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서공 묘갈명(主簿徐公墓碣銘)
[생졸년] 1657년(효종 8)~1706년(숙종 32) / 향년 4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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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적 도성 서쪽에 살면서 서씨와 이웃하여 공의 형제 세 사람을 보았다. 모두 헌걸찬 어른이었는데 공이 가장 막내였다. 모여 앉을 때면 자제들이 그 곁에 줄지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즐기느라 온화한 기운이 가득하였으나 그 집을 살펴보면 몹시 가난하였다.
공이 늙자 더욱 곤궁해지고 관직은 낮고 녹봉은 적었으나 만족스레 살았다. 부인은 몸소 두레박을 들고 물을 길었으나 역시 불평하지 않아 이웃 사람들이 어질다고 여기며 모두 “이분이 일곱 아들을 두었다. 하늘의 보답은 아마도 이것이리라.”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공은 휘가 문택(文澤), 자가 윤장(潤章)이다. 의금부 도사 휘 진리(晉履,1622~1648)의 아들이며 달성위(達城尉) 휘 경주(景霌,1579~1643)의 손자이며 판서 약봉(藥峰) 휘 성(渻,1558~1631)의 증손이다. 모친은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니 그 부친은 부제학 경여(慶餘,1596~1653)이다. 외조는 연평(延平) 충정공(忠定公) 이귀(李貴,1557~1633)이다.
공(公)은 숭정 정유년(丁酉年,1657, 효종 8) 태어나 숙종 정묘년(丁卯年,1687, 숙종 13) 진사가 되었다. 기사년(己巳年,1689) 안전(安𤩴)이라는 자가 율곡(栗谷,李珥,1536~1584), 우계(牛溪,成婚,1535~1598) 우암(尤庵,宋時烈,1607~1689) 세 선생을 모욕하자 공이 소수(疏首)가 되어 변무하였다.
마침 우암이 사사(賜死)하는 명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문하의 사람들이 화(禍)를 재촉할까 두려워 저지하였기에 상소는 완성하였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갑술년(甲戌年,1694) 성균관 집강(成均館直講,正五品 벼슬)이 되어 상소를 올려 나라의 역적을 옹호한 영의정 남구만(南九萬,1630~1711)의 죄를 성토하니, 공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사림(士林)에 큰 시비가 있으면 공의 집안이 번번이 그 사이에 참여하였다. 신사년(辛巳年,1701)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바뀌고 광흥창 봉사, 평시서 직장(平市署直長)으로 옮겼다. 6품으로 조용되어 다시 광흥창 주부가 되었다. 병술년(丙戌年,1706) 11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공은 용모가 후덕(厚德,어질고 덕이 많음)하고 기운이 온화하였으며, 마음가짐과 일처리가 한결 같이 진실하여 시기하거나 성내는 사심이 전혀 없어 느닷없는 역경을 당하더라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평소 문을 닫고 조용히 지내며 구차하게 구하거나 함부로 영위하는 일이 없었다.
곤궁(困窮)하고 굶주린 사람을 보면 다친 사람 보듯 슬퍼하여 먹던 음식을 주기도 하였다. 어려서 양친을 잃고 형님을 아버지처럼 섬겼으며,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제 입을 잊고 바쳤다. 청주(淸州)에 살 적에 누이의 집과 거리가 거의 1식(息,30리)이었는데, 달마다 서너 번 찾아갔으니 그 우애가 이와 같았다.
부인은 본관이 남양(南陽)으로 목사 홍석기(洪錫箕,1606~1680) 공의 손녀이며 진사 일우(一宇,1628~?)의 딸이다. 집에서는 효녀였고 공에게는 어진 내조자였다. 공보다 5년 먼저 세상을 떠나 공과 함께 양근(楊根) 대곡(大谷) 갑좌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 종집(宗集)은 목사, 종흡(宗翕)은 현령, 종섭(宗燮)은 이조 참의, 종업(宗業)은 도사, 종엽(宗曄)은 현감, 종급(宗伋)은 호조 판서, 종협(宗浹)은 목사를 지냈다. 종집의 아들은 명관(命寬)이고 딸들은 오질(吳瓆), 이규신(李奎臣)의 아내이다.
종흡의 아들은 명최(命最)와 명재(命宰)이고 딸은 윤사연(尹師淵)에게 시집갔다. 종섭의 아들은 명원(命元), 명천(命天)이다. 종업의 아들은 명응(命應), 명능(命能)이고 딸은 이사원(李思元)에게 시집갔다. 종엽의 아들은 명인(命仁), 명전(命佺)이다.
종급의 외아들은 명현(命顯)이고 임매(任邁)와 김숙행(金肅行)은 사위이다. 종협의 아들은 명직(命直), 명권(命權)이다. 공은 처음 종협의 원종 공훈으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종급이 추은(推恩)하여 추가로 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은 임종을 앞두고 아들들에게 효도하고 근신하라 경계하고, 또 “나는 살아서 몹시 곤궁하였으니 오직 너희들이 명예와 행실을 닦아 사람들로 하여금 내게 좋은 자손이 있는 줄 알게 하면 충분하다.” 하였다. 참의 형제가 와서 명을 청하기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시경》에〈상체〉를 노래하였고 / 詩歌常棣
역사에 양춘(楊椿)과 양진(楊津)을 기록했네 / 史書春津
예전에 그 이야기 들었는데 / 昔聞其語
지금 내 이웃에서 보았네 / 今見我鄰
기운은 순후하고 안색은 온화하니 / 氣醇色和
참으로 가까이할 만하였네 / 展也可親
관대하면서 요약으로 처신하니 / 寬以處約
벼슬한 것은 가난 때문이었네 / 仕則爲貧
집안이 쓸쓸해도 / 環堵蕭然
푸른 수건으로 그런대로 즐거웠네 / 聊樂綦巾
선행에 대한 하늘의 보답은 / 維天報善
그 자신에게 내리지 않았네 / 不于其身
그 보답은 무엇인가 / 其報維何
자손이 많은 것이라네 / 子孫振振
관모와 패옥 휘황하고 / 冠佩有煒
어떤 이는 귀한 수레 탔네 / 或朱其輪
그 말씀 참으로 선하니 / 有言孔善
힘쓸지어다 후세 사람이여 / 勖哉後人
내가 곧은 돌에 명을 새겨 / 我銘貞石
먼 후세에 보이노라 / 庸眎無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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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주부 서공 묘갈 :
이 글은 서문택(徐文澤)의 묘갈명이다. 서문택의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윤장(潤章)이다. 1657년(효종 8) 6월 1일 태어나 1706
년(숙종 32) 11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시경에 상체를 노래하였고 :
《시경》〈상체〉는 형제의 우애를 노래한 시다.
[주03] 양춘(楊椿)과 양진(楊津) :
남북조 후위(後魏)의 형제로 우애가 돈독하였다.《北史 卷41 楊播列傳》
[주04] 푸른 수건 :
《시경》〈출기동문(出其東門)〉의 “흰 옷에 푸른 수건을 쓴 여인이여. 그런대로 나를 즐겁게 하네.[縞衣綦巾, 聊樂我員.]”라는 구
절을 인용한 것이다. 흰옷과 푸른 수건은 가난한 여인의 옷으로, 여기서는 아내를 말한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