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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정교회와 가톨릭교회의 차이
동방정교회와 가톨릭교회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전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신구약을 포함하는 『성경』 외에 『성전』과 『니케아신경』을 경전으로 삼는 반면,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성전』만을 경전으로 삼는다. 동방정교회는 성령이 단지 성부에게서만 왔다고 주장하고 가톨릭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왔다고 주장한다. 동방정교회는 교황이 교리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교황 무류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주교의 옷차림이 다르다. 동방정교회 주교는 원통형 모자를 쓰고 은백색이나 검은색 가운을 입는다. 그리고 가슴에 성상을 달고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반면 가톨릭교회 주교는 타원형 모자나 사각 모자를 쓰고 황금색 긴 가운을 입는다. 또한 십자가를 걸고 권위를 나타내는 반지를 낀다.
셋째, 기도문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그리스어 외에 현지 민족의 언어도 사용하지만 가톨릭교회는 라틴어만을 사용한다.
넷째, 세례의식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교인을 물에 담그고 가톨릭교회는 물을 뿌린다. 동방정교회는 태아가 세례를 받은 후 견진성사를 거행하지만 가톨릭교회는 7~8세 때에 거행한다.
다섯째, 성찬식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교인 모두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지만 가톨릭교회는 성직자에게만 빵과 포도주를 주고 일반 교인에게는 빵만을 준다.
여섯째, 성직자의 결혼제도가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주교를 제외하고
모든 성직자가 결혼이나 이혼, 재혼을 할 수 있지만 가톨릭교회는 성직자가 결혼할 수 없고 독신과 금욕생활을 강조한다.
일곱째, 절기의 명칭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주님 성탄절, 주님 신현 축일, 주님 입당 축일, 주님의 예루살렘입성 주일, 주님 승천 축일, 삼위일체 주일, 주님 변모 축일, 성모 안식 축일, 성모 입당 축일로 부른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예수 탄생 대축일, 주님 세례 축일, 주님 봉헌 축일, 종려 주일, 예수 승천 대축일, 삼위일체 대축일, 예수 거룩한 변모 축일, 성모 승천 대축일, 성모 헌당 대축일로 부른다. 동방정교회는 산 조르디 축
일(4월 23일), 니콜라스 축일, 베드로 축일, 순교 주일 등 지역마다 민속과 풍습이 달라서 작은 절기는 조금씩 차이가 난다.
여덟째, 신품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정교회만의 교구제를 실시하고 신품에는 흑백 두 종류가 있다. 흑색 신품은 수사, 수사보제, 수사대보제, 수사사제, 수사대사제, 주교, 대주교, 총대주교로 모두 주교이자 교구장이다. 백색 신품에는 강경사, 부보제, 보제, 대보제, 사제, 대사제, 사제장 등이다. 가톨릭교회는 1품은 수문품, 2품은 강경품, 3품은 구마품, 4품은 시종품, 5품은 차부제품, 6품은 부제품, 7품은 사제품 혹은 신품으로 모두 7품으로 나뉜다. 1~4품은 낮은 신품으로 소품이라 하며5 ~7품은 높은 신품으로 대품이라 한다. 교황청이 발전하면서 주교의 품위가 교황, 추기경, 총대주교, 대주교, 일반 주교로 나뉘었다.
아홉째, 교회력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양력의 전신인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가톨릭교회는 줄곧 양력을 사용했다.
열째, 예배당 양식이 다르다. 동방정교회의 예배당 건축 양식은 대부분 바티칸 혹은 슬라브 양식이지만 가톨릭 예배당은 대부분 로마나 고딕 양식이다.
레지오 마리애 훈화
최경용(부산교구 신선 본당 주임 신부)
40.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교본 제40장 : 463-493면)
1) 주님의 마지막 유언(교본 463-466면); 2) 레지오는 영혼 하나하나를 겨냥해야 한다(교본 466-468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이고 명령이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심으로써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복음 선포 사명을 몸소 수행할 수 없으셨다. 그 대신 재림 때까지 모든 신자들에게 당신의 선교 사명을 맡기셨다.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도 부모의 유언은 실천하려고 한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예수님의 유언인 선교 사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인류 구원 사업에 동참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강생하신 목적은 지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과 예수님을 전하여 믿고 사랑하도록 함으로써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을마다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선포하셨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루가 4,43).
교회 창립의 목적은 복음 선포이다. 선교와 복음화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교회는 선교를 위해 생겨났고 복음화를 위해 존재한다. "순례하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다. 교회는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선교 교령, 2항). 그래서 미사 끝에 사제가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면서 신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한다. '미사'의 뜻도 사명과 파견이다. 교회는 복음 선포를 강조하려고 전교의 달과 전교 주일을 정해 놓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전교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말했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고린 9,16).
선교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지만 실행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더구나 혼자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예수님의 유언을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조직적 선교 단체가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가 바로 그런 단체이다. 레지오 마리애는 영혼 하나하나를 겨냥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개인 접촉을 하여 복음 전파 활동을 한다. 그런 사람을 감화시키는 것은 단원들의 상투적인 말보다도 모범적인 삶이다. 삶과 생활로써 모범을 보여 주지 않는 선교는 실패하기 쉽다. 세상 사람들은 종교 자체보다도 종교인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아무리 참된 종교라도 신자들의 생활이 실망스러우면 믿지 않으려 한다. 신앙 이론이 아니라 신앙생활이 더 중요하다.
단원들은 생면부지의 사람들보다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게 먼저 선교해야 한다. 비신자인 가족, 친척, 친지, 친구, 동료, 이웃 등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게 "성당에 같이 나가자."고 자신 있게 권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긍심을 가진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거나 선교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단원 자신이 기쁘게 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겠는가? 단원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애덕을 실천하면서 감사와 기쁨의 생활을 보여 줄 때 비로소 그들은 자발적으로 예비신자 교리반에 나오게 될 것이다.
모름지기 레지오 단원은 예수님의 유언인 선교 사명을 이행할 때 입으로만 봉사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봉사하는 그야말로 언행일치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3) 정교(正敎) 전통을 지닌 자매 교회들(동방 교회)과의 특별한 유대 관계(교본 468-470면)
동방 교회는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가 당시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인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반도, 이집트, 아르메니아 등지에 전파된 교회를 말한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를 교황에게 맡기고 330년에 자신의 거처를 동방의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틴)로 옮겼다. 700년 이상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는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동방 교회는 전례에서 비잔틴 예식을 별도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서방과 동방 교회는 언어, 제도, 관습, 전례 예식, 신경(信經) 해석에서 차이가 생기고, 비잔틴 총주교들의 로마 교황과의 동등권 주장 등 극단적인 의견 대립으로 1054년에 분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방 교회는 동방 전례를 따르는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나뉜다. 동방 가톨릭 교회는 교황을, 볼 수 있는 지상 교회의 으뜸으로 받아들이지만, 동방 정교회는 그렇지 않은 것이 차이점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서로가 거의 비슷하다. 동방 정교회에서 거행하는 일곱 성사와 성찬의 전례도 유효하다. 왜냐하면 서로 분열된 후에도 정교회는 정교 전통을 지녔고, 정통 주교로부터 성품성사가 수여되어 왔기 때문이다.
동방 정교회 가운데 두드러진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이다.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인 로마 가톨릭의 자매 교회라고 불린다. 예수님께서 일치를 위해 기도하셨듯이(요한 17,20-26 참조) 분열된 서방과 동방 교회는 서로 일치하려고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분열은 그리스도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며, 세상에는 걸림돌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야 할 지극히 거룩한 대의를 손상시키고 있다"(일치 교령, 1항).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동방 교회에 관한 교령을 반포하고 이듬해인 1965년에 동방 교회 총대주교를 만남으로써 실로 911년 만에 두 교회가 화해를 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동방 교회와의 일치를 위한 교황 교서 '동방의 빛'을 반포하며 제1항에서 이렇게 강조하였다. "우리는 존경스럽고 유구한 동방 교회의 전통을 그리스도 교회에 반드시 필요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동방 교회의 전통과 친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가톨릭 신자들은 그 전통에서 자양분을 얻고 각자 최선을 다하여 일치의 과정을 촉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황은 2001년 5월에 몸소 그리스를 방문함으로써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 간의 일치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방 정교회는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께 대한 공경과 신심이 각별하다. 프랭크 더프는 성모 신심이 깊은 동방 정교회에서 가톨릭 교회가 제정한 묵주기도를 바치게 될 날이 오기를 염원했다. 그는 특히 러시아 정교회에 애착을 가져 1969년부터 매년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팀(P.P.C.)을 러시아에 파견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이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정교회는 정교 전통이 있으므로 개종의 대상이 아니라 화해와 일치의 대상이다. 레지오 마리애는 일치의 방법을 모색하는 가운데 성모님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시며 일치의 어머니시다. 성모님은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 발현하시어 정교회를 신봉하는 러시아가 공산 국가로 바뀔 것을 예언하시면서 세계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기도를 요청하셨다. 성모님의 예언대로 소련 공산 정권은 공교롭게도 1991년 8월 22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에 붕괴되고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독립 국가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방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일치를 위해 레지오 단원들은 일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해야 한다.
4) 입교자를 찾아 나서자(교본 470-477면)
입교 권면, 외인 권면 활동은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 종목 중 첫자리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인구 가운데 천주교 신자는 열 명에 한 명꼴도 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선교 대상이 지천에 널려 있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므로 누구나 절대자를 찾아 행복해지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이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해 입교 권면 활동을 해야 한다. 비신자들이 성당을 스스로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다. 누군가가 입교 권면을 함으로써 예비신자가 된다.
일반적으로 비신자들은 천주교에 대해 호감과 호의를 지니고 있다. 종교를 선택해야 한다면 천주교를 택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천주교 신자들이 이기적이고 냉정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천주교에 호감을 갖고 있는데 성당에 나가자고 권유하는 친절한 신자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마치 밥상을 차려 주었는데도 숟가락을 들지 않는 것과 같다. 타 종교 신자들은 과도할 정도로 선교 활동을 펼치는데 유독 천주교 신자들은 입교자를 찾아 나서는 활동에 소극적이다. 그래서 천주교에 와야 할 비신자조차 타 종교에 빼앗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만이라도 적극성을 띠고 입교 권면 활동을 펼쳐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레지오 단원조차도 소극적이다. 쁘레시디움 사업 보고서를 보면 1년 동안에 한 명도 입교시키지 못한 지단이 있다. 비신자들은 생활 속의 시련으로 위로를 받고 싶어하고 영적인 담화를 고맙게 여긴다. 단원들이 친절하게 접근하면 쉽사리 대화의 물꼬가 트인다. 따라서 레지오 단원들은 비신자들에게 활동할 때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떳떳하고 당당하게 해야 한다. 다만 신앙을 강요하거나 논쟁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입교 권면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려면 만나는 비신자마다 입교 대상자로 여기고 친절하게 대하면서 말문을 열어야 한다. 이때에는 반드시 수줍은 마음이나 체면, 두려움을 버리고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시종일관 친절과 사랑을 보여야 하며 상대방을 위해 기도를 해 주어야 한다.
여기에 어느 열심한 레지오 단원의 입교 권면 활동 사례를 요약해 본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더라도 입교 활동 대상자로 여기고 먼저 말을 꺼내어 호의적인 대화를 나눔으로써 최대한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나 가까운 친지를 만났을 때, 장례 봉사나 병원 방문 때, 버스와 지하철의 승객이나 택시 기사에게, 횡단보도에서 만나는 이에게 등 누구라도 놓치지 않고 잠시라도 대화를 나눈다. 그는 효과적인 선교 활동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대인 접촉에 있음을 알고 겸손한 자세와 친절한 언행으로 사람들과 사귀고 온화한 표정으로 기쁘게 사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관심을 보이며 힘닿는 데까지 사랑을 실천한다. 그리고 아는 비신자를 만나면 신앙의 대화를 꺼내 쉽게 천주교 안내 책을 전해 준다.
그는 입교 권면 활동 경험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레지오 단원들은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여 입교 권면 활동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① 선교 활동은 용기와 신념을 가져야 가능하다. ② 굳센 믿음과 불타는 선교 사명감으로 대인 접촉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선교의 성패가 달려 있다. ③ 즉각적인 반응이 없다고 해서 실패한 것은 아니므로 끊임없이 선교의 씨를 뿌려야 한다. ④ 기쁘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좋은 표양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믿음은 들음에서 비롯하므로"(로마 10,17) 호소력 있는 말과 안내 책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레지오 마리애」 114호, 76-80면 참조).
5) 개종시키려면 성체를 설명하라(교본 477-481면)
개신교에는 성체성사가 없고 성체를 모시는 감실이 없다. 성품성사가 없기 때문이다.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가 있어야 미사를 통해 성체성사가 이루어진다. 사제가 없으니 고해성사, 견진성사 등 다른 성사도 없다. 다만 세례식, 혼례식, 기념 성찬례가 있을 따름이다. 1517년에 천주교 신부였던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가 이른바 종교 개혁으로 '새롭게 고친 교회'(개신교)를 만듦으로써 예수님께서 세우신 일곱 성사가 없어졌다. 개신교는 오직 성서, 은총, 믿음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예배도 거의 말씀 전례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고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써 성체성사 제정을 준비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0-51). 그리고 수난 전날 저녁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사제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 하신 말씀을 미사에서 그대로 재현한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마태 26,26-28; 마르 14,22-24; 루가 22,14-20; 1고린 11,23-25 참조).
오직 성서만을 주장하는 개신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내 몸이다."라고 선언하신 분이 동시에 '내 몸이 아니다.'라는 뜻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지오 단원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성체성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어야 하며 성체성사를 개종의 수단으로 여겨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성체성사를 "선교 활동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사제 생활 교령, 5항)이라고 했고, 개신교 형제들과의 대화 주제로서 성체성사를 반드시 포함시킬 것을 제안하고 있다(일치 교령, 22항 참조). 개신교 형제들 가운데 '만일 성체 교리가 사실이라면 얼마나 큰 손실을 입고 있는가?' 하면서 충격을 받고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참된 종교로 개종하기도 할 것이다.
성체 교리 덕분에 가톨릭 교회로 개종한 목사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목사가 다섯 살 된 딸을 데리고 런던에서 여러 가지 특별한 구경을 시켜 주다가 천주교 성당에도 들어가 보았다. 제대 위에서 빨갛게 빛나는 성체등을 보고 어린 딸이 "왜 낮에 불이 켜져 있어요?"라고 묻자 아버지가 설명해 주었다. "얘야, 그것은 예수님께서 저 조그만 감실 안에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등불이란다." 그러자 어린 딸이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여 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감실 문이 잠겨 있어서 볼 수 없단다."하면서 어린 딸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번에는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왜 여기에는 등불이 켜져 있지 않나요?" 하고 묻는 딸에게 "예수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란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딸은 "빨리 나가요 아버지, 나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고 싶어요." 하는 것이었다. 어린애의 말에 충격을 받은 그 목사는 깊이 생각한 끝에 마침내 가족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마리아」 34호, 11면 참조).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개신교 형제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그들을 가톨릭 교회로 인도하려면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성체성사를 개종의 도구로 삼아 자상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사목, 2003년 7월호>
굳뉴스자료실
東方敎會 | ||
라틴어 | ecclesia orientalis | |
1. 역사적 유래 : 동방(東方)교회, 서방(西方)교회라는 명칭은 고대 교회에서는 지리적 의미가 있었지만 오늘에는 오히려 역사적 유래에 의하여 호칭된다.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당시의 로마제국(帝國)의 동부지역인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반도, 이집트 등지로 전파되었고, 로마제국의 국경을 넘어서 갈데아지방과 아르메니아 등지로 확산되었다. 기원후 400년경에는 제국의 동부지역에 약 1천만 명의 그리스도 교인들이 있었으니 이들을 동방교회라고 하였다. 즉 서유럽에 전파되었으며, 400년경에는 약 500만 명의 신자들이 있었는데 이들 서방교회라고 한다. 서방교회에서는 유일한 종교 · 문화 · 정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고리신학, 전례, 법제, 관습들이 서방교회 전체에 확산되어서 서방교회는 외형적으로도 상당히 통일된 단일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방에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소아시아의 에페소, 그리스의 아테네 등등 정치 · 문화 · 교역 · 학문의 중심지들이 여러 군데 있었으므로 동방에 전파된 그리스도교도 자연히 이러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몇 개의 서클이 형성되었으며, 특히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는 그 신자수와 신학적 권위로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박해가 끝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수도 로마를 교황에게 맡기고 자기는 동방의 비잔틴(콘스탄티노플)으로 옮긴 뒤부터(330년) 비잔틴은 황제의 후광을 업고 영향력을 증대하여 끝내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총주교좌가 공인되었다. 각 총주교좌는 그 주변의 교회들을 지휘하여 거의 자립적인 블록을 형성하였으므로 각 블록은 고유한 전례와 관습을 발전시켰으며, 다만 신앙교리의 완전한 일치만이 동서방 교회들을 하나의 그리스도교로 통일시켰던 것이다. 두 가지 위격(位格, persona)이 있다는 설을 주장하다가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단죄되고 추방되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은 페르시아지방으로 피신하여 그곳에 자파의 교회를 세웠다. 그 뒤 네스토리우스파는 인도와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나 타멜란의 박해로 위축되었고, 16세기에 일부는 가톨릭으로 귀의하였고, 일부는 오늘에까지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인도, 미국 등지에 10여만 명이 있다. 네스토리우스설에 반대하는 에우티케스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완전히 그리스도의 신성에 흡수해 버리는 단성설(單性說, monophysitism)을 주장하여 칼체돈 공의회(451년)에서 단죄되었으나 이집트, 시리아 그리고 에티오피아와 아르메니아에서 단성설을 추종하는 이교가 생겨나, 그들을 큐트파, 야곱파라 불렀다. 그 뒤에 이슬람교가 이 지역을 휩쓸어서 그리스도교는 아주 소수가 되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로마 교회와 비잔틴 교회는 사소한 분쟁을 계속하면서도 신앙의 일치를 유지하였지만,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차이, 관습과 제도의 차이, 니체노-콘스탄티노플 신경의 해석 차이, 그리고 비잔틴 총주교들이 로마 교황과의 동등권을 주장하는 야심 등으로 인해서 양 교회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미카엘 체롤라리우스 총주교는 콘스탄티노플의 라틴계 교회와 수도원을 폐쇄하고, 라틴교회가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고, 사제의 독신제를 고집하고 신경에 필리오케를 삽입하였다고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에 대하여 성 레오 9세 교황은 특사를 보내어 담판을 하였으나 결렬되었고, 교황의 사절인 훔베르트 추기경은 체룰라리우스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체룰라리우스는 로마교황을(사실은 그 때 교황좌는 성 레오 9세의 사망으로 공석 중이었다) 파문함으로써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결정적으로 분열되었다(1054년). 그 뒤에 루마니아, 조지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의 정교회(正敎會)들이 속속 로마에서 이탈하였다. 석권하여 성지를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므로 서방교회는 십자군을 일으켜 여러 번 동방에 원정하였고, 한때는 거기에 라틴제국(1204~1261년)과 라틴 전례총주교좌를 설치하였다. 서방교회의 도움이 필요했던 동로마 황제들의 노력으로 리용 공의회(1274~1284년)와 플로렌스 공의회(1439년)에서 양 교회의 일치를 결의하였지만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호응이 없어서 무위로 끝났다. 미구에 터키제국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됨으로써 동로마제국은 멸망하였고(1453년), 러시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지배에서 독립하였다. 중요한 일부가 가톨릭과 합일하였다. 17세기에는 시리아 전례의 멜키트 교회가 가톨릭으로 복귀하였다.또 19세기에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교회들이 독립된 국민교회가 되었고, 1차 세계대전으로 터키가 유럽에서 축출되면서 비잔틴 총주교의 실질적 권한은 이스탄불 근처의 교구들에 국한되었다. 놓여 정확한 현상을 파악하기도 힘에 겨운 형편이다. 동방의 여러 교회들은 각 교회가 추종하고 있는 의식(儀式, ritus)에 따라서 크게 다섯 그룹으로 분류된다. 그들의 의식은 전례절차와 법제와 관습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동방교회에서 압도적 다수파인 비잔틴 의식에 속하는 정교회(正敎會, Orthodox)는 이스탄불을 위시하여 그리스인들이 800만명, 멜키트파가 50만명,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인들이 1억 4,000만명, 루마니아, 조지아, 알바니아 등지에 1,500만명 등 총 1억 6,000여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소련 내의 정교도의 수가 1억명이 아니고 5,000~6,000만명이라고 추산하는 학자들도 많아서 비잔틴전례의 신자수는 1억 2,000만명에서 1억 7,000만명까지 유동적이다. 신자를 합하여 370만명으로 본다. 서부 시리아 의식의 신자는 70만명, 동부 시리아(갈데아) 의식의 신자 17만명, 콥트 의식의 신자 130만명, 에티오피아에 500만명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정교회 신자가 아닌 기타 동방교회의 신자는 약 1천만명 이상으로고 본다. 이들은 다 5세기에 이미 분리된 교파들이다. 동방교회에 소속되어 있다가 여러 가지 기회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재일치를 이룬 동방 가톨릭 교회들의 신자도 약 1,000만명으로 추산된다(Uniati). 비잔틴 의식의 가톨릭 750만명, 아르메니아 의식의 가톨릭 18만명, 서부 시리아 의식의 가톨릭 17만명, 동부 시리아 의식의 신자 20만명, 인도의 말라바르 의식의 신자 130만명, 그리고 레바논의 마론 의식의 신자는 전부 가톨릭으로서 50만명을 넘는다. 있기 때문에 여타의 동방교회들이 항상 경계하는 대상이 되어서, 객관적으로 보면 교회일치 운동에 있어서 좋은 위치에 있지만, 실제로는 오르토독스 교회가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트집을 잡는 구실이 되어 있다. 그들을 동방교회에 대한 서방교회의 침략의 표지로 보기 때문이다. 동방교회의 체제는 다양하고 동방교회 전체를 통괄하는 중심 권위는 없다. 각 의식 그룹별로 총주교, 대주교, 주교의 계통이 있지만, 같은 의식 안에도 여러 총주교좌가 있어서 서로 독립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자치적인 국민 교회의 최고 의결기관은 시노두스 또는 전국 공의회이며 이 회의에는 평신도도 참석하고 있다. 동방교회 전체가 참여하는 세계 공의회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지만 그런 공의회는 역사상 한 번도 개최된 일이 없다. 1950년에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좌는 전체 동방교회의 중심이라고 선언하였지만(아테나고라스 총주교) 아무도 호응하지 아니하였다. 동방의 여러 교회들은 로마시대부터 국가의 직접적인 간섭을 많이 받았으며 오늘의 공산체제 하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철의 장막 뒤에서 들려오는 교회 당국자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독자적 의사표시인지 또는 공산정권의 뜻이 어느 정도 들어 있는지 알기 어렵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는 일치운동의 범위 내에서 상당히 호전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상호방문과 공동연구의 단계에 있고 실질적인 변화는 별로 없는 상태이다. 일치운동에 대하여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좌는 상당히 적극적이지만 다른 교회들은 소극적이고 유보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가톨릭과 같다. 고대에 그리스도론 논쟁 중에 분리된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자들의 교회의 교리는 분열 당시보다는 많이 변했지만 에페소 공의회와 칼체돈 공의회를 배척하는 한, 가톨릭 측에서나 정교회 측에서 그들의 교리를 정통신앙의 교리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정교회는 교회의 초기 7회의 공의회를 가톨릭과 함께 인정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인 성삼론과 그리스도론에 대하여 표현이나 설명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몇 가지 교리와 실천사항에 차이가 있다. 하느님의 계시는 성경과 성전을 통하여 전달된다고 인정하지만, 러시아 교회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서 구약성서의 제2정경(正經, Deuterocanonicum)을 성경이 아니라고 한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성령론 해석에 있어서 가톨릭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 발하신다고 해석하는데, 정교회는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발하신다고 해석한다. 성모께 대한 신심은 두터우면서도 성모 무염시태 교리는 배척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모는 모태에서 성화되지 아니하였고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서 성화되었다 한다. 동방교회에서도 죄의 사면장을 발행하지만, 죄의 사면으로 벌도 사면된다고 하면서 가톨릭의 은사교리를 배척한다. 가장 큰 쟁점은 교황의 명예상 수위권은 인정하나 통치권적 수위권을 배척하고, 교황의 특별 교도권의 무류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동방교회의 신심생활은 미사와 성무일도에 집중되어 있고 대단히 장엄하고 복잡하다. 자신이 세례를 받은 자라야 타인에게 세례를 줄 수 있고(실제는 사제와 부제), 긴급한 경우 외에는 세 번 물에 잠그는 침수식(侵水式)으로 세례성사를 거행한다. 견진성사는 여러 번 받을 수 있고 미사에는 반드시 누룩으로 발효시킨 빵을 사용하며, 평신자도 빵과 포도주를 받아서 영성체를 한다. 고백성사의 보속은 견책이라 하여 속죄가 아닌 치료의 뜻으로 한다. 병자성사는 건강한 사람도 받을 수 있고, 혼인은 양 당사자의 동의로써가 아니고 사제의 축복으로 성사가 된다. 특별한 관면이 없으면 정교도가 아닌 다른 교회의 주교에게서 받은 신품은 무효로 본다. 전례 시기는 예수 부활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고, 성탄 축일은 1월 6일(공현축일)에 지낸다. 성모와 성인과 그들의 성화(聖畵)공경이 활발하고 순례행사를 즐기며, 수도생활(monachism)을 매우 높이 존경한다. 수도자 아닌 재속 성직자는 신품 받기 전에 결혼할 수 있으면, 1923년 이후로는 홀아비가 된 부제나 신부는 재혼할 수도 있다. 일반 신자들은 성탄축일, 부활축일, 베드로 · 바울로축일, 성모승천축일에 영성체하며, 영성체하기 며칠 전부터 단식을 하기도 한다. (鄭夏權)
R. Janin, Eglises orientales et rites orientaux, Paris 1955 / P. Evdokimov, L'orthodoxie, Paris 1959 / O. clement, Byzance et christianisme, Paris 1964 / F. Dvornik, Byzance et la primaute romaine, Paris 19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