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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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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충의 지조의 시 스크랩 단재 신채호
은하수 추천 0 조회 56 23.04.18 18:21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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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4.18 18:27

    첫댓글 (2) 애국계몽기 - 성균관 입학은 채호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그는 박은식이 주도하는 일부 진보적인 유학의 경향을 접하면서 봉건 유교학문의 한계와 봉건 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 세계관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이남규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김연성, 번영만, 유인석 등과 사귀어 그 해 10월에는 독립협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사퇴하고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사>에 입사했다. - <황성신문>은 독립협회 중에서 개화 자강파인 남궁억, 유근, 나수연 등이 창간한 신문이다. - 그 해 11월,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신문이 무기정간을 당하자 양기탁의 추천으로 1906년 채호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었다. -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Thomas Bethell 이 사장인 한영(韓英)합작 신문사였기 때문에 일제의 사전 검열없이도 자유롭게 출판이 가능했으며 양기탁은 이 신문사의 총무로 있었다

  • 작성자 23.08.27 17:33

    - 1907년 채호는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 가담했다. 나중에 <대한매일신보>가 ‘신민회’의 기관지로 전환됨을 우리는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1909년 ‘신민회’가 청년운동의 일환으로 청년학우회를 창립하자 채호는「청년학우회 취지서」를 쓰기도 하였다. 1907년부터 1910년 동안 채호가 저술한 많은 작품들 속에 나타나는 일관된 주장들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의 애국계몽사상기라고 부를 수 있다. - (3) 망명 활동기 - 1910년 일제의 한일 합병정책이 노골화되어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구축을 계획한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채호는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중국 산둥 반도의 청도로 망명했다. 1911년 채호는 윤세복, 이동휘, 이갑 등과 ‘광복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는데 ‘광복회’는 ‘신민회’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대종교’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이 합작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 작성자 23.08.27 17:33

    - ‘광복회’는 1917년 경 국내의 행동대원들이 채호의 통고문과 고시문으로 지주들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다가 일제 관헌에게 발각되어 1918년에 조직이 붕괴 됨 - 그 해 12월 교민단체인 ‘권업회’의 <권업신문>의 주필이 되었다가 1914년 대종교 관계자 윤세용과 그의 형제들이 설립한 동창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조선사』집필에 착수하였다. 이 시기에 대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판단되며 1915년 신규식, 박은식 등과 상하이에서 대규모의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한중합작을 도모하는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였으나 실패로 끝이 나자 동지 이회영의 안내로 서간도로부터 북경으로 가서 3.1운동 때까지 약 4년 간의 체류생활을 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 그의 독립사상을 소설형식으로 표현한 중편소설『꿈하늘』과『조선사』를 집필하였다. -(4) 임시정부 활동기 -1918년 12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발표되었고 여러 세계적 정황에 발맞추어 우리나라에서는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다. 이런 여파로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채호는 ‘임시의정원’이 되었고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정식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해, 7월

  • 작성자 23.04.18 18:34

    제5차 ‘전원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으나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반대하면서 ‘위임통치안’을 철저히 규명할 것을 주장하다가 관철되지 않자 그 직위를 사퇴했다. 신채호의 완전독립, 절대독립의 주장에 비추어볼 때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은 그것이 아무리 일시적인 전술이나 방편이라고 할지라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매국노적인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이에 맞서 <신대한>의 주필이 되었으나 일제와 임시정부의 방해로 휴간되었다. 1920년 9월 ‘군사통일촉성회’ - 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이 서로 통합하여 효율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결성된 단체 - 와 베이징에 있는 ‘보합단’의 내임장(內任長)으로 추대되어 그곳으로 떠났다. 1921년『천고』를 발간하면서 김창숙, 장고상 등 54명의 서명과 함께「성토문」을 작성하여 임시정부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였는데 이승만은 이 타격으로 말미암아 5월 21일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고 채호는 ‘창조파’로 활약했다. - 당시의 국민대표회의는 이전부터 상해 임시정부를 원칙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개조하려는‘개조파’와 아님 임시정부를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운 정부를 창조

  • 작성자 23.04.18 18:37

    ‘창조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공존하고 있었다.
    (5) 무정부주의 활동기 - 1923년 8월 창조파의 새로운 임시정부는 블라디보스크로 갔다. 그러나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하던 소련은 한국의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것은 신채호의 사상적 기반으로 조선독립이 실패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채호를 커다란 좌절감과 허무함 속에서 방황하게 만들었다. 본국의 처자로부터 기한(飢寒)을 호소하는 편지는 그를 더욱 괴롭혔다. 1924년 3월 45세의 나이로 승려가 되기 위해 북경 교외에 위치한 관음사라는 절에 들어간 것도 이러한 방황을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승려생활 중 시작(詩作)과 『전후삼한고』를 집필하다가 자신에게 국사연구의 사명이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그 해 가을 승려생활을 청산하였다.「조선혁명선」집필 시 친분을 가졌던 이희영, 유자명 등의 동지들을 접하면서 크로포트킨의 저작들을 읽게 되었고 그는 점점 무정부주의 사상에 물들어 간다. 1925년『난객의 신년 만필』에서 이런 요소들이 짙게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27년 그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5월에 이 연맹의 선전 잡지발간과 폭탄제조소 설치자금 마련

  • 작성자 23.08.27 17:32

    위해 활동하던 중 외국 위채 위조사건에 연루되어 10년 형을 선고 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2월 뇌일혈로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2. 단재 신채호의 사상 (1) 민족주의적 영웅사관의 형성 -역사는 변화하고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의 갈등은 언제나 일어난다. 특히 사회의 급격한 전환기에 더욱 대립적이고 논쟁적인 형태의 모습을 보인다. 한말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구학과 신학의 대립이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였다. 나라는 망해도 도는 망하면 안된다는 척사론적 입장, 유교를 근본으로 하되 신학문을 받아들이자는 절충적인 입장, 유교를 배척하고 기독교를 신봉해야 한다는 입장, 구학과 신학 모두를 거부하고 민족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이념을 정립시키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각각의 이러한 입장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한계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척사론은 당시 “유교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 호응이 없었으며 절충적인 입장의 개화파는 외국 사람들에게 아부하여 개인 영달의 기회로 삼고 외국인들에게 침략의 책략을 제공한다는 오해

  • 작성자 23.08.27 17:32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 추측컨대 채호가 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 추천에 반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 기독교의 한계는 종교를 이용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오직 영혼구원과 천국 지상주의만을 추구하여 국가와 민족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한계점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조선 고유의 문화가 강조되었는데 이를 국수주의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국수란? 그 나라에서 역사적으로 전래하는 풍속, 승과, 제도 등을 기본정신으로 삼는 ‘나라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국수가 있어야 외국문물을 수용하면서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동시에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도 고취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국수’ 가운데에서도 특히 우리나라의 단군역사를 강조한 대종교가 있다. 신채호를 비롯한 초기의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바로 이런 입장에 서서 흔들리는 조국을 바로 잡고자 했던 것이다. - (2) 신채호의 사상활동 시기 - 신채호 일생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봉건 유생에서 애국계몽가로 거기서 혁명적 민족주의자로 다시 무산계급에 의한 폭력 혁명론자로 변화되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과정을 시기적으로 발생되었던 여러 부수 상황들과 관련하여

  • 작성자 23.08.27 17:31

    살펴보기로 하자.
    1) 애국계몽시기 (1906~1910) 신채호의 민족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적으로 적용시킨 스펜서와 키드의 사회진화론에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개념을 받아들여 외세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자’가 되는 길밖에 없으며 이것은 ‘타(他)’에 의해서가 아닌 ‘자강’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아와 비아의 투쟁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기 위한 역사적 창조자는 민족적 영웅이어야 한다는 영웅사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1907년의 번역서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서 주관한『을지문덕전』,『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동국거걸최도통전』등의 전기를 저술한 예만 보더라도 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2) 혁명적 민족주의 시기 (1910~1920) 1910년 한일 합병정책의 압력은 그를 중국으로 망명시킬 만큼이나 위력적이었다. 무력에 의해 자신의 조국에 발도 붙이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그가 느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망명 이후로 본격적인 역사연구를 시작하였고 중세의 왕조 중심의 역사관을 극복하여 그것을 근대적 역사의식으로 발전시켰다. 당시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을

  • 작성자 23.08.27 17:31

    이런 와중에 그의 역사인식은 한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영웅 중심적인 사관에서 벗어나 점차 민중 주체의 역사관으로 바뀌어 갔고 역사 창조의 주체로 민족을 설정한 것은 신채호가 남긴 사상적 유산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민족과 민중의 힘은 조직적 투쟁이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 당시 그의 활동들을 보아도 광복회 조직, 신한혁명당 조직, 상해 임시정부 가입 등 어떤 집단에 소속된 조직적 투쟁을 중요시 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아마도 군대를 동원한 일본의 무단통치를 통한 국권침탈을 뼈저리게 체험한 그에게 조직의 필요성에 대한 영향력은 컸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신채호의 이러한 사상적 뒷받침의 결실로 ‘무오독립선언’을 거쳐 3.1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 3) 무정부주의 시기 (1925~1936 or 1925~1928)신채호가 무정부주의자가 된 시기를 1925년으로 본다면 그 이전에 임시정부가 요직을 둘러싼 파벌싸움의 양상을 보이고 수습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는 임시정부 의장직을 사퇴하는사건이 있었다. 게다가 시베리아 흑하 자유시에서 독립군이 소련군들에 의해 학살당하는 참변소식까지 접했다.

  • 작성자 23.04.18 18:51

    이 두 사건은 아무리 유교적 고집불통인 그도 실의에 빠지기에 충분하였다. 그런 그에게 희망이 되었던 것은 바로 중국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리타치오와 조선인 초기 공산주의자인 이동휘, 김립 등과의 만남이다. 이들과의 교분 속에서 그는 점차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이해하게 되고 특히 사회발전의 원동력을 ‘경쟁’이 아닌 ‘부조’로 본 러시아 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상호부조론』에 큰 감명을 받았다. - 좌절에 빠진 조국독립의 성공성을 여기에서 찾으려 했던 것으로 판단 됨 - 그는 크로포트킨을 석가, 공자, 예수, 마르크스와 같이 인류 5대 사상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할 정도로 그를 찬양하였고 1927년 9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의 창립총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할 만큼 이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45년 동안이나 끊임없이 연구하고 꿈꾸어 온 그의 가치관, 사상이나 신념들이 완전히 무너지는 깜깜함 속에서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무정부주의는 그를 그 깜깜함 속에서 건져내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이다.여하튼 1926년 무정부주의자 국제적 동방연맹에 가입하여 운영 자금조달을 위해 활동하다가 1929년 체포되어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옥사하기까지 그는 마지막 희망을

  • 작성자 23.08.27 17:39

    무정부주의에 모든 것 걸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는 마냥 부정적으로만 평가되었던 그의 무정부주의 사상에 대해서 그가 무정부주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은 그 당시의 조국 독립을 빙자한 폐단과 아울러 객관적인 재해석의 필요가 요청되는 부분들이다. - - - - 동지 이회영의 안내로 서간도로부터 북경으로 가서 3.1운동 때까지 약 4년 간의 체류생활을 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 그의 독립사상을 소설형식으로 표현한 중편소설『꿈하늘』과『조선사』를 집필하였다. <참고문헌> 1. 최영 저『근대 한국의 지식인과 그 사상』문학과 지성사. 1997 2.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한겨레신문사 3. 『한국의 역사인식(上)』창작과 비평사 4. 신채호 저 『조선상고사』인물연구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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