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로부터 뭔가를 듣고. 배운다는 것은 그것이 학문을 배우는 것이든,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든, 하다못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들을 때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들을 머릿속에 채워 넣고 쌓아놓기에 바쁘다. 마음을 텅 비우고. 깨달음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수도자들만이 하는 것이라 여긴다. 지식을 채워가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모두 마음을 고용하게 정진하고, 비워가는 작업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전에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는 진리의 길에 입문할 수 있는 것이다.
장자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처음에는 뜬 구름같이 손에 잡히지 않는 실체로 다가왔고, 이제까지의 우리네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상이었다. 실제로 장자의 사상은 현실 도피적이고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표면적인 것이고, 일부분만을 확대 해석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자의 도가사상은 현실 도피적이지도 세상을 등한시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아주 현실 순응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방법을 제시하다. 그것은 직접적인 언어와 구절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고. 우화적인 이야기를 통해 전달된다.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를 읽고 생각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모두 내면의 무의식에 참된 영혼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나'라는 외양과 '참된 나'라는 내면의 영혼이 하나로 완벽하게 일치하여 존재하였지만 "참된 나"를 둘러싼 외양의 모습이 점차로 껍데기와 같은 것(욕망, 번뇌, 소유, 아집)으로 자신을 감싸기 시작하면서 점점 그 사이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의식하고, 겉모습에 신경쓰고, 남에게 보이려는 억지스런 행동들을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내면에서 자신을 비추던 순수한 영혼은 그 빛을 잃어 세상을 어둡게 하였다. 세상의 어려운 사람들, 장애인, 일반인과는 다른 모습의 여러 사람들을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여 그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멸시한 것이다.
또한 겉모습이 늙어감에 따라 마음도 늙고 굳어져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정신은 전혀 성숙되지 않고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이제 우리는 마음의 눈을 떠야할 때이다. 자기 마음의 수많은 장벽들을 없애고, 모든 껍데기들을 버리고 알맹이를 취해야 한다. 곧 외면과 내면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잊은 듯하고, 인식하지 않는 경지(物我相忘)에 이르러 진정한 나와 진정하지 않은 나의 합일이 선행될 때 비로소 내면의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런 모습은 자연스러움을 몸에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보여줄 수 있다.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모습에서 거리낌 없고, 그들의 얼굴이 빛나 보이는 것은 그들이 거짓됨 없이 정성을 다해 사람들을 대하기 때문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 상대방을 대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참다운 모습에까지도 도달하여 내면의 맑은 영혼을 겉으로 표출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봉사자들뿐만 아니라 '참나'를 발견해 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해당이 될 수 있다. 특히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참 됨'을 그들의 작품을 통해 종종 표출하곤 한다. 깨끗한 마음의 상태로 예술을 창조함으로써 또 다른 "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일반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깨달음을 줄 수 있고, 감동을 줄 수 있다.
아마도 작품을 보면서 마음속에 파장을 느끼고 뭔가를 깨달은 사람들은 비록 아직 "도"를 체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미 그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때문에 예술가들의 영성이 비 예술가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외부세계를 잊어버림으로 삶 자체, 나의 의미를 잊게 된다. 곧 타자의 구분이 사라진다는 얘기이며 잊음 혹은 비움이라 부르면 맞을 것이다. 완전히 비워버리면 새로운 의식이 생겨날 것이고 사물을 꿰뚫어 보는 형안(炯眼)이 열려 밝음을 체험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를 보게 되는데 궁극적으로 하나와 하나가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와 하나가 된다함은 보는 주체와 그 봄의 대상이 되는 객체의 주객분리가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비움에 대한 장자 의 견해는 生死라 하지 않고 死生이라 말하는데 나타나 있다. 삶도 나서 죽는 일보다는 죽었다가 우주적 나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殺生者不死 生生者不生, 즉 죽기 전에 죽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로 풀이할 수 있겠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성서에도 나온다.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찾느니라. 두 문장 모두 자의식으로 가득한 현재의 나가 죽어 없어질 때 우주적 의식을 지닌 진정한 나. 우주적 나가 탄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현대의 일상적 삶 어디를 둘러봐도 일률적으로 지어진 아파트와 같은 인공적인 사물들, 우리는 이러한 삶 속에서 고정관념에 발목이 묶여 진정한 앎에서 멀어지는 건 아닌지. 인간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 일생을 통해. 이런저런 선입견에 한 번 길들면 그것을 만고불변하는 진리처럼 떠받들고 산다. 더 무서운 건 이런 상태를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살아 가는 데 있다고 본다.
[장자는 진정한 앎의 척도로 진인(眞人)을 내세우고 있다. 진인은 삶을 즐겁다 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다 할 줄도 몰랐다. 곧 죽음과 삶 어느 쪽에도 집착하지 않고 의연하고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진인이라 불렀다.
장자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했는가? 道를 터득한 사람이 말로 전하기는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그 뜻을 헤아려 알아들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앞서 말한 교외별전, 이심전심이 그 방법일 수 있으리라.]
장자를 통해 배운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삶에 있어 중요한 무엇인가에 큰 도움을 받았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떠받드는 고정관념, 서구 기독교의 뿌리 깊은 이분적 사고방식, 거기서 시작되는 가치, 윤리 등을 깊이 생각하게 하여 삶의 진정성, 참 나에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었다고 생각한다. 지식을 던져준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쥐어 주었다.
"이심전심"이라면 전해도 받을 수 없는 게 도라면, 결국엔 스스로 깨달아 부자연스런 삶을 자연스럽게 해야 하지 않을까? 장자는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는 건 아닐런지.
인위적인 것을 포함한 부자연스런 모든 행동을 초극한 상태,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넘어선 상태, 자의식을 극복한 상태, 이런 빈 마음에서 물화되어 우주의 나로 채운다면 신나는 삶, 풍요한 삶, 절대적 자유의 삶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 참고자료: 안희진. 장자의 예술정신, 단국대학교,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