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재세시부터 탁발(托鉢)은 수행자들이 식사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탁발은 산스크리트어 pindapatad의 음역인 빈다파다에서 나왔다. 발우를 들고 시중에서 음식을 얻는 것을 말하는데 불교가 생겨나기 전부터 출가 사문의 생활수단이었다. 부처님의 제자를 일컫는 ‘비구(比丘)’라는 말도 밥을 얻어 먹으며 수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탁발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이다. 걸식을 통해 수행자는 자신을 낮추게 되고, 음식을 공양하는 사람은 보시의 공덕을 짓는다. 출가 수행자는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으며 매매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전적으로 재가자의 보시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재가자의 여러 보시 중에서도 음식보시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다. 출가자에 대한 공양은 공덕의 복전(福田)이 된다고 했다.
탁발은 부처님도 늘 성공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잡아함 제39권〉 걸식경(乞食經)에는 부처님이 마가다국의 어느 마을에서 아침 공양을 얻기 위해 탁발을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부처님을 본 마라(惡魔)가 규칙을 어기고 다시 탁발을 나가면 음식을 얻도록 도와주겠다며 속삭인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거절한다. 오후불식이기 때문에 아침에 탁발을 하지 못하면 하루 종일 굶어야 했다.
부처님에게도 악마가 유혹을 했다면 보통의 비구에게 배고픔은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탁발에 대한 규정을 엄격하게 정해놓지 않으면 여러 잡음이 일어날 우려가 많았다.
그래서 탁발은 엄격한 법식과 금제에 의해 이루어졌다. 스님들의 엄격한 수행법에 대해 정해놓은 12두타행(頭陀行) 중 상행걸식(常行乞食), 차제걸식(次第乞食), 수일식법(受一食法) 은 탁발에 관한 것이다. 즉, 항상 걸식하여 먹을 것을 해결할 것과 걸식할 때는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가리지 않고 차례로 할 것, 그리고 하루에 한 끼만 먹을 것 등이다. 또 칠가식(七家食)이라 하여 밥을 빌 때는 일곱 집을 넘으면 안 된다고 했다. 한번 갔던 집을 다시 찾아가면 안 된다는 규칙도 있다.
〈사분율〉을 보면 비구들의 탁발위의가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한번만 밥을 주는 곳에서 지나치게 받지말라, 받지 않은 음식을 먹지말라, 좋은 음식을 구하지 말라, 차례 차례 걸식할 것이며, 강제로 행하지 말라” 는 등의 규정이 〈사분율〉 전 장에 걸쳐 자세하고 풍부하게 나와있다. 그만큼 탁발이 부처님 당시에도 중요한 의식이었음을 말해준다.
〈사미율의〉에도 탁발법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노성한 사람과 함께 하여야하고 함께 할 이가 없으면 갈만한 데를 알아야한다. 남의 집 앞에 가서는 형편을 살펴보아서 위의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자가 없는 집에는 문안에 들어서지 말아야한다. 앉으려거든 좌석을 살펴보되 병기(兵器)가 있으면 앉지 말고 보물이 있으면 앉지 말고, 여인의 옷이나 이불이나 장식품이 있으면 앉지 말아야한다. 내게 음식을 대접하면 네가 복을 받는다고 하여서는 안된다”
또 “걸식할 적에 너무 사정하거나 꼭 달라고 하면 못쓴다. 인과의 말을 많이 하여 많이 주도록 하면 못 쓴다”고도 했다. “많이 얻으면 욕심이 생기고 적게 얻으면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말며, 낯익은 시주만 찾아가거나 낯익은 암자에만 찾아가서 달래서는 안된다”고도 했다.
〈유마경(維摩經)〉 ‘제자품(弟子品)’에서는 탁발이 단지 먹기위한 방편이 아니라 수행이라고 했다.
“걸식은 평등한 법에 머물러 차례대로 해야 한다. 걸식은 식용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음식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다. 마을에 들어갈 때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마을이라는 생각으로 들어가야 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온갖 분별은 깨달음의 경지에서 하여 모든 것이 꼭두각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걸식한 밥은 모든 중생에게 베풀고 부처와 성현에게 공양한 다음 먹어야 남의 보시를 헛되이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번뇌를 버리지 않고서도 해탈에 들고, 집착을 끊지 않고서도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다.”
수행자가 식사를 해결하는 방법… 경전엔 법식 엄격
승원생활 정착 후 풍습 약화… 64년 들어 공식금지
불교 교단사에서 최초의 탁발은 부처님 성도 후 7일이 지나 일어났다. 부처님은 부다가야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7일 동안 가부좌 한 채 해탈의 즐거움을 누린 뒤 선정에서 깨어난다.
마침 보리수 곁을 지나던 트라프사와 바루리카라는 두 상인이 부처님에게 공양을 바친다.
이 때 부처님은 모든 정각자는 음식을 손으로 받지 않는다며 거절한다. 이에 두 상인은 처음에는 황금으로 두 번째는 칠보 바루를 올리는데 받지 않자 결국 사천왕이 돌로 된 바루를 각각 하나씩 바쳐서야 부처님이 공양을 받게 된다.
탁발은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정주생활하고 중국에서는 총림이 생겨 자급자족하는 방식으로 바뀐 뒤에도 주요한 수행법으로 남아있었다.
한국불교에서도 1964년 조계종에서 공식적으로 금지할 때 까지 오랜 전통으로 내려왔다. 〈조선불교통사〉는 1900년대 초까지의 탁발 풍습이 기록돼 있다. ‘걸식 탁발시에는 공인된 증서를 휴대해야한다“라고 했다.
탁발을 하고자 하면 스승 및 도반의 연대서명을 받아 본사에 청원하고 면허 증서를 휴대하고서야 탁발할 수 있다. 또 스무살 미만은 허가 하지 않았으며, 면허를 받은 사람 풍기와 법의를 문란케 하면 면허를 완전히 박탈한다고 했다. 탁발 시에는 사법(寺法)에 정해진 옷차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때의 정해진 법식이 어떤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시간은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였다.
〈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탁발을 행할 때 예절이 있어 발우를 항상 왼쪽 어깨에 두어야하며, 탁발을 하러 나갈 때 청나라 사람인 영악석수도인(靈岳石樹道人)의 걸식게(乞食偈)를 외운다. 연로한 비구와 함께 가야한다. 만약 함께 할 사람이 없으면 갈 수 있는 곳을 알아야한다는 등 〈사분율〉이나 〈사미율의〉에 나오는 내용과 비슷한 규정이 들어있다.
1964년 조계종은 종단차원에서 탁발을 금지했다. 이유는 스님들의 위의를 해치고 탁발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악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불교통사〉에는 “조선의 동량승 가운데 목탁을 치며 수행자처럼 천수주를 독송하는 자가 있으며, 동발을 치며 회심곡을 부르는 자가 있으니 이는 몸과 마음의 빈궁함만을 꾀하는 것이라 속된 말로 땡땡이란 말은 동발의 소리로서 그를 이름한 것으로 이는 신라 대안대안(大安大安)의 유풍이다”라고 했다.
사회의 경제수단이 쌀 등 현물중심에서 화폐경제로 옮아간 것도 탁발이 사라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탁발이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해도 시골 등지에서는 20여년간 더 계속됐다. 신도수가 많지않은 산골이나 시골의 작은 절에서 양식을 조달하기 위해서나 마을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끊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공식적으로 금지됐던 탁발은 1996년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이 불교의 사회참여 조성 기금마련을 위해 대대적으로 탁발운동을 펼친 뒤 탁발은 종종 중요한 종교행사가 되기도 했다. 중앙승가대 총학생회는 비구니 기숙사 마련과 학교 발전기금 모금을 목적으로 탁발행사를 한 적이 있으며, 동국대 경주캠퍼스 석림회 법사단도 ‘강원 산불 이재민과 불우이웃 돕기 자비의 탁발’ 행사를 개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탁발은 일회성 행사에 그친 이벤트였다.
반면 지난 3월1일부터 도보로 전국을 순회하는 도법스님(전 실상사주지)과 수경스님(불교환경운동가)의 생명평화 탁발순례는 지금까지는 볼 수없던 방식이다. 이 스님들은 생명평화의 가치를 확산하고 이를 따르는 사람들을 조직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3년에서 5년간 일정으로 전국을 도보 순례하고 있다. 기금과 식사 잠자리는 모두 탁발에 의존한다. 걸식을 통해 의식주를 해결하는 전통방식에다 생명평화라는 가치를 얹은 변형된 탁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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