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도 눈물
김민술
목포는 전라남도 제일 큰 항구도시고 가수 이난영이 출생한 곳이며 이난영이 부른 목포에 눈물을 애절하게 불러 더 알려진 항구도시다. 일제 강점기 애달픈 삶을 노래로 불태우며 부른 노래다. 온 국민이 다 불렀고 내18번이기도하다.
컴퓨터에 글을 다 쓰고 송고하려는데 율산이 전화 걸어왔다. 몇 일전 율산한테 서부신시가지를 서부시장으로 착각하고 착각이라는 주제로 글을 보냈는데 안과 찾느라 고생한줄 알고 안과 위치도 확인하고 진료상담도 같이하잔다. 사위도 같이 왔다.
젊은 사람도 스마트폰에 지리를 입력하고도 서신동에서 헤매다 전화해 신시가지에서 찾았는데 토요일이라 진료는 끝났다. 다음 토요일은 선약이 있어 그다음 토요일 같이 오자며 율산 차는 전주 군산 산업도로를 달려 청암이라는 회집에 도착한다. 육식보다는 생선회를 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청담회집은 이면도로 마주보는 두 개 건물로 시설도 꽤 큰집인데도 손님들이 가득 자리하고 끄트머리 청실 방에 겨우 자리 잡았다.
어제는 우리나라 역사적 순간의 날이었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헌법재판소장 권한 대행이 거짓 부인과 은폐, 이것은 헌법 수호란 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반이라고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전원일치 인용 되었음인지 홀가분한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방 가득 자리 한껏 같았다.
도우미 여자가 메뉴판을 율산에게 보인다. 율산이 손가락으로 짚었는데 주문회가 나오기 전에 서비스 덤이 거판스럽다. 어패류 키조개 가리비 까지 생새우, 튀김 우럭튀김도, 주문한 회는 큰 쟁반에 꽃모양으로 예쁘게 가득히 나왔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좋은 안주에 소주가 빠질 수 있는가? 내가 한 병 불렀다. 율산이 깜박 했는지, 아니면 술이 해로울 것 같아 일부로 주문하지 안했는지, 두 잔만 마신다고 했다. 안주 때문에 약속을 어기고 더 마셨다.
나오면서 직원에게 청담을 한자로 어떻게 쓰냐고 물었더니 잘 모른다고 한다. 내 생각으로 속세를 이야기 하는‘淸談’이 아닐까, 곧바로 귀가 할 줄 알았는데 째보선창 해양테마공원에 주차한다.
일제 잔재 건물들, 녹슨 기찻길, 허리띠 졸라맨 군산시민, 옥구 군민 피눈물 같고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을 곳곳에서 감지했다. 군사 기지답게 폭격기, 수송기, 크고 작은 헬기, 군함, 수륙상륙전차포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부둣가에 부잔교 (浮棧橋)가 있어 걸었다. 한걸음 걷다가 고 김광웅 선생이 머리에 스친다. 선생께서 꽃밭정이 수필 반에서 첫사랑을 부잔교에서 했다는 수필을 읽었었다. 아직 이른 나이고 건강하셨으며 턱 밑에 뭐 조금만것 때어냈다고 다음 수강에 나온다고 하더니 영영 우리 곁을 떠나시고 말았다. 눈물도 나고 목포에 눈물이 있으면 군산엔 피눈물이 있다는 글을 쓰고 싶었다.
군산근대박물관으로 가는데 구석기시대쯤 공룡발자국이 유리로 덮어 전시되고 있었다. 군산시 산북동 도로 공사 중에 발견 된 것이라 하니 백제시대에도 공룡이 있었음이 아닌가? 박물관은 3층 건물 이였다. 입구에 붉은 장탉과 암탉, 암탉이 알을 품고 대나무 언통어리, 망태형 둥우리가 첫눈으로 정유년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점포 이름도 학교점방, 조선고무신집, 하얀 저고리 검정치마 입은 여학생들이 태극기 손에 들고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귀가를 스치는 것 같았다.
유성기, 다듬잇돌과 방망이가 얼마나 울분을 터트렸을까, 심지어 놋그릇, 목화솜까지 수탈해간 잔인무도한 일본사람들, 목화솜으로 실을 뽑는 물래, 베틀, 재봉틀, 논가는 쟁기, 나락을 등짐으로 옮기는 지개, 벼를 훑는 홀 테, 쌀을 정미하는 절구통과발동기, 벼겹질을 불어내는 채, 풍구로 만든 쌀을 일제 압박으로 수탈당하였으니 군산, 옥구 군민들이 흘린 피눈물이 얼룩져 있는 것 같아 분통이 터졌다. 박물관 내외 전시물은 군산시민과 옥구군민이 기증했으며 2016년 100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목화솜에서 물레로 실을 뽑을 때 물레는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까, 아낙들은 다듬잇돌에 방망이로 왜놈들 생각하며 분통이 나 드둘겼을것이고, 유성기 속에서도 불멸의 가수 이난영이 목포에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고 오늘 내가 본 군산항도 피눈물이 얼룩져 녹슨 기찻길에 젖어있었다.
해가 뉘엿거리는데 월명산동국사에 들렀다. 1906년 일본스님이 지은 절이라 건물도 일본식이었다. 대웅전에 복전하고 큰절하며 가족의 건강과 대학입학하고도 취업 준비하는 두 손자에게 좋은 소식 있기를 축원하며 나오는 길 은파 유원지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음력 열나흘 둥근달이 별도 없이 외로이 떠 내 품으로 안기는 것 같았다.
불멸의 가수 이난영은 초등학교 4학년 배움이 전부라고 한다. 제주도에 일본사람이 극장을 운영하는데 어머니가 식모로 있었고 어머니한테 가 주인집 아들을 돌봐주었으니 모녀가 식모살이 한편이다. 난 영은 아이를 돌보며 한마디씩 흥얼거린 노랫소리가 예사롭지 않아 천부적으로 타고난 소질을 감지한 극장주인 이 극이 시작 전 노래하는 막간 가수로 발탁되고 1932년 열여섯 나이로 삼천리 가극단장 권유로 가수길 을 걸었다고 한다.
목포출신 무명시인 문 일석이 응모한 목포의 노래가 당선작이 되고 1935년 목포에 눈물로 제목을 바꾸어 손 목인이 작곡한 노래다. 당시 일제의 악랄함은 우리민족정서 담아내 일본의 귀에 거슬려 삼백년 원한 (三百年 怨恨)품은을 삼백연 원안풍 (三栢淵 願安風)으로 바꿔 검열을 통과 했다 고한다.
불멸의 가수 이난영의 남편은 납북으로 생이별, 두 번째 처자식이 있는 두 살 년아 남인수와 결혼 했으나 남인수도 1962년 폐병으로 사망하므로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알코올중독으로 1965년 9월 49세 나이로 나라 잃고 슬프고애절한 노래 부르며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목포시나 군산시가 잔인무도한 일제억압으로 피로 얼룩져 피눈물을 흘린 것 같아 마음에 소금을 져려오는것 같았다.
오늘 내 생애 좋은날 하루 폴러스하고, 지나가면 되돌릴 수없는 아쉬운 시간을 고스란히 한나절을 율산과 사위한테 빼앗아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둥근달을 다시 보며 7시에 집에 왔다.
가까운 이웃 일본사람들이 왜, 36년이나 피눈물을 흘리게 했는지, 지금도 진솔한 사과 없어 한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 마음아파하고 있지 않은가?
목포에 눈물이 있다면 오늘 내가본 군산항도 피눈물이 녹슨 기찻길에 묻어 있었다.
(2017.3.11.)
첫댓글 부럽습니다. 손자와 사위분이 선생님을 대접 했군요. 김광웅 선생님 얘기가 나오니 가슴이 찡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건강 하신것 같애 마음이 좋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좋은 글도 잘보고 갑니다. 윤동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