기 때문에 더욱 그 사랑에 포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그러나 짝사랑이 아닙니다. 그분도 나를 사모한다는 쌍방 고백입니다. 행복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성숙한 사랑입니다. 이 고백은 영적인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 나의 모든 보배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보다 더 성숙된 관계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기까지는 그분이 나를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탕자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 사랑을 몰랐습니다. 아버지를 떠나고 싶었습니다. 세상이 좋았습니다. 평생 먹여주는 아버지는 모르면서 한 끼 밥 사주는 친구가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돈이 떨어지니까 아무도 친구가 되어 주지 않았습니다. 누구나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닙니다. 돼지 기르는 곳에 취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돼지를 기르지 않습니다. 돼지는 식용으로 쓸 수 없는 가증한 동물입니다. 탕자가 돼지를 기르는 곳에서 일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이방인 속에 들어가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대하여 주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너무나 굶주려 주염열매를 먹었습니다. 돼지에게나 주는 쓰레기음식을 먹었습니다. 이때에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아버지를 먼저 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자기를 먼저 보고 달려와서 끌어안았습니다. 새 옷을 주었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금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돌아오니 아버지의 사랑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돌아가면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어떤 전라도 장로님의 고백입니다.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나 10년 동안 방황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무당이 와서 굿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굿을 시도하던 무당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예수 믿는 사람 있네요. 그 사람 때문에 굿이 되지 않습니다. 나가 주세요."
장로님은 둘러보았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예수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 정신없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장로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나는 주님을 10년 동안이나 버렸는데 주님은 아직도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그는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품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주님 안에 속한 것을 알면 주님이 나를 사모하고 계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술람미와 솔로몬은 이런 관계에 들어갔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숨었습니다. 죽어야 할 아담이 다급하여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은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내가 주님을 아는 것보다 주님은 나를 더 잘 아십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사이는 이제 완전히 하나가 된 성숙한 단계로 들어갔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11절)
이제 무르익은 사랑은 둘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 유숙하자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들로 가자는 말은 정말 들판으로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한 자연 속으로 들어가자는 말입니다. “신혼여행 가자."는 말이기도 합니다. 삶의 현장을 떠나 조용히 미래를 설계하자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들’은 원어로 보니 ‘거친 들’입니다. 광야입니다. 험준한 산입니다. 그 다음에 동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사람이 안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가자는 말입니다.
이제 둘만의 사랑의 단계를 넘어 백성들을 보살피자는 말입니다. 사명입니다. 일하자는 것입니다. 남보다 건강하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남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것도 축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동네는 ‘케파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벽이 없는 마을입니다. 위험한 마을입니다.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서민들입니다. 적이 오면 금방 점령당하는 위험한 곳으로 가자는 말입니다. 서민과 함께 하려는 마음입니다.
본문은 동네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는 동네들입니다. 복수형입니다. 한동네만 아닙니다. 여러 동네를 다니며 지내자는 것입니다. 이는 민정시찰입니다. 서민 사랑입니다. 정치를 잘 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제 부부간의 사랑을 백성들에 대한 사랑 차원으로 승화시킨 부부의 모습입니다.
옛날부터 부부애가 좋은 사람을 금슬이 좋다고 말합니다. 금琴은 거문고를 말합니다. 슬瑟은 비파를 말합니다. 거문고와 비파가 잘 어울려 연주되면 최상의 소리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 조화는 신비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잘 어울리면 거문고와 비파가 어울리는 것과 같은 신비한 소리가 나옵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에 “아내와 잘 합하는 것은 금슬을 고하는 것과 같다.”라는 말에서 금슬 좋은 부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은 이제 그런 가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들로 가는 부부, 성벽이 없는 동네로 가는 부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명의 부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12절)
그리고 우리만의 행복의 복음자리 포도원으로 가자고 이끌고 있습니다.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피고 있는지, 석류꽃이 피고 있는지 보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포도원에 대한 관심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가정 포도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정보다도 술집을 더 좋아하고, 아내보다도 거리여자를 더 좋아 한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밥은 먹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학교생활은 잘 하는지, 친구 관계는 어떠한지 관심을 기우려야 합니다. 부부간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는지 걱정스러운 일은 없는지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직분 자는 교회 포도원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시험받고 있는 일은 없는지, 이단의 유혹을 받지는 않는지, 기도 할 것은 무엇인지, 내가 지도하는 신자들이 말씀 안에 잘 성숙하고 있는지 일찍이 일어나서 살펴야 합니다. 일찍이 일어난다는 것은 부지런함을 말하며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포도원에 관심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환경 속에서 내 사랑을 흠뻑 모두 쏟아부어주겠다고 여인은 남자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초봄의 분위기입니다. 이런 꽃들이 필 때는 봄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사랑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의 휴식 내지는 사랑을 나누는 여행입니다. 부부끼리의 오붓한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런 때를 놓치지 말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나 때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때를 놓치지 말고 즐거운 시간을 갖자고 하고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부부의 모습입니다. 무엇이나 때가 있습니다. 조금 우물쭈물하다가는 꽃이 집니다. 아름다운 시기가 지나갑니다. 금방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면 꽃을 볼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생에 3번 정도의 좋은 기회가 온다고 합니다. 그 기회를 잡으면 모든 일이 순조롭습니다. 그러나 기회를 놓치면 그만입니다. 항상 기회가 찾아와주는 것은 아닙니다. 기회는 왔을 때 지체하지 말고 잡아야 합니다.
행복은 돈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올 때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백성들을 돌보면서도 부부가 즐기며 사랑을 성숙시킬 꽃피는 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중요하지만 저것도 필요합니다.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13절)
여인은 사랑의 진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합환채는 히브리어로 '두다임' dudaim이라고 부릅니다. 합환채에서 나는 향은 남녀 간에 성적인 흥분을 시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합환체는 지중해 연안 지방에 널리 서식하고 있는 다년생 식물로써 녹백색의 꽃이 피며 불그스름한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레아가 남편 야곱을 차지하기 위해 라헬에게 합환체를 주고 남편을 끌어들이는 것을 봅니다. 그만큼 합환체가 귀했던가봅니다. 레아가 합환채를 팔아 남편인 야곱과 동침하였습니다. 그래서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하게 되는 풀이 합환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인이 합환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진한 사랑을 같이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합환채 향기는 사과 향기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합환채는 '사랑의 사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고대 근동 이야기 가운데 여왕이 합환채를 왕의 코에 대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유혹입니다.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르익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가 있습니다. 새 것, 묵은 것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둔 열매입니다. 이미 경험한 사랑과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랑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남자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사랑을 찾아가려는 술람미 여인의 노력이 보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배려하여 준비하는 사랑입니다.
남편들도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서 준비하고 해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아내를 기쁘게 해주려면 아내에 대한 관심으로 작은 선물이라도 가끔 전달해야 합니다. 먹을 것도 사들고 와야 합니다. 외식하는 것도 아내는 좋아합니다. 밥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여자는 분위기를 좋아하고 식상한 분위기를 벗어나 색다른 곳에 적응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필요를 따라 주셨습니다. 자연도 가정도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며 이제 주님께 내 인색한 주머니를 열어야 하겠습니다. 피차 구체적인 관심과 준비된 사랑으로 더욱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아가 8:1-7 / 강준민 목사
들어가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사랑입니다.
1.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 싶은 불타는 열망입니다.
1) 건전한 소유의식은 관심이라는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2) 건전한 소유의식은 보호라는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3) 건전한 소유의식은 양육이라는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 나니" (에베소서 5:29)
4) 하나님은 건전한 소유의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애굽기 19: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19-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신명기 11:12)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시편 121:4-5)
2.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가서 8:6)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출애굽기 34:14)
나가는 말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안 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로마서 8:35)
사랑의 미로
아가서 7:10-13 / 석원태 목사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은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행복의 노다지입니다. 그 어떤 글이나, 그림으로나, 소리나, 말이나, 행동으로 그 사랑의 내용을 다 표현할 수 없는 언어 중에 하나가 사랑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말이 더 매력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온갖 좋은 꿈들을 심어 줍니다.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온갖 축복과 용서와 약속들을 심어 줍니다.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온갖 시와, 산문들과, 노래들을 심어 줍니다. 우리에게 들려 오는 세계적인 명곡과 명작들 그리고 명시들과 예술들은 예외없이 위대한 사랑의 영감의 산물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신령한 시와 노래들로 서로 화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노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노래의 보고(寶庫)가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자기 사랑의 최대 표현이요, 하나님 자기 사랑의 극치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가리켜 구약에는 아하바(האַ)라 일컬었는데, 이 말이 신약에는 아가페(ἀγάπη)로 불려졌습니다. 신약성경 중에 위대한 사랑의 장(章)이 고린도전서 13장이라면, 구약에는 바로 솔로몬의 아가(아 1:1) 곧, 노래 중의 노래입니다.
이 위대한 사랑찬가인 아가서는 꽃이 피는 봄날에 엮어졌습니다. 이 노래 속에 숨어 있는 풍부한 비유들은 동양적인 색채가 짙은 것들입니다. 그 속에 나타나고 있는 자연, 공원, 목장, 포도원, 양의 무리들 그리고 기화요초(琪花瑤草)들은 이 사랑노래의 정서를 멋있게 북돋아주고 있습니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솔로몬과, 그의 짝인 술람미 여인 그리고 예루살렘 여자들과, 술람미 여인의 고향 어미의 아들들이 나옵니다.
이 책의 영감의 목적은 틀림없이 장차 나타나실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와 관계를 맺은 신부인 그리스도인과의 사랑 관계를 나타내는 예표론적 노래입니다. 솔로몬 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짝인 술람미 여인은 신약의 성도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신랑 솔로몬이 신부가 된 술람미 여인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다음에, 나타난 술람미 여인의 사랑 화답입니다. 그 화답 내용의 중심은 ‘함께하는 사랑의 미로’입니다.
당신의 것이 된 나와 함께 들로 나가가면 거기에 있는 포도동산에서 내가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주겠다고 하는(아 7:10-13), 사랑의 미래를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말하자면 ‘함께하는 사랑의 미로(未路)’입니다.
Ⅰ. 주(主) 안에 함께 된 나는,
아가서 7장 10절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술람미 여인이 자신의 현재 상태를 표현하며 자기 신분의 소속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술람미 여인 자신은 혼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미 솔로몬에게 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고백을 이미 오래 전부터 해왔습니다(아 2:16, 6:3). 그는 이미 솔로몬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행복의 고백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교회)은 예수의 사람이요, 예수에게 소속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버린 자들입니다(롬 14:8).
그녀는 솔로몬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라고 함으로 위대한 사랑의 입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술람미 여인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녀가 솔로몬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여기에서 자기 존재의 보람을 느낀 것입니다. 바로 오늘 그리스도인된 우리 모두가 함께 감지하는 예수 사랑 체험의 행복입니다.
Ⅱ. 함께 주의 포도동산으로 가서
이제 술람미의 여인은 솔로몬에게 사랑의 야유(野遊;들놀이)를 청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아 7:11-12a)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전에는 신랑에게 끌려 다녔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찾아오고, 부르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술람미 여인편에서 신랑에게 동행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고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함께)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자고 제의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아마 궁실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동네는 옛날 그녀가 살고 있던 수넴의 농촌 마을을 두고 한 말인지 모릅니다. 거기에는 그녀가 돌보던 포도원이 있었습니다(아 1:6).
그녀는 들녘에 있는 포도원의 봄소식을 알고 싶었습니다. 포도원에 움이 솟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곳에서 꽃술이 퍼진 웃음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곳에서 석류꽃이 피어 있는 웃음을 보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생명이 풍성한 들녘의 포도원으로 사랑의 야유(野遊)를 떠나자고 한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산, 움직이는 동산, 성장의 동산, 생명의 동산, 혼이 넘치는 동산으로 함께 나가보자는 사랑의 미로(未路)를 제의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들녘 동네 가운데 자리잡은 포도동산은 이 세상에 자리잡은 주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에 예외없이 포도동산은 이스라엘을 상징했고, 주님의 교회를 상징했습니다.
중대한 내용은 그 포도동산이 살아 있는 동산인가, 죽은 동산인가에 있습니다. 포도원에 포도움이 돋았는가? 꽃술이 퍼졌는가? 석류꽃이 피어 있는가? 함입니다. 말하자면 부활 생명의 동산인가? 봄동산인가? 향기가 있는 동산인가? 벌과 나비과 모여드는 동산인가?
말하자면 생혼(生魂)이 넘치는 동산인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가 이루어지는 교회인가? 깨어 기도하고 있는 교회인가? 선한 일에 열심하는 교회인가? 전도와 구제와 선교로 구원받을 무리들이 날마다 움처럼, 꽃술처럼 피어나고 모여들고 있는가?
술람미 여인이 제의한 사랑의 미로(未路)는 결코 불확실하거나, 불분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제의한 사랑 여로의 목적지가 확실합니다. 들녘의 동리 그리고 그 곳에 있는 포도동산이었습니다. 그곳은 죽은 동산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의 동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이 넘치는 동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장을 볼 수 있는 동산이라고 하였습니다. 결코 잠잠히 말이 없는 싸늘한 시체들의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움직임과 창조와 생산이 넘치는 동산이 저들이 떠나야 할 사랑의 미로(未路)라고 하였습니다.
Ⅲ. 함께 사랑을 나누자
아가서 7장 12절 하반절에서 13절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인의 사랑 성장은 이제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 있음을 봅니다. 그녀는 들녘 동네 가운데 있는 포도원에서 ‘자기 사랑’을 솔로몬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서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거기 포도동산, 곧 생명의 봄이 완연해져버린 곳에서 자기 사랑을 솔로몬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거기는 사랑의 심볼(symbol)인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있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티 루터는 이것은 ‘사랑의 사과’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화란어도 이 번역을 따르고 있습니다.
저들이 유숙하는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의 묵은 것과 새것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위하여 쌓아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사랑에는 모든 것이 함께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움돋은 포도나무, 퍼진 꽃술, 피어버린 석류꽃들, 향기를 토하는 합환채, 풍족하게 예비된 여러 맛난 과실들…. 거기서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랑의 성장입니다. 이제는 신부를 취한 신랑이 아니라 신랑을 취한 신부가 되었습니다. 신부에게 드리는 신랑이 아니라, 신랑에게 드리는 신부로 성장하였습니다. 전에는 받으려는 처녀, 받으려고 애쓰는 처녀였으나, 이제는 신랑에게 드리는 신부, 바치는 신부로 변한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과 함께 사랑을 나눌 들녘 가운데 동네 그리고 포도원! 그것은 그녀가 어미의 아들들의 포도원을 연상하고 한 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들녘 가운데 있는 동네의 어느 집 그리고 포도원은 사실상 솔로몬의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은 그 어느 하나라도 솔로몬에게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솔로몬에게 받은 그것으로 솔로몬을 섬기고 사랑한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주께 드릴 수 있는 온갖 사랑의 고백은, 본래 내 것이 아니고 모두가 주께 받은 것으로 드리는 것을 알려 줍니다. 주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온갖 생명의 은총들을 가지고, 주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몰랐습니다. 미움밖에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를 통하여 사랑하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요일 4:8-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들녘, 동리 가운데 있는 포도동산! 그곳은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이 사랑을 함께 누릴 미로(未路)였습니다. 그곳은 쓸쓸한 사막이 아니라 화창한 봄날의 동산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죽어 버리고 덮여 버린 사막이 아니라, 모든 것이 움돋고 꽃피는 부활의 동산이었습니다. 사랑의 심볼인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각종 묵은 과실, 새 과실이 준비되어 사랑의 흥을 북돋아주는 동산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사랑을 받은 그녀는 이곳으로 사랑의 여행을 떠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미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의 미로(未路)를 내다 본 것이 아닌가?
사랑하는 경향교회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들녘 동리 가운데 포도동산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지금 그 동산의 아름다움의 마무리 작업으로 한창 분주합니다.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학교법인 경향학원의 동산입니다. 주님은 거기에서 신령한 포도동산을 우리에게 허락하였습니다. 지금 거기에는 우리가 주께 드린 사랑 고백의 결과로, 아름다운 새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만천여 평에 가까운 큰 공간입니다. 넓고 넓은 주차공간이 지하 2층으로 완비되어 성전으로 직결되고 있습니다. 400여 평에 이르는 최신 체육 공간이 완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제1, 2, 3성전의 공간이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500여 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식탁 공간과 아래층까지 햇빛이 들어가는 100여 평의 선컨(sunken) 공간과 또다른 작은 선컨 공간이 마련되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교육기관들과 집무실(사역실)들이 완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학원내 경복여자고등학교와 경복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와 새 예배당은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학교의 큰운동장을 중심으로 새롭게 설계되어 꾸며진 새공간의 정원들에는 벌써 우리 앞에 봄을 싣고 왔습니다. 새성전의 도로편에는 50미터가 넘는 십자가의 높은 탑이 경향의 깃발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새 포도동산은 최고도의 설계와 건축공학의 산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교회사적인 건물은 확실히 주께 받은 것으로 드린 여러분의 사랑고백의 결과입니다. 바로 이곳이 오늘 서울이라고 하는 들녘 가운데, 강서라고 하는 동리에 세운 경향의 포도원, 아니 주님의 포도원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그 길, 그곳으로 떠나려고 합니다. 정말 멋진 사랑의 미로(未路)가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거기 경향의 새동산에서 “주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사랑의 고백을 하려 합니다. 우리 경향인 모두는 거기서, 우리에게 있는 사랑을 주께 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이 포도나무의 움이 되고, 꽃술이 되며, 피어난 석류꽃이 되고, 합환채가 되고, 과일들이 되어서 우리가 받은 삶의 전부를 주 사랑의 이름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거기서 주를 향한 새 사랑의 출발, 새 사랑의 약속, 새 사랑의 고백을 하려 합니다. 정말 복스러운 사랑의 미로(未路)가 아닙니까?
나 혼자 따로 가면 안됩니다. 둘만이 가서도 안됩니다.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이 없는 사랑의 미로란 아무런 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과 함께 사랑의 미로(未路)를 떠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사이에 널리 펴져 내려왔던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밤늦게 연인의 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때 방안에 있는 처녀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하기를 “나입니다(It's me.).”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방안에서 처녀가 대답하는 말은 “이 방은 너무 좁아요. 한 사람밖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돌아 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실망한 그 청년은 슬픔을 잊기 위해 세상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사랑에 대한 큰 이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다시 그 연인의 집에 찾아가 전처럼 문을 두드렸습니다.
방안에서 처녀는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옛날에 했던 그 질문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청년은 “당신입니다(It's you.).”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문은 곧 열렸고, 그 청년은 그 사랑하는 자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아니고, 당신 자신이었을 때 문이 열렸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사이에는 나와 당신이 아니고, 오직 당신일 뿐이란 말입니다. ‘그와 나도 아니고 오직 당신뿐’이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의 미로(未路)는 내가 아니고 오직 당신(主=κυριος)일 뿐입니다. 들녘에 있는 동네의 포도동산은 내 동산이 아니고, 당신(主)의 동산입니다. “당신의 동산에서 내가 당신께 받은 사랑을 바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복된 사랑의 미로(未路)입니다.
그렇다면 경향인이 받은 사랑의 미로(未路)에는 불안이라든가, 공포라든가, 불만이라든가, 의심이라든가, 절망, 무상, 허무 따위는 자리잡을 시간도 장소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4반세기만의 사랑의 미로(未路)는 확실하고, 빛나고, 영광스럽습니다. 우리 모두 주와 함께 서울 들녘 가운데, 강서 동네에 주님의 세워주신 포도동산에서 움과 꽃과 향기와 열매의 사랑을 주께 바쳐봅시다. 거기서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 아 멘 -
여행 중 애가
아 7:10-13 / 창녕감리교회
신부가 신랑과 함께 촌으로 여행하며 모든 과수의 자라는 것을 구경하였으니 때는 봄이다.
본문은 전원의 풍경을 묘사한 시문이다. 신부는 신랑에게 전원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다. 도시가 악마의 세계라면 전원은 천사의 세계이다. 전원을 중심한 새집(新家)은 하늘의 천사가 부러워한다고 한다. 신부는 원래 자연미가 풍부한 술람미 전원의 출신이다. 그는 향기로운 전원을 그리워하였다. 저는 애인과 동반하지 않으면 혼자는 갈 수 없는 것이다. 저가 갈 곳은 포도원이다. ① [포도움이 돋았는지]
저는 포도를 생각했다. 포도는 주의 보혈의 모형이니 우리는 도시를 떠나서 농촌으로 돌아가서 보혈로 이루어진 복음을 전하여 거기서 싹이 나고 움돋고 꽃이 피게 하는 재미는 실로 아름답다. ② [석류꽃이
피었는지] 석류는 구원의 모형이니 우리의 받은 바 구원을 저 산간벽지(山間僻地)에서 사단의 포로가 된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포도의 일이다. ③ 합환채는 사랑을 조발케하는 향초이다. 우리의 합환채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랑에 굶주린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④ 새것과 묵은 것은 말씀의 모형이니 천국의 서기관되는 교역자는 신구약 곡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내어 주린 영혼에게 배급해줄 의무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애인인 그리스도와 같이 전원으로 돌아가서 대자연의 하나님의 품속에서 친가정(親家庭), 곧 지상낙원(地上樂園)을 건설하는 것이 우리 기독자에게 부가 된 사명이다.
1. 신랑 심부의 관계
1) 사랑하는 이(10) ― "사랑"은 아가서에 65번 나온다. 구약에 255회, 신약에 326회 나온다.
영해는, 예수는 우리를 사랑하여 희생하셨다. 우리도 예수를 이렇게 사랑해야 한다.
2) 속함(10) ― 신부는 신랑에게 속했다(창3:6). 3회나 말한다(2:6, 6:3).
영해는, 서도는 주님께 속하였으니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한다(요15:5).
3) 사모함(10) ― 술람미는 솔로몬이 자신을 '사모'한다고 철저한 태도를 나타낸다.
영해는, 성도는 예수님의 '사모'함이 되며, 또 '사모'함이 된 것을 철저히 증거하여야 한다.
2. 여행을 하는 동기
1) 합환채가 향기를 토해서(13) ― "합환채"는 키는 매우 짧고 뿌리는 인삼 같고 맛은 달고 냄새가 있으나 그 성질이 독하여 식료품으로는 사용치 못하고 약으로 사용하는데, 봄에 나서 가을에 익기 때문에 춘약(春藥)이라고 칭하였다. 유대 풍속에 여자가 이 실과를 먹으면 성태(成胎)한다는 말이 있다(창30;4). 이 실과를 애정의 표로 사용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폐백드릴 때 대추를 꿰어준다.
영해는, 성도가 주님을 사랑하는 애정이 끓어오를 때 산중에 찾아간다.
"향기를 토하고"는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애정을 나타내겠다 함이다.
영해는, 진실한 신자는 그리스도에게 향기롭다(호14:16).
2) 문 앞에 사랑하는 자 위해 신구(新舊)의 실과를 쌓아 두어서(13) ― 술람미는 솔로몬을 대접하기 위해 벌써 식물을 풍부히 준비하고 여행을 원했다.
영해는, 성도는 선행(先行)미덕(美德)을 쌓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여행의 목적
1) 동리에서 유숙하기 위해(11) ― 왕궁을 떠나서 조용한 수넴 촌으로 가서 자연의 품에서 즐기자는말이다.
영해는, 성도를 일시 동안 속세를 떠나 산아나 들이나 강가에서 주님과 교제하며 말씀을 상고하는 것으리 의미한다. 모세가 시내산으로(출19:20), 룻은 소돔을 떠나 아이라는 성으로(창13:3), 바울은 아라비아 광야로(갈1:17), 빌립은 가사로(행8:26) 갔다.
2) 자연을 보기 위해(11) ― "일찌기 일어나서"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자들의 특성이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러하셨다(막1:35).
영해는, 성도는 일찍이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 "포도움 꽃술 석류꽃"은 술람미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을 구하는 소원이 불타오른다.
영해는, 성도는 자연으로 돌아 갈때(회개하여 범죄 전 아담의 상태)에 열매를 맺는다.
3) 사랑을 주기 위해(12) ― 술람미는 솔로몬에게 사랑의 절정(絶頂)을 보이려고 약속한다.
영해는, 성도는 한적한 곳에서 주와 열열히 사랑하게 된다(요14:23).
보다 더 성숙해진 신부가 준비해 놓은 사랑의 증표
아 7:10-13 /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1. 들어가며
아가서에는 신앙과 관련된 말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가장 신앙적인 책이 바로 이 아가서다. 왜냐하면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관계 곧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으로만 보아서는 이 책이 무슨 연애 이야기인가 하고 판단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이 책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상당히 내공이 필요하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거듭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겉으로 보기에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주인공이지만 내면에서는 첫사람 아담과 하와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는 여호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등장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장차 도래할 천국에서 혼인 예식을 치르게 될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성도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오늘 이야기는 점점 더 성숙해 가고 있는 신부감에 관한 이야기다. 대체 술람미 여인에게 있어서 성숙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이 그녀가 솔로몬을 데리고 갔던 포도원과 합환채 그리고 새것과 옛것으로 마련된 그녀의 집과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인가?
2. 솔로몬은 왜 그녀를 성숙한 여인이라고 칭찬하였는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항상 좋은 관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때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놓쳐 버린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한다. 놓쳐 버린 신랑을 다시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신랑을 찾게 된 데에는 3가지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끈질긴 기도와 진심 어린 회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높여 드림으로 가능했다. 그 뒤 그녀와 솔로몬은 더욱더 가까워졌다. 신랑은 그녀를 아주 칭찬해 주었다. 그녀를 부르는 명칭에 있어서도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라고 했다(아6:4,9). 그리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라고까지 칭찬해 주었다(아6:4,9). 솔로몬은 그녀야말로 진정 신랑을 기쁘게 하는 가장 귀한 존재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때는 그녀가 자신의 부주의와 무관심으로 인하여 신랑을 놓쳐 버린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에게 닥친 위기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해 내었을 뿐만 아니라, 신랑이 기뻐하는 일까지 준행하는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성장해갔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아가서 6~7장이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술람미 여인이 어떻게 되어서 더 성숙한 여인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는지가 나온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녀도 솔로몬처럼 양 떼를 낳고 양육하는 자가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의 과정은 솔로몬은 그녀의 유방에 대해서 말하는 대목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왜냐하면 그녀의 유방에 대해 예루살렘의 딸들은 두 개의 암사슴의 쌍둥이 새끼 같다고 말했었다(아7:3). 이것은 그녀의 성숙도를 말해 주는 표상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성장하였고 나중에는 솔로몬은 그녀를 먼저는 종려나무의 열매송이와 같다고 하였고(아7:7), 포도송이 같다고도 하였다(아7:8). 이것은 엄청난 성장이다. 왜냐하면 둘만을 산출하여 먹이던 신부의 삶에서 이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부들을 산출하고 양육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술람미 여인은 왜 신랑을 데리고 포도원으로 가자고 했는가?
그러던 어느 날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데리고 자기가 가꾸어 놓은 포도밭으로 데려간다. 그에게 보여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게 보여준 것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때 그녀는 남편에게 말하기를 들(야생의 들판)로 가서 어떤 동네에서 유숙하자고 말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얼핏 보면 여자는 시선들이 많은 예루살렘 궁을 벗어나 시골의 한적한 곳으로 외박을 하고 거기서 둘이 서로 사랑을 나누자는 제안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진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책은 결코 청춘 남녀의 에로티시즘을 묘사하기 위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부의 초청 장소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히브리어 원문에 대한 바른 분석이 필요하다. 왜냐햐면 아가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를 부르기 위한 시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번역본만으로는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동네'라는 말에서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동네'로 가서 유숙하자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성경을 낸 허성갑 목사는 '고페르 나무 숲'이라고 번역했다. 히브리어 성경 원문을 따라 번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는 말씀은 아직 포도원을 개척하지 않은 야생의 들로 가서 거기에서도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전하여 그곳에 하나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코페르'나무는 아가서 1:14에 나오는 적갈색의 '고벨화'나무의 히브리어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벨화'는 '코페르'라는 단어로서 그 뜻이 '속죄, 덮음, 속전'이라는 뜻을 지녔으며, 그 나무도 흰 색 바탕에 빨간색을 두르고 있는 꽃잎을 가지고 있어서 죄 없이 순결하신 예수께서 보혈의 피를 흘려 죽으실 것을 예표하는 나무다.
4. 그녀가 포도원에서 남편에게 드린다고 했던 '내 사랑'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게 야생의 코페르나무 숲으로 가자고 한 말은 그에게 '그녀의 사랑'을 드리고 싶어서였다(아7:12). 즉 그동안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 놓았는지를 신랑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남편에게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는 말과 이어서 그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포도원으로 가보자는 말은 그녀가 일구어 놓은 포도밭과 그리고 그동안 수고하여 얻은 결과들을 신랑에게 보여줌으로 그녀가 신랑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지를 대신하겠다는 말이었다. 이는 새로운 개척지에 또다른 신부를 낳고 그들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지를 밤을 새워 이야기해 보자는 말이었다. 또한 아침 일찍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나무에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피었는지, 석류나무의 꽃이 피었는지를 보자는 말은 그녀가 어떻게 포도원을 가꾸어 놓았고 그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같이 보자는 말이었다. 이는 그녀가 신랑을 되찾았을 때 신랑이 하고 있었던 일이 어떤 일인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며, 남편의 뒤를 이어 포도원을 가꾸어 열매를 산출하는 일이 신랑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었음을 알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을 보면, 그녀는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있고, 이미 그녀가 거둬 놓은 새 열매들과 묵은 열매들이 있는데 그것은 신랑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아7:13). 이는 그녀가 얼마나 신랑을 사랑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5. 신부의 성숙도는 무엇으로 측량할 수 있는가?
고로 우리는 신부의 성숙도는 열매로 평가한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지금도 또 다른 사람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고 자라서 거룩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열매가 없는 삶이었다면 그것은 진실하고도 참된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8-20)" 그렇다. 성숙의 척도는 열매인 것이다. 지금도 맺고 있으며 이미 맺은 것도 있고 앞으로 맺을 열매를 위해 오늘도 씨를 뿌리는 것이다. 이미 자라고 있는 것도 있고 이미 거둬 놓은 것도 있고 앞으로 씨를 뿌리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님은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5-6)" 그렇다.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해야 한다. 그분의 말씀이 나를 주장하게 해야 하며, 그분이 함께 하심으로 나에게도 그분의 열매가 맺히고 있어야 한다. 성품의 열매, 말의 열매, 기도의 열매, 전도의 열매, 영혼의 열매 등을 맺어야 하는 것이다.
6. 나오며
아가서의 말씀 중에서 6~7장의 말씀은 신부가 얼마나 성숙해졌는지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와 같은 말씀이다. 우리 중에 많은 이들이 자기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우리의 입술의 고백만을 가지고서 주님께서 그것을 우리의 사랑이라고 받아 주시는 것일까?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게 드렸던 것은 입술의 고백이었는가 아니면 열매였는가? 술람미 여인은 그것을 신랑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했다(아7:12). 그런데 그녀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솔로몬을 포도밭으로 데려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가꾸어 놓은 포도밭은 이미 포도나무와 석류나무가 꽃이 피고 있었다. 그런데 두 나무들은 아주 많은 열매들을 산출하는 나무들이다. 그녀가 그만큼 더 많은 신부들을 산출하여 양육하고 있다는 표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집에 새것과 묵은 것들도 저장되어 있다고 말했다. 모두가 다 신랑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들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신랑에 대한 신부의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던 야고보의 말처럼(약2:26), 우리는 우리 앞에 과연 어떤 열매가 놓여 있는지, 지금도 일구고 있는 새로운 땅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것이 없었다거나 혹은 작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우리의 말로 우리를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우리의 열매로써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