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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내 마음의 고향(1984 안도 도요로쿠 지음)
저자 소개 : 오노다 시멘트 상담역-안도 도요로쿠 저(小野田セメント相談役- 安藤豊禄著) 재계인의 쇼와사, "한국 내 마음의 고향".
(*安藤豊禄 : 안도 도요로쿠(1897년 1월 18일 - 1990년 2월 26일)는 일본의 경영자. 오노다 시멘트 사장을 지냈다. 오이타현 출신 1921년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오노다 시멘트에 입사했다. 1944년 이사로 취임해 1947년 전무를 거쳐 1948년부터 사장에 취임. 1966년 이사 상담역을 거쳐 1975년 상담역으로 취임하였다. 1990년 2월 26일 심부전으로 사망.향년 93세)
서문 : 내 저서 한국 내 마음의 고향(재계인의 쇼와사)이 이번에 발간되게 됐다. 본 저서의 발간은 내가 과거에 쓰거나 말한 것 중에서 주요한 것을 집대성하는 한편 새롭게 덧붙인 것이다.
나와 한국의 인연은 길다. 전쟁 전후를 통해 육십여 년이 되지만, 사실 나는 스물다섯 살에서 오십 살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시기를 한국에서 보냈다. 결코, 싫증나게 보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매우 의미 있고, 또한 즐겁다고 생각하면서 보낸 25년간이었다.
물론 종전 후 2년의 기간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이는 공산당의 북한 평양에서 보낸 2년이니 이 기간은 즐겁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것도 사십 년 가까이를 지내고 보면 어느 정도 마음의의 양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 머릿속에서 한국을 떨쳐버리려 해도 그건 무리다. 책 이름이 태어난 이유는 여기에 있다. 88년의 삶은 이를 거시적으로 보면 한 조각의 꿈일 뿐이다. 흔히 말하는 망망대해의 일엽 편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미시적으로 보면 천차만별. 가파른 언덕 험로를 무사히 보내고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내 친구도, 또 많은 사람들도 크든 작든, 이런 생각을 품고 지난 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본 저서는 말하자면 순서부동의 문장의 오합지졸로, "저서" 라는 말에는 해당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별로 적당한 다른 말도 찾지 못한 채, 굳이 저서라는 말를 사용하게 되었다.
발간에 있어서는 하라쇼보(原書房)의 나루세 쿄(成瀬恭)사장, 편집부의 나라하라 마키오(奈良原真紀夫), 고미네 토시로(小峯寿朗) 두 사람에게 힘입은 바가 많다. 또 오노다 시멘트의 오시마 겐지(大島健司) 사장을 비롯해 아리카와 쇼지로(蟻川昭二郎), 마에다 히로시(前田博司), 마쓰타니 시코(松谷志子) 제씨의 협력도 이 지면을 빌려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1984년 6월 24일, 안도 도요로쿠 씀
● 목차(안도 도요로쿠 지음,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재계인의 쇼와사-昭和史).
제1장 한국여정 1P
01 사계절의 하늘
02 한국의 설날.
03 풍속과 습관
04 창씨개명의 어리석음
05 안중근은 민중의 마음
06 이승만후의 신생 한국
07 한일 국교 회복 "전야"
08 박 정권과 한일 관계
09 경제풍경 "한강의 기적"
제2장 비극의 역사를 넘어 - 한일 간에 놓는 다리 75p.
10 60여 년의 교제
11 내 마음의 고향
12 두개의 학살 사건을 걱정하다
13 '불청객'의 횡포
14 기만적인 "인사 정책"
15 신생 한국의 대변신.
16 위대한 지도자의 삶과 죽음
17 침략과 은혜의 대가
18 비극의 역사를 넘어 지금.
제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인생 107p
19 세정(世情) 불안의 시기의 입사
20 월급 80엔의 현장 배속.
21 조선으로의 첫걸음
22 3•1 사건의 여파가 남다
23 가와우치(川内)공장 건설.
24 폭발도 젊음으로 극복하다.
25 독일유학
26 모든것이 놀라운 베를린.
27 세계 동력 회의에 참가.
28 크루프 공장 견학
29 컴퓨터 모델 눈 아래에
30 귀국 여행
31 "마천루" 풍경
32 다시 조선으로.
33 제3공장 건설
34 '중용열시멘트' 개발
35 수교선언의 땅 문경(聞慶)
36 "문화통치"의 사이토(斉藤)총독
37 "정신" 강조의 미나미(南)총독
38 "창씨개명" 반대
39 종전(終戦)
40 지금까지의 관계가 역전.
41 북한, 억류 생활.
42 식량만은 차별받지 않고.
43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
44 연탄으로 열차를 움직인다.
45 고국의 땅
46 사장 없는 실권자.
47 천황의 행차
48 도덕성 저하에의 역요법
49 만철(満鉄) 조사부 창시자
50 GHQ에의 직소
51 본사 기능을 도쿄 이전.
52 업태(業態)의 확대
53 폐쇄보다 재건 동분서주.
54 "하늘은 내 편이다"
55 후지모토(藤本)군의 오노다 구제
56 노사 공방의 나날
57 오코치(大河内) 도쿄대 총장의 눈물
58 오노다 방식 OA의 선구
59 구로베4호댐(黒四ダム) 컴퓨터의 위력
60 연구 투자의 무대 뒤
61 메트로폴리탄 클럽의 추억
62 사업 성공의 열쇠
4장 이외(理外)의 이치(理)를 읽는다, 173p.
63 오노다의 '육아론'
64 소득 배증 계획의 파문, 사토 에이사쿠 외.
65 나라 만들기 행각, 미키 요노스케
66 경영자의 조건 도멘토요노부(道面豊信)
제5장 잊지 못할 사람들 245p
67 어머니 같은 고향
68 다케오원두(武夫原頭)에 새싹이 움트다
69 다죽사(茶竹舎)의 추억
70 과단(果断)과 선견지명.
71 노구치(野口)씨와 구도(工藤)군
72. 쇼팽을 생각하다
73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 선생님을 그리워하다
74 "시게미츠(重光)외무상"의 알려지지 않은 일면
75 과묵의 후타바야마(双葉山) 선수
제6장 외전(外伝)•안도 도요로쿠(安藤豊禄) 245p.
76 일본적 경영자의 전형
77 도요로쿠(豊禄) 씨의 한국 론(論)
78 미수(米寿)의 기개
79 약년표(권말) 334p
한국 내 마음의 고향(안도 도요로쿠 著 1984)
제1장 한국여정(韓国旅情)
[제1장 참고 자료]
*사계절 하늘 <한국의 하늘-1962년 3월>
*한국의 정월 <주간 다이아몬드-1964년1월>
*풍속과 습관 <게재지 미상>
*창씨개명의 우(愚) <창씨 개명 이야기-문예춘추 1955년 3월호>
*안중근은 민중의 마음 <안중근 의사 사건- 1983년>
*이승만후의 신생 한국 <새로운 한국의 표정- 경제왕래 1962년 11월호>
*일한국교회복"전야" <한일 정상화의 기운 무르익다-니혼게이자이신문 1962년12월19일>
*박정권과 한일관계 <고뇌하는 박정권과 한일관계- 자유세계 1964년 7월호>
*경제풍경 "한강의 기적" <우방(友邦) 1969년 8월-9월호> 등에 가필 보정 함
한국 내 마음의 고향(안도 도요로쿠 1984)
● 01 사계절의 하늘(한국의 하늘-1962년 3월의 글)
반생을 조선반도(朝鮮半島)에서 보낸 나에게 그 곳에서의 추억은 한없이 솟아나지만, 첫 번째로 생각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하늘의 '아름다움'이다.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잘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과 달리 늘 맑은 조선(朝鮮)의 하늘은 그 이름 속의 '신선할 선(鮮)'이란 글자가 대변해 준다.
며칠이고 계속 불어닥치던 추운 시베리아 북풍도 멎고, 두드리면 쨍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어질 것 같은 별들이 얼어붙어 있는 듯한 겨울 밤하늘.
냇가에 만발한 개나리 꽃잎을 떠내려 보내며 한가롭게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빨래 방망이질 소리에 희미한 파문이 흩어져 가는 개울물에 비친 봄구름.
내려쬐는 여름 햇빛 속을 황급히 빠져나가는 일진의 바람에 휘날리는 포플러 가로수 잎 뒷면의 선명한 흰색이 창공의 흰구름과 어울려 한층 더 하늘에 푸르럼을 더하는 여름하늘.
늦가을 해질녘, 피어오르는 초가 굴뚝 연기가 옆으로 퍼져 나기는 너머로 보이는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에는 장미색에서 연보라색으로, 짙은 감색으로, 암흑색으로 차츰 변해가는 미묘한 색조의 변화의가 아름다운 가을의 석양.
사계절 내내 내게는 이러한 하늘이 뚜렷이 인상에 남아 있다. 몇 번의 전화(戦火)를 이겨내고 획기적으로 부흥과 발전에 힘쓰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하늘이야말로 마음의 휴식을 주고 희망의 상징이 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안도 도요로쿠 1984)
● 02 한국의 설날(1964년 1월 주간 다이아몬드 게재)
연일 살을 에는 추위에 온갖 소리가 얼어붙어 버렸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던 집들의, 높이 쌓은 흙벽담 넘어로 갑자기 떠들썩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아 설날이 왔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었다.
추운 한국에서도 아이들은 역시 추위를 모른다 일 년 동안 기다려온 설날이라 빨강 노랑 파랑 색색의 색동옷을 입고, 남자아이는 팽이치기나 연날리기에, 여자아이는 널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팽이는 팽이채를 사용하여 돌리며 주로 연못이나 논 웅덩이의 빙판 위에서 행하며, 언제까지나 계속 돌려서 질리지 않는다. 여자들의 놀이인 널뛰기는 일종의 시소로 중앙을 고인 길다란 한 장의 긴 넓판의 양 끝에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번갈아 가며 최대한 높이 도약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독특한 놀이로, 색감도 선명한 새동옷 차림의 소녀가 맑고 푸른 하늘에 마음껏 뛰어오르는 것은 보기만 해도 즐겁다. 아이들에게 즐거운 설날은 또한 어른들에게도 즐겁고 엄숙한 연간 최대 행사이다.
원래 농업국인 한국은 그 생활이 당연히 음력과 깊게 연결되어 있으며, 설날도 음력으로 행사가 열린다. 또한 한국 생활에는 불교의 영향은 별로 보이지 않지만 유교와 샤머니즘에서 유래한 각종 지방 종교의 영향이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다. 특히 설날과 같은 전통적인 행사에서는 그것이 두드러진다.
한국 설날의 필수적인 행사는 조상의 제사이며, 이는 유교에서 전래된 것이다. 집집마다 제상을 마련하고 비교적 대가족제인 일가권속들이 모여 조상의 혼령을 맞이하여 가장이 제를 집행하고 오래 전부터 준비한 여러 가지 음식을 모두 제단에 바쳐 과거에 대한 감사와 새해의 행복을 기원한다. 장유(長幼)의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절을 한다.
이때 아이들의 경우는 상당한 세뱃돈이 기대돼 이들의 가장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이 풍습은 과거 일본에서도 행해졌지만 한국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새해 제례가 끝나면 남자는 이웃에게 인사차 의관을 갖추고 나간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의관(衣冠)'을 갖추는 것으로, 옷은 '도포'라고 하는, 일본이라면 무늬가 있는 하오리 하카마에 해당하는 것을 착용하고 머리에는 반드시 관(冠)을 쓴다. 화창하게 맑은 하늘 아래 백의흑관(白衣黑冠)이 새봄 햇살에 빛나며 삼삼오오 무리지어 나와 인사다니는 모습은 한가롭기도 또 경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엄격한 유교의 영향인지 여성은 거의 집에 머물며 그 모습을 볼 수 없고, 따라서 일본처럼 아름다운 기모노 차림의 여성과 상투 차림의 남자들 같은 풍경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조금 쓸쓸했다.
게다가 근래에는 이런 풍습은 완전히 과거의 것이 되어 설날 풍경도 많이 바뀌어 버렸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대에 차고 각오를 다지고 새해의 시작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안도 도요로쿠 1984)
● 03 풍속과 습관 (게재지 미상)
오랜 인간의 역사이니 곳에 따라 시대에 따라 풍속 습관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일본의 경우만 하더라도 얼마나 다양한 습관이 있는지 야나기다(柳田) 선생님의 민속학을 빌릴 것도 없이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궁무진하다.
쇼와 18년(1943년) 무렵엔 대동아전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학도 동원도 성행한다. 당시 일본의 통치하에 있던 한국에서도 군복무를 하지 않은 대학생과 졸업생도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되어 지원제도가 공포되어 많은 한국인 자제가 지원했다.
이 사람들은 각각의 부대에 배속되어 이른바 당시의 1년 지원병으로 부사관이나 장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원제이기 때문에 지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평상시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고이소 쿠니아키(小磯国昭) 대장은 지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징집해 후방지원 근무를 시키도록 하는 제령(制令)을 내렸다.
이렇게 징집된 사람들은 오백 명 정도였는데, 그중 절반은 철도원 쪽으로 절반은 시멘트 공업 쪽으로 보내기로 결정되어 고이소 총독 자신이 시멘트 공업회의 회장이었던 나를 조선총독부로 불렀고, 나에게 실질상의 명령, 형식적으로는 간청이 있었다.
나는 이것을 받아들여 이 중 약 150명을 오노다(小野田)시멘트의 세 곳의 공장에 배치하기로 했다. 여하튼 그 징용학생의 가정상황을 조사해 보니 무려 전체의 80%가 첩복(妾腹)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여전히 조혼 풍습이 있었고, 특히 부유한 가정에서는 남자 12-13세에 아내를 맞이한다. 그 며느리는 시댁에 들어가서는 시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나이인 스무 살 정도의 여자가 많다.
자연 부부 사이는 나이 차이도 있어 소원하게 마련이다. 그러다 남자가 상당한 나이에 이르면 첩을 갖게 된다. 따라서 대학에 갈 만한 부유한 가정에는 첩의 자녀가 있게 마련이다. 그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 되면 둘째 부인도 상당한 나이가 되고 용색(容色)도 자연스럽게 쇠퇴해져 여성으로서의 매력도 적어진다.
이런 여성은 무엇보다 의지하는 것은 자신이 낳은 아들이고, 그 아들이 군대에 들어가 만일 전사라도 당하면 큰일이다. 따라서 울며 아이의 군대 지원을 말린다. 그러니 지원하지 않은 대학 졸업 젊은이 대부분이 첩복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들의 입장을애해 하게 되었다. 이들 자제는 특별히 군대 지원을 싫어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만일 자신이 전사하게 된다면 뒤에 남은 친어머니는 의지할 사람이 없어진다. 그래서 그것이 지원을 하지 않은 주된 이유였다.
나는 내 공장에 온 젊은이를 앞에 두고 입사에 즈음하여 훈사(訓辞)를 했다. 그때 나는 지극히 간접적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학도 어머니에 관해 언급했을 때 모든 학생이 큰 소리로 통곡했다. 나는 이 때만큼 인정의 기미(機微)를 건드린 적이 없다. 나 자신도 이들 모자들의 안타까운 처지에 함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들의 근무 모습은 매우 성실했다. 나는 은근히 감탄하며 지켜본 것이다. 그 몇 달 후 고이소 총독이 공장에 시찰와서임 징용 학도에게 훈사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총독에게 미리 학도의 가정사를 이야기하고 총독이 이 점을 충분히 감안해서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고이소 총독은 드물게 보는 이야기를 잘하는 분이다. 학도에게 매우 동정적인 훈사를 말씀하셨다. 많은 학도들이 흐느끼며 총독의 훈사를 경청하는 모습은 지금도 내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후일 고이소 총독은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나라에 따라, 곳에 따라 풍속의 차이는 현저하다. 사물의 판단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것도 사회학의 일면일 것이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안도 도요로쿠 1984)
● 04 창씨개명의 우(愚) (창씨 개명 이야기-문예춘추 1955년 3월호)
분명 대평양전쟁이 시작된 직후쯤일 것이다. 김씨라든가 박씨라든가 하는 기존의 한국인의 성도, 이름도 동영(東永)이라든가 태석(泰錫)이라든가 하는 이름 대신 문웅(文雄-후미오)、삼랑(三郎-사부로)과 같은 이름으로 고치는 것을 허락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른바 창씨개명의 문제다.
취지는 동문동종(同文同種)인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이니 성명도 똑같이 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도 일본인과 똑같이 충군애국(忠君愛国)의 진의(真意)에 충실하고 점점 더 대동아전쟁에 협력하게 될 것이라고 당시로서는 일단 당연한 생각으로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막상 실행이라는 단계가 되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창씨개명이 신고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쨌든 창씨개명한 한국인은 황국신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무원도 될 수 있고 전쟁 관련 일도 맡을 수 있다고 하니 자신의 의지이든 아니든 일절 개의치 않는다. 물론 글씨를 쓰지 못하는 한국인도 많았으니, 이 사람들은 면사무소 사람들이 대필을 해서 개명신고를 해준다.
だから、ご本人も知らない日本名が判るところに製造されて、文字通り「私は誰か」ということになった。自然の勢いは恐ろしいものだ。各村々町々の『改名」競争みたいなことにまで進展した。この村は九五名改名した、
그래서 본인도 모르는 일본 이름이 제조되어 말 그대로 '내 이름은 뭔가'라는 것이 되었다. 이 현상이 무섭게 퍼져 나가 각 마을들의 '개명' 경쟁 같은 것으로까지 진전되었다.
이 마을은 95명 개명했다. 저 마을은 백 명 전원이 개명했다는 등 각 마을 이장들의 선두 경쟁까지 벌어졌다. 가능한 한 좋은 이름이라고 하기 때문에 근위(近衛-고노에), 덕천(徳川-도쿠가와), 송평(松平-마쓰다이라) 등의 엄숙한 성도 곳곳에서 생겨났다.
결국에는 창씨를 하지 않는 사람의 아이는 학교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소문이 박차를 가해 아마 전 한국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개명하고 말았다.
한민족의 역사는 오래되고 길다. 이천 년의 성을 버리고 순식간에 일본인의 이름이 되고 싶을 리는 없는 것이다. 특히 이름에 관련한 한국의 습관(*항렬)은 매우 엄격해 언뜻 보아도 형제간인지, 부자 관계인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이름 글자 배열을 크게 고려할 정도이다.
예를 들어 안도(安藤)인 내가 갑자기 프랭클린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창씨개명은 당시의 주한 일본인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게 생각되었던 것 같지만 그 당사자인 조선인에게는,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억지라는 것이 된 것이다.
당시 주한 일본인들이 조선총독부가 취한 정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비평 같은 말을 한 적은 좀처럼 없다. 그러나 이 문제만은 너무나 중대한 일이므로 미나미 지로(南 次郎 1936년8월~1942년5월 재임) 총독에게 창씨개명의 절대 불가을 말한 사람도 있었다고 들었다.
원나라 때 백 년 동안 강압을 당했던 한국인의 몽골식 변발과 전족이 원나라가 명나라에 멸망하자 재빨리 이를 멈추고 한순간에 옛 한국 풍속으로 돌아간 역사적 사실이 있다. 예로부터의 습관에 손을 대는 것은 특히 이민족의 경우 절대 불가하다는 것은 누구나 절감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이 경우 본인의 자유의사에 맡긴다고 해도 전쟁이 한창일 때 실질적으로는 강제될 우려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니 물론 한 개인의 창씨개명 절대 불가 의견 따위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반대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게 창씨개명은 실시된 것이다.
한국인치고 창씨개명하지 않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전쟁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되어 실질적으로 큰 곤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음은 물론이다.
내가 있던 평양시 교외의 시멘트 공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우수한 한국인 기사로 도쿄의 고등공업학교를 나와 재직 20년에 가깝고 훌륭한 풍채와 좋은 집안을 가진 마흔 살 전후의 이군(李君)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가 어느 날 창씨개명이 종문일동의 반대로 안 되니 "이대로는 회사에 폐를 끼치게 될 것이니 당장 퇴사시켜 달라" 고 신청했다. 나는 물론 이렇게 말했다.
"창씨개명은 개인의 자유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상관없다. 그대로 재직하고 있어라.” 라고 하자 그는 감격해 계속 열심히 근무해 왔다. 그러다 곧 종전이 됐다. 창씨하지 않은 유력한 한국인이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많이 있을 리 없다.
그는 말하자면 민족의 용사였다. 금세 알려져 제1차 북한 내각이 생길 때에는 최초의 상공대신이 되었지만, 후에 그는 대신을 그만두고 공업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북한의 공업 진흥에 상당히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운이 좋았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다. 창씨개명을 부정한, 한민족에게 이해가 있는 일본인이라고 해서 모든 경우에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몇 번 보안대에 끌려갔지만 본부까지 가면 어김없이 쉽게 풀려났다.
심지어 식사 대접을 받은 적도 있었다. (고문을 당한 적도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오노다 재흥칠천일"의 원고에 양보한다) 한국인으로부터 일본 정치를 비난받을 때 창씨개명만큼은 잔류 일본인(북한 억류)으로서 심히 답변에 시달렸지만 나 개인으로서는 전혀 뜻밖의 행운을 당한 셈이다.
민족의 습속에 손을 대는 것은 반복되지만 실로 중대한 문제이다. 러시아(소련)의 북한 통치에 즈음하여 전체적으로는 실로 가혹한 조치를 취한 반면, 한국인의 습속만은 매우 존중했던 사실이 뭔가 교훈적으로 상기되는 것이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안도 도요로쿠 1984)
● 05 안중근은 민중의 마음 (안중근 의사 사건- 1983년 글)
안중근 의사가 뤼순(旅順)에서 처형된 것은 메이지 43년(1910년)이다. 내가 열세 살 때이니 일본과 당시 한국의 관계에서 볼 때 내가 안의사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이쇼 11년(1922년) 5월에 평양부(平壌府) 외곽, 승호리(勝湖里)에 있던 오노다(小野田) 시멘트의 평양 지사에 부임하여 그곳 사택에 거주했다.
안중근의 옛 집이 그곳에서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파읍(破邑)이라는 곳에 있다. 근처이지만 내 사택은 평안남도이고, 안의사 옛집은 황해도에 있다.
당시 안 의사는 이토(伊藤博文)공을 죽인 일본인의 원수다. 그 주거에 일본인이 가는 것은 조금 꺼리낌이 있다. 한국인도 당시 경찰의 분위기로 보아 그곳에 가는 것을 꺼려할 수밖에 없는 정세에 있었다.
나는 평양 지사에 갓 부임한 청년 사원이라 아는 사람도 적다. 그 저택을 구경하러 가려고 혼자 파읍으로 갔다. 안 의사의 저택은 남강(南江)이라는 대동강 지류의 좌안에 있었다. 강을 따라 평평한 언덕 중간쯤에 있다.
지금 생각하면 저택 대지가 이백 평 정도이고, 건평은 삼십 평 정도의 초가집이었다. 이 지방에서는 상류에 속하는 집이었다. 나는 한 번 더 놀러 갔을 정도로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해 다이쇼 11년(1922년)가을에 평양 부근에 백 년 만이라는 대홍수가 있어 이 파읍 마을 전체가 유실되었다. 당시 마을은 지금 모두 강의 일부분이 되어 흔적이 없다. 육십여 년이 지났으니 그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나는 한국 사람을 많이 만났지만 이 집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따라서 내가 한국 사람들에게 이 집에 대한 설명을 하곤 했다. 그런데 나의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대선배 중에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清次郎)라는 사람이 있었다.
메이지 5년(1872년)의 출생이니까 살아 계시면 지금은 백십삼세 정도이다.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공과 같은 야마구치현 하기시(山口県萩市)에서 태어나 도쿄대 법과 출신이니, 그 당시에는 그야말로 엘리트로 이토 공으로부터 매우 귀여움을 받은 수재였다.
이 사람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1857~ 1929) 씨가 만철(満鉄) 초대 총재가 되었을 무렵 34세로 만주 주재 만철 최대 이사가 되었다. 이토 공이 러시아의 코코체프 장상(蔵相)을 만나기 위해 하얼빈에 간 메이지 42년(1909년)은 만철 이사로서 3년이 되는 37세 때였다.
이토 공의 안내역으로서, 또한 불어 통역으로서 하얼빈행을 수행했다. 코코체프는 이토공(伊藤公)의 열차를 타고 다나카(田中) 씨의 통역으로 첫 회견을 마쳤다. 이토 공은 역두에 내려 다나카 씨의 두세 걸음 뒤에 서서 가고 있을 때 안중근이 권총을 발사했고, 그 총알 한 방은 다나카 씨의 얼굴에 맞았다.
이토(伊藤) 공은 즉사했다. (다나카 씨의 말) 다나카 씨는 총에 맞은 줄도 모를 정도였다. 총성으로 뒤돌아보니 이토 공은 쓰러져 있고 근처에 권총을 든 안중근이 서 있었다고 한다.
그때 안중근의 늠름한 모습과 유연한 태도와 달려든 헌병이나 경찰에게 권총에 여전히 한 알이 남아 있는 것을 주의시키는 태도 등은 인격의 높이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다나카 씨가 생애에 본 최상 최고의 장면이었다고 한다.
다나카 씨는 만주 주재 만철의 최대 이사이기 때문에 당시 시베리아 철도로 일본으로 향하는 세계의 높은 사람을 거의 다 만나고 있었다. 당시 사람으로서는 일본에서도 가장 많은 국제인과 친하게 만난 것이다. 또한 유명한 만철조사부를 창설한 지식인이기도 하다.
보통이라면 안중근을 가장 미워해야 할 환경에 있던 사람이다. 그런 다나카 씨는 당신이 지금까지 만난 세계 사람들로 일본인을 포함해 누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언하에 그것은 안중근이라고 잘라 말했다. 아쉽긴 하지만'이라는 한 단어를 곁들여서.
우리 회사 직원 중에 히라이시(平石)군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히라이시 군의 아버지는 안중근 당시의 뤼순 고등법원장이었다. 그 히라이시 법원원장은 자주 안중근의 훌륭한 인물을 극찬했다고 한다. 올해(쇼와58년-1983년) 9월에 미야기현 와카야나기쵸 다이린지(宮城県若柳町大林寺)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에 참배했다.
"위국 헌신 군인 본분(為国献身軍人本分)이란 안중근의 글씨는 묵근 임만(墨根淋滿) 즉 붓끝이 머문 흔적이 없는 일필휘지의 글씨다. 이것은 메이지 43년(1910년) 3월 사형대에 오르기 5분 전에 써내려간 글이다. 그 인격의 높이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지금 한국 최고의 애국지사로 전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안도 도요로쿠 1984)
● 06 이승만 이후의 신생 한국 (새로운 한국의 표정- 경제왕래 1962년 11월호)
우리 일행(1962년 당시)이 처음 도착한 곳은 김포의 비행장으로, 그곳에서는 서울, 옛 경성까지 4~50킬로미터입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한국인의 얼굴을 보았는데 한국인의 남녀노소, 직업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쾌활하고 매우 건강해 보였습니다.
발걸음은 매우 가벼워 보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예전에 25년 한국에 있으면서 본 한국인의 표정과 전혀 달라졌습니다. 이건 대단한 변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한국인인데 왜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라고 저는 생각했는데, 이것이 우선 저가 느낀 첫인상입니다. (제1회 방한 경제사절단)
그리고 또 하나는 길가의 광고판에 한자와 영문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한글입니다. 차가 경성 시가에 들어가면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한글뿐입니다.
영문자와 한자는 드물게 보일 정도입니다. 일본과 비교하면 도쿄의 경우 한국의 수십 배라는 비율로 영문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인 가나에 사용되는 한자어를 포함하면 한자 사용 비율은 일본이 한국보다 몇 백 배 정도로 많은 것이 됩니다.
한국은 말하자면 나랏말인 한글로 대부분을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고, 특히 하나의 독립된 국가라는 것을 표징하기 위해서 한글전용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이것은 한국인의 기개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06 이승만 이후의 신생 한국 (새로운 한국의 표정- 경제왕래 1962년 11월호)
● 06-1 [청결해진 마을]
거리는 청소가 잘 되어 있어 매우 청결합니다. 도로는 포장되어 있는 곳도 있고, 포장되지 않은 곳도 있고, 또 공사 중인 곳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청소가 매우 잘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청결함은 도쿄와 비교되는 느낌입니다.
관공서도 청소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러 곳을 가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르겠습니다만, 특히 고위 관리를 만난 것이기 때문에, 그 근처는 잘 청소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을 방문하러 가는 길거리도 어디나 잘 청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호텔도 청결하였습니다. 옛날(일본 통치시대)에 비하면 오히려 지금이 더 청소가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아무튼 일본과 비교가 됩니다. 자세히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희가 지나는 곳은 매우 청결했습니다.
음식점도 아주 잘 청소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복장을 봐도 옛날에는좀 너덜한 옷차림의 사람이 많았습니다만, 지금은 거리를 지나고 있는 사람이 모두 깔끔하다는 느낌입니다.
자주 목욕도 했을 것이라는 느낌의 깔끔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옛날처럼 너저분한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싶을 정도로 이것은 매우 큰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다.
06 이승만 이후의 신생 한국 (새로운 한국의 표정- 경제왕래 1962년 11월호)
● 06-2 [거리에서 사라진 불량배]
건물은 어떤가 하면, 옛날 일본인이 만든 콘크리트 건물, 벽돌 건물이 상당히 남아 있었습니다. 불연(不燃)의 고층 건축물이 현재 얼마나 많아졌는지 남산 위에서는 잘 보였습니다. 위에서 제가 본 느낌으로는 옛날의 6배 내지 7배는 되어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옛날 반도 호텔이라는 약 5천 평의 9층 건물이 있었습니다. 남산 위에서 보면 그 건물이 특별히 눈에 띄어 보였던 것입니다. 그 옆에 서울시청 건물이 있어서 그 두 건물이 굉장히 크게 눈에 띄었던 겁니다.
지금 남산 위에서 보니 아, 저게 그거구나 하는 정도로 보였으며 그 정도의 건물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습니다. 그 수가 대략 6~7배, 아니 10배 정도로 늘어나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에 큰 도로가 상당히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저가 지도를 보거나 차로 달린 느낌으로 보면 대략 40킬로미터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교통 상황은 매우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울의 모습은 매우 좋아 보였습니다.
치안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밤 12시경에도 여자가 혼자 걷고 있는 것을 저가 묵고 있는 호텔 8층에서 내려다 보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만 이렇게 야심한 밤에 여자가 혼자 다니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오전 4시경부터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서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호털에 5박을 하며 묵고 있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 보고 있었습니다만, 길거리에서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청소하는 사람이라든가 여러가지 길거리 현장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불량배는 모두 없어졌습니다. 지금의 정권이 생기기 2년 전의 상황은 남산 위에서 돌을 던지면 김씨라는 성이 많기 때문에 "김씨의 머리에 맞거나 아니면 불량배의 머리에 맞는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불량배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많았덛 불량배들은 모두 탄광으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그 영향인지 탄광 사정이 지금은 매우 좋다고 합니다. 예전엔 석탄 생산량이 백만 톤 이하였던 것이 지금은 650만 톤 정도 된다고 합니다. 불량배가 없어진 탓에 거리의 표정도 밝아졌고 동시에 치안이 좋아져 늦은 밤에 여자 혼자 다닐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도쿄에서는 12시가 넘으면 여자 혼자서는 다니기 어려운 상황과 비교가 됩니다.(쇼와 30년대- 1955년 무렵)
06 이승만 이후의 신생 한국 (새로운 한국의 표정- 경제왕래 1962년 11월호)
● 06-3 [사관학교 학생들의 기개]
한국의 전 국민이 나서서 독립된 한국을 어떻게 좋게 만들까 하는 의욕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가로수는 옛날 총독부 시절에도 상당히 심어져 있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때 없어졌고, 그 후에 심은 포플러(*미루나무)가 20미터 간격으로 잎을 무성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화(国花)인 무궁화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높이 1미터에서 1미터 50정도인 무궁화가 계속 길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코스모스가 심어져 있고, 그런 길이 수십 킬로미터씩 이어져 있었습니다.
꽃길 속을 가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약 백 킬로미터 정도 그런 곳을 지나갔습니다. 꽤 잘 가꾸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칫하면 훼손되기 쉬운데 잘 가꾸어지고 있는 것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그것을 심고 가꾸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국화를 소중히 한다는 마음은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관학교를 보러 갔습니다. 사관학교 학생수는 몇 명인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상당한 인원이었습니다. 옛날 일본의 해군병학교보다 더 늠름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느낌입니다. 체격은 좋고, 얼굴은 검게 그을러 있었고, 혼연일체로 씩씩하게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모습 등은 정말 믿음직스럽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옛날 병학교 이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의 공격을 받았는데 사관학교 학생 오백 여명이 학교를 지키다가 전부 전사할 때까지 한 명도 도망친 사람 없이 사수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세계의 역사에도 없는 일이라고 전 참모장을 지낸 중장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런 사관학교이니까 더욱 훌륭한 학생들이 나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역시 한국이라는 나라를 다시 봐야할 좋은 재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곳의 선생님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로, 우리 연대는 마지막에는 세 명밖에 살아남지 않았다든가, 우리 연대는 열 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든가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실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최일선의 현장감이 배어있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도 강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육십만의 군대를 유지한다는 것은 미국의 도움을 받기는 하겠지만 경제적으로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모두가 견뎌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06 이승만 이후의 신생 한국 (새로운 한국의 표정- 경제왕래 1962년 11월호)
● 06-4 [발전하는 제반 산업]
산업면에서는 중공업 쪽은 그 수가 적은 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의류 공업은 모두 자급자족입니다. 서울의 인구는 주간 인구 삼백만, 야간 이백육십만, 옛날 종전(*1945년) 무렵에는 육십오만 정도였기 때문에 지금은 5배 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야채는 매우 풍부합니다. 그리고 곳곳에 배나 사과 같은 과일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과밭도 꽤 손질이 잘되어 있었습니다. 야채도 풍부했습니다. 예전에 내가 있던 시절에는 수수나 조 등이 심어져 있던 밭이 지금은 전부 채소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구가 60만에서 300만이 되었는데도 채소가 풍부하다는 것은 근교의 농부들이 부지런히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시 큰 변화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일하는 사람이 적으면 사회는 잘 돌아기지 않는 것입니다. 채소가 풍부하다는 것은 일하는 사람이 많다는 하나의 좋은 증거입니다.
대구의 모직 공장과 방적 공장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모직 공장은 한국의 모범적인 공장일 것입니다. 이천이백 명 정도의 노동자가 있고, 육십억에서 칠십억 원 정도의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합니다. 기계도 모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주로 독일제로, 능률도 일본의 것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고, 제품도 그러하였습니다.
수출도 하고 있을 정도의 훌륭한 공장도 있었습니다. 기숙사만 해도 잘 정돈되어 있어서 우리가 봐도 꽤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공장 여기저기에 꽃들이 피어 있어서 예뻤습니다. 잘 정돈되어 이렇게 깨끗한 공장은 일본에도 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장 좋은 공장의 예일 것입니다. 이곳 사장님은 꼭 '이시바시(石橋)씨' 같은 느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시바시 단야마(*石橋湛山:정치가) 씨가 아니라 브리지스톤 사장(*石橋 正二郎: 브리지스톤 타이어 설립자) 같은 느낌의 사람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조선소를 둘러봤습니다. 이곳은 옛날 미쓰비시가 만든 조선소로 일본에서 보면 별거 아닌 작은 조선소였습니다. 그리고 자동차 트럭 농기구 등을 수선하는 육군정비공장을 둘러봤는데 규모가 상당한 대공장이었습니다.
모던하고 깨끗한 공장이지만 육군 공장이기 때문에 기계는 미국 기계가 많았습니다. 그런 곳에 가서 대화를 하면 상대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서로 닮았음을 느낌니다. 동문 동종(同文同種)이라는 것을 크게 느끼게 하였습니다. 곳곳에서 일본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일본어로 대화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젊은 사람은 일본어를 모릅니다. 나이 든 사람은 일본어를 알고 있었습니다. 조금도 꺼리낌 없이 일본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그런 지시가 상부로부터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만,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시기에는 일본어 사용을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일본인과 일본어로 대화한다는 것은 매우 큰 변화였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우리를 적대시하는 듯한 눈으로는 보는 사람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습니다. 일본인이 탄 차들이 줄지어 간다는 것은 조금 눈에 띄는 일이어서, 어쩌면 봉변이라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습니다만, 그런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경비도 하고 있었겠지만, 그런 험악한 사람의 눈초리를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저는 예전부터 오랫동안 한국인들과 접촉해 왔기 때문에 상당히 예민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다. 그런데 그런 눈초리를 한 번도 못 본 것입니다.
06 이승만 이후의 신생 한국 (새로운 한국의 표정- 경제왕래 1962년 11월호)
● 06-5 [판문점에서의 일화]
이것은 판문점에 갔을 때의 이야기인데 여기서는 북쪽 사람과 남쪽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남쪽의 군인들만 봐 왔는데, 북쪽 군인 여러 명의 얼굴을 보니 분명히 북쪽 군인들은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체격도 왜소해 보였습니다.
남쪽의 군인들이 훨씬 좋아 보였습니다. 표정도 남쪽이 더 밝아 보였습니다. 동서 베를린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쪽은 2천5백만의 인구인 반면 북쪽은 천만 정도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38선으로 나누어 질 무렵의 북쪽은 1500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게 지금은 천만 정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백만 내지 육백만 정도는 남쪽으로 넘어 온 것입니다. 역시 '동서 베를린'과 같은 양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외로 저가 다른 것보다 예리하게 본 사항입니다.
산야와 숲에 관한 것입니다만, 벌목이 심해 신들이 벌거숭이가 되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당히 숲이 무성해져 있었습니다. 이건 바람직한 일입니다.
거리에 가로수도 줄지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마 현 정부도, 전 정부도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행기에서 조선 전체를 보면 의외로 녹색이 많이 보였습니다. 현 정부는 나무를 베는 것을 매우 까다롭게 제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연탄 생산량을 늘려 그걸 목탄 대신 쓰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석탄 생산을 독려하여 지금 650만 톤의 석탄이 생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천만 톤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경제와 공업도 좋아지고 있으며 입고 먹는 쪽도 충분히 좋은 상태입니다.
지금은 주택 건설거에 열심입니다. 한국은 기후적으로는 매우 좋습니다. 게다가 지진이 없기 때문에 쉽게 블록으로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지반이 한국 전체적으로 매우 좋습니다. 특히 서울 부근은 모두 화강암이기 때문에 집을 쉽게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콘크리트와 블록만으로 몇 층이든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지진이 없는 독일이나 러시아의 상황과 같은 조건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콘크리트와 블록으로 지어진 집들이 상당히 늘어나는 경향입니다.
목재가 귀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 일 것입니다. 한국은 석회석 매장량이 많고 시멘트 제조과정에 필요한 땔감인 무연탄도 있기 때문에 시멘트를 만드는데는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주택 건설 쪽도 잘 진행이 되고 있는 것같습니다.
다만 중공업 관계를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 5년 계획의 중요한 점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철강이라면 연 36만 톤 생산의 공장을 앞으로 몇 년 안에 짓는다든가 시멘트는 현재 육십만 톤에서 3~4년 후 백오십만 톤으로 늘린다든가 30만톤 생산의 비료 공장을 건설한다는 등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정부 사람들도 실정에 맞는 일을 하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년 검토하여 실제로 실시할 수 있도록 실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이것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5개년 계획이라고 하면 힘든 일인 것 같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은 상식적인 선에서의 중공업 계획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중공업 계획에 따른 건설물자의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나라들로부터 도입되고 있었습니다.
독일, 덴마크, 미국과 영국 등에서 장기차관으로 건설 물자들이 들어 왔습니다. 시멘트 기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테트론 공장을 장기 차관으로 건설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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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 [일본에 가까운 교육열]
그리고 학교 교육 보급상황이 매우 좋은 편입니다. 일본에 못지 않습니다. 일본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학교보급율이라는 면에서 보면 세계 유수의 보급율입니다. 보급율 면에서는 동남아시아, 인도 등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입니다.
일본에 가깝습니다. 그런 학교의 졸업생은 체격이 좋아서, 그 중에는올림픽 선수도 많이 나올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체격이 좋기 때문에, 그들이 하려는 마음만 먹는다면, 중공업 쪽에도 상당히 진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은 자원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그런 점은 일본도 같은 사정입니다. 일본은 사람과 항구가 있을 뿐으로 자원이 빈약하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 전력 사정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전력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을 화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수력은 기껏해야 수십만 킬로와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제반 사정으로 봐서 군사 정권, 혁명 정권이 만약 모두에게서 배척당하고 있다면, 거리를 오가는 사랑들에게서 저런 밝은 표정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런 밝은 표정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저희는 생각합니다. 물론 반대도 많이 있겠죠. 다소 언론에 대한 억압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전체를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일반 대중은 현 정권을 매우 지지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 우리가 본 느낌입니다.
다음으로 공산당에 대해서는 큰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산당으로부터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만나는 사람마다 들었습니다. 그것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정말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관학교 학생연구실 같은 곳에 10미터나 되는 유화가 있었는데, 그것이 공산당이 서울에 왔을 때 부녀자나 아이를 살해하는 그림으로 마치 옛날 트로이 전쟁을 그린 그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의 참상이 잔혹했던 것 같았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공산당이니까 이런 짓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남북에서는 그런 대립이 없었는데 공산당의 사상이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입니다.
옛날에는 이렇게 서로 미워한 적이 없었는데 공산당이 생기고 나서 이런 일을 한 것은 다른 외국이 한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이 사관학교 학생 연구실에 걸려 있기 때문에 사관학교 학생의 의기는 왕성합니다. 철두철미합니다. 지금의 일부 일본인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상상할 수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젊은 이는 특히 그런 것 같습니다.
일종의 인텔리, 한국에도 인텔리가 있어, 용공적인 인텔리가 때로는 용공적인 일을 하지만 그것은 극히 소수입니다. 대구 이북 사람들은 특히 반공의 색깔이 강합니다. 남쪽으로 가면 다소 그것이 희미해져 있다는 느낌입니다. 저는 매우 유익한 견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06 이승만 이후의 신생 한국 (새로운 한국의 표정- 경제왕래 1962년 11월호)
● 06-7 [새로운 역사를 만들겠다는 열의]
우리가 만났던 한국인은 대부분 군사혁명 이후의 군인입니다. 나이도 젊습니다. 옛날 일본의 군인과 같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우리로서는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생각과는 달리 모두 매우 부드럽습니다. 딱딱한 태도는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외국인, 그것도 귀한 손님이라는 것을 떠나서 다른 한국인을 대하는 태도를 봐도 매우 공손하고, 조금도 으스대지 않았습다. 한국인 사장님과도 동석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들에 대해서도 정중하였습니다.
이것은 옛날 일본의 일부 군인들과는 천양지차입니다. 대략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중에 좋지 않은 점은 없었습니다. 저는 옛날 일을 잘 알기 때문에 비판적인 눈으로 보았지만, 그래도 나쁜 점이 없었습니다. 저는 매우 감탄했습니다.
결국 새로운 한국, 새로운 역사를 만들자는 일치된 생각, 이것이 현재의 한국을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농업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농촌에서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른바 시골을 백 킬로미터 정도 다녔는데 모두 훈훈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시골에 가도 신발을 신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물가는 상당히 어렵습니다만, 옷은 대체로 일본의 반값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발도 일본의 반값 정도였습니다. 일본의 상급품에 해당하는 제품의 옷감도 생산되어 일본돈 1만엔 정도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단 같은 부인용 옷감도 전부 직접 만들고 있었습니다. 모든 게 자급자족이었습니다. 즉 의식주는 자급자족이기 때문에 매우 안정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미국 원조의) 잉여 물자인 밀은 원조 받아 왔지만, 쌀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소도 50만 마리 정도밖에 없던 것이 지금은 120만 마리로 늘어 축산 쪽도 점점 좋아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닭은 좀 적어서 약 2천만 마리 정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은 쌀이 남아돌고 식량에 여유가 있어 축산 쪽도 좋아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 근로자 임금은 사람에 따라서는 일본의 4분의 1 정도 또는, 절반 정도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절반 이하가 평균일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마침 운좋게 공업 쪽으로 간 사람은 훨씬 좋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쁘다는 것으로, 상당히 임금의 차이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아직 발전 단계가 낮기 때문에 현재의 일본과 비교해서, 몇 백억원을 가지고 있는 부자는 드문 것 같습니다. 물론 훌륭한 저택을 가진 사람도 있고,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옛날 미술관이나 궁궐 같은 것은 생각보다 꽤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엉망이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옛날 모습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옛날 미술품도 공산당이 와서 약탈해 간 것 같은데, 그 후 제대로 새롭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비원이라는 궁정의 정원을 가보니 훌륭했습니다.
십수만 평의 큰 정원이 있고, 그 곳에는 지금도 여우가 많고 늑대도 있다고 할 정도로 큰 정원입니다. 그것이 잘 보존되어 손질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비원은 안쪽까지 4킬로미터 정도 되는데 차로 한 바퀴 돌아 보았습니다.
학교도 돌아 보았는데 옛날 이화전문학교, 지금의 이화여대라는 학교는 그 면적이 20만 평 정도라고 합니다. 20만 평이라고 하면 우에노 공원의 한 배 반입니다. 15~6만 평의 도쿄대학(東京大学)보다 넓었습니다. 그리고 4층~5층의 백아(白亞)의 깨끗한 학교 건물이었습니다.
삼천육백 개의 의자가 있는 강당도 있었습니다. 3600개의 의자가 있다는 것은 일본에서도 조금 드물 것입니다. 어쨌든 학교는 훌륭했습니다. 이것은 미국 선교사의 많은 기부로 된 것 같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기독교가 대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영향이 매우 큰 것 같습니다. 선교사의 기부로 훌륭한 대학이 많이 들어설 정도이기 때문에 사관학교에서도 불교의 절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신불에 참배하며 자신감을 되찾게 하는 것은 나아가 국민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예전 나의 25년간의 체험으로 보아 정말 훌륭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안도 도요로쿠 1984)
● 07 한일 국교 회복 "전야" <한일 정상화의 기운 무르익다-니혼게이자이신문 1962년12월19일>
나는 9월 중순(쇼와 37년-1962년), 방한 경제사절단(단장 우에무라 게이단렌 부회장)의 일원으로 방한한 데 이어 12월 초순부터 중순까지 방한 경제시찰단 단장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의 실상을 직접 접하며 느낀 것 중 첫 번째는 박 정권 아래 국민이 모두 경제건설에 적극 나서려는 열의였다.
그 생생한 표정은 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의 자세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지만, 특히 첫 번째인 9월과 달리, 이번 12월의 한국에서는 추위에 움추려 들지 않았나 하는 나의 예감과는 달리 오히려 활기가 넘쳤던 것에 놀랐다.
둘째, 9월보다 일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수가 훨씬 늘었고, 그 말투도 유창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잊혀져 가던 일본어를 다시 떠올리며 독서나 회화에 사용할 기회가 늘어난 것의 증거이겠지만, 이는 곧 일본에 대한 관심의 고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도로 등 토목공사에 힘쓰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서도 대구에서도 9월에 갔을 때보다 거리는 깨끗하게 완성되어 있었고, 농촌에서도 빈약한 도로를 트럭이 다닐 수 있는 넓은 도로로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민중의 손에 의한 이러한 도로 공사는 3600킬로미터가 완성되었다고 들었다.
이러한 한국의 "신선한 활기"는 박 정권하의 새 지도자층이 적극 나서고 있는 "나라 만들기" 에 대한 열의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지사, 시장, 혹은 국영기업의 수장들 중 상당수는 40대의 젊은 나이이며, 그들은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도 일선에 서서 지휘봉을 잡고 있다.
그 사람들이 내게 말한 "한국전쟁 때의 고생에 비하면 이 정도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말은 크게 내 가슴을 울렸다. 지도자가 겸손하고 성실하기 때문에 민중의 박 정권에 대한 지지와 신뢰도 크게 높아지고 있다.
헌법 개정안에 대한 찬성률이 투표 총수의 80% 가까이에 달했다는 것은 이를 말해주며, 이는 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극히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국민의 의견에 따라 투표된 결과가 이것이라는 것이다.
강제된 99%의 찬성률보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결과 20%가 넘는 반대가 나온 것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의 이런 실정을 볼 때 한일 국교정상화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과 한국의 지리적 관계 및 역사적 깊은 연결고리로 보아 현재와 같은 불편한 한일관계는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국교회복을 남북통일 후로 미루라는 사람도 있지만 남한은 2600만의 인구를 가진 반면 북한은 약 천만에 불과하다. 이 상황만 봐도 한국과 먼저 손을 잡아야 한다.
이케다(池田) 총리가 청구권 문제에 용단을 내려 국교정상화의 길을 제시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극히 시의적절하고 타당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청구권의 금액에 대해서도 더 이상 그 크기를 논하는 수준에 머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편 한국 측도 일본과 손을 잡으려는 기운이 지금처럼 고조되고 있는 시기는 없었다. 개헌투표 결과가 박 정권을 고율로 지지한 것도 국민이 박 정권의 대내외 정책, 그 큰 것 중 하나인 대일정책을 타당하다고 인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국교정상화의 길과 병행하여 대한 경제협력을 추진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양국의 경제관계가 특히 긴밀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역사적, 지리적 관계 때문인데, 최근 미국,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국가들이 한국에 5~10년의 연불수출 등을 통한 경제원조를 해주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먼 유럽 국가들이 하고 있는데 이웃 일본이, 더구나 자유진영에 속한 나라끼리 지금과 같은 불편한 상태를 지속하는 건은 좋을 것이 없다. 이것은 한국 시장 진출을, 돈을 번다거나 이른바 '자본 진출'이라는 인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웃돕기'라는 각도에서 호혜평등 정신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제성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일본으로서는 한 차원 높은 곳에서 보는 협력의 태도가 필요하다. 다만 한국의 경우는 다른 낙후된 저개발 국가들과 달리 경제발전의 여건은 갖춰져 있는 것으로 보이며, 경제원조가 결실을 맺을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부지런하고 뛰어난 노동력과 기술력이 있기 때문이다.
전국 64개 대학을 가지고 교육 수준이 높은 데다 60만 명을 거느린 군대가 기술교육을 군복무 2년 반 동안 진행하기 때문에 매년 25만 명씩 기술 훈련을 받은 사람이 군에서 배출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낮은 임금으로 곤고결핍(困苦欠乏)을 견뎌낸 청년층이 ‘나라 만들기’의 의기에 불타고 있으니, 외국으로부터 자금과 기술을 도입한다면 한국은 머지않아 "믿음직한 이웃"으로 성장할 것이다. 나는 한국 경제 발전에 필요한 길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당분간 실업을 없애고 소득을 늘리고 생산을 수출 쪽으로 지향하면서 생활을 안정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급선무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일본인보다 손재주가 있는 한국인이 그 손재주를 살리는 일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참에 일본이 하고 있는 수공업의 일부를 한국에 넘길 생각을 해도 좋을 것 같다.
다른 하나는 한국경제재건 5개년 계획에 따른 중공업 건설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것과 병행하여 착실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이상 두 가지 모두를 협력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국교 정상화를 앞두고 지금부터 그 준비를 진행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 차원의 경제협력이 시작되기 전에 민간이 ‘연결고리’적인 의미에서 성과를 쌓아두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앞으로 양국인의 왕래는 활발해지겠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마음이 이참에 특히 필요하다.
08 박 정권과 한일관계.
● 08-1 정치위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담자)
* 다나카 다쓰오(田中龍夫-중의원 의원)
* 나카야스 요사쿠(中保与作-고인, 평론가)
* 안도 도요로쿠(安藤豊禄-1897~1990-재계의 한국 경제 전문가)
* 노미야마 가오루(野美山薫-전 산케이 신문 기자).
노미야마(野美山): 한국에서는(1964년) 6월 2일, 3일 박 정권 타도의 학생 시위가 심해졌고, 마침내 3일 밤에는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기까지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대의 힘으로 학생들을 단속하는 한편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여당 실세 김종필 당의장을 사직시켰습니다. 그리고 김씨는 18일 미국으로 외유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그 후 여당 내부, 또 여야 사이에 치열한 정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 한국은 국내가 매우 어수선하고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한국의 전문가인 나카야스 선생님, 한국 경제의 전문가라고 할까요, 재계에서 안도 선생님, 정계에서 자민당 한일문제위원장을 하고 계신 다나카 선생님이 와 계시니 여러 가지 의견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선 현황 분석입니다만, 안도 씨는 지금의 사태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안도(安藤): 한국의 문제를 볼 때, 먼저 한국의 군부라는 것의 웨이트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 군부와 주한미군이 함께 방위를 하고 있는데, 이 둘이 딱 맞지 않으면 본래의 방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의 군대와 주한미군이 일체로 방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하나의 전제로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한국 군대 그 자신의 웨이트라는 것이 한국 내에서 매우 큰 비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조차 전에 없던 큰 웨이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라고 해도 메이지 이후의 일입니다만, 그 일본에서의 군대의 웨이트와 지금의 한국에서의 군대의 웨이트를 비교하면 저는 한국이 훨씬 크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 대통령은 만약 군대가 반대한다면 절대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한 미군과 한국 군대 모두로부터 지금의 대통령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국민 대다수의 지지가 있어야 하지만 이런 것을 하나의 전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미국의 정치적 측면―국무부 소식통에서는 꼭 그렇지는 않지 않느냐 하는 것이 현재 한국 정정(政情)의 한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공산국가와 자유국가의 다툼에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경제라는 것은 거기서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정치 문제에 경제도 따라간다고 봐도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를 빼놓은 경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가지 시각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한국의 상황이 "국방 대 공산(国防対共産)" 이라는 문제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라고, 저는 경제인으로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08 박정권과 한일관계.
● 08-2 미국과의 미묘한 관계
나카야스(中保): 그것은 확실히 그렇습니다. 정치가 안정되지 않는 곳에 경제 건설을 해도 무의미하기 때문에 안도 씨의 말이 맞습니다.
다만 미국 측의 희망사항으로 크게 정국의 안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지만, 처음 군사혁명이 일어났던 당시는 유엔군 사령관과 군사혁명 정부 사이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즉 유엔의 대한협정에 따라 한국군은 작전상 유엔군의 지휘하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지휘하에서 이탈하여 제멋대로 행동했다는 것은 유엔군 사령관으로서는 매우 곤란한 일로 "원대로 복귀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그 후의 협의로 지금은 수도 경비 사령부를 제외하고, 일단 모두 원대로 복귀하여 유엔군의 지휘하에 돌아간 것입니다.
노미야마(野美山) : 민정 이관 때도 야당과 상당한 접촉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카야스(中保): 미국으로서는 민정으로 빨리 이관되지 않으면 대한 원조의 명분이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미국이 원조하는 이유는 한국을 자유세계의 '쇼윈도'로 만들자는 것이므로, 한국이 언제까지나 군정을 하고 있어서는 원조의 명분이 서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 납세자에게도 체면이 서지 않고 세계 자유국가에 미안한 마음이 있어 가급적 빨리 순수한 민정을 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실정을 보면 미국식 민주주의 정치를 한국에서 시행하는 것이 과연 실정에 맞는가 하는 것도 문제죠.
노미야마(野美山) : 한국에 있어서 미국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시 되는 문제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해버린 것입니다만, 다나카 씨, 미국의 대한(対韓) 정책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다나카(田中) : 지금 서두에 안도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에서 국방이라는 문제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매우 민감한 관계에 있는 것도 말씀하신 대로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국방이라는 것을 종전 후의 일본인이 거의 잊어버리고 있다는 점에 매우 중대한 결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당면한 한일 문제뿐만 아니라 일본 경제든 일본 외교든 국방이라는 문제에서 유리되어 버렸다는 것이 저는 매우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공산권 안에서조차 국경을 초월한 이상적이 국가관계는 이제 꿈 같은 이야기로, "국가적 이해" 라는 것이 중심적인 작용을 하고, 그것이 오늘날 세계가 분극화되고 있는 원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일본 자체를 생각할 경우에, 이 한국-한반도라는 것을 무시한 일본의 방위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 삼천 년의 일본 역사를 보더라도 정말 모든 시대에 일본의 존재를 위해 한국-한반도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의 모습이라는 것은 마치 겐코노란
(元弘の乱-1331년~1333년 가마쿠라시대 말기의 내란) 시기의 한반도와 같은 모습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듭니다. 저는 한일 문제는 그런 시야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국 문제에 대해서 일본인이 자신의 감촉으로 조금 예민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 문제를 통해 한국 내 정쟁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한일 문제의 취급에 대해서는 일본 자신의 기본적인 대한(対韓)정책을 확립하고, 그리고 당분간 일어나는 여러 현상 형태에 대해서는 좀 더 대범하게 관찰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08 박 정권과 한일관계
● 08-3 대한정책(対韓政策)의 기본과제
노미야마: 이케다 내각은 박 정권을 상대로 한일 협상을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만, 그 박 정권이 학생 시위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계엄령을 내리는 사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일본의 대한정책(対韓政策)은 한일 협상을 타결한다는 것을 전제로 생각해 온 것입니다만, 현상태로선 협상의 타결은 올해 안에 될지 내년이 될지 모르는 실정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협상 이외의 형태로 뭔가 한국에 대해서 원조를 한다든가, 그런 대한(対韓)정책을 생각해 나가야 할 시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 이런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나카(田中) : 저는 국교 정상화가 좀처럼 진전되지 않기 때문에, 안도(安藤) 씨 등 재계 쪽에 부탁을 해서 경제 문제부터 때로는 대처해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도 씨도 국가적인 견지에서, 회사로서는 좋지 않은 조건일지도 모르지만, 한국의 무연탄 상당량을 일괄 수입하여 관련 공장에 집중 사용하도록 하여 일본의 석탄시장 전반에 범람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국교정상화 전에 경제적 관계로 레일을 깔아 주시면 도움이 것 같습니다. 이것은 좀처럼 정부가 매듭을 짓지 못하는 상태에서 재계 쪽에서 나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한일 양국의 관계는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특히 서일본 쪽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경제 관계의 교류부터 순차적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쪽에서도 아시다시피 외자촉진도입법을 통과시켜 한일과의 통상협정 체결 전이라도 자본을 도입할 수 있도록 법제도를 개선한 것이지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무역 협정도 그렇고, 어쨌든 경제 관계에서는 진행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이 아직 경제 재건이 진척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것은 미국과의 관계도 있겠지만 일본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국이 정치적으로도 매우 동요하고 있다는 것은 일본에게도 매우 위험한 일이고, 일본의 존립이라는 면에서 볼 때 한일 문제는 한일이 일체가 되어 운명을 함께한다는 전제에 입각한 진지한 인식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나카야스(中保): 지금의 다나카 씨의 말씀에 사족을 좀 더하자면 지금의 박정희 대통령은 예전에도 지금도 "국교정상화 이전이라고 해도 선의의 협력은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협상이 잘 진척되지 않을 때일수록 민간 간 경제협력은 특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협력하는 쪽에서 보면 상대 쪽 나라의 정치가 불안정하면 큰 위험을 초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내부에는 신용해도 좋을 사업가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을 상대로, 가능한 한의 협력을 빨리 진행해 나가 경제의 회복을 촉진해 주는 것이, 정치의 안정을 가져오게 할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재계 분들이, 그런 측면에서 수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노미야마(野美山) : 안도(安藤) 씨가 있는 곳(오노다 시멘트)은 잘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고 있습니다만.
안도(安藤) : 그다지 잘 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노미야마 : 일본에서 경제 원조를 하려고 하면, 한국 쪽에서는 "일본의 경제 침략이다" 라는 등의 말이 나옵니다. 이번 3월의 경우에도 그 학생 시위가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아마 한일 협상은 잘 처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데모로 인해 지장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에 있는 일본상사원에게 "일본으로 돌아가라"라는 시위를 하는 등 여러가지 학생들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지 걱정 스럽습니다.
08 박 정권과 한일관계.
● 08-4 학생들의 교묘한 전술
나카야스 : 그때 학생들이 "대일 저자세 외교 반대, 일본의 자본주의적 침략 반대" 라고 한 것은 *적본주의적인 생각으로, 일부 사람이 일본의 일부 사람과 불법 거래를 하는 것을 반대하는 명분으로 학생들이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敵本主義: 목적이 다른 데 있는 것처럼 가장하다가 갑자기 본래의 목적을 향하여 행동하는 방법)
목적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후 일본제국주의 반대 운운 따위는 아무도 말하지 않고, 일본상사의 퇴거 운운도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로지 '박정희 반대'라는 데 집중하고 있는 셈이죠. 그러니까 이런 걸 일본이 너무 예민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데모의 하나의 전술인 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전술은 극히 교묘해 앞의 이승만 정권을 쓰러뜨렸을 때도 처음부터는 ‘이승만타도’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학원의 자유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대학생들이나 고등학생들이 모두 이에 공감을 하자 이번에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고 한 것입니다.
일반 시민들이 또 이에 동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놓은 것이 '이승만 정권 타도' 였습니다. 전술로는 꽤 잘한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일본을 창끝에 올리고 저자세 운운하는 것은 요컨대 일반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하나의 전술로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아무도 일본의 문제를 거론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일본에서 다소 오해를 하고 계신 분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학생 시위는 결코 배일(排日) 운동이 아닌 것입니다.
노미야마(野美山): 그래서 '배일'을 외치면 아무도 그것에 반대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이 점이 문제인데, 한국 학생들은 좀 더 국제적으로 눈을 뜨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국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지금의 한국을 구하는 길은 아까 안도 씨가 말했듯이 경제 안정입니다.
경제 안정을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일본과 경제적으로 교류하는 것이 빠른 길인데, 그런 점의 인식이 한국 학생에게 부족한 것 같습니다.
08 박 정권과 한일관계
● 08-5 경제협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카야스(中保) : 최근 배(裵) 주일 대사를 통해 한국이 시멘트나 화학 섬유 등의 프랜트 수입을 일본에 제안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미야마(野美山) : 제안은 좋지만, 그것을 한국 내에 발표할 때 "일본에서 원하니까 그것을 허가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형태로 밖에 국민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조금 불안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안도: 그 학생운동을 한 대학생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배일(排日)교육'이 한창일 때 성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국민 모두가 다 그렇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는 우선적으로 어업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번 학생운동의 시작은 부산의 수산대학이었습니다. 나는 이 어업 문제에 일본 정부의 입장도 아니지만, 일본 측이 좀 더 부드럽게 대처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한국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볼 때 어업은 현실이니까요. 여러 가지 일방적인 말들을 해도 수산대학 학생, 혹은 어민 입장에서 보면 국제법이 어떠하든 현실이라는 것은 존재하고 있고, 그 것이 생활에 직접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어디까지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어렴풋이 상상하고 있는 상태까지 와 있으니까, 일본도 뭔가 손을 쓰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미야마(野美山) : 야마구치현(山口県)이라든가, 서일본 연안 어민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겠지요.
다나카(田中) : 나는 한일 문제라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일본인 중에 두 가지 흐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 전에 한국에 있던 분들, 즉 독립 전 한국에 살던 분들이 보는 시각과 전후 독립 후의 새로운 한국을 보는 시각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즉 '한국전문가'이라고 할까요, 친한파 중에서도 전전파와 전후파는 감각이 매우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한국을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나아지도록 한다는 것은 마치 서베르린의 사례와 유사합니다. 베르린이 동서로 나누어진 후, 서베르린이 경제도 성장하고 융성하고 있는데 동베를린은 매우 조락(凋落)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공산주의와 그렇지 않은 것과의 본보기를 만들어 준 것 같은 모양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권으로서는 한국이 일본이나 미국의 협력에 의해 경제적으로도 번영하고 군사적으로도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을 결코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일 국교정상화를 철저히 분쇄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동남아시아에 대한 여러 가지 공작과는 달리 중공도, 북한도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또 하나 오히려 일본의 자세를 생각하면, 문제를 1차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일본 정부의 관리 중에 2만 8천 명 가까운 공산당원이 있고, 그것도 농수산성이나 대장성 등에 매우 많습니다.
그것이 정부 직원으로서 현실적으로 내각이 한일 협상을 결정하든 말든 구체적인 사무적인 면에서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한일 협상을 처리한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저해 요인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08 박 정권과 한일관계
● 08-6 김의 수입과 정부 관련 공무원
예를 들어, 한일 협상의 수산 문제 중에서 김 문제를 다루어 보면, 농수산성은 일본의 총 수요는 35억 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 전에 약 60억 장의 소비 수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 전 한국 총독부 시대의 최고 생산은 7억 장입니다. 지금은 계속 떨어져서 4억장이나 5억장입니다.
일본의 지금의 일본 국내 생산은 매우 저조하여 20억 장이 될까 말까 한 것입니다. 그러면 국내 생산과 한국의 생산을 더해보아도 일본의 총수요에는 부족한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날 일본은 인구가 1억 가까이 되기 때문에, 인구로 보아도 당연히 60억 장이나 100억 장의 수요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것을 국내 일부 김 생산자의 생활안정과 보호라는 명분으로 한국에서 김을 수입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 농수산성입니다.
동시에 또, 이승만라인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 서일본 지역의 수산 관계 종사자들을 다독여아 하는 것도 수산청(현 농수산청)입니다.
그리고 또 한일 협상 때 적극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막상 김 수입 문제가 나왔을 때 대장성 쪽에서 관세정률별표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바꿔 버린 것입니다. 국회 대장위원회에 제출하기 전날 우리 자민당 정책심의회에서 처음으로 제가 발견한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관세정률별표 속의 검고 얇은 것으로 사각형의 것이라는 식의 표현으로 거의 금지적인 관세를 부과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편, '전국세(全国税)'라는 단체가 대장성 직원 조합에 있습니다만, 그기에 직원 조합의 임원 6명 모두가 공산당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공산당 쪽으로부터 직제와 대결하여 "직제의 기능을 마비하라"는 지령에 따라 "반정부 투쟁을 하자" 는 명령을 직원 조합에서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직원 조합 자체의 명령이 상관이 내리는 명령보다 더 강한 것입니다.
즉 농수산성 직원조합이 사무적으로 한일 협상을 할 수 없도록 홍보하거나 반대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렵게 되면 다음에는 같은 성내의 '전국세' 단체를 이용하여 관세정률별표 안에서 금지적 관세 조치를 하는 것입니다.이런 현상이 일본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황산암모늄 수출 문제를 보더라도 중공(중국)에 제시한 기준가격이 39달러 정도였습니다. 그것을 한국이 달라고 하면 45달러 정도가 되고 대만이 달라고 하면 49달러가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옛날처럼 공무원은 '정부의 고용인' 이라고 해서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산당이라는 것이 절대로 한일협상을 성사시키지 않겠다는 의도하에 한편으로는 정치인에 대한 분쇄 공작을 하고, 한편으로는 외부적인 홍보 단체를 동원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관공서 안에서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매우 적극적인 공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08 박 정권과 한일관계
● 08-7 희생을 치르고 있는 수출
노미야마(野美山) : 김의 문제 같은 것은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에서 살 수록 싸집니다.
안도(安藤) :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김 같은 것은 잘 먹지 않기 때문에 남아돕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일본이 수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나카(田中) : 여러분이 잘 모르시는 점이지만, 우리들이 하나의 방침을 세울 때는 정부 부처 내의 공산당원이라든가 이들의 동조자들의 암약이 격렬합니다.
노미야마 : 지금의 그 말이라면, 예를 들어 아이치현이라든가, 후쿠오카현이라든가, 김과 관계가 있는 지역 의원들과의 결속이 쉽게 이루어지겠군요.
다나카 : 지금의 한국 김 전부를 들여와도 수요 공급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부족합니다. 말하자면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김이라고 하는 것은 귀중품입니다. 이런 바보 같은 행정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극히 일부 생산자 때문에 일본국민 대중이 얼마나 큰 손해를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노미야마: 저는 한국의 행정능력이라는 문제를 항상 생각하고 있는데, 비료에 대해 한국이 제시하고 있는 가격은 일본 상사가 좀처럼 응할 수 없는 가격이었습니다. 한국은 국제적인 시야가 없기 때문에, 고자세에 머물러 있고... 올해는 세계적으로 비료 부족으로 가격이 올라 버려서, 물건이 없어져서 농수산장관이 나중에 당황했다고 합니다만.
다나카 :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매매기준가격을 말한 것으로 그 동안의 경위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안도(安藤) : 비료에 대해서는 저도 다소 관계했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만, 일본 메이커도 가급적 협력하려고 열심히 했습니다. 다만 중국의 경우는 더 이상 안 된다고 하는 통지를 무시하고 맨 처음의 지령에 의해 계약을 해 버린 것입니다.
다나카 : 그것은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데, 통산성 안에서 공산당의 동조자나 중국관계 전문가가 이미 미리 중국과 연락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업계 그 자체로서의 지금의 이야기와 같은 경과는 있다고 해도, 만약 일본이 한국을 정말 도울 생각이 있다면 정부가 일부 고려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한국을 도울까, 돕지 않을까 하는 자세인 것 같아요. 정말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수단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안도(安藤) : 민간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은 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성과가 없다고 하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나카야스(中保) : 비료 문제에서 저는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세계 국제 입찰에서 일본이 가장 싼 가격으로 낙찰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가격이 정해져 있으니까 비싸니까 깎으라는 것은, 거래상에서는 조금 이상한 이야기예요. 그건 정부끼리 논의 단계라면 다르지만....
안도(安藤) : 비료에 대해서는 한국 측에도 조금 무리한 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 측에 그 얘기를 했어요. "비료를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제3자적 입장에서 보면 한국 측에 다소 무리가 있는 것 같아요. 상대측의 성의도 고려해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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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8 문제는 한국 측의 수용태세.
노미야마 : 한국을 도와주자는 점에서는 여러분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다만, 향후 수용 태세라는 것이 어느 정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수용 태세가 없는 곳에, 아무리 도와줘도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가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것이군요.
나카야스 : 이번 프랜트 수출 문제에서도 외무성 측에서는 지금 프랜트 수출을 해도 저쪽에서 건설을 끝내는 것은 2, 3년이 걸립니다. 그것보다 당장 필요한 소비 물자 등을 도와주는 것이 화급한 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만, 문제는 사고방식입니다.
다나카 : 바로 여기에 오기 전에 외무성 정보문화국 회의가 있었는데 외무성 정보문화국 사람들이 가장 곤란해 하는 것은 자민당 안의 이른바 프로 공산권 관계의 사람들로부터 앞서 언급된 식으로 자꾸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안보 개정의 문제라든지 또 그 외 여러 자유권과의 관계 설정에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민당 안에서 아시아 자유진영과의 접촉에 대해 반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뭐랄까, 1960년 이래 소련이나 중공의 영향으로 쐐기박기가 자민당 안에 매우 커지고 있어서, 가령 대만 문제나 한국 문제를 거론하려고 해도 여당인 자민당 안에서 반대가 나오기 때문에 곤란하고 어렵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카야스(中保) : 처리하기 어렵군요.
안도(安藤) : 그것은 자민당의 문제점이 되겠네요.
다나카 : 지금의 내각 자세의 문제이기도 하고, 우리 당의 자세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점은 굉장히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나카야스 : 저는 작년 가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일곱 가지 긴 질문을 냈는데 정중한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그 중 하나로 아시아 AA주의와 비슷한 구상인데, "한국의 경제건설은 중공업 건설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비료나 철강, 시멘트 공업 같은 것을 지금 한국에서 건설한다고 해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든다.
게다가 생산품이 일본에서 수입하는 것보다 비싼게 된다. 실제로 비료는 중소업계의 것을 보더라도 매우 비싼 편이다. 그것보다 일본에서 만든 싼 것을 계속 사들여 사용하는 한편 한국은 한국내에서만 가능한 것 위주로 하여 서로 분업적인 협력을 하면 어떻겠느냐" 는 질문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저도 동감하지만 한국 경제의 현황은 반드시 그대로 되지 않는다" 는 대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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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9 박 대통령의 나약함
노미야마: 이번 학생 시위 때 박 대통령은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며 "일본과의 경제 교류, 한일 국교 정상화라는 것은 한국 경제에는 풀라스가 되지 않는다" 는 대답을 했군요.
저는 매우 안타까운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박 대통령이 솔직하게 "한국이 북한을 이겨내는 길은 우선 경제적으로 나라를 좋게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 는 현실을 국민에게 호소할 만한 용기가 있었다면 이번 이런 문제는 상당히 다른 형태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안도(安藤) : 그런 말을 했나요?
나카야스(中保) : 그것은 뭔가 보도의 잘못이 아닌가요?
노미야마 : 아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계속 한일 문제 보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안도 : 그 보도는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노미야마 : 서울에서 온 보도입니다.
안도 : 일본 신문 기자로부터인가요
노미야마 : 일본 신문에도 일부 나왔습니다만, 외신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안도 : 외신은 또 어디서 따왔는지... (웃음) 저는 그런 말을 정말 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노미야마 : 다만, 그런 보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면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추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럼 당신은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라고 책임을 추궁당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분도 이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안도 : 신문에 대해 나쁘게 말하면 안됩니다만, 신문 기자의 보도는 표현이 서툴다고 할까, 상대가 말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반대의 기사가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래서 그 점, 능력이 있는 신문기자 분들이 한결 같이 위험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한결 같이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선입감이라고 할까요, 자신의 잠재의식에 따라 왜곡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그 쪽으로...
노미야마 : 포인트를 잡는 방법으로, 그런 일도 있습니다만...
안도 : 포인트를 잡는 방법으로 프러스를 마이너스로 잡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나카야스 : 한국 문제에서 아주 최근의 보도를 보고, 저는 매우 위험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공산주의 세력이 많이 침투해 있어 학생 시위가 공산주의 세력의 선동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보도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노미야마 : 어떤 신문에서 처럼 서울대 학생의 5%, 고려대 학생의 10%가 공산주의자라고 쓰고 있기 때문에 자민당 안에서 "뭐야, 한국 학생대모는 공산당이냐" 는 견해가 굉장히 많은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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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10. 북조선의 대일 - 대한 공작
나카야스(中保) : 이런 보도는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쓰여진 것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그 목적은 일본의 경제적 진출을 막으러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 공산주의화 된다면 위험해서 일본은 경제 협력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과 한국의 경제적 제휴를 저지하려는 하나의 보도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그것을 의도하고 있는 시람이 많이 있습니다. 알고 계신대로 재작년 비료 협상 때도 상당 부분까지 진전된 것을 망친 것은 미국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미국 회사가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근간을 생각하면서 외신이라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미야마 : 미국은 대한 원조를 일본이 대신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강해서 현실적으로 원조를 줄여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측이 "그럼 그렇게 할까" 라고 나서면 여러 가지 방해를 하고 있는 면도 있지요. 이 점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웃음)
나카야스 : 경제 원조를 생각하는 것은 미국정부이고, 방해하는 것은 그쪽의 사업가이지요.
안도 : 게다가 사업가의 선동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또 실제로 실행하는 관리도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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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11 일부 통일을 기원하는 목소리
다나카(田中) : 국책 연구회에서 내고 있는 '신국책(新国策)'이라는 출판물이 있습니다. 그 속에 한국의 어떤 사람으로부터 기타자와 나오키치(北沢直吉)전 의원이과 우리 앞으로 온 편지를 전재하고 있는데, 그 사람의 주장은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한국 내 친일파이기 때문에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거도 하면서 노력했지만 지금의 일본은 의지가 되지 않는다. 또 미국에 의지해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일본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 결국 우리 한민족이 단결해서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북쪽에는 풍부한 자원과 공업력이 있고 남쪽에는 노동력이 있다." 와 같은 매우 감상적인, 조금 흥미로운 편지인 것입니다. 이것 또한 한국 일부 사람들의 뿌리 깊은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일본이 자신의 민족과 국가를 지킨다는 신념 아래 한일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내세움과 동시에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내 운명을 건 생명선이라는 마음에서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이든 백업이든 일본을 위해서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저항이 있더라도 만난을 배제해 나간다는 정부의 의연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도 : 이쪽은 자유세계이고 저쪽은 공산세계인데 자유세계와 손을 잡는 것을 꺼리고, 반대편의 손을 잡는 것을 우선하겠다는 생각이 이렇게 공연하게 통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카야스 : 최근 신문을 보고 놀란 것은 일본 외무대신이 '북한과의 무역 문제에 대해 부하직원에게 검토시키고 있다' 고 국회에서 답변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다나카(田中) : 현재 통산성(通産省)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은 북한(北鮮)과 오사카(大阪)의 월 2회 정기편입니다. 환율 관계는 프리입니다. 예를 들어 북조선총련 쪽으로 들어가는 돈은 계속 프리로 들어가고 있으니까요. 얼마 전에도 대장위원회에서 그점을 제가 지적했어요.
어쨌든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지 모르지만, 정부가 경제 정책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환율 흑자의 문제입니다. 계속 들어오면 일본혁명 공작자금이든 뭐든 다 프리하게 받아들여버리는 셈이죠.
그런 점, 저는 매듭이 서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총련에 대한 송금이 공공연히 도쿄은행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북조선무역 같은 것도 돈을 벌기만 하면, 달러가 들어오기만 하면 무엇이든 좋다는 그러한 자세를 스스로 고치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카야스 : 잡지 '자유 세계' 에 주목할 만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제목이 '재일조선대학의 놀라운 실태'라는 기사인데, 이곳과 관련한 송금 숫자가 나오는데 제가 들은 숫자는 더욱 컸습니다.
지금 다나카 씨가 말씀하신 대로 계속 돈이 들어오고 자금이 풍부해 지니까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전국의 지부에서 비상한 조직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전역의 구석구석까지 지부의 건물이 생겨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의 지방의회를 모두 움직이고 있습니다. 현의회를 움직이고, 시의회를 움직이고, 촌(村)의회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북한 '귀향 운동'이라는 것도 이들이 홍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미야마 : 대체로 재일교포를 봐도 한국계에는 '민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집안싸움만 하고, 잘 정리되고 있지 않습니다.
나카야스 : 최근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한국계 단체인 민단은 단장이 2, 3일 전에 불신임 결의를 당했다고 하니 또 다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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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1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작자금
다나카(田中) : 학교 문제와 함께 매우 중요한 문제는 각 현에 있는 신용조합입니다. 이것은 북선계(北鮮系), 남선계(南鮮系), 모두 각지에서 하고 있습니다만, 북선계 쪽은 엄청난 판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신용조합이라고 하는 것은 은행법에 의하지 않는 지사(知事)의 권한인 신고제입니다.
그래서 설립 요건이 갖추어지면 지사로서는 인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조선으로부터의 송금이 일본 국내 각지의 신용조합 설립 자금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본주의 경제하의 금융기관을 통해서 중소기업에 대한 세력을 가지게 되고, 이런 점에서 북조선에서 들어오는 송금이 학교와 금융기관에 보내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항해서, 민단 쪽에서도 인가신청이 있습니다만, 북조선과 비교해 보면, 천양지차이고, 민단 쪽 자금의 판로라고 하는 것은, 실로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각 현의 지사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어떻게든 북선계의 신용 조합을 억제하고 남선계를 인정해 주려고 해도 설립 요건이 갖추어지지 않고, 현청 내에 자치노조라는 것이 있어, 이것이 일교조(日教組) 이상으로 좌익화되어 있어, 이들의 압력을 받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미야마: 한국이 재일한국인에 대한 원조(援助)를 충분히 하고 있지 않은 것이군요. 그기까지 도움의 손이 못미치는 것이군요.
사회자 : 조선대학에 8년 전부터 들어온 자금 액수를 자세히 알고 있는데, 처음에 1억엔부터 시작하여 2억엔, 3억엔으로 매년 늘어나 작년(*1963년?)에는 8억엔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 돈을 무엇에 쓰느냐 하면 명목은 교육비라고 해도 공산당 전사(戦士)를 먹여 살리는 데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카야스(中保) : 가능한 한의 학생을 수용하여 기숙사도 학비도 식비도 모두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 그런데 재작년에 한국에서 임시 아시아 반공 연맹 대회가 있었는데, 그때 한국에서는 반공전사를 양성하는 반공센터를 만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반공센터를 만들고, 일본에서는 북조선이 공산당센터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센터뿐이라면 좋겠지만, 혹은 무력을 사용할지도 모르는 걱정이 있습니다. 수십만 명의 북한인이 무장이라도 한다면 큰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카야스 : 이들의 전술이 매우 뛰어나서 예전에는 북조선인 자신이 진두(陣頭)에 섰지만, 요즘은 일본의 좌익 학생, 좌익 정치인, 좌익 단체가 진두에 서는 것입니다. 전에 조선연구소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도 처음에는 북한 사람들이 리포트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일본인에게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저널리즘의 세계에서는, 일본인의 이런 일들을 크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이러한 사고방식과 모습으로 북한으로부터의 선전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우 위험하고 마치 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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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13. 한일 협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노미야마 : 이번에 다시 외국에 가게 된 김종필(金鐘泌)은 비교적 국제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프랑스가 중국을 승인하는 등 여러 가지 국제 정세의 변화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 한국의 나아갈 길이라는 것을 이 사람은 잘 알고 있습니다. (*김종필 1926년 1월 7일 충남부여 출생. 1962년 11월 12일 한일협정 성립에 큰 역할. 1963년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1차외유. 1964년 6월 18일 2차외유: 시위와 당내분)
이 말을 하는 것은, 결국 김종필이 나서면 동료들이 발목을 잡고 끌어내려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정치의 불안정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김 씨가 쫓겨나고 김 씨의 수하만 남아 있는 셈입니다. 지금도 불안정한 요소는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지만, 우선 정국이 안정되지 않으면 경제도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도(安藤) : 그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원조의 근본은 뭐니뭐니해도 정치입니다. 정치가 95%, 그 다음 5%가 경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경제만 분리해서 생각하면 경제인으로서 독자적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하겠지만, 근본은 정치이고, 특히 한국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는 느낌입니다.
경제만 뭔가 다른 삶을 살자거나 앞서자고 해도 저는 한국의 경우는 정치 자체가 가장 큰 중심이고 그것은 다른 어디의 경우와도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나카 씨가 말하는 이른바 일본의 오랜 역사이기도 합니다.
다나카 : 그리고 경제 관계 부서에 부탁을 해서 한국 쪽으로 진출하든지 교류한다고 해도, 그것을 넘어선 국가적인 큰 명제가 없으면 경제적, 즉 순수한 상업적인 진출만으로는 한국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도(安藤) : 그것은 저도 항상 그렀게 생각합니다.
나카야스(中保) : 넘쳐나는 실업자를 활용한다는 면도 또 고려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안도(安藤) : 가령 일본 정부는 어느 쪽이든 좋다는 식으로, 예를 들어 일본에서 기계라면 기계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만약 그기가 공산권과 연결되면 그야말로 공산권에 물건을 넘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쩌면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경제인이라고 해서 그냥 나만 지금 돈을 벌면 된다는 자세로는 절대 장사해서는 않돼는 것입니다. 나라의 경제를 생각하면서 일을 해야하니까요. 적어도 상당 수의 경제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면에서 정부의 근본적인 자세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노미야마(野美山) : 그런 점에서는 자민당 쪽이 제대로 해 주어야 하겠지요.
안도(安藤) : 그도 그렇지만 이것은 이제 국민 전체의 책임이라고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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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14 공동선언방식
나카야스 : 다나카 씨를 앞에 두고 말하기는 송구하지만, 실은 오히라-김 회담 때 다나카 씨가 저에게 전화를 걸어와서 먼저 공동 선언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것은 매우 좋은 구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확실히 정리하지 않고 법률적인 논쟁을 하고 있어서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다나카(田中) : 하토야마(鳩山) 씨 때 일소 교섭을 진행했을 때, 공동 선언을 함으로써 전쟁 상태를 중단하고 국교 정상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일소 간에는 아직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일소간의 교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일관계만큼은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한국 쪽에서 다케시마(*竹島-독도) 문제 등을 포함한 모든 조건이 전제되지 않으면 원칙적인 국교정상화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상태는 반대로 한국 쪽은 공동선언도 좋다고 하지만 일본 쪽이 모든 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웃음)
안도(安藤) : 그것은 누가 한 말입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웃음)
노미야마(野美山) : 저는 지금은 외무성 기자 클럽에 있습니다만, 외무성은 지금은 심사숙고 중인 것 같습니다. 다나카 씨가 말한 공동선언을 한다는 것은 지금은 한국 측이 매우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뭔가 신사협정으로 해상 경계선에서의 어선 나포 등을 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일본에서 어선의 출어 문제라든가, 그런 문제는 정리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무역을 늘려가는 것입니다. 그런 기정사실을 쌓아가면서, 교류를 하고, 장래에 명확한 국교정상화 조약을 맺는 형태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카야스 : 너무 법률적인 논쟁이 많아서 대소 협상과 같은 정치적인 결단이 없습니다.
안도 : 양쪽에서 사이좋게 지내자는 식의 공동선언을 할 수 없다면 걱정입니다.
노미야마(野美山) : 안도 씨, 나카야스 선생님, 다나카 선생님만 해도, 그리고 저도, 한국 쪽에 많은 친구가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사이가 좋습니다. 언제든 편지를 서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 대 국가가 되면 좀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뭔가 걸림돌이 있다고나 할까요.
안도 : 멀리 있는 공산구가와는 공동선언을 할 수 있었는데 이웃한 한국과는 그게 안된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카야스 ; 조만간 다시 한국에 가보려고 편지를 보냈는데, 여러분의 뜻을 반영해서 하나의 큰 선을 내세울 수 있는 의견을 교환해 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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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15 학생에게 일본을 보여주다
노미야마(野美山) : 한국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일본을 보여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느낌이 드니까요. 그런 걸 해 주면 어떨까요.
나카야스(中保) : 유학 희망자도 있어요.
안도(安藤) : 그런 일을 지금 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만, 좀 더 도쿄가 깨끗해지고 나서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웃음)
다나카(田中) : 얼마 전에도 국제학생대회에 참가했던 한학련(韓学連)의 다섯 명 정도 대표가 와서 자민당 학생부의 제군과 간담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학생 시위 얼마 전이었습니다만, 자민당 학생부의 제군이 ''아무래도 그들의 말이 납득되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그 것은 자신들이 일본 사회에서의 학생이라는 입장을 고려한 말인 것 같습니다.
나는 눈여겨 보았는데, 이 학생들은 각 대학의 대표이지만 저가 한국에 갔을 때 깜짝 놀란 것은 정치인을 만나도, 재계인을 만나도 "지금의 학생 제군은 이렇습니다. 학생들의 동향은 이렇습니다" 라며 다들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신경을 쓰나 싶을 정도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이래 한국의 학생운동은 일본의 전학련(全学連)과 다른 의미에서 의외로 큰 비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점, 박정희 씨가 상당히 견제를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노미야마 : 학생이 가장 순수하게 사리판단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이번 경우와 같이, '시위와 폭력으로 새 정권을 무너뜨리면 된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어도 알 바 아니다' 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나카야스 : 학생들을 위해 변호해야 하는 입장이겠지만 한국 대학교수의 말로는, "학생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폭력과 파괴는 부랑자가 참여해서 했고 학생들은 처음에 학내에서 집회를 했는데 경찰들이 들어와서 진압하려왁 했기 때문에 시민들도 들어와서 커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 하나는 한국뿐만 아니라 후진국 어디서나 그렇겠지만 조직력과 행동력을 가진 것은 군대와 학생들입니다. 특히 후진국에서 학생들은 인텔리층으로서 지도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흥국가의 학생들은 민족의식이 강하고 의지가 있기에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시민이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 학생이 보기에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미야마 : 저도 작년 여름 서울대 공대를 비롯한 좋은 학교 학생들이 여름방학에 농촌활동에 간다고 해서 따라갔는데 학생들의 생각은 '한국은 농업국이기 때문에 우선 농촌이 좋아져야 나라가 좋아진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일반인은 농촌을 잘 생각해 주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은 농촌에 뼈를 묻을 생각으로, 선두에 서서 열심히 간척사업을 하거나 여대생은 어린이집을 하거나 여러 가지를 하고 있는데, 그런 것은 매우 좋은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카야스(中保) : 그리고 일본에 유학하고 싶다는 희망자가 꽤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가 만난 것으로 벌써 세 명이 있어요. 문제는, 일본체류 1년 이상이어야 한다던가 하는 입국관련 조건입니다.
노미야마 : 한국에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일본은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유학생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국교는 정상화되지 않았지만, 다나카 씨의 힘으로 한국 학생을 일본에 받아들여 주도록 한번 추진해 주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고심 끝에 밀항해서 들어갔다든가 하는 경우뿐입니다만...
나카야스 : 공식적으로도 받아들이고 있어요. 대한시멘트회사 회장 이동준(李東俊)의 아드님은 안도씨의 신분보증과 저의 신원보증으로 마침 게이오대학에 저의 친분이 있는 교수가 있어서 같이 데려가서 이야기를 하자 "안도선생님과 당신이 보증해 주신다면..." 이라며 받아 준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재정경제위원회 간사를 하고 있는 김상인(金商仁)의원의 아들로, 노력하여 와세다(早稲田)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작년 12월 저와 함께 도쿄에 왔습니다만, 벌써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고 있습니다. 와세다 대학에서는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며 이런 유학생이라면 대환영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노미야마(野美山) : 미국에는 한국유학생이 4천 명 정도 갔고, 유럽에도 꽤 많이 갔다고 합니다. 일본에는 국비 유학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카야스 : 한국에서 외국 유학생 수는 약 4천 명 정도이고 그 중 90%는 미국, 그리고 서독,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이고 일본은 지금 말씀드린 두 명 정도입니다. 앞으로 유학생을 많이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09 경제풍경 '한강의 기적'
● 09-1 경제풍경 '한강의 기적' <경제풍경 "한강의 기적" 우방(友邦) 1969년 8월-9월호>
저는 전후(戦後) 한국에는 도합 네 번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7년 전(1962년)에 6명이서 방한하였습니다. 그때 한국 사람들은 굉장히 활기가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여러 곳의 설비를 비롯한 군사 관계 기관도 상당히 훌륭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한일경제위원회(1969년)] 이번에는 네 번째방한이었는데, 이번은 한일경제위원회가 정식으로 구성되어 그 첫 공식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했기 때문입니다. 그전 세 번은 서울과 도쿄에서 번갈아 간담회가 열렸을 때였습니다.
네 번째 회의부터는 '경제위원회'를 공식적인 회의로 결정한 후 그 첫 번째 회의를 서울에서 연 것입니다. 여기에 우에무라(植村) 씨를 단장으로, 저를 비롯하여 20명 정도가 참가했습니다.
이번 주제는. 정치 관련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주로 경제관련 내용으로 무역을 더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한국의 일본 수출액은 1억달러가 되지 않고, 일본에서의 수입액은 6억달러, 즉 6배나 되는 불균헝 무역으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가 한국측으로부터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수출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무엇을 일본이 사면 좋을까, 이것은 꽤 어려운 문제입니다. 일본에서 가지고 갈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가져가도 되는 물건들만 있습니다. 올해에는 쌀까지 수출품목이 된 상황입니다.
뭔가 일본에서 필요한 것을 한국에서 빨리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광물 관계는 다소 있지만 현재로서는 대수롭지 않게 보입니다. 구리가 많이 나온다고 했는데 이 동매장의 산을 잘 알아보니까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생선, 농산물, 소돼지 등의 축산물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자는 이야기도 있었고 광물도 극히 일부분이지만 일본으로 돌리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가공 무역 면에서는 일본에서 재료가되는 천을 가져와 보세 가공을 해서 이것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보세가공 수출도 거론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물을 만들어 일본에 수출하면, 이것을 일본에서 가공한다든가, 일부분 가공한 것을 일본에서 마무리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여러 가지로 했습니다만, 좀처럼 상대방으로부터 선뜩 시선을 끌 내용이 없었습니다.
한국 측은 여러 가지로 열심히 이야기합니다. 저희도 뭔가 있지 않을까 하고 여러 가지를 찾습니다만, 좀처럼 찾을 수 없습니다. 단시간에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위탁가공 무역과 문제점] 다만, 위탁가공이라는 면에 대해서는 꽤 열심이었습니다. 일본에서 가공에 필요한 윈재료를 보내면 상대편에서 가공하여 일본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입니다. 한국 측의 수입(收入)은 가공임(加工賃)이지만, 일본에서 재료를 보낼 때도 관세가 부과되고, 가공 후 돌려보낼 때도 관세가 부과됩니다.
다만 가공한 것에 대한 부가가치에만 관세가 부과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왕복 모두 전액 부과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현재로서는 일본의 법률상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일본의 중소기업의 가공업자로부터는 위탁가공 수입품에 가급적 많은 관세를 부과해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진정이 일본 정부에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틀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측의 요구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한국 측도 모르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일본은 이런 일에 매우 엄격합니다.
[공업 소유권 문제] 또 하나, 가장 큰 문제는 공업 소유권 문제가 있습니다. 특허, 상표, 신안 등록 등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다소 기술적인 면을 알고 있어, 상대방과의 논의에 나선 것입니다.
한국은 만국공업소유권회의 멤버에 가입하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약국이 되면 모두 같은 의무와 권리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으로는 선진국에 맞설 수가 없기 때문에 좀처럼 가입하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독일, 미국, 영국 등과는 만국공업소유권 조약과 같은 형식의 협정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해서만은 이것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5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좀처럼 결판이 나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현황] 현재 서울의 상황을 말씀드리면, 서울시내는 매우 많은 빌딩이 들어서 있습니다. 15, 6층에서 22, 3층의 고층 건물입니다. 조선호텔도 재건축 공사 중이었습니다.
저의 보증으로 게이오 대학에 입학했던 이군의 아버지도 최근 20층 정도의 호텔을 지었습니다. 지진이 적고 지반도 좋기 때문에 건축은 비교적 편한 편입니다.
자동차 수도 이전에 비해 많이 증가하여, 중심 거리에는 도쿄와 별로 다르지 않을 정도로 차들이 달리고 있습니다. 그 자동차의 종류도 일제 제품이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토요펫이라든가 블루버드 등 여러 가지가 보입니다.
[한국의 발전소 건설] 한국에서는, 한창 발전소 건설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7년 전에 한국에 왔을 때는 40만 킬로와트 정도였지만, 현재 공사 중인 수력과 화력 발전소도 여러 곳 있으며 발전용량이 21만 킬로와트와 18만 킬로와트의 대용량인 것도 있어, 이들은 올해(1969년) 말부터 내년 초에 걸쳐 준공 예정이며, 대체로는 독일, 미국 그리고 일본의 기계입니다. 조만간 총 삼백만 킬로와트 정도가 될 계획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석유 정제 공장에 대하여] 석유는 울산의 정제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데, 처음 4만 5천 배럴 정도의 처리 능력이었지만, 현재는 12만 배럴 정도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비료 공장에 대해] 그리고 앞서 문제를 일으킨 적도 있는 예의 요소계 비료 공장입니다만, 이것도 울산에서 대략 하루 생산량 1천 톤으로 이 정도 공장이라면 역시 일류의 큰 공장입니다.
일본 동양고압(東洋高圧)의 기술지원으로 만든 것으로 현재 조업 중이며, 연산 30만 톤 정도의 요소 비료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현재는 순조롭게 가동되고 있습니다.
[시멘트 공업에 대하여] 시멘트 공업에 대하여 한국은 자급자족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발달되어 있습니다. 올 봄에는 총생산능력이 연산 오백만 톤에 이를 전망입니다. 전쟁 전 일본의 시멘트 생산 능력이 최고가 되었을 때가 연산 칠백삼십만 톤으로, 물론 이 안에는 옛날 조선, 대만의 몫도 포함한 생산능력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조선, 만주, 대만을 제외한 일본 내지만의 생산능력이 대략 오백만 톤 정도였다는 것과 비교하면 한국만의 시멘트 공장으로, 오백만 톤이라는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시 중 오노다(小野田)시멘트에서 수요조사 계획을 세웠을 때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이런 공장으로 채산성이 있을까 걱정했으며, 가장 큰 시멘트 공장은 북한에 있었고, 그 선적항은 묵호항입니다. 이 항구는 무연탄을 싣는 곳이었지만 현재 1만 톤급 배가 접안할 수 있는 설비 공사를 하고 있고 올해 안에 완성 된다고 합니 다.
묵호에 공칭 생산능력 2백만 톤으로 연간 150만~160만 톤은 거뜬하게 생산할 수 있는 시멘트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이름은 쌍용시멘트로, 묵호가 선적항으로 한국의 각 항구와 외국으로 보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하는 시멘트 전용선 두척은 저희들이 관계하고 있는 조선소에서 건조하여 납품한 6,500톤의 배들입니다. 그리고 충청북도 단양 근처에는 시멘트 공장이 기존의 것과 합쳐 총 네 곳이 있는데 이것은 대체로 연산 40만 톤에서 백만 톤 정도 규모의 것입니다.
그 중에서 문경의 시멘트공장은 원래 오노다 시멘트가 조성하고 있던 곳으로, 이 공장이 상당히 커져서 40만 톤 정도의 규모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삼척에는 저희가 원래 하던 곳인데, 그 당시에는 연산 18만 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것이 지금은 연산 백만 톤 정도가 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여러 가지 기술 협력도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말씀드린 각 공장의 연간 생산 능력은 대충 계산하여도 오백만 톤은 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년도, 즉 1970년도에는 현재 건설 중인 것이 완성되면 총 7백만 톤 정도의 연산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이만한 시멘트는 모두 소화가 된다고 하니까 상당히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조선소에 대하여] 부산에는 전쟁 전부터 있던 조선 중공업(朝鮮重工業)이라는 미쓰비시 계열의 조선소가 있고, 인천에도 전전부터 있던 조선기계(朝鮮機械)라는 곳이 있는데 그다지 발전은 하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 계통도 앞으로 많이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로서도 오노다 계통의 회사에서 여러 가지 기술적인 수출을 하고 있습니다. 기계 제작을 한국에서 해준 것 중에는 성능이 좋지 않은 것도 있어 어쩔 수 없이 일본 제품의 기계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등, 기계 공업 쪽은 상당히 뒤쳐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약품 공업에 대하여] 약품 관계의 공장은 독일에서 바이엘 등도 진출하고 있고, 그 외 여러 가지 약품이 생산되고 있는데 이 부문은 일본에서 진출할 경우 상당한 경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석유공업을 말함] 석유에 대해서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연간 생산량이 12~13만 배럴 정도입니다. 따라서 무연탄을 가정연료로 사용하게 함에 따라 중유는 시멘트 공업 등 공업 쪽에 주로 사용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외의 산업에서는 쌀생산과 소의 증식 등 농축산 쪽은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광물(鉱物) 쪽도 일본에 수줄할 정도에는 이르지는 못할 것습니다.
어업 쪽에서는 조금은 진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으로부터 여러 가지 어업용 기자재를 수입해 가고 있기 때문에 생선의 일본 수출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국과의 무역관계와 관련해서는 자칫하면 오히려 곤란한 관계가 되기 때문에 요즘 꽤 어려운 상황입니다.
09 경제풍경 '한강의 기적'
● 09-2 [질의응답] <* 참고 : 경제풍경 "한강의 기적" 우방(友邦) 1969년 8월-9월호>
질문=포항 근처에 큰 제철소가 건설된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현재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답=그건 아직 완공되지 않았습니다. (포항제철소, 1979년 준공) 계획뿐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계획입니다. 제철소는 전전(戦前)에 청진(清津)에 닛테쓰(日鉄)가 만들었었고 따로 미쓰비시(三菱)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것과 같은 정도의 것이 인천에 생겼습니다. 청진에서 미쓰비시가 철괴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그것과 비슷한 것을 인천에서, 지금 20만 톤 정도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연(理研=理化学研究所1917년설립)이 인천에서 하던 제조공장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철이 아니라 제강 부문입니다. 이것도 보러 갔습니다만, 아주 소규모였습니다. 유리 공장도 인천에 생겨 있습니다. 월산 8만 상자 정도로 꽤 활발한 상태였습니다.
질문=닛산이라든가, 도요타의 자동차공장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답=도요타는 조립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닛산은 '새나라' 라는 이름으로 차를 만들고 있었는데, 이것은 뭔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도요타가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조립 공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무튼 미국이나 유럽에서 한국으로 점점 진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한국에서 여러 가지 기술 부문에서 접촉해 보았는데, 어쨌든 구미 각국의 일류 기업이 진출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지 않으면, 한국에서는 무시당할 수 있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그런 사정이기 때문에, 우리가 한국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미 각국의 한국에 대한 진출 상황을 충분히 알아 두어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그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한국에 진출하지 않으면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너 따위는 별것 아니다는 식으로 무시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서양 각국에 출장을 갈 경우에도, 여러 곳을 둘러보고 여러가지를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한국 측에서는 우리는 구미 각국에 진출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설픈 일본인은 바보 취급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질문=일본에서 한국으로 진출하려면 이른바 기부금이 많기 때문에 진출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러한 점을 미국이나 독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기부금 같은 것을 역시 내고 있는 것일까요.
답=이건 잘은 모르겠지만, 저쪽에서 한국에 내고 있는 금액은, 매우 고가입니다. 지불 조건 등도 한국에는 유리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금액만으로 보면 매우 비싼 느낌인 것 같습니다.
질문=외국에서 상당한 차관을 하고 있지만, 한국으로서는 그 상환능력이 매우 의심스럽다는 것이 동아일보에도 쓰여 있다고 들었는데, 이 점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답=한국 측 대기업이나 대공장의 이익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것을 매우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점점 은행 쪽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은행에서는 요즘의 새로운 공장에 대해서 아마 연구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은행이 대기업에 직접 찾아가서 그것을 관리한다는 것은, 이것은 능력이라고 할까, 기능 면에서 뒤떨어지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일본에서도 그런 예는 각지에서 상당히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들렸을 때에 그런 얘기가 나와서 이 점을 한국에서는 좀 더 숙고해야 한다고 저는 말했습니다만, 차츰 좋아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강의 기적이란]
한강의 기적―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일컬어 ‘스미타강의 기적’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한강의 기적’도 한국 경제의 경이로운 발전을 총칭한 것입니다. 우리가 방한한 1969년 무릅도 그 시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박 정권의 1차(1962년~1966년)와 2차(1967년~197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약진기를 가리킵니다. 박 정권은 1962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했는데 이는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에 따른 외자 도입이 도화선이 되면서 산업기반 정비와 수출산업 확충에 투자의 무게를 실은 것입니다.
이 기간의 외자 도입액은 3억 5천만 달러에 달했고, 수출은 1962년 5천 4백 8십만 달러에서 1969년 2억 5천 30만 달러로 확대되었으며, 이 결과 한국 경제는 실질 평균 8·3%의 성장을 이루었고, 1인당 GNP도 87달러에서 125달러로 늘어났다.
이렇게 해서 한국 경제는 후진국 상태에서 벗어나는 비상을 1965년에 시작했다. 이어지는 제2차 5개년 계획은 기본 목표를 (1)식량 자급화, (2)공업화 촉진과 수출 확대를 통한 국제수지 개선에 두었는데, 세계적 호경기라는 환경 속에서 수출이 연평균 33.7% 증가라는 비약적인 증가율을 보였다.
이 결과 기간 중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1·4%라는 고도성장을 이루었고, 1인당 GNP도 1971년에는 278달러로 비약했다. 이 기간은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 이라 불리는 한국 경제의 약진기였다.
2章 悲劇の歴史を越えて-日韓に架ける橋
※悲劇の歴史を越えて『日韓に架ける橋』五九年五月一日、二日の両日、小野田銀座倶楽部にてロ遣。ホストには原書房社長成瀬恭および編集部が当たった。
日韓に架ける橋 77p
● 10 [六〇年余の付き合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