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 지만원 박사(육사 22기졸업)
서울지방검찰청은 1994. 10. 29. 정승화 등의 고소사건을 포함한 8건의 고소·고발사건에 관하여 모 두 불기소처분을 하였다.
‘반란죄’에 대하여는 혐의사실은 인정되나 여러 정상을 참작하여 기소유예처분을 내렸다. 검찰은 12.12사건에 대하여 기소하는 경우에 재판과정에서 과거사가 반복 거론되고 법정논쟁이 계속리어 국 론분열과 대립양상을 재현함으로써 불필요하게 국력을 소모할 우려가 있고 이런 난맥상은 결국 장래 적으로 국가 안정을 저해하고 자칫하면 국가 발전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음을 고려하여,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맡기고 사법적 판단은 검찰의 기소유예 결정으로 마무리 지 은 것이다.
‘내란죄’에 대하여는 공소권없음 불기소결정을 내렸다. “12·12사건으로 신군부는 군 주도권을 장 악하였을 뿐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 헌법기관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었다”는 것 이 그 이유였다.
정승화 등은 찰의 처분에 불복하여 항고 및 재항고를 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자 1994.11.24. 불기소처 분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였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재직기간 동안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가 정지되는지 여부를 판단한 다음 내란죄에 관한 부분은 공소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각하하 고, 나머지 죄에 관한 부분은 적법성은 인정되나 검찰의 불기소처분이 자의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 각했다.
1989.12.15. “1노3김”이 ‘5공청산대타협’에 의해 김영삼은 “내년부터는 5공청산이라는 4 글자 는 안 쓰는 것이 좋겠다고 공언했다. 그 후 김영삼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역사평 가는 후대에 맡겨야 한다“ 등 5공에 관한 보복을 하지 않을 방침을 피력해 왔었다.
당시 여론은 이런 결론들을 별 무리 없이 수용하고 있었다. 이로써 민주화세력에 의한 역사뒤집기 노 력은 일단 서리를 맞는 듯 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이변이 발생했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 의원 이 2,300억 원 대에 이르는 노태우의 비자금을 폭로한 것이다. 국민은 충격과 배신감에 노태우 뿐만 아니라 군사정권 전체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역사를 뒤집기하려는 소위 민주 화세력에게 절호의 찬스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국민적 분노가 열화와 같이 일자 1995년 10월 27일, 노태우는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조기 진 화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뜻밖의 변수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다. 1995년10월25일부 터 중국 ‘조어대’(영빈관)에 1주일간 가있던 김대중이 동행했던 참모들과 한마디 의논도 없이 그 가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가 그런 폭로를 한 것은 더 큰 것을 예방하기 위 해 던지는 작은 미끼와 같은 것이었다. 만일 검찰이 노태우 비자금의 향방을 추적하게 되면 그가 노 태우로부터 받은 비자금 전모가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노루가 제 방귀 에 놀란 격이었다. 여기에는 김영삼을 향한 비수도 꽂혀있었다. 당시 민정당에 들어가 노태우 밑에 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노태우로부터 더 큰 규모의 비자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조사하면 김대중 혼자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김영삼이 더 많이 다칠 것이니 알아서 막으라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김대중의 이 의도는 적중했다. 김대중의 폭로로 당황한 쪽은 정부·여당이었다. 여당은 김대중의 정 치자금 수수를 비난하며 ‘20억+a’ 설까지 제기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김영삼에 지향된 검은 돈 의 혹을 막을 수 없었다. 대다수 국민은 노태우로부터 검은 돈을 받았다면 김대중보다는 김영삼이 더 많 이 받았을 것이라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김영삼은 특유의 승부수를 띄워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김영삼은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을 존중한다던 종전의 입장을 갑자기 바꿔 5·18 특별법 제정 을 선언하면서 전광석화의 속도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켰다. 노태우는 1995.12.5.에 구속수감 시켰고, 전두환은 며칠 후인 12월13일에 그의 고향인 합천에서 검거하여 안양교도소에 수감시켰다. 김영삼은 결국 그를 향해 집중돼 있는 검은돈의 의혹을 피해가기 위해 노태우와 전두환을 희생양으 로 삼은 것이다. 관심을 돌린 것이다.
여론의 지지와 야당의 전폭적인 협조로 1995.12.19. 3당합의에 의해 5·18 특별법이 전격적으로 국회 를 통과했다. 그렇게 해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통령들인 전두환, 노태우를 법정에 세우고, 재 벌 총수들의 줄 소환이 이어졌다.
뉴라이트 계통이 발간하는 ‘시대정신’ 2007년 겨을호(통권37호)에서 김영삼은 5공청산의 정당성을 이렇게 진술했다. “솔직히 전두환 노태우를 그렇게까지 감옥에 보내려고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노태우 비자금 내용을 보고 있으니 기가 차는 겁니다. 내가 판단하기는 이 천문학적인 돈을 도둑질 해서 갖고 있는 사람을, 또 광주에서 민간인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해주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래서 빨리 잡아들이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명분일 뿐, 필자는 그의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2008.2.9.
출처: 육사 총동창회/http://www.kmaaa.or.kr/
|
첫댓글 비굴한 인간 김영삼
그러니까 IMF 왔지요
역대 대통령중에 제일 못난 인간이 03인거 다 아시죠. 그는 민주투사로 남아 있어야 할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대통령 물려준 노통 정말 한심하고 원망 스럽네요
개성공단 사건만 보아도 아기들 장난 세계적으로 이런나라가 어디있는지 아직도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을 신봉하는자가 있느니ㅉㅉㅉㅉㅉㅉ 북 좋아하는분들 북에가서 살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시비할가치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