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산의 愛民사상-남원 목민관들을 적셨다.
(남원시 공직자들을 위한 박석무 이사장의 거침없는 특강 소감)
남원발전연구포럼 감사 서호련
2015년 3월 2일, 남원시 공직자를 위한 박석무 이사장의 특별강좌가 오전 9시 20분 남원시청 대강당에서 1천 여 명의 수강자를 대상으로 개최되었다.
모두에 박이사장은 한국최초의 문화도시, 인재의 고장- 유서 깊은 남원에서 이러한 자리를 갖게 된 것에 개인적으로 크게 영광스럽다는 인사와 함께, 먼저 이곳에서 강좌를 갖게 된 연유를 잠간 피력했다.
“ 서울에서 거주를 하고 있는 사람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런 남원 같은 곳에 오기란, 더군다나 하루 전에 내려와서 일박을 하고 이른 아침에 강의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평소에 남원의 문화발전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고 계시고 많은 칼럼을 쓰고 계시는 저의 학교 선배 서호련 주교님의 여러 차례에 걸친 부탁으로 불원천리하고 이곳 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다산학 전문가인 박 이사장은 제13·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5·18 기념재단 이사장,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및 이사장 등을 거쳐 현재 다산연구소 이사장과 성균관대 석좌교수, 실학박물관 석좌교수 등을 겸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8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지금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서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한 정재원(丁載遠)의 5남 3녀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 1730~1792)으로 압해 정씨이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海南尹氏, 1728~1770)이다.
어머니 해남윤씨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인데 학자이자 3재화가로 유명했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으니, 공재는 바로 다산의 외증조부가 된다. 친가인 나주정씨는 기호남인계의 명문집안으로 다산의 선조들에는 연달아 8대에 걸쳐 홍문관 벼슬을 역임하여 ‘8대 옥당집안’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듣던 가문이었고, 해남 윤씨인 다산의 외가는 호남의 대표적인 남인계 집안으로 학문과 벼슬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넉넉한 살림으로 호남부호라는 이름을 듣던 명가였다.
33세에 경기북부 암행어사로 나아가 백성들의 참혹상을 목격하고, 권세를 휘둘러 민폐를 끼친 관리들을 처벌하도록 정조에게 보고했다.
다산연구소 이사장 (72) 은 먼저 전라도에 관해서 운을 떼었다. “지금이니까 전라남도, 전라북도로 나뉘어 있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전라남북도를 가리켜 전라도라고 했다. 북도는 전주 남원으로 , 남도는 광주 나주로 대표 되고 있지만 전라도란 전주 와 나주를 합성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서울과 남도에서는 비교적 나의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도 서소문에 유명한 식당이 하나 있는데, 그곳엘 가면 주인이 직접 안내하면서 서비스를 많이 베푼다. 주인장께 이러시면 안 되는데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더니, ” 아니예요. 제 고향도 남원인데요.“ 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 예상외로 서울에도 남원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 같다.
( 전날 저녁에 남원에 도착하여 관광단지 내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데 이외에도 식당에서 일하는 여인네들이 박 이사장을 알아보고 이구동성으로 전두환 청문회 스타였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또 다음날 강의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갈 때에도 고속버스터미널 직원들이, 다산 박사인줄은 모르고 청문회 때 활약했던 유명한 국회의원이라면서 알은 체를 했다.)
3월 2일 남원시청 대강당에는 청렴한 공직자의 자세를 다시금 정립하고자 하는 직원들로 붐볐다.
이번 특강은 다산 학의 1인자로 유명한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지난 2일 오전 9시부터 1천
여 명의 남원시 공직자와 남원발전연구포럼 회원 그리고 시민원로들 앞에서 인상적인 강의를 펼쳤다
. 청렴특강에 앞서 이환주 남원시장은 직원들에게 바른 공직자 상을 정립해주고자 '다산사상에 나
타난 공직윤리' 청렴특강을 실시해 바른 목민관의 정신을 일깨워 주려고 다산 연구소 박석무 이사
장을 초청했다는 인사말을 했다.
민본(民本)사상을 기본으로 한 가장 이상적인 관료였던 다산 정약용이 생각한 '民의 개념과 백성들
에 대한 두려움, 공직자의 청렴정신에 대한 박 이사장의 논리 정연한 특강이 이제 막 발을 들인 신규
공무원들 뿐 아니라 30년 이상 공직생활에 몸 담아온 직원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박 이사장에 의하면 다산에게 있어, 백성은 지극히 천하여 호소할 데도 없는 사람들인 동시에 산처
럼 높고 무거운 힘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공직자라면 아래로는 백성을, 위로는 감독관청
을, 또 그 위로는 정부를, 가장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청렴하지 않은 자는
아예 공직에 들어서지 말라.” 고 조언했다. “재물에 청렴하고, 여색에 청렴하고, 직위에 청렴하면
문제 생길 곳이 없다. 청렴하며 는 백성이 존경하고 상관이 가벼이 여기지 않고, 사물이 실상을 감
추지 못한다.“ 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 행정의 중심이자 뿌리인 공무원은 특별한 사명감과 높은 도덕성, 그리고 하
늘 같은 자부심을 가지고 공직에 임해야 한다. 공무원들이 다산 정약용과 목민심서에 대해 어렴풋
하게는 알고 있으나 막상 다산의 저서를 읽어본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면서, 여러분 가운데 다
상의 목민심서를 읽어 본 분이 계시면 손을 한번 들으시라고 주문했다. 손을 든 사람이 아무도 없
자, “ 그러면 그렇지 , 읽은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고 조크를 하여 모두를 웃기기도 했다.
御使詩 와 남원 공무원
이사장은 먼저 남원의 상징인, 춘향전 이몽룡의 御使詩를 화두로 끄집어 냈다. 천하에 명품시가 이 어사시 이다. 춘향이가 사또의 생일날 불려나와 목숨이 경각에 달린 때에 남루한 걸인차림의 선비하나가 잔치자리에 등장하여 먹을 것을 청하였다. 걸인이 무슨 시를 짓겠는가고, 시한수를 지으면 음식을 내주겠다고 하면서 문제를 내주었다. 지필묵을 청한 걸인은 일필휘지로 시 한수를 지은 뒤, 옆자리에 있는 운봉현감의 옆구리를 찌르며 이 시를 던져주고 자리를 떴다. 이 시를 읽어가는 운봉현감은 사시나무 떨듯 온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매어둔 말을 타고 도망쳤던 것이다. 그 안에 무슨 말이 적혀 있기래 운봉현감이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도망쳤을까? 이 시가 다음과 같은 이몽룡의 어사시(御使詩)이다.
금준미주 천인혈이요( 金樽美酒 千人血)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인의 피요
옥반가효 만성고라 (玉盤佳肴 萬姓膏)
옥쟁반의 맛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촉루락시에 민루락이요 (燭淚落時 民漏落)
촛대 흐르는 촛물은 백성들의 눈물이요
가성고처에 원성고라 (歌聲高處 怨聲高)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망소리 높다
운봉현감의 뇌리에 뇌성벽력 같은 철퇴가 아니었겠는가?
어사시는 우리 남원의 공직자에게 내린 하늘의 선물이요 선생이다. 날마다 이 시를 뇌이며 산다면 여러분에게 다산사상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혹시 술을 마실 때, 내가 마시는 술이 백성의 피와 같은 세금이 아닌지? 내가 먹는 맛있는 안주가 백성의 고혈은 아닌지? 분에 넘치는 나의 생활이 백성의 눈물로 된 것이 아닌지? 노래방에서 외쳐 부르는 나의 노래가 울부짖는 백성의 원성은 아닌지? 를 생각 해 보아야 한다.
조선조의 어사가 누구인가? 공직자로서 최고의 영예와 권력을 가진 암행어사 는 삼권을 한 손에 쥐고 왕을 대신하여 왕명을 집행하는 공권력의 상징이다. 어사는 생사의 여탈 권을 가졌다. 때문에 산천천하가 그 앞에서 떤 것이다. 사나이로서 어찌 한번 해 보고 싶은 자리가 아닌가? 그러나 어사는 왕의 신임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는 그의 복심 중에서 임명되었다. 당시에 다산이 정조 왕에 의하여 암행어사로 임명받고, 33세에 경기북부 암행어사로 나아가 백성들의 참혹상을 목격하고, 권세를 휘둘러 민폐를 끼친 관리들을 처벌하도록 정조에게 보고한 것을 시작으로 다산은 어사가 된 후 가는 곳 마다 털끝만한 부정이나 부조리를 지은 관리들을 가차 없이 처단했다. 남원의 공직자들도 일단 국가의 공무원이 된 이상, 먹고 살만하면, 그이상 욕심 부리지 말고 이러한 암행어사의 사명과 자부심을 가지고 시민을 섬긴다면 그는 공직자로서 성공 할 것이다. 큰 일 을 할 사람은 작은 것에 욕심을 내서는 안된다. (후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