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듣지 못한 말...
제목 : 푸른 늑대의 파수꾼
김은진 글 / 창비청소년문학
발제자 : 18기 최화영
년초에 짠 순서대로였다면 내가 발제를 맡을 작품은 시인 윤동주의 작품집이었다. 헌데,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뒤로 밀려서 받은 책이 하필이면 피하고 싶었던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라니... 1학기때 권윤덕 작가의 『꽃할머니』를 공부하면서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목이 메었었다. 그림책에는 소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꽃으로 표현되었지만 나에게는 인권유린의 현장에서 짓밟힌 10대 소녀들의 순결과 청춘, 그녀들의 많았던 웃음과 꿈 등으로 느껴져 꽃의 빛깔만큼 짙고 참담한 기분이 들었고, 오랫동안 빠져나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푸른 늑대의 파수꾼』의 주인공 ‘현수인’은 흑백 영화 같은 일제 강점기 경성 거리를 거닐고 자기 목소리로 말하고 노래하는, 한마디로 컬러풀한 소녀다. ‘위안부’ 할머니를 떠올리던 암울한 느낌의 시선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생기발랄한, 현재의 10대보다 더 10대다운 소녀로 제시한 점에서 새로움을 느꼈고 보다 편한 마음으로 끝까지 읽을 수 읽었다.
무대는 2016년 오늘날의 서울과 1940년대 일제 강점기의 경성 거리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구성이 눈을 뗄 수 없이 몰입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16세 소년 ‘오햇귀’는 봉사 활동을 하러 독거 할머니의 집에 방문한다. 할머니의 이름은 ‘현수인’. 그녀는 평양에서 태어나 맑은 노랫소리로 학급 친구들을 행복하게 해 주며 거침없는 말괄량이 여학생이었다는데, 지금은 병들고 칼자국난 얼굴을 하고 병상에 누워 링거에 의지한 채 지낸다. 할머니 수인은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고통에 신음한다. 한편, 햇귀는 그 집 2층 벽장 속에서 ‘Race the clock(시간과 싸워라)’이라고 새겨진 낡은 회중시계를 발견해 자신을 괴롭히는 태후를 피해 엉겁결에 1940년대 경성으로 시간 여행을 간다. 그곳에서 햇귀는 소녀 시절 수인과 수인이 식모로 일하는 집의 딸인 하루코를 만나고, 우리 역사의 지울 수 없는 상처인 일본군 강제 위안부 문제와 맞닥뜨린다. 수인과 햇귀가 시간을 거슬러 만나는 덕분에, 나의 오늘이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선 위에 있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햇귀는 위안부가 될 수인을 구할 수 있을까? 시간 여행에서 과거가 바뀌면 미래인 현재도 바뀌게 될 텐데, 그럼 역사가 바뀌는 것인가? 기대와 바람 섞인 긴장감으로 햇귀를 응원했다. 제목에서처럼 햇귀가 늑대들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잘 해내주길를....
일제 강점기는 물론 힘든 시대였지만, 이때에도 청소년들은 미래를 꿈꾸고, 좌절하고, 다시 희망을 찾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책에 나오는 현수인, 열여섯 살 가수 지망생 소녀가 그랬듯이 말이다. 여기서 각자 다른 꿈을 가진 10대 청춘들이 등장한다. 1927년 평양에서 독립군의 막내딸로 자란 현수인은 당대 최고의 명가수를 꿈꾸고, 조선총독부의 세무 감독국장인 후지모토의 딸, 하루코는 듬직한 샐러리맨을 만나 로맨틱한 사랑에 빠지기를 꿈꾼다. 2016년을 사는 햇귀는 은밀한 빵셔틀로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만 저항하지 못하는 생활에서 도망치는 게 소원이다. 수인과 하루코가 나들이 나가던 날 미용실과 백화점에서의 에피소드를 보며 나도 함께 설레였고, 세 사람이 시간을 뛰어넘어 만나는 장면들이 생생하고 흥미진진했다.
『도둑맞은 나의 청춘! 김해송의 목소리 끝에서 청춘이 불현듯 나타나 달음질쳐 왔다. 폭풍우처럼, 사자처럼. 나에게는 폭풍우가 몰아치듯 춤추고 사자가 포효하듯 노래할 자유가 있었다.
김해송의 노랫가락에 취한 듯 리듬을 타며 탁자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맨발로 어설프게 탭댄스도 추었다. 잔을 들어 위스키 마시는 흉내를 냈다. 도저히 입 밖으로 노래가 나오지 않았다. 여기는 청춘을 저당 잡힌 하루코네 응접실이니까. 본문(129p) 중에서』
수인의 밝고 명랑한 모습은, 점점 일본군 강제 위안부로서 처참히 살아야 했던 경험과 대비되어 더욱 짙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수인과 짝을 이루는 일본 소녀 하루코 또한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사춘기를 지나는 하루코는 “죽을 것처럼 슬프다가 갑자기 즐거워졌다가 어떤 때는 미치도록 화가 나는 거 있지. 대체 무슨 병일까? (…) 어쩌면 난 외롭게 죽어 갈 거야.”(154p)』라고 고민하고, 간호 장교가 되어 전쟁터로 가고 싶지는 않다며 괴로워한다. 선생님을 향한 첫사랑에 가슴앓이도 겪는다. 총독부 관리의 딸과 식모 소녀라는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힘없는 10대 소녀로서 한 시절을 함께 겪고 서로 위안이 되어 준다. 국경과 계급을 넘어선 이들의 우정에 감정이 이입되면서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수인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가수의 꿈을 꾸던 수인을 가족의 품에서 빼내어 종처럼 부리는가 하면, 위안부에 넘기기 위해 갖은 술수를 쓰던 후지모토는 서슬 퍼런 칼날과 같다. 후지모토의 딸 하루코는 미래에서 왔다는 한 남자아이로부터 ‘후지모토가 수인을 위안부에 보내려 한다.’는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신분을 바꾸고 낯선 남자들을 따라 나선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한 악랄한 행위들을 보고 배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택한다. ‘타인의 시간을 빼앗은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265p)유서로 이 한 문장만을 남기고 말이다.
과거가 바뀌기 전, 그러니까 수인이 ‘무료로 공부도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위안부 배에 오르고 난 다음에 모든 상황을 알게 된 하루코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는 생각으로 그 모든 생각들을 이겨내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숨을 거둘 때, 손녀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미안합니다, 마음으로부터.”(105p)
과거가 바뀌기 전에, 그리고 과거가 바뀐 후에 사라진 것과 남겨진 것들.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햇귀는 현수인 할머니를 지켜냈다. 아니, 자신과 동갑이고 가수가 꿈인 수인이를 살렸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할머니’라는 시점보다 ‘친구’라는 시각에 맞추어서 쓴 책이라 더욱 더 잘 읽히고 공감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들도 꿈을 가졌고, 가족들과 더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한때는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이었을 테니까. ‘미안합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루코가 남겼다는 이 한 마디. 지금까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단 한 마디의 사과도 없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일본 정부와 다르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하는 하루코 할머니. 소설이지만 참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또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함께 생각해보아요.
작가는 일본인 소녀, 유메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늑대는 어디에나 있스므니다. 도망쳐도 또 만나게 되지요. 한번 도망치면 영원히 도망치게 되므니다.”(104p)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도망치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작가가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라 함께 나눠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