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텍사스 레인저스
<2>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4> 보스턴 레드삭스
<5> 신시내티 레즈
<6>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7>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8> 시카고 컵스
<9>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0>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11>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12>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3> 볼티모어 오리올스
<14> 뉴욕 메츠
<15> LA 다저스
<16> 시카고 화이트삭스
<17> 휴스턴 애스트로스
<18> 미네소타 트윈스 [2]
[ML 팀역사] <4> 텍사스 레인저스
텍사스 레인저스의 전신은 워싱턴 세네터스. 그러나 명투수 월터 존슨을 배출한 세네터스는 따로 있다. 1901년 아메리칸리그 창설과 함께 워싱턴을 지켜온 세네터스는 허약체질에도 불구하고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세네터스는 1961년에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로 이전, <미네소타 트윈스>가 됐다. 졸지에 연고구단을 잃은 워싱턴 시민들의 아쉬움은 대단했다. 결국 아메리칸리그는 1년만에 워싱턴에 '제2의 세너터스'를 만들어줬다. 이 세네터스가 현재의 텍사스다. 두번째 세네터스도 허약하긴 마찬가지였다. 창단과 동시에 4년 연속 100패. 10시즌 중 5할 승률 한차례. 길 허지스, 짐 레먼, 테드 윌리엄스 등 스타 출신 감독을 영입했지만, 윌리엄스의 푸념 대로 워싱턴은 '감독들의 무덤'일 뿐이었다. '익스펜션 드래프트'에서 좋은 선수들을 건지지 못한 탓에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여기에 마음먹고 클리블랜드로부터 영입한 외야수 지미 피어샐도 헛방망이만 돌렸다. 1964시즌이 끝나고 워싱턴은 투수 클로드 오스틴을 LA 다저스에 주고3루수 켄 맥멀런과 외야수 프랭크 하워드를 데려왔다. 오스틴은 훗날 다저스에서 정상급 투수로 발돋움했지만, 맥멀런과 하워드의 활약도 이에 못지 않았다. 워싱턴은 1965년 처음으로 70승대에 올라섰고, 테드 윌리엄스를 감독에 앉힌 1969년에는 5할 승률을 넘겼다. 그러나 반짝했던 태양은 금새 먹구름에 가려졌다. 1971시즌이 끝나고 구단주 밥 쇼트는 팀을 텍사스주 댈러스와 포트워스 사이에 위치한 앨링턴으로 옮겼다. 빌리 마틴이 지휘봉을 잡은 1974년 텍사스는 84승을 거두며 서부지구 2위를 차지했다. 시카고 컵스에서 데려온 퍼기 젠킨스가 25승을 따냈으며, 제프 버로우스는 25홈런-118타점으로 MVP를 수상했다. 그러나 이듬해 승률이 5할 밑으로 떨어지자 마틴 감독은 경질됐다. 이후 마틴은 뉴욕 양키스로 자리를 옮겨 1977-78년의 월드시리즈 2연패를 일궈냈다. 1977년 텍사스는 무려 4명의 감독이 교체되는 어수선함 속에서도 창단 후 최고성적인 94승을 마크했다. 2년만에 복귀한 젠킨스, 신인 스티브 코머, 불펜 에이스 짐 컨이 버틴 마운드가 튼튼했다. 그러나 같은 지구의 캔자스시티 로열스가 102승을 거둠으로써, 아쉽게도 첫번째 지구우승의 꿈은 무산됐다. 텍사스는 이후 1988년까지, 파업으로 중단됐던 1981년과 찰리 허프의 너클볼이 춤췄던 1986년을 제외하면 거의 매년 바닥을 헤맸다. 1989년 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구단을 매입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놀란라이언이 이웃 휴스턴에서 건너와 12년만에 300탈삼진을 따내며, 개인통산 5,000탈삼진을 돌파했다. 6번째 노히트노런의 양념도 곁들였다. 타선에서는 루벤 시에라, 훌리오 프랑코, 라파엘 팔메이로가 돋보였다. 텍사스는 초반 반짝 1위 이후 6위까지 추락했으나, 후반기의 선전에 힘입어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후세 구즈만과 후안 곤잘레스가 합류한 이듬해에도 3위를 지켰다. 1992년 케빈 브라운은 21승을 올려 텍사스 투수로는 역사상 두번째 '20승투수'가 됐으며, 곤잘레스는 홈런왕에 올랐다. 그러나 전반적인 타격침체로 승률은 다시 5할 밑으로 떨어졌다. 시즌이 끝나고 바비 위트, 루벤 시에라, 제프 러셀을 내주고 오클랜드로부터 호세 칸세코를 데려오는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지만, 칸세코는 이듬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운드에 올랐다가 팔꿈치 부상을 당하는 바보짓을 했다. '알링턴 파크'의 개장 다음해인 1995년.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 감독인 자니 오츠를 영입한 텍사스는 지구 3위를 차지하며 신흥강호로 등장했다. 그리고 대망의 1996년. 창단 35년만에 지구우승이 찾아왔다. 곤잘레스는 47홈런-144타점으로 MVP에 올랐으며, 켄 힐을 비롯한 선발투수 4명은 14승 이상 씩을 올렸다. 곤잘레스는 양키스와의 디비전시리즈에서 5개의 대포를 쏘아올렸지만 텍사스는 1승3패로 무릎을 꿇었다. 이듬해 3위로 잠시 주춤했던 텍사스는 1998년 애너하임과의 진땀승부 끝에 두번째 지구우승을 차지했다. 곤잘레스는 전반기에만 100타점을 돌파하며, 핵 윌슨이 보유한 타점신기록(191타점)에 도전했지만 157타점으로 MVP에만 만족해야 했다. 디비전시리즈의 상대는 또 양키스. 이번에도 텍사스는 3연패로 물러났다. 1999년 텍사스는 팀 최다승기록인 95승으로 지구를 제패했다. 포수 이반 로드리게스는 논란이 됐던 MVP 투표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제쳤다. 디비전시리즈에서 양키스와 세번째 대결을 펼쳤지만, 3경기 1득점의 망신을 당하며 3연패로 물러났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라는 위기의식을 갖게된 텍사스는 팀의 상징이었던 곤잘레스를 포기하며 대대적인 체질개선에 나섰다. 곤잘레스를 디트로이트로 보내는 대신, 저스틴 톰슨, 프랭크 카탈라노토, 게이브 캐플러, 프랜시스코 코데로 등의 좋은 선수들을 쓸어왔다. 지난해 텍사스는 '꼴찌'를 감수하면서까지 팀 재건에 주력했다. 시즌 후에는 무려 2억5,200만달러를 쏟아부어 '최고 유격수'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잡아왔다. 그러나 정작 필요했던 투수력 보강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그 결과 2년 연속 꼴찌에 머물렀다. 존 하트 단장 체제으로 새출발한 텍사스는 월드시리즈는 커녕 리그 우승도 차지하지 못한 오명을 씻기 위해 박찬호, 칼 에버렛, 존 로커 등 새 얼굴들을 영입하며 전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ML 팀역사] <10>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1995년 3월, 1억3,000만달러의 가입비를 내고 내셔널리그의 정식일원으로 참여했다. NBA 피닉스 선즈의 구단주인 제리 콜란젤로가 구단주 그룹의 대표를 맡았으며, 에이전트 출신 조 가라지올라 주니어가 단장에 임명됐다. 가라지올라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출신이자 요기 베라의 절친한 친구인 조 가라지올라 시니어의 아들. 애리조나는 3년간이 창단작업을 거쳐 1998년 처음으로 정규시즌에 나섰다. 97시즌이 끝나고 확장드래프트를 가졌던 애리조나는 다시 유망주와 베테랑을 바꾸는 작업을 통해 만만치 않은 전력을 구축했다. 헤수스 산체스(현 시카고 컵스)를 주고 플로리다로부터 중견수 디본 화이트를 데려왔으며, 디트로이트에서 트래비스 프라이먼을 데려온 다음, 다시 클리블랜드에서 '올스타 3루수' 맷 윌리엄스와 바꿨다. FA시장에서는 앤디 베네스, 그레그 올슨(이상 투수), 제이 벨(2루수)을 영입했다. 5연패로 시즌을 시작한 애리조나는 65승97패로 결국 서부지구 꼴찌를 차지했다. 하지만 시즌 막판의 연승행진을 통해 다음 시즌의 돌풍을 예고했다. 시즌이 끝나고 애리조나는 LA 다저스와의 영입경쟁에서 랜디 존슨을 건지는 '잭팟'을 터뜨렸다. 계약조건은 4년간 5,240만달러. 존슨을 놓친 다저스는 이후 케빈 브라운과 1억500만달러짜리 계약을 맺었다. 애리조나는 그 외에도 디트로이트로부터 헐값에 루이스 곤살레스를 데려왔으며, 스티브 핀리와 토니워맥도 영입했다. 존슨, 곤살레스, 그리고 커트 실링을 제외하면 애리조나는 트레이드시장이나 자유계약시장에서 훨씬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특히 99년 중반 플로리다에 브래드 페니, 블라디미르 누네즈(이상 투수), 애브라함 누네즈(외야수)를 주고 마무리투수 맷 맨타이를 데려온 것은 최악의 실수였다. 맨타이가 부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반면, 페니는 올시즌 플로리다의 제1선발을 맡을 성도로 성장했다. 애브라함 누네즈도 메이저리그 입성을 기다리고 있다. 99년 애리조나는 100승을 올리며 지구우승을 차지했다. 창단 2년만의 포스트시즌 진출로 콜로라도 로키스의 기록을 1년 앞당겼다. 존슨은 17승으로 사이영상을 따냈으며, 윌리엄스는 142타점으로 내셔널리그 타점 2위에 올랐다. 핀리와 곤살레스 역시 각각 34홈런 .336의 타율로 '돈값'을 해냈다. 그러나 애리조나는 디비전시리즈에서 뉴욕 메츠에 패해 아쉬움을 남겼다. 2000시즌에는 중반까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다저스와 함께 치열한 3파전을 치렀다. 애리조나는 필라델피아에서 커트 실링까지 데려오는 강수를 뒀지만, 지구 3위에 그치고 말았다. 시즌이 끝난후 창단감독 벅 쇼월터가 해고되고, 전속해설가였던 밥 브렌리가 새 사령탑에 앉았다. 애리조나는 관중수가 급감하며 재정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선수들은 먼저 연봉의 지불유예를 허락하는 등, 선수단의 결속은 오히려 더 강화됐다. 지난해 존슨-실링 듀오는 역사상 최고의 원투펀치 중 하나로 올라섰다. 실링은22승으로 다승왕을, 존슨은 방어율왕과 탈삼진왕을 나눠가졌다. 이목을 집중시켰던 사이영상투표에서는 존슨이 승리, 존슨은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3연패했다. 불펜에서는 김병현의 활약이 돋보였다. 김병현은 19세이브를 거두며 맨타이의 빈자리를 완벽히 메웠다. 곤살레스는 시즌내내 타선을 이끌며 57홈런을 날렸으며, 새로 영입한 1루수 마크 그레이스와 외야수 레지 샌더스도 좋은 활약을 보였다. 핀리는 시즌 막판부터 불망망이를 휘둘렀다. 결국 애리조나는 샌프란시스코와 다저스를 제치며 두번째 지구우승을 차지했다. 애리조나는 무적원투펀치를 내세워 세인트루이스와 애틀랜타를 연파하고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는 26회 우승에 빛나는 최고명문팀과 네살박이 풋내기 간의 일전이었다. 3차전까지 2승1패로 앞섰던 애리조나는 김병현이 4 5차전에서 역전을 허용하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6차전을 15-2로 잡아낸 애리조나는 7차전에서 실링과 존슨을 연투시켜 마침내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따냈다. 곤살레스는 9회말 양키스의 '철벽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로부터 극적인 끝내기 안타를 쳐냈다. 올시즌 애리조나는 제3선발로 릭 헬링을 영입한 것을 빼면 전력을 보강하지 못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다저스도 전력상승에 실패한 데다가, 존슨-실링듀오의 건재로 인해 애리조나는 지구우승의 0순위, 월드시리즈 진출 1순위로 꼽히고 있다
[ML 팀역사]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876년 <뉴욕 뮤추얼스>가 내셔널리그에서 쫓겨난 후 6년동안 뉴욕에는 메이저리그 팀이 없었다. 1883년 존 데이가 <트로이 트로전스>를 사들여 내셔널리그의<뉴욕 고텀스>와 아메리칸 어소시에시에이션의 <뉴욕 메츠>를 창단하면서, 비로소 뉴욕은 '야구의 고향'으로서의 위치를 되찾았다. 데이는 고텀스가 계속 부진하자, 1886년 짐 머트리 감독과 에이스 팀 키페 등 메츠의 주요전력을 고텀스로 보냈다. 머트리가 고텀스 선수들을 "나의 거인들(My Giants)"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팀명칭도 자이언츠로 바뀌었다. 바야흐로 자이언츠의 화려한 역사가 개막된 것이다. 자이언츠는 1888년 처음으로 내셔널리그를 제패했고, 이듬해도 정상의 자리를 수성했다. 자이언츠가 최강의 전력을 구축한 것은 1902년. 자이언츠와 함께 아메리칸리그의 볼티모어 오리올스(현 뉴욕 양키스)를 사들인 존 브러시는 볼티모어의 존 맥그로 감독과 조 맥기니티, 포수 로저 브로스나한 등 주요선수 5명을 자이언츠로 데려온 다음, 다시 볼티모어를 팔아치웠다. 맥그로 감독은 1932년까지 풀시즌 29년간 월드시리즈 우승 3회, 리그 우승 10회, 100승 시즌 4회 등, 자이언츠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맥그로는 투수가 반드시 완투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차린 첫번째 감독이었으며, 그 외에도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전략을 많이 만들어냈다. 제자중에서 프랭크 프리시, 휴 제닝스, 케이시 스탱걸 같은 명장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자이언츠는 투타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뤘지만, 그중에서도 조 맥기니티-크리스티 매튜슨의 마운드 듀오가 가장 돋보였다. '철인' 맥기니티는 한달 사이에 더블헤더 연승을 세번이나 기록했을 정도로 강인한 체력을 자랑했다. 1900년 신시내티 레즈에 '퇴물' 에이머스 루지를 주고 얻어온 매튜슨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전국구 슈퍼스타로 부상했다. 매튜슨의 주무기는 '페이드어웨이(fadeaway)'로 불린 스크루볼. 맥그로 감독의 풀타임 첫 시즌이었던 1903년, 자이언츠는 맥기니티와 매튜슨이 61승을 합작하며 단숨에 꼴찌에서 2위로 상승했다. 이듬해 자이언츠는 5년만에 내셔널리그 왕관을 되찾았으나, 1902부터 시작된 아메리칸리그 우승팀과의 월드시리즈를 거부했다. 구단주 브러시와 맥그로 감독이 '열등한' 아메리칸리그와는 경기를 치를 수 없다고 버텼기 때문. 1905년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한 자이언츠는 이번에는 월드시리즈에 나서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를 꺾고 통산 첫 '통합 챔피언'에 올랐다. 3년 연속 30승 이상을 기록한 매튜슨은 6일동안 벌어진 월드시리즈 3경기(1,3,5차전)에서 모두 완봉승을 따내며 '빅 식스'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탄탄대로로 여겨졌던 자이언츠 앞에 최강전력의 시카고 컵스가 나타났다. 컵스는 1906년에는 메이저리그 최다승인 116승을 올리는 등, 1910년까지 내셔널리그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1908년에는 그 유명한 '머클의 본헤드' 사건이 일어났다. 시즌 막바지에 벌어진 컵스와의 경기. 1-1로 맞섰던 9회말 2사 1,3루에서 1루주자로 나가 있었던 머클은 앨 브리드웰의 끝내기 안타 때 2루 베이스를 밟지 않고 덕아웃으로 들어갔다가 상대팀의 항의로 아웃됐다. 결국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고, 자이언츠는 그 무승부 때문에 리그 우승을 놓쳤다. 1911년 자이언츠는 마침내 컵스의 장기집권을 종식시켰다. 매튜슨과 함께 루브 마커드, 제프 테스루의 마운드 트리오가 맹위를 떨쳤으며, 타선에서는 래리 도일, 아트 플래처 존 마이어스이 방망이가 힘차게 돌아갔다. 자이언츠는 13년까지 3년연속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러나 월드시리즈에서는 모두 고배를 마셨다. 1915년 꼴찌로 추락하며 잠시 주춤했던 자이언츠는 1918년부터 3년연속 준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전력을 가다듬었다. 뉴욕 양키스와 브루클린 다저스의 전력이 급상승하기 시작한 1920년부터 메이저리그에는 '뉴욕 야구 삼국지'라는 장편드라마가 쓰여지기 시작했다. 1929년까지 10년동안 뉴욕팀이 4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며, 3번의 지하철시리즈가 열렸다. 뉴욕팀이 배제된 월드시리즈는 단 2차례. 특히 같은 리그 소속인 자이언츠와 다저스 간에 라이벌 의식이 더 강했다. 자이언츠는 1921년부터 24년까지 프랭크 프리시-조지 켈리-에밀 뮤젤의 강타선을 내세워 4년 연속으로 내셔널리그를 제패했다. 21년과 22년에는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를 연달아 제압했지만, 23년과 24년에는 양키스-워싱턴 세너터스에게 패배의 쓴맛을 봤다. 이후 7년동안 자이언츠는 2-3위권을 계속 유지했지만,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다. 1932년 맥그로 감독은 시즌 초반 팀이 최하위로 처지자 지휘봉을 1루수 빌 테리에게 넘겼다. 테리는 리그 3위로 시즌을 끝냈다. 맥그로는 멜 오트와 칼 허벨이라는 보물을 남기고 팀의 부사장으로 물러났다. 그는 모두들 뜯어고치려 했던 오트의 독특한 스탠스를 인정했으며, 허벨에게는 스크루볼을 권유, 특급투수로 도약시켰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4년 2월 '자이언츠의 영웅'은 세상을 떠났다. 오트와 허벨을 주축으로한 자이언츠는 1933년 내셔널리그를 제패하고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거머줬다. 자이언츠는 이듬해에도 리그 우승을 눈앞에 뒀지만, 다저스에게 덜미를 잡혀 2위에 그쳤다. 시즌 전 테리 감독이 "다저스가 아직도 리그에 남아있나"라고 농담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1936년과 37년 자이언츠는 다시 월드시리즈에 올랐지만, 모두 양키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1942년 테리에 이어 오트가 지휘봉을 잡았다. 그러나 오트의 시대는 끔찍했다. 풀타임 6시즌 동안 5위 2번에 꼴찌 2번. 결국 오트는 1948년 중반 '사람 좋으면 꼴찌'라는 핀잔을 들으며 리오 듀로서로 교체됐다. 듀로서는 영양가 없는 홈런타자로만 채워졌던 타선을 빠르고 실속있는 선수들로 교체했다. 여기에 샐 매글리가 에이스로 등장하며 자이언츠는 다시 정상급의 전력을 갖췄다.1950년부터 시작된 '뉴욕 야구 삼국지' 2탄은 전편보다 더 화끈했다. 10년동안 뉴욕팀이 8번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가져갔으며, 지하철시리즈만 5번이 열렸다. 그러나 1탄에서 주연을 맡았던 자이언츠는 2탄에서는 조연에 불과했다. 1951년 자이언츠는 팀 역사상 가장 극적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개막과 동시에 11연패를 기록하며 일찌감치 꼴찌로 내려앉았던 자이언츠는 8월에 16연승을 올리며 중위권으로 상승하더니, 막판 47경기에서 39승을 거두며 다저스와 극적인 동률을 이뤘다. 3전2선승제로 치러진 플레이오프. 자이언츠의 바비 톰슨은 3차전에서 '세계로 울려퍼진 홈런'을 날려 팀에 리그 우승을 선사했다. 그러나 월드시리즈 우승은 이번에도 양키스 몫이었다. 자이언츠에게51년은 또 하나의 역사가 탄생한 해였다. 바로 윌리 메이스가 등장한 것. 메이스는 72년까지 21년간 자이언츠와 동고동락을 같이하며 역사상 최고의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올라섰다. 메이스는 <스포팅뉴스>와 <토탈베이스볼> 선정 역대 최고선수 랭킹에서 나란히 베이브 루스에 이은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자이언츠는 1954년 클리블랜드를 꺾고 월드시리즈를 제패했다. 그러나 이것이 자이언츠의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시즌이 한창이던 1957년 8월, 뉴욕은 충격에 휩싸였다. 자이언츠와 다저스의 연고지 이전이 발표된 것. 자이언츠의 구단주 빌리 스톤햄은 다저스 구단주 월터 오말리에 설득당해 뉴욕 최고참팀으로서의 위치를 포기하고 덩달아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다저스의 로스엔젤레스 이전은 대성공이었던 반면, 자이언츠는 그렇지 못했다. 다저스는 연고지 이전 후 5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지만, 자이언츠는 2번의 리그 우승에 그쳤다. 1958년 올랜도 세페다, 59년 윌리 매코비, 62년 펠리페 알루와 후안 마리셜이 가세하며 전력은 막강해졌지만, 1962년의 내셔널리그 우승 말고는 특별한 성과물을 얻어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1960년에 건설한 캔들스틱파크는 강풍으로 인해 한여름밤에도 담요를 덮어야하는 애물단지가 됐으며, 선수와 선수, 선수와 감독 사이의 반목이 심했다. 1969년 자이언츠는 기존의 매코비와 마리셜에 바비 존스와 게일로드 페리의 활약이 더해지며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리그챔피언십에서 피츠버그에 패했다. 이후 매코비와 마리셜의 기량이 시들해지고 메이스가 메츠로 트레이드되며 자이언츠도 기력을 잃었다. 자이언츠는 '빅레드머신'으로 불린 신시내티와 '투수왕국' 다저스의 2파전이었던 70년대를 조용하게 보냈다. 자이언츠가 신문의 1면을 장식한 것은 스톤햄 구단주가 토론토의 투자가들에게 팀을 팔려고 했던 사건.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이전 문제를 질질 끄는 사이 토론토에는 블루제이스(1977년)가 탄생했다. 자이언츠의 오랜 기다림은 1987년에 와서야 끝났다. 85년 팀 역사상 처음으로 100패를 당했지만, 로저 크레이그 감독이 부임한 후 선수들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자이언츠는 1987년 신시내티를 물리치고 16년만에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리그챔피언십에서 세인트루이스에 패했다. 좌익수 케빈 미첼이 윌 클락과 강타선을 이룬 1989년, 자이언츠는 27년만에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관중은 처음으로 2백만명을 돌파했다. 그러나 '베이시리즈'로 치러진 월드시리즈는 오클랜드의 싱거운 4연승으로 끝났다. 1993년 자이언츠는 더스티 베이커 체제로 새출발했다. 피츠버그에서 FA로 풀린 배리 본즈를 영입했으며 매트 윌리엄스는 전년도의 부진을 털어냈다. 마운드에서는 존 버켓과 빌 스위프트가 로드 백(48세이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20승을 올렸다. 그러나 자이언츠는 막판에 고춧가루를 뿌린 다저스 탓에 103승을 올리고도 지구우승에 실패했다. 이후 2년 연속 지구꼴찌를 차지했던 자이언츠는 1997년 다시 지구우승을 차지했다. 제프 켄트와 션 에스테스가 놀라운 활약을 했으며, 시즌 중반에는 유망주들을 쏟아부어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윌슨 알바레스, 로베르토 에르난데스 대니 다윈을 데려왔다. 그러나 자이언츠는 디비전시리즈에서 와일드카드팀인 플로리다 말린스에 패했다. 1998년에는 와일드카드를 놓고 벌인 시카고 컵스와의 단판승부에서 패해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됐다. 이듬해 '신흥강호' 애리조나에 밀려 지구 2위에 그쳤던 자이언츠는 2000년 역사상 5번째로 지구우승을 차지했다. 자이언츠는메이저리그 30개 팀 중 최고승률을 기록했지만, 디비전시리즈에서 다시 뉴욕 메츠에 패하고 말았다. 올시즌도 자이언츠는 시즌 막판까지 지구 타이틀을 다퉜다. 팀의 상징인 본즈는 역대 최다인 72호 홈런을 날렸다. 특히 지난해 퍼시픽벨파크를 완공한 이후로는 2년 연속 평균 4만명 이상의 관중동원을 기록했을 정도로 홈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마술사' 베이커 감독 지휘 아래, 자이언츠는 단단한 팀워크로 매년 전력 이상의 성적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자이언츠가 강호를 넘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기에는 구단의 투자가 너무 인색하다
[ML 팀역사] <2> 보스턴 레드삭스
아메리칸리그가 출범하고 첫 20년 동안 보스턴은 6번의 리그 우승과 함께 5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월드시리즈 우승 숫자가 하나 모자란 것은 1904년 내셔널리그 우승팀이었던 뉴욕 자이언츠가 경기를 거부해 월드시리즈 자체가 무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80년 동안은 겨우 4번의 리그 우승에 그쳤다. 더 황당한 것은 4차례의 월드시리즈을 모두 7차전 끝에 패했다는 것. 사람들은 이를 두고 '밤비노의 저주'라 부르기 시작했다. 1901년 아메리칸리그의 창설멤버로 출발한 보스턴은 초기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1903년부터 <필그림스>로 불렸으며, 1907년부터는 지금의 이름인 <레드삭스>로 바뀌었다. 당시 보스턴에는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라는 강팀이 버티고 있었지만 때마침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레드삭스는 간단히 보스턴의 야구팬들을 쓸어담을 수 있었다. 결국 브레이브스는1953년 밀워키로 떠났다. 보스턴은 창단 3년째였던 1903년, 첫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사이 영이 3년연속 다승왕을 따냈으며, 벅 프리먼은 홈런과 타점에서 1위에 올랐다. 또한그 해 창설된 월드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꺾고 명예로운 첫번째 우승팀이 됐다. <보스턴 글로브>의 발행인 찰스 테일러의 아들인 존 테일러가 구단을 인수하면서 전력은 한층 강화됐다. 테일러는 전폭적인 투자로 조 '스모키' 우드, '회색 독수리' 트리스 스피커, 해리 후퍼, 더피 루이스 등을 발굴해냈다. 펜웨이파크가 개장한 1912년, 보스턴은 지금도 프랜차이즈 기록으로 남아있는 105승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월드시리즈에서는 존 맥그로의 뉴욕 자이언츠를 꺾고 두번째 왕좌에 올랐다. 1915년 베이브 루스가 합류하면서 최강의 마운드가 구축됐다. 우드, 어니 쇼어, 루브 포스터, 루스의 4명은 아메리칸리그의 승률 1위부터 4위까지를 독식했다. 보스턴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월드시리즈도 1패 후 4연승으로 간단히 끝냈다. 그 해 겨울 보스턴은 뉴욕의 연극재벌 해리 프레지의 손으로 넘어갔다. 운명이 바뀌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초기 프레지는 구단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좋은 구단주였다. 그러나 연극사업에서 입은 손해를 메우기 위해 1919년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파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단돈 12만5,000달러에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포기한 것이다. 루스는 원래 투수였다. 첫 풀시즌이었던 1915년 18승을 올렸고, 이듬해에는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1회 1실점 후 나머지 1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 14회 연장전을 2-1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정규시즌에서는 당시 최고의 투수였던 월터 존슨(워싱턴 세너터스)와의 연장 13회 맞대결을 1-0 완봉승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1918년 13승과 함께 11홈런으로 홈런 1위에 오른 루스는 이듬해 타자로 전업,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29개의 홈런을 날렸다. 루스의 맹활약에 더불어 보스턴은 1916년과 18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루스의 이탈은 치명적이었다. 이후 보스턴은 1933년까지 14년동안 꼴찌만 8번을 차지하며 파멸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루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예고홈런'을 터뜨렸던 1932년에는 팀 최다패 기록인 111패를 당하기도 했다. 1933시즌이 끝나자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톰 야키가 구단을 매입한 것. 야키는 사망하기 전까지 보스턴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야키는 구단을 사자마자 베테랑 레프티 그로브, 지미 팍스, 조 크로닌 등을 영입했다. 1938년과 42년 사이에는 바비 도어, 테드 윌리엄스, 텍스 허그슨의 대형신인이 나타났다. 결국 1962년 보스턴은 27년만에 가장 좋은 성적인 .612의 승률로 리그 2위에 오르며 재기에1946년 테드 윌리엄스 등 1차대전에 참전했던 선수들이 돌아오고 투수 데이브 페리스와 1루수 루디 요크가 가세하면서 보스턴은 28년만에 아메리칸리그 정상에 올라섰다. 월드시리즈의 상대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양팀이 3-3으로 맞선 7차전 9회말의 세인트루이스의 공격. 해리 워커가 중전안타를 때리자 1루주자 에노스 슬래터가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3루를 지나 홈까지! 그러나 아웃이 당연했던 상황에서 커트맨이었던 레드삭스의 유격수 조니 퍼스키는 공을 두번이나 더듬었고, 슬래터는 '광란의 질주'를 무사히 끝냈다.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48년에는 클리블랜드와 동률 1위를 이루고 가진 1게임 플레이오프를 패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1경기만 이기면 우승할 수 있었던 마지막 더블헤더를 모두 패하며 좌절했다. 1950년에는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다 막판 최악의 부진으로 3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맥이 빠져서일까. 보스턴은 이후 리그 4위권으로 밀려났고, 1959년부터는 아예 최하위권으로 떨어졌다. 1966년 겨우 꼴찌를 면했던 보스턴은 이듬해 놀라운 투혼을 선보였다. 4팀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이겨내고 정규시즌의 마지막 날 극적인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테드 윌리엄스로부터 좌익수를 물려받은 칼 아스트렘스키는 트리플크라운과 함께 MVP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월드시리즈 상대는 또다시 세인트루이스. 그러나 밥 깁슨이 버텼던 세인트루이스는 이번에도 7차전 패배라는 아픔을 선사했다이후 5년간 2~3위권을 유지하는 안정된 전력을 선보였던 보스턴은 프레드 린이 최초로 신인왕과 MVP를 석권한 1975년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리그챔피언십에서 오클랜드를 물리치고 나간 월드시리즈. 칼튼 피스크는 6차전 연장 12회말에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날렸지만, 월드시리즈 챔피언은 신시내티 레즈의 몫이었다. 그 해 겨울 톰 야키는 끝내 월드시리즈 우승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로저 클레멘스가 '로켓 열풍'을 불러온 1986년 보스턴은 다시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를 꺾고 올라간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메츠를 만났다. 그러나 1986년의 월드시리즈는 '밤비노의 저주'를 다시 한번 각인시켰을 뿐이다. 레드삭스는 3승2패로 앞섰던 6차전에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1루수 빌 버크너가 '통한의 알까기'를 범하며 패했고, 결국 메츠에게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이후 3번의 지구 우승(88년, 90년, 95년)과 2번의 와일드카드(99년, 2000년)로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았지만, 리그 우승과 월드시리즈 우승에는 모두 실패했다. 보스턴에게 올시즌은 각별했다. 창립 100주년의 특별한 의미와 함께 시장에 나온 구단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월드시리즈 우승이 필요했다. 그러나 주전선수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내분이 일어나면서 자멸했다. 보스턴 팬들은 열성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누가 새 구단주가 되더라도 강팀으로서의 면모는 계속 지켜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밤비노의 저주'와양키스는 너무도 버거운 상대다
[ML 팀역사] <3> 신시내티 레즈
1876년 내셔널리그 출범과 함께 창단된 신시내티 레즈는 4년만에 리그에서 쫓겨났다. '구장내 술 판매를 금한다'라는 조항을 어겼기 때문인데, 당시 한 맥주회사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신시내티에게는 너무가혹한 조항이었다. <아메리칸어소시에이션>으로 무대를 옮겨 활동을 계속했던 신시내티는 1890년이 되서야 귀양살이를 끝냈다. 그러나 복귀한 신시내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만년꼴찌 자리였다. 신시내티가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것은 1917년. 크리스티 매튜슨 감독 체제가 본격 가동됐던 이 해 8년만에 5할 승률을 넘겼다. 프레드 토니는 시카고 컵스의 히포 본과 '노히트노런 맞대결'을 펼친 끝에 승리를 낚았다. 이듬해 리그 3위를 차지한 신시내티는 1919년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첫 내셔널리그 우승이자, 1882년 아메리칸어소시에이션 우승에 이은 37년만의 감격이었다. 원동력은 안정된 투수진. 슬림 샐리를 비롯한 4명의 투수가 96승 중 74승을 챙겼다. 신시내티는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5승3패로 꺾고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지만, '블랙삭스 스캔들'이 그 의미를 퇴색시켰다. 1926년까지는 강팀으로서의 위치를 지켰으나, 1927년부터 다시 바닥권으로 추락했다. 10년동안 꼴찌만 5차례. 1933년 구단주 시드니 웨일이 파산하자, 채권 은행은 마이너리그 구단을 회생시킨 경험이 있던 래리 맥파일에게 구단운영을 맡겼다. 맥파일은 1935년 최초로 야간경기를 도입해 관중수입을 2배 이상으로 늘리는 등 기지를 발휘해 구단 재정을 튼튼히 했다. 훗날 맥파일은 1938년 다저스의 단장으로 취임, 이후 브렌치 리키가 맹활약할 토대를 닦기도 했다. 빌 맥케니 감독의 첫 시즌이었던 1938년, 신시내티는 꼴찌에서 4위로 급상승했다. 포수 어니 롬바르디는 타격왕과 함께 MVP에 올랐으며, 자니 반더 미어는 전무후무한 2경기 연속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세웠다. 1939년 신시내티는 두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버키 월터스와 폴 데링어가 52승을 합작했으며, 1루수 프랭크 매코믹은 타점 1위에 올랐다. 그러나 오랜만에 나선 월드시리즈에서는 뉴욕 양키스에게 4연패의 수모를 당하며 물러났다. 이듬해 신시내티는 다시 내셔널리그를 평정했다. 특히 막강 투수력을 발판으로 아직까지도 메이저리그 기록으로 남아있는 41차례의 짜릿한 1점차 승리를 따냈다. 디트로이트와의 월드시리즈는 손에 땀을 쥐게 했던 명승부. 5차전까지 2승3패로 몰렸던 신시내티는 월터스의 완봉승으로 6차전을 잡아낸 다음, 7차전을 2-1로 승리, 두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3위권을 유지했던 신시내티는 1944년 이후 타선약화가 심각해지며 다시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50년대 들어 타선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던 신시내티1956년 프랭크 로빈슨, 윌리 포스트, 테드 클러츠스키의 대포타선을 내세워 메이저리그 팀홈런 타이기록(221개)을 세웠다. 팀 최초로 100만 관중을 돌파했으며, 올스타투표에서 몰표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성적은 3위. 1961시즌을 앞두고 단장에 취임한 빌 드위트는 밀워키로부터 투수 조이 제이를 영입하고, 시카고 화이트삭스로부터 3루수 진 프리스를 데려왔다. 제이는 21승으로 다승 공동 1위에 올랐으며, 프리스도 개인 최고인 26홈런 87타점을 기록하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신시내티는 5월초까지 바닥을 헤메는 초반부진을 딛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월드시리즈에서는 또 다시 양키스에 1승4패로 물러났다. 1964년에는 1경기 뒤진 2위에 오르기도 했으나, 60년대 대부분은 4위권에 머물렀다. 신시내티는 1969년 휴스턴과 이틀 사이에 노히트노런을 주고 받는 해프닝을 연출하며 아쉬운 60년대를 마감했다. 70년대는 신시내티 최고의 전성기였다. 1970년부터 79년까지 10년간 5번의 지구 우승과 4번의 내셔널리그 우승, 2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 기간 동안 신시내티의 선수들은 6개의 MVP 트로피를 쓸어왔다. 특히 자랑거리였던 강타선은 쉴새없이 방망이를 휘둘러 '붉은 기관총 군단(Big Red Machine)'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신시내티의 날카로운 스카우팅시스템은 1965년 아마추어드래프트가 시작되면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자니 벤치를 비롯, 켄 그리피, 할 매크레이, 투수 개리 놀란과 돈 걸렛 등 주요전력의 대부분을 드래프트에서 얻었다. 1969년 쯤 되자 신시내티에는 피트 로즈, 토니 페레즈를 비롯한 뛰어난 선수들이 득실거렸다. 그리고 1970년 스파키 앤더슨 감독의 취임을 계기로 비로소 '서말 구슬'이 꿰어지기 시작했다1970년 신시내티는 30년만에 100승을 돌파하며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피츠버그를 격파, 기세 좋게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프랭크 로빈슨이 이끄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맥없이 물러났다. 이듬해 공격력이 둔화되며 잠시 4위로 주춤했던 신시내티는 1972년 '복덩어리' 조 모건의 합류로 다시 서부지구를 평정했다. 천신만고 끝에 챔피언십시리즈를 통과한 신시내티는 바이다 블루-켄 홀츠먼-캣피시 헌터의 삼각편대를 내세운 오클랜드와 월드시리즈를 가졌다. 그러나 7차전 중 6경기가 1점차 승부였을 정도의 숨막히는 접전 끝에 오클랜드에게 무릎을 꿇었다. 70년대는 또한 막강 투수력을 내세운 LA 다저스와의 한판대결이었다. 신시내티에 벤치, 로즈, 모건 등의 강타자가 즐비했다면, 다저스에는 돈 서튼, 클로드 오스틴, 앤디 메서스미스, 버트 후튼, 토미 존, 마이크 마셜 등의 명투수가 빼곡했다. 1973년 신시내티는 후반기 대약진으로 다저스를 따돌리고 지구우승에 성공했지만, 챔피언십서 뉴욕 메츠에게 일격을 당했다. 이듬해는 다저스에게 밀려 지구 2위. 1975년은 '빅레드머신'의 최고의 해를 보냈다. 108승으로 프랜차이즈 최다승기록을 세웠으며, 1927년의 양키스를 제치고 역대 최고에 선정될 정도로 타선의 파괴력이 절정에 달했다. 마운드에서는 타선의 지원을 듬뿍 받아 10승투수 6명이 배출됐다. 신시내티는 챔피언십시리즈에서 피츠버그를 3연승으로 간단히 제압하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월드시리즈는 시리즈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였다. 5차전까지 3승2패로 앞섰던 신시내티는 6차전 12회말 보스턴의 칼튼 피스크에게 치명적인 끝내기 홈런을 맞았으며, 7차전에서도 5회까지 0-3으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6회부터 '붉은 기관총'이 가동되기 시작, 결국 9회초 토니 페레즈의 결승 솔로홈런으로 극적인 4-3 극적인 승리를 낚았다. 조 모건의 기량이 최고조에 올랐던 1976년 신시내티는 가볍게 지구우승을 따낸 다음 챔피언십시리즈를 3연승, 월드시리즈를 4연승으로 끝내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상대는 각각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뉴욕 양키스. 그러나 1976년을 끝으로 팀의 정신적 지주였던 페레즈가 몬트리올로 트레이드되면서 '빅레드머신'의 해체가 시작됐다. 신시내티는 이후 2년 연속으로 다저스를 넘지 못했고, 앤더슨 감독은 해임됐다. 로즈는 FA로 풀려 필라델피아로 이적했다. 1979년 신시내티는 지구우승에 성공했지만, 챔피언십시리즈에서 피츠버그에게 패퇴했다. 시즌이 끝나자 모건은 고향 휴스턴으로 떠났고, '빅레드머신 시대'는 그렇게 끝이 났다. 드래프트를 통해 최강팀으로 군림했던 신시내티는 돈이 최고인 FA제도가 정착되자 점차 기력을 잃기 시작했다. 1981년에는 파업이 일어나기 전까지 메이저리그 구단을 통털어 최고승률을 마크하고 있었으나, 사무국이 갑자기 전후기 우승제를 채택하는 바람에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됐다. 1982년 프랜차이즈 기록인 101패를 당했으며, 이듬해에도 꼴찌를 지켰다. 신시내티는 1984년 피트 로즈가 감독 겸 선수로 취임하고, FA시장에서 데이브 파커를 건진 후 바닥을 벗어났다. 1985년부터 4년동안 신시내티는 지구 2위를 지켰다. 1985년 타이 콥의 통산최다안타기록을 넘어섰던 로즈는 1989년 자신의 팀을 걸고 도박을 했다가 야구계에서 영구히 추방을 당했다. 루 피넬라가 지휘봉을 잡은 1990년 신시내티는 9연승으로 시즌을 시작한 끝에, 샌프란시스코와 다저스를 제치고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타선에서는 유격수 배리 라킨과 88년의 신인왕 크리스 사보가 돋보였으며, 롭 디블, 놈 찰튼, 랜디 마이어스의 '내스티 보이스'가 불펜을 굳게 지켰다. 챔피언십시리즈에서 피츠버그를 꺾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신시내티는 예상을 깨고 스타군단 오클랜드를 4연승으로 제압했다. 호세 리호가 선봉에 선 신시내티의 투수진은 오클랜드의 막강타선을 단 8점으로 봉쇄했다. 신시내티는 데이비 존슨이 감독에 취임한 1994년 파업으로 중단되기 전까지 지구 1위를 유지했고, 그 이듬해에도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새로 도입된 디비전시리즈에서 다저스를 꺾었지만,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애틀랜타에 패했다. 이후 신시내티는 1999년 와일드카드 결정전에 진출한 것을 제외하면, 휴스턴과 세인트루이스의 등쌀에 밀려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없는 살림에 켄 그리피 주니어를 데려온 짐 보든 단장은 전력상승을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역시 돈이 문제다.
[ML 팀역사] <5>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 함께 월드시리즈 최다승 2위(9회)를 차지하고 있는 명문팀이다. 출발 당시 <브라운스>였던 이름은 <퍼펙코스>를 거쳐 1901년 <카디널스>로 고정됐다. 1902년부터는 밀워키에서 건너온 <브루어스>가 <브라운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다 1954년 볼티모어로 이전, 현재의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됐다. 세인트루이스는 1891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이 해체되자 무대를 내셔널리그로 옮겼다. 그러나 1913년까지는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1916년 제임스 존스 구단주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브라운스에서 브렌치 리키를 데려온 것.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꼽히는 리키는 1920년 부회장 겸 단장에 취임하며 처음으로 제대로된 팜시스템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 찾아올 카디널스의 전성기는 32개팀, 6백여명의 마이너리거를 독점할 수 있게 만든 리키의 공헌 덕이었다. 2루수 로저스 혼스비가 지휘봉을 잡은지 2년째인 1926년, 세인트루이스는 첫 내셔널리그 제패에 성공했다. 5년동안 4할타율을 세번 기록했던 혼스비는 비록 타율이 .317로 급락했지만,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월드시리즈에서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밥 뮤젤이 버티고 있던 막강타선의 뉴욕 양키스를 상대한 세인트루이스는 피트 알렉산더와 제시 헤인스가 이끈 투수진이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며 첫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줬다. 세인트루이스는 이후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의 발목을 2번 더 잡아내, LA 다저스(브루클린 시절 포함)와 함께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가장 많이 저지킨 팀이 됐다. 특히 다저스가 상대전적에서 3승8패의 절대 약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세인트루이스는 3승2패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시즌이 끝나자 구단주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혼스비는 뉴욕 자이언츠로 보내졌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는 이후 1931년까지 세번의 리그 우승과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번 더 차지하며 내셔널리그의 새로운 강자로 올라섰다. 1934년의 세인트루이스에는 '개스하우스 갱(Gashouse Gang)'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감독겸 2루수 프랭크 프리시, 외야수에서 3루수로 전향한 페퍼 마틴, 유격수 리오 듀로서, 좌익수 조 매드윅, 1루수 립 콜린스로 이뤄졌던 그들은 화끈한 성격만큼이나 실력도 좋았다. 마운드에서는 디지 딘, 폴 딘 형제가 돋보였다. 정규시즌에서 49승을 합작한 이들은 월드시리즈에서도 나란히 2승씩을 따내며 팀의 세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됐다. 그러나 1932년부터 36년까지 5년간 120승을 올리며 거침없이 질주했던 디지는 1937년 올스타전에서 당한 발가락 부상이 어깨부상으로 이어지며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1937년을 끝으로 세인트루이스의 전력은 하향세로 접어들었다. 구단주 샘 브레든은 1938년부터 3년동안 사령탑을 5번이나 갈아치우는 조급함을 보였지만, 마지막 선택만큼은 탁월했다. 1940시즌 중반, 마이크 곤살레스로부터 지휘봉을 넘겨받은 빌리 사우스워스는 그 후 레드 쇼엔디스트와 함께 세인트루이스의 2대감독으로 꼽힐만한 업적을 쌓았다. 1941년 세인트루이스는 10년만에 가장 많은 승수인 97승을 올렸지만 내셔널리그의 왕좌는 100승을 올린 브루클린 다저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시즌이 끝날 무렵, 세인트루이스에는 팜 최고의 걸작품 스탠 뮤지얼이 도착했다. 통산 타율 .331 3,630안타 475홈런 1,951타점, MVP 3회, 올스타전 24회 출장, 타격왕 7회의 화려한 기록이 말해주듯 뮤지얼은 세인트루이스가 배출한 최고의 슈퍼스타다. 뮤지얼의 풀타임 첫 해였던 1942년 세인트루이스는 106승을 올리며 역사상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9월까지 1위는 다저스였지만, 세인트루이스는 마지막 13경기에서 12승을 따내며 대역전에 성공했다. 에이스 모트 쿠퍼는 다승과 방어율 1위에 오르며 MVP를 수상했고, 자니 비즐리는 각 2위에 랭크됐다.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는 첫 판을 잃었지만 나머지 4경기를 모두 이기며 가장 완벽했던 1942시즌을 마감했다. 시즌이 끝나자 브레든 구단주는 마이너리거를 사이에 두고 갈등을 빚었던 리치를 해임했다. 뮤지얼이 첫번째 MVP를 수상한 1943년 세인트루이스는 105승을 거두며 다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이번에는 양키스에 패퇴했다. 그러나 1944년에는 동향팀 브라운스를 꺾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위로 잠시 주춤했던 세인트루이스는 1946년 다시 내셔널리그 패권을 차지했다. 에노스 슬래터는 타점왕에 올랐으며, 뮤지얼은 타율 장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득점의 6개 부문을 독식하며 두번째 MVP 수상에 성공했다. 세인트루이스는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나온 슬래터의 '광란의 질주'로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의 무적행진은 더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브루클린 다저스라는 난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1942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쫓겨났던 리키는 곧바로 다저스로 향해 팜을 정비했고, 47년에는 재키 로빈슨을 등용함으로써 흑인선수라는 보물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1947년부터 49년까지 세인트루이스는 평균 90승을 기록했지만, 다저스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리키의 통쾌한 복수극이었다세인트루이스는 1946년부터 17년 동안 우승의 달콤함을 맛보지 못했다. 다른 팀들도 팜시스템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선점효과가 사라진 데다가, 리키의 두번째 팜은 너무 강력했다. 1963년까지 다저스는 내셔널리그를 8번 제패했다. 밥 깁슨이 18승을 올린 1963년 세인트루이스는 93승으로 다저스에 이어 지구 2위를 차지하며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이듬해 6월 중순까지 바닥을 기고 있던 세인트루이스는 시카고 컵스에서 루 브록을 데려온 것을 전환점으로 맹렬한 선두추격을 시작했다. 세인트루이스는 결국 신시내티 레즈와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한경기 차로 물리치고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월드시리즈의 상대는 양키스였다. 61-62년 월드시리즈 챔피언이자 63년 준우승팀인 양키스에는 로저 매리스와 미키 맨틀의 쌍포가 버티고 있었다. 양팀이 3승3패로 맞선 7차전. 5차전에서 10이닝 완투승을 기록했던 깁슨은 7차전에서도 완투승을 따내며 카디널스에게 일곱번째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선사했다. 월드시리즈가 끝나자 자니 케인 감독은 자리를 양키스로 옮겼고, 레드 쇼엔딘스트가 새감독으로 부임했다. 쇼엔디스트는 이후 1976년까지 역임하며 세인트루이스의 역대 감독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팀을 지휘했다. 1965년과 1966년 세인트루이스는 각각 7위와 6위에 머물렀지만, 전력은 점점 다져지고 있었다. 1967년 세인트루이스는 올랜도 세페다의 파워, 브럭의 스피드, 안정적인 투수진의 조화속에 101승을 거두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월드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였다. 정규시즌에서 13승에 그쳤던 깁슨은 1차전 1실점 완투승, 4차전 완봉승, 7차전 2실점 완투승으로 월드시리즈 MVP에 올랐고, 레드삭스 타자들은 그에게 '악몽(Nightmare)'이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1968년은 깁슨을 위한 해였다. 34경기에 출장 22승(9패), 13완봉승, 1.12의 방어율로 20세기 이후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투수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특히 1.12의 방어율은 데드볼 시대 이후 최고의 단일시즌 방어율로 남아 있다. MVP와 사이영상을 석권한 깁슨은 월드시리즈에 나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타자들에게 다시 악몽을 선사하려 했다. 1차전에서 완봉승, 4차전에서 1실점 완투승을 따낸 깁슨은 다시 7차전의 선발투수로 나섰다. 하지만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았다. 깁슨은 6회까지 무실점으로 역투했지만, 중견수 커트 플러드가 짐 노스롭의 타구를 3루타로 만들어주며 2실점을 하게 됐고, 결국 경기는 디트로이트의 4-1 승리로 끝났다. 1969년 세인트루이스는 동부지구에 편입되면서 LA 다저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신시내티 레즈 등의 강자들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70년대에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1981년 화이티 허조그가 감독으로 부임하고, 1982년 유격수 아지 스미스와 외야수 윌리 맥기가 등장하면서 세인트루이스에 봄날이 찾아왔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데려온 '오즈의 마법사' 스미스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수비로 12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수상하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유격수로 등극했다. 리그 최다승인 92승을 기록한 세인트루이스는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서부지구 우승팀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를 물리치고 12년만에 내셔널리그를 제패했다. 월드시리즈는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대결이었다. 카디널스는 1차전을 0-10으로 대패했지만, 롤리 핑거스가 부상으로 빠진 밀워키의 불펜을 효과적으로 공략하며, 4승3패의 극적인 승리를 일궈냈다. 이후 2년 동안 선두경쟁에서 벗어났던 세인트루이스는 1985년 또 한 명의 걸물, 빈스 콜맨을 맞이했다. 콜맨이 110개의 누를 훔친 이 해, 세인트루이스는 번개발들은 314개의 팀도루를 기록했는데, 이것은 2위팀에 무려 132개나 앞선 수치였다. 세인트루이스는 다저스를 4승2패로 제압한 후 월드시리즈에 올랐지만, 캔자스시티 로열스에게 3승1패 후 3연패라는 통한의 역전패를 당했다. 1987년 세인트루잇는 다시 동부지구를 평정한 후 샌프란시스코를 4승3패로 물리치고 월드시리즈 무대에 올랐지만, 프랭크 비올라와 커비 퍼켓이 버틴 미네소타 트윈스를 꺾지는 못했다. 시즌이 끝나자 클락은 뉴욕 양키스로 이적했고, 이때부터 세인트루이스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0년 팀이 밑바닥에서 허우적대자 허조그 감독은 경질됐고, 지휘권은 조 토레에게 넘어갔다. 토레의 부임 후 카디널스는 선전했지만, 마지막 7경기를 모두 패하며 72년만에 팀 순위의 가장 아랫부분에 이름을 남기고 말았다. 토레의 재임기간 동안 세인트루이스는 비교적 안정적인 전력을 유지했지만, 항상 우승으로 가는 마지막 한 계단을 넘지 못했다. 토레 감독은 1995시즌 중반에 전격해임된 후 양키스로 건너가 월드시리즈 4회우승을 일궈냈다. 뒤를 이은 감독은 80년대 후반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토니 라루사. 1996년 세인트루이스는 리그가 3개 지구로 나눠진 이후 첫번째 중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디비전시리즈에서 샌디에이고를 일축했고, 애틀란타와의 챔피언십시리즈에서도 3승1패로 앞서 나갔지만, 마지막 3경기를 1-12, 1-3, 0-15로 대패하는 수모를 당했다. 1997시즌 중반 세인트루이스는 트레이드 시장에 나와있던 마크 맥과이어를 세 명의 마이너리그 투수로 낚는 잭 팟을 터뜨렸다. 이때부터 세인트루이스의 야구는 속도에서 파워중심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맥과이어가 합류한 후부터 3년 동안 가장 좋았던 성적은 지구 3위에 불과했지만, 그의 홈런쇼 덕분에 세인트루이스는는 최고의 인기구단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2000년 세인트루이스는 맥과이어 없이도 235개의 홈런을 날리며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뉴욕 메츠에 막혀 월드시리즈의 무대를 밟는 데는 실패했지만,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애틀란타를 격파하며 96년의 수모를 되갚았다. 지난해 월드시리즈 우승 후보라는 찬사를 받았던 세인트루이스는 예상과는 달리 천신만고 끝에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러나 디비전시리즈에서 애리조나의 원투펀치에 막혀 다시 한번 월드시리즈 우승에 좌절했다. 시즌이 끝나고 팀의 상징인 맥과이어가 은퇴를 선언했지만, 티노 마르티네스와 제이슨 이스링하우젠을 영입, 오히려 전력은 강화됐다. 세인트루이스는 올해도 가장 유력한 월드시리즈 우승 후보 중 하나다.
[ML 팀역사] <6>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클리블랜드는 1995년부터 5년 연속으로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의 최강팀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그에 앞선 25년 동안은 빅리그 최악의 팀 중 하나였다. 1899년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가 내셔널리그에서 퇴출되자, 아메리칸리그의 회장 밴 존슨은 1901년 창설과 동시에 새 팀을 만들어 클리블랜드를 장악했다. 푸른색의 유니폼 때문에 <블루스>로 불렸던 그들은 <브론코스> <냅스>를 거쳐 1915년 <인디언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스파이더스는 마지막 시즌에 134패(20승)을 당하며 메이저리그 최다패 기록을 세웠다. 새로운 클리블랜드 팀도 허약하기는 마찬가지. 창단 첫 해 겨우 리그 꼴찌를 면했으며, 이듬해에는 6월까지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대선수의 영입으로 클리블랜드의 운명은 바뀌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라셔웨이는 호너스 와그너, 타이 캅과 함께 20세기를 연 최고의 타자. 통산타율이 .338에 달하며, 20세기 타자로는 두번째로 3,000안타를 돌파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슈퍼스타였던 라셔웨이는 선수들을 노예나 다름없게 만드는 '보류조항'에 정면으로 도전했다가 내셔널리그에서 추방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었고, 결국 클리블랜드에 합류했다. 클리블랜드는 라셔웨이의 맹활약에 힘입어 5할이 넘는 승률로 시즌을 마감했다. '라셔웨이 효과'는 성적만이 아니었다. 팀의 인기가 치솟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흥행 구단'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03년 클리블랜드는 아예 이름을 냅(나폴레옹의 줄임말)에서 따온 <냅스>로 바꿨다. 1908년 클리블랜드는 디트로이트와 함께 리그 최다승인 90승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나 우천취소경기가 있었던 디트로이트는 패수가 하나 더 적었고 결국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클리블랜드는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메이저리그에는 우승과 관련된 우천취소경기는 모두 재경기를 치르며, 동률 1위일 경우 플레이오프를 갖는 새로운 조항이 만들어졌다. 1911시즌을 앞두고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었다. 퍼펙트게임(1908)과 노히트노런(1910)을 한차례씩 달성한 에이스 에디 조스가 급성결핵으로 죽었지만,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현 오클랜드)로부터 데려온 조 잭슨이 .408로 신인 최고타율기록을 세웟다. 1914년 102패를 당하며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자 클리블랜드는 라셔웨이를 어슬레틱스로, 잭슨을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보냈다. 냅스라는 명칭은 팬 투표를 통해 인디언스로 바꿨지만, 관중수는 역대 최저수준으로 추락했다. 훗날 잭슨은 화이트삭스에서 '블랙삭스 스캔들'에 휘말려 메이저리그에서 추방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1916시즌을 앞두고는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회색 독수리' 트리스 스피커와 마이너리그로부터 투수 짐 배그피, 스탠 코벨레스키를 영입했다. 스피커는 .386의 타율로 타이 캅의 타격왕 행진을 9에서 공식적으로(?) 저지시켰다. 1916년 6위에 그쳤던 클리블랜드는 3인방의 활약 속에 1917년 3위, 18-19년 2위로 올라서며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1920년 클리블랜드는 시즌 중 레이 챔프먼이 투수가 던진 공에 맞아 숨지는 비극적인 사건을 딛고 처음으로 리그 정상에 올랐다. 감독 겸 선수 스피커(.388)가 이끈 타선은 3할타율(.303)을 돌파했으며, 배그비와 코벨레스키는 각각 31승과 24승을 올렸다. 화이트삭스가 치열한 경합을 벌였지만, 막판에 '블랙삭스 스캔들'의 주모자 8명의 영구추방이 결정된 후 자멸했다. 클리블랜드는 월드시리즈에서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를 4승1패로 제압하고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상승세는 이듬해에도 계속됐지만, 막판 부진으로 리그 챔피언을 뉴욕 양키스에 내줬다. 양키스에게는 명문팀의 초석을 다지는 첫번째 리그 우승이었다. 이후 클리블랜드는 1947년까지 26년동안 주로 상위권에 머무르며 2번의 준우승에 만족해야만 했다. 40년대 클리블랜드에는 밥 펠러와 루 부드루라는 2명의 슈퍼스타가 등장했다. 17세의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펠러는 첫 경기에서 15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는 것을 시작으로 메이저리그를 공습, 40년대 최고의 강속구투수로 군림했다. 커브마저도 일품이었던 펠러는 2차대전 때 자원입대로 군대에서 3년반을 보냈으면서도 통산 266승(162패)과 함께 2,581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 유격수인 부드루는 뛰어난 수비력과 함께 정확한 타격을 자랑했으며, 야구에 대한 남다른 센스를 갖고 있었다. 테드 윌리엄스(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한 수비변형작전인 '부드루 쉬프트'로 유명한 부드루는 1942년에는 약관 24세의 나이에 감독으로 취임, 메이저리그 최연소 감독기록을 세웠다. 1947년 회장에 취임한 '흥행의 귀재' 빌 빅은 래리 도비를 기용, 아메리칸리그에서는 처음으로 흑인선수를 등용했다. 이듬해 클리블랜드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4파전과 보스턴과의 플레이오프를 통해 리그 챔피언에 올랐다. 월드시리즈에서는 마운드의 맹활약 덕분에 .199라는 말도 안되는 팀타율로 보스턴 브레이브스를 꺾었다. 그 해 클리블랜드는 260만명을 동원, 메이저리그 최초로 200만 관중을 돌파했다1951년 알 로페스 감독의 취임을 계기로 클리블랜드의 '1차 전성기'가 시작됐다. 래리 도비, 루크 이스터, 알 로센, 빅 위츠가 '공포 타선'을 구축했으며, 마운드에는 밥 레먼, 얼리 윈, 마이크 가르시아, 아트 호트먼, 허브 스코어 등의 쟁쟁한 투수들이 버티고 있었다. 클리블랜드는 1956년까지 6년간 평균 95승을 올리는 혁혁한 전과를 세웠지만, 리그 우승은 고작 한번에 불과했다. 그 시절은 양키스의 최고 전성기이기도 했다. 양키스는 1949년부터 1958년까지 10년동안 아홉번의 리그 우승을 독식했다. 클리블랜드가 2위를 차지한 나머지 5년 동안 아메리칸리그 우승팀은 모두 양키스였다. 1954년은 클리블랜드 역사상 가장 완벽한 시즌이 될 뻔 했다. 프랜차이즈 최다승기록인 111승으로 103승의 양키스를 따돌렸으며, 다승(레먼, 윈) 방어율(가르시아) 홈런, 타점(이상 도비), 타격(아빌라) 등 개인타이틀의 거의 전부분을 휩쓸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는 월드시리즈에서 윌리 메이스가 'The Catch'를 선보인 뉴욕 자이언츠에게 충격적인 4연패를 당했다. 1957년을 끝으로 로페스 감독이 물러나면서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후 1968년까지 중위권에 머물렀던 클리블랜드는 1969년 강팀이 즐비한 동부지구에 편입되면서 본격적인 '꼴찌 행진'을 시작했다. 1993년까지 25년동안 최하위 7번, 최하위를 겨우 면한 것이 11번에 달했다. 1991년 존 하트 단장(현 텍사스 단장)의 취임은 암흑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앨버트 벨, 매니 라미레스, 짐 토미, 케니 로프턴, 오마 비스켈 등의 싱싱한 선수들로 라인업을 채우고, 신구조화가 절묘히 이뤄진 투수진을 구성한 클리블랜드는 1994년 중부지구 편입을 계기로 '2차 전성기'의 막을 열었다. 화이트삭스를 1경기로 쫓고 있던 도중 시즌이 중단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새구장인 제이콥스필드는 매진을 계속했다. 제이콥스필드의 매진행진은 지난해 4월5일까지 이어져 총 455경기 연속매진이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1995년 마침내 중부지구 우승에 성공했다. 간판타자 벨은 시즌단축에도 불구하고 메이저리그 최초로 '홈런 50개-2루타 50개'을 기록했으며, 투수진은 리그에서 유일하게 3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 클리블랜드는 보스턴과 시애틀 매리너스를 연파하고 기세 좋게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게 우승 트로피를 내줬다. 이듬해 지구를 2연패하고 다시 포스트시즌에 나섰지만, 디비전시리즈에서 와일드카드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덜미를 잡혔다. 1997년은 뭔가가 되는 분위기였다. 난적 양키스와의 대결이었던 디비전시리즈. 그 해 올스타전에서 MVP를 수상한 포수 샌디 알로마 주니어는 8회말 마리아노 리베라로부터 동점홈런을 쏘아올려 팀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냈다. 볼티모어와 맞붙은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토니 페르난데스가 6차전 연장 11회초에 짜릿한 결승홈런을 날렸다. 월드시리즈는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한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대결이었다. 클리블랜드의 우세가 점쳐졌지만, 플로리다의 에드가 렌테리아는 7차전 연장 11회말에서 끝내기 안타를 날려 클리블랜드를 세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의 꿈을 좌절시켰다. 1998년 클리블랜드는 디비전시리즈에서 보스턴을 꺾었지만,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만난 양키스를 넘지 못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직구가 90마일을 넘지 못했던 보스턴을 맞아 디비전시리즈에서 무너지는 수모를 당했다. 타선은 여전히 리그 최강이었지만, 기대했던 자렛 라이트가 부상, 바톨로 콜론의 부진하면서 '에이스 부재'의 악령이 포스트시즌만 되면 되살아났다. 2000시즌 돌풍의 화이트삭스에 의해 6연속 지구 우승이 저지됐던 클리블랜드는 지난해 다시 지구 타이틀을 찾아왔다. 그러나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대대적인 세대교체에 나선 탓에 올시즌의 전망은 어둡다. 클리블랜드가 90년대 초반 존 하트가 했던 팀재건을 다시 한번 해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ML 팀역사] <7> 시카고 컵스 [1]
가장 오랫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한 팀(94년)이자 가장 오랫동안 월드시리즈에 나가보지 못한 팀(57년). 그러나 최고의 인기구단으로 가장 오랫동안 한 도시를 지켜온 팀(132년)이기도 하다. 최초의 프로구단인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이어 1871년에 창단한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의 명맥을 이은 팀은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아니라 시카고 컵스다. 컵스는 1890년 이 소중한 이름을 버리는 우를 범했고, 이후 <콜츠> <오펀스>를 거쳐 1902년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컵스는 1876년 알 스폴딩과 캡 앤슨이라는 두 명의 슈퍼스타를 내세워 '내셔널리그 첫번째 우승팀'의 영광을 차지했다. 앤슨이 감독을 맡았던 11년(1880~1890) 동안 리그 우승 5회, 준우승 3회를 차지했고, 이후로도 강팀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컵스는 1906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1910년까지 5년 동안 4번의 리그 우승과 준우승 1번, 2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다. 씨앗은 1901년에 뿌려졌다. 프랭크 셀리 감독의 취임과 함께 세손가락으로 역회전성 커브를 던졌던 모데카이 브라운을 비롯 에드 릴박, 잭 피스터, 잭 테일러, 오발 오버럴 등의 명투수들이 합류했으며, 프랭크 챈스(1루수) 자니 이버스(유격수) 조 팅커(2루수)의 철벽내야진이 구축됐다. 특히 이버스와 팅커의 키스톤콤비는 'Tinker to Evers to Chance'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을 정도로 더블플레이의 대명사로 군림했다. 1906년 컵스는 메이저리그 팀최다승기록인 116승(36패)를 거뒀다. 지난해 시애틀 매리너스의 116승은 컵스보다 10패를 더 당하고 세운 기록이다. 메이저리그를 통틀어 유일하게 1점대(1.76)를 팀방어율을 기록했으며, 브라운 피스터 릴박은 나란히 리그 방어율 1,2,3위에 올랐다. 그러나 컵스는 팀타율 최하위로 아메리칸리그를 우승, '물방망이의 기적'으로 불렸던 동향의 시카고 화이트삭스에게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다. 이듬해 공격력은 다소 약화됐지만, 마운드의 맹위는 여전했다. 107승으로 리그를 제패한 다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 한경기도 내주지 않고 감격적인 첫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08년 컵스는 재경기 끝에 뉴욕 자이언츠를 꺾고 다시 리그 챔피언이 됐다. 자이언츠는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던 경기에서 프랭크 머클이 '머클의 본헤드'를 범함으로써 좌절하고 말았다. 컵스는 월드시리즈에서 다시 디트로이트를 꺾었다. 그러나 이것이 컵스의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이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09년 컵스는 104승을 거뒀지만, 110승의 피츠버그에 밀려 리그 2위에 만족해야만 했다. 1910년에는 리그 우승을 차지한 후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악몽의 '월드시리즈 7연속 패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듬해 컵스는 2위에 그쳤고, 그 다음해에는 3위로 한계단 더 물러났다. 전력강화에 관심없는 구단주를 비난했던 챈스 감독이 해임되면서, 컵스의 추락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16년 페더럴리그의 꿈을 접은 찰스 위그먼이 컵스를 샀다. 아울러 컵스는 현재의 리글리필드를 갖게 됐다. 위그먼은 최초로 관중에게 파울볼을 허용했고, 이 때부터 리글리필드에는 다른 팀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소중한 전통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1차대전의 여파로 시즌을 단축됐던 1918년 컵스는 8년만에 리그 정상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머클이 타선을 이끌었으며, 1917년 프레드 토니(신시내티)와 '더블 노히트노런'의 명장면을 연출했던 히포 본은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다. 그러나 컵스는 월드시리즈에서 베이브 루스가 맹활약한 보스턴 레드삭스를 넘는 데는 실패했다. 1921년 츄잉검으로 갑부가 된 윌리엄 리글리가 새 구단주가 됐다. 리글리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1925년에는 처음으로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전력은 서서히 다져지고 있었다. 1926년 명장 조 매카시 감독과 핵 윌슨이 합류했고, 이듬해에는 외야수 키키 카일러와 2루수 로저스 혼스비가 컵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1929년부터 컵스에는 3년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3년마다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월드시리즈에 가서 패했던 것. 29년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에게 1승4패, 32년에는 뉴욕 양키스에게 4연패로 물러났으며, 35년 디트로이트에게 2승4패, 38년은 다시 양키스에게 싹쓸이 4연패를 당했다. 1930년 윌슨은 지금도 메이저리그 기록인 191타점을 기록하며 스타 대열에 합류했지만, 술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추락했다. 이후 침체기를 보냈던 컵스는 1945년 세인트루이스를 꺾고 16번째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월드시리즈에서는 할 뉴하우저를 앞세운 디트로이트에게 7차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리글리필드에서 벌어진 월드시리즈 4차전. 염소를 데리고 왔다가 입장하지 못한 팬이 "컵스에게 저주가 내리리라"며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컵스는 한번도 월드시리즈에 나가지 못했다. 보스턴이 '밤비노의 저주'라면 컵스는 '염소의 저주'인 셈. '염소의 저주'에 걸린 컵스는 1946년부터 1966년까지 21년간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어니 뱅크스, 빌리 윌리엄스, 론 산토 등 걸출한 타자들을 배출했지만, 투수진이 너무 부실했다. 지난해 알렉스 로드리게스(텍사스)에게 깨지기 전까지 메이저리그 유격수 최다홈런기록(44개)을 보유했던 뱅크스는 배리 본즈(샌프란시스코)와 함께 통산 500홈런을 기록하고도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아보지 못한 단 2명으로 남아있다. 1961년 리글리는 8명의 코치가 감독을 번갈아 맡는 집단지도체제를 채택, 무려 4년이나 끌고 갔다. 그러나 사공이 많은 배가 바다로 갈리 만무했다. 1969년 내셔널리그 동부지구로 편입되면서 지구 우승을 노렸지만, 막판에 8연패를 당하는 사이 10연승을 거둔 '기적의 메츠'에게 우승을 내줬다. 1981년 61년간 소유권을 유지했던 리글리 가문은 '시카고 트리뷴 그룹'에게 컵스를 넘겼다. 컵스는 시즌중 클리블랜드에서 데려온 릭 셔클리프가 16승1패를 기록한 1984년과 안드레 도슨-라인 샌버그-마크 그레이스의 중심타선이 막강했던 1989년, 2번의 지구우승을 차지했지만 모두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무릎을 꿇었다. 도슨은 1990년 윌리 메이스에 이어 2번째로 2,000안타 300홈런 300도루를 기록했다. 1992시즌이 끝나고 컵스는 FA로 풀린 그레그 매덕스를 잡는데 실패했지만, 화이트삭스로부터 새미 소사를 얻는 행운을 잡았다. 컵스에게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케리 우드가 신인으로서 한경기 20탈삼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소사는 마크 맥과이어와의 홈런대결 끝에 66홈런과 MVP를 따냈다. 컵스는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제압했지만, 디비전시리즈에서 애틀랜타에게 3연패를 당했다. 이후 2년 연속 90패 이상을 당했던 컵스는 지난해 88승으로 부활했다. 부상에 시름하던 우드가 재기, 존 리버와 함께 안정적인 선발로테이션을 이끌었으며, 노장으로 가득차있던 라인업도 어느정도 세대교체에 성공했다. 특히 마이너리그에는 지난해 드래프트 1순위 지명자 마크 프라이어를 비롯, 후안 크루즈, 카를로스 잠브라노, 벤 크리스텐슨(이상 투수) 최희섭(1루수) 바비 힐(2루수) 데이비드 켈턴(3루수) 등의 대형유망주들이 즐비하다. 컵스의 미래는 화려한 장밋빛이다.
[ML 팀역사] <8>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디트로이트는 뉴욕 양키스에 이은 아메리칸리그 최다승 2위팀. 특출나지는 않았지만, 꾸준한 성적으로 101시즌에서 61번의 5할 이상 승률을 기록했다. 통산 아메리칸리그 우승 9회에 월드시리즈 우승은 4회를 차지했다. 아메리칸리그의 전신 <웨스턴리그> 출신인 디트로이트는 1907년 휴 제닝스가 감독에 부임하면서부터 강팀으로 부상했다. 제닝스가 지휘봉을 잡고 나서 첫번째 행한 조치는 타이 콥을 주전외야수로 기용한 것이었다. 콥은 풀타임 첫시즌이었던 1907년 타율 장타율 최다안타 타점 도루에서 1위에 오르며 이후 22년간 이어질 돌풍의 뚜껑을 열었다. 총 24년 중 22시즌을 디트로이트에서만 보낸 콥은 현재 통산타율 1위(.366) 최다안타 2위(4,189) 최다득점 2위에 올라있으며, 전무후무한 9년연속 타격왕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피트 로즈가 최다안타기록을, 리키 핸더슨이 최다득점 기록을 경신해 빛이 다소 바래지긴 했지만, 은퇴당시만 해도 그는 무려 90개의 메이저리그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콥은 각종 '역대 최고선수' 랭킹에서 최소한 3위에 올라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베이브 루스를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디트로이트는 콥과 샘 크로포드의 정교한 방망이를 내세워 1907년부터 3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월드시리즈 우승에는 모두 실패하며, 뉴욕 자이언츠(1911-1913)와 함께 월드시리즈를 3년 연속으로 나서고도 트로피를 가져가지 못한 두 팀 중 하나로 기록됐다. 1907년 월드시리즈의 상대는 당시 메이저리그 최강팀이었던 시카고 컵스였다. 디트로이트는 1차전에서 9회 2아웃까지 3-2로 리드했지만, 포수 찰리 슈미트가 경기를 끝낼 수 있는 공을 뒤로 빠뜨려 결국 무승부로 경기를 끝냈다. 컵스는 이후 4연승으로 우승트로피를 가져갔다. 이듬해에도 컵스에 1승4패로 물러난 디트로이트는 1909년에는 호너스 와그너가 이끄는 피츠버그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디트로이트는 이후 1933년까지 24년 동안 2위 3번, 3위 4번에 그치는 침체기를 보냈다. 1915년에는 100승을 거두고도 101승의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우승을 내주기도 했다. 1912년에는 두번의 기억할만한 사건이 있었다. 향후 87년 동안 홈구장으로 사용될 타이거스타디움이 개장한 것이 그 첫번째이며, 두번째는 경기 보이콧의 해프닝이 있었다. 관중을 폭행해 출장정지를 당한 콥을 구명하기 위해 선수단 전체가 출전을 거부한 것. 디트로이트는 다음날 아마추어선수들을 급조해 경기에 나섰지만,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에게 24-2로 대패했다. 디트로이트가 다시 리그 정상에 오른 것은 1934년이다. 감독 겸 포수 미키 코크린, 외야수 구스 고슬린, 1루수 행크 그린버그, 2루수 찰리 게링어 등의 활약이 돋보였으며, 마브 오웬(3루수)-빌리 로겔(유격수)-게링어-그린버그의 내야진이 탄탄했다. 특히 타선의 핵이였던 그린버그는 고향팀 뉴욕 양키스의 러브콜을 마다하고 기회가 충분한 디트로이트에 입단했다. 당시 양키스의 1루수는 루 게릭이었다. 개스하우스 갱'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맞붙은 1934년의 월드시리즈. 디트로이트는 디지-폴 딘 형제에게만 4승을 헌납하며 1907년부터 이어진 월드시리즈 연속 패배의 숫자를 4로 늘렸다. 11-0으로 대패한 7차전에서는 세인트루이스 조 매드윅의 거친 슬라이딩으로 타이거스타디움이 난장판이 되기도 했다. 그린버그가 170타점을 기록한 이듬해 디트로이트는 다시 리그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4전5기 끝에 첫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상대가 컵스여서 기쁨은 더했다. 월드시리즈가 끝나고나서 얼마후 월드시리즈 우승의 소원성취를 한 프랭크 내빈 구단주는 눈을 감았다. 5년 후인 1940년 디트로이트는 리그 최종일을 앞두고 클리블랜드와 동률 1위를 이루고 있었다. 마지막 경기는 공교롭게도 클리블랜드와의 맞대결. 디트로이트는 선발투수 플로이드 기벨이 '래피드 로봇' 밥 펠러를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6번째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신시내티와의 월드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팽팽한 승부였다. 마지막 7차전에서 디트로이트는 보보 뉴섬을 이틀만에 선발등판시켰고, 신시내티는 폴 데링어를 3일만에 마운드에 올렸다. 결과는 신시내티의 2-1 승리였다. 1944년 최종일의 패배로 우승을 놓쳤지만, 1945년에는 할 뉴하우저와 디지 트로트의 원투펀치를 내세워 다시 5년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뉴하우저는 25승에 1.81의 방어율로 2연속 MVP에 올랐으며, 제대한 그린버그는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을 확정짓는 만루홈런을 날렸다. 월드시리즈에서 디트로이트는 7차전 끝에 다시 컵스를 물리쳤다. 디트로이트는 이후 주로 중하위권에 머물렀다. 1961년에는 101승을 올리며 반짝했지만, 이 해 로저 매리스-미키 맨틀의 'M-M포'를 앞세운 양키스는 109승을 올렸다. 24년만인 1968년 디트로이트는 다시 리그 챔피언이 됐다. 에이스 데니 매클레인이 31승을 올렸는데, 이후 30승투수는 더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디트로이트는 매클레인과 미키 롤리치의 맹활약으로 밥 깁슨을 앞세운 세인트루이스를 꺾고 월드시리즈 왕관까지 차지했다. 1969년 지구제가 도입되면서 디트로이트는 동부지구에 편입됐다. 1972년에는 지구우승을 차지했지만, 챔피언십시리즈서 서부챔피언 오클랜드에게 패했다. 이후 조용한 나날을 보냈던 디트로이트는 1982년 신시내티의 '빅레드머신'을 이끌었던 스파키 앤더슨이 감독에 부임하면서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앤더슨 감독의 부임 3년째였던 1984년은 그야말로 디트로이트의 해였다. 시즌 시작과 동시에 9연승을 내달리더니, 첫 40경기에서 .875(35승5패)라는 엄청난 승률을 마크했다. 결국 디트로이트는 1927년의 양키스에 이어 역대 두번째로 시즌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단 한번도 1위를 내주지 않은 채 104승으로 아메리칸리그를 제패했다. 선발투수 중 방어율 10걸 안에 드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지만, 윌리 에르난데스와 아우렐리로 로페스가 버틴 불펜이 막강했다. 에르난데스는 32연속 세이브기록을 세우며 사이영상을 차지했다. 디트로이트는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캔자스시티를 꺾고 월드시리즈에서 다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일축했다. 앤더슨은 양대리그에서 모두 월드시리즈 우승을 맛본 최초의 감독이 됐다. 1987년에는 토론토를 꺾고 지구우승을 차지했지만, 챔피언십서 미네소타에 패했다. 디트로이트는 1988년 리그 2위를 끝으로 아직까지 13년 동안 5할승률을 단 2번 차지하는 극심한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팀재건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99년. 시즌이 끝나자 랜디 스미스 단장은 저스틴 톰슨, 게이브 케플러, 프랭크 카탈라노토 등의 유망주를 듬뿍 내주고 텍사스로부터 후안 곤살레스를 데려오는 최악의 수를 범했다. 디트로이트는 설상가상으로 곤살레스와의 장기계약에도 실패, 현재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하는 입장이다. 플로리다 말린스를 유망주 천국으로 다져놓은 데이브 덤브러스키 신임 회장의 활약이 기대된다
[ML 팀역사] <9>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1882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창립 멤버였던 피츠버그는 1887년 가장 먼저 탈퇴, 내셔널리그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1890년 새로 출범한 <플레이어스리그>의 팀에게 주전의 대부분을 빼앗기며 23승113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뒀다. 1891년에는 2루수 루 비어브로어를 강탈하다시피 데려오면서, '해적들(파이어리츠)'이란 이름을 얻었다. 1890년대 '최악의 팀'이었던 피츠버그는 이후 2개 팀을 흡수, 1900년대 초 내셔널리그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간판선수인 호너스 와그너(유격수)를 비롯, 프레드 클락, 토미 리치, 데콘 필립 등 피츠버그가 자랑했던 선수들의 대부분은 다른 팀에서 온 선수들이었다. 1901년 첫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한 피츠버그는 1903년까지 내셔널리그를 3연패했다. 아메리칸리그의 출범으로 인한 선수이탈이 가장 적었던 팀이 바로 피츠버그였다. 공격력이 리그 최강이었으며, 잭 체스브로-제시 태니힐-데콘 필립의 마운드도 안정적이었다. 1903년에는 체스브로와 태니힐의 이적에도 불구하고 리그 3연패에 성공했지만, 그 해 처음으로 열렸던 월드시리즈에서 보스턴 필그림스(현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3승5패로 패하며 내셔널리그의 자존심을 구겼다. 이후 주로 2위권을 유지했던 피츠버그는 1909년 지금도 프랜차이즈 기록으로 남아있는 110승을 올리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샤이브파크(필라델피아)와 함께 최초의 콘트리트-철근구장인 포스브필드도 개장했다. 피츠버그는 월드시리즈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4승3패로 꺾고 첫번째 월드시리즈 왕좌에 올랐다. 조용히 지내던 피츠버그가 다시 강팀으로 부상한 것은 1924년 3위에 오르면서부터. 피츠버그는 이듬해 글랜 라이트-키키 카일러-파이 트레이너-맥스 커레이 등이 불꽃 방망이를 휘두르며 리그 1위에 올랐다. 당시 피츠버그의 팀타율은 무려 .307에 달했다. 월드시리즈에서는 7차전 끝에 워싱턴 세너터스를 꺾어, 월터 존슨의 눈시울을 적셨다. 1927년은 폴-로이드 워너 형제의 해였다. 폴이 타율과 타점에서 1위, 로이드가 득점에서 1위를 차지하는 맹활약으로 카일러의 부상 공백을 극복했다. 형제는 최다안타에서도 나란히 1 2위에 올랐다. 그러나 피츠버그는 월드시리즈에서 그 유명한 '27년의 양키스'에게 힘 한번 못써보고 4연패로 물러났다. 이후 피츠버그에는 명유격수 아키 본, 홈런왕 6연패의 랠프 카이너 등이 등장했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1946년 새 구단주 존 갈브레스는 '마하트마' 브렌치 리키를 회장으로 고용했다. 이후 팀은 아예 바닥권으로 내려앉았지만, 리키의 '마이너리그 농장'에는 서서히 명품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그러부터 10년후 피츠버그는 딕 그로트, 빌 마제로스키, 로베르토 클레멘테, 밥 프랜드, 번 로, 로이 페이스 등의 쟁쟁한 선수들로 가득 차게 된다. 그로트가 MVP에 오른 1960년 피츠버그는 33년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마제로스키는 월드시리즈 역사상 가장 극적인 홈런으로 꼽히는 7차전 끝내기홈런을 날렸다. 1927년의 통쾌한 복수였다. 피츠버그는 이후 투수진이 붕괴하며, 다시 평범한 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광의 70년대'가 기다리고 있었다피츠버그는 1970년부터 79년까지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의 우승을 6번 차지하는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다. 그러나 '빅레드머신' 신시내티 레즈, '마운드 왕국' LA 다저스의 등쌀에 밀려 리그 우승은 2번에 불과했다. 70년대의 피츠버그는 역사상 가장 끈끈한 동료애를 발휘했던 팀으로 꼽힌다. 특히 윌리 스타겔이 리더에 오른 70년대 후반, 그들의 캐미스트리는 절정에 달했다. 당시 선수들은 스타델을 '아저씨(pops)'로 불렀으며, 스타겔은 자신의 동료들을 '가족(family)'이라 칭했다. 1970년 피츠버그는 6월까지 5할을 왔다갔다했지만, 7월 새로 개장한 '스리리버스 스타디움'으로 옮기고 나서 무서운 질주를 시작했다. 결국 피츠버그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신시내티에 완패를 당했다. 지긋지긋한 신시내티 징크스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듬해 다시 지구 정상에 오른 피츠버그는 챔피언십의 상대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였던 덕분에(?)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상대는 20승투수를 4명이나 배출한 볼티모어 오리올스. 피츠버그는 첫 2경기를 모두 내주는 위기를 맞았지만, 4승3패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클레멘테는 7차전의 쐐기를 박는 솔로홈런과 함께 12안타 2홈런 타율 .414의 맹타를 휘두르며 스타로서의 진가를 발휘했다. 1972년 다시 지구우승을 차지했지만, 챔피언십에서 신시내티를 넘지 못했다. 시즌이 끝나고 클레멘테는 니카라과 난민을 돕기 위해 구호물자를 실은 비행기에 올랐다가 추락 사고로 요절하고 말았다. 마침 은퇴직전까지 3,000안타를 쳤던 클레멘테는 5년의 유예기간 없이 곧바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그리고 사회봉사활동에 적극적인 선수들에게 수여됐던 시상제도는 그의 이름을 딴 '로베르토 클레멘테상'으로 바뀌었다. 마침 '영원한 파이어리츠맨' 마제로스키마저 은퇴, 피츠버그 팬들의 슬픔은 더했다. 1973년 지구 3위로 주춤했던 피츠버그는 1974년 시즌 후반의 무서운 돌풍으로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저스에게 덜미를 잡혔다. 피츠버그는 이듬해 다시 챔피언십에서 신시내티에게 3연패로 물러났다. 1976년부터 3연속 지구 2위에 그쳤던 피츠버그는 1979년 지구우승으로 챔피언십에 진출한다음 4번째 맞대결만에 신시내티에게 승리를 거뒀다. 신시내티의 '빅레드머신'은 이후 조 모건마저 떠나며 완전히 해체됐다. 볼티모어와의 월드시리즈는 1971년의 재판이었다. 한술 더떠 피츠버그는 1승3패 이후 내리 3연승을 거두며 4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82년 스타겔이 은퇴하면서 특유의 팀워크는 와해되기 시작했고 성적도 추락했다. 1985년 피츠버그의 지방정부와 기업가, 시민들은 성금에 세금까지 동원해 파이어리츠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구단주 다니엘 갈브레스를 저지했다. 1986년 시드 트리프트 단장-짐 릴랜드 감독 체제가 출범하면서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피츠버그는 1990년부터 지구 3연패에 성공했다. 특히 배리 본즈-바비 보니아-앤디 밴 슬레이크의 중심타선이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리그 챔피언십에는 신시내티에게 1차례, 애틀랜타에게 2차례 패하며 월드시리즈 진출이 좌절됐다. 1992시즌이 끝난후 트리프트 단장은 동시에 FA로 풀린 본즈와 밴 슬레이크 중 밴 슬레이크를 잡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고, 이후 피츠버그는 90년대 초반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피츠버그는 PNC파크의 개장과 더불어 새출발을 선언했다. 그러나 에이스 크리스 벤슨을 비롯한 마운드가 줄부상을 당하며 메이저리그 최저승률을 기록했다. 새 구장의 건립으로 재정이 좋지 않은데다가, 마이너리그까지 부실한 까닭에 피츠버그의 약세는 최소 몇 년간 더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ML 팀역사] <11>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는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에서 유일한 창립멤버다. 9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함께 2위 기록이며, 뉴욕 양키스의 횡포(?) 속에서도 아메리칸리그를 15차례나 제패했다. 에디 콜린스, 프랭크 베이커, 알 시먼스, 지미 팍스, 레프티 그로브, 캣피시 헌터, 롤리 핑거스, 레지 잭슨, 데니스 에커슬리, 리키 핸더슨, 마크 맥과이어, 제이슨 지암비는 모두 어슬레틱스가 배출한 수퍼스타들이다. 그러나 어슬레틱스는 동시에 아메리칸리그에서 꼴찌를 가장 많이 한 팀(28회)이자, 100패 이상의 시즌을 가장 많이 가졌던 팀(16회)이기도 하다. 또한 유일하게 동부(필라델피아) 중부(캔자스시티) 서부(오클랜드)를 모두 거친 '떠돌이'이며, 현재 다시 프랜차이스를 옮기려 하고 있다. 1901년 아메리칸리그를 창설한 밴 존슨은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의 주인으로 당시 밀워키에서 팀을 운영하고 있던 코니 맥을 골랐다. 맥은 구단주 겸 감독으로 1950년까지 지휘봉을 잡으며 최장재임기록과 함께 감독 통산 최다경기(7,755) 최다승(3,731) 최다패(3,948)에서 1위에 올랐다. 1902년 첫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한 어슬레틱스는 1905년에는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러나 내셔널리그 챔피언인 뉴욕 자이언츠와의 월드시리즈는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어슬레틱스는 '빅 식스' 크리스티 매튜슨에게 3번의 완봉패를 헌납하는 수모를 당했다. 어슬레틱스가 최강의 전력을 완성한 것은 1910년이었다. 에디 콜린스와 잭 배리의 영입으로 '10만달러짜리 내야진'을 구축했으며, 잭 쿰스, 에디 플랭크, 치프 벤더의 선발 트리오도 든든했다. 정규시즌에서 102승을 거둔 어슬레틱스는 시카고 컵스를 꺾고 첫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어슬레틱스는 이후 1914년까지 5년동안 4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석권했다. 1911년 마침내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다. 월드시리즈에서 자이언츠를 다시 만난 것이다. 쿰스, 플랭크, 벤더는 6경기를 8자책점으로 막아냈으며, 베이커는 결정적인 홈런 2개로 '홈런 베이커'라는 애칭을 얻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통쾌했던 복수는 매튜슨에게 2패를 안긴 것이었다. 이듬해 3위로 주춤했던 어슬레틱스는 1913년 다시 정상에 복귀했다. 또한 월드시리즈에서는 자이언츠에게 3연속 준우승의 아픔을 안겨주었다. 1914년에는 비록 돌풍의 보스턴 브레이브스에 밀려 월드시리즈 우승을 놓쳤지만, 누가 뭐래도 그들은 당대 최강의 팀이었다. 그러나 1914년을 끝으로 어슬레틱스는 무너졌다. 그들을 정상의 위치에서 끌어내린 장본인은 맥 자신이었다. 맥은 1915년에 새로 출범하는 페더럴리그 때문에 선수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으로 예상했다. 맥은 콜린스(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베이커(뉴욕 양키스), 잭 배리(보스턴 레드삭스)를 팔고, 벤더와 플랭크는 아무 조건없이 풀어주는 우를 범했다. 그러나 맥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연봉인플레는 거의 없었으며 페더럴리그는 2년만에 붕괴됐다. 1914년 99승을 올렸던 어슬레틱스는 1년만에 109패를 기록했다. 또한 1916년에는 아직까지도 아메리칸리그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117패(36승)를 당했다. 무려 7년동안 계속된 '꼴찌행진'은 1921년이 되서야 끝났다. 1924년 알 시먼스의 영입을 팀 재건의 신호탄으로 삼은 맥은 1925년 마이저리그 최고의 팀이었던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선수들을 싹쓸이했다. 이 때 데려온 선수들은 역대 최고의 좌완투수로 꼽히는 레프티 그로브를 비롯, 조지 언쇼, 조 볼리, 맥스 비숍 등이었다. 또한 맥은 5만달러를 주고 퍼시픽코스트리그 포틀랜드로부터 미키 코크린을 사왔다. 그러나 맥이 했던 최고의 투자는 2,500달러로 지미 팍스를 건진 일이다. 당시 팍스를 데리고 있던 홈런 베이커는 그를 뉴욕 양키스에 팔려 했지만 이미 루 게릭을 보유하고 있던 밀러 허긴스 감독은 이를 거절했고, 팍스는 어슬레틱스의 차지가 됐다. 1925년 어슬레틱스는 88승 64패의 성적으로 2위에 올랐다. 무려 10년만에 맛보는 5할 승률이었다. 1927년부터는 양키스와의 혈전이 시작됐다. 당시의 양키스에는 베이브 루스-루 게릭-밥 뮤젤-토니 라제리의 '살인타선'이 버티고 있었다. 초반에는 양키스가 우세했다. 양키스는 1927년과 1928년 어슬레틱스를 2위로 밀어내고,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다음 3년은 어슬레틱스의 몫이었다. 1929년 어슬레틱스는 타점왕(157타점) 시먼스를 비롯한 6명의 선수가 79타점 이상을 올리는 고른 공격력으로 양키스보다 18경기가 앞선 104승을 올렸다. 또한 월드시리즈에서는 오랜만에 올라온 시카고 컵스를 4승1패로 제압했다. 1930년 어슬레틱스는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꺾었다. 그로브는 다승(28) 방어율(2.54) 탈삼진(209) 승률(.848) 세이브(9) 1위를 휩쓸었다. 1931년에는 프랜차이스 기록인 107승을 거뒀지만, 페퍼 마틴이 맹타를 휘두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의해 3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저지당했다.1932시즌이 끝나자 맥은 다시 선수들을 팔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우승을 당연하게 생각한 어슬레틱스 팬들이 경기장을 찾는 일이 뜸해지기 시작한 데다가, 대공황이 맥의 인내심을 자극했다. 결국 맥은 두번째 '점포정리세일'을 단행했ㄷ. 1935년부터 1950년까지 어슬레틱스는 10번의 꼴찌와 2번의 7위를 차지했다. 1946년 맥은 자신의 지분을 세 아들에게 나눠주었다. 마치 견훤의 세 아들과도 같았던 이들은 이 때부터 치열한 대권다툼에 들어가더니, 1950년에는 88세의 노부를 강제로 은퇴시켰고, 1954년에는 구단을 시카고 출신의 아놀드 존슨에게 팔았다. 어슬레틱스가 최고의 시장 중 하나인 필라델피아를 떠난 것은 바로 존슨의 결정이었다. 어슬레틱스는 캔자스시티에서의 13년동안 10명의 감독이 교체되는 등 어수선한 시절을 보냈다. 1960년 팀의 소유권을 얻은 찰스 핀리는 1967년 다시 캔자스시티를 떠나 서부로 향했다. 오클랜드에서의 첫 시즌이었던 1968년 16년만에 처음으로 패보다 승이 많은 시즌을 보냈다. 1969년과 1970년에는 미네소타 트윈스에 이은 지구 2위를 그쳤지만, '영광의 시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슬레틱스 팜의 전통이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자린고비' 핀리는 팜을 유독 강조했고, 그들은 '10월의 사나이' 레지 잭슨, '불펜 에이스' 롤리 핑거스, 3각편대 중 2명인 캣피시 헌터와 바이다 블루를 비롯, 중심선수들의 대부분을 자체생산해냈다. 1971년 어슬레틱스는 101승으로 서부우승을 차지함으로써 5년간 이어진 승전가의 서곡을 울렸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어슬레틱스는 5번의 지구우승과 3번의 리그우승,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다. 그들은 양키스를 제외하면 월드시리즈 3연패를 이룬 유일한 팀이다. 첫 해 동부지구 우승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월드시리즈 티켓을 내줬던 어슬레틱스는 1972년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어렵게 꺾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상대는 '빅레드머신'의 신시내티 레즈. 첫 4경기에서 3승1패로 앞섰던 어슬레틱스는 5,6차전에서 핑거스와 블루가 무너지며 3승3패 동률을 이뤘지만 마지막 7차전에서 헌터-홀츠먼-핑거스를 투입하는 총력전으로 3-2 승리를 거뒀다. 1930년 필라델피아 시절 이후 무려 42년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이었다. 레지 잭슨이 장타율 홈런 타점에서 1위를 차지하고 관중이 처음으로 1백만을 돌파한 1973년, 어슬레틱스는 뉴욕 메츠를 꺾고 월드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다. 잭슨은 7차전에서 굳히기 2점홈런을 날리며 '10월의 사나이'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74년 어슬레틱스는 LA 다저스를 4승1패로 제압하고 다시 월드시리즈를 가져왔다. 또한 5년간 계속된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아메리칸리그 방어율 1위 행진도 저지했다. 1975년 어슬레틱스는 5년연속 지구우승을 차지했지만 리그 챔피언십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KO패를 당했다. 시즌 후 헌터의 자유계약선언으로 전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법정까지 가는 우여곡절끝에 블루, 잭슨, 핑거스, 홀츠먼, 조 루디는 어슬레틱스를 떠났고, 어슬레틱스는 '배시 브라더스'와 데니스 에커슬리가 등장하는 80년대 후반까지 다시 음지를 지켰다. 1982년 어슬레틱스는 지구 5위의 부진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170만명의 관중을 동원, 프랜차이스 신기록을 세웠는데 관중의 대부분은 시즌최다도루기록에 도전하는 리키 핸더슨을 보기 위해 온 것이었다. 핸더슨은 130개의 도루로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988년 다시 최강팀이 결성됐다. 호세 칸세코와 마크 맥과이어의 홈런쇼에 관중은 최초로 2백만명을 넘어섰으며, 데이브 스튜어트와 밥 웰치는 39승을 합작했다. 어슬레틱스는 리그챔피언십에서 보스턴을 격파했지만, 월드시리즈에서는 예상 못했던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다윗(다저스)과 골리앗(어슬레틱스)'의 대결로 불린 월드시리즈에서 에커슬리는 커크 깁슨에게 1차전 끝내기 홈런을 맞았으며, 타자들은 오렐 허샤이저에게 2번의 완투승을 헌납했다. 1989년 어슬레틱스는 칸세코를 비롯한 주요선수들의 부상으로 고전했지만, 마이크 무어와 복귀한 핸더슨의 활약으로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꺾고 14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베이시리즈로 치뤄진 월드시리즈에서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가볍게 눌렀다. 1990년 최강의 투수진을 앞세운 어슬레틱스는 103승으로 지구를 평정한 후, 보스턴 레드삭스를 꺾고 월드시리즈에 올랐지만 호세 리호가 버틴 신시내티 레즈에게 4전4패로 무릎을 꿇었다. 1992년 에커슬리는 7승1패 51세이브 방어율 1.91의 성적으로 사이영상을 수상했지만, 리그챔피언십에서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패했다. 1992년을 끝으로 어슬레틱스는 다시 하향세로 접어들었다. 폭등하는 스타선수들의 몸값을 지불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팀의 기둥 맥과이어가 허리 부상으로 넉달 이상을 결장했던 1993년 어슬레틱스는 역사상 팀방어율과 팀타율에서 모두 꼴찌를 차지한 세번째 팀이 됐다. 1995시즌을 끝으로 토니 라루사 감독이 해임됐고, 1997년 중반 프랜차이스 스타인 맥과이어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되면서 어슬레틱스는 별볼일 없는 팀이 됐다. 그러나 빌리 빈 단장은 구단을 젊고 강한 팀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어슬레틱스는 2000년 8년만에 지구우승을 차지하며 멋지게 재기했다. 2001시즌 어슬레틱스는 초반 8승18패의 부진을 딛고 102승으로 시애틀 매리너스에 이어 전체승률 2위를 기록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두번째로 적은 총연봉으로 두번째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시즌이 끝나고 팀의 핵심전력인 제이슨 지암비, 제이슨 이스링하우젠, 자니 데이먼을 잃었지만, 막강한 선발진의 위력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ML 팀역사] <12>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최초의 프로구단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의 후예로, 현재의 메이저리그 구단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레드스타킹스가 프로화를 포기하자 감독 겸 간판타자였던 해리 라이트는 주축선수들을 다시 모아 보스턴 레드스타킹스를 만들었다. 레드스타킹스는 비니터스를 거쳐 1912년부터 브레이브스로 불리기 시작했다. 내셔널어소시에이션과 내셔널리그 초기에는 당대 최고의 선수들인 알 스폴딩과 로스 반스를 보유, 최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은퇴하면서 서서히 전력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1900년 무렵에는 최하위권으로 추락했다. 브레이브스는 1901년부터 1945년까지 45년동안 절반이 넘는 24년을 꼴찌 아니면 그 두번째에 위치했다. 1901년 아메리칸리그가 출범하면서 보스턴 야구팬의 대부분은 나약한 브레이브스 대신 레드삭스를 응원했다. 결국 브레이브스는 1953년 보스턴을 포기하고 밀워키로 떠났다. 보스턴 시절의 가장 짜릿한 추억은 '기적의 브레이브스(Miracle Braves)'라 불렸던 1914년. 1906년 최악의 공격력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쥔 '물방망이의 기적(Hitless Wonders 시카고 화이트삭스)', 1969년 '어메이징 메츠(Amaging Mets)'와 함께 빅리그의 3대 깜짝사건으로 꼽힌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밑바닥에서 시즌을 시작한 브레이브스는 7월말부터 갑자기 연승행진을 달리더니, 뉴욕 자이언츠를 꺾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 해 브레이브스의 팀타율과 팀방어율은 8개 팀 중 각각 4위에 불과했다. 브레이브스는 완패가 예상됐던 월드시리즈에서도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를 누르고 첫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았다. 이후 바닥을 기었던 브레이브스는 1946년 베테랑 빌리 사우스워스 감독을 영입하면서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듬해 워렌 스판이 21승을 거두는 돌풍을 일으켰으며, 투수 자니 세인, 3루수 밥 엘리어트, 유격수 앨빈 다크 등이 속속 등장했다. 스판은 통산 363승으로 역대 좌완투수 최다승(전체 6위)을 기록했다. 1948년 브레이브스는 아메리칸리그의 대권에 도전했지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1경기 차로 무릎을 꿇었다. 1952년 브레이브스가 리그 7위로 추락하자 홈 관중수는 4년전에 비해 5분의1 규모로 줄었다. 이에 구단주 루 페리니는 밀워키로의 이전을 결심했다. 1903년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뉴욕으로 이전, 하이랜더스(현 뉴욕 양키스)로 이름을 바꾼 이후 최초의 프랜차이즈 이동이었다. 밀워키시대'의 상징은 행크 애런. '최후의 니그로리거' 애런은 1954년 '세계에 울려퍼진 한방'의 주인공 바비 톰슨을 제치고 주전을 꿰찬 후, 21년간 브레이브스의 타선을 지켰다. 애런은 온갖 정신적 박해를 견디면서 1975시즌 홈개막전에서 베이브 루스를 넘는 역사적인 715호 홈런을 날렸다. 애런과 함께 에디 매튜스가 '공포의 쌍포'를 이뤘으며, 마운드에는 워렌 스판-류 버데트-밥 벌의 트리오가 든든했다. 1955-56년 연속 2위에 머물렀던 브레이브스는 시즌 중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부터 2루수 레드 쇼엔디스트를 영입한 후 급상승세를 타기 시작, 세인트루이스를 꺾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였다. 밀워키는 6차전까지 3승3패를 이룬후 버데트의 7차전 완봉승에 힘입어 두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월드시리즈에서 다시 양키스와 맞붙었다. 그러나 브레이브스는 4차전까지 3승1패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4연패를 당해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다. 1959년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3전2선승제의 플레이오프에서 다저스에게 패한후 또 관중이 급격하게 줄기 시작했다. 브레이브스는 다시 짐을 챙겨 1965년 애틀랜타로 향했다. 1969년 디비전제도의 도입으로 서부지구에 편입된 브레이브스는 막판 10연승으로 지구 우승을 차지하지만, 챔피언십시리즈에서 '기적의 메츠'에 패했다. 1976년 구단을 매입한 테드 터너는 전폭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하지만 터너의 투자는 1991년이 되서야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91년 바비 콕스의 감독 취임으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이후 브레이브스는 지난해까지 10년 연속 지구우승이라는 신기원을 이룩했다. 1991년 브레이브스는 내셔널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전년도 지구 꼴찌에서 1위로 도약했다. 타선에서는 테리 팬들턴-데이빗 저스티스-론 갠트의 트리오가, 마운드에서는 톰 글래빈-스티브 에이버리-존 스몰츠의 트리오가 시즌을 이끌었다. 브레이브스는 배리 본즈와 바비 보니아의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꺾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또 하나의 '꼴찌 신화'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월드시리즈는 시리즈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힌다. 7경기 중 5경기가 1점차 승부였으며, 그 중 3번이 연장전 끝에 승패가 갈렸다. 그러나 브레이브스는 7차전에서 미네소타의 잭 모리스에게 10이닝 완봉승을 내주며 월드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다. 이듬해 다시 토론토 블루제이스에게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내준 브레이브스는 1993년 시카고 컵스에서 FA로 풀린 그레그 매덕스를 영입하며 월드시리즈 우승을 노렸지만, 챔피언십시리즈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에게 발목을 잡혔다. 하지만 브레이브스는 1995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잡고 월드시리즈 우승의 숙원을 풀었다. 1996년 애틀랜타는 챔피언십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박살내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상대는 아메리칸리그의 신흥강호로 등장한 뉴욕 양키스. 1차전에서 12-1, 2차전에서 4-0 완승을 거뒀던 브레이브스는 3차전에서도 7회까지 2-1로 앞섰다. 그러나 8회초 양키스 포수 짐 레이리츠의 3점홈런 한방이 브레이브스의 운명을 바꿨다. 브레이브스는 4연패로 월드시리즈를 내준 것은 물론, 이후 포스트시즌에만 나가면 맥을 못추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1997년에는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와일드카드팀 플로리다 말린스에 패했으며, 98년에는 프랜차이즈 최다승인 106승을 올리고도 월드시리즈 진출권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내줬다. 99년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에게 치욕의 4연패를 당했으며, 2000년에는 디비전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에게 3전전패로 물러났다. 지난해 역시 챔피언십에서 만난 애리조나에 무릎을 꿇었다. 지구를 10연패를 하는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은 고작 1번이었다. 90년대 초반 브레이브스는 양키스 못지 않은 '큰 손'이었지만, 구단주인 TBS가 타임워너에 합병되고, 타임워너가 다시 AOL과 한살림을 차리면서 씀씀이를 크게 줄였다. 또한 전력의 추축이었던 매덕스-글래빈-스몰츠의 '사이영 트리오'는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존 슈홀츠 단장이 닦아놓은 팜시스템과 방대한 스카우팅 시스템, 선수단 사이에 흐르는 강한 자신감으로 인해 브레이브스는 당분간 강팀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ML 팀역사] <13> 볼티모어 오리올스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문 뉴욕 양키스와 최고의 스타 베이브 루스는 모두 볼티모어 출신이다.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1954년까지 볼티모어에는 메이저리그 팀이 존재하지 않았다. 볼티모어는 프로리그의 원조격인 내셔널어소시에이션부터 내셔널리그, 아메리칸리그에 모두 참가했던 전통적인 야구도시. 그러나 1903년 오리올스가 뉴욕으로 이전, 하이랜더스(현 뉴욕 양키스)로 이름을 바꾸고 난 후, 볼티모어 시민들은 워싱턴의 세너터스나 마이너리그의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응원해야만 했다. 1954년 이후만 놓고 보면 오리올스는 성적과 인기라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6번의 리그우승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 함께 양키스(17회)에 이은 아메리칸리그 2위 기록이며, 루스와 함께 전 미국인의 사랑을 받는 칼 립켄 주니어라는 수퍼스타도 배출했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 시절은 암울 그 자체였다. 오리올스의 전신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이지만, 그 출생지는 밀워키였다. 브라운스는 1901년 밀워키 브루어스로 아메리칸리그에 참가했다가, 이듬해 1902년에 세인트루이스로 이전했다. 브라운스라는 명칭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1898년까지 사용했던 이름으로, 덕분에 브라운스는 세인트루이스를 떠나기 전까지 항상 카디널스의 '밥'이었다. 52년 동안 브라운스는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25년을 최하위(11회) 또는 그 두번째(14회)에 위치했다. 하위그룹에서 맴돌던 브라운스의 숨통을 트여준 이는 브랜치 리키와 조지 시슬러였다. 1913년 중반 감독에 취임한 리키는 1914년 미시건대학 시절의 수제자인 시슬러를 영입했다. 시슬러의 풀타임 첫해였던 1916년, 브라운스는 8년만에 5할승률을 올렸다. 1920년 시슬러는 .407의 타율과 함께 지금까지도 단일시즌 최다안타기록으로 남아 있는 257개의 안타를 날렸다. 시슬러-어번 쇼커(20승) 콤비의 활약으로 브라운스는 1908년 이후 가장 좋은 순위인 4위에 올랐다. 시슬러가 1900년 이후 역대 3위기록인 .420의 타율을 마크한 1922년, 브라운스는 2위까지 상승했다. 팀타율과 방어율에서 모두 리그 1위에 올랐지만, 뉴욕 양키스의 2연패는 저지하는데는 실패했다. 대신 브라운스는 세인트루이스 시절의 가장 좋은 승률인 .604를 마크했다. 시슬러가 부상으로 한경기도 나서지 못한 이듬해, 브라운스는 다시 5위로 추락했다. 리키와 시슬러가 사라져 버린 브라운스는 이후 21년동안 한번도 타이틀 경쟁에 참가하지 못했다. 브라운스가 반짝한 것은 2차대전이 무르익었던 1944-45년이다. 특히 44년에는 세인트루이스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9월 내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밀고 밀리는 접전을 치뤘던 브라운스는 최종일에 가서야 우승을 확정지었다. 월드시리즈에는 동향팀인 카디널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운스는 스탠 뮤지얼과 모트 쿠퍼가 버티고 있는 카디널스의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승리도 돈도 챙기지 못한 구단주 빌 빅은 1953년 9월 구단을 볼티모어의 투자가들에게 팔았다. 오리올스는 행크 바우어가 지회봉을 잡게 되는 1964년부터 20년간의 전성기에 들어갔다. 이후 1983년까지 오리올스는 지구 우승 7회, 리그 우승 6회, 월드시리즈 우승 3회를 일궈내며 뉴욕 양키스의 독주에 종지부를 찍었다. 1966년 오리올스는 최고의 전력을 완성했다. 1959년 카디널스와의 동전던지기 끝에 1루수 부그 파월을 확보했고, 1965년 겨울에는 무려 4명의 선수를 내주는 대가로 신시내티 레즈로부터 프랭크 로빈슨을 데려왔다. 1962년 팜 디렉터였던 짐 맥라플린은 목이 날아갈 것을 각오하고 단장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8만달러의 거금으로 투수 데이브 맥널리를 잡았다. 맥라플린은 그 사건 때문에 해임됐지만, 맥널리는 68년부터 4년연속 20승을 거두며 오리올스에게 181승을 선사했다. 짐 파머의 영입도 인상적이었다. 토론토 시절 팻 길릭(현 시애틀 단장)이 션 그린(현 LA 다저스)의 집에 다짜고짜 쳐들어간 것처럼 리차드스 역시 파머의 집을 불시에 방문, 4만달러에 오리올스 유니폼을 입혔다. 파머와 맥널리는 1969년에 합류할 마이크 큘러와 함께 5년연속 팀방어율 1위의 막강 투수진을 이끌게 된다. 3루수 브룩스 로빈슨을 중심으로 데이비 존슨(2루수)-마크 벌랜저(유격수)로 이어졌던 내야진은 도합 27개의 골드글러브를 따냈을 정도로 철벽수비를 자랑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이었던 메이요 스미스는 "오리올스의 내야로 공을 날리는 것은 벽에다 햄버거를 던지는 꼴"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오리올스는 1966년 허먼 킬러브루가 버티고 있던 미네소타 트윈스를 꺾고 볼티모어에서의 첫번째이자 세인트루이스 시절까지 포함하면 통산 두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프랭크 로빈슨과 파월은 나란히 100타점을 넘겼고, 2년차 파머는 팀내최다승인 15승을 올렸다. 또한 LA 다저스와의 월드시리즈를 4연승으로 끝내며 감격적인 첫번째 월드시리즈 우승도 차지했다. 그러나 1967년 파머가 어깨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오리올스는 6위로 추락했다. 이듬해 맥널리와 짐 하딘의 활약으로 다시 2위에 올랐지만, 파머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1969년 파머가 돌아왔다. 파머는 그동안 트레이드마크였던 삼진 위주의 피칭을 버리고, 맞춰잡는 피칭으로 부상 이전보다 더 강력한 투수로 변모했다. 통산 8번의 20승시즌, 사이영상 3회에 빛나는 파머는 1984년을 끝으로 영원한 오리올스맨으로 남았다. 파머의 복귀로 천군만마를 얻은 오리올스는 .673(109승 53패)라는 승률을 기록하며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도입된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서부지구 챔피언 미네소타 트윈스를 KO시켰다. 뉴욕 메츠와의 월드시리즈는 당연한 오리올스의 승리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리올스는 '어메이징 메츠'에게 월드시리즈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톰 시버-제리 쿠스먼-놀란 라이언 등이 버틴 메츠의 마운드를 공략하지 못한 타선의 책임이 컸다. 1970년 오리올스는 108승으로 다시 아메리칸리그를 평정한 다음 월드시리즈에서는 내셔널리그 챔피언인 신시내티 레즈에게 확실히 앙갚음을 했다. 타율 .429(21타수 9안타) 6타점의 맹타를 휘두른 브룩스 로빈슨은 월드시리즈 MVP에 올랐다. 1971년 오리올스는 5명의 선발투수 중 무려 4명(파머, 큘러, 맥널리, 팻 돕슨)이 20승 이상을 거두는 빼어난 투수력으로 다시 동부지구의 우승자가 됐다. 리그 챔피언십에서는 신흥강호로 부상한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를 간단히 KO시키며 리그 챔피언십이 도입된 이후 세번의 우승을 모두 전승으로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월드시리즈는 1969년의 복사판이었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보다 한수 위의 전력으로 평가받았던 오리올스는 7차전 끝에 무릎을 꿇었다. 피츠버그의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7차전의 결정적인 솔로홈런으로 오리올스의 연속우승을 좌절시켰다. 1972년 3위로 주춤했던 오리올스는 73년과 74년 다시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리그 챔피언십에서 오클랜드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75년부터 3년연속 지구 2위에 머물렀던 오리올스는 79년 리그 챔피언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윌리 스타겔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맞아 또 다시 피츠버그에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헌납했다. 1982년을 끝으로 얼 위버 감독이 해임되면서 오리올스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위버 시대'가 14년만에 막을 내렸다. 위버 시대의 오리올스는 피츠버그 못지 않은 끈끈한 팀워크의 팀이었다. 전성기를 이끌었던 대부분의 선수는 위버 감독 밑에서 마이너리그부터 동고동락을 같이한 사이였다. 1981년 포스트시즌행은 좌절됐지만, 칼 립켄 주니어라는 보물을 얻었다. 온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립켄 덕분에 오리올스는 전국구 구단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립켄은 풀타임 첫 시즌이었던 1982년, 타율 .264 28홈런 93타점의 빼어난 성적으로 신인왕을 차지했다. 이듬해 립켄은 다시 가공할만한 공격력을 자랑하며 MVP를 수상했고, 오리올스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누르고 4년만에 동부지구 챔피언에 복귀했다. 서부 챔피언인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4경기만에 제압한 오리올스는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1-2로 패하며 69, 71, 79년의 악몽을 되풀이하는 듯 했다. 그러나 오리올스는 나머지 네경기를 7실점으로 버틴 투수진의 호투 덕에 4승1패로 세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 우승을 끝으로 오리올스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986년이 되자 더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듬해 한계단 상승하긴 했지만 .414의 승률은 32년만에 최악이었다. 1988년에는 개막후 21연패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프랭크 로빈슨 감독이 정식으로 부임한 1989년부터 오리올스는 다시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구 우승은 토론토, 보스턴, 양키스가 나눠 가졌고, 오리올스는 항상 2-3위권에 머물렀다. 1996년 피터 앤젤로스 구단주는 중요한 결정을 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팻 길릭 단장을 빼내온 것이다. 길릭은 데이비 존슨을 감독에 앉히는 것을 시작으로 데이빗 웰스, 켄트 머커, 랜디 마이어스, 로저 맥도웰, B J 서호프, 로베르토 알로마의 6명을 새로 영입하는 대대적인 개편을 했다. 오리올스는 뉴욕 양키스에 6경기 뒤진 동부지구 2위로 정규시즌을 마쳤지만, 타지구 2위팀들을 제치고 와일드카드를 획득했다. 에이스 마이크 무시나는 2년 연속 19승을 올렸으며, 스콧 에릭슨(13승)과 웰스(11승)가 그 뒤를 받혔다. 오리올스의 자랑은 리그 최고의 장타력이었다. 1번타자로 나서 50홈런을 날린 브래디 앤더슨을 비롯, 라파엘 팔메이로, 바비 보니아, 토드 질, 알로마, 립켄, 서호프 등으로 구성된 타선은 257홈런으로 팀홈런 신기록을 세웠다. 디비전시리즈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제압한 오리올스는 리그 챔피언십에서 양키스를 만났다. 양키스타디움에서의 1차전. 오리올스는 8회초까지 4-3으로 앞서며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운명의 8회말, 데릭 지터가 아만도 버티네스의 공을 우익수쪽 깊은 곳으로 날렸다. 우익수 토니 태라스코가 점프를 하려는 순간, 관중석에서 제프리 메이어라는 12세 소년이 공을 낚아 챘다. 그 장면을 보지 못한 심판진은 홈런을 선언했고, 결국 양키스는 11회말에 터진 버니 윌리엄스의 끝내기 홈런으로 1차전을 잡아냈다. 결정적인 오심에 의해 1차전을 놓친 오리올스는 웰스가 2차전을 잡아내며 분위기를 반전하는 듯 했으나, 양키스의 좌완 3인방 지미 키-케니 로저스- 앤디 페티트를 당해내지 못하며 1승4패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1997년 오리올스는 양키스를 2경기차로 누르고 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리그 챔피언십에서 돌풍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월드시리즈행 티켓을 내줬다. 98년 9월 길릭 단장이 은퇴했다. 그러자 오리올스 내에는 앤젤로스 구단주의 독선을 견제할 세력이 없어졌다. '베테랑 중독증'에 걸린 앤젤로스는 신인선수로 교체해야 할 자리에 또 다른 베테랑 영입을 반복했고, 결국 오리올스는 빅리그에서 가장 노령화된 구단으로 변했다. 그리고 2000년 오리올스는 9년만에 하위그룹으로 떨어졌다. 오리올스는 팀재건을 시작했다. 그러나 구단주가 바뀌지 않는 이상 세대교체가 원활하게 이뤄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ML 팀역사] <14> 뉴욕 메츠
'마하트마' 브랜치 리키의 마지막 도전은 제3의 메이저리그인 컨티넨탈리그의 창설이었다. 내셔널리그는 이를 막기 위해 1962년 뉴욕 메츠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리그 가입을 승인했다. 내셔널리그로서는 12개에서 8개로 줄었던 1900년 이후 처음으로 갖는 리그 확장이었다. 시작은 여느 신생팀들과 마찬가지였다. 20세기 최다패기록인 120패로 화려하게 데뷔한 메츠는 창단 이후 4년 연속 100패를 당하며 지구 꼴찌를 지켰다. 7년간 최하위 5번에 9위 2번. 하지만 인기만큼은 남부럽지 않았다. 1958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뉴욕 자이언츠가 서부로 떠난후 응원할 팀이 사라졌던 뉴욕의 '양키헤이터(Yankee hater)'들은 메츠가 나타나자 열광적인 성원을 보냈다. 셰이스타디움이 개장한 1965년, 메츠는 여전히 꼴찌를 차지했지만 관중동원수에서는 월드시리즈 챔피언 양키스를 능가했다. 메츠가 점차 강자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68년 길 허지스가 감독에 취임하면서 부터. 73승으로 꼴찌 탈출에 성공한 메츠는 이듬해인 1969년 '미라클 메츠'라는 신화를 이룩했다. '미라클 메츠'의 원동력은 방어율 2위를 차지한 마운드였다. 선발에서는 마치 현재의 오클랜드 3인방을 연상시키는 톰 시버(24)-제리 쿠스먼(26)-게리 젠트리(22)의 영건 트리오가, 불펜에는 론 테일러-터그 맥그로-놀란 라이언이 버티고 있었다. 5월부터 불이 붙기 시작한 메츠는 6월 단숨에 2위로 도약했고, 막판 질주로 시카고 컵스를 잡아냈다. 특히 시버는 마지막 10번의 선발등판에서 모두 승리를 따내며 지구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버는 25승7패 방어율 2.21로 메츠에 첫번째 사이영상을 선사했다.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3연승을 거둔 메츠는 월드시리즈에서 당시 메이저리그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만났다. 특히 마이크 큘러-데이브 맥널리-짐 파머의 선발진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메츠의 젊은 투수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1차전을 패한 메츠는 나머지 4경기에서 볼티모어 타선을 단 5점으로 막고 4승1패로 시리즈를 끝냈다. 메츠는 이후 강팀으로서의 전력은 유지했지만, 고비를 넘지 못하며 3년 연속 지구 3위에 머물렀다. 1973년 내셔널리그의 동부지구는 6개팀중 5팀이 5경기차 안에 있었을 정도로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레이스를 치렀다. 8월말까지 1위에 7경기 뒤진 최하위였던 메츠는 막판의 7연승 등 후반기 대약진으로 두번째 기적을 이뤄냈다. 메츠는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빅레드머신' 신시내티 레즈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고 월드시리즈에 나섰다. 하지만 '다이너스티'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를 넘는데는 실패했다. 바이다 블루-켄 홀츠먼-캣피시 헌터-롤리 핑거스의 막강 마운드를 자랑했던 오클랜드는 이후 1974년까지 월드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다. 1974년부터 메츠는 오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1977년에는 시버가 신시내티로 떠났으며, 그 이듬해에는 쿠스먼이 미네소타 트윈스로 향했다. 1980년 넬슨 더블데이와 프레드 윌펀이 구단을 매입하면서 뭔가 해보자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더블데이와 윌펀은 팀 재건을 위한 전폭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1983년 대릴 스트로베리와 론 달링이 데뷔했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부터 키스에르난데스를 데려왔다. 이듬해에는 데이비 존슨이 지휘봉을 잡았으며, 거물 드와이트 구든이 나타났다. 1985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포수 게리 카터를 영입한 메츠는 86시즌에 앞서 밥 오헤다까지 데려오면서 막강 전력을 구축했다. 1984-85년 연속 2위로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메츠는 1986년 마침내 폭발했다. 오헤다-달링-구든은 방어율에서 각각 리그 2,3,5위에 올랐으며 불펜의 로저 맥도웰과 제시 오로스코(현 다저스)는 43세이브를 합작했다. 카터-스트로베리-에르난데스의 파워도 가공할만 했다. 결국 메츠는 지금도 프랜차이스 최다승으로 남아있는 108승을 거두며 2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21.5경기 앞선 여유있는 우승을 차지했다. 챔피언십시리즈에서 휴스턴를 꺾고올라간 월드시리즈에서 메츠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1루수 빌 버크너에게 통한의 실책을 선물한 '밤비노의 저주'에 힘입어 7차전 끝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메츠는 오헤다의 부상 이탈과 달링의 부진 속에서도 세인트루이스에 3경기 뒤진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988년 메츠는 20승을 따낸 데이빗 콘의 돌풍 속에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15경기 차로 누르고 다시 지구 우승을 따냈다. 하지만 메츠는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오렐허샤이저를 앞세운 다저스에게 예상밖의 패배를 당했다. 1989년의 2위 이후 메츠는 다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전성기가 지난 카터와 에르난데스가 방출됐으며, 스트로베리는 다저스로 이적했다. 존슨 감독도 90시즌 중반에 해임됐다. 1993년 103패를 당하며 바닥을 친 메츠는 1995년 2위, 96년 4위로 점차 전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큰 기대를 걸었던 '영건 트리오' 빌 펄시퍼-제이슨 이스링하우젠(현 세인트루이스)-폴 윌슨(현 탬파베이)의 몰락은 너무도 아팠다. 96시즌 중반 일본프로야구 롯데 마린스에서 복귀한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메츠는 투수력에 바탕을 둔 세밀한 야구를 펼치기 시작했다. 마이크 피아자가 합류한 1998시즌, 메츠는 막판까지 여유있는 와일드카드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막판에 믿을 수 없는 5연패를 당하며 결국 샌프란시코와 컵스의 승자에게 와일드카드를 넘겨주고 말았다. 메츠의 뒷심 부족은 이듬해 재현됐다. 메츠는 마지막 9경기에서 1승8패의 부진으로 신시내티 레즈에 동률을 허용했다. 하지만 알 라이터는 플레이오프 단판승부에서2안타 완봉승으로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다. 메츠는 디비전시리즈에서 랜디 존슨이 버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꺾었지만,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다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벽을 넘지 못했다. 2000시즌 와일드카드 획득에 성공한 메츠는 샌프란시스코와 세인트루이스를 연파하고 월드시리즈에 진출, 양키스를 만났다. 44년만에 이뤄진 지하철시리즈였다. 하지만 3연패에 도전하는 양키스의 전력은 한수 위였다. 지난해 최악의 공격력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메츠는 올시즌에 앞서 모 본, 로베르토 알로마, 로저 세데뇨, 제로미 버티츠 등의 강타자들을 쓸어담으며 애틀랜타의 10년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ML 팀역사] <15> LA 다저스
아메리칸리그의 양키스, 내셔널리그의 다저스. 다저스는 뉴욕 양키스와 함께 메이저리그의 양대 명가로 손꼽히는 구단이다. 비록 성적면에서는 비교할 바가 못되지만, 그동안의 업적을 고려하면 명문구단이라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1947년 단장 브랜치 리키는 100년 가까이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인종의 벽'을 허물었다. 최초로 흑인선수 재키 로빈슨을 등용한 것. 그 후 로빈슨과 다저스는 온갖 박해를 견뎌내며 빅리그 역사에 선구자로 남았다. 1957년 구단주 월터 오말리는 프랜차이즈를 로스엔젤리스로 옮기는 파격을 단행했다. 뉴욕의 거대시장을 버리고 서부지역으로 이동한 사건은 말 그대로 '사건'이었다. 1995년 노모 히데오의 신인왕 등극은 새 시대를 알리는 전조였다. 노모와 박찬호의 대활약은 메이저리그의 눈을 아시아시장으로 돌리게 한 결정적인계기가 됐다. 이밖에 신시내티 레즈와 더불어 시작한 최초의 야간경기(1938년), 최초의 정규시즌 라디오 중계(1939년), 최초 연관중 3백만돌파(1978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다저스는 명실공히 '메이저리그의 개척자'였다. 다저스는 양키스(26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이상 9회)에 이은 월드시리즈 최다승 4위팀(6회). 그러나 다저스의 사감(史監)에는 쓰라린 기억도 많다. 총 12번의 월드시리즈 패배는 최다 기록이다. 다저스에게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라는 '철천지 원수'가 있다. 뉴욕 시절부터 서로 으르렁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은 프랜차이즈 이전 후에도 각각 로스엔젤리스와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여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1951년 당시 '황금시대'를 보내고 있던 다저스는 시즌 내내 선두를 유지하다 막판에 가서 자이언츠에게 덜미를 잡혔고, 결국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세계로 울려퍼진 한 방'을 맞았다. 1965년도 최종전에서 자이언츠에게 동률을 허용한 끝에,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끝내기 밀어내기로 패했다. 이로부터 28년 뒤인 1993년, 이번엔 다저스가 화끈한 고춧가루 세례를 퍼부었다. 다저스와 자이언츠의 시즌 최종전. 다저스는 이미 지구 4위가 확정되어 부담이 없는 상황이었고, 샌프란시스코는 승부의 향방에 따라 지구우승이 결정되는 중요한 경기였다. 하지만 다저스는 끝까지 스포츠정신을 발휘(?), 자이언츠의 포스트시즌행을 저지했다.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최강자, 브루클린 브라이드그룸스가 내셔널리그로 활동무대를 옮긴 것은 1890년. 신입생의 전력은 막강했다. 다른 내셔널리그 팀들이 '플레이어스 리그'의 출범으로 인한 주전선수들의 유출을 막지 못한 반면, 다저스는 대부분의 선수들을 지켜냈기 때문. 그 해 다저스는 내셔널리그 '111년 역사'를 개막하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후 부진했던 다저스는 1899년 찰스 에베츠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구단주 해리 반 더 호스트간의 밀약이 성사되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에베츠는 다저스 지분의 30%를 반 더 호스트에게 내주는 대가로 오리올스의 네드 헨런 감독과 핵심 선수들을 받았왔다. 1899년, 1900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도 이때 합류한 윌리 킬러, 허기 제닝스, 조 켈리, 짐 허그스, 덕 맥제임스 덕이었다. 그러나 다저스는 이들이 은퇴한후 40년동안 리그 우승을 두 번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침체기를 보냈다. 다저스가 명문팀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한 것은 1938년 래리 맥파일이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맥파일은 짧은 5년의 재임기간 동안 전력강화에 매진함은 물론 다저스를 재정적으로 튼튼하고 인기있는 구단으로 만들었다. 맥파일의 뒤를 이은 브랜치 리키는 '황금시대'의 막을 연 주인공이었다. 최초의 팜 시스템 개발자로도 유명한 리키는 1947년 인종의 벽을 허물었고, 온화한 버트 쇼튼을 감독에 임명했다. 1947년부터 1956년까지 정확히 10년동안 다저스는 리그 우승 6회를 기록하면서 내셔널리그 최고의 팀으로 군림했다. 가장 나빴던 해의 성적이 3위. 재키 로빈슨(2루수)은 피 위 리즈(유격수)와 함께 최강의 키스톤 콤비를 이루었으며, 1948년에는 전설적인 명포수 로이 캄파넬라가 합세했다. 1949년에는 외야수 듀크 스나이더가 주전으로 도약, 길 허지스(1루수)-캄파넬라의 파워라인에 무게를 더했다. 마운드의 주인공은 돈 뉴컴이었다. 1949년 신인으로서 팀내 최다승인 17승을 거두며 혜성처럼 등장한 뉴컴은 부상에 허덕였던 1954년을 제외하면, 이 기간동안 매년 평균 20승 이상을 올렸다. 황금시대의 최절정은 1953년이었다. 이때 거둔 105승은 아직도 다저스의 최다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특히 타선이 돋보여 다저스는 타율, 출루율, 장타율, 득점, 홈런, 총루타, 도루 등 공격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다저스는 6번 도전했던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에게만 무려 5번이나 고배를 마시며 아쉬움을 남겼다. 다저스의 복수는 1955년에 이루어졌다. 첫 두 경기에서 2연패를 당하며 악몽을 되풀이하는 듯 했던 다저스는 3, 7차전에서 각각 2실점 완투승, 완봉승을 따낸 자니 포드리스의 대활약으로 극적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포드리스는 처음 제정된 월드시리즈 MVP의 영광도 안았다. 양키스의 돈 라센에게 월드시리즈 퍼펙트게임의 수모를 당한 1956년, 구단주 월터 오말리는 '팀을 로스엔젤리스로 옮기겠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발표했다. 오말리의 폭탄선언과 함께 다저스의 브루클린 시대는 그렇게 끝이 났다로스엔젤리스 시민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출발은 그리 좋지 못했다. 세번이나 MVP를 수상했던 포수 로이 캄파넬라는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불운을 겪었으며, 재키 로빈슨과 함께 피 위 리즈의 콤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담한 에베츠 필드에 익숙해 있던 다저스 타자들에게 메모리얼 콜리세움은 허허벌판으로 느껴졌다. 다저스는 로스엔젤리스에 둥지를 튼 1958년, 14년만에 리그 7위로 추락하는 아픔을 맛봤다. 하지만 다저스는 이내 새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타선에서는 모리 윌스가 나타나 그라운드를 온통 휘젓고 다녔으며, 돈 드라이스데일과 샌디 쿠펙스의 좌우듀오는 투수왕국의 새역사를 열었다. 1962년은 다저스 역사상 최고의 해로 기록될 뻔 했다. 다저스타디움이 개장했으며, 윌스는 47년만에 시즌최다도루기록(104개)을 경신하면서 MVP를 수상했다. 드라이스데일과 쿠펙스는 사이영상과 방어율 1위를 나눠가졌으며, '최초의 흑인선수' 로빈슨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하지만 '숙적' 샌프란시스코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다. 자이언츠는 무서운 뒷심으로 시즌내내 선두를 달리던 다저스를 동률 1위로 끌어내렸고, 타이브레이크 끝에 월드시리즈 진출권을 따냈다. 1963년은 쿠펙스를 위한 해였다. 쿠펙스는 다승(25) 방어율(1.88) 탈삼진(306)의 3관왕을 차지하며 사이영상과 MVP를 동시에 거머줬다. 쿠펙스는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두번의 완투승을 따내며 월드시리즈 MVP까지 석권했다. 이듬해 19승으로 주춤했던(?) 쿠펙스는 1965년과 1966년 각각 26승과 27승을 거뒀지만, 좌타자용으로 개발한 사이드암 커브가 화근이 되어 아까운 선수생활을 접어야만 했다. '가장 화려했던 4년'동안의 성적은 다음과 같다. 97승27패 1228탈삼진 방어율 1.86 사이영상 3회, MVP 1회, 월드시리즈 MVP 2회 수상. 1965년 다저스는 9월초까지 자이언츠에 뒤져있었으나, 막판 13연승으로 극적인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1962년의 복수에 성공했다. 미네소타 트윈스와 맞붙은 월드시리즈에서도 쿠펙스의 7차전 완봉승으로 두번째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가져왔다. 이듬해 다저스는 다시 내셔널리그를 제패했지만, 월드시리즈에서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4연패로 물러섰다.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극심한 팔꿈치 통증을 느꼈던 쿠펙스는 2차전 6이닝 4실점(1자책점)으로 마지막 무대를 패전으로 장식했다. 쿠펙스의 은퇴 이후 다저스는 8위, 7위, 4위에 머무르며 화려했던 60년대를 마감했다. 피터 오말리 체체로 막을 연 70년대, 돈 서튼이 이끈 다저스의 마운드는 신시내티 '빅 레드 머신'과의 일전을 남겨두고 있었다. 70년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는 그야말로 신시내티와 다저스의 격전장이었다. 1970년부터 1979년까지의 10시즌 동안 둘이서 지구우승을 나눠가진 것만 아홉번(신시내티 6회, 다저스 3회). 그중 일곱번은 1,2위를 나눠가졌다. 두 팀의 스타일은 정반대였다. '빅 레드 머신'으로 대표됐던 신시내티가 자니 벤치, 토니 페레즈, 조 모건, 피트 로즈, 조지 포스터, 켄 그리피 시니어의 기관총 타선을 내세웠다면, 다저스는 돈 서튼, 클로드 오스틴, 앤디 메서스미스, 버트 후튼, 토미 존, 마이크 마셜의 마운드에 승부를 걸었다. 물론 70년대 내셔널리그의 최강자는 신시내티였지만, 그들을 가장 괴롭힌 상대가 다저스였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당시 다저스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최고의 내야진이었다. 스티브 가비(1루수)-데이비 룹스(2루수)-빌 러셀(유격수)-론 세이(3루수)로 구성됐던 다저스의 내야는 메이저리그 최강이자 최장(最長)의 내야진이었다. 1973년에 구축된 이 멤버는 무려 1981년까지 이어졌다. 신시내티에 번번히 무릎을 꿇었던 다저스는 1974년 102승으로 신시내티를 4경기 차로 눌렀다. 서튼과 메서스미스가 39승을 합작했고, 지미 윈이 32홈런을 날렸으며, 마셜은 마무리투수로서는 경의적인 106경기에 출장, 208이닝을 던지며 구원투수 최초로 사이영상을 차지했다. 다저스는 리그 챔피언십에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격파했지만, 월드시리즈에서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게 5경기만에 무너졌다. 토미 라소다가 감독에 취임한 1977년과 이듬해인 1978년, 다저스는 2년연속 신시내티를 2위로 밀어내고 지구우승을 차지했다. 1978시즌이 끝나자 신시내티는 우승실패의 책임을 물어 스파키 앤더슨 감독을 해임했다. 앤더슨의 해임으로 시작된 '빅 레드 머신'의 해체는 다저스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다저스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따낼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를 'Mr. October' 레지 잭슨이 이끈 뉴욕 양키스에 막혀 모두 놓치고 말았다. 1981년 다저스에는 '공포의 신인' 페르난도 발렌주엘라가 등장했다. 발렌주엘라는 에이스 제리 로이스 대신 등판한 개막전에서 2-0 완봉승을 거뒀고, 결국 그해 신인왕과 사이영상을 석권하며 '페르난도마니아'를 불러왔다. 파업으로 시즌이 단축되며 승률 상위 4개팀이 맞붙었던 리그 챔피언십에서 다저스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제압하고 월드시리즈에 나섰다. 상대는 상대전적 1승 8패의 치욕을 안겨준 뉴욕 양키스. 다저스는 로이스와 후튼이 나선 1, 2차전을 모두 패하며 역사를 되풀이하는 듯 했지만, '81년의 다저스'는 달랐다. 3, 4, 5차전의 홈경기를 모두 1점차로 잡아내며 전세를 역전한 다저스는 6차전에서 외야수 페드로 게레로의 방망이가 폭발하며 사상 5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47년 이후 월드시리즈 우승 5회, 리그 우승 14회를 기록하며 내셔널리그의 '영원한 강호'로 군림했던 다저스는 1981년을 기점으로 '영원한'이란 꼬리표를 떼어냈다. 1983년과 1985년에 지구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포스트시즌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덜미를 잡혔으며, 1986년과 1987년에 올린 .451의 승률은 20년만에 나온 가장 나쁜 기록이었다. 오렐 허샤이저가 진정한 '불독'의 힘을 보여준 1988년, 다저스는 다시 지구 1위로 올라섰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데려온 외야수 커크 깁슨은 28홈런으로 공격을 주도했으며, 허샤이저는 선배 드라이스데일이 가지고 있던 연속이닝무실점기록을 '59'로 늘렸다. 하지만 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점치는 전문가는 별로 없었다. 허약한 공격력으로 데이빗 콘-드와이트 구든-론 달링으로 이어지는 메츠의 삼각편대를 뚫을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월드시리즈에서 진출하면 104승의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 대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다저스에는 1988년을 자신의 해로 만든 허샤이저가 있었다. 비록 허샤이저는 팀타선의 불발로 챔피언십 1차전과 4차전에서 모두 패전의 멍에를 안았지만, 7차전의 완봉승으로 다저스를 월드시리즈로 이끌었다. 오클랜드와 격돌한 월드시리즈. 그러나 호세 칸세코와 마크 맥과이어의 '배시 브라더스'도 허샤이저 앞에서는 솜방망이에 지나지 않았다. 허샤이저는 2차전의 완봉승, 최종전인 4차전의 2실점 완투승으로 챔피언십 시리즈 MVP, 월드시리즈 MVP를 동시에 수상했다. '부상병' 깁슨은 1차전 9회말 대타로 출장, 데니스 에커슬리로부터 극적인 대타홈런을 뽑아냄으로써, 기선제압의 일등공신이 됐다. 극적인 월드시리즈 우승 이후, 다저스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1991년 대럴 스트로베리와 브렛 버틀러의 영입으로 잠시 활기를 되찾는듯 했지만, 1992년에는 99패를 당하며 그 해 메이저리그 최악의 승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다저스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 것은 40년전 브랜치 리키가 다져놓은 '신인농장'이었다. 1992년에는 에릭 캐로스가 나타나 에디 머레이로부터 1루를 물려받았으며, 1993년에는 마이크 피아자가 신인포수 홈런기록을 35개로 늘렸다. 1994년에는 라울 몬데시가 강견을 자랑하며 메이저리그 신인 어시스트기록(16개)을 세웠다. 1995년에는 '토네이도 열풍'이 불었다. 일본야구 퍼시픽리그 다승왕 출신인 노모 히데오는 전매특허인 포크볼을 내세워 236개의 탈삼진을 기록, 새로운 '닥터K'로 부상했다. 1996년 토드 홀랜스워스의 신인왕 수상으로 다저스는 신인왕 제도가 도입된 1947년 이후 최초의 5년연속 신인왕 배출이라는 뿌듯한 기록을 세웠다. 파업으로 중단됐던 리그가 재개된 1995년, 다저스는 홈런군단 콜로라도 로키스를 꺾고 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처음으로 치뤄진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신시내티에게 3연패로 물러났다. 1996년 7월 토미 라소다는 심장이상으로 쓰러지며, 20시즌 동안의 감독생활을 마감했다. 빌 러셀 감독대행체제로 시즌을 마무리한 다저스는 와일드카드를 획득했지만, 다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게 3연패의 수모를 당했다. 1998년 3월19일 충격적인 뉴스가 발표됐다. 구단주 피터 오말리가 더 이상 구단을 운영할 능력이 없다며 다저스를 FOX의 루퍼트 머독에게 넘긴 것이다. 48년간 이어졌던 오말리家의 지배는 그렇게 끝이 났다. CNN 테드 터너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이기기 위해 야구판에 끼어든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했던 머독은 전폭적인 투자를 약속했지만, 그의 어색한 돈에 다저스는 체하고 말았다. 전통적으로 팜을 중시하는 팀에게 주어진 백지수표는 급히 먹은 밥이었던 셈이다. 시즌 중반 다저스는 '프랜차이스 플레이어' 마이크 피아자와 3루수 토드 질을 플로리다 말린스로 보내고 게리 셰필드, 바비 보니아, 짐 아이젠라이크, 찰스 존슨을 받아오는 '블럭버스터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하지만 충격요법의 전혀 효과는 없었고, 오히려 성적은 더 떨어지며 지구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999시즌을 앞두고 다저스는 사상 최초의 억대계약으로 케빈 브라운을 영입하고, 새사령탑으로 명장 데이비 존슨을 데려왔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2000시즌에는 션 그린까지 보강하며 월드시리즈 우승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오히려 대표적인 '밑빠진 독'으로 전락했다. 2001시즌이 끝나면서 다저스에는 몇가지 변화가 생겼다. 다저스를 추락의 늪으로 내몰았던 케빈 말론 단장이 물러났으며, 짐 트레이시 감독이 성공적인 감독 데뷔를 했다.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난 연봉을 줄이기 시작, 박찬호 등 기존의 전력을 대폭 물갈이했다. 올시즌 다저스는 일본에서 영입한 이시이 가즈히사, 게리 셰필드를 내주고 데려온 오달리스 페레스 등 투수진이 맹활약하며 예상 외의 선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방망이의 지원 없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ML 팀역사] <16> 시카고 화이트삭스
내셔널리그 보다 24년 늦게 출발한 아메리칸리그는 거의 모든 '도시 라이벌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뉴욕에서는 양키스가 다저스와 자이언츠를, 필라델피아에서는 어슬레틱스가 필리스를, 보스턴에서는 레드삭스가 브레이브스를 제치고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시카고에서 만큼는 달랐다. '터줏대감' 컵스는 이미 부촌인 시카고 북부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1900년대 최강의 전력으로 초반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그러나 화이트삭스를 패배자로 내몬 첫번째는 1919년의 '블랙삭스 스캔들'이었다. 화이트삭스의 창립자는 찰리 코미스키. 코미스키는 스타 1루수 출신으로 처음으로 투수의 1루 백업을 고안하는 등 진취적인 기상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선수들의 착취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웨스턴리그 세인트폴에서 구단을 운영하던 코미스키는 밴 존슨의 오른팔로 아메리칸리그 창설에 일조하며 거대시장인 시카고를 얻었다. 아메리칸리그 출범 첫 해인 1901년, 감독이자 투수였던 클라크 그리피스의 맹활약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한 화이트삭스는 이후 '마지막 스핏볼러' 에드 왈시, 덕 화이트, 프랭크 오웬, 닉 앨트록 등 안정된 투수진을 바탕으로 첫 10년간을 상위권에 머물렀다. 특히 1906년에는 팀타율 안타 홈런에서 꼴찌에 그치고도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월드시리즈에서 116승의 시카고 컵스를 격파하면서 '물방망이의 기적(hitlees wonder)'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조용한 나날을 보내던 화이트삭스가 다시 강팀으로 나타난 것은 1915년. 에디 시코티가 이끄는 강력한 투수진과 함께 라인업에는 어슬레틱스에서 건너온 2루수 에디 콜린스, 외야수 오스카 펠시, 그리고 '맨발의 조' 조 잭슨이 등장했다. 1915년 3위, 1916년 2위로 발동을 건 화이트삭스는 1917년 100승으로 리그를 평정한 다음, 뉴욕 자이언츠를 격파하고 두번째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주요선수들의 1차대전 참전으로 6위로 주춤했지만, 그들이 복귀한 1919년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곪아가고 있었다. '폭군' 코미스키는 선수들에게 다른 팀보다 터무니없이 적은 연봉을 줬다. 당시에는 '보류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선수들이 다른 팀으로 옮겨갈 수도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코미스키는 30승을 올리면 특별보너스를 주겠다고 한 시코티가 29승을 올리자 그를 더이상 경기에 내보내지 않았다. 콜린스는 대학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뒤로 남들 보다 훨씬 많은 연봉을 챙기고 있었다. '블랙삭스'라는 이름도 코미스키가 유니폼 세탁비 조차 주지 않아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항상 더러운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섰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끝내 사건이 터졌다. 전직 헤비급 복서인 1루수 치크 갠딜이 주동자가 되어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도박사들과 짜고 월드시리즈를 져주기로 한 것이다. 결국 화이트삭스는 월드시리즈에서 한수 아래로 평가받았던 신시내티 레즈에게 5승3패로 패했다. 이듬해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일부러 월드시리즈에서 패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8명의 선수들이 법정에 섰다. 법정은 '증거 불중분'으로 무죄를 판결했다. 하지만 이를 그냥 넘길 케네소 랜디스 커미셔너가 아니었다. 랜디스는 커미셔너의 직권으로 승부조작에 연루된 8명을 영구추방시켰다. 이 과정에서 억울한 선수들도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연판장에 X자로 서명을 한 잭슨이나 오히려 반대를 했던 벅 위버까지 쫓겨나게 된 것이다. 1920년 화이트삭스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치열한 선두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8경기를 남겨놓고 영구추방 결정이 내려지면서 결국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블랙삭스 스캔들'이 일어난 1919년 이후 지금까지 화이트삭스는 리그 우승 1번에 그치며 두번째로 긴 '월드시리즈 우승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밤비노의 저주', 컵스가 '염소의 저주'라면 화이트삭스는 비열한 승부조작으로 메이저리그를 파국으로 몰고갈 뻔 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8명이 추방되고 맞이한 1921년, 화이트삭스는 15년만에 리그 7위로 추락했다. 이후 투수 테드 라이언스, 유격수 루크 애플링 등 간혹 걸출한 선수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전력은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다. 1948년 프랭크 레인이 단장에 취임하면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레인은 폴 리차드스를 감독에 기용하는 등 전체적인 전력을 재정비했다. 1951년 화이트삭스는 17년만에 5할 승률을 넘겼다. 1955년을 끝으로 레인이 떠나고 코미스키의 손자, 척 코미스키가 구단운영의 일선에 나섰다. 코미스키는 1957년 명장 알 로페스를 감독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했다. 로페스 재임 9년 동안 화이트삭스는 평균 90승을 올렸다. 하지만 매번 양키스의 벽을 넘지 못해 2위만 5번을 차지했다. 화이트삭스가 리그 우승을 챙긴 것은 양키스가 난조에 빠졌던 1959년. 이해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의 구단주였던 빌 비크는 브라운스를 팔고 코미스키 가문으로부터 화이트삭스를 샀다. 화이트삭스는 클리블랜드와의 일대 접전 끝에 40년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베테랑 얼리 윈을 구심으로 밥 쇼, 게리 스탤리, 터크 론의 마운드가 위력적이었으며, 유격수 루이스 아파라시오는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누볐다. 하지만 화이트삭스는 샌디 쿠팩스-돈 드라이스데일의 원투펀치가 버틴 LA 다저스에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내줬다. 1965년을 끝으로 로페스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투수진이 붕괴되면서 화이트삭스는 1980년까지 15년간 5할 승률 4번에 그치는 오랜 침체기를 보냈다. 1981년 현재의 구단주인 제리 레인스도프가 구단을 매입했다. 토니 라루사 감독(현 세인트루이스)의 4번째 시즌이었던 1983년, 화이트삭스는 1920년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인 99승으로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베테랑 그레그 루진스키, 칼턴 피스크와 함께 4년차 해롤드 베인스, 신인 론 키틀이 타선의 신구조화를 이뤘으며, 라마 호이트와 리치 돗슨은 46승을 합작했다. 하지만 화이트삭스는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칼 립켄 주니어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패퇴했다. 이후 다시 리그 하위권으로 미끌어졌던 화이트삭스는 1990년 최강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 이은2위를 차지하며, 다시 우승 경쟁에 합류했다. 그 해 마무리투수 바비 시그펜은 57세이브로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메이저리그 세이브기록을 세웠다. 뉴 코미스키파크가 개장한 1991년, 풀타임 1년차인 프랭크 토머스가 타율 .318 31홈런 109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새로운 주포로 떠올랐다. 토머스는 이후 98년까지 8년 연속 타율 3할-20홈런-100타점-100볼넷의 진기록을 세웠으며, 1993, 94년에는 로저 메리스(1960-61) 이후 처음으로 MVP를 2연패한 아메리칸리그 선수가 됐다. 1991시즌 화이트삭스는 8월까지 선두에 1경기 뒤진 2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후 17경기에서 15패를 당하며 결국 미네소타 트윈스에게 지구 우승을 내줬다. 이듬해 3위로 잠시 주춤했던 화이트삭스는 1993년 잭 맥도웰-윌슨 알바레스(현 탬파베이)-알렉스 페르난데스의 막강 마운드를 내세워 10년만에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동부 챔피언 토론토 블루제이스에게 막혀 월드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파업으로 1994년을 놓친 화이트삭스는 이듬해 최강의 전력으로 등장한 클리블랜드에 밀리며 96년부터 4년 연속 지구 2위에 그쳤다. 97년에는 사상 최초의 1,000만달러 연봉에 엘리베이터조항까지 감수하며 앨버트 벨을 영입했지만, 벨과 토머스의 쌍포는 궁합이 전혀 맞지 않았다. 97년 중반 화이트삭스는 알바레스, 로베르토 에르난데스(이상 현 탬파베이)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내주고 키스 폴크, 션 로(현 피츠버그) 등을 받아오는 '백기 트레이드(White Flag trade)'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팀 개편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3년만인 2000시즌, 화이트삭스는 그 해 메이저리그 최다승인 95승을 올리며 클리블랜드의 지구 6연패를 저지했다. 타선은 매글리오 오도네스, 카를로스 리, 폴 코네코 등의 젊은 타자들로 가득찼으며, 마이너리그에는 킵 웰스(현 피츠버그), 존 가랜드, 존 로치, 애런 메이에트 등의 유망주 투수들이 넘쳐났다. 그야말로 화이트삭스의 미래는 온통 장밋빛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화이트삭스는 투수진이 줄부상을 당하고 리더 토머스 마저 부상으로 이탈, 지구 3위로 추락했다. 부상병들이 복귀한 올해는 미네소타 트윈스와 접전을 펼치고 있지만 당초 기대했던 모습은 아니다. 특히 믿었던 특급 투수유망주들이 계속 빅리그 무대에서 실패하면서 화이트삭스의 미래에 대해 재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ML 팀역사] <17> 휴스턴 애스트로스
1962년 뉴욕 메츠와 함께 내셔널리그에 등장한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창단과 동시에 야구사에 2가지 큰 족적을 남겼다. 1965년에 건립된 애스트로돔은 세계 최초의 돔구장으로 당시 '세계 8대 불가사의'라는 칭송을 받았을 정도로 일대 사건이었다. 사실 애스트로돔은1962년에 개장할 예정이었지만3년이 지연됐고, 실외구장을 사용한 3년 동안 휴스턴은 무더위, 높은 습도, 모기떼의 극성으로 흥행에 참패했다. 애스트로돔은 햇빛으로부터 외야수의 눈을보호하기 위해 천장의 유리에 코팅을 입혔다. 그러자 잔디가 죽었다. 결국 휴스턴은 1년 만에 최초로 인조잔디를 애스트로돔의 그라운드에 깔았다. 휴스턴은 신생팀답게 창단 후 첫 7년 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메츠가 최하위를 6번 차지한 반면, 휴스턴은 1번으로 선전했다. 메이저리그에 최초로 지구제도가 도입되고 메츠가 '어메이징 메츠'의 돌풍을 일으키며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1969년, 서부지구에 편입된 휴스턴도 처음으로 5할 승률을 마크했다. 이후 2년간 다시 5할 밑으로 떨어졌지만, 1972년에는 처음으로 우승 레이스에 참여한 끝에 지구 2위에 올랐다. 1975년 97패를 당하며 역사상 최악의 시즌을 보냈던 휴스턴은 이듬해 래리 디어커가 이끄는 마운드에 J R 리차드가 합류하며 중위권으로 도약했고, 조 니크로가 선발 2년차로 21승을 따낸 1979년에는 다시 지구 2위에 올랐다. 이듬해 휴스턴은 시즌내내 다저스와 우승 경쟁을 치렀다. 비록 리차드가 파업의 공백을 버티지 못하고 은퇴했지만, 니크로-놀란 라이언-번 룰의 투수진은 여전히 든든했다. 휴스턴은 막판 3연패로 다저스에게 동률을 허용했지만, 플레이오프 단판승부에서 니크로가 7-1의 승리를 견인, 창단 첫 지구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휴스턴은 챔피언십시리즈 최종5차전에서 10회 연장 끝에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패했다. 이듬해 메이저리그는 파업의 여파로 시즌이 단축되며 전 후기제로 치러졌다. 후기리그 1위에 오른휴스턴은 전기리그 우승자인 다저스와 챔피언십에서 맞붙었지만 2연승 후 3연패로 허무하게 물러났다. 이후 중위권으로 내려앉았던 휴스턴은 1986년 96승으로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전력의 핵심은 '스플리터의 마술사' 마이크 스캇이었다. 스캇은 18승과 함께 방어율 탈삼진 최다이닝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팀의 지구우승을 확정짓는 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따내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챔피언십의 상대는 창단동기인 메츠였다. 스캇은 드와이트 구든과 맞대결한 1차전에서 1-0 완봉승, 3차전에서 1실점 완투승으로 고군분투했지만, 휴스턴은 메츠에 2승4패로 무릎을 꿇었다. 특히 최종 6차전은 연장 16회 끝에 패한 것이어서 더 아쉬움이 남았다. 1991년 휴스턴은 70년대의 에이스이자 전속 해설가인 디어커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전년도 보스턴 레드삭스에 불펜투수를 내주고 데려온 제프 배그웰은 눈부신 활약으로 신인왕을 따냈다. 디어커는 부임하자마자 3년 연속 지구우승으로 휴스턴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휴스턴은 '킬러B'로 대표되는 짜임새있는 타선에 대릴 카일(현 세인트루이스)-셰인 레이놀스-마이크 햄턴(현 콜로라도)-호세 리마(현 디트로이트)-빌리 와그너로 이어지는 막강 투수진의 공 수균형이 돋보였다. 하지만 휴스턴의 성공은 정규시즌에만 국한됐다. 3년 동안 매번 포스트시즌의 첫 관문인 디비전시리즈에서 무릎을 꿇으며 2승9패의 성적을 기록한 것. 1998시즌 중반에는 프레디 가르시아-존 할라마-카를로스 기엔(이상 시애틀)이라는 엄청난 출혈을 감수하고 랜디 존슨을 데려왔지만, 존슨은 자신의 포스트시즌 연패기록만 늘리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로 떠났다. 2000년 휴스턴은 현재는 애스트로스필드로 이름이 바뀐 엔론필드를 개장했다. 과거 애스트로돔이 철저한 '투수들의 구장'이었다면, 엔론필드는 쿠어스필드 못지 않은 '타자들의 구장'이었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에 투수진이 무너졌다. 결국 휴스턴은 지구 4위로 추락했다. 지난해 휴스턴은 마운드에서 웨이드 밀러와 로이 오스월드, 타선에서 랜스 버크먼이라는 걸물들이 등장하면서 1년만에 중부지구 타이틀을 탈환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의 징크스는 여전해, 디비전시리즈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게 3연패로 물러났다. 90년대 중반 이후 휴스턴이 강한 전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외부영입 보다는 베네주엘라로 대표되는 해외시장의 개척과 드래프트를 통한 자체개발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올시즌 휴스턴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팽팽한 선두다툼을 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휴스턴은 여전히 강하며 마이너리그는 랭킹 3위 안에 들 정도로 튼튼하다. 그들의 강세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ML 팀역사] <18> 미네소타 트윈스
미네소타 트윈스의 전신은 워싱턴 세너터스. 아메리칸리그와 함께 창단, 1961년 미네소타로 이전하기전까지 60년 간을 워싱턴에서 보냈다. 워싱턴은 미국의 '정치 1번지'였지만 야구는 그렇지 못했다. 이는 다른 아메리칸리그 팀들이 이미 마이너리그에서 활동했었던 반면, 워싱턴은 방출선수들을 중심으로 급조했기 때문이다. 첫 두 해 6위로 선전한(?) 워싱턴은 이후 9년 동안 꼴찌(4회) 아니면 그 다음(5회)에 위치했다. 1907년은 워싱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이 있었던 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월터 존슨이 데뷔한 것. 존슨은 이 만년 꼴찌팀에서만 21년을 보내며, 역대 다승 2위(417승), 완봉승 1위(110), 방어율 1위(2.17 3,000이닝 이상), 탈삼진 8위(3,412) 등의 금자탑을 쌓았다. 1910년 존슨은 1.36으로 아메리칸리그 방어율 3위를 차지하고도 17패를 당했으며, 이듬해에는 1.90으로 2위에 올랐지만 13번의 패전을 경험했다. 존슨은 그야말로 워싱턴의 '외로운 황제'였다. 1912년 명투수 출신으로 아메리칸리그 창립 공신 중 한명인 클라크 그리피스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워싱턴은 시즌중 1루수 치크 갠딜을 데려온 후 12연승을 달린 끝에 보스턴 레드삭스에 이은 2위로 시즌을 끝냈다. 존슨이 다승 방어율 탈삼진 승률 완투 완봉 최다이닝에서 1위를 차지하며 생애 최고의 해를 보낸 이듬해에도 워싱턴은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이후 존슨은 최고의 자리를 유지했지만, 워싱턴의 전체적인 전력은 중하위권에 그쳤다. 그리피스는 전력 강화의 요구가 받아즐여지지 않자 1921년 아예 구단을 산 다음 전폭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1924년 27세의 2루수 버키 해리스가 감독에 임명됐으며, 구스 고슬린은 베이브 루스를 제치고 타점 1위에 올랐다.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한 존슨이 이끄는 마운드는 리그 최강이었다. 결국 워싱턴은 창단 24년만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워싱턴은 뉴욕 자이언츠와의 월드시리즈에서 7차전 12회 연장 끝에 행운의 불규칙바운드 안타로 챔피언에 올랐다. 이듬해 워싱턴은 어슬레틱스를 꺾고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월드시리즈에서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패퇴했다. 이후 존슨이 은퇴하고 핵심전력이 빠져나가면서 워싱턴은 예전의 위치를 되찾았다. 1933년 조 크로닌 감독 하에 뉴욕 양키스를 제치고 리그 우승을 차지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중하위권에 머물렀다. 그리피스가 사망한 후 구단을 물려받은 아들 캘빈 그리피스는 1960년 미네소타로의 이전 계획을 발표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롯한 상하원 의원들은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리그 사무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전 후 첫 시즌이었던 1961년, 미네소타는 감독이 4명이나 바뀌는 어수선함 속에서 7위에 그쳤다. 그러나 마지막에 샘 멜리가 지휘봉을 넘겨받으면서 팀은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기존의 하먼 킬러브루-밥 앨리슨의 라인업에 졸리오 베르살레스, 리치 롤린스, 토니 올리바, 로드 캐로, 투수진에서는 카밀로 파스칼, 짐 카트, 짐 그랜트 등의 좋은 선수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미네소타는 이 선수들의 맹활약으로 1962년부터 7년간 우승 1회, 준우승 3회, 3위 1회를 차지하는 전성기를 보냈다. 미네소타는 1965년, 지금까지도 최다승기록으로 남아있는 102승을 올리며 이전 후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올리바는 2년 연속 타격왕에 올랐으며 베르탈레스는 MVP를 수상했다. 그랜트와 카트는 39승을 합작. 하지만 미네소타는 LA 다저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샌디 쿠팩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쿠팩스는 7차전에서 3안타 완봉승을 따냈다. 이듬해와 그 이듬해, 미네소타는 초반의 극심한 부진을 만회하지 못하고 2년 연속 2위에 머물렀다. 특히 1967년에는 마지막날의 더블헤더를 모두 승리하면 보스턴 레드삭스와 동률 1위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1승1패로 1경기차 2위에 그쳤다. 디비전제도가 처음 도입된 1969년, 미네소타는 신임 빌리 마틴 감독 하에서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킬러브루는 49홈런-140타점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으며, 캐로는 타격왕을 수상, 이후 7회 수상의 서막을 열렀다. 하지만 미네소타는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당시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미네소타는 이듬해에도 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월드시리즈행 티켓은 역시 볼티모어의 몫이었다. 미네소타는 이후 슬럼프에 빠지며 13년간 우승의 달콤함을 맛보지 못했다. 1982년 메트로돔 개장 이후 경영학화를 버티지 못한 그리피스家는 칼 폴라드에게 구단을 팔았다. 그 해 미네소타는 프랭크 바이올라가 급성장하고 커비 퍼켓이 합류하면서 공동 2위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톰 캘리 감독의 첫 풀타임 시즌이었던 1987년, 미네소타는 서부 지구를 제패한 다음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4승1패로 꺾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상대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홈 1,2차전을 따낸 미네소타는 원정 3,4,5차전을 내줬지만, 다시 6,7차전 홈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4승3패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미네소타 이전 후 첫 우승이자 63년만의 우승이었다. 이듬해 미네소타는 바이올라, 퍼켓, 마무리투수 제프 리어던이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며 91승을 올렸지만, 104승의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를 감당해내지는 못했다. 1991년의 메이저리그는 '꼴찌들의 돌풍'이 일었던 해였다. 전년도 지구 꼴찌팀인 미네소타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월드시리즈에서 만난 것. 7차전까지 간 것은 물론 5경기가 1점차 승부였으며, 6,7차전을 포함한 3경기는 연장전 끝에 승패가 갈리는 등, 지금까지도 월드시리즈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고 있다. 미네소타는 홈경기 1,2,6,7차전을 따내 우승을 거머쥐었던 1987년의 월드시리즈를 그대로 재현해냈다. 에이스 잭 모리스는 7차전에서 10이닝 1-0 완봉승을 따내며 MVP에 올랐다. 1992년 미네소타는 시즌 내내 선두를 지키다 막판 오클랜드에게 역전을 허용했다. 이후 경영 문제로 전폭적인 투자를 하지 못한 미네소타는 1996시즌을 앞두로 퍼켓이 비운의 은퇴를 하고, 이듬해에는 척 노블락이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되면서 대대적인 팀재건에 들어갔다. 이후 미네소타는 지구 바닥을 기었지만, 세대교체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특히 드래프트에서 최소한의 비용으로 좋은 선수들을 확보하는데 진가를 발휘하며 로스터의 거의 대부분을 자신들이 길러낸 선수로 채웠다. 마침내 2001년, 미네소타는 고행의 열매를 거두기 시작했다. 막판 부진으로 지구 우승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내주긴 했지만, 30개 구단중 최하위의 연봉으로 12위의 성적을 마크한 것은 오클랜드 못지 않은 기적이었다. 시즌이 끝난후 리그 퇴출의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이는 오히려 시민과 선수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호재로 작용했다. 올시즌 미네소타는 안정된 전력으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치열한 승부가 펼쳐질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지구 1위를 순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