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공설운동장에 있는 사이클영웅 엄복동선수상
제2의 엄복동 선수를 기다리며
그가 왜 말년에 서울에서 변두리인 동두천과
연천을 오가며 뜨내기처럼 살았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고
1952년 전쟁통에 동두천 인근 야산에서
폭격에 맞아 비명 횡사하였다는
소식만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요즈음 같으면 대스타로 자전거에 엄복동
사인만 해 주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텐데
지난 시절 운동 선수들의 말년은 비참하기
그지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하계 올림픽 경기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먼 거리를 경주하는 경기는
단연 사이클 시합이다.
우리가 나라가 없을 때 우리의 속을 시원하게 하였던 운동 선수 중에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손기정 마라톤 선수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에게는 엄복동 자전거 경주 선수가 있었다.
그는 서울 태생이고 평택에 있는 일미상회 직원으로 있었는데
당시 자전거 가게는 자전거를 수리도 하고 판매도 하고 배달 행상도
하였다는 것을 보면 평택-서울 간을 지금의 택배회사에서 일하는 것 같이
배달 심부름도 하였는가 보다.
워낙 날쌔게 배달을 하는 그를 보던 주변의 권유로
엄복동은 19세의 나이로 1913년에 처음으로 자전거 경기에 출전하였다.
그가 출전한 전 조선 자전차 경기는 세 번에 걸쳐 인천, 용산, 평양,
세곳에서 열렸다. 당시 용산 대회서만 10만명이라는 관중이 모였는데
이 대단한 대회에서 일본인 선수들을 뒤로 제쳐버리고 우승한 쾌거는
관중들의 기억에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이었다고 한다.
그 후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열리는 경기마다 일본본토의 선수를 출전시켜
경기의 양상은 종전에 열린 어떤 경기보다 익싸이팅한 한일전이 되었다.
엄복동 선수는 어떤 조건에도 아랑곳 않하고 계속 우승을 하였으니
민족의 스타로서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다.
당시 경기 진행 방식은 각 리그 상위 선수가 삼류에서 이류로, 이류에서
일류선수 선수들이 출전하는 경기로 승격해서 경기를 치루었다.
엄복동 선수는 일류 경기에만 출전하는, 말 그대로 일류 메이저 게임 선수였다.
1920년 경성시민 운동대회
자전거 경주대회에서 항상
다 낡은 중고 자전거를 가지고
출전하던 엄복동 선수가
영국 자전거 회사 라지사에서
기증한 새 자전거로 바꿔타고
일본에서 원정 온 최고수
모리를 비롯하여 8명의
일본선수와 함께 50바퀴를
도는 경주를 하였다.
중요한 경기에 항상 단골손님
처럼 나타나는 부정 심판은
그 경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 선수들은 자빠지고 엎어져 엄복동 선수는 3바퀴나 앞서는 경기를
펼쳐 관중은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 들어갔다.
어허? 이런일이…
도중에 심판은 일몰로 경기를 중단 시킨거다.
다 이긴 결과가 뒤집힌 숏트랙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 사건과
비슷한 일은 벌써 예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김동성 선수의 깃발 사건과 내용은 다르지만 깃발 사건이 일어났다.
엄복동 선수는 한 성깔을 보여주었다. 단상에 올라가 꽂혀있는
우승 깃발을 뽑아 부러뜨리자 경기장에 일본선수를 응원하던 기세
등등한 일본인들이 엄선수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누군가 "엄복동이 얻어 터진다" 하는 소리에
군중들이 우루루하고 엄선수를 에워싸 보호하며 패싸움이 일어나니
그새 경기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자칫하면 민족 결집으로 불과
일년 전인 기미년 3.1만세 사건을 재현시킬만한 대규모 반일운동이
일어날 기색이 보였을 정도만큼의 대사건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 한 바퀴 스퍼트에서는
안장에서 엉덩이를 올리고 질주하여
“엄복동이 엉덩이 들었다”
말은 우승이라는 말과 같았다.
엄복동이 엉덩이 들었다는 계속되었고 그의 나이 41세까지 큰 경기를
휩쓸어 나라 잃은 백성들의 울분에 숨통을 틔워 주는 역할을 도맡았다.
그래서 생겨난 유행어가
'땅에는 엄복동이 가장 빠르고 하늘에는 안창남이다'인데
당시 힘없는 백성들에는 커다란 위안거리였다.
그는 한때 은퇴하고 쉬었다. 41세에 나이에 다시 출전한
1932년 전조선 남녀 자전거 대회에서 1만미터 경주에 다시 우승을 하여
꺼진 불도 다시보자를 팬들에 일깨워 주었다.
훗날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자전거 경기는 여전히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 하였다.
특히 일반 사이클 경기가 끝나고 벌어지는 여학생부 자전거 시합은
볼만한 경기였다. 무거운 삼천리 자전거를 끌고 경주하는
십대 아가씨들의 모습은 볼거리 중에 볼거리였다.
자빠지고... 무릎은 까지고... 울고... 뭐(?)터저 울고... (오버)
(상장 받고 있는 50년대 싸이클 선수의 헬멧이 특이하다)
그래서 그런지 제2,3의 엄복동을 꿈꾸는 청소년들은 해방 전에도, 해방
후에도 계속 나타났고 그 여파는 우리나라 배달문화에 한몫 하였다.
냉면 쟁반을 겁겹히 쌓아올리고 한 손으로 들고서 다른 한 손으로는
자전거 핸들을 잡고 거침없이 좁은 골목과 복잡한 시장 골목을 누비는
곡예사 같은 식당 종업원 총각들이나 쌀가게에서 쌀가마니를 첩첩이
쌓고 달리는 청년들이 모는 자전거는 배달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중국집에서 철가방을 오토바이에 매달고 배달하는 지금의 세대와는
천지 차이였다.
올림픽에서 자전거 경기종목의 메달수는 육상 수영 다음으로 많은
남자 11개, 여자 7개를 합하여 총 18개에 달하지만 우리 선수들이
지난 60년 동안 올림픽에서의 좋은 성적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엄복동 선수와 같은 훌륭한 선수가 다시 나오기를 기대하며...
끝
첫댓글 엄복동선수처럼 훌륭한 선수가 되고 싶군요...
훌륭한 선수는 그만 두고, 대회때 등수에나 들도록 노력해 봅시다..어떻게 내년에는 좋은 성적을 얻도록 해봐야 할 텐데...나이는 점점 먹어가고, 장비는 무거워지고...암튼 내 몸무게살도 빼고, 애마의 무게도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