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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산서원 ***
안동의 도산서원과 쌍벽을 이루는 옥산서원은 성리학의 거두 晦齋 이언적(1491~1553)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서원이다.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번지에 위치한 옥산서원은 1967년 사적 제 154호로 지정되었는데, 이 서원에서 북서쪽으로 700미터 떨어진 곳에는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獨樂堂이 있다.
회재는 사간원 사간이 되어 김안로를 재등용하려는 논의를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숙청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자옥산 기슭에 독락당을 지었다. 그는 자계계곡의 독락당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봉우리를 골라 화개산, 자옥산, 무학산, 도덕산이라 이름 붙이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중요한 너럭바위를 골라서 관어대, 영귀대, 탁영대, 징심대, 세심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른바 회재의 4산 5대로 일컬어지는 경승으로, 조선시대의 대시인 노계 박인로(1561~1642)는 이곳을 찾아와 이언적의 학덕과 경승을 읊은<독락당>이라는 시를 썼다.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의 사후 19년 만인 1572년(선조5년)네 당시의 경주부윤이던 이제민과 유림들이 회재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그 다음해인 1573년에 경주 서악의 향현사에 있던 위패를 모셔와 봉안하였고, 1574년(선조 7년)에 ‘玉山書院’ 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후 옥산서원은 임진왜란 때도 병화를 면하였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되었으며, 6·25 전쟁 당시 이곳이 가장 치열한 격전지의 하나였음에도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어왔다.
서원 경내의 건물들은 체인묘·전사청·체인문·신도비각·경각·장판각·구인당·민구재·암수재·무변부·역락문·고직사·청분각 등이 있다. 건물의 배치는 전면에 강학 공간을 두고, 후면에 제향 공간을 형성한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서원의 정문인 외삼문은 역락문이다. 이는 논어의 <학이편>에서 따와 지은 것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2층 누각인 무변루가 버티고 서 있는데, 무변루와 역락문 사이에는 작은 도랑이 있다. 이 도랑은 계류를 끌어들여 흐르게 한 서원의 명당수로서, 이 도랑을 건너야만 무변루의 누문을 통과하여 서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2층 누각인 무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무변루는 원생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처음에는 문루 이름이 納淸樓라 하였으나, 소재 노수신(1515~1590)이 무변루로 바꾸었다고 한다. 2층 대청에 걸려있는 ‘無邊樓’ 편액은 석봉 한호(1543~1605)의 웅필이다.
무변루 1층의 누문을 통해 계단을 올라서면 강당인 구인당의 앞마당이다. 구인당 앞 좌우에는 원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고, 강당 앞마당에는 정료대가 세워져 있다. 구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기단은 다듬은 돌로 바른 층 쌓기를 하였으며, 기단 위에는 둥글게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세웠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좌우 각 1칸에는 온돌방을 두었는데 왼쪽 방이 원장이 기거하던 양진재이고, 오른쪽 방이 요즘의 교무실과 같은 곳으로 해립재이다.
구인당은 1839년(현종5년)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 지으면서 현종이 추사 김정희(1786~1856)에게 편액을 쓰게 하였는데, 현재 구인당 전면에 걸린 ‘玉山書院’편액이 추사의 글씨이고, 대청 전면에 걸린 ‘玉山書院’편액은 선조 때 사액된 것으로 아계 이산해(1538~1609)의 글씨이다. 그리고 구인당의 ‘求仁’은 회재 이언적의 저서 <求仁錄>에서 따온 것이며,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이다.
강당에서 볼 때 왼쪽이 동재인 민구재이고, 오른쪽이 서재인 암수재이다. ‘敏求’는 ‘인을 구함에 민첩해야한다’는 뜻이고, ‘闇修’는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나날이 새롭게 밝게 펼쳐나감’을 뜻하는 이름이다. 민구재와 암수재는 각각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인당 뒤에는 사당으로 통하는 제향 공간의 정문인 내삼문이 있다. 이 내삼문의 이름이 체인문이며, 담장을 둘러쌓아 만든 별도의 영역에 사당인 체인묘아 전사청이 자리 잡고 있다. 체인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내부에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체인은 어질고 착한 마음을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니, 회재가 행한 실천철학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회재의 이름은 본래 적(迪)이었으나, 훗날 중종의 명으로 彦자를 더하여 언적으로 고쳤다고 한다. 또한 그의 호 ‘晦齋’는 주자(성리학을 대성한 남송의 대유학자 주희)의 학문을 따른다는 뜻에서 주희의 호인 회암(晦庵)을 따라서 자신의 호를 ‘晦齋’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서 태어난 이언적은 외숙인 우재 손중돈(1463~1529)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조 정랑, 사헌부 장령, 밀양 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25년)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난 뒤 낙향하여 독락당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되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 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 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조정에 <일강십목소 - 一綱十目疏>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 상소는 김안로 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로서 그는 이 상소에서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바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 가지 조목을 열거하였다.
그 후 이언적은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이조, 형조,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하거나 외직으로 나가기를 요청하여 안동 부사,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인종이 즉위한 다음 해에 의정부 우찬성, 좌찬성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인종이 승하하자 원상이 되어 국사를 관장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의 영수 윤원형 등은 사림을 축출하기 위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그는 모친의 병이 위독하여 사직하였으나 원상으로 있을 당시 대윤인 윤임 일파의 처벌에 미온적이었다는 탄핵이 올라와 삭탈관직 되었으며 1547년(명종2년)에는 윤원형 등 소윤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에 유배된 후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회재 이언적은 유배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론적 성리설은 그 다음 세대인 퇴계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다. 그의 문집으로는 <회재집>이 있으며, <구인록>, <奉先雜儀>, <大學章句補遺>, <續大學惑問> 등의 저서가 있다. 그에게 문원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10년 (광해군 2년)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들을 “동방 5현”이라고 부른다.
회재의 위패를 봉안한 체인묘 북쪽에는 신도비각이 세워져 있고, 남쪽에는 경각과 장판각이 있다. 그리고 서원 영역 남쪽으로 고직사가 있다. 신도비는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짓고 이산해가 쓴 것이다. 경각과 정판각에는 어서와 어필, 내사본 등 각종 전적과 각종 판각을 보관하였는데 지금은 서원 동남쪽에 현대식으로 지은 장서각인 청문각에 <정덕계유사마방목>(보물 제526호), <이언적 수필고본 일괄 13책>(보물 제586호) 등 옥산서원의 많은 서책과 회재의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고직사는 서원의 노비들이 기거하던 곳인데, 그 규모가 매우 크다. 서원의 총무인 유사가 상주하면서 서원 살림을 지휘하던 서원청이란 건물을 중심으로 ‘ㄱ’자 형으로 구성된 15칸의 고청과 대규모의 곳간채가 있으며 마당 가운데는 서원의 행사 때 음식을 장만하던 공간인 포사가 있다.
옥산서원에서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700미터를 가면 회재 이언적이 낙향하여 지은 집의 사랑채인 독락당이 있다.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는 독락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1칸의 온돌방과 3칸의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호인 ‘獨樂’은 성리학을 강구하며 천진본체를 홀로 즐긴다는 뜻이라고 한다.
회재는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하면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독락당 옆 계곡과 경계를 이룬 담장에는 살창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차경 수법으로 바깥 경치를 집 안까지 끌어들이는 고도의 건축기술이다. 또한 독락당 뒤쪽의 계정은 자계계곡 물가의 관어대는 반석 위에 올라앉은 정자로서 양진암이라고도 하는데 자연과의 조화가 절묘하다. 1칸의 온돌방과 2칸의 대청으로 이루어진 ‘ㄱ’자 형 건물인 ‘溪亭’의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이며 ‘養眞庵’은 퇴계의 글씨이다.
=== 양동마을을 찾아서 ===
1. 한국에 명문가가 존재하는가?
- 한국 근세 100년의 역사는 명문가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굴곡이 많고 가팔랐다.
일제 때 친일, 해방 후 좌익, 우익, 독재정권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흠집하나 없이 온전한 집안으로 있기에는 힘들었다는 말이다.
혹자는 한국 사회에는 존경받는 명문가나 지도층이 없다고 잘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도 분명 품위 고, 자존심을 지키려고 애쓴 집안들이 남아 있다. 이름 하여 명문가라고 하는 것이다.
조용헌은 그의 저서 <명문가>에서
명문가라고 일컬을 수 있는 집안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고 보았다.
첫째, 역사성이 있다. 짧게는 일이백년, 길게는 사오백년 동안 그 지역에서 오래 거주했다는 것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전통문화가 축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둘째, 도덕성이다. 도덕성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으면 수백 년간 집안은 건사해 올 수 없다. 도덕성이란 뒤집어보면 존경이다. 존경받지 못한 집안은 사회적 격변기에 거의 사라져 버렸다.
셋째는 인물이다. 학문과 인품이 훌륭한 인물이 그 집안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에 그 집이 오래 유지될 수 있었고, 그런 집이 대체로 ‘고택’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넷째는 재력이다. 재력이 없으면 대지 500 - 1000여 평에 수 십 칸 규모의 저택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관리하기란 불가능하다.
다섯째는 명당이다. 현재 남아있는 고택들은 풍수지리학으로 명당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고색창연한 한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명문가 여부를 가늠하는 척도로 활용될 수 있음을 말한다. 물론 고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서울에서 8대를 내리 판서를 지낸 우당 이희영 집안은 일제 때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서울 명동에 있던 고택을 처분했다. 그러나 대체로 고택하나로도 명문가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영남지역에 고택이 많이 남은 이유
- 호남이나 충청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남지역에 고택이 많이 보존된 이유(안동 일대 등)
첫째, 조선시대 남인 지방이 고택을 비롯한 집안보존에 노론이나 소론에 비해 남다른 관심을 기울임
* 조선 후기 약 150년 가깝게 정권에서 배제, 요즘의 지역차별을 당한 셈. 영남사람 영의정, 서애 류성룡, 조선말 고종 때 서애의 8대손 유후조가 좌의정에 오른 일이 다이다. 그밖에는 중앙정치 무대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즉 기호지방 노론으로부터 견제 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둘째, 6.25 전쟁이다. 영남지방에 고택이 많이 보존된 이유는 6.25전쟁과 관련이 있다. 영남은 충청이나 호남에 비해 6.25의 폐해가 적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낙동강 이남이 점령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400년 전 임란 때 영남이 직격탄을 맞아 피해를 입었던 반면 기호나 호남은 피해가 적었다면 6.25 때는 그 반대였다. 영남에 많은 고서가 남아 있는 배경으로 6.25의 피해가 적었음을 감안할 수 있겠다.
셋째, 서울과의 거리이다. 즉 영남은 충청과 호남에 비해 영남은 오지였다.(산세가 험함)-- 외부와의 통행제약
결국 서울이 상징하는 것은 서구화, 현대화, 산업화 등으로 변함
3. 조선시대의 비버리힐즈 ‘양동마을’
한국 전통 민속마을은 충남 아산 외암리, 경북 안동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양동마을이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분위기가 잘 보존된 곳이다. 대략 60 여 채의 기와집이 남아 있는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5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명소이다.
① 지정학적 위치 : 경주와 포항 사이에 있어서 출퇴근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다. 예) 영남의 반촌마을 : 경주 양동, 안동 하회, 안동 내앞, 봉화 닭실마을. 양동과 하회마을 :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양동은 품격 있는 마을로 보존되고 있으나 안동은 상업화되고 있다. 평면적인 반촌(평지)에 비해 양동은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어서 입체적임.
로마시대 귀족 === 팔라티누스 언덕, 아벤티누스 언덕
미국 샌프란시스코 === 언덕으로 올라갈수록 고급주택이 위치
유럽 사람들이 양동마을에 오면 경탄
조선시대의 비버리힐즈 ==> 양동마을 (가장 오래된 고택 경주 손씨 종택)
◆ 서백당(書百堂)
* 참을 忍자를 백 번씩 쓴다는 말
서백당이 지어진 시기 : 양민공 손소(1433-1484) 때부터 ---
손소의 처가인 양동에서 살기 시작한 때가 1458년이고 이 무렵에 서백당이 지어짐. 양민공 손소의 아들 우재 손중돈(1463-1529) 대에 이르러 명성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현재 20대 종손 손성훈 씨까지 약 550년의 역사를 가졌다. 이는 충남 아산에 있는 북향집 맹씨행단(1330년대)다음으로 오래된 개인주택이라고 한다. 서백당이 손씨 종가라면 여강 이씨의 종택 무첨당도 500여년이나 되었다.
언덕 위에 집을 지은 양동마을은 공간이 협소하여 다른 반촌에 비해 건물들이 협소하나 언덕이라는 입지조건으로 풍수해를 입지 않았다.
양동마을의 또 다른 특징은 외손이 발복하는 터라는 것이다. 손소는 유복하의 사위로 손중돈을 낳았고, 이언적은 손중돈의 조카로 손소의 외손이다.
손씨 집안의 전설에 의하면 서백당에서는 “세 명의 혈식군자가 나오는 자리다”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血食君子란 서원에 배향되는 레벨의 인물을 가리킨다.
그 첫 인물이 우재 손중돈이다. 그런데 우재 다음으로 난 인물이 회재 이언적이다. 그래서 혈식군자 세 명 가운데 한 장을 이씨 집안에서 가져간 셈이다. 그 이후로 손씨 집안의 딸들은 서백당에서 출산하는 기회가 차단되었다고 전해진다. 손씨 집안에서는 세 번째 인물을 아직 기다린다고 하는데 현재 위덕대학 총장으로 있는 손제석 전 문교부 장관이 그 세 번째 인물이라고도 말한다.
* 서백당에 있는 나무
마당 우측에 있는 향나무는 양민공 손소가 직접 심었다고 하는데 수령이 600여년으로 문화재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백당 대문 앞에는 오래된 회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회화나무는 괴목(槐木)이고, 느티나무는 귀목(櫷木)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괴목과 귀목을 혼돈하여 사용하고 있다. 회화나무는 귀신을 쫓는 辟邪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또 양동마을 어른들은 회화나무가 습기를 빨아들이는 효과가 있으며 피부병 문둥병 등을 예방해 주는 나무라고도 하고 있다.
경주 손씨의 저명인사로는 전 경동보일러 회장 고 손도익, 전 문교부장관이었고, 위덕대학 총장인 손제석, 동양석판(주) 손열호 회장, 퍼시스(주) 손동창 회장, 서울대 손봉호 교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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