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전행사에서 알몸의 젊은이들이 여러 날 동안 합창과 군무로 신을 찬양하던 행사였습니다.
에릭 사티가 이 고대 제전의 춤추는 광경을
피아노 모음곡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티의 피아노 음악은 모두가 짧다.
그리고 소품처럼 규모도 작다. 각각의 곡은 독창적이고, 금욕적인 동시에 관능적이다.
영화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사티의 음악으로는
짐노페디와 그노시엔느 등이 가장 두드러진다.
한국영화 '101번째 프로포즈'는 사티의 짐노페디를 국내에 알리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그의 곡 "Je te veux" 역시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북회귀선(원제:Henry and June)'에서 사티의 음악은 가장 효과적으로 쓰여졌다. 사티의 음악은 이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영화 '프라하의 봄(원제: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에서도 사티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에릭 사티의 대표곡 Gymnopedy 3부작 짐노페디(troi gymnopedies)에 관하여
에릭 사티의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작품을 꼽으라 하면
여지없이 짐노페디 3부작 (troi gymnopedies)이 뽑힐 것이다. 이 작품은 gymnopedy 1 (lent et douloureux), gymnopedy 2 (lent et triste), gymnopedy 3 (lent et grave) 이렇게 총 3부작으로 이루어져있고 그중 1부작인 lent et douloureux 가 우리 귀에 가장 친숙한 곡이리라.
광고 음악으로도 사용됐고 영화 백한번째 프로포즈에서 문성근씨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코피 터져라 연주하던 곡이기도 하고 또 많은 영화 음악가들이 이 곡의 연주 패턴을 모방하여 에릭 사티
그 특유의 스산하고 절제된 심미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짐노페디 3부작은 곡 구성과 연주 패턴이 서로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어 3곡 모두 유사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1부작만 귀에 착 달라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다른 짐노페디 2,3부작을 들어봐도 가슴에 메아리쳐 남는 멜로디는 1부작 뿐이다. 그렇다고 다른 짐노페디 2,3부작이 음악적으로 수준이 떨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마 그것은 멜로디가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기 때문일까?
이런 감정은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 일거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하면 누구나 다 음산하면서도 몽환적인 adagio만를 떠올리듯이 짐노페디하면 1부작의 멜로디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건 누구나 다 짐노페디를 한번 들어본 분이라면 수긍이 가는 공통된 느낌일 것이다.
이하 3부작 짐노페디(troi gymnopedies)의 감상평 (by 박종승)
이 곡을 듣고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울해지면서 심란해진다. 날씨 쌀쌀한 늦가을, 금방이라도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쏟아질 것만 같은 무거운 구름 잔뜩 낀 하늘, 메마른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 아무도 찾는 이 없이 홀로 덩그러니 놓여진 벤치 하나있는 공원, 낡은 외투깃 세우고 펴지지 않은 우산을 들고 어디론가 쓸쓸히 가로수 지나며 걷고있는 중년의 남자, 이 곡을 듣고있으면 이런 풍경들이 마음속에 그려진다.
에릭 사티의 곡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마음속에 뭔가 이미지를 그릴 수 있게 하는 심미적인 부분이 많다. 혹시 이 곡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거나 자기 감성에 맞는 곡이라고 느껴지는 분들이 계시다면 영화 음악가 블래드미르 코스마(vladimir cosma)가 음악을 담당한 영화 디바(diva) 오리지날 사운드트랙 앨범을 강력히 추천해 주고 싶다.
특히 이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 sentimental walk는 짐노페디의 쌍둥이거나 자식뻘되는 곡으로서 그 분위기가 90 퍼센트 이상 흡사하다. 분위기가 흡사하다고 해서 절대 어설프게 짐노페디를 패러디하거나 모방에만 그쳤다는 뜻이 아니라 짐노페디를 들을 때도 sentimental walk 를 들을 때와 같은 감동을 받는다는 얘기다. 에릭 사티 음악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한번 꼭 들어보시기를..
Portrait of Erik Satie (detail) / Suzanne Valadon
에릭 사티 (Erik Satie,1866 ~1925 )의 일생
먼저 사티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그가 동시대의 작곡가 중에서도 매우 독창적이고, 앞선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사티보다 더 뛰어난 작곡가로 여기고 있는 드뷔시나 라벨은 사티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후에도 사티에게서 받은 영향을 공공연하게 말했을 정도이다. 사티가 당시의 프랑스 음악계에서, 그리고 현재의 서양음악사에서 ‘언더그라운드’ 내지는 ‘아웃사이더’로 남게 된 것은 그의 음악이 당시의 음악적 흐름에 따르지 않은 너무나 독창적이고 뛰어난 것이었으며, 그가 풍자 정신이 매우 투철한 음악인이었다는 데에 기인한다.
새로운 세대로 접어들면서, 드뷔시, 라벨, 포레의 매혹적인 음색이 기존의 음악계를 흔들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음악계는 프랑크, 댕디, 혹은 생상의 음악과 같이 방대하고 훌륭한 프레스모풍의 교향곡에도 열중했던 모습을 남기고 있다.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예상 밖의 인물인 에릭 사티는 음악계에 한 획을 긋게 된다. 우수적이며 불가사의한 음악성을 통해 그는 일반화되고 체계화 되어진 기존의 음악관습에 대조를 이루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했으며, 심미성과 예술성만을 추구하던 당시의 음악을 조롱했다. 천부적인 표독스럽고 직선적인 유머감각을 지님 그 별난 작곡가 사티는 당시에 유행하던 겸손하고 절제되어진 솔직하지 못한 유명음악의 추구로부터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예술적으로 다른 세대에 속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그 당시의 수많은 철학적 사상들을 신봉하면서 그가 살던 시대속에 굳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예술종합 대학인 몽쉐르 바투아르에서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던 사티는 1886년 피아노가 주를 이룬 그의 첫 작품(오지브, 사라방드, 3개의 짐노페디)을 작곡한다. 기이한 옷차림과 행동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몽마르트에서 사티는 가끔씩 선술집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생활해 나갔으며 드뷔시와의 친밀한 우정은 사티가 단골 이상으로 자주 드나들던 Auberge du clou에서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여러 가지 신비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던 그 시대의 피해자였던 그는 다양한 장르에 속해있었다. 그는 또 펠라담, 마젤, 보이스, 콘타미네 드 라투어, 그리고 사제임을 자청하던 조세핀의 설교에 영감을 얻어 장미십자회의 집회(1891-95)를 위해 고대양식과 신비주의가 조화를 이룬 음악을 만들었으며, 얼마 후 장미 십자회에 불화가 생기자 사티는 자신만이 유일한 멤버였던 "Metropolitan Churcj of Art and of Christ the Leader"를 창설했다.
정신적으로 개인적인 모순의 포화상태에 있었던 그는 1898년 파리를 떠나 야쿠엘로 갔으며 거기서 그가 죽을 때까지 "미천한 우리의 여인"이란 별칭을 가진 초라한 방에서 생활하게 된다. 또한 그곳에서 "신비에 둘러싸인 사티"는 자신만의 비밀스런 삶을 보내게 된다. 그는 그의 비교적 수줍은 성격을 감추기 위해 몽마르트 카페에서 연주와 유쾌한 유행가의 작곡에 시간을 할애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아마추어로서의 연주활동에 싫증을 느낀 사티는 1905년부터 스클라 캔토럼에서 훗날의 음악공부를 위해 알베르 러셀의 정식 제자로서의 생활을 해 나가게 된다.
당시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자기과시 경향에 대한 영향으로 기이성과 과대망상의 시조가 만연하게 되며 사티는 자신의 역량을 펼치기 위해서 the Belle pogue 시대(1880-1905년 프랑스의 살기 좋았던 시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917년에 쟝콕토와 협력해서 이룩했었던 'Parade'스캔들의 여파로 그 자신의 활동영역이 구심점을 이루게 되었으며 뜻밖의 명성을 획득했다. 신교정주의에 선두주자들 중 한사람으로 간주되어,사티는 레식스와 아쿠엘 학교의 최고의 지주적 위치와 정신적 대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