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국 : 1963년 광주 출생. 1990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수배일기’ 연작 7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 18년 만에 발간한 첫시집 [슬그머니], 실천문학의 시집 166,에서 몇 편 골랐습니다.
순산
우사 불빛이 환하다
보름이나 앞당겨 낳은 첫배의
송아지 눈매가 생그럽다
바싹 추켜 올라간 소꼬릴 연신 얻어맞으며
얼굴 벌겋게 달아올라서,
새 목숨
힘겨이 받아내던 친구는
모래물집에 젖은 털을 닦아주며
우유 꼭지 물리는데
그 모습 이윽히 지켜본 어미소가
아주 곤한 잠을 청한다
화개장터
붕어빵 굽다 말고 아낙이
윗도리를 풀어 헤쳐 꺼내놓은 희고 봉긋한 젖통을
아기가 빨다가 만지작거리는데
그걸 힐끗힐끗 쳐다보던 이순의 양주가 상기된 채
연분홍 솜사탕을 뽑다 감다 말고
연방 흘러나오는 헛기침을 애써 참아보는데
그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벚나무가
볼그족족 돌기 솟았던 몽우릴
하르르 터뜨리고 말았으니
적빈모정
오밤중 동네를 다 깨우며
지 어매를 패던 놈, 식칼을 들이대고
돈 내놔, 윽박지르던 것을 뜯어말리다가
땅바닥에 두어 번 머릴 짓찧었는데
그 어미, 놈의 머리통을 날래 감싸 안으며
눈초리를 치켜세우고
째려보는 모습이라니!
다비식 날이었다
예 말이요, 달아실댁
우리 몸도 불사르면 사리가 나올께라우
팔꿈치 무릎팍 시큰하도록
오체투지 삼천 배 절하고도
저녁 범종처럼 퍼지는 말씀 한 토막
얻어들을 수 잇을까 마음 조아려지는
저 고귀한 스님이야
죽을 때까지 부처님 공양했응께 그러겠제만,
우리들이사
진짜 딴 욕심 차릴 틈도 없이
뼛골 시리도록 나락 농사만 한평생 지었응께
몸에선들 엉치뼈 틈사리 어느 금간데선들
새하얀한 쌀톨 사리가
한 말쯤 안 나올께라우
천적
놈이 있어야 했다
추어 양식에는 아귀 같은 메기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수가 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놈이 없으면 빈둥빈둥 놀기만 해서
살결에 힘이 없고 찰지지가 않는다
놈이 있어야 잽싸게 도망쳐
진흙 속에 혼신껏 처박아 숨고
쫒기는 동안 몸피가 부쩍 미끈해진다
나의 생애도 촌음에 닥쳐오는
메기 같은 놈이 늘 가까운 데서
노려보고 있다
슬그머니
쌀뜨물 받아
생밤의 속껍질을 불리는 동안
숫돌에 반달칼 벼리었다
애비는 조각하듯 곱게
생율 치는 법만 가르치고는
살그머니 없어져선
제 주름 깊은 가슴과 어깨를 짓누르던 생애,
그것을 고스란히 떠받친 발뒤꿈치의
굳은살을 하얗게 갉아내곤 하였다
한껏 등허리를 옹송그려
옹이 같은 각질의 발꿈치를 깎아내다 들킬 때면
겸연쩍은 듯 배시시 감추던
반달 모양의 손칼을
쥐어보기도 하였는데
제삿날이면 나는
그 곤고했던 무게를 떠받치느라 조금씩
닳아 뭉개어진 애비의
신발 들고 살그머니 없어져선
구두수선집을 재게 다녀오곤 했던 일도
넌지시 떠올리며
슬그머니 없어진 자식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천각(天刻)
당산나무 둥치에 조각칼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자
옛 싸움에 몸 바친 할아비가 지어주신 이름
成國, 그렇게 새겨서는
물경 사십 년 남짓 버티었다고 하자
당고개의 세 아름드리 느티나무 왈, 그러냐고
나는 짐짓 오백 년 족히 견디었다고,
예나 이제나 창천의 하늘로 가질 내뻗어
천필만필 각인해 올리고 있다고, 있는 중이다고
그러던 어느 날엔 공연히 눈 둘 바를 모르고
동구 밖 당고개를 넘곤 하였다
호접점경(胡蝶點景)
볕바른 동원훈련장의
늙수그레한 중대장 눌변대로라면
그 육십년대의
중무장한 남파특수부대가
단박 침투해 올 것 같았다
요즘도 그런 사태가 발발하겠냐는 듯
두엇 두엇 모인 예비군은
옹송그려 졸고
어깨에 기댄 M16 총구 위로
노랑나비도 쪽잠 들러 날아들었다
비탈길 끝 방
봉선동 대성여고 앞, 천막 비닐 덧댄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산 적이 있다. 비좁은 바람벽 칼끝 선명한 녹두장군 목판화 한 점 붙여두고 은신의 조이는 가슴 달래던 열두 칸짜리 셋방, 대낮에도 스며든 바람 소리조차 어두웠다. 이따금 초조에 찌든 속옷을 빨아 방 안에 널어두면, 자취하던 여학생 두엇 살며시 엿보다 얼굴이 붉어지곤 하여도 왜 그렇게 가슴은 두근거렸는지. 으슥한 발길에 발목 적시며 남몰래 오는 애인을 기다리며 긴긴 불면의 밤을 한사코 견디었던 청춘의 방. 급습당한 내가 대공요원에게 육탄 공격하다 머리끄덩이 잡힌 채 끌려왔던, 그렇게 목숨을 건 시대와 함께 사라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던 그 비탈길 끝 방. 칠칠치 못하게 내 마음 흔들릴 때면 꿈속에까지 쫓아오곤 했다.
조성국'슬그머니'중에서.hwp
첫댓글 음~ 자잘한 일상에서 건져올린 글들이 보석같으네요. 올려주시느라 또 한번 감사^^
^^...잘 읽었습니다... 글씨도 반듯하고... ...
올려주신 글 덕분에 잠시나라 더위를 잊고 있었습니다. 감사해요.
귀한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정경들을 곱게 보여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