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든사람(지식인)이라고 믿는 몇몇 분이 모여 또 아무 쓸데없는 짓을 벌이려 한다. 그분들이 늘어놓는 여러 가지 ‘주장’은 이미 오래 전에 거짓임과 억지스러움과 터무니없음이 밝혀진 지 오랜데, 때도 없이 똑같은 말을 한두 마디씩 말만 바꾸어 가며 불쑥불쑥 내뱉고 있으니 이럴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기도 숨이 차다.
요즘 들어 우리 말이 더욱 빠르게 엉뚱한 길로 빗나가고 있어서 걱정들인데 죽어 가는 우리 말을 살리는 일에 힘을 모으기는커녕 아예 숨통을 막으려 드니 정말 이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인지, 아니면 우리 나라 사람 탈을 쓴 딴나라 사람인지 갈래지어 알기도 어렵다.
진작, 옳고 그름이 판가름난 이야기지만 한 번 더 그 사람들의 잘못된 눈을 바로잡아 준다는 뜻에서 몇 가지만 간추려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려 한다. 이 글을 읽고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면 ‘글소경(문맹)’이란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한문글자를 모르는 게 글소경이 아니라 한문글자를 알아도 우리 말을 듣고 뜻을 모르는 게 정말 글소경이라 해야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1. 우리 말이 지니고 있는 남다른 점
⑴ 우리 말 짜임새
우리 말 짜임새가 뜻글자와 소리글자를 함께 쓰도록 되어 있다고 하는 데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말과 글이 무엇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어린애도 다 아는 것을 이른바, 제법 먹물깨나 먹었다는 ‘든사람 (지식인)’이 모른다는 게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
말이란 생각과 뜻과 느낌을 사람 목소리로 나타낸 것이고 글자란 말소리를 담아 두는 그릇이다. 따라서 말소리만 제대로 담아 둘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좋은 글자다. 목소리를 본디 소리 그대로 담아 둘 수 있고 나중에 끄집어내었을 때 처음 담은 소리가 그대로 되살아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글자는 없다. 소리를 담는 데 ‘뜻글자’니 ‘소리글자’니 하는 것은 부질없다.
우리 말 가운데 열에 일여덟이나 차지한다고 말하는 한자말을 ‘눈으로 보는 말(시각성 언어)’로, 그리고 배달말을 ‘귀로 듣는 말(청각성 언어)’로 갈래지어 말하는데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니 말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지만 눈으로 보는 말이니 귀로 듣는 말이니 하는 것은 억지다. 아무리 머릿속에 한문자가 몇만 자씩 들어 있고 만 권 책을 읽었다 하더라도 이런 사람을 가리켜 ‘머릿속이 빈 사람(무식한 자)’이라 한다. 이 세상 어디에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소리를 볼 수 있는 눈도 없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말소리’도 없다.
우리 말 속에 한자말이 많은 것은 틀림없다. ‘낱말 모은 책 (사전)’을 보면 열에 예닐곱이 한자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식구와 가족’, ‘가구주와 세대주’ 따위 ‘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말이 함께 실려 있다. 어떤 나무나 벌레 이름은 대여섯 가지 다른 이름이 모두 실려 있다. 이러니 한자말이 많아 보일 수밖에 없다.
서양 문화, 문명과 함께 들어온 일본 한자말 말고 나날말(생활 용어)로 쓰는 한자말은 거의 다 겨레말이 있다. 겨레말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한자말도 있지만 그밖에 우리 말이 있는 남의 말(외국어)은 우리 말살이 속에서 모조리 솎아내야 한다. 그런데도 아무 쓸데없는 한자말에 매달려서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으니 옆에서 보기에 하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말이란 본디 귀로 듣는 소리다. 눈으로 보는 말이란 있을 수 없다. 귀로 듣고 뜻을 모르는 말은 우리 말이 아니다. 우리 말의 짜임새가 소리글자(한글)와 뜻글자(한문글자), 두 가지를 아울러 쓰도록 되어 있다는 것은 멀쩡한 거짓말이다.
⑵ 한글과 한문글자 섞어 쓰기
어느 나라말이건 다 겨레말과 들온말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이 때 들온말은 그 뿌리가 어디이건 받아들인 나라의 나라말이고, 나라말로 자리잡았다면 반드시 나라 글자로 써야 한다. 일본에서 들어온 말은 일본 글자인 ‘가나’로 쓰고, 미국에서 들어온 말은 로마 글자로 적고, 아랍에서 들어온 말은 아랍 글자로, 몽골에서 들어온 말을 몽골 글자로 쓴다면 글자살이(문자 생활)는 끝장나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자말도 우리 말이 되었다면 마땅히 우리 글자로 적어야 한다.
또 한글과 한문글자를 섞어 쓰면 서로 모자란 데를 채워 주는 새의 두 날개요, 수레의 두 바퀴라 하지만 한 쪽은 참새 날개요 다른 쪽은 까마귀 날개라면, 한 쪽 바퀴는 둥글고 다른 쪽은 네모꼴이라면 어떻게 될까? 다 거짓이고 억지다.
한문글자를 섞어 쓰자는 말은 바로 한자말을 쓰자는 말인데 다들 알다시피 남의말을 쓰면 겨레말이 죽는다. ‘메, 가람, 미르, 미리내’가 한자말 ‘산, 강 용, 은하수’에 밀려서 가뭇없이 사라졌다.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같은 말은 아직 살아 있지만 ‘증조부, 고조모’는 겨레말을 찾을 수 없다. ‘가시아비, 가시어미, 가시집’도 ‘장인, 장모, 처가’에 쫓겨나 이젠 옛말로 나앉았다. 겨레말을 깡그리 내쫓고 나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⑶ 갈말과 솜씨말 (학술용어와 전문기술용어)
갈말과 솜씨말은 거의 다 한자말이다. 일본 한자말이고 중국 한자말이다. 몇몇 나비 이름이나 물고기 이름, 산짐승 이름, 나무 이름, 약풀 이름, 토박이 꽃 이름 따위는 우리 말이 있지만 서양 문명과 서양 학문에 쓰는 갈말이나 솜씨말은 우리 말이 없다.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 서양 학문과 문명이 우리 것이 아니고 우리 말 이름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서양 학문이나 기술과 함께 일본과 중국에서 만든 한자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이들 서양말을 받아들이면서 소리를 따 들온말로 삼기도 하고 뜻으로 풀어 한자말을 새로 만들기도 했는데 어떤 말을 만드는 데는 몇십 년이 걸리기도 했고, 말도 여러 차례 다듬어서 비로소 들온말 자리에 앉혔다. 일본에선 제대로 들온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손가락 한 번 꼼짝하지 않고 아주 손쉽게 중국과 일본에서 만든 한자말을 공짜로 끌어들였다. 한때는 우리도 우리 말로 갈말과 솜씨말을 지어 쓰려 했지만 ‘한문글자에 찌든’ 사람들이 발거리 놓는 바람에 다시 일본 한자말을 쓰고 있는 오늘이다. ‘이름씨’를 ‘명사’로, ‘세모꼴’을 ‘삼각형’으로, ‘셈본’을 ‘산수’로, ‘말본’을 ‘문법’으로 쓰는 것이 그 보기다.
갈말과 솜씨말을 한글로 쓰면 뜻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은 어쩌면 맞는 말인지 모른다. 한문글자 뜻을 짜 맞추거나 소리를 따 만든 일본 한자말을, 우리 한문글자 소리대로 읽고 한글로 적으니 이런 일이 생긴다. 우리도 마땅히 우리 말로 이름을 지어야 했다. 그런데 힘들이지 않고 남이 애써 만든 말을 슬며시 가져올 생각만 하니 어찌 제대로 된 말을 쓸 수 있기를 바랄 것인가?
일본말 쓰레기를 주워와 쓰려고 어린애한테 한문글자를 배우라 하지 말고 갈말이나 솜씨말을 우리 말로 새로 짓는 것이 백 번 옳은 일이다. 또 일본 갈말과 솜씨말에 매어 있는 동안에는 우리 학문과 우리 기술은 새로 지어낼 수도 없고 깊어질 수도 없다. 언제나 일본 사람들이 무엇을 만들어 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래도 한자말을 써야 한다고 우길 것인가?
⑷ 같은소리 뜻다른 말 (동음 이어)
한문글자는 몇만 글자가 되든 우리가 읽는 소리는 800가지 안팎이다. 따라서 한자말은 읽는 소리는 같으나 뜻이 다른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한자교육추진국민총 궐기대회’ 선언문 뒤에 붙여 놓은 <한자교육 자료 3>을 보면 한자말 여섯 낱말을 보기로 들고 같은소리 한자말을 늘어놓았는데 적게는 16낱말이고 많게는 22낱말이다.
되풀이하거니와 말소리를 듣고 뜻을 알 수 없는 말은 우리 말이 아니다. 따라서 한자말은 우리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은 뻔하다. 우리 말만 쓰면 모든 어려움이 깨끗이 풀린다. 한문글자를 익혀서 이들 한자말 뜻을 갈래지어 알려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한문글자만 십 년을 익혀도 될 성싶지 않다. 또 한문글자를 익혔다 한들 글자 뜻으로 한자말 뜻을 풀어낼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회사(會社)’와 ‘사회(社會)를 글자 뜻으로 풀이해 보라.
보기로 든 한자말을 보자. ‘고사’는 ‘古事, 故事, 孤寺, 考査, 告祀, 枯死, 古史’ 따위 스무 두 낱말이다. 어쨌거나 이 따위 한자말은 우리 말이 아니다. 우리 말을 찾아 쓰겠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가? ‘옛일, 옛 이야기가 담긴 일, 외딴 절, 시험, 말라죽음, 옛 역사’라 하면 누구나 다 곧바로 말뜻을 알아차린다. 우리 말이기 때문이다.
또 고사(古事)라 하면 유식하고 ‘옛일’이라면 무식한가? 고사(古寺)라 해야 철학이 있고 ‘옛 절’이라 하면 철학이 없는가? ‘강변(强辯)’ 이라야 사상이 있고 ‘억지’라 하면 사상이 없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없다. 그리고 ‘억지 강변’이란 말도 있는가? 우리 말을 제대로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야로’도 같은소리 말이 여럿이다. ‘야로, 冶爐, 夜露, 夜路, 野路, 野老’인데 ‘야로’는 남에게 숨기고 있는 좋지 않은 셈속(흑막)’이란 겨레말이고 나머지 한자말은 ‘풀무, 밤이슬, 밤길, 들길, 시골 늙은이’다. 겨레말을 쓰면 될 일을 한자말을 끌어들이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긴다. 또 쓸데없는 한자말을 쓰기 때문에 알토란 같은 겨레말 ‘야로’가 사라지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2. 겨레 문화 이어받기와 꽃피우기
⑴ 옛 겨레 문화가 담긴 한문책
고려 때부터 조선이 끝날 때까지 우리 한아비(조상)들이 남겨 놓은 책은 거의다 한문글자로 씌어 있다. 글월은 ‘옛 중국 글월(한문)’이다. 이 책 속에는 겨레얼과 겨레삶과 겨레 생각, 겨레 꿈 따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 조각이라도 허술히 여길 수 없는 보물이다.
반드시 익히고 이어받고 아끼고 잘 갈무리해야 한다. 다만 모든 겨레가 다 ‘한문’을 배워서 그런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두시언해’나 ‘월인천강지곡’과 같이 우리 말로 뒤쳐서(번역하여) 읽도록 하면 그만이다. 중국 사람이라고 모두 ‘한문고전’을 읽을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읽지도 않는다. 알아야 할 것은 책 속에 들어 있는 속내(내용)지 한문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산스크리트 말글을 알아야 부처님이 말씀하신 참뜻을 깨닫는 것도 아니고 히브리 말글을 알아야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문 공부를 해야 동양(중국) 고전이나 우리 고전 속에 담겨 있는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문은 동양 학문이나 동양 철학을 연구할 사람만 깊이 공부하면 된다. 그뿐만 아니라 한문 고전은 실용 한자 몇천 자를 익혔다고 해서 읽고 뜻을 풀이할 수 있는, 그렇게 만만한 책이 아니다.
⑵ 우리 한아비(조상)가 만든 한문글자
글자란 말소리를 담는 그릇임을 여러 차례 말하였다. 따라서 우리 말소리를 담을 수 없는 글자를 우리 한아비가 만들었다는 말은 억지다. 중국 옛 책에 ‘동이족(우리 겨레)’이 한문글자를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느니 제주도 ‘똥돼지’를 본 딴 ‘집 가(家)’ 자를 보면 안다느니 하지만 뒷간에 돼지를 키우는 곳은 중국 변두리,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있고 ‘동이족’이 중국말을 썼다면 모르겠거니와 배달말을 쓰는 겨레가 한문글자를 만들었다는 말은 터무니없다.
다만, 일본 사람이 만든 멍울 선(腺), 짤 착(搾), 비뚤어질 왜(歪) 같은 국자(國字) 처럼, 우리 나라에서 만든 국조자(國造字)도 있다. 논 답(畓), 시집 시(媤), 사람 이름 돌(乭) 따위다. 하지만 한문글자를 우리 한아비가 만든 것은 아니다. ‘청소년 문제’를 ‘명심보감’으로 풀어야 한다는 말도 뜻은 좋으나 ‘명심보감’을 꼭 ‘한문’으로 쓴 옛 책으로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탈무드’를 읽으려고 우리 겨레가 다 이스라엘 말글을 배워야 한다는 말과 똑같다. 우리 말로 옮겨 놓은 명심보감이 책방에 널려 있다.
⑶ 붓글씨와 사람 됨됨이 (서법 계승 발전으로 인격 함양)
전에는, 충성 충(忠) 자를 가르치면 충신이 되고 효도 효(孝) 자를 가르치면 효자가 된다더니 이번엔 또 ‘붓글씨(서예)’를 가르쳐서 ‘인격을 함양’하고 ‘인성을 교육’해야 한다고 말한다. 붓글씨를 배우고 부지런히 쓰는 것이 몸과 마음을 닦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 참말일지라도 굳이 한문글자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글을 쓰나 한문글자를 쓰나 그게 그거다.
한문자가 있는지도 모르는 서양 사람 가운데도 ‘충신’은 있었고 글자라는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두메 숲 속 사람들 가운데도 ‘효자’가 없으란 법은 없다. 옛 중국 ‘요순’ 시절에도 ‘도척’이 있었고 한문자만 쓰는 중국에도 ‘역적’과 ‘불효자’가 있었다. 한문글자를 모른다고 모두 역적이 되고 불효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한문자가 모든 어려움을 풀어 주는 용구슬(여의주)은 아니다. 아직도 도깨비 방망이를 믿는 어른이 있다니 부럽기도 하다.
3. 학문을 가르치는 연모 (교육적 효과 차원)
⑴ 먹물 묻은 말, 생각 담긴 글 (지식 용어, 지적 문장)
옛날에는 한문글자와 한문이 학문의 시작과 끝이었다. 그 밖에는 학문이란 게 없었다. 우리 나라에서 이야기다. 어쩌다가 다른 학문이 들어오면 ‘잡술’이라 해서 못하게 밀막았다. 이제는 예와 다르다. 글자란 학문을 비롯한 모든 것을 배우는 연모일 뿐이다. 뜻글자가 어떤 남다른 구실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쓸모 없고 값어치 없는 ‘한문글자’에 매달릴 까닭이 없다.
또 뜻글자를 익히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도 억지 소리다. 모든 문화와 학문이 말과 생각에서 태어나고 말과 생각으로 깊어진 것이고, 글자란 오직 문화와 학문을 제대로 담아 두는 데서 보람이 있는 것이다. 말과 글자의 뜻과 구실을 알면 이 따위 억지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한자말을 ‘지식 용어’라 하고 한문을 ‘지적 문장’이라 하는데, ‘화분(花粉)’은 지식 용어지만 ‘꽃가루’는 지식 용어가 아니고, ‘사고 다발 지역’은 지적 문장이고 ‘사고가 자주 나는 곳’은 초등학생이나 쓰는 ‘지적 수준이 낮은’ 글월이라는 말인가? ‘도요(陶窯)’에선 ‘고려 청자’가 나오고 ‘가마’에선 장독이나 막사발이 나온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하다. ‘반 문맹이라도 좋다. 정직하게만 살아다오’ 이게 모든 어버이가 바라는 바일 것이다.
⑵ 말글 하나 되기 (어문 일치)
요즘 영어 문화권에선 ‘쉬운 영어 쓰기 운동’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 한다. 여기서 말하는 쉬운 영어란 글말을 버리고 입말로 쓰는 영어요, 어려운 영어란 입말과 글말을 함께 쓰는 영어를 말한다. 옛 봉건 군주 시대엔 어느 나라건 귀족이 쓰는 글말과 상사람(백성)이 쓰는 입말이 서로 달랐다. 그러던 것이 사람들 생각이 깨이면서 글말은 조금씩 입말로 바뀌어 왔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다. 양반들은 이른바 ‘문자(어려운 한자말)’를 쓰면서 거드름을 피웠고 상사람들은 겨레말을 쓰면서 굽실거렸다. 양반이 쓰는 말과 상사람이 쓰는 말이 달랐다. 이것이 ‘말글 다르기(어문 불일치)’다. 하지만 다 지난 이야기다. 이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똑같은 말을 쓴다. 이것이 ‘말글 하나 되기’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지적 수준’이 높은 글말(한자말)과 ‘지적 수준’이 낮은 입말(겨레말)로 갈래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말과 글이 같은 말, 한글로만 쓴 글은 초등학교 수준밖에 안 되는, ‘지적 수준’이 낮은 글이기 때문에 한문글자를 섞어 쓰는 ‘지적 문장’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어문 불일치’를 부르짖는 이분들은 아마도 조선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일 것이 틀림없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이룩한 모든 것이 한문글자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나날살이에서 쓰는 말 속에 녹아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이 인간들은 무슨 뜻인지 모를 것이다.
⑶ 한문글자는 컴퓨터용 글자
이 글 속에는 보기를 든 한자말 몇몇 낱말만 한문글자로 썼다. 이 때 한문글자 한 자를 쓰는 데 한글 스무 자를 쓰는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이 컴퓨터에 실어 둔 한문글자가 없어서 쓸 수 없는 것이 많았다. 컴퓨터를 쓰면 한문글자를 쉽게 쓸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한자말을 써야 하는 핑계로 ‘눈에 띄기(시각성)’, ‘줄이기(압축성)’, ‘말 만들기(조어성)’를 들먹이지만 이미 억지와 거짓임이 밝혀진 지 오래다. 하나하나 대꾸할 값어치도 없다. 먼저 컴퓨터를 사서 배우고, 써 본 뒤에 다시 그럴 듯하게 말을 바꾸어 이야기해 주기 바란다.
4. 온 누리 사람들과 손잡기
⑴ 아시아 태평양 문화권
‘한자 문화권’, ‘아시아 문화권’, ‘동양 문화권’에 이어 또 ‘아태 문화권’으로 이름을 바꾸어 말하면서 ‘아태 문화권’에서 두루 쓰는 한문글자를 국제 문자라 하면서 우리가 한문글자를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문화권’이란 같은 문화를 함께 누리는 나라나 겨레를 묶어서 일컫는 말이다. 어쩌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손을 잡는 일도 있는데 이 때는 문화권이라 하지 않는다. 따라서 ‘동양권’, ‘아시아 태평양권’이란 말은 있어도 ‘동양 문화권, 아태 문화권’이란 말은 없다.
아시아에는 서른 여섯 나라가 있고 태평양에 맞닿은 오세아니아에도 열한 개 나라가 있는데 아메리카를 넣는다면 훨씬 더 많아진다. 그러니 ‘아태권’이라면 쉰에서 여든 나라쯤 된다. 이런 어마어마한 아태권 안에 살면서 한문글자를 쓰지 않는 탓으로 이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으며 외톨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노리고 내세운 얄팍한 속임수가 바로 ‘아시아 태평양 문화권’이다. 하지만 아시아 태평양에 있는 수많은 나라 가운데서 한문글자를 쓰는 나라는 기껏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 뿐이다. 이런 ‘지적 문구’가 그 인간들 마음에 쏙 들지 모르겠다. ‘泰山 鳴動 鼠 一 匹 ’
‘영어 문화권’이라면 영어를 나라말로 쓰는 나라나 겨레를 묶어서 하는 말이다. 같은 말을 쓴다는 뜻이다. 하지만 ‘로마 글자 문화권’ 이란 말은 없다. ‘로마 글자’를 빌려쓰는 나라는 많다. 영국을 비롯하여 ‘이태리, 러시아, 도이치, 프랑스’ 이 밖에도 수십 나라가 다 로마 글자를 쓰지만 ‘로마 글자 문화권’이라 하지 않는다. 다 서로 다른 제나라 말을 쓰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자 문화권’이란 말도 없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가 같은 한문글자를 쓴다는 것을 빌미로 그렇게 믿게 하려는 노림수이지만 세 나라가 제가끔 서로 다른 제나라 말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세 나라가 쓰는 한문자가 다 같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에선 옛 중국 글자인 ‘정자(번체자)’를 쓰는데 중국에선 ‘간체자(소리글자 구실을 하도록 줄여 만든 글자)’를 쓰고 일본에선 ‘약자(줄인 글자)와 대용자(글자 뜻은 생각하지 않고 소리가 같은 여러 글자를 모아 그 가운데 하나를 대표 글자로 쓰는 것)와 국자(일본에서 만든 글자)’를 쓰니 한, 중, 일 세 나라에서 쓰는 한문글자는 서로 다른 것이 많다. 또 같은 한문글자라도 읽는 소리와 ‘낱말’과 ‘낱말 뜻’이 서로 다른 것도 매우 많다. 한자 문화권이란 터무니없는 거짓이다.
⑵ 다른 나라에서도 한문글자를 공부한다
쓸모가 있다면 아무리 말려도 배우고야 만다. 쓸데가 없다면 아무리 많이 배워도 바로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한문글자를 배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한자말을 쓰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제가 하고 싶어하고 스스로 배우고 싶어한다면 아무도 말릴 사람은 없다.
다만, 배울 사람만 배우고 쓸 데만 써라는 말이다. 어린애들에게 억지로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 말 속에 섞어 쓰면 안 된다는 말이다. 아무 데서나 자랑삼아 한자말을 쓰고 한문글자를 쓰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 말을 멍들이고 우리 말을 죽이지 말라는 말이다.
서양 여러 나라에서 한문글자를 공부한다지만 우리가 쓰는 한자말이나 한문글자가 아니라 중국 말글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나서서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칠 까닭도 없다. 또 서양 사람이 중국말글을 배운다는 게 마치 중국말글이 대단해서 배우는 것처럼 말하지만 미국이나 영국 사람 가운데는 한국말을 배우는 사람도 많고 아프리카 깊은 두메 산골에 사는 몇 안 되는 사람들만 쓰는 말을 배우는 사람도 많다. 다 쓸모가 있어서 배우고 싶어서 배운다.
⑶ 일본과 중국에서 오는 구경꾼
일본에서 놀러 온 스무 살도 안 된 학생에게 방송 기자가 묻는다. “우리 나라에서 겪은 일 가운데 가장 불편한 점은 무엇인가요?” “예, 모든 길 알림판과 가게 이름이 한글로만 씌어 있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어요.” 이래서 ‘모든 도로 표지판과 가게 이름을 한문자로 써야 한다.’고 말을 맺는다. 그러면 부랴부랴 많은 돈을 들여서 ‘표지판’도 고치고 ‘간판’도 새로 만들어 단다.
88올림픽 때 우리는 일본과 중국에서 몇 사람이 왔는지 똑똑히 보았다. 도로 표지판을 고치는 데 쏟아 부은 돈을 몇 푼이나 건졌는가? 그래도 ‘관광’ 이야기만 나오면 어김없이 이 말이 나온다. 구경꾼을 끌어들이려면 구경꾼들이 ‘볼거리’와 ‘살 거리’를 만들어 내야지 우리가 한문글자를 쓴다고 몰려드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제 나라에서 늘 보던 것이 아니고, 사고 싶어하는 것도 제 집에서 늘 쓰던 것이 아니다. 색다른 것이다.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 한문글자를 구경하러 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한문글자를 쓰는지 안 쓰는지 살펴보러 오는 것도 아니다.
‘장사(무역)’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장사하는 사람이 배우든지 ‘전문 통역관’을 길러야 한다. 우리 겨레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몽땅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 보따리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웬 한문글자 타령인지 모를 일이다. 그 옛날, 중국 사람들보다 더 한문을 잘하던 우리 벼슬아치들이 중국에 갈 때나 일본에 갈 때는 반드시 ‘역관(통역)’을 데리고 갔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는가?
5. 마무리
경제가 무너져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일이 눈앞에 닥쳐온다. 눈 뜬 사람은 다들 알고 있는데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꿈속에서 잠꼬대나 하는 사람도 많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일본 ‘문화 종살이’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우리 말이 어려운 고비에 놓였기 때문이다.
한자말, 일본말, 서양말이 우리 말에 속속들이 파고들어 뿌리를 갉아먹고 있다. 일본말 쓰레기가 우리 말밭을 어지럽히고 한자말이 우리 말로 둔갑하여 우리 말 안방을 넘보고, 서양말 얼룩이 우리 말을 더럽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뜻 있는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야 할 때다.
초등학생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바르고 고운 우리 말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한문글자 가르치는 일은 하루빨리 그쳐야 한다. 영어 가르치기도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 말이 먼저다. 초등학교에서 우리 말을 올바로 가르치고 난 뒤 중학교에 가서 한문글자를 배우든 영어를 배우든 배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지금처럼 영어나 한문글자를 억지로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
때를 늦추었다가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이 뜻밖에 일찍 닥칠 수도 있다. 소매를 걷어 부치고 모두 힘을 모아 나서자. 이대로는 안 된다. 남에게 미루어서도 안 되고 내일로 미루어서도 안 된다. 남이 할 일이 아니고 내가, 우리가 할 일이다. 내일 할 일이 아니고 바로 오늘 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