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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스러운 협동의 열매
새마을지도자반 제66기 강 상 익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면 장전리 360)
저희 마을은 제주시 서남 쪽 13km 지점에 위치한 전형적인 제주도의 산 간 부락입니다.
총 호수 163호가 전부 농가이며 인구는 856명으로 10 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 낙후 한 마을로서 불명예스럽게 우리 지방에서 저희 마을을 가리켜 “재완지 방석”이라고 불렀으며 가난을 숙명으로만 체념해야 했던 실로 안타까운 마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48년 제주 4·3 폭동 사건 당시 마을은 온통 잿더미가 되었고, 마을을 이끌어 오던 청 장년 무려 106명의 목숨마저 학살 당한 처참한 과거를 가진 마을로서 모함과 질투가 뒤범벅이 되어 협동이 씨앗을 심어 뿌리를 내리기에는 염두도 못 낼 만큼 각박한 마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새마을운동이 일기 시작하면서 양상이 달라지고 소득이 높아져 75년도에 대통령 각하 하사 금 1 백 만 원을 지원 받고 자립 마을로 승격되었으며 77년도에는 우수 마을로 선정되어 1 백 5 십 만 원이 각하 하사 금을 두 번째 지원 받아 오늘에는 전 주민이 똘똘 뭉쳐 활기차게 전진하는 새마을로 72년도 호 당 소득 26만 원이었던 것이 78년 말 호다 소득 236만 원으로 급성장을 보아 부자 마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이 있기까지는 말 못할 고난과 눈물겨운 사연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8살 되던 해 제주 4·3 사건으로 아버님과 전 재산을 잃게 되면서 모진 가시밭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해변 부락을 전전하며 문 전 걸 식으로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새우 잠을 자야 했고 살을 에는 엄동설한 추위에도 산에 올라가 숯을 구워가며 「톱밥, 쑥 떡으로 배를 채워야 했던 것이 저의 어린 시절 이였습니다.
차츰 나이가 들면서 남의 집 밭 갈기, 김 매기, 나무 패기 등으로 고용살이를 해가며 한 푼 한 푼 저축을 하고 밤이면 등잔 불 밑에서 독학에 몸부림을 쳤습니다.
저의 동갑 친구들이 대학 4학년에 다닐 때 귀일 중학교 3학년 2 학기 편입 시험을 치러 무난히 합격되어 6개월 간 학교생활로 중학교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당시 제 나이 22살! “키다리 중학생, 꺽대 중학생!” 나이 어린 같은 반 학생들의 조롱과 놀림도 수업이 당하였지만 배움에 굶주린 저에게는 아랑곳없었습니다.
<제대 비 600원으로 이룩한 감귤농장>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군에 입대하여 1963년도에 제대하였습니다.
3년 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할 때 당시 저에게 주어진 제대 비가 600원! 친구와 어울려 소주라도 한 잔 한다면 모자랄 적은 돈이었지만 맨 주먹 뿐인 저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은 큰 자본이었습니다.
6 백 원의 제대 비로 새끼 돼지 2마리를 사다가 온 정성을 다하여 키운 보람으로 탱자 씨앗 2되 살 수 있었고, 살아간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으며 마당 한 구석에 파종한 탱자 묘목에 갈귤 나무를 접목 4 천 5 백 여 본의 감귤 묘목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장전 마을에는 서북풍이 심하게 닿아 감귤 재배가 불가능한 것으로만 알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감귤 묘목을 가꾸어오면서 체험한 것은 방풍림을 잘 조성하면 우리 마을도 감귤 재배 적지가 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4천 5백 본의 감귤묘목을 판매한 1백 2십 만 원의 자본으로 마을에서 700m 쯤 떨어진 속칭 「도깨비 수덕」 불모지 9 천 평을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가시 덩굴과 잡목이 뒤엉켜 소름이 끼칠 정도 으슥 으슥한 「도깨비 수덕」을 샀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자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집 이야기로 화제가 된 것입니다.
「아무개 미쳤나 봐.」「보리밭 몇 마지기 사서 보리밥이나 배불리 먹을 일이지」「아니 그곳에 뭐 밀감 나무, 두고 보라 구」「안 될걸 안 돼」 가혹하리 만큼 비웃는 차가운 조소와 멸시는 나의 가슴 속에 못이 박혔지만 「두고 보아라」「한 인간의 무서운 힘을 보여주고 말리라.」라는 굳은 의지로 개간하였습니다.
「황무지 개간」 말하기는 쉽지만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몇 배나 더 어려웠고 손과 발이 할퀴고 찢겨지고 멍이 들었고 몰골은 삼복의 햇볕에 타다 남은 나무 토막처럼 그을려 자신이 자신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우두커니 서서 「이 미친놈! 바보 천치야 너와 같은 돌대가리가 이 세상에…….」 자신을 나무라며 살아간다는 사실에 대하여 저주하기도 해 보았습니다.
「용기를 내고 끝을 봐야 해」 여기서 중단하면 비겁한 인간이야, 그러면서 다시 곡괭이 자루를 잡곤 했습니다.
땅 두더지가 되어 3년 간 개간을 마치고 67년도에 1 천 5 백 평에 밀감 나무 450 본을 정식 해서 70년도에 1 천 3 백 관을 수확하여 1 천 4 십 5만 원의 소득을 보게 되면서 부지런하고 끈기 있게 노력한다면 누구든 절망이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과를 보고 따라온 주민들>
이처럼 가난을 물리쳐 보겠다는 일념으로 제 자신을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에서 곁눈질로 저를 보던 마을 사람들도 이해하게 되었고 한 사람 두 사람 자갈밭을 치우고 불모의 땅을 일궈가며 감 귤나무를 심기 시작하였으며 74년도 주민 총회에서는 새마을 지도자란 무거운 멍에를 걸머지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저는 남을 헐뜯고 모함이나 늘어놓으면서 트집 잡기 좋아하는 주민들의 퇴폐적인 사고방식을 어떻게 던 고쳐 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 가 호 호를 방문하면서 주민들과 대화를 통하여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일에 자신의 의견이 반영됨으로 해서 우월감을 갖고 참여 의식을 고취 시키려는 제 나름대로의 착상에서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정신 개혁에 힘을 기울인 결과 어느 정도 달라져 갔습니다.
저는 첫째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으로 연결되는 사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여 농가 소득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저의 감귤 재배 체험을 토대로 감귤 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고 개발 위원회의 협의를 거쳐 마을 총회를 소집하고 감귤 원 조성 사업을 벌이자고 사업 계획을 제시 하였습니다 만, 몇몇 사람들의 「이젠 늦었어, 자본이 있어야지 그간에 무엇 먹고 사나」하며 심고 싶은 사람들이나 심을 일이지, 막무가내로 호응을 얻지 못하여 첫 계획은 백지화되고 말았습니다. 실망도 대단하였습니다. 돈 많이 벌고 잘 살아 보자는 데 이해가 안 되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허나 저는 좌절하지 않고, 뜻있는 농가들을 찾아다니면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개인 설득을 편 결과, 38명으로부터 한 번 해 보겠다는 동의를 받게 되고, 38명이 모여 장전 감귤 작목반을 조직, 반장의 책임까지 맡았습니다.
그해 종묘 상에서 탱자 씨앗 4 가마를 공동으로 구입하고 작목반원에게 4되씩 분양해 육묘 하도록 지도해 나갔습니다. 이듬해 눈 접을 실시하여 좋은 성적으로 묘목을 확보하게 되면서 임야지 개간, 방품림 식재, 축장 시설 등 감귤 단지 조성 사업에 따른 기반 시설 바람이 서서히 일기 시작하였으며, 감귤 재배에 소요되는 농약, 농사용 자재 등을 공동으로 구입함으로서 협동의 참 뜻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협동의 힘으로 잘 살게 된 우리 마을>
먼저 착수한 농가들은 수확을 보게 되었고, 76년도에는 반원들의 눈물겨운 협동의 힘에 의하여 보조 3 백만 원과 자체 부담 1 백 5만 원 노력 동원 3 백 7 십 명이 투입되어 감귤 선과 장 50평 창고와 작목반 사무실 1 동을 완공하고 자동 선과 기를 설치하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마을에도 「하면 된다」는 새마을 운동에 시동이 걸리게 된 것입니다.
완강하게 반대하던 일부 주민들도 뒤질 세라, 감귤 재배에 열을 올리게 되었고 오늘에 와서는 125ha의 감귤 재배 면적에 7 십 2만 kg을 생산하여 제주도 내에서 최우수 단지로 감귤 소득 만도 1억 9 천만 원이란 실적으로 고소득 감귤 마을로 성장 발전하였으며 77년부터 1억 1 천 4 백 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저장 장고 38 동 연 건 평 760평을 완공함으로서 미래에 꿈을 심고 마을 주민들의 찌푸린 얼굴이 미소로 변모케 되었습니다.
<모험 없이 큰 발전 없다>
이와 같이 소득 사업을 떠나가면서 한편으로는 기반 조성 사업으로 마을의 오랜 숙원인 마을 안길 확장 및 포장 사업에 손을 대었습니다. 리어카도 제대로 못 다니는 마을 안길을 그대로 두고서 마을 발전을 기대하기란 쓰레기장에서 장미꽃을 보려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주민 총회의 결의를 거쳐 착수는 하였으나, 편입 토지 지주들의 완강한 반발과, 돌출 가옥 8 동의 가옥 주로부터 낫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반대에는 이해와 설득 만으로는 도저히 추진할 수 없었습니다. 몇 차례 주민 총회를 소집하여 해결책을 협의해 보았으나 별다른 묘안이나, 대책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모험을 걸고 내가 책임을 지자”」 이 사업은 전체 주민의 숙원 사업이다. 만약 여기서 꺾이면 앞으로는 아무 일도 못하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억지로 밀어 부칠 것을 결심하고 이튿날 주민들을 동원하여 저부터 먼저 돌출 가옥 지붕 위에 올라 지붕을 헐기 시작하였습니다. 삽시간에 8 동 지붕이 헐리고 돌맹이가 빗발치듯 날아왔습니다. 가옥 주들도 갖은 욕설을 다하고 나니 목이 쉬여 더해 볼 욕지거리가 없었던지, 지도자 놈 집을 부셔버리자며 저희 집으로 몰려들어 유리 창들을 박살 내 버렸습니다.
<인내와 집념 앞에 불가능 없어>
참고 견디자, 새마을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장벽과 시련들이 산적해 있다. 언젠가는 이해하겠지.
그날 밤도 술병을 싸들고 고집 센 강씨 아저씨 집부터 먼저 찾아가 애절한 호소로 설득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 사람 지독한 친구구먼」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정리나 잘해 주게, 다른 사람들은 내가 같이 가서 잘 이야기 해 줄께 하며 되려 도와주겠다며 뜻밖에도 협조를 얻게 되었고 아저씨와 함께 가옥 주 가정을 일일이 찾아가서 양해를 구했습니다.
「이제 별 수 있나」「나도 동의를 했어」 길 뚫게 해 주자며 아저씨가 먼저 입을 열면서 그토록 어렵던 일이 결국에는 동의를 해 주었고 안길 확장하는 데 편입되는 수천 평의 문전옥답도 주민들로부터 희사 받는 데 성공하여 온 주민이 기꺼이 참여한 가운데 노폭 7m, 연장 1,900m에 달하는 숙원 사업을 행정 당국에서 시멘트 3 백 50 포와 주민 부담 2 백 7 만원, 노력 동원 7 백 60명으로 사업 착수 2개월 만에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안길 확장 사업이 완전 성공으로 새마을 운동이 불길은 어떤 모진 비바람도, 세친 눈보라도 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훤히 트인 마을 안길을 걸으면서 주민들도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안길 확장 사업에서 얻은 값비싼 교훈은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케 되었으며 중단하지 않고 전진하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를 터득케 된 것입니다.
여세를 몰아 장전~금덕리 간 농로개설 협동권 사업을 추진키로 결심하고 두 개 마을 합동으로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이 사업을 벌임으로서 몽리 주민 1천 8백여 명의 동맥으로 농경지 85ha가 옥토로 바뀌게 되고 초등학교 학생들의 통학길이 되며, 농축산물을 수성하는 산업도로가 되는 중요한 사업이지만 워낙 험준한 코스에 물동량이 벅차 주민 자력 부담만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힘겨운 사업이여서 행정당국에 건의하여 2백만 원 지원을 확약 받고 노력부담은 부락 활당제로 책임 구간을 정하여 추진키로 하고 정지 정리와 사업비는 공동 부담키로 해서 밀고 나갔습니다. 총사업비 5백 20만 원 노력 동원 연 인원 1,420명을 투입하여 알만한 지도층 인사들이 반대를 위한 뒷전에서의 방해와 엎치락뒤치락 부락 간에 서로 얽히는 이해관계로 온갖 곤욕을 치러가면서도 노폭 8m 연장 1,200m의 대로를 개설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어렵고 고달픈 일들이 매듭 될 때마다 지도자만이 느낄 수 있는 환희의 보람, 이 때문에 외로움도 말끔히 씻겨 지고 새로운 용기가 자꾸만 나는 가 봅니다.
<못 배운 한을 장학금으로 풀어>
저는 어린 시절 너무도 불우했기 때문에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하여 6개월 동안 다녔던 모교에 75년 3월 어느 날 17년 만에 처음으로 교장 선생님의 방문을 두들기고 10만 원을 내놓았습니다. 작은 액수지만 이걸 보증금으로 해서 저의 농장 수입에서 정기적으로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사 하고 말씀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22살 나이에 중학교 졸업장을 받아들고 한없이 울었던 지난날이 되살아나 목이 메어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나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구나 하니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말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한참 후에 고개를 돌고 보니 교장 선생님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강군」「내 평생 교단에 서서 오늘처럼 감격스런 뜨거운 눈물을 흘려 보지 못했네」하며 저의 뜻을 쾌히 승낙해 주어 매년 가정이 곤란하나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지금까지 6명에게 학비 일체를 지원해 주고 여기에 보람을 느끼며 더욱 성실한 마음가짐과 검소한 생활 자세로 신뢰받는 지도자가 되어 지역 사회와 이웃을 위하여 땀 흘릴 각오를 새롭게 되새기곤 합니다.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새마을 운동>
새마을 운동은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가 봅니다. 하면 할수록 일거리는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76년 9월 18일 32명이 모여 호주머니를 털고 5만 8천 원으로 처음 시작한 새마을 금고도 부녀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한 끼 한 사람 한 숟갈 절약하는 절미 저축을 기반으로 폐품 수집 빈병 모으기 순회출자 반상회 출자 등으로 78년 말 회원 267명에 2,287만 원의 자산을 조성하여 법인 설립을 완료하고 마을 은행으로서 구실을 다하고 있으며 78년 3월 4일 전국 새마을금고 지도자 대회 시에는 제주도 실적 평가 최우수 자립금고로 선정되어 내무부장관 단체 표창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77년도 우수마을로 선정되어 지원받은 대통령각하 하사금 1백 50만 원과 주민 부담 2백 20만 원으로 지하 22평 상온 고구마 저장창고를 연 인원 870명을 투입 완공하고 마을 주민들이 매년 어려움을 겪어오던 씨 고구마 구입 걱정을 해소시켜 소득 증대를 이루게 되었고 더구나 사업 착수 단계에서는 많은 문제점과 반발이 있었지만 꾸준한 설득으로 양전동 표준 주택개량사업을 자체자금 9백만 원과 정부 융자 1천 700만 원으로 추진하여 18동 전 가구를 문화주택으로 개량해 놓아 대망의 80년대를 향하여 전진하는 새마을의 참모습이 온 마을에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장 진입로 2.1m를 개설하고 안길포장 600m, 100% 상수도 시설, 100% 전화시설, 국민 교육 헌장 탑 건립, 금고사무실, 시설 등 주민들이 협동하며 흘린 땀방울은 열매를 맺게 되었고 마을 소득의 핵심 주체인 감귤 작목반도 착실히 성장하여 공동기금 4백 20만 원으로 금년 들어 가공용 감귤집하 창고 부지 2필지 650평을 매입하여 2백평 규모의 창고시설을 추진중에 있습니다.
<잘사는 마을의 본보기가 된 우리 마을>
이와 같은 작은 일들이 이룩되면서 이웃 마을에 또는 관계 기관에 저의 활동이 알려지자, 제주교도소와 제주도 농민교육원 새마을 성공사례 강사로 위촉하여 매주 1회 시간에 모진 고난과 시련을 딛고 일어선 체험 사례를 발표하여 많은 지도자님들의 가슴 속에 새마을 운동의 참뜻을 심어가는 데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부락의 새마을 사업을 주도해 오면서 한시도 가정 새마을 운동이 선행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란 명언을 지도자 활동에 좌우명으로 삼고 항상 부족하고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대비 6백 원으로 출발, 15년 간 무한정의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 이룩한 9천 평의 감귤 농장과 목초지 2천 600평 경작지 9백 평 그리고 한우 3두 돼지 2마리를 일꾼을 두지 않고 우리 부부의 쉴 새 없는 노동력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78년 말 조 수익 1천 300만 원으로 마을 최고 소득을 울렸고 주민들도 자신의 일처럼 이웃 마을에 저의 소득을 자랑하면서 좋아한답니다.
이제 우리 마을의 새마을 불길은 협동의 메아리 속에 훨훨 타오르고 있습니다. 더 험준한 고개와 가시밭길을 넘어 영광된 낙원 마을을 기필코 이룩하여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기 위해 땀 흘리고 있으며 한 마을에 뿌린 협동의 씨앗은 영원히 피어나 탐스러운 열매를 맺으리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