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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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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개시판 스크랩 월정사 : 09. 04. 12
신한 등대 추천 0 조회 6 09.11.16 05: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월정사 月精寺


창건기 :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띤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 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뿐더러

예로부터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서 신성시되어 왔다.

그 오대산의 중심 사찰로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1400여 년 동안,

개산조 자장율사에서부터

근대의 한암, 탄허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난 선지식들이 머물던 곳이려니와,

월정사는 오늘날에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 곳 전나무 숲의 그 곧음과 푸름으로

승가僧伽의 얼을 오롯이 지키고 있는 한국 불교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그 때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이었다.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고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자장율사는

“너희 나라 동북방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하라”는

게송을 문수로부터 듣고

신라에 돌아오자마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에 들어가

임시로 초가를 짓고 머물면서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 정암사에 들어가 입적하게 된다.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 뒤로 유동보살(석가모니가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 연등불燃燈佛에게 공양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의 이름)의 화신이라고 전해지는

신효거사와 또 범일국사의 제자였던 두타승 신의스님이

자장율사가 초가를 지었던 터에 다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스님 이후로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남아 있던 이 암자는

수다사(水多寺: 진부면 수항리에 있던 절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의 장로 유연스님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면서

비로소 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고 그 뒤로 차츰 규모가 커졌다.

그 무렵의 월정사는 금당 뒤쪽이 바로 산인 특수한 산지가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금당 앞에 탑이 있고 그 옆에 강당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남북자오선南北子午線 위에 일직선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을 세운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중창기 :

고려 충렬왕 33년(1377)에 화재로 모두 타버린 것을

이일스님이 중창하고 조선시대까지 계속 법등을 밝혀 왔는데

조선 순조 33년(1833)에 또다시 큰 화재를 입고 말았다.

그런지 12년 뒤인 헌종 10년(1844)에 이르러

영담, 정암 스님 같은 분이 앞장서서 중건하여 큰 사찰로서의 모습을 다시 회복하였다.

1911년에는 전국 31본산의 가운데 하나가 되어

강원도 남부의 사찰을 총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랜 역사를 간직해 오던 월정사는

1950년 6. 25 전쟁의 참화로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하여

영산전, 광응전, 진영각 등 17동 건물이 모두 불타고

소장 문화재와 사료들도 모두 재가 되어버린 비운을 맞이했다. 


현재 :

지금의 월정사는 1964년 탄허스님이 적광전을 중건하고

그 뒤로 만화스님과 현해스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중건하여 이룩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엿한 대가람의 모습을 되찾게 된 월정사는

비록 몇 차례 화재와 전화로 많은 성물聖物과 문화재를 잃긴 하였으나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지닌 당우들이며

국보로 지정된 팔각구층석탑을 비롯하여 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1)적광전

 


 

팔각구층석탑 뒤에 만월산 자락의 한 기운이 엉긴 곳에 자리한

적광전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의 매우 큰 법당으로,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으로 세워졌으며

갖가지 문양이 어우러진 단청은 매우 화려하다.

1930년대의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과거 7불을 보신 칠불보전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 때 아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968년에 만화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 다시 중건되었다. 

적광전 외부 기둥 18개 중 16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이고

2개는 괴목이며, 내부기둥 10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전나무로 만들었다.

적광전이 소실되기 전에는 칠불보전七佛寶殿이라 했다.

대체로 적광전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통례인데

이곳 적광전은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의 불상 형태를 그대로 따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이는 1964년 만화스님 법당 중창당시에는 현판이 대웅전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탄허스님의 오대산수도원을 기념하기 위해 결사의 주主 경전이었던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의미로 적광전으로 고쳐 현판을 달았다.

적광전 뒷면 벽화는 10개의 소를 찾아다니는 이야기를 그린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적광전 현판과 주련柱聯 글씨는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주련의 넉 줄은 자장율사의 불탑게이다. 


     萬代輪王三界主 만대윤왕삼계주    

     雙林示滅幾千秋 쌍림시멸기천추    

     眞身舍利今猶在 진신사리금유재    

     普使群生禮不休 보사군생예불휴


     만대의 왕이며 삼계의 주인이여

     사라쌍수 열반 이래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지금 여기에 모셨으니

     뭇 중생으로 하여금 예배를 쉬게 하지 않으리.



2) 팔각구층석탑 :

월정사의 본당인 적광전의 앞뜰 중앙에서 조금 비껴난 자리에 팔각구층석탑이 서 있다.

이 석탑은 우리나라 북쪽 지방에 주로 유행했던 다각다층석탑多角多層石塔의 하나로

고려초기 석탑을 대표하는 것이다.

 

  

 

현재 팔각의 이중 기단이 밖으로 드러나 있는데

지표 아래에 기단부로 짐작되는 시설이 더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2000년 8월 석조보살좌상 보수공사 당시

      지하 1m아래에서 상중하의 3부분으로 구성된 대좌臺座가 발견되어

      학계의 많은 동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좌의 연꽃문양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둥글며 커다란

      중판연화문重瓣蓮花紋을 조각했다.

기단 위에 팔각의 갑석(甲石, 뚜껑처럼 덮은 돌)이 놓여 있는데 갑석 위에는 연꽃을 새겨 꾸몄고,

기단 중석에는 안상(眼像, 탑 면석에 팔면의 오금곡선으로 안쪽을 파낸 모양)을 새겼다.

이 위에 놓인 1층 몸돌 받침의 모양은 고려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몸돌 각 면에 새긴 문틀모양[龕室]과 수평적인 지붕돌 등도 마찬가지이다.

상층기단 면석[탑 기단의 받침돌과 덮개돌 사이에 막아댄 넓은 돌]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을 새겨놓아 목조건축 양식의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9층으로 된 몸돌과 지붕돌은 늘씬한 높이에 비해서 안정된 느낌을 주며,

모서리의 휘어짐이나 탑 몸체부의 문틀 모양 팔각의 다양한 변화 등은

고려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래 위 균형이 잘 잡혔고,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각다층석탑의 대표적인 석탑이라 할 수 있다.

탑 앞에는 강릉 신복사터 삭탑과 마찬가지로 공양供養하는 보살좌상菩薩坐像을 모셔놓았다.


팔각구층석탑은 연꽃 무늬로 치장한 이층 기단과

균등하고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그리고 완벽한 형태의 금동장식으로 장엄한 상륜부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뛰어난 석탑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하나,

그 무렵의 탑들은 평면 정방형에 삼층 또는 오층의 탑으로 이루어진 것에 견주어,

이 탑은 평면이 팔각형이며 탑의 층수도 구층에 이르는 늘씬한 자태를 이루어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탑은 전체를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상륜부에 일부 금동장식을 더하였는데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손상을 입은 부분이 더러 있으나

오늘 날까지도 본래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다.

기단은 아랫 층 각면에 안상을 새기고 연꽃 장식을 베풀었다.


3) 석조보살좌상 : 보물 제 139호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팔각구층석탑 앞에는

그 탑을 향하여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공양을 드리는 모습을 한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좌상의 전체높이는 1.8m.

입에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는 이 보살상을

일명 약왕보살藥王菩薩 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일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된 이 보살은

턱이 약간 길고 눈두덩이 두껍고

빰은 도톰하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어 복스럽게 느껴진다.

머리 위에 높다란 원통현관을 쓰고 있는데

관 옆에 작은 구멍이 얕게 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에 장식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발寶髮은 등으로 살짝 감추어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새기고

앞가슴은 영락으로 장엄한 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무엇을 잡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금 아래로 내려놓은 오른쪽 팔꿈치는 아래에 받침을 괴었는데,

재미있게도 이 받침은 동자상童子像이다. 

지금은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임.

                                                                                                     (인터넷에서)

 (아래의 사진은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솔나리)

이 보살은 탑을 향하여 한가운데가 아닌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 앉아 있고,

상체가 하체에 견주어 큰데

이것은 우리 눈의 착시 현상을 감안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것은

고대 인도의 관습에 따라 자신을 낮추고

스승에게 최상의 존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 이 보살상이 약왕보살藥王菩薩임은 법화경에 잘 나와 있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는

과거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희견보살喜見菩薩이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 설법을 듣고

현일체색신삼매現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

환희심에 가득 찬 보살은 여러 가지 공양을 올렸고,

마침내 천이백년동안 향을 먹고 몸에 바른 후

자신의 몸을 태우며 공양하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받아

일명정명덕국日月淨明德國의 왕자로 태어났을 때

일월정덕여래는 그가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몄다.


그러고도 모자라 탑 앞에서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칠만이천 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약왕보살이다.

 

                                                                                      @ 보살 뒤에 앉아 있는 새

 

# 석등

 


2) 무량수전/수광전 :

무량수전은 서방 극락정토의 교주 아미타불을 모신 곳으로

수광전, 극락전 이라고도 불리운다.

아阿란(아미타(바)Amitabha 무량광無量光·무량수無量壽) 한량없다無의 뜻이며,

미타는 수명을 뜻하니 목숨이 없는 수명의 다함이 없는 부처님이란 뜻이다.

 

 

 

월정사 무량수전은 상단에는 아미타부처님과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모시고

뒤쪽으로 극락의 법회 장면을 묘사한 목각탱화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를 모시고 있다. 

중단에는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지장시왕地藏十王 목각탱화를 봉안하고 있으며,

하단에는 지옥의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인로왕보살님을 금선묘金線描의 탱화로 봉안하고 있다.

지금 무량수전은 1989년 도명스님 때 시작해 1992년 현해스님이 완공廻向했다.

 

# 금강루

 

윤장대 輪藏臺  - 금강루 안에 있다.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의장으로

축을 넣어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 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윤장대를 세운 이유는 부처님 법이 사방에 널리 퍼지라는 의미와

우리나라에 치세를 고르게 하여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풍년이 들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달라는 염원이 들어 있다.

이에 월정사에서는

사찰을 찾아 오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한 번 되돌아 보고

희망하는 소원이 하루 속히 성취되도록 하기 위하여

발원문을 작성하여 윤장대 안에 넣고 돌리도록 성물聖物을 조성하였다.

 

  @ 윤장대에 조각된 동물상

 

 

@ 금강루에 있는 코끼리

 

 

3) 청류다원 淸流茶院 :

 

                                                                                                                        (이전에 갔을 때 찍은 사진)

솔잎은 흠뻑 젖고

금강연은 사납기만 한데

이름모를 보살님 들고 온 찻잔

천만겁아승지千萬劫阿僧祗의 불계佛界가 이곳이로구나. 

전통한옥식 건물로 앞으로는 금강연과 전나무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으며

찻집 가운데는 군고구마와 떡을 구워 먹을 수 있는 난로가 놓여

굴뚝으로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다.

 

# 삼성각

 

 

# 성황각城隍閣

성황각은 이 지방의 토속신을 모신 곳이다.

맞배지붕에 크기는 자그마하여 2평 남짓한 이 성황각은 모든 사상과 믿음을 수용하려는 불교의 넓은 가르침을 보여준다.

사찰로 가는 일주문 전이나 일주문에서 사천왕문 사이 또는 옆에 모시고 있으며, 국사당, 국사단, 가람당이라고도 한다.

 

 

 

 

 

# 전각에 글린 글씨들

 

 

 

 

# 천왕문

 

   @ 천왕문에 있는 부조로 된 사천상  --- 천왕문의 사천왕 이외 더 안으로 들어가면

                                                              특이하게 문에 사천왕의 부조상이 둘 있다.

 

 

# 전나무숲길

 

 

# 삭발기념탑

 

 

# 일주문

 

  @ 일주문에 그려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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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스님

 

신라진평왕 12년(590)에

진골 출신으로 소판벼슬을 지낸 김무림金武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늙도록 자식이 없던 김무림은 부인과 함께 천수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자식 낳기를 지성으로 발원하여 자장을 얻었다.

자장은 어려서부터 마음이 맑고 슬기롭고 문장과 생각이 풍부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부모를 여윈 뒤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원녕사元寧寺라는 절을 짓고

수도의 길로 들어섰다.

구도를 위하여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을 때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이에 선덕여왕이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하여도

자장은 끝내 굽히지 않고

"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戒)를 지니고 죽을지언정,

백 년을 파계하고 살기를 원치 않는다" 고 하며 강한 출가 의지를 나타내니

선덕여왕도 어쩔 수 없이 출가를 허락하였다.

자장의 수도가 날로 깊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계를 받으려고 찾아왔으나

그럴수록 자장은 당나라로 들어가 불법을 더욱 익혀 크게 교화하기를 바랐다.

마침내 선덕여왕 5년(636)에

당나라에 건너가 문수보살이 머무는 오대산에 가서 기도하던 중

꿈에 노스님이 나타나 게송偈頌을 주었다.

문득 깨어나니 꿈은 선명하나 게송이 모두 범어梵語(고대인도어)였으므로

그 뜻을 전혀 알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스님 한 분이 오셔서

" 어찌하여 수심에 싸여 있습니까? " 하고 물으니

자장율사가

" 꿈에 대성인에게서 사구게四句偈를 받았으나 해석할 수 없어서입니다. " 하였다.

그러자 그 스님이 게송을 해석해 주고,

가사와 발우 한 벌, 부처님 정골 사리 등을 주면서

" 이것은 부처님의 도구이니 잘 간직하시고,

당신의 나라 동북방 명주溟洲 땅에 오대산이 있는데,

그곳에 일만의 문수보살이 늘 거주하니 가서 뵙도록 하시오 "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한 것이었다.

자장율사는 중국에 더 머무르다가

선덕여왕 12년(643)에 돌아와 오대산에서 월정사를 창건하였다.

그 뒤로 분황사에 머물면서

나라의 최고 고문인 대국통이라는 벼슬에 추대되어

황룡사에 아홉 층짜리 탑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탑을 아홉 층으로 함은

주변의 아홉 나라가 신라를 중심으로 뭉쳐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상징하는 것이니

이 구층탑의 조성으로 삼국 통일을 기원하였다.

황룡사 구층탑은 선덕여왕 14년(645) 두 해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자장은 또한 선덕왕 15년(646)에

양산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세워 중생제도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이렇게 자장율사가 불교 교단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전력을 다하니

머리 깎고 스님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해마다 늘어났다.

만년에 서라벌을 떠나 명주 땅을 찾아 나서 강릉 가까운 곳에 수다사를 세웠고

꿈속에서 이끌린 대로 태백산 갈반지를 찾아 석남원을 세우고

입적할 때까지 이 곳에서 만년을 보냈다.



한암스님 :


출가한 지 몇 해 뒤에 신계사 보운강화에 갔다가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읽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 뒤로, 한암은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운수행각에 나서

성주 청암사의 경허화상을 만났다.

하루는 경허화상을 모시고 차를 마시다가

경허화상이 '선요'의 한 구절인

"어떤 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라는 문답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자,

한암은 '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이 앞에 섰다 ' 고 대답하였다.

경허 화상은 이튿날 법상에 올라가 대중을 돌아보면서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초과했다" 고 인가하였다.

이때가 스물네 살이었다.


이어 한암은 서른 살 되던 1905년 양산 통도사 내원선실의 조실로 있다가

1910년 봄에 선승들을 해산시키고

평안도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보임保任 중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 때가 서른다섯 되던 겨울이었다.

한암은 이때부터 중생이 서로 의탁하여 사는 이 세상에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면서

수시수처隨時隨處에서 선풍을 크게 떨쳤다.

당시 송만공宋滿空 스님과 법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한암스님은 쉰이 되던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 스님으로 있다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하면서 오대산에 들어갔다.

한암은 오대산에 들어와 들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었는데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 나와 나무가 되니


중대 앞의 단풍나무가 그것이다.

이즈음 조계종 초대 종정이 되었다.

하루는 일본 조동종 사토오가 오대산 상원사에 와 한암에게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大義입니까?" 하고 묻자

한암스님은 놓여 있던 안경집을 들어 보일 뿐이었다.

계속해서 사토오가

"스님은 대장경과 조사어록을 보는 동안

어느 경전과 어느 어록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 하니

한암스님은 사토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적멸보궁에 참배나 갔다 오라" 고 대답하였다.

이어 사토오는

"스님께서는 만년의 경계와 초년이 경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고 묻자

한암은 "모르겠노라" 대답했다.

이에 사토오는 일어나 절을 하면서 활구법문活句法門을 보여 주어 감사하다고 하자

한암은 "활구라고 하였으니 벌써 사구死句가 되었네" 하였다.

사토오는 삼 일 동안 머물다 떠나면서

"한암스님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인물이다." 하며 떠났다.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일본 저명인사의 발걸음이 잦았다.

일본 경무국장(치안감) 이케다가 2차대전 막바지에 찾아와

"이번 전쟁은 어느 나라가 이기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은 "이 있는 나라가 이기지요" 하며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게 대답하였다.

패색이 짙은 전세를 아는 이케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떠났다.

6.25 전쟁이 나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으나

한암은 그대로 상원사에 남았다.

일사후퇴 때에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모두 불태우려고 했다.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올라온 군인들이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했다.

한암 스님은 잠깐 기다리라 이르고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수受하고


법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한 뒤 불을 지르라고 했다.

장교가 "스님이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하자

한암스님은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 하며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이에 감복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마당에서 불을 지르고 떠났다.

오늘날 상원사 법당이 남은 것은 오로지 한암스님의 덕이다.

일사후퇴로 모두 피난을 떠난 지 두 달쯤 지나

1951년 3월 21일 - 1951년 신묘년 음력 2월 14일 - 아침,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잔을 마시고는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이때 한암스님의 세수는 75세요, 법랍은 54년이었다.

당시 정훈장교인 김현기 거사가 사진을 찍기 위해

입적하신 방한암 스님을 햇볕이 드는 바깥채로 모셔 나오기 위하여 육신을 드니

몹시 가벼웠다고 한다.

그것은 방한암 스님이 입적하기 보름 전부터

사바세계의 연緣이 다함을 알고

물 외에는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사진 앞에 있는 경상經床은 김현기 거사가 가져다 놓았으며

벽에 쳐져 있는 담요는 군인들이 문짝을 태워서 문에 담요로 두른 것이다.

한암 스님은 이야기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일발록一鉢錄」 한 권을 남겼는데

그마저 1947년 봄, 상원사에 불이 났을 때 타고 말았다.

이 책은 뒤에 1995년 월정사 주지 현해스님이 문도들의 뜻을 모아

「한암일발록漢岩一鉢錄」으로 재간행하였다.

제자로는 보문普門, 난암煖岩, 탄허呑虛등이 있으며,


한암스님은 1925년 오대산에 들어온 뒤 입적할 1951년까지

27년 동안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아 수행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탄허스님 :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한암 스님의 명성을 듣고

19살에 처음으로 한암스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무려 삼 여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문장이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탄허스님은

정든 속세, 부모 형제를 두고 한암 스님을 찾아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했다.

평소 승려 교육에 많은 힘을 쏟은 탄허스님은

불교학의 최고 학설인 화엄경 120권을 번역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화엄론 40권, 육조단경, 보조법어, 사교, 사집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였다.

승려 교육의 공로로 생전에 인촌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스님의 사상은

한국불교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며

1983년 6월 5일 오후 향년 71세로 입적하실 때까지 오대산 방산굴에 계셨다.

입적 뒤 종교인으로서는 최초로 국가가 추서하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만화스님 :

상원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사교 입선하여 서래밀지西來密旨를 참구하였다.

그 뒤 1945년부터 상원사 총무로 대중외호에 전념하였고,

1950년 육이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암 조실 스님이 모두 안전 지대로 피하라고 하였으나

조실 스님만 남겨두고 떠날 수 없다며 끝까지 남아서

한암 선사의 좌탈입망坐脫立亡을 지켜보았던 효법손孝法孫이다.


1953년에 상원사 주지.

1956년에는 월정사 주지로 취임하였다가

1957년 설악산 신흥사 주지로 부임하여 적묵당을 건립하였고,

1959년 다시 월정사 주지로 취임하여

6.25 전쟁으로 전소된 대웅전을 웅장한 모습으로 중건하였으니,

그 법당이 지금의 월정사 적광전寂光殿이다.

이어 종무소, 동별당, 서별당, 용금루, 사천왕문, 일주문, 진영각, 방산굴 등을 중건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1973년에 중앙종회의원이 되었고

1977년 5월부터 탄허 큰스님과 함께 인도, 동남아 성지를 순례하였다.

1981년 8월 월정사 회주會主로 추대되었다가

1983년 12월 11일 입적하니 세수 64세요, 법랍은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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