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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元均
원균은 이곳 평택에서 1540년 1월5일 출생하였는데, 이순신보다는 5년 연배이었다. 그리고 1597년 칠천량(漆川梁)전투에서 삼도수군(三道水軍)을 이끌고 왜군과 싸웠으나 대패하였고, 원균은 여기서 그의 외아들인 원사웅(元士雄)과 함께 전사(戰死)하였다. 이 곳 원균의 묘는 가묘(假墓)이다. 전사(戰死)한 그의 시신(屍身)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그가 태어난 이 곳에 가묘(假墓)를 만들었다.
원균, 원사웅의 죽음 ... 미스테리
원균과 그의 아들 원사웅(元士雄)의 죽음에 관하여 지금까지 이것이 정설(定說)이었다. 그러나 '인조실록(1624년)'의 기록에는 ' 반정공신(反正功臣) 2등에 원사웅이 올랐다. 그는 선조(宣祖) 때 선무공신(宣武功臣)이었던 원균(元均)의 아들이다 ' 라는 기록이 나온다. 1597년 칠천량전투에서 죽었어야 할 '원사웅'이 27년 후에 다시 실록에 등장하는 것이다. 당시 원사웅의 나이 50세이었다.
1597년 죽었다는 원균(元均)의 죽음도 의문투성이이다. 1598년 실록에는 원균이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도 실려 있다. 사실은 ? 원균도, 원사웅도 임진왜란때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1921년까지의 '원주원씨' 족보에는 임진왜란 이후의 원균과 원사웅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1921년이후의 족보(族譜)에서는 칠천량(漆川梁) 전투 이후의 원균,원사웅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삭제되어있다고 한다. 후손들이 일부러 조작하였다는 얘기인데....
우리는 원균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이순신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이순신은 영웅을 넘어 성웅(聖雄)이었다. 특히 박정희대통령의 제3공화국부터... 이순신에 대한 폄하(貶下)는 금기시(禁忌視)되는 사회 분위기이었고, 이순신에 대한 신화(神話)는 일제시대, 6.25동란, 4,19혁명, 5,16혁명 등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국민들의 가슴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되었지만, 임진왜란을 이순신 위주로만 설명하다보니 여러가지 면에서 무리한 미화(美化)도 있었던 것...또한 사실이다.
지금까지 이순신을 평가하는 정설(定說)은.....
▶ 임진왜란 기간(1592~1598)에 전쟁의 최고 지휘부인 조선 조정은 철저히 무능(무능)했고, 당쟁으로 일관하였다. ▶ 이순신은 이 같은 당쟁(黨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직 나라를 구하려고 몸을 바쳤다. ▶ 이순신은 뛰어난 전략과 거북선 등 빈틈없는 준비로 엄청난 군사적 열세를 뒤집고 해전(海戰)을 승리로 이끌어 전세를 뒤집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 이순신은 동료 장수인 원균(원균) 등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옥(옥)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백의종군(백의종군)한다. ▶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은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패잔병을 수습하여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 이순신은 마지막 노량해전(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나라에 대한 " 충(忠) "으로 일관했으며,가정에서는 " 효(孝) "를 실천하는 등 문(文)과 무(武)를 겸한 성인(성인) 중의 성인이었다.
이에 대한 정설(定說)을 뒤집어 생각해 보는 것...그리고 교과서(敎科書)에 나와 있지 않은 숨은 얘기들을 들추어 보는 것... 원균(元均)의 묘(墓)에서 깨우쳐야 할 역사(歷史)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떄, 경상도와 전라도 수군(水軍)은 左,右로 나뉘어져.. 경상좌수사 박홍(朴泓),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棋)에게 그 지휘권이 있었다. 그러나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리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홀로 적과 싸웠으나 수영(水營)이 함락되었다.
이때 원균으로부터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에게 왜란의 급보가 전해진 것은 왜군이 침공한지 2일 후였지만, 이순신이 경상도로 출동한 것은 20일 후인 5월4일이었다.원균은 영남해역에서 단독으로 왜군의 함정 10여척을 격파하는 등 전과를 올리면서 이순신에 원군을 계속 요청하였지만, 이순신은 계속 출동을 미루기만 하였고..이는 후일 두사람의 불화(不和)를 빚게 되는 불씨가 되었다.
갈등의 시작 ... 첫 승리와 연명장계
흔히 조선 수군(水軍)의 첫번 째 승리 이후 이순신과 원균, 두 사람의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첫 승리 이후 이순신과 원균이 공동으로 연명장계(聯名壯啓)를 올리기로 하였는데, 이순신이 이 약속을 어기고 홀로 장계를 올려 원균의 전공(戰功)을 가로채니, 이것으로 두 사람의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록'에서 다음 기록을 증거로 제시한다.
임진년에 이순신이 전라도좌수사로 전함을 거느리고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과 함께 거제도 앞바다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쳐부수고 왜적의 배 50여 척을 포획하여 전란(戰亂) 이래 제일의 공을 세웠었다. 그러나 그때에 계책을 마련하여 먼저 올라갔던 일은 모두 원균의 솜씨에서 나온 것이고, 이순신은 다만 달려와서 구원했을 뿐이었다.
크게 승전한 뒤에 원균이 행조(行朝)에 치보(馳報)하려고 하자, 이순신이 속이기를 ' 공(公)과 협력하여 일을 한다면 왜놈들은 섬멸하고 말고 할 것도 못되는데 이러한 소소한 승전을 어찌 조정에 치계(馳啓)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다른 도(道)에서 급작스럽게 구원하러 왔기에 병기를 갖추지 못했으니, 왜적에게서 노획한 것을 사용해야 하겠다 '고 하니 원균이 그대로 따랐다.
그러고는 이순신은 비밀히 사람을 시켜 노획한 병기와 왜적의 배에 살려 있던 금병(金屛), 금선(金扇) 등의 물건을 가지고 가서 행조(行朝 .. 피난간 임시 조정)에 치계하도록 하여 과시하였으므로 전공(戰功)이 모두 그 자신에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때 행조(行朝)는 한참 다급한 때이었으므로, 치보(馳報)를 받고 크게 기뻐하여 이순신을 통제사로 제수하고, 윤원으로 하여금 이순신의 지휘를 받게 하니, 이때문에 원균이 크게 화가 나 드디어 서로 협조하지 않았다.
그 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원균이 통제사가 되었는데, 왜적의 기세를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한산도(閑山島)로 물러나 지키고만 있고 싸우지 않으려고 하자, 조정에서는 매우 급박하게 싸움을 독려하여 도원수 '권율(權慄)'로 하여금 장벌(杖罰)케 하였다. 이에 원균이 마지 못하여 싸우다가 패전하여 죽었다. 이순신이 다시 이를 대신하여 제독(提督) 진린(陳璘)을 따라가 순천(順天) 앞바다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쳐 승전을 거두게 되었을 때 왜적의 탄환에 맞아 배 안에서 죽었다. 이순신은 재질과 기운이 남보다 뛰어나 중국 사람들도 명장이라 일컬었다... 선조실록 1603년 4월21일
즉, 처음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연명(連名)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다. 이에 이순신이 말하기를 ' 천천히 합시다 '하고는 밤에 스스로 연유를 갖추어 장계(壯啓)를 올리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곳이 없었던 것과 왜적을 공격함에 있어 공로가 없다는 상황을 모두 진술하였으므로, 원균이 이 사실을 듣고 대단히 유감스럽게 여겼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공을 아뢰었는데, 두 사람의 갈등이 생긴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연명장계의 진실
그러나 이러한 이순신의 출동 지연(遲延)은 이순신의 잘못은 결코 아니었다. 출동은 그의 작전권 범위를 벗어나 있었으므로 조정의 허가(許可)가 필요하였고, 작전상으로도 절대 서두를 일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의 합류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원균과 불화(不和)의 시작이 되었으며, 선조(宣祖)도 이순신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되는 이유가 되어, 적을 앞에 두고 조정의 내분과 갈등으로 연결되고 혼란이 벌어진다. 출동을 미루는 이순신에게.. 군관 송희립은 " 큰 도적이 치고 들어와 그 행세가 커졌는데, 가만히 앉아서 외로운 성만 지킨다고 혼자 보전될 리 없으니 나아가 싸우는것이 상책입니다. 그래서 다행히 이기면 적의 기운이 꺾일 것이고, 또 불행히 전쟁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신하(臣下)된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暈)도 이에 가세한다. " 영남도 우리 땅이므로 적을 치는데 있어서는 전라도,경상도에 차이가 없습니다. 신하로서 국은을 입고 국록을 먹다가 이런 때에 죽지않고 어떻게 감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 이에 이순신은 출정을 결심하고 군사와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閑山島)에서 원균과 합류하여 모두 40척을 대파하였다. 이어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도 합세하여 이른바 3道 수군(水軍)의 연합전선이 구축되었다. 이로부터 약 5개월간 왜선 약 330척을 격파하거나 불태워 없애는 등 엄청난 전과를 올리게 되고, 조선은 수세(守勢)에서 공세(攻勢)로 전환할 수 있었으며,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출전과 강화회담(講和會談)으로 이어진다.
해전(海戰)에서의 패배와 명나라의 화해(和解) 주선으로 일단 철수한 일본은 재침(再侵)을 노린다. 그리고 사전에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하여 재침의 시기(時期)와 경로에 관한 역정보(逆情報)를 흘린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출동을 지시하지만, 이순신은 거짓 정보임을 알고, 출동을 미루자 격노한 선조(宣祖)는 이순신을 하옥(下獄)시키고, 원균을 새로운 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이 당시 이순신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지만, 선조(宣祖)는 이순신이 전투에 주저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새로 부임한 원균의 판단도 이순신과 같았으나, 조정의 강력한 요구로 출동준비를 마무리하고 결전에 임하였다. 이 때 상상할 수도 없는 돌발사건이 벌어진다. 도원수(都元首) 권율(權慄)장군이 출동 지연(遲延)이라며,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원균에게 곤장을 때린다. 요즘 말로 참모총장이 해군사령관에게 직접 태형을 가한 것이다.
이에 분함을 참지못한 원균(元均)은 명령에 의하여 수군(水軍)을 출동시키지만, 분명히 왜군의 계략(計略)에 빠져 패배할 것이라는 비장한 말을 남기고 수군 3만명과 함선 200척으로 전선을 향하였다. 짐작대로 원균의 수군(水軍)은 왜군 1천척에 대패(大敗)하고, 원균(元均)도,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도 모두 전사(戰死)하게 되고, 경상우수사 배설만(배설만)이 12척의 배를 이끌고 한산도로 후퇴할 수 있었다. 정유재란(丁猶再亂)이었다. 조선 수군이 완전히 와해된 이 해전(海戰)을 칠천량(漆川梁)해전이라고 부른다. 원균의 전술(戰術)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이 패전은 조정의 무능력과 무지(無知) 그리고 일본군의 간계(奸計)에 허망하게 당한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
한 개인(個人)의 역사는 시간이 갈수록 후대(後代)의 사람들에 의하여 때로는 각색(脚色)되고, 윤색(윤색)되기 마련이다. 어떤 인물은 사실보다도 훨씬 더 부풀려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형편없이 왜곡,축소되기도 한다. 보통 이순신은 영웅(英雄)을 넘여 성웅(聖雄)이고, 그 상대역인 원균(元均)은 무능한 겁쟁이에다 모함꾼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 두 사람의 골이 깊어지게 된 원인은 먼저 이순신(李舜臣)이 제공(提供)한다.
그 빌미는 옥포해전(玉浦海戰)의 승리이었다. 이 승리는 이순신과 원균이 합동으로 참여하여 승리한 것으로...서로 공(功)을 탐하지 않고 승리의 보고(狀啓)를 할 때 서로 협의하여 하기로 했슴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이를 어기고 단독(單獨)으로 장계를 올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비롯하여 부하들은 모두 상(賞)을 받았지만, 원균과 그 부하들은 어떤 포상도 받지 못하였다.
또 이러한 사건도 있었다. 이순신이 출정한 날이 1492년 5월4일인데, 이순신은 출정하기 직전에 원균(元均) 관할 지역인 남해의 군사창고를 불태웠다. 그것이 왜적의 손에 넘어 갈 경우, 가까이 있는 이순신 관할인 전라좌수영의 방어에 큰 위협이 된다는 이유이었다. 이 행동은 불필요한 이순신의 큰 오판(誤判)이었으며, 자신의 관할지역도 아닌 곳에서 원균과 사전 협의도 없이 자신의 지역만을 위한 이기적(利己的)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公的) 이유에 의한 갈등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적(私的)인 일로 인한 갈등일 것이다.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측실(側室) 소생인 원사웅(元士雄)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功)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일러 바친 것이다. 이에 선조(宣祖)는 " 수군(水軍)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앞으로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사하러 간 이덕형(李德馨)에 의하여 밝혀진다. 원균(元均)의 아들 원사웅(元士雄)은 측실(側室) 소생이 아니라 정실(正室) 소생이었으며, 12살이 아니라 18살이었고, 실제로 아버지 원균을 따라 전장터에서 공(功)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확인도 안 하고 원균을 모함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으며, 이순신이 하옥(下獄)될 때 그 이유의 하나가 되고 있다고 실록(實錄)에 기록되어있다.
이순신이 파직(罷職)되어 하옥(下獄)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원균에 대한 모함(謨陷) 사실과 조정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출정하지 않았다는 죄(罪)인데...두번째 이유는 사실 이순신에게 억울한 것이고, 오히려 조정이 일본의 계략(計略)에 넘어 간 것이었다.
원균의 가장 큰 불명예는 이순신을 모함하여 하옥시키고, 자기가 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칠천량전투(漆川梁海戰)에서 조선 수군을 붕괴시킨 주인공이라는 것인데.... 사실은 이순신이 원균을 모함하였고, 칠천량전투는 원균의 뜻과 작전이 전연 아니었고, 조정의 무능과 도원수 권율이 곤장을 때리며 강요한 탓이었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평가
이순신의 '난중일기' 가운데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던 32일 간의 일기가 2008년 새롭게 확인되었다. 이순신에 대한 자료를 필사한 '충무공유사'는 난중일기와 함께 충무공 종가에 내려온 책으로 1670년 이후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 제76호인 '난중일기' 초본에는 을미년(1596년) 일기는 전해지지 않는데, '충무공유사' 중 난중일기의 일기 내용을 뽑아 쓴 '일기초' 부분에 325일치 일기가 들어 있고, 이 가운데 을미년을 중심으로 한 32일치 일기가 발견된 것이다.
이렇게 확인된 일기에는 이순신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흐트러짐이 없는강직하고 꼿꼿한 면모, 백성가 군사를 아끼는 자상함 등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동료 장수에 대한 언급도 자주 나오는데 특히 원균에 대한 불만이 많은 점이 눈길을 끌고 있다. 을미년, 1596년 11월1일의 일기에는 ' 김희번이 서울에서 내려와서 영의정의 편지와 조보 및 원흉적(元兇賊 .. 원균)의 답서를 가져와 바치니,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천지 사이에는이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 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도원수 권율장군에 대한 비판도 등장하고 있다. 1595년 4월 30일 일기에는, ' 아침에 도원수 권율의 계본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의 일종)과 기씨, 이씨 두 사람의 공초(죄인의 진술) 초안을 보니, 도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도원수의 자리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 고 적었다. 난중일기 을미년 기록에 원균, 권율과 부하 장수에 대해 비하하는 발언이 빠져 있는 이유는, 충무공의 기록이 정조대왕에게 노출될 수가 있어 의도적으로 은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왜곡되는 역사, 억울한 원균
원균(元均)은 이순신과 비교될 때 항상 " 시기와 모함을 일삼는 무능한 장군 "라는 부정적 선입견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원균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인 이순신(李舜臣)의 친구인 서애 유성룡 (西涯, 柳成龍)조차도 선조(宣祖)에게 " 옛날부터 육장(陸將)은 수전(水戰)에 능하지 못하고, 수장(水將)은 육전에 능하지 못하나, 원균은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용감히 싸우며 그 모두에 능하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전쟁이 끝난후 그의 저서 " 징비록 (懲憊錄) "에서는 원균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 성질이 음험하고 간사하며, 또 중앙과 지방의 많은 인사들과 연결하여 이순신을 모함하는 데에 힘을 다했다." 라고 적고 있다. 원균(元均)에 대한 평가(評價)가 시대(時代)에 따라, 당쟁(黨爭)에 따라 달라졌다는 의미이다.
원균은 비겁한 졸장이 아니라 너무 용감해서 문제가 있는 그러한 장군이었다. 임진왜란을 결과적으로 평가하였을 경우 원균은 분명히 패장(敗將)이었고, 이순신은 영웅이었다. 그러나 원균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너무 왜곡되어 있고, 억울한 점이 많다. 그의 칠천량 패전(漆川梁 敗戰)도 그는 반대하였지만,조정의 무능과 강요(强要)로 인한 예정된 패배이었다. 원균은 이 전투에서 그의 외아들과 함꼐 죽어 후사(後嗣)도 완전히 끊기고, 그 시신(屍身)도 못 찾아 가묘(假墓)로 그 억울함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이순신과 권율은 1등공신, 원균은 2등공신으로 추천되었으나, 선조(宣祖)의 사리(事理)있는 판단으로 1등공신이 된다. 그러나 역사는 또 한번의 반전(反轉)을 기록한다. 선조와 광해군을 지나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 시절... 역사는 다시 왜곡된다. '선조실록'은 광해군시절에 편찬된 것이고, '선조수정실록'은 인조(仁祖) 때에 다시 수정된 실록인데...당시 이율곡(李栗谷)의 제자들인 서인(西人)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북인(北人)으로 분류된 원균(元均)은 다시 무능(無能)하고 모함만 일삼는 비겁한 패장(패장)으로 기록되는것이다. 더욱이 '선조수정실록'의 편찬 주관자는 이순신의 후손인 택당 이식(李植)이었다.
선무공신 교서 宣武功臣 敎書
이 교서(敎書)는 선조 37년, 1604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왜적과 대적하여 크게 이기고, 정유재란 때에 통제사가 되어 왜적을 물리치다 장렬하게 전사(戰死)한 '원균'에게 공신(功臣)으로 임명하다는 내용을 담은 공신교서(功臣敎書)이다. 이 교서의 주요 내용은 장렬하게 전사한 원균에게 죽은 후에도 그 후손들을 계속해서 보살필 것임을 밝히고, 노비 13명, 전 150결, 은 10냥, 옷감 1단, 말 1필을 하사한다는 것이다. 이 교서와 함께 있는 치제문은 선조 38년 (1605) 정월 18일, 임금이 의정부좌찬성으로 증직된 원균의 영정에 그의 죽음을 기리어 제사를 지내게 한 글을 담은 문서이다.
원균은 원래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 패전(敗戰)을 이유로 공(功)을 깍지 마라 '는 선조(宣祖)의 명령에 따라 1등으로 책정되어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원릉군(元陵君)에 추봉되었다. 선조(宣祖)가 과도하게 원균을 편든 것은 아마도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는 방편이었을 것이다. 선무공신(宣武功臣) .....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거나 명나라에 병량주청사신(兵糧奏請使臣)으로 가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을 말한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난중에 각 방면에서 공을 세운 문,무관에 대한 공신책봉 문제가 논의되다가,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청난공신(淸難功臣)과 더불어 선무공신도 결정되었다.
모두 18인을 3등으로 구분하였는데, 1등은 이순신, 권율, 원균 등 세 사람으로, 2등은 신점, 권응수, 김시민, 이정암, 이억기 등 5인으로, 3등은 정기원, 권협, 유시원, 고안백 등 10인으로 결정하였다. 이들 공신에게는 모두 특전이 주어졌다.
즉, 1등은 본인과 부모 처자에게 3계(三階)를 올려주고, 자식이 없을 때는 조카나 사위에게 2계를 올려주며, 적장자가 이를 세습하여 그 녹(祿)을 받게 하였다. 2등에게는 본인과 부모 처자에게 2계를 올려주고 자식이 없으면 조카나 사위에게 1계를 올려주고, 적장자가 그 녹을 세습하고, 반당 6인, 노비 9구, 구사 4인, 전지 80결, 은자 7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하였다.
원균 사당 원균 祠堂
지나친 美化, 지나친 歪曲
이순신에 대한 일방적인 미화(美化)와 원균에 대한 지나친 왜곡과 평가절하...당쟁(黨爭)과 선조(宣祖)의 무능(無能)에 기인한 바 크지만.. 이순신은 '난중일기'등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만, 이상하리만치 원균의 기록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실록에는 이순신보다 더 많은 장계(壯啓)와 보고를 하였음이 나타나 있는데, 이렇게 한쪽은 자료가 철저히 보관되고, 나머지 한편은 철저하게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 누가 의도적으로 없앴다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을 정도이다. 조카에게 보낸 짧은 편지도 ' 난중일기'에 남아 있는데, 이순신(李舜臣)에 불리(不利)한 사건의 일기등은 전부 빠져 있다. 이 것도 누군가 후손에 의하여, 당쟁의 결과로 제거되었다는 주장도 이해할 만하다.
역사는 정말 승자(勝者)의 기록인 것 같다.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極과 極의 평가와 반전.. 이순신은 물론 구국의 충신이었지만, 한 사람만을 영웅화시키기 위하여 다른 무고한 장수를 왜곡하거나 폄하하려는 것은 오히려 이순신의 영웅적인 모습을 오히려 훼손할지도 모른다.
원균, 상반되는 역사의 기록
원균 .. 우리 역사에서 원균만큼 후대에까지 그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 경우도 흔치 않다. 원균을 부정적으로 단정한 예는 택당 이식 (澤堂 李植 .. 이순신의 후손이다)이 쓴 이순신장군 시장(諡壯)과 정조(正祖)가 찬한 이순신 신도비명, '오성 이항복'이 쓴 전라좌수영대첩비, '우암 송시열'이 쓴 명량도비, '잠곡 김육'이 지은 신도비명,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 기록 등이다. 그외에도 후대에 쓰인 많은 글들이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원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였다.
이러한 글 등과는 달리 원균의 행적을 드러내고 그 억울함을 토로해 시정하려는 시각에서 쓰인 글들은 현석 박세채와 우암 송시열의 문인인 후재(厚齋) 김간(金幹)이 쓴 행장이 그러하다. 일견에도 중과부적이다. 하지만 국왕인 선조와 아계 이산해, 오음 윤두수 등 중신들은 흔들림 없이 원균을 지원하였다. 물론 같은 당파 식구들이었지만.
애마총 愛馬塚
애마총(愛馬塚)...선조가 원균장군에게 하사한 말의 무덤이다. 원균과 함께 전장을 누비다가 원균이 전사하자, 그의 유물을 싣고 고향에 돌아 온 후. 식음을 전폐하다가 주인을 따라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