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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caminando por la ribera del mar de Galilea vio a dos hermanos, Simón, llamado Pedro, y su hermano Andrés, echando la red en el mar, pues eran pescadores, y les dice: «Venid conmigo, y os haré pescadores de hombres». Y ellos al instante, dejando las redes, le siguieron. Caminando adelante, vio a otros dos hermanos, Santiago el de Zebedeo y su hermano Juan, que estaban en la barca con su padre Zebedeo arreglando sus redes; y los llamó. Y ellos al instante, dejando la barca y a su padre, le siguieron.
«Os haré pescadores de hombres»
Prof. Dr. Mons. Lluís CLAVELL
(Roma, Italia)
Hoy es la fiesta de san Andrés apóstol, una fiesta celebrada de manera solemne entre los cristianos de Oriente. Fue uno de los dos primeros jóvenes que conocieron a Jesús a la orilla del río Jordán y que tuvieron una larga conversación con Él. Enseguida buscó a su hermano Pedro, diciéndole «Hemos encontrado al Mesías» y lo llevó a Jesús (Jn 2,41). Poco tiempo después, Jesús llamó a estos dos hermanos pescadores amigos suyos, tal como leemos en el Evangelio de hoy: «Venid conmigo y os haré pescadores de hombres» (Mt 4,19). En el mismo pueblo había otra pareja de hermanos, Santiago y Juan, compañeros y amigos de los primeros, y pescadores como ellos. Jesús los llamó también a seguirlo. Es maravilloso leer que ellos lo dejaron todo y le siguieron “al instante”, palabras que se repiten en ambos casos. A Jesús no se le ha de decir: “después”, “más adelante”, “ahora tengo demasiado trabajo”...
También a cada uno de nosotros —a todos los cristianos— Jesús nos pide cada día que pongamos a su servicio todo lo que somos y tenemos —esto significa dejarlo todo, no tener nada como propio— para que, viviendo con Él las tareas de nuestro trabajo profesional y de nuestra familia, seamos “pescadores de hombres”. ¿Qué quiere decir “pescadores de hombres”? Una bonita respuesta puede ser un comentario de san Juan Crisóstomo. Este Padre y Doctor de la Iglesia dice que Andrés no sabía explicarle bien a su hermano Pedro quién era Jesús y, por esto, «lo llevó a la misma fuente de la luz», que es Jesucristo. “Pescar hombres” quiere decir ayudar a quienes nos rodean en la familia y en el trabajo a que encuentren a Cristo que es la única luz para nuestro camino.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18-20)."
마태오복음만 보면,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보시자마자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어부들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분이 부르시자마자 즉시 그분을 따라간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요한복음을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안드레아는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요한 1,35.40).
그는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고,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았고,
예수님과 함께 묵었습니다(요한 1,36-39).
그리고 자기 형 시몬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했고,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요한 1,41-42).
그래서 예수님께서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이미
어부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는 있었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는 어부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즉시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불러 주시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원했던 일이었으니 따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또 원했던 일이었으니 바로 응답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라는 말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의 그들의 마음가짐을 나타냅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기쁜 마음으로'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불러 주셔서 기뻐했을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물을 버리다." 라는 말은 실제로 그물을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직업을 버렸다." 라는 뜻이고,
이것은 "인생을 버렸다.", 즉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다." 라는 뜻입니다.
하고 있던 일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 같은 것은 전혀 없이,
새로 하게 되는 일에 대한 희망과 기쁨만 있었다는 것.
어부들이 새로 하게 된 일은 '사람을 낚는 일'입니다.
(그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낚는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물'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물 속에 있는 사람들을 낚아서 물 밖으로 꺼내는 것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물고기의 경우에는,
물 속에 있는 물고기를 낚아서 물 밖으로 꺼내는 것은 그 물고기를 죽이는 것이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반대가 됩니다.)
어부들은 사도가 되기 전에는 물고기를 '죽이는' 일을 하면서 살았지만,
사도가 된 다음에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는 사도가 된 다음에도 직업을 아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는데,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사도 18,2-3)."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교활동에 필요한 활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는 사실상 직업을 버린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사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일반 신자들에게는)
직업을 버리는 것이 요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6,33).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하느님을 찾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돈을 버는가?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것은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과 신앙생활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복잡할까?
원하는 것이 많으면 인생도 복잡해집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이것도 무시할 수 없고, 저것도 신경 써야 하고,
이 사람도 챙겨야 하고, 저 사람도 만나야 하고...
그러나 원하는 것이 단순하면 인생 자체가 단순해집니다.
희망하는 것, 그것 하나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희망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희망하면 됩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에,
그는 영원한 생명도 원했고, 부유함도 원했고,
십계명을 잘 지키는 것도 원했고, 자기 재산을 지키는 것도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자에게 하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라는 말씀은,
당신의 제자가 되라고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슬퍼했습니다(마태 19,22).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슬퍼한 것입니다.
과연 그는 최종적으로 무엇을 얻게 되었을까?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마태 16,26).
송영진 모세 신부
단 한 사람을 낚는 낚시꾼
11월의 마지막 날 교회는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기념한다.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으로서 형과 같은 어부였으나,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니시던 예수로부터 형과 함께 제자로 불림을 받았다.
안드레아는 벳사이다 출신(요한 1,44), 아니면 카파르나움 출신(마르 1,29)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처음에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였다가 예수의 제자가 된
그 첫 번째 사람이다.(요한 1,35-40)
그리고는 자기 형(신몬 베드로)을 예수께 인도하였다.
신약성서를 살펴보면 안드레아는 복음서에 16번, 사도행전에 1번 등장하는데,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승천, 성령강림 사건에 함께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성령강림 이후 안드레아는 흑해 연안의 소아시아 전역과 오늘날 불가리아와 그리스 지방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도 소생시켰다고 전해진다.
성인의 마지막 종착역은 그리스 아카이아 지방의 파트라스,
여기서 성인은 에게아스 총독의 부인 막씨밀리아를 신앙으로 인도하고
영적 생활을 하도록 권고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총독은 안드레아 성인을 불러 그리스도교에 대한 납득할만한 이해를 요구한다.
성인의 충분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총독은 경비병들에게 지시하여
성인을 구금하고 고문을 가한다.
결국 성인은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매달려 서서히 죽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 ‘X’ 모양의 십자가를 ‘안드레아 십자가’라 부른다.
성인은 죽어가면서도 백성들을 향하여 설교를 하였고, 하늘의 광채가 그를 비추었다.
이에 완전히 정신이 나간 에게아스 총독은 성인을 창으로 찌르며 죽도록 매질하게 하였다.
이렇게 성인은 60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막씨밀리아는 성인의 시체를 거두어 경건하게 장례를 치렀다.
성인의 유해 대부분은 356년 콘스탄티노플의 사도성당에 옮겨졌고,
1208년에는 나폴리 근처 아말피의 성 안드레아 대성당으로 로 옮겨졌다.
유해의 다른 부분들은 로마와 파트로스로 옮겨졌다고 하나 그 진실성은 의심스럽다.
안드레아 사도는 러시아와 스코틀랜드 등 여러 나라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으며,
부르군트 왕가는 안드레아 십자가를 가문의 문장을 삼기도 했다.
부르군트 왕가는 12세기경 ‘안드레아의 십자가’를 발견하여 마르세이유에 보관하였으나
14세기에는 다시 브뤼셀로 옮겨 보관하였다고 한다.
성서에서 안드레아 성인은 형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로 나타난다.
형 베드로가 과격하고 덤벙거리는 유형이라면 동생 안드레아는 신중하고 세심한 성격을 가진 자였다.
복음서에서는 안드레아는 주의력과 끈기가 대단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요한 1,36)는 말을 듣고
예수께서 묵고 계신 곳까지 따라가 그분의 제자가 된다.
그리고는 형 시몬을 예수께 인도하였다.(요한 1,37-42)
며칠씩 따라 다니던 오천 명의 군중을 허기진 채로 돌려보내시지 않으려는 예수님의 의중을 헤아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어린아이를 발견하고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것을 예수님께 전해 드림으로써
빵의 기적을 보기도 했다.(요한 6,8-9)
예수님이 마지막 과월절 명절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온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를 뵙게 해 달라는 간청을 듣고 필립보와 함께 예수께 전해 올리기도 한다.(요한 12,20-22)
또 안드레아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제자와 함께
올리브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시던 예수께로 다가가 재난의 시기와 징조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는, 어떤 일이 있어나도 정신을 차리고, 박해자들 앞에서 주님을 증언해야 하며,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도 했다.(마르 13,3-13)
바로 이런 세심함과 끈기와 다짐이 오늘 성 안드레아 사도를 있게 한 것이다.
위에 언급한 안드레아 성인의 복음선포활동에서 보았듯이,
그는 총독 에게아스의 부인 막씨밀리아를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인도한 대가로 목숨을 바쳐야 했다.
그가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세심하고 주의 깊은 성격 탓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스승인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의 스승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번째 제자들의 소명사화를 전하는 오늘 복음이 더 의미 있게 들리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제자들의 소명사건이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과
갈릴래아 출현의 첫 시점에 있었던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태오는 이 사건을 예수님 공생활의 첫 부분에 배치해 놓았다.
왜일까?
그것은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으면서 스승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고 보고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안드레아 사도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해 낸 것이다.
자기 형 베드로가 그물을 쳐서 많은 사람들을 낚는 어부요 사도였다면(사도 2,14-42),
동생 안드레아는 낚시를 던져 한 사람을 낚는 세심하고 끈기 있는 낚시꾼이며 사도였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단 한 사람을 인도하는 데서 시작됨을 깨닫는 오늘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우리는 ‘신자’ 이전에 ‘인간’으로 부르심 받았다
[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9
김근수 | editor@catholicnews.co.kr
그런데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닐다가 보시니,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기 안드레아 두 형제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부였다. 그러자 그들에게 “내 뒤로 오시오. 당신들을 사람 낚는 어부들로 삼겠소” 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 그리고 그분은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기 요한을 보셨는데 그들은 자기네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배에서 자기네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은 곧 배와 자기네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마태 4,18-22)
예수가 제자를 부른 두 장면으로 엮어진 이야기다. 오늘 본문은 사실 보도라 하기보다 이상화된 장면이다. 초기 제자들의 이름과 직업, 그리고 부르신 장소가 나타나 있다. 둘째 초대는 첫째 초대보다 짧은 후렴처럼 소개된다. 첫째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그물을 버렸는데, 둘째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다. 자녀를 떠나보내는 부모 입장이 아니라 떠나는 자녀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다(1열왕 19,20).
갈릴래아 호숫가는 마태오 복음 16,12까지 예수의 주요 활동 무대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도 갈릴래아 호수, 특히 긴네렛 호수라고 불렸다(민수 34,11). 어부는 호숫가에 발을 담근 채 그물을 던진다. “그물”은 선교에 대한 전망을 고려한 표현이다(마태 13,47).
베드로는 처음부터 시몬으로 소개된다. 베드로는 마태오 복음이 생긴 공동체에 잘 알려져 있었다. 시몬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베드로 또는 시몬 베드로라고 언제나 불린다(예외 : 마태오 17,25). 오늘 본문과 마태 10,2에서 “베드로라고 불리는 시몬”으로 나타난다.
마태 16,16에서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을 예수가 장엄하게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별명이던 베드로가 직무 이름으로 새롭게 규정되는가? 첫 번째 사도(마태 10,2)로서 베드로는 요한 복음 1,40-42와 달리 공관복음(마르코 · 마태오 · 루카 복음 총칭)에서 언제나 첫째로 부름 받았다.
마르코 복음 3,16과 달리 예수가 시몬에게 그 이름을 주었다고 마태오는 말하지 않는다. 바위라는 뜻의 그리스어 베드로는 돌같이 단단한 그 성격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성격을 예수가 베드로라는 별명으로 확인한 것이지 그 성격을 예수가 창조한 것은 아니다(마태 16,19). 제자들 성질머리를 예수도 고치지 못했다. 자기 성격은 자기 탓이다. 별명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이 언급된 사실은 예수가 그들 성격을 확인해 주었다는 뜻일까(마태 10,2-4; 루카 6,16)?
목수 예수가 어부 제자를 부른다. 제자보다 동지(同志)가 더 적절한 번역은 혹시 아닐까. 목수는 어부보다 훨씬 대접받던 직업이었다. 당시 목수는 전문직 중산층에 속하는 호평 받는 직업이었다. 반면 어부는 농부처럼 하층 직업에 속했다. 목수는 가난한 직업이었다는 설교를 아직도 자주 듣는다. 이런 멍청한 설교를 신자들은 언제까지 더 들어야 하나.
그러나 마태오에게 12 제자단 구성은 빠져 있다. 오늘 제자들을 부른 이야기, 마태오를 부르심(마태 9,9)에 이어 10,1에 이미 12 제자가 있는 것으로 전제될 뿐이다. 마태오는 사도(apostolos)라는 단어를 10,2에서만 사용하고, 언제나 제자(mathetai)라는 단어를 쓴다. mathetai는 12 제자들과 공동체의 일치를 나타내는 단어지만 apostolos는 그렇지 않다.
부모를 떠나는 대목은 마태 10,37에 다시 나온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불효를 권유하는 구절이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불효를 부추기고 권장하는 집단이 아니다. 아버지는 유다교를 따르고 자녀는 초대교회를 따르는 경우가 있던 당시 신자들을 위로하려는 구절이다.
예수를 따를수록 부모에게 더 효도해야 한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을까. 인륜도 모르면서 천지의 창조주를 어떻게 알까. 인륜부터 닦는 것이 종교심의 기본이다. 논어도 모르고서 어찌 성서를 알랴. 기본이 되지 않고서 높은 경지를 어떻게 넘볼까. 인성의 기본도 갖추지 않은 성직자들이 마이크를 잡으면 어떻게 될까. 신자들에게 반말하는 성직자들이 적지 않다. 유치원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인간들이다.
제자들을 그렇게 부르듯 예수는 우리를 부르셨다. 예수를 알기에 앞서 우리는 인간으로 하느님께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교 신자로 세례 받는 것보다 앞서 인간으로 세례 받은 셈이다. 인간으로 부름 받은 이 놀라운 사실을 그리스도교 세례보다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어느 종교에 속하느냐보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란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교리를 단순히 아는 것이 곧 예수를 따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회개를 동반한 따름이 진짜 따름이다. 예수를 따름은 내 자신이 또 다른 예수가 되도록 애쓰는 것이다. 가톨릭에서 성직자에게 흔히 붙이는 경칭인 ‘또 다른(alter) 예수’는 성직자에게만 해당되는 용어가 전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또 다른 예수다.
김근수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