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21
선진과 개발의 사이에서
이춘아 한밭문화마당 대표
동남아시아에 속해있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말레카, 태국 치앙마이, 방콕(2009.11.5~11.18)을 다녀온 이후 나에게 변화된 것이 있다면, 단어로만 이해했던 동남아시아를 처음으로 보고 느꼈던 것이고, 그 다음은 경제적인 관점이 조금 생긴 것입니다. 십여일 묵은 지나간 신문의 활자를 보는 내 눈은 다소 빛나있습니다. 새롭게 보이고 있는 단어는 역시 동남아시아이고, 경제면의 용어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예컨대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쓴 ‘동남아는 하나가 아니다’ 라는 기자의 칼럼, ‘세계경제 축 아시아로 이동’ 등의 단어들이 실감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곳을 가 본 것과 가보지 않고 단어로만 이해한다는 것의 차이는 바로 ‘실감’이라는 단어입니다. 단어에 의미에 밑줄 그어 실감하는 것일 것입니다.
싱가포르라는 선진국, 개발도상과 선진의 사이에 줄을 대고 있는 태국, 말레이시아 등 각국의 문화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이 경제계의 노력이 그만큼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화활동가들은 어쩌면 어부지리로 그에 힘입어 문화공간을 지을 여유도 생기고 문화의 중요성도 강조되면서 활동할 수 있는 일자리도 만들어졌을 것임을 인정해야겠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습니다. 나의 경우 경제기업인들과 직접적인 관계도 없었고 이를 알려고도 하지 않은 편에 속해있었기 때문입니다.
싱가포르가 엄청 깨끗하다고 소문을 들었는데 가보니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몇 년 전에 왔더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만, 지금은 우리도 전국적으로 상당히 깨끗해져 큰 차이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싱가포르에서 태국 치앙마이로 가면서 싱가포르가 깨끗했었고 찍었던 사진을 다시 보아도 비할 수 없이 차별되는 특징들이 다시 보였습니다. 선진의 느낌이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태국 치앙마이는 방콕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로 태국의 역사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지역이며 1200년대 이주해온 난나 왕국의 성이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고 네모난 성곽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방사선 형태로 외연을 넓히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도심 한복판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인도가 거의 없이 모든 사람들이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운행되고 있어 도심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되어도 손색없는 고색창연한 곳이었지만 관광객들이 걸어다니기에 불편한 곳이었고 낡은 차량과 오토바이가 뿜어내는 매연에 더위와 함께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자연히 대중교통과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 것을 불평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 교민의 말이 날이 더워 사람들이 제대로 걸어 다니려 하지 않고 오토바이 등으로 다니다보니 인도가 발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대중교통 버스 등의 체계를 갖추려했으나 ‘쌩태우’라 불리는 트럭형 차와 오토바이에 마차형태를 덮어씌운 ‘툭툭’이 대중교통을 대신하고 있는데 이들의 조합 힘이 강해 매번 대중교통체계 개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공형 또는 기업형의 대중버스보다는 사적인 대중택시 형태가 발전되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깨끗하고 편리한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만연되어 있는 나를 문득 다시 생각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잠시 들린 외부관광객에게는 불편할 수 있으나 많은 수의 서민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나름의 체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대중 공공버스 운송체제가 된다면 소수의 운전사와 버스회사는 좋을 수 있으나 많은 이들의 일자리는 박탈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치앙마이는 영세한 형태이나마 모두들 열심히 살고 있었고 길거리 행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같습니다.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서울 청계천 일대가 재정비되면서 많은 영세상인들이 어디론가 밀려져 나갔습니다. 그들은 살 자리를 잃었습니다. 외형상 좋고 청계천 일대를 보러 오는 관광객들은 많아졌고 보기에도 좋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당장의 일자리를 잃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모두 함께 잘 잘 수 있다는 원칙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그 우선순위에 대한 합의를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선진’이라는 미명하에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잘 살게 되었나
생각해보면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잘 살게 되었나? 되묻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발전의 원동력은 역시 교육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랜 외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속국이 되지 않았던 것, 전쟁 등을 통해 생존의 법칙을 터득한 악착같음은 고혈을 짜내어 교육시킨 결과인 것 같습니다. 백여년 전 북미와 남미로 노동이민간 세대들을 비교할 때 하와이 등 북미 이민자들은 악착같이 자녀교육을 시켰던데 비해 남미 이민자들은 그렇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북미 이민자들에 비해 남미 이민자들의 생활수준은 떨어진다는 이민사의 속사정을 들은 적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고질적 병폐중 하나가 교육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식교육은 내가 시킨다는 아집에 연유한 것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부담한 교육이민 형태가 도출되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초중등생들의 해외유학의 양상을 태국 치앙마이에서 보았습니다.
한 집에 세 가정의 자녀들이 기거하며 사는 모습, 150여명 모인다는 한인교회의 일요예배에 온 교인들의 절반이상이 유학 온 청소년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떨어져있는 혼자 온 아이들,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들, 그럼에도 아이들의 표정은 밝았습니다. 이 표정이 부모의 모든 헌신을 낳게 했겠구나 가늠할 뿐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유출될 교육이민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이를 바라보아야할까요. 한국내 교육만으로는 안되겠다는 판단은 외국에 나가보면 더 분명해지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유학 온 청소년들을 보듬어 안고 있는 한인교회 목사님이 존경스럽고 이렇게라도 건강한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지원책이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부모가 함께 있을 수 없는 처지라면 어차피 동질적인 공동체는 있어야하고 건강하고 즐거운 공동체를 지원해주는 것도 교육정책일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나가 살면 민족적 동질성이 사라져 국력이 쇠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내심 깔려있었습니다만, 많은 중국 해외이민자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의 한인사회처럼 말입니다. 국내의 교육정책이 신뢰를 잃으면서 해외 교육이민이 급증하였고 경제적 이유로 미국 등 선진국에 제한되었던 것이 이제 저 멀리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이중적인 잣대로 들이댈 것이 아니라 보다 멀리 내다보면서 글로벌 시대를 국내로만 좁힐 것이 아니라 건강한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생각과 발전적 정책이 있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