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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5 - 에트루리아 베이를 점령후 켈트족 침략으로 로마가 점령되어 약탈당하다!
BC 753 년에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된 "영원한 도시" 라는 로마는 2천년 역사에서 그 이름이 무색
하게도 여섯차례나 외국 군대가 침략해 로마는 "함락되고 점령당해 약탈" 을 겪어야 했습니다.
첫 번째는 BC 390년 갈리아인이라 불리는 켈트족이고 두 번째는 410년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이며
세 번째는 455년 게이세리크의 반달족, 네 번째는 546년 토틸라의 동고트족 그리고 다섯 번째는
1084년 로베르 기스카르의 노르만족, 여섯번째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개신교 기독교도들 입니다.
로마가 갈리아인이라 불리는 켈트족에게 점령당해 약탈당하기 꼭 100년 전인 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가
2만 5천으로 그리스를 침공해 에우보이아를 파괴했으나 1만 아테네군은 마라톤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퇴했고 10년후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30만 대군과 1천척 함대로 그리스를 침공해 아테네를
점령했으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해 철수하니 아테네는 델로스동맹을 만들어 그리스의 패권국가가 됩니다.
30년 후인 기원전 450년에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방문한 로마 원로원 의원 3명은 스파르타에
더 친근감을 느꼈지 싶은데, 솔론의 법을 필사하고 페리클레스의 언동을 관찰하며 아테네 정치체제는
페리클레스라는 탁월한 인물이 아니면 유지되기 어려웠다고 본 것 같으니.... 펠로폰네소스 정쟁사를
쓰게 되는 투키디데스는 “겉모습은 민주정치지만 실제로는 한사람이 지배하는 나라” 라고 말했습니다.
로마는 독재가 싫어 기원전 509년에 왕정을 무느뜨리고 공화정으로 이행한지... 반세기
밖에 지나지 않은 나라로 세명의 시찰단은 독재의 위험을 간파했다고 여겨지니
전성기의 아테네를 시찰하고도 그 아테네의 정치체제를 모방하지 않은 이유라고 봅니다
1. 로마 최초 성문법인 12표법과 권력투쟁
귀국한 세사람 원로원 의원을 포함 10명의 위원은 “12 표법”을 만들게 되는데... 기원전 367에 이르기
까지 80년동안 귀족과 평민간의 투쟁에 결말을 내지 못하고 동요했으니.... 첫째는 농경민족인
로마인은 본래 보수적이라 변핵을 본능적으로 싫어했으니 개혁이 불가피해도 천천히 추진했고,
발전속도가 느렸지만 일단 개혁하면 함부로 바꾸지 않았으니 쇠퇴기에 접어들어도 천천히 쇠퇴합니다.
두 번째는 로마의 귀족계급은 아테네와는 달리 평민과 대립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숫자는 적지만 과거 족장 출신이었기 때문인지 아랫 사람들을
보호해 주고 살펴주며 또 귀족을 따르는 무리들을 각각 많이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로마의 평민들은 과두정치 아래에서 기회균등을 요구했지만 과두정치
자체를 바꾸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으니.... 평민들의 대표 한테도 통치권을
주라고 요구했지만 평민 모두에게 통치권을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왕정시대는 왕과 원로원 그리고 민회가 3각 관계로 균형을 유지했는데 공화정이 되면서 1년
임기 2명의 집정관을 민회에서 뽑는다고 해도 거의 원로원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선출되다 보니 권력은 원로원과 민회로 양분되는지라 서로 충돌이 일어나게 된 것인데,
로마를 뒤집어 엎으려는 전 왕과 두 아들이 죽고 이웃 라틴 부족과의 10년 전쟁에서도
승리한 결과 거국일치 체제가 더 이상 필요없게 되니 이제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평민은 해마다 전투에 나가니 농토는 황폐화 되고 경제사정은 나빠졌으니 60세 평민의 비참한 모습이
포로 로마노에 모여있던 평민들의 눈길을 끌었으니, 한때 백인대장까지 지낸 노인은 자신의 농토가
전쟁터로 변해 농장과 집이 불타고 가축도 도둑맞은지라 빚을 냈더니 이자는 높고 소득은 적어 빚을
갚을 수 없어 채권자 소유물이 되어 로마시민이지만 노예보다 더 혹사당하는 농노의 신세가 되었다는?
노인이 옷을 벗자 몸에는 전사엿음을 보여주는 무수한 칼자국 외에도 수없이 채찍에 엊어맞은
자국이 뚜렸했으니.... 민중은 흥분했고 원로원 의사당으로 몰려가자 두 집정관이 설득
하려고 했지만 진정되지 않았고 원로원 의원들이 겁에질려 나오지 않는 바람에 정족수
미달로 회의가 열리지도 못하자..... 혁명 전야에 외국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날아듭니다.
집정관 세르비우스는 포고문을 발표해 평민들과 타협을 꾀하니 “ 어떤 사람도 로마시민을 감금
하거나 쇠사슬에 묵어 시민이 집정관의 소집에 응해 병역에 지원하는 것을 금할수 없다,
군무를 수행하고 있는 로마 시민의 사유재산을 그 시민의 부재중에 팔거나 몰수해서는 안된다”
평민들은 납득하고 전장으로 나가 로마군이 승리를 하는데 개선한 병사들은 법제화를 기다렸으나
또 다른 집정관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의논한바가 없다며 법제화를 거부하니 원로원 의원
다수도 동의하는지라 민중은 분노했고 외적 침입에도 평민들은 집정관의 소집에 응하지 않고는
에스퀼리누스 언덕과 아벤티누스언덕에 틀어박혀 농성했으니 로마 역사상 최초의 파업이었습니다.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가 이그는 대결파가 우세한 가운데 독재관을 옹립해 비상사태를 선언
했으니 임기 6개월 독재관은 기원전 501년 사비니족을 상대로 싸울때 옹립한
전례가 있는데 대결파는 협상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에 독재관에는 협상파 중에서
푸블리콜라(민중파)라는 초대 집정관 발레리우스의 친동생인 발레리우스 마니우스 였습니다.
평민들은 내려와 독재관의 소집에 응했고 10개 군단이 편성되었으며 다른 민족에 개방적이면서도 공동체
의식이 강한 로마인들은 단결만 하면 외적에게는 강했으니 이번 전투도 승리햇으며 발레리우스는
독재관을 사임한후 두 집정관에게 빚을 갚지못한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금지한 법안을 제출합니다.
그러나 법안은 1인 1표제가 아닌지라 민회에서 부결되었으니 세제와 군제와 선거제도를 일체화
한 로마에서는 경제력을 가진 사람이 많은 전사를 제공할 의무가 잇는 반면에 선거에서도
더 많은 표 수를 행사했기 때문에 귀족 계급이 민회 의결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기 때문 입니다.
2. 호민관 창설과 라틴연합
법적으로는 받아들일수 밖에 없지만 정당한 권리를 거부당했다고 생각한 평민의 분노는
거세게 불타올랐으니 이번에는 멀리 떨어진 몬테사크로산에 틀어박혀
2차 농성을 벌였으니 소문은 에트루이아까지 퍼진지라 분란을 이용하려고 언제
외적이 쳐들어 올지 모르니 원로원 협상파와 평민 온건파가 서로 타협점을 모색합니다.
기원전 494년 몬테사크로 산에서는 승리의 함성이 울려퍼졌으니 평민계급의 이익과 권리수호
를 목적으로 하는 전임 관직을 설치하기로 했으니..... “트리부누스 플레비스” 라고 불리는
“호민관” 으로 이 직책은 민회가 아닌 평민게급들만 모인 평민 집회에서 선출되며 인원은
2명이었고 호민관은 집정관이 내린 결정에 거부권이 있었으며 면책 특권이 인정 되었습니다.
이로써 단결한 로마의 군사적 강력함은 주변 국가들을 압도했으니 라티움에 있는 도시들은 라틴연합
을 맺은채 대항했으나 로마는 홀로 연합군을 상대하면서도 우세를 지켰으니 결국 카시아눔 조약
(Foedus Cassianum)을 맺으니, 로마가 힘들면 라틴 연합이 도와주고, 라틴 연합이 힘들면 로마
가 도와준다는 것인데..... 따라서 로마는 단독으로 이들 라틴 연합 전체와 동등한 입지에 서게 됩니다.
문제는 전쟁에서 이겻기 때문에 발생햇는데 로마는 전투에서 패한 부족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않고
30% 내외의 토지만 몰수해 반은 함께 싸운 동맹국에 주고 나머지는 로마의 공유지가 되는데
문제는 공유지를 로마시민에게 임대해 주는 과정에서 귀족들이 임대를 받는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아니 얼핏 보면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임대해 주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비옥한 토지는 주로
귀족들에게 그리고 척박한 토지는 평민들에게 임대한다는 점에서 평민들이 분노를 하니
근본적인 해결은 450년 후에나 등장할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 까지 분란을 계속하게 됩니다.
문제는 로마인의 미덕인 명예심이 너무 강한데 있었으니 평민들이 소집을 거부하다가도 적이 쳐들어오면
전장에 나가고 또 전장에서 전투를 거부하다가도 아군이 불리해지기라도 하면 농성을 풀고 달려나가
전투를 이겨버리는데, 귀족을 원망하고 싶어도 로마 귀족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를 실천하는 사람
들이라 귀족이 앞장서서 재산을 내놓고 또 앞장서서 적진으로 돌격해 전사하니 트집을 잡을수가 없다는?
밭을 갈면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귀족 킨킨나투스는 독재관에 임명되자 괭이를 버리고 전장
으로 달려가 국경을 침범한 외적을 보름만에 패퇴시키고는 6개월간 맡을수도 있는
독재관 직을 16일만에 반납하고 다시 괭이를 잡았으며 또 어린 아이만 남기고 가문
모두가 전장에서 앞장서다가 전사해버린 귀족 파비우스가문은 로마에서는 흔한 사례입니다.
불문법은 내용을 아는 귀족들에게 유리한지라 평민들은 성문법 제정을 요구했고 기원전 450년 3명이
그리스 시찰에 나설 때 평민들은 귀족과 1년간 휴전을 했으며 귀국후 10명은 아무 간섭없이 기원전
449년 “12표법”을 제정해 포로 로마노의 동판에 발표했는데 새로 추가된 내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로마인 대다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그리스시찰 이었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했을테지만 부동산
의 다소에 따라 균역을 정한 솔론법은 이미 로마에 있었으며 클레이스테네스는 부동산을
동산으로 바꾸었지만 상공업이 발달한 아테네와는 달리 로마는 농업국가라 맞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로마시민이 빚을 갚지 못햇을 때 인데 채무자는 60일동안 구류되며 이 기간에도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로 팔리거나 빚 액수만큼 무보수로 노동을 해야 햇는데 전쟁이 나서 군무를 수행하는 기간에는
예외로 한다는게 유일한 개선내용이니 이미 불문율로 되어 있었던 것을 단지 “성문화” 한 정도였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재판후 민회에 항소할수 있고 민회가 부결하면 사형에 처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공화정 탄생시에 생긴 법을 추인한데 불과했으며 귀족과 평민간에 결혼을 금지한 법도 손대지 않았으니
오늘날 전문가도 12표법 중 3분의 1 정도 밖에 모르는 것은 평판이 나빠 이후 자주 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3. 아피우스 클라디우스의 일탈
로마인들은 구 법을 고치거나 수정하지 않고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법조문을 새로 제정
하는 것이니 구 법 가운데 신법과 어긋나는 부분은 자동적으로 효력을 상실하는데
기대를 배신당한 평민들은 12표법 발표후 바로 분노를 표시했으니 그 결과 대
귀족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이끈 로마군은 외적과 두 번 싸워 모두 패배했습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미모의 처녀를 사랑했는데 처녀는 호민관의 딸이었지만 평민인지라 12표법
이 결혼을 금지하니 첩으로 삼으려 하자 여자가 거절하니 아피우스는 부하를 시켜 그녀가
친부라는 호민관의 딸이 아니라 자기 노예가 낳은 달리아 선언하니 노예의 딸은 노예이니
아피우스는 처녀를 납치하는데 이 일은 호민관이 전쟁터에 나가고 없는 기회를 이용해 일어났습니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돌아왔고 납치된 딸에게 비통한 목소리로 “너를 자유의
몸으로 해주려면 이 방법박에 없구나” 라고 말하고는 단검을 딸의 가슴에 박았으니
로마 시내의 평민뿐만 아니라 전쟁터에 나가있던 평민들도 일제히 봉기했으니 대귀족
아피우스의 전횡에 항의해서는 모두 교외의 모테사크로산에 틀어박혀 농성을 시작합니다.
부하들을 이끌고 농성중인 평민들에게로 쳐들어 가려던 아피우스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
는데 강경한 보수주의자로 자존심도 강했던 아피우스는 수모를 참지 못하고 감방에서
자결했으며 이 사건으로 “10인 위원회”는 붕괴했으며 귀족계급은 평민들의 요구에
따라 앞으로는 평민들의 승인을 얻지 않은 기구는 설치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게 됩니다.
4. 로마의 귀족
로마의 귀족들은 아테네의 귀족들 과는 달리 신흥 세력의 힘에 밀려날만큼 허약하지 않았으니....
대토지를 소유한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라틴어 “클리엔테스” 는 영어 “클라이언트”
의 어원이 된 말로 Client 는 변호사의 의로인, 고객, 예속 평민, 부하를 뜻하고 Cliente 는
고객, 손님, 의뢰인, 돌봐주는 사람, 귀족의 보호를 받는 평민, 남의 심부름을 하는자라는 뜻입니다.
이 클리엔테스와 패트런(후원자)의 어원인 “파트로네스”의 관계는 로마 건국 당시 부터
존재했으니 초대왕 로물루스는 100ᅟᅧᆼ의 가부장을 소집해 원로원을 창설했는데
그 백명이 바로 “파트로네스” 였고 또 “귀족” 이었으니..... 혈연이나 지연 그밖의
연고로 이어지는 사람들을 이끌고 있던 씨족장(우두머리)과 그 가족이 귀족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훗날 뒤늦게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우두머리가 로마로 이주하기로 결정했을 때 무려 5천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의 클리엔테스들이 우두머리를 따라 함께 로마로 이주해온 것이니 재산(토지)에 따라
귀족이 많은 병력(조세)을 내놓을때 귀족은 한명 뿐이나 저 클리엔테스들이 숫자만큼 머릿수를 맞추어
주니 투표권도 그만큼 많은지라 민회에서 표결할때 귀족들이 단결하면 표수가 평민보다 많았던 것입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저리 강경하게 나갈수 있었던 것은 저 5천명에 달하는 클리엔테스들이 뒷받쳐준
덕분이고... 파비우스 가문이 전쟁터에서 모두 목숨을 바쳤지만, 파비우스 가문 귀족에 속하는 자는
306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전사자 4천명은 모두 파비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 들이었으며
파트로네스가 공직에 입후보하면 클리엔테스들은 친구까지 모아 마르스광장으로 달려가 투표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클리엔테스 중에 가난해진 자는 파트로네스가 도우기도 하고 또 클리엔테스가 무슨 사업을
시작하면 파트로네스는 동료 귀족들에게 부탁해서라도 자기 클리엔테스가 사업에 성공하도록 도와
주었고 반대로 파트로네스의 재정상태가 나빠지면 클리엔테스들이 십시일반으로 모금해 도와주었
으니 서로 끈끈한 관계를 가진지라 일번 평민들은 전면 투쟁을 못하고 농성하는게 고작이었던 것입니다,
5. 그리스의 쇠퇴
로마인들이 그리스를 시찰한뒤 20년이 흐른 기원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정면
으로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는데 다음해 싥가한 페리클레스는
그 다음해인 기원전 429년에 전염병으로 죽은후 아테네는 과두정치파 와 민주
정치파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이른바 “중우정치” 로 들어서 혼란에 빠집니다.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 및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 제자로 출중한 인재지만 페리클레스가 30년간
이나 민중에게 국정은 자기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믿게한(착각한?) 그런 정치력은 없었으니 기원전
404년 전쟁은 스파르타 승리로 끝났고 기원전 399년에는 소크라테스가 고발되어 재판이 열렸습니다.
해군가 강한 나라로 자타가 인정하는 아테네 해군이 육군이 강하다는 스파르타 해군
에게 해전에서 패한 것이 무려 27년이나 끈 전쟁의 막을 내리게 했습니다.
아테네를 점령한 스파르타는 민주정치를 버리고 과두정치를 행할 것과 피레우스 항 가는 길을
지키는 성벽 철거를 명했으니 크세노폰은 “성벽 파괴는 즐거운 축하행사라도 되는양 풍악
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마치 이 날이 그리스에 자유가 시작되는 날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날은 그리스에 자유와 독립이 사라지기 시작한 날이니 스파르타 지배 아래 그리스 전체
가 자유를 잃었는데 그러나 스파르타의 패권은 오래 가지 못했으니 타국인들은 스파르타인의
생활 양식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으니 전 그리스인들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1만명 스파르타인
에게는 역부족이었으니..... 배타적인 스파르타는 병력을 1만명 이상으로 늘릴 수가 없었습니다.
33년 후인 기원전 371년 스파르타는 패권을 잃고 테베가 스파르타를 대신해 그리스의 패권
국가가 되었으나 10년을 넘기지 못햇으니 아테네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문화도 융성
했지만 정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돈을 거듭햇으며 마침내 기원전 362년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 6년 후인 기원전 356년에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납니다.
6. 에트루리아 도시 베이 점령과 평민 이탈
힘이 커지자 예전에 로마를 경시하던 에트루리아까지 공격하게 되었고 유능한 장군인
카밀루스의 지휘 아래 기원전 396년 에트루리아의 이름난 도시인 베이를 점령하게
되었으니 이때 베이의 시민들은 모두 학살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텅 빈 베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평민과 귀족들의 의견이 엇갈려 "내분" 이 일어납니다.
평민들은 로마 시민의 절반을 베이로 이주해서 또 다른 로마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급진적
의견에 귀족들의 의견은 매우 부정적이었고 특히 전쟁을 지휘한 카밀루스가 이것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하자 평민들은 분개하였고 카밀루스가 10년에 걸ㅊ펴 베이를 공격할 때 추운 겨울철에도
집에 돌려 보내지 않고 들판에서 야영 시키며 고생시킨 것도 있고 해서 그를 횡령 혐의로 고발합니다.
사실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시민들은 카밀루스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기로 작정했으므로
카밀루스가 무죄 판결받는 것은 가망이 없는 상황이 되니 따라서 카밀루스는
자진해서 한밤중에 자기 클리엔테스들의 배웅을 받으며 로마를 떠났는데 그래도
재판은 열렸고 카밀루스는 벌금형에 처해졌으며 평민들은 베이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7. 켈트족(갈리아인) 이 침입해 로마 점령
로마 귀족과 평민들이 내분을 벌이는 동안 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어 토리노와 밀라노 등지로 밀려나
거주하던 켈트족이 기원전 390년 루비콘강을 건너 남하하는데.... 켈트족은 그리스인이 붙인 이름
이고 로마는 갈리아인이라 했으니, 기원전 6세기초 켈트족의 이동이 시작되어 파도가 치듯 가장
북쪽에 있던 부족이 가까운 부족을 밀어내고 밀려난 부족은 더 남쪽의 부족을 밀어내는 식이었습니다.
남쪽으로 밀려난 켈트족은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에서 포강 유역에 걸쳐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과 로마 사이에는 아펜니노 산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에트루리아
12개 도시 국가들이 있었으니..... 로마에서는 저 켈트족을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니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위에 성채를 쌓고 살다가 쇠퇴하기 시작한 에트루리아는 로마에도 밀리고 도시들이
함락되면서도 대동단결하거나 지휘체계를 통일하지 못했지만 로마는 중앙의
본대는 로마인들이 배치되고 좌우 양익은 라틴동맹 군대가 맡아 전쟁후 전리품
은 분배하지만 지휘권만은 로마가 가져 일사불란한 전투 지휘체계를 유지했습니다.
켈트계 세노네스족은 로마가 10년간의 오랜 전투 끝에 베이를 점령한 5년 뒤인 기원전 391년
에 남하하니 그들은 먼저 에트루리아의 클루시움이라는 도시를 포위하자 클루시움은
베이 점령 이후 에트루리아 지역에 세력을 뻗기 시작한 로마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로마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바빴고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으니 결국 함락 당합니다.
켈트족이 침략할 때 견고한 방파제가 될 수 있었던 에트루리아 베이를 없앤것은 로마 자신이었으니
브렌누스가 지휘하는 세노네스족은 에트루리아를 돌파해 로마로 진격해 올때 로마는 사령관은
외국으로 망명했고 평민은 베이로 이주해버렸으니 병력이 반 밖에 안남은 로마는 위기에 처합니다.
켈트족 전사들의 무기는 칼과 창이고 가죽을 씌운 나무 방패에 구리 투구를 쓰고 있었는데
지위에 따라 투구에 깃털 장식을 달았으며 군단은 기병과 보병에 로마인들로서는 처음
보는 전차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차가 적진을 돌파한후 기병과 보병이 돌격하며
전투때는 옷을 벗어던지고 금목걸이와 팔찌만 참 맨몸으로 싸우는 무리도 있었다고 합니다.
전투시에 옷을 걸치지도 않고 맨몸으로 싸우는 것은 너죽고 나죽자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하겠다는 것이니 적에게 귀기스러운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와 싸울 때 죄수들을 앞장서서 내보내는데 갑옷은 커녕 거의 벌거벗은
몸에 방패도 없이 달랑 단도 하나 들고 앞으로 나오니..... 오나라군이 의아하게 쳐다봅니다.
그런데 저 벌거벗은 죄수들은 괴성을 지른후 돌격해 오는게 아니라 자기 가슴을 찔러
자결하니 오군은 저 원귀가 자기 몸에 붙을까 몸을 사리는 사이에 월군이
총공격을 가해 승리했다는.... 또 비슷한 적군을 기망한 사례로는 몽골군의
1차 침입시 1231년 10월 20일 안북성 아래 벌판에서 고려군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三軍乃與戰 蒙兵皆下馬 分隊成列 有騎兵突擊我右軍。 양군이 맞붙자 몽고군들은 말에서 내려 부대
별로 대열을 지은후 기병(騎兵)이 우군(右軍) 쪽으로 돌격해 왔다. 몽골군이 말에서 내리는지라
저 뜻밖의 해괴한 광경에 고려군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서 멀거니 쳐다 보던 중에 말에서 내린
몽골군 사이로 갑자기 기병이 뛰쳐나오니 혼비백산한 고려군은 성으로 도망치다가 몰살을 당합니다.
대장 채송년은 몽골군은 기병이라 야전에서 이길수 없으니 수성하다 힘이 빠지면 공격을 하자니
대집성이 "겁쟁이 마냥 웅크리지말고 싸우자!" 고 주장하는지라 성 밖에 나가 진을 치는데 진주
(陣主) 들과 지병마사(知兵馬事)는 성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이를 본 대집성은 되돌아 들어
갔으니 대장들은 성안에서 웅크리고 있고 애꿎은 병사들만 성을 나왔다가 몰죽음을 한 것입니다.
또 켈트족은 자기가 죽인 적병의 목을 잘라 말 목에 매다는 습관이 있었으며 집으로
돌아가면 그 머리를 기름에 담가 두었다가 손님이 방문하면 보여주는게 최고의
접대였으며 클루시움에서 로마는 120km 거리로 적을 막아줄 산이나 강도 없고
최고의 방파제인 베이는 이미 로마가 멸망시켜 버렸으니 로마로 바로 쳐들어 옵니다.
방어전을 지휘한 로마군의 집정관 포필리오스 레나는 병사들에게 외치니.... “ 우리가
지금 상대하는 적은 라틴족이나 사비니족처럼 전투 후에는 우리 동맹국이
될수도 있는 민족이 아니다, 적은 흉포한 짐승들이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당시 로마는 라티움의 패권자였으나 에트루리아 베이에 제2 수도 건설 여부에 대한 논쟁으로
귀족과 평민이 계급투쟁을 벌이느라 군사력이 절반으로 줄어들은 상태라... 적의
침략에 급조된 로마군은 기원전 390년 7월에 벌어진 알리아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며
패잔병은 개미새끼 처럼 흩어져 달아났고 어찌된 일인지 로마의 성문도 열려 있었다고 합니다.
켈트계 세노네스족은 성 안으로 진입하였고 로마 시민은 싸울수 있는 자들만 뽑아 로마 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카피톨리노 언덕 위로 올라가 농성햇으며 원로원 의원이더라도 싸울수
없는 사람은 올라가지 못했는데 카피톨리노 언덕은 방어에 유리했으나 비좁았기 때문입니다.
로마를 점령한 켈트족은 원로원 의원, 어린아이, 여자 할것 없이 무차별로 죽이고 부녀자들을 되풀이 해서
욕을 보였으며 로마 시내 건물과 문서를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불살랐으니 그 결과 기원전 390년 이전의
로마 문서들은 모두 소실되었는데 카피톨리오 언덕에서 방어하는 소수의 로마인들은 물끄러미 바라볼수
밖에는 할일이 없었는데 다시 로마가 함락되어 겁탈당하는 것은 800년 후에 게르만 서고트족에게 입니다.
켈트족은 로마 시내를 점거하였으나 카피톨리노 언덕의 로마인들이 7개월 동안이나 계속 저항하였고,
켈트족은 떠돌아다니는데 익숙해져 있어 도시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 몰랐으니 시체를 수로에
그냥 버려 더러워진 수돗물을 먹고 전염병까지 생길 정도였으니... 하지만 로마인들도 도저히
방법이 없는지라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했고... 켈트족은 무려 300kg 황금을 받고 로마를 떠났습니다.
로마는 다시 도주한 카밀루스를 불러들여 독재관으로 임명하니 그는 베이로 이주했던 평민
들도 소집해 군단을 편성해서는 물러간 켈트족을 추격해 습격해서는 분풀이를 하였
지만 로마가 당한 상처는 심각했으니..... 평민들도 더는 베이를 고집하지 않았는데
신들이 켈트족을 이용해 로마를 버리려 한 로마인들을 응징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후 주변의 라틴 부족들은 로마를 깔보기 시작했고 이후 주변 정세를 안정시키는데 40년이나
소비하는데.... 라틴동맹은 공중분해되었고 해체된 정도가 아니라 어제의 동맹인
라틴족 도시들이 이번에는 로마를 멸망시키겠다고 적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로마는 건국 360년, 공화정으로 바뀐지 120년만에 또 다시 "처음 부터 시작" 해야 했습니다.
8. 로마군 군제 레기온 도입
저런 로마가 어찌 아테네나 스파르타 그리고 카르타고 보다 강대해지게 되었는가? 로마역사를 쓴 그리스
의 폴리비오스는 기원전 390년의 켈트족 침입이 로마가 강대해지기 시작한 첫 걸음이었다며 밑바닥
까지 떨어졌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고 느리면서도 착실하게 다시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던 것이라 말합니다.
로마는 군대를 개혁하기 시작하니 과거 그리스식의 팔랑크스 스타일을 버리고 레기온 스타일로 진화
했으니 '팔랑크스' 는 무장한 병사들이 하나의 거대한 사각형을 이뤄 공격하는 방식이었으나
'레기온' 스타일은 작은 네모들로 큰 네모를 형성해 공격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이런 레기온 스타일은
훗날 삼니움족과 전투에서 발전한뒤 칸나이 전투 직후 대대(Cohort)를 편성함으로써 완성되게 됩니다.
뿐만아니라 켈트족과 상대하였을 때, 우수한 무장을 갖춘 신분 높은 계급이 중앙에 위치하였는데 양익이
달아나면서 중앙이 포위돼 섬멸되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높은 계급의 생존률을 높이기 위해 계급순의
일렬로 배치하는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로 나뉘는 마니풀루스
진형으로 켈트족에게 당한 패배는 로마가 레기온 스타일의 전투방식을 창시하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카밀루스는 5번이나 독재관에 지명되었고 4번이나 개선식을 거행했는데도 집정관에는 한번도 선출되지
못했는데 기원전 410년부터 기원전 360년까지는 여섯명의 군사담당관(독재관)이 2명의 집정관을
대신해 로마를 다스린 시기니 전쟁은 계속되어 비상시기엿다는 뜻이니 평민들도 독재관을 선호했습니다.
카밀루스는 전투에 이기기 위해서는 켈트족의 전술 까지도 모방했으니 전투대형도 켈트족
처럼 기동력을 중시하는 쪽으로 개선되었으며 군단이 커다란 직사각형으로 뭉쳐
돌격하는 것이 아니라..... 중대별로 작은 직사각형을 이루어 돍겨하는 전법으로
바꾸었으며 힘으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유연한 전술로 바꾸며 무기와 군장도 개량합니다.
9. 로마의 정치 개혁
기원전 449년에 성문법인 12표법을 제정한 이래 귀족과 평민간에 결혼 금지제도를
철폐하고 기원전 367년에는 평민인 “리키니우스 법” 이 성립되니 원로원
계급이 주로 선출되어 온 로마의 모든 요직을 "평민에게도 개방"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집정관등 요직을 마친 자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간에 원로원 의석이 주어졌으며
기원전 366년 최초로 평민 집정관이 선출되고 기원전 356년에는 최초로 평민
독재관이, 기원전 351년 재무관 그리고 기원전 332년에는 법무관에 평민이 선출됩니다.
민회에서는 집정관 2명, 법무관(1명-2명-16명), 회계감사관(2명-40명), 재무관 2명,
안찰관 4명이 선출되었으며 원로원(세나투스) 의원 300명은 집정관을 승인하게 됩니다.
비상시 집정관은 독재관 1명을 선출하며 독재관은 기병장관을 임명하고 평민회는 호민관 2명(10명)
을 선출했으며 기원전 322년에는 빚을 갚지못한 채무자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10. 로마 가도 건설
도로가 국토의 동맥인 것은 오늘날에는 상식이지만 2,300년 전에 이걸 실제로 안 나라는 오직 로마
뿐이었으니 그 전에 오스티아항으로 가던 비아 살라리아와 라티나지방으로 이어지던 비아 라티나
두 개의 도로가 있있던 로마는 기원전 312년에 “비아 아피아” 가 개통되면서 단순한 행정도로를
넘어 정략적인 의도에서 도로를 만드니 정치와 군사 및 행정에 필요한 도로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재무관 아피우스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로마에서 카실리움(카푸아)에 이르는 아피아 가도 는 이후
이탈리아 남쪽 끝 브룬디시움까지 연결되었으며 플라미니아 가도, 카시아 가도, 아우렐리아
가도가 건설되어 사방 팔방으로 확장되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로마가도는 단단한 돌과 건축 재료를 동원해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졌으니 먼저 도로가 놓일 곳을
철저히 벌목하는데 도로 뿐만 아니라 양 옆으로 수십미터를 벌목하고는 도로가 놓일 땅을,
단단한 지반이 드러날 때 까지 보통 1.5미터 정도로 깊게 파며 도로의 너비는 왕복
2차로는 4미터에 배수로가 양쪽에 2개가 있고 인도가 각 3미터씩 합쳐 10미터에 달했습니다.
땅을 깊이 판후 최하층은 statumen 이라고 자갈을 30cm 높이로 깐 다음에 2층은 rudus 라고
돌과 자갈에 점토를 섞어 깔고 3층은 nucleus 이니 인위적으로 잘게 부순 돌멩이를 가운데가
높은 아치형으로 깔며 4층은 pavimentum 이란 바닥길이니 접합면이 딱 들어맞도록 사방
70cm 정도의 자른 마름돌을 빈틈없이 맞추는데 당시 시멘트가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돌들이 도로의 기반으로 놓여진후 그 위에 작은 돌들을 놓고, 모래 또한 촘촘히 더해져서
돌들의 틈을 메꾸며 이 위에 자갈과 점토를 섞어 붓는데 수레들이 왔다갔다하며 지금까지
쌓은 재료들을 단단히 다짐과 동시에 표층의 재료들을 쏟아주고, 물 또한 뿌려 잘 굳도록 합니다.
재료들은 수평 널판지에 의해 한번 평평해지고, 이어 롤러에 의해 평탄해지는데 이 과정들을 반복하며
표층이 완성되며 표층의 재료들은 도로의 종류와 도로의 위치에 따라 달랐고, 그 지방에서 채석할수
있는 재료 중 가장 좋은 재료들을 선별해 사용했으니 석회암, 화산재, 콘크리트, 석재등이며 도로의
옆은 살짝 경사가 져있어서, 비가 오더라도 비가 가운데 고이지 않고 양 옆으로 빠져나가도록 했습니다.
완성된 표층은 비가 오더라도 젖거나 스며들지 않고 '거북이의 등껍질' 과 같이 빗물을 튕겨내고
흘려보냈으며, 매끄럽고 평탄했는데 도로 양 옆으로 20m 씩의 지점에는 배수로를 파고,
이 배수로는 확인되지 않은 마차들이 도로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기능했으며 벌목된 공간은
야생 동물이 갑작스레 공격하거나 약탈자들이 도로에 매복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는 2천 3백년 전에 먼 산에서 도시까지 수킬로 미터에 이르는 수도교와 더불어 저런
엄청난 공력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야 하는 도로를 수없이 건설했다는게
놀라운데... 우리나라 조선은 구한말 까지 큰 강에 단 하나의 다리도 놓지 못했고,
단 하나의 로마 가도와 같은 "포장도 로" 도 건설하지 못하고 그냥 맨 흙길 이었습니다.
조선은 안그래도 산이 많아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가야 하니 평지가 드문데 평지의 도로
라는게 흙길이다 보니 비가 오면 흙길 도로는 유실되어 길 자체가 없어지곤 했으니
때문에 말이 끄는 "마차" 라는 것은 없었고..... 화물 유통은 머리에 이고 지게로 지는
"보부상" 이 담당했으니.... 구한말 2천년 전의 로마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