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구원은 있는가? 아니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가? 정말 이 세계는 인간이
살아가기에 적당할 만큼 아름다운 세계인가?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우리가 미래에 대해
무언가 확신할 만한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 곤혹스러운 질문에 답하기 위한 힘든 무대가
열렸다. 가마골 소극장 20주년 기념공연 1 이윤택 작/연출의 [바보각시] 4월 6일 늦은 7시
30분 가마골 소극장. 그저 마음 턱 놓고 보기에는 상당한 사고력의 소비를 필요로 하는 작
품이며, 요사이처럼 낄낄거리며 감상하기에는 너무나 처참하고 잔혹한 연극이다. 그리고 요
사이처럼 손쉽게 관중에게 접근하려는 연극풍토에 견주어 본다면 이 작품은 관중들에게 시
비 걸듯이 메시지를 집어 던지고 관중과의 대결구조를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구축해 가는
작품이다. 나는 지금 그 연극을 접한 곤혹(?)스러운 체험을 기록하고자 한다.
관중이 들어서면 무대에는 무엇이 있는가? 두 개의 사다리가 있고 각종 잡동사니가 널부
러져 있는 황량한 공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공간. 한쪽에는 서울 지하철 신도림역의 출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는 그런 공간이
열린다. 관계자의 안내가 끝나고 물러나면 암전되면서 곧바로 들려오는 지하철의 난폭한 굉
음이 관중을 후려친다. 이거 대단히 불친절한(?) 연극이 되겠는걸? 조명이 조금씩 들어오며
운무가 퍼져 나가고 그 틈새를 비집고, 맹인가수(문원령분)가 등장한다. 완전히 거지차림이
다. 머리가 부수수하고, 대충대충 걸친 허름한 복장. 하지만 그가 던지는 대사는 예사롭지
않다. 자기는 여기에서 끝까지 관찰자의 자리만을 지키겠다는 태도다. 자기가 이미 우리의
관찰 대상인데도 그는 그런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관중의 자세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것을
관찰만 하겠다는 거다. 마치 신처럼... 저 구름 저편에 인간에게 등돌리고 태연하게 손톱만
깍고 있는 신처럼 말이다. 그는 태연하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황량한 공간에 ‘인간’이 등장한다. 바보각시 인형을 육신으로 한 바보각시 영혼(이윤
주분)이 등장한다. 포장마차 수레를 끌고 영육이 분리되어 한 인간이 등장한다. 육신은 귀엽
기는 하지만 어쩐지 좀 괴기스런 모습으로 영혼은 전통적인 한국 여성의 단아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자리를 잡는다. 그림처럼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녀는 포장마차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주변을 떠도는 인간군상들을 관찰하는 자리에 자리잡는다. 그녀는 맹인가수
나 마찬가지로 관찰자가 된다. 맹인가수와 그녀가 관찰하는 가운데 이제 각종 인간군상들이
주변으로 모여든다. 길거리에 오줌을 질질 갈기면서 고주망태가 되어있는 지식인 떨거지(김
송일분)가 등장하고, 꼴에 신을 섬긴답시고 성서를 들고 설치는 신학도(이승헌분)가 등장하
고, 연신 택시를 불러대며 어디론가 떠나는 몸짓을 하는 밤처녀(길현숙분)가 등장하고, 홍수
환을 섬기는 얼치기 권투선수(오성택분)가 등장하고,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앵벌이(변혜경
분)가 등장하고 잘 나오지도 않는 호르라기를 빽빽거리며 설치는 파출소장(곽병규분)이 등
장한다. 그런데 포장마차 주변을 떠도는 그들의 모습은 서로가 서로에게 무의미하게 완벽하
게 파편화되어 있다. 괜시리 거들먹거리고 폼을 재고 있지만 모두다 허망한 존재들 뿐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냥 버러지같은 존재들이 그곳에서 넘실댄다. 그런데 여기에
그들을 보고 좀 각성들 하라고 대갈 일성을 던지며 우국청년(김진모분)이 나타난다. 다분히
80년대의 이념투쟁을 하는 듯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이미 리얼리즘도 해체주의도 한물 가 버
린 이 시대에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제 혼자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다 포장마차에 화
염병을 던지고 사라진다.
도대체 그들에게 구원은 있는가? 아니 그들은 구원을 바라기라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은 구원을 바라는 존재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하는 행위란 카바레
에 있음직한 노래 기기에 돈을 집어 넣고, 카드를 긁어대고 흘러간 노래만 주절대는 그냥
한심한 영혼들일 뿐이다.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과 내일이 같은 삶. 도대체 의미라고는 쥐
꼬리 만큼도 없는 그냥 떠도는 바위와 같은 존재들의 군상. 아예 미래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은 것 같은 그런 삶. 그들은 왜 그리 된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얼
마 안 있어 그 이유가 드러난다. 그들이 마치 마귀와 같은 분장을 하고 등장하는 것이다. 그
들은 겉은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실은 마귀들이었다-이 마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마귀가
아니다-그들은 그들의 존재를 각성시키는 우국 청년같은 존재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다.
일상의 흐느적거림 속에 이렇게 즐거운데 무슨 얼어죽을 각성이란 말이냐? 그래서 군중들은
우국청년을 잡아 죽인다. 죽여서는 팔다리를 절단해 버린다. 그리고 머리를 끊어버리고 그것
을 들쳐 보인다. 일상의 무기미한 삶이 이제 완전히 엽기적인 살육이 현장이 되어버린다.
살육의 현장,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이 바로 발프르기스의 밤이라는 말이다.
지옥의 화염불 속에서 인간들은 광란을 한다. 중간에 거짓 예수(이승헌분)가 나타나 예수 수
난의 과정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할 정도로 기독교적인 구원 가능성도 깡그리 몰아내버린 인
간들. 그 인간들의 본 모습이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아! 가면이라! 그 가면은 인간을 감춘
페르소나가 아니라, 페르소나 이면에 있는 본래 얼굴이었다. 겉으로 인간의 지식 체계를 반
영하는 얼치기 지식인, 인간의 경찰제도를 반영하는 파출소장, 그 모든 것을 페르소나로 돌
리고 그 페르소나 뒤에 숨어 있던 인간의 본 보습이다. 그 본모습은 이제 지옥의 축제를 요
구한다. 우리의 속죄양이 누구냐! 지금까지 충분히 보여 주었듯, 우리의 죄를 대속한다던 예
수도 엉터리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렇게 지옥같은 삶속에서 우리를 구해주도록 우리의 죄
를 대신할 존재는 누구냐?, 그 외침의 한 가운데로 바보각시의 육신이 내던져진다. 연극에서
는 바보각시의 인형이 내던져지고 영혼은 오열한다.
사실 바보각시 인형이 군중들에 의해 유린되는 과정은 보기에 따라서는 끔찍할 정도로
참혹하다. 이거 아무리 연극이지만 너무 지나치게 하면 보기 역겨워진다. 이런 장면들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면 난 조금 거북해진다. 그것이 인형으로 상징화되고, 그 내면의 영혼은
조용히 앉아 있으니 오히려 수용하기가 수월하다. 한쪽에서는 참혹한 윤간이 벌어지고 그
배면 또 다른 한쪽에서는 조용한 영혼이 앉아 있다. 그래! 포장마차 앞에 조용히 앉아 있다.
이 조용히 앉아있음은 맨 처음에 등장한 맹인 가수와 이 바보각시 영혼에게 주어진 몫이다.
극단적인 혼란과 지극히 고요함의 공존. 극단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지탱할 수 있
음은 그 한 켠에 저 고요함의 정밀(靜謐)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게 인간의
모습이리라. 인간의 구원은 지 혼란스러움을 꿰뚫고 그 조용함으로 닿았을 때 가능하리라.
그런데 앞서 보았던 그 쓰레기 부류의 인간들에겐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구원의 길이
그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이 구원의 길임을 모른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
명”이라 아무리 말해 주어도 쇠귀에 경읽기다. 오히려 그들은 그 정밀(靜謐)한 세계를 그들
의 세계로 타락시킨다. 노래하는 노래방기기를 다루듯 그들은 바보각시를 희롱한다. 바보각
시는 최소한 살아남기 위하여 그들과 동화되며 같이 타락해 간다. 하지만 인간들의 타락이
본연적인 것이었다면 바보각시의 타락은 다분히 위장적인 것이다. 그것은 바보각시가 덜컥
임신이 되었음이 알려졌을 때 그 본질의 모습을 잔인하게 까발겨진다.
아이를 낳는 존재는 여성이다. 그런데 여성이 아이를 낳도록 씨를 뿌리는 존재가 남자라
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인간은 단성생식을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낳은 아이가
자기 아이임에는 분명하지만 이게 누구의 씨인가를 정확하게 밝혀야 하는 당위성에 일부일
처제로의 강요가 개재된다. 바보각시가 낳은 애가 도대체 누구의 씨인가를 밝히는 과정은
한 인간을 사회제도와 관습 속에 편입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남자는 만약 자기가 씨
를 뿌린 자임이 확인했다면 그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 “도대체 이 아기가 누구의
씨를 받아서 난 것이요?”라고 바보각시가 자기를 유린한 남자들에게 접근했을 때, 남자들은
전부다 자리를 피하거나 외면한다. 그들은 여자를 희롱했을 따름이지, 남녀간의 화합에 의해
최소 단위의 사회구성을 한다는 책임을 떠 맡기에는 너무나 쓰레기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이
다. 그들이 책임을 떠맡을 때, 비로소 그들은 구원에 이를 수 있건만 그들 스스로 그 구원의
길을 박차 버린다. 아! 불쌍하면서도 저주스러운 저 인간들! 저 남자들이여!
“너희들이 이런다면 이 아이는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절규하며. 자기의 육신의 목
을 밧줄에 걸어버리는 바보각시의 행위는 그 저주스러움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다. 최후의
심판. 최후의 심판은 그렇게 온다! 스스로의 생명을 닫아버림이 어찌 보면 예수의 수난과
일맥상통할 것 같지만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나이다.!”라
며 마지막 인간에의 끈을 놓지 않았던 예수의 죽음과 이 죽음은 다르다. 이 죽음은 인간의
그 저주스러움, 그 쓰레기 같음에 대한 저주이며 일종의 징벌이다. 인간들은 벌은 받는다.
“이 천하에 벼락맞아 죽을 놈들아!”라고 욕을 퍼붓고 싶은 인간들이었기에 지하철의 굉음
속에 부딪쳐 처참하게 박살이 난다. 강렬하고도 난폭한 조명아래 명멸하며 인간들은 문자
그대로 얼굴 전체를 일그러뜨리며 발악하며 꺼져간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과연 그렇게 되는가? 우리의 위대한 대한민국에서 청소년과 성행위
를 하고, 유아 강간을 저지른 남자들 모두 그렇게 죽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쓰레기보다 못
한 그들도 유아 강간범에게 전자 팔치를 채우자는 논의에는 인권유린이라는 거창한 핑계로
저항한다. 강간 행위가 확인된 남자에게 어떤 형이 내려진다던가? 그까짓 한강에 배 지나가
기라고 둘러대며 말이다. 그러니까 한 여자를 유린했다고 지하철에 깔려 죽는다는 것은 우
리의 희망 사항이거나 그냥 당위적인 명제일 뿐이다. 그것은 필연성이 결여된 가능성(키에
르케고르)일 뿐이다. 이 시점으로부터 이 연극은 이제 그 필연성이 결여된 가능성의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한다.
장면이 바뀌면 이제 바보각시는 등신불이 된다. 아기 동자를 앞에 놓고 말이다. 이리하여
또 다시 기막힌 우상 숭배가 이루어지는데.... 모두들 자기의 가면-그러니까 자기의 실체다-
를 그 등신불 앞에 내다 바치고 그리고 구원이라고 생각하며 엄숙하게 경배한다. 하느님이
말했나니라 “나 이외의 신을 믿지 말라”고,,,, 그들은 그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등신불은 인간에 대한 저주를 퍼붓고 사라진 존재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아버지의 손
에 자기를 겸손하게 맡긴 예수와 같은 죽음이 아니란 말이다. 그게 무슨 구원이 되겠는가?
그 행위는 어찌 보면 뒤집힌 형태로 된 또 다른 발프르기스의 밤인 뿐이다. 아! 이거 불교
에서 부처님 앞에서 경배하는 것하고 많이 닮았다. 사이비 예수가 등장하여 예수를 우스꽝
스럽게 희화한 것처럼, 이제는 부처마저도 희화화된다. 구원은 없다. 인간 스스로가 구원을
버렸고, 이제 어디에도 길은 없다. “여행은 시작되었지만 길은 끝났다.”(루카치)
그런데 더욱더 가관이 그 다음에 벌어진다. 미처 자기 가면을 등신불에게 바치지 못한
앵벌이가 뒤늦게 나타나는데, 가면을 바치려 발버둥치지만-참 허망한 짓이다- 결국 뜻을 이
루지 못하여 울부짖는다. 세상에! 그 뭐 대단한 짓이라고? 마치 부처님 앞에 불공을 안드리
면 아이가 대학시험에 실패한다고 믿는 인간들의 허망한 믿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
허망함을 뒤로하고 연극은 문자 그대로 ‘잔인하게’ 끝난다. 아! 이래도 되는 것인가? 도대체
날더러 어쩌라고....
이 극은 아무 가능성도 보여주지 않는다. 연출자의 임무는 극속 에서 ‘아! 아직도 불길이
남아있네?“라고 탄성을 지르는 인간의 모습에서 보이는 그 실팍한 가능성의 실마리, 언젠가
는 필연성을 갖춘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무대를 떠났다.
연극의 모든 장치와 배우의 액션등이 내가 이때까지 써 내려온 이 후기에 보이는 느낌을 빚
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음을 생각하면 그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닐 것 같다. 다른 데도 아
니고 가마골 소극장 팀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최근 들어 이 극단의 작품이 너무
가벼워지는 것 같아 조금 당혹스러웠던 나로서는 이번 연극은 오래간만에 연극의 진미를 맛
보게 한 가치있는 체험이었음을 기록하며 이 후기를 마치기로 하자.
오래간만에 연극의 진수를 보여준 가마골 소극장 팀에 경의를 표하며 부산시민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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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후기 / 관람 후기
공연후기요
구원을 거부한 인간들의 비극-[바보각시]관극 후기
천하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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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1
06.04.10 13:21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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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음.. 한번 보고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으으으 이 연극 9일로 끝났는데... 다음을 기다려야겠네요.
역시 선생님 다우신 관록있는 후기시군요.................근데............... 제 작품 안 보러 오십니까?
이곳에서의 닉네임, '천하바보'시군요. ^^ 저는 외봉쌤을 배신하고 ^^ 결혼 봤습니다~ 오늘 '안녕갈매기'는 혼자 보셔야겠어요, 저는 더 특별한 시간 때문에 벌써부터 두근두근합니다. 바보각시는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은 연극으로 제 마음에 기록했습니다. 알듯 모를듯 답답했던 마음이 쌤의 후기로 조금 시원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