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경루(多景樓) → 정형(井?) 다권(茶卷) : 송대에 차를 경외(境外)에 반출하는 관의 증명서로, 그 값이 수백만 전에 이를 경우도 있었다. 《宋史 卷三五七 梅執禮傳》 /고려도경/ 다농(茶農) : 청 나라 시인이며 화가인 장 심(張深)의 호. 자는 숙연(叔淵)이고 별호는 양객(良客)임. 추사는 일찍이 다농에게 부탁하여 난설의 부춘매은도(富春梅隱圖)를 그리게 한 일이 있음. /완당집/ 다다익선(多多益善) : 《사기》 회음후전(淮陰侯傳)에 한 고조가 한 신에게 “나는 얼마만큼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다고 보는가?” 하고 물으니, 한 신은 “폐하는 10만쯤 거느리는 데 불과합니다.” 했다. 고조는 “그대는 얼마만큼 거느리겠는가?” 하니 한 신은 “저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했다. /서애2-23/ 다다익판(多多益辦) : 많을수록 일을 처리하기가 더욱 수월하다는 뜻. 한 고조(漢高祖)가 한 신(韓信)과 더불어 수하(手下) 장군들이 군사 몇 명을 통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를 논하다가, 고조가 한 신에게 “그대는 몇 명을 거느릴 수 있는가?”고 묻자 한 신이 “많으면 많을수록 일을 처리하기 쉽다.”고 답한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韓信傳》 /고봉집3/ 다담상(茶啖床) : 교자상 /열하1-24/ 다듬이돌을 닦으리 : 두보(杜甫)의 도의(?衣)란 시에, “수자리 나간 남편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아, 가을이 오매 다듬이돌을 닦누나.[亦知戍不返 秋至拭淸砧]”이라 하여, 가을이 되자 변방으로 수자리 나간 남편이 추위에 떨까봐 옷을 장만하는 아낙의 마음을 노래하였다. 〔용재집〕 다라니(陀羅尼) : 총지(總指)의 뜻을 지닌 범어(梵語)로, 중덕(衆德)을 갖추어 지닌 것을 가리킨다. 법다라니(法陀羅尼)·의다라니(義陀羅尼)·주다라니(呪陀羅尼)·인다라니(忍陀羅尼) 등 네 가지로 나누기도 하고, 혹은 주문(呪文)의 동의어(同義語)로 쓰이는 수도 있다. /오주17-217/ 다라수(多羅樹) : 범어(梵語). 인도(印度)에 흔한 나무. 그 잎으로 불경(佛經)을 썼음. 패엽(貝葉). /해행5-184/ 다래[障泥] : 말을 탄 사람의 옷에 진흙이 튀지 않도록 말의 배 양쪽에 늘어뜨리어 놓은 물건. 주로 가죽 같은 것으로 만듦. /연행7-69/ 다로기[月吾其] : 가죽으로 지은 긴 버선. 가죽의 털이 안으로 가게 지은 것으로 추운 지방의 주민들이 겨울에 신으로 신발로도 쓰임. /연행5-75/ 다리 …… 걸령(乞靈)이로세 : 미상(未詳). 걸령이란 신령에게 빈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다리 가에 수유나무가 있음으로 해서 자연히 수유교(茱萸橋)란 이름이 붙여졌기에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용재집〕 다리 …… 읊조리네 : 눈 속의 행인들 중 누가 시상(詩想)이 더 많은가 하면 큰 수레를 탄 사람보다 다리 저는 나귀를 탄 사람이 더 많다는 뜻으로, 소동파(蘇東坡)의 <증사진하수재(贈寫眞何秀才)>란 시에 “또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 나귀를 탄 맹호연이 눈썹을 찌푸리고 시를 읊으매 움추린 어깨가 산처럼 높네.[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 하였다. 다리 부러진 게 :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 변방에 사는 늙은이의 아들이 말을 타다가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리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위로하였으나, 아버지인 늙은이는 “이것이 도리어 복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 하였는데, 과연 그 후 전쟁이 일어나 몸이 성한 사람들은 모두 전쟁터에 끌려가 십중팔구 목숨을 잃었지만 그 아들은 다리를 다친 탓에 집안에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한다. 《淮南子 人間訓》 〔용재집〕 다리를 …… 바친 : 초(楚) 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왕에게 드렸더니 여왕(?王)이 거짓이라 하여 왼쪽 발을 베고, 무왕(武王)이 즉위한 후 드리니 또 거짓이라 하여 오른쪽 발을 베었다. 문왕(文王)이 즉위해서 또 올리니 마침내 왕이 옥공을 시켜 쪼개어 아름다운 옥을 얻었다. ??????韓非子 和氏?????? 여기서는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어 자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리와 …… 희롱할 : 마음대로 갖고 놂을 뜻한다. 《국어(國語)》 오어(吳語)에 “대부(大夫) 종(種)은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나니 장차 오(吳) 나라를 자기 다리와 손바닥 위에 얹어 놓고 희롱하여 제 뜻을 이룰 것이다.” 하였다. 〔월사집〕 다만 …… 것일세 : 천하의 공의로 보면 당연히 맏이인 백이가 보위(寶位)에 올라야 하지만 아버지 고죽군(孤竹君)이 유명(遺命)으로 숙제에게 보위를 물려주었기 때문에, 백이와 숙제가 각각 의리상 난처한 입장에 봉착하였던 것이고, 이에 두 사람이 저마다 한 걸음씩 물러나 도망가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다만 …… 두렵노라 : 《맹자(孟子) 진심상(盡心上)》에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행을 하는 자는 순(舜)임금의 무리이고,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을 위해 행도하는 자는 도척(盜蹠)의 무리이니, 순임금과 도척의 구분을 알려고 한다면 딴 것이 없다. 이익과 선행의 차이일 뿐이다.” 하였으므로 이 글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다반(茶飯) : 일상의 일. 다방(多方) : 다방은 여러 나라를 가리킨다. 주 성왕(周成王)이 즉위한 이듬해 엄(奄)과 회이(淮夷)가 반란을 일으키니 성왕이 엄을 멸하고 귀국하여 다방에 포고하였다. 그 내용을 적은 글을 다방이라고 한다. 《書經 周書 多方》 /명종실록5/ 다방면에 뛰어났다 :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백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으니 문혜군이 잘한다고 감탄하였다. 이에 백정이 말하기를 ‘저 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은 두께가 없으니 없는 것으로 있는 것에 들어가므로 넓고 넓어서 칼날을 놀릴 수 있다.” 하였다. 다방해(多方解) : 다방은 《서경》의 편명. 다방은 곧 여러 지방이라는 뜻임. 무왕(武王)의 아들 성왕(成王)이 왕위(王位)에 오르자 엄(奄)과 회이(淮夷)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편은 엄을 정벌(征伐)하고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고체(誥?)임. 《類選》 卷六下 經史篇 經書門. /성호7-110/ 다생(多生) : 불가(佛家)의 말로 삶과 죽음을 여러 번 되풀이한다는 뜻. /연행11-373/ 다섯 …… 건 : 정(鼎) 다섯 개에 음식을 담아놓고 먹는 것으로, 고관(高官)이나 귀족의 호사스런 생활을 뜻한다. 〔용재집〕 다섯 …… 아니리요 : 술은 끊었지만 시 지는 일은 그만 둘 수 없으니, 이는 시 잘 짓는 그대가 자꾸 지어주는 시에 차운(次韻)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대’는, 앞뒤의 시들로 보아 읍취헌(?翠軒) 박은(朴誾)을 가리킨다. 〔용재집〕 다섯 가지 …… 달렸으니 : 《좌전》 소공(昭公) 20년에 “선왕(先王)이 다섯 가지 맛[五味]를 잘 조화하고 다섯 가지 소리[五音]을 잘 조화하여 그 마음을 화평케 하고 그 정사(政事)를 이룬다.” 하였다. 여기서는 상대방 부사가 큰 정사를 쉽게 처리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는 뜻으로 말한 듯하다. 〔용재집〕 다섯 가지 걱정 : 장례할 때에 피해야 할 다섯 가지 사항으로, 성곽(城郭)과 구거(溝渠)와 도로(道路)를 피하며 권력가에게 빼앗기게 될 지역과 장차 개간하여 경작할 농지라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성곽·구거·도로·촌락(村落)·우물이라고도 한다. 《近思錄 권9 治法》 다섯 말 : 오마(五馬)는 태수(太守)의 별칭이다. 한(漢) 나라 때 태수의 수레는 다섯 필의 말이 끌었으므로, 태수를 가리켜 ‘오마’라 하였다. 다섯 수레의 책 : 《장자(莊子)》에 “혜시(惠施)는 학문에 방도가 많아 그 책이 다섯 수레나 된다.” 하였다. 책이 매우 많음을 뜻한다. 다섯 지자(止字) : 문왕(文王)의 덕을 말하면서 “인군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치고, 신하가 되어서는 공경에 그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그치고, 아버지가 되어서는 사랑에 그치고 백성들과 사귈 때에는 신(信)에 그쳤다.〔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 爲人父 止於慈 與國人交 止於信〕”는 글을 가리킨다. 다시 …… 없습니다 : 주자는 정좌 공부에만 치중하는 것은 선학(禪學)에 가깝다 하여 지양(止揚)하였으므로, 여기서 ‘또한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는 식의 어투로, 완곡하게 스승 연평의 공부 방법에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茶時) : 臺官들이 일없이 모였다가 해산하던 일. 茶時는 茶禮의 뜻을 딴 것이다. 이 제도는 고려 및 朝鮮朝初에 행하던 것으로, 당시 言責 이외에 별다른 任務가 부여되지 않았던 臺諫들은 특별한 公事가 없을 경우, 으레 景福宮 門 오른편 曲墻에 설치된 즉 城上所에서 교대로 하루 한 차례씩 모여서 茶를 마시고 산회했던 것이다. <李瀷 星湖僿說類選 經史篇八 論史門 茶時> 다시금 …… 것을 : 묵수(墨綬)는 지방관이 차는 인끈이고 융막(戎幕)은 군영(軍營)이다. 사구(絲?)는 고대 신발[鞋]의 위에 끈을 맬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장식으로 여기서는 근신(近臣)의 신분을 뜻하여, 금정(禁庭)은 임금이 있는 대전(大殿)의 뜰이다. 황정견(黃庭堅)의 ‘자첨(子瞻)이 지난 해 봄 이영각(邇英閣)에서 시립(侍立)하고 자유(子由)가 가을, 겨울 사이에 입시(入侍)하면서 저마다 시를 지어 소회(所懷)를 기술하였기에 나도 그 시에 차운한다.’라는 시에 “푸른 신발 밑으로 강 모래를 밟고 도시금 사구를 매고서 금정에서 시립하도다.[江沙踏破靑鞋底 却結絲?侍禁庭]” 하였다. 여기서는 두 구가 도치된 것으로, 대궐에서 근신으로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번진(藩鎭)을 맡아서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월사집〕 다시금 …… 맡기노라 : 언제나 마음을 맑은 풍월(風月)에 두고 살겠다는 뜻이다. 〔용재집〕 다시금 …… 점검했으리 : 황섬이 고향 집을 다시 찾아갈 터인데 그 아우가 먼저 당도하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월사집〕 다용곤(多甬袞) : 태조(太祖)의 열 넷째 아들로 이 자성(李自成)의 군대를 격파하고 북경을 평정하였으며, 조카인 세조(世祖)를 도와 섭정(攝政)하였다. 예친왕은 봉호(封號)임. /연행10-251/ 다음 날 낫게 되는 경사 :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위중한 병이 들었을 때 주공(周公)이 대신 죽기를 비는 축책(祝冊)을 지어 선왕(先王)께 고하고 돌아와 그 축책을 금으로 봉한 궤, 즉 금등(金?)에 넣자 무왕이 다음 날 곧 나았던 고사가 있음. 《書經》 <周書> 金?편. 다정(茶亭) : 국왕 또는 중국 사신이 지날 때에, 이를 환영하는 뜻으로 베푸는 작은 채붕(綵棚 : 여러 가지 색의 실·종이·헝겊으로 꾸민 시렁). 시렁 앞에 사람·짐승 따위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어 늘어 세우고 뒤에는 큰 물통을 세워 놓고 거기에 물을 대면 앞에 세운 형상들의 입속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와 높이 솟는다. 본디 채붕의 설치에는 나례(儺禮)를 아울러 행하게 되어 있으므로, 나례를 생략하는 이 다정을 설행하여 비용을 절약하기도 하였다. ○ 召政府大臣議曰 …… 議者以爲 …… 綵棚有儺禮戱謔之事 茶亭則無儺禮 宜以茶亭迎之(設小綵棚 前列人雖雜象 從棚後植大筒注水 水自雜象口中?出高湧 俗謂之茶亭) <文宗實錄 卽位年六月丁丑> ○ 初右參贊許?啓曰 …… 上曰 …… 然盡革則難衣 只說茶亭小棚可也 …… 姜孟卿啓曰 雖不結大棚 請廣飾茶亭小棚 …… 上曰 予斷不用大棚矣 雖茶亭之棚 亦欲罷去<文宗實錄 二年三月辛丑> 다칠 …… 은혜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문왕(文王)은 백성을 마치 다친 사람처럼 보살피셨다.[視民如傷]”고 하였다. 다투어 …… 있으리 : 무도한 세상을 피하여 낚시질하거나 운산에 숨어지냈으나 지금은 세상이 밝아져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 다행히 …… 계시니 : 강락(康樂)은 남조(南朝) 송(宋) 나라의 사영운(謝靈運)의 봉호(封號)로 강락공(康樂公)을 습봉(襲封)했으므로 사강락(謝康樂)이라고 부르는 바, 사현(謝玄)의 손자로,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서적을 두루 보았으며 서화에도 재능이 있었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안연지(顔延之)와 함께 강좌제일(江左第一)이었는 바, 곧 다행히 우리 집안에도 강락처럼 훌륭한 종형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다행히 …… 안타깝구려 : 황태자의 등극이라는 경사를 알리는 조서를 가지고 온 분을 만났으나 자신은 이미 늙어서 좋은 시를 읊어서 축하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는 뜻이다. 두보(杜甫)의 추흥(秋興) 8수 중 여덟 번째 시에 “훌륭한 시재(詩才)로 일찍이 기상을 구하였더니 지금은 백발의 몸 시를 읊으매 몹시 고개를 떨구노라.[綵筆昔曾干氣象 白頭吟望苦低垂]” 하였다. 〔월사집〕 단(彖)은 《주역》의 하고, 괘(卦)를 풀이한 말로서, 괘사(卦辭)를 말함인데, 문왕(文王)이 지었다 함. 상(象)은 《역경》의 괘사와 효사(爻辭)를 풀이한 것으로서 주공(周公)이 지었다 한다. /성호7-13/ 단경(斷梗) : 단경은 복숭아 나무로 만든 인형인 도경(桃梗)을 뜻한다. 《전국책》 제책(齊策)에, “토우(土偶)가 도경에게 말하기를, ‘지금 그대는 동국(東國)의 도경으로 나무를 깍아서 사람꼴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비가 내려 치수(淄水)가 불어 그대를 떠내려 보내니, 그대는 표표히 떠서 장차 어디로 가려느냐?’ 하였다.” 하였다. 〔월사집〕원호문(元好問)의 시에, “반생을 뿌리박을 데 없어서, 끊어진 짐승처럼 떠도는도다.”[半生無根着 飄轉如斷梗]이라고 하였음. 단계(丹桂) : 과거의 대과(大科)에 급제함을 말한다. 송(宋) 나라 때 두우균(竇禹鈞)의 다섯 아들이 모두 등과하자 풍도(馮道)가 “영춘 한 그루 늙었는데, 단계 다섯 가지 향기롭네.[靈椿一株老 丹桂五枝芳]”라는 시를 지어 주었던 고사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宋史 竇禹鈞傳》 단계(端溪) : 중국 광동성(廣東省) 고요현(高要縣) 동남쪽 난가산(爛柯山)에 있는 벼루의 명산지이다. 〔월사집〕 단계(丹桂)와 …… 여겼지만 : 단계는 계수나무로 과거 급제를 뜻하고, 벽도(碧桃)는 신선이 먹는 복숭아로 장수를 뜻한다. 즉 과거에 급제하지도 못하고 장수를 누리지도 못했다는 뜻이다. 〔월사집〕 단고륜(斷苦輪): 고통스러운 輪回의 고리를 끊음. 단골(單骨) : 주고(主顧). 늘 정해놓고 거래하는 관계를 말한다. 단공(端公) : 남무(男巫)의 속칭. 《칭위록(稱謂錄)》 단공(端公)에, “蜀人之祀神必憑巫 謂巫爲端公”이라고 하였음. /성호6-321/ 단공(檀公) : 삼십육책(三十六策)을 만든 사람이다. 설흔여섯 계책 중 마지막 계책인 삼십육계(三十六計), 즉 달아나는 것이 가장 상책이라 한다. 《南史 王敬則傳)》 여기서는 월사 자신의 나이가 설흔여섯 살이므로, 삼십육계에 따라 환로(宦路)의 티끌에서 달아나 전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월사집〕 단구(丹丘) :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한다. 《초사(楚辭)》에 단구는 신선들이 노는 곳으로 사람이 죽지 않는 고을이라고 했다. 단구(丹邱)1 : 일반적으로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하는데 밤낮으로 항상 밝다고 함. 구체적인 지명으로는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영해현(寧海縣) 남쪽 90리에 있고 사산(獅山)에 가깝다고 하는데, 손작(孫綽)의 천태산부(天台山賦)에 《도사를 단구에서 방문하여, 불사의 복지를 찾네.[訪羽人於丹丘 尋不死之福庭]》라는 구절이 있음. ⇒단구(丹丘) 단구(丹丘)2 : 지명. 문탄공(聞灘公)이 이 고을의 수령을 지낸 일이 있다. 단구부자(丹丘夫子)가 …… 깨닫고 : 단구부자는 신선으로 곧 매계(梅溪) 조위(曺偉)를 가리킨 것이며, 명전(冥筌)은 추상적인 도리와 구체적인 실체를 이른다. 단구자(丹邱子) : 신선을 말함. 《楚辭 遠遊》에 “仍羽人於丹邱兮 留不死之舊鄕”이라 했고, 그 주에 “단구는 해외 신선의 땅인데 주야로 항상 밝다.” 하였음. /완당집3/ 단궁(?弓) : 주나라 때 공(功) 있는 제후(諸侯)나 장수에게 《불은 활》을 내려서 정벌(征伐)할 권한을 주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연려실기술1-40/ 단규(端揆) : 재상(宰相). 재상은 백관의 위에 있어서 국정을 총괄하는 까닭으로 일컫는 말. 단(端)은 정(正)이요, 규(揆)는 헤아린다는 뜻으로, 정무(政務)를 바르게 베푼다는 뜻. 《南史 沈約傳》 /중종5-236/ 단금(斷金) : 마음을 함께 하는 깊은 우정을 말한다. 《주역》 동인괘(同人卦)에 대한 공자의 설명에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함에 그 예리함이 쇠붙이를 끊는다.[二人同心 其利斷金]”는 말에서 유래한다. 《周易 繫辭上傳 第八章》 단금(斷金)의 정 : 두 사람의 마음이 합치되어 매우 친함을 이른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하니 그 예리함이 금을 자를 수 있으며 마음이 같은 말은 그 향기로움이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하였다. 단기지계(斷機之戒) : 무슨 일이고 중도에서 폐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옛적에 맹자의 어머니가 베를 짜다가 아들이 공부하다 돌아온 것을 보고, 짜던 베를 끊어버리며 네가 공부를 중도에 안한다는 것이 이와 같다고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맹자는 큰 유학자가 된 것이다. /담헌2-25/ 단단(斷斷) : 마음이 정성스럽고 전일(專一)한 모양을 형용한 것이다. 《대학》에 “만일 한 신하가 단단할 뿐[斷斷兮] 다른 기량은 없으나 그 마음이 곱고 고와 남을 용납함이 있는 듯하다.” 하였다. 〔월사집〕 단당상(單堂上) : 당상 중에서 가장 낮은 자급(資級), 곧 정 3품(正三品)의 상계(上階). 동반(東班)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서반(西班)의 절충장군(折衝將軍)등을 말한다. 《中宗實錄 二十三年 六月 癸卯》 단두장군(斷頭將軍) : 결사의 장군. 후한(後漢)의 유장(劉璋)의 장수 엄안(嚴顔)이 파촉을 지키다가 장비(張飛)에게 사로잡혀 항복을 권유 받았을 때에, 우리 주(州)에는 단두장군(斷頭將軍)이 있다고 한데서 유래. /대동1-93/ 단락(簞樂) : 단표(簞瓢)의 즐거움. 《단표(簞瓢)》 참조. 단란서(斷爛書) : 《춘추(春秋)》의 변칭임. 송(宋) 나라 왕 안석(王安石)이 처음에 춘추를 주해(注解)하여 천하에 돌리려고 했는데 손 신로(孫莘老)의 서(書)가 먼저 나왔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해 보아 그보다 낫게 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드디어 성경(聖經)을 헐뜯어 폐기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단란조보(斷爛朝報)다.” 하였음. 《주 인지(周麟之)의 春秋經解跋》 단련(鍛鍊) :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달구어 예리한 연장을 만들 듯이 혹독한 관리가 법(法)의 조문(條文)을 교묘히 이용하여 남의 없는 쇠를 만들어 내는 것. 여기서는 법에 따라 죄를 준다는 뜻으로 쓰였다. /선조실록9/ 단련사(團練使) : 관직명. 주로 중국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하인들을 다스리는 일을 맡거나, 중국 사신의 환영·환송에 수행하여 호송하는 일을 맡는데, 수령·군관 등이 이에 임명된다. 이조 초기엔 병마단련사(兵馬團練使)라 하여 지방병권을 관리하거나 민사를 담당하였다. /연행4-90/ 단령(團領) : 깃이 둥근 공복(公服) /연8-269-61/ 단례문(端禮門) → 간당비(奸黨碑) 단류객(鍛柳客) : 단류객은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 강(?康)을 가리키는데 그가 대장일[鍛冶]을 좋아하여 자기집 버드나무 아래서 대장일을 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종 회(鍾會)가 혜 강의 집을 찾아왔는데, 혜 강은 그를 잘 대우하지 않고 그가 가려 할 때 묻기를 “무엇을 들으러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느냐.” 하자 종 회가 “들을 것을 들으러 왔다가 볼 것을 보고 간다.” 하고 떠났다. 그후 이로 인해 종회는 혜강에게 감정을 품고 문제(文帝)에게 참소하기를 “혜 강은 와룡(臥龍 : 흔히 때를 만나지 못한 영웅을 지칭한 말이나 여기서는 잠복해 있는 간웅(奸雄)이라는 뜻이다)입니다 …… ” 하여, 결국 혜 강은 죽임을 당하였다. 《晉書 卷四十九 ?康傳》 /동국 3-47/ 단리(短李) : 당 나라 이 신(李紳)의 별칭. 그는 체구가 아주 왜소했기 때문에 ‘단리’라는 별칭이 있었다. 이 신은 처음에 재질과 절조로써 진용되었다가 뒤에 소인들의 모함으로 거의 화란을 당할 뻔했으나 다시 정인(正人)들의 극력 구호로 풀려나 길이 공명을 누렸다. 《舊唐書 卷一百七十三 李紳傳》 /동국3-31/ 단리(短李) : 唐나라 李紳을 말함. 사람이 短小 精悍하여 당시에 그렇게 불렀음. 唐書 李紳傳. 단망(單望) : 어느 관직에 임명하기에 합당한 단 한 사람의 후보. 세 사람의 후보 즉 삼망(三望)을 임금께 천거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으나, 삼망을 갖추지 못하게 되면 단망으로 하기도 함. /중종실록 46/ 단명(端明) : 단명은 송(宋) 나라 때의 벼슬인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인데 낙양기영회서(洛陽耆英會序)를 쓴 사마광(司馬光)을 가리키는 듯하다. 송(宋) 나라 때 문로공(文潞公) 문언박(文彦博)이 서경 유수(西京留守)로 있으면서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를 모방하여 부필(富弼) 등 13인의 학덕(學德) 높은 노인들과 함께 만든 모임인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을 만들었을 때 사마광이 일흔이 못된 나이로 특별히 참석했다고 한다. 〔월사집〕 단목(丹木) : 동인도(東印度) 원산(原産)인 작은 상록교목(常綠喬木)으로 목재는 활을 만드는 데에 쓰이고, 속의 붉은 부분은 붉은 물감과 한방(漢方)의 통경제(通經劑)로 쓰인다. 다목. /중종실록 51/ 단목(端木) : 춘추 시대의 위(衛) 나라 사람 단목사(端木賜). 자는 자공(子貢)이고 공자의 제자로서 언어(言語)에 뛰어났다. 단문(袒免)1 : 5대조에서 갈라진 친족의 복제(服制), 즉 3달을 입는시마복(?麻服)을 벗어난 경우로서 두루마기의 오른쪽 소매를 벗고 머리에 사각건을 씀. 10촌의 친족 관계를 말함. 단문(袒免)2 : 상례(喪禮)의 한 가지. 왼 팔을 드러내는 것을 ‘단(袒)’이라 하고 관을 벗고 괄발(括髮)하는 것을 ‘문(免)’이라 하는데, 이는 동고조(同高祖) 종형제에게는 복(服)이 없으므로 단문을 하여 애의(哀意)를 표하는 것이다. /성호4-38/ 단문(袒免)의 친척 : 단문은 초상 때에 두루마기의 오른쪽 소매를 벗고 머리에 사각건(四角巾)을 쓰는 것으로 9촌 이상의 친척을 이른다. 상복(喪服)에 있어 삼종형제인 8촌간은 시마삼월(?麻三月)을 입고 9촌부터는 단문을 한다. 단문(袒免)의 형제 : 사종형제(四從兄弟)를 가리킨다. 단문은 상중(喪中)의 복식의 한 가지로 단(袒)은 왼쪽 소매를 걷는 것이고 문(免)은 관을 벗고 머리를 묶는 것인데, 오복(五服) 이외의 친족에 대한 애도의 표시이다. 《예기(禮記)》 <대전(大傳)>에 “5세(世)가 지나면 단문을 하여 동성(同姓)으로 강등한다.” 하였다. 단문(單文) : 고립된 기재(孤立的記載) 단문(端門) : 궁전의 정남향의 문이다. 궁전의 정전(正殿) 앞에 있는 정문. 단문복(袒免服) : 상복은 원래 팔촌까지의 친족이 입는 것인데 이 단문복은 구촌·십촌되는 친족이 입는 복이므로 단문복을 면한 친족이란 열촌이 넘는 친족을 말한다. /연려실기술1-42/ 단문창(段文昌) : 당 헌종(唐憲宗) 때 회채(淮蔡) 지방을 반란을 평정하자 한유(韓愈)가 헌종의 명을 받고 평회서비문(平淮西碑文)을 지었는데, 그 비문에서 배도(裵度)의 일을 주로 서술하고 배도의 공(功)을 제일로 삼았다. 그러나 회채 지방에 들어가서 반적(叛賊)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은 데 있어서는 실로 이소(李?)의 공이 제일이었으므로, 당안공주(唐安公主)의 딸인 즉 이소의 아내가 금중(禁中)에 드나들면서 비문(碑文) 내용이 사실과 어긋난 점을 자주 호소하자 마침내 헌종이 명을 내려 한유가 지은 비문을 깎아버리고 한림학사(翰林學士) 단문창(段文昌)에게 명해서 이소의 공을 제일로 삼아 비문을 새로 짓게 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후세에 단문창이 지은 비문은 알려지지 않고, 한유가 지은 비문만이 널리 알려졌다. 〔월사집〕 단문친(袒免親) : 종고조부(從高祖父)·고대고(高大姑)·재종증조부(再從曾祖父)·재종증대고(재종증대고(再從增大姑)·삼종조부(三從祖父)·삼종대고(三從大姑)·삼종백숙부(三從伯叔父)·삼종고(三從姑)·사종형제 자매(四從兄弟 姉妹)의 일컬음. /세종실록 39권. 123/ 단밀(單密) : 불가어(佛家語)의 단전밀부(單傳密付)의 준말로서 스승의 학문을 적통으로 이어받는 것을 말함. 단바라밀(檀波羅蜜) : 단은 단월(檀越)의 뜻이고 바라밀은 범어에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도 하는데 그 뜻은 피안(彼岸)에 당도하는 것으로 역하였음. /완당집3/ 단발(斷髮) : 단발령(斷髮嶺)은 금강산 서쪽 천마산(天磨山)에 있는데 사람들이 이 고개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보면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한다. 〔월사집〕 단백(單伯) : 주 나라의 경사(卿士). 노 나라의 요청으로 왕명을 받고 제 나라에 숙희를 풀어줄 것을 청하려고 갔다가 잡혔는데, 이듬해 제 나라에서 그의 청을 허락하고 풀어주었음. 관련 사실은 앞의 주 ‘자숙희(子叔嬉)’ 참조. 《左傳 文公 十有五年》. 단보(單父) : 공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이 단보(單父) 지방의 수령이 되었을 때 관아에 앉아 거문고만 연주해도 정치가 잘 되었다고 한다. 이는 복자천의 교화가 퍼져 온 고을에 맑은 정치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呂氏春秋 察賢》 단봉(丹鳳)1 : 단봉궐(丹鳳闕). 임금이 있는 궁궐을 말한다. 단봉(丹鳳)2 : 단혈(丹穴)의 봉황. 단혈은 봉황이 나는 곳으로 훌륭한 인재가 나는 곳을 비유함. 단봉(丹鳳)3 : 임금의 조서(詔書)을 가지고 오는 사자, 또는 조서를 말함. 단봉(丹鳳)은 …… 춤춘다 : 단봉은 황제를 조서(詔書)을 가지고 오는 사신(使臣), 또는 조서를 뜻한다. 상양(商羊)은 전설상의 새로, 큰 비가 내리기 전에 항상 한 쪽 발을 굽히고 일어나 춘을 춘다고 한다. 즉 중국 황제로부터 반가운 조칙이 오고 백성들이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는 뜻이다. 〔용재집〕 단봉문(丹鳳門) : 창덕궁의 돈화문 좌측에 있음. /만기2/ 단부사(單府使) : 판관(判官)이 없는 도호부(都護府)의 부사(府使). ○ 光弼曰 潘碩枰合於邊方之任 而資尙卑 雖不可陞爲堂上 如五鎭等處單府使 則似可爲矣(單府使 乃無判官處) 《中宗實錄 十年正月辛丑》 단사(丹砂) : 수은과 유황의 화합물. 짙붉은 색 또는 적갈색이고 선약(仙藥)의 재료가 됨. 단사(斷辭) : 원문은 ‘斷事’인데,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단사군(丹砂郡) : 진(晉) 나라 갈 홍(葛洪)이 교지(交趾)에서 단사가 난다는 말을 듣고 벼슬을 구하여 구루령(句漏令)이 된 고사를 인용한 것임. /완당집3/ 단산(丹山)1 : 산 이름. 당(唐) 나라 장 간지(張柬之)의 동비백로가(東飛伯勞歌)에, ‘靑田白鶴丹山鳳’이라한 구절이 있는데, 단산은 신서이 가지는 단사(丹砂)가 나오는 산이라 함. /중종4-338/ 단산(丹山)2 : 충청북도 단양(丹陽)을 말함. 단산(丹山)에 …… 일어났어라 : 단산은 봉황이 산다는 산이다. 《예기》 예운(禮運)에서, 기린, 봉황, 거북, 용 네 동물을 사령(四靈), 즉 네 가지 신령스런 동물이라 일컬고 군자가 덕치(德治)를 이루면 이 사령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월사집〕 단상(短喪) : 연산군 때 삼년상(三年喪)의 기간이 길어 불편하다고 억지로 기간을 단축한 것. 곧 궁인(宮人)들은 27일, 무수리(水賜)들은 12일, 사대부는 27일, 사대부는 27일, 일반 서민은 12일로 제한한 것. 경박한 무리들은 이대로 했지만 근신한 사람들은 전대로 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음. 《燕山君日記》 /중종실록35/ 단상(短喪)의 제도 : 상기(喪期)를 짧게 하는 것으로, 연산군이 조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승하하자 거상(居喪)의 기간을 짧게 하였다. 〔용재집〕 단서(丹書)1 : 《대대례(大戴禮)》 편명. 여상(呂尙)이 주 무왕에게 “공경이 태만을 이기게 되면 길(吉)하고 태만이 공경을 이기게 되면 멸(滅)한다.[敬勝怠者吉 笞勝敬者滅]”고 한 말이 있음. 단서(丹書)2 : 단서철권(丹書鐵券). 임금이 공신(功臣)에게 내리는 녹권(錄券). 단서(丹書)3 : 신라 시대의 화랑(花郞) 안상(安祥)과 영랑(永郞)의 무리가 와서 3일 동안을 놀고 갈 때 포구의 암벽(巖壁) 사이에 여섯 글자의 붉은 글씨를 새겼다고 한다. 이른바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란 글씨인데, 여기에 관한 해석은 분분하다. 단서(丹書)4 : 중요한 내용을 붉은 글씨로 써서 깊이 간직한 것을 말함.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등극(登極)한 후에 상보(尙父) 즉 여 상(呂尙)에게, 상고시대의 임금 황제(黃帝)·전욱(?頊)의 도가 남아 있는가고 물었는데, 이 때 여 상은 그것이 단서(丹書)에 적혀 있다고 대답하였다 한다. 《大戴禮 武王踐祚》 /중종실록1/ 단서지계(丹書之戒) : 사상보(師尙父)는 주(周) 나라의 현신(賢臣) 여 상(呂尙)에 대한 칭호. 무왕이 그에게, “예전의 현군(賢君)인 황제(黃帝)·전욱(?頊)의 도를 들을수 있는가?”고 물으니, “단서(丹書)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단서는 붉은 참새가 물어다 떨어뜨려 준 붉은 글씨의 문서로서, 인군이 조심하여야 할 일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중1-226/ 단서철권(丹書鐵券) : 옛날에 공신(功臣)에게 반사하여 대대로 전해 가면서 죄를 사면받게 한 공신녹권(功臣錄卷)으로, 단사(丹沙)로 쓰고 철제(鐵製)로 권(券)을 맸기 때문에 생긴 말. /선조실록36/ 단선원서궁(團扇怨西宮) : 둥근 부채는 반 첩여(班??)의 단선(團扇)을 말하며 서궁은 후궁(後宮)임. /완당집3/ 단수(?脩) : 단수(段脩)로도 쓰는 바, 포를 만들 때에 고기를 두들겨 생강과 계피(桂皮) 등의 양념을 넣고 길게 잘라 만든 것을 이른다. 단수(?脩) : 생강 계피 따위를 섞어서 만든 포. 단수(湍水)와 식색(食色) : 단수는 여울물, 식색은 식사와 남녀 관계. 《孟子 告子 上》에 고자(告子)가 맹자(孟子)와 사람의 본성을 말하는 중, “사람의 성품은 여울물 같아,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어서, 애당초 선과 불선이 없다.”하고, 또 “식욕과 색욕 같은 것이 모두 사람의 성품이다.” 하기도 했다. /중종7-77/ 단수반(?脩盤) : 생강과 계피(桂皮)를 섞어서 만든 육포(肉脯)를 고인 쟁반. /중종실록 49/ 단수실(段秀實) : 당(唐) 나라 때 단 수실(段秀實)이 간신(奸臣) 주 자(朱?)를 상홀(象笏)로 친 고사. 단 수실이 사농경(司農卿)으로 있을 때 주 자가 반(反)하여 단 수실을 인망이 있다 하여 부르자 단 수실은 그에게 가서 거짓 친절한 체하다가 하루는 그와 함께 모사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그의 상홀을 빼앗아 이마를 후려치면서 크게 꾸짖었다. 《唐書 卷一百五十三 段秀實傳》 /동국3-203/ 단심(丹心)은 …… 지극하였네 : 북쪽의 대궐에 계신 임금을 향한 망인(亡人)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이 지극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단약(丹藥) : 먹으면 신선이 된다고 하는 약. 《神仙傳》에 “회남왕(淮南王) 안(安)이 임종할 때에, 먹고 남은 단약 그릇을 뜰 가운데 놓아 두었더니, 닭과 개가 핥아먹고 모두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천상에서 닭이 울고 구름 속에서 개가 짖었다.”하였는데, 허황한 일이라는 뜻이다. /양촌2-180/ 단양(端陽)의 좋은 명절 : 단양은 5월 5일 곧 단오절(端午節)을 가리킨다. 단오첩(端午帖) : 立春이나 立端午節에 祝福하는 글을 기둥에 써서 붙이는 것으로 입춘에 써서 붙이는 것을 春帖子라 하고 단오절에 써 붙이는 것을 단오첩자라 한다. /연려실기술 별집15권 11-146/ 단오첩자(端午帖字) : 단오날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신하들이 임금에게 지어 올리는 첩자(帖子). 궁중의 기둥이나 붙었음. /명종실록1/ 단왕길(端王佶) : 길은 송 휘종(徽宗)의 이름. 일찍이 단왕에 봉해졌었다 /명종실록3/ 단외(段?) : 후한(後漢)사람. 무위 사람으로 헌제(獻帝) 때 장군을 지냈고, 화음에 주둔. 흥평 2년(195) 헌제가 장안으로부터 동쪽으로 돌아갔는데, 단외가 일찍이 옷가지 등 물건과 음식을 바침. 후에 이각을 죽이고 그 전 가족을 허도로 호송해와 탕구장군에 임명되었고 장안을 진수. 《삼국지》「위서」<가후전> 주에 인용된 〈헌제기〉에 의하면, 후에 대홍려ㆍ광록대부가 됨. 건안14년(209)에 사망. 단월(單月) : 월선(月選)에 있어서 대선을 거행하는 달. 즉 우수(偶數)의 달에 뽑는 것을 쌍월, 급선을 거행하는 기수의 달, 즉 기수의 달에 뽑는 것을 단월이라고 한다. /연행5-263/ 단월(檀?) : 또는 단상(檀象), 단(檀)은 단나(檀那)의 약칭. 시주(施主)라 번역한다. 육도(六度) 가운데 보시를 행하는 사람. 단위(端委) : 고대의 예복. 단유(檀楡) : 박달나무와 느릅나무. 옛날에 철이 바뀔 때마다 그 계절의 나무를 비벼대어 새로이 불을 얻는데, 봄에는 느릅나무의 불을, 겨울에는 박달나무의 불을 취함. 여기서는 일 년의 경과를 말함. 단의(丹?) : 천자가 제후를 인견할 때 천자 뒤에 둘러치는 붉은 빛깔의 병풍인데, 여기서는 단의육잠(丹?六箴)의 줄인 말. 단의육잠은 당 경종(唐敬宗) 때 이 덕유(李德裕)가 경종을 풍간(諷諫)할 목적으로 써서 올린 여섯 가지 잠언을 말하는데, 경종이 가상히 여겨 단의에 붙이고 단의육잠이라 불렀다. 《唐書 卷一百八十 李德裕列傳》 단의육잠(丹?六箴) : 당나라 李德裕가 丹?六箴을 지어 敬宗에게 바쳤다. 丹?는 천자가 제후를 대할 때 뒤에 새우는 붉은 병풍이며, 六箴은 宵衣箴·正服箴·罷獻箴·納誨箴·辨邪箴·防微箴이다. /퇴계집7/ 단자(段子) : 단자는 곧 단자(緞子). 광택이 많고 두텁고 무늬가 든 비단. /연산군일기8-269-62/ 단장보(端章甫)로 …… 공서적(公西赤) : 각자의 뜻을 말해보라는 공자의 말에 공서적이 “종묘(宗廟)의 일 또는 회동(會同)에 단장보 차림으로 소상(小相)이 되고자 합니다.” 하였다. 단장보는 현단복(玄端服)과 장보관(章甫冠)이고, 소상은 집례(執禮)를 돕는 사람이다. 〔월사집〕 단장취의(斷章取義) : 문장 전체의 대의(大義)를 밝히지 않고 한 부분만 따서 그 뜻을 취한다는 말. /성호8-188/ 단전(丹篆) : 단전(丹篆)은 옛날 신선들이 읽은 글이다. 그러므로 단전의 짝이라 함은 같은 신선이란 말이다. /승람4/ 단전(丹田) : 배꼽 아래 한 치쯤 되는 곳. /퇴계집2-370/ 단정(丹鼎) : 도가의 약 달이는 그릇. 《瑯環記》에 “천년 묵은 거북이 봉래산 아래 신을 찾아와서 단정 씻은 물을 마시면, 곧 날개가 돋혀 변화 무쌍하게 된다.” 하였다. /양촌집2/ 단정(丹旌) : 상여에 따르는 명정(銘旌)을 말함. 명정은 붉은 천에 쓰기 때문에 일컫는 말임. 단조(丹?)1 : 선가의 단약(丹藥)을 만들어 내는 부엌을 말함. /완당집3/ 단조(丹?)2 : 신선들이 단약을 만드는 단지를 말한다. 단주(丹朱) : 요(堯)의 아들로 오만 방자하여, 요는 임금 자리를 단주에게 전하지 않고, 순(舜)에게 양위하였다 한다. /중종실록9/ 단지 …… 다르지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문왕(文王)은 키가 10척(尺)이요 탕(湯)은 키가 9척이다.” 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이 바다에 돌다리를 놓아 해 뜨는 곳을 구경하려 하자, 신인(神人)이 돌을 몰아서 바다에 넣는데, 돌이 빨리 가지 않는다고 신인이 채찍질하자 돌이 피를 흘렸다 한다. 《藝文類聚 七十九卷》 일설에는 만리장성을 쌓을 때 있었던 고사라 한다. 여기서는 길 가에 서 있는 석장군이 돌로 된 것이므로 이 두 전고(典故)를 차용하여 말한 것이다. 〔용재집〕 단지 …… 무관하다오 : 열관(熱官)은 권세다 당당한 고관대작이다. 월사 자신은 사명(使命)을 받드느라 늘 분주할 뿐이지 권세를 부리는 자리에 앉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월사집〕 단지(丹?) : 천자의 뜰은 전계(殿階)를 붉게 바른다. 그래서 궁전의 섬돌을 《단지》라고 한다. /연행5-300/ 단직(斷織) : 짜던 베를 끊다. 맹자(孟子)가 공부를 중단하고 집에 돌아가자, 맹자의 어머니는 베틀에서 짜던 베를 끊어 놓고 힐책하기를 “네가 공부를 중단한 것은, 마치 이 짜던 베를 필을 채우지 못하고 도중에 끊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는데, 맹자는 그 말에 감동하여 곧 다시 선생에게로 돌아가 크게 학문을 성취하였다. 《烈女傳·母儀傳》 /양촌3-235/ 단처(丹處) : 천자가 제후(諸侯)를 대할 때에 치는 머리 병풍인데, 임금의 처소를 이름. 단청(丹靑) : 회화를 말하는 경우도 있고, 선명한 색깔로서 일이 명백하여 의심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이다. 단파양림(丹?陽林) : 사모하여 만나고 싶다는 뜻. 단파는 붉은 꽃이고 양림은 양지바른 산의 남쪽 숲이니, 양자는 서로 호응하여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좌 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에 “흰 구름은 북쪽 봉우리에 머무르고, 붉은 꽃은 양지 수풀에 빛나도다.” [白雲停陰崗 丹?陽林]하였다. /면암2-64/ 단포(丹苞) : 단혈(丹穴). 봉황이 나는 곳. 훌륭한 인재의 고장을 비유함. 단표(簞瓢) : 밥을 담는 대그릇과 물을 뜨는 표주박으로 빈한한 살림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어질도다, 안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 물[一簞食 一瓢飮]로 누추한 시골에서 지내자면 남들은 그 곤궁한 근심을 감당치 못하거늘, 안회는 도를 즐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雍也> 〔월사집〕 단표(簞瓢) : 안회(顔回)가 한 그릇의 밥[一簞食]과 한 그릇의 마실 것[一瓢飮]으로 누항(陋巷)에 지내며 도를 즐거워한 것을 두고 공자가 어질다고 칭찬하였다. 《論語》 <雍也>. 단표(簞瓢)의 참 즐거움 : 안연(顔淵)의 즐거움을 말한다. 공자가 안연을 두고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항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하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 단표누항(簞瓢陋巷) : 소박한 시골 살림. 공자가 그 제자 안연(顔淵)을 두고 “어질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항에 있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다,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 단하(丹霞) : 산명인 동시에 동명(洞名)임. 마고산(麻姑山)의 서쪽에 있음. /완당집3/ 단혈(丹穴)1 : 단사(丹砂)를 내는 산의 구명. 단혈이 있는 산을 단산(丹山)이라 하며, 그곳에 봉황이 깃든다 함. /동문선1-45/ 단혈(丹穴)2 : 봉황이 나는 곳. 훌륭한 인재가 나는 곳을 비유함. 단혈(丹穴)에 …… 잃었도다 : 단혈은 봉황이 산다는 단산(丹山)의 굴이고 채봉은 오색 무늬의 봉황으로 곧 봉황과 같은 아들을 잃었음을 말한 것이다. 단혈(丹穴)의 …… 있었어라 : 전설상의 산 이름으로, 이곳에 봉황이 산다고 한다. 《山海經 南山經》 훌륭한 자손이 있어 작록(爵祿)을 이어감을 뜻한다. 〔월사집〕 단효(彖爻) : 《주역》의 괘를 설명한 것으로서 단(彖)은 괘의 전체적 의미를 풀이하고, 효(爻)는 한 괘를 이루는 여섯 개의 효를 개별적으로 설명한 것임. 달 아래 …… 못하네 : 두보(杜甫)의 <한별시(恨別詩)>에 “집을 그리워하여 달 아래 거닐며 맑은 밤에 서있고, 아우를 생각하여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대낮에 졸고 있다. [思家步月淸宵立 憶弟看雲白日眠〕” 하였는 바, 이 구절을 인용하여 형제간에 서로 그리워하는 정이 간절함을 비유한 것이다. 달(達) : 세자가 대리할 때 세자에게는 달한다고 한다. /고려실기술 별집 11권 0-331/ 달가(達可) : 서거정(徐居正)의 자이다. 달거여사(達去如斯)하였던 정숙자(程叔子) : 정숙자는 이천(伊川) 정이(程?)이다. 그가 부주(?州)로 귀양가면서 삼협(三峽)의 염예퇴(??堆)를 지날 때 파도가 매우 거세게 일어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랐는데 이천은 홀로 조용히 동요하지 않았다. 이 때 언덕에서 어떤 나뭇꾼이 소리를 높여 “생(生)을 버려서 이와 같은가? 이치를 달관하여 이와 같은가?[捨去如斯 達去如斯]”라고 묻기에 이천이 대답하려 했으나 배가 이미 지나가 버렸다 한다. 《心經 2卷 正心章》 〔월사집〕 달기(?己) : 은(殷) 나라 마지막 임금 주(紂)의 비(妃). 유소(有蘇)의 딸로 주의 총애를 믿고 음탕하고 포악하였는데, 뒤에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그녀를 죽였음. /성호7-140/ 달덕(達德)이 원문에는 달도(達道)로 되어 있으나 앞에 말한 십륜(十倫)의 도가 달도(達道)인 즉 뒤에 말한 지인용(智仁勇) 경성(敬誠)에 대한 것은 달덕(達德)으로 봄이 옳을 듯 함. 달도(??) : 슬프다는 뜻이다. 옛날 경주의 풍속에 정월 첫째 자일(子日), 진일(辰日), 오일(午日), 해일(亥日) 등의 날에는 모든 일을 삼가 함부러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신일(愼日)이라 하였다.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 정월 15일에 까마귀 · 쥐 · 용 · 말 · 돼지의 이변이 있음으로 해서 왕이 금갑(琴匣)에 들어있던 자객의 화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子) · 진(辰) · 오(午) · 해(亥)가 들어가는 날을 신일로 삼은 것이다. 신일을 방언으로는 달도라 하는데 이는 슬프고 시름겨우며 금기(禁忌)한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東國歲時記 正月 月內》 〔용재집〕 달도(達道) : 中庸에서 나온 말인데 喜·怒·哀·懼·愛·惡·欲의 七情이 發할 때에 節度에 맞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 하나는 君臣·父子·夫婦·昆弟·朋友의 사귐이라 하였다. 달도(達道)의 화(和) : 달도는 사람 누구나 모두 행하여야 할 도리로 부자간에는 친함이 있고〔父子有親〕 군신간에는 의리가 있는〔君臣有義〕 등의 오륜(五倫)을 가리킨다. 《중용》에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정이 나타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하니,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는 천하의 달도이다.” 하였는 바, 큰 근본이란 곧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본성을 가리킨 것이다. 달량(達梁)의 변 : 명종 10년(1555) 왜선 70여척이 전라도 영암의 달량포(達梁浦)에서 쳐들어왔던 사건.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고도 한다. /명종실록11/ 달로(達虜) : 조선과 중국의 북방에 살던 종족으로, 그 계통은 분명하지 않으나 시대에 따라 달단(撻?)·몽고(蒙古)·거란(契丹) 등으로 불리던 종족의 일부이며, 이때의 달로는 원(元)이 망한 뒤에 북으로 달아나 흩어져 살던 이들을 말하는데, 명(明)의 북부와 조선의 평안도 북변에서 자주 말썽을 일으켰다. 노(虜)자에 갈음하어 자(子)·노(奴)를 붙여 부르기도 하며, 앞에 건이(建夷 : 건주위<建州衛>의 오랑캐)라 한 것도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선조실록18/ 달마(達磨) : 선종(禪宗)의 시조. 남인도 향지국(鄕至國)의 셋째 왕자로서 반야다라(般若多羅)에게 불법을 배워 대승선(大乘禪)을 제창하고, 양 무제(梁武帝) 때 중국에 건너와 왕을 뵈었으나 뜻이 맞지 않으므로,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들어가 도(道)를 깨달았다고 한다. /양촌 3/ 달마(達摩)의 갈대잎 : 중국 선종의 시조인 달마대사(達磨大師)가 갈대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넜다는 전설이 있음. 달사(達辭) : 왕세자가 섭정할 때 논죄에 관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글. 달월(達越) : 금(琴)이나 슬(瑟)의 밑에 구멍을 내어 그 소리가 더디고 무겁게 하도록 한 것을 이르는 말[疏通瑟底之孔, 使其聲遲重] 달은 …… 하네 : 물방아에 비친 달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물방아는 사람이 없어도 물이 절로 방아를 찧네. [雲?無人水自?]”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달을 …… 괴롭지만 : 달을 보면서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이백(李白)의 송장사인지강동(送張舍人之江東)에 “오주에서 달을 보시거든 천리 밖에 나를 생각해 주시게.[吳洲如見月 千里幸相憶]” 하였다. 〔월사집〕 달이 필성(畢星)에 걸리더니 : 비가 올 조짐이다. 《시경》 소아(小雅) 삼삼지석(漸漸之石)에, “달이 필성에 걸렸으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리로다.[月離于畢 ?滂?矣]” 하였다. 〔용재집〕 달자(?子) : 조선과 중국의 북방에 살던 종족으로 그 계통은 분명하지 않으며 시대에 따라 달단(??), 몽고(蒙古) 등으로 불리었고 본디 말갈(靺鞨)의 별종이라 하나 반드시 한 겨레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함. 이때의 달자는 원(元) 나라가 망한 뒤에 그 종족이 북방으로 달아나 흩어져 살던 것을 말하나 또한 그 종족만은 아니고 그곳의 다른 종족도 섞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조선의 평안도 북변에서 자주 말썽을 일으키기도 하였음. /중종실록40/ 달적(撻賊) : 도둑질하는 달자(撻子). 달자는 중국 북방에 살던 종족으로, 그 계통은 분명하지 않으나 시대에 따라 달단(??)·몽고(蒙古) 등으로 불리웠다. 이때의 달자는 명대(明代)의 호칭으로, 원(元) 나라가 망한 뒤에 북방으로 달아나 흩어져 살던 종족을 말한다. 이들은 명 나라와 조선의 북방에서 자주 말썽을 일으켰다. /명종실록12/ 달존(達尊)1 : 관작(官爵)과 연령(年齡)과 학덕(學德)이 있는 사람. 사람이 누구나 공통으로 높이는 것으로, 연치와 관작과 덕이 높은 것을 삼달존(三達尊)이라 칭한다. 《孟子 公孫丑下》 달존(達尊)2 : 천하에 두루 통하는 존귀한 것으로 고을에서의 나이[齒], 조정에서의 벼슬[爵], 세상을 돕고 백성을 기르는 [德]을 말함. 《孟子》 《公孫丑下》. 달콤하다 …… 친함만하랴 : 《예기》 표기(表記)에, “군자가 사람을 접함은 물과 같고 소인이 사람을 접함은 단술과 같나니, 군자는 담담함으로써 이루고 소인은 달콤함으로써 무너뜨린다.” 한 대목을 차용하였다. 〔용재집〕 달효(達孝) : 누구나 공통으로 일컫는 효로, 공자(孔子)는 일찍이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은 달효라 할 것이다. 효라는 것은 선친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친의 일을 잘 전하는 것이다.” 하였다. 닭 잡고 기장밥 지어 : 《논어》 《미자(微子)》에 한 노인이 공자(孔子)의 문인 자로(子路)를 집에 묵게하고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한 일이 있는데,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이른다. 닭 잡고 오리 잡겠노라 : 당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이인(異人)에게 샀다고 하며 궁예(宮裔)에게 바친 옛 거울에 새긴 문구에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는다.[先操鷄 後搏鴨]” 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왕건(王建)이, “먼저 계림(신라)를 멸하고 뒤에 압록강을 취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닭과 개를 찾으면서 :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을 말한다. 《맹자》 <고자장구 상>에서 맹자가 “사람이 닭가 개가 도망가면 찾을 줄 알지만 마음을 잃고서도 찾을 줄 모르니,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고 하였다. 닭꿈은 …… 재촉했다오 : 사건창(謝建昌)은 진(晉)나라의 명재상인 사안(謝安)을 가리킨다. 그는 꿈에 상관인 환온(桓溫)의 수레를 타고 16리를 가다가 닭을 보고 수레를 멈추었는데, 그후 환온의 지위를 대신한 지 16년만인 유년(酉年)에 죽었다 하는 바, 망인(亡人)이 유년에 죽었으므로 말한 것인 듯하다. 닭울음 …… 출 : 진(晉) 나라 조적(祖?)이 친구 유곤(劉琨)과 한 이불을 덮고 자다가 한 밤중에 때 아닌 닭 울음이 들리자 유곤을 발로 차 깨우면서 말하기를, “이는 상서럽지 못한 소리가 아니다.” 하고는, 일어나 춤을 추면서 말하기를 “천하가 들끓어 호걸들이 다투어 일어나게 되면 나와 그대는 마땅히 중원(中原)으로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晋書 祖?傳》 〔월사집〕 닭울음소리 내는 잔약한 무리들 : 하찮은 재주를 간직한 자를 이른다.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이 진(秦)나라에 들어가 잡혀있었는데, 맹상군에게는 호백구(狐白?)라는 명품이 있었다. 맹상군이 진왕(秦王)의 총애하는 여자에게 구명(救命)을 요청하자, 그녀는 호백구를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진왕에게 바친 뒤였으므로 그녀의 요청에 응할 수가 없었는데, 마침 수행한 문객(門客) 중에 개처럼 도둑질을 잘하는 자가 있어 진나라의 궁중에 들어가 호백구를 훔쳐다가 그녀에게 주고 풀려날 수 있었다. 맹상군이 풀려나 밤중에 함곡관(函谷關)이라는 관문에 이르니, 관문의 규정에 새벽닭이 울어야 관문을 열어주었는 바, 아직 시간이 일러 진군(秦軍)의 추격이 예상되었으나 마침 문객 중에 닭울음소리 흉내를 내는 자가 있어 ‘꼬끼오’하고 울자, 들닭이 모두 울어 관문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史記 孟嘗君傳》 닭을 …… 쓰겠는가 :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인재의 큰 재주를 쓸 것이 있겠냐는 말이다. 자유(子游)가 일찍이 무성(武城)의 읍재(邑宰)가 되어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리자, 공자가 이것을 보고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割鷄 焉用牛刀]” 하고 농담을 하였는데, 이 일을 들어 말한 것이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닭을 잡고 …… 웅비하였으니 : 고려의 태조(太祖)인 왕건(王建)이 건국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후량(後粱) 말제(末帝) 때인 정명(貞明) 4년(918) 중국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한 도사로부터 거울 하나를 얻었는데 그 안에 여러 가지 비기(秘記)가 쓰여져 있었는 바, 그중에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덮칠 것이다.〔先操鷄 後搏鴨〕” 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것은 왕건이 먼저 계림(鷄林) 즉 신라의 경주(慶州)를 점령하고 뒤에 압록강(鴨綠江) 강안(江岸)까지 점령하리라는 예언이었다 한다. 닭을 잡고 기러기를 덮치니 : 비기(秘記)에 나오는 내용으로, 닭은 계림(?林) 곧 경주(慶州)를 이르고 기러기는 압록강(鴨綠江)을 이르는 바, 고려를 창건한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먼저 신라의 경주를 점령하고 뒤에 국경을 압록강 유역까지 확장함을 말한 것이다. 닭잡는 사람 :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을 이른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을 맡아 백성들에게 예악(禮樂)을 가르치자, 공자가 “닭잡는 데에 어이하여 소잡는 칼을 쓰는가?” 하고 농담을 하였는 바, 이 고사를 인용하여 말한 것이다. 담고(擔鼓) : 악기 이름. 항아리보다 좀 작은 것으로서 가죽을 씌워 칠한 것. 《文獻通考 卷三十六 樂九》 /동사강목2-50/ 담노(覃老) : 옹 담계를 말함. /완당집3/ 담담히 …… 담았구나 : 빙호추월(氷壺秋月)이라 하여, 얼음 병에 담은 발빛이란 뜻으로 고결한 인품을 형용한 것이다. 소식(蘇軾)의 증반곡(贈潘谷)이란 시에, “베옷은 때 묻어 검고 손은 갈라 터졌어도, 얼음 호로에 가을달을 담는 건 문제가 안 되네.[布衫漆黑手如龜 未害氷壺貯秋月]” 하였다. 〔용재집〕 담대(澹臺) : 춘추 시대 노 나라 무성(武城) 사람으로 이름은 멸명(滅明), 자는 자우(子羽). 담대(澹臺)는 그의 성이고 충직한 성품을 가졌다. 공자가 무성의 수령이 된 자유(子游)에게 인재를 얻었는가를 묻자 자유가 답하기를 “담대멸명이라는 이가 있는데, 지름길로 다니지 않으며 공사가 아니면 일찍이 나의 방에 이르지 않았습니다.[有澹臺滅明者 行不由徑 非公事 未嘗至於偃之室也]”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 담로(湛盧) → 병산(屛山) 담모(??) : 모(?)는 아이가 나면 머리카락을 잘라서 머리 위에 끼워두는 것인데 ‘담모’란 이것을 드리운 것을 말함. 이는 옛날에 자식이 부모 생전의 수식(首飾)으로서 부모 사후에 제거한다고 함. 담무갈(曇無竭) : 달마울가타(達摩鬱伽陀)의 약칭으로, 한역(漢譯)으로는 법기보살(法起菩薩)이라 한다. 이 보살이 중향성(衆香城)에 상주하면서 항상 설법한다고 한다. 그래서 금강산을 법기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라 한다. 〔월사집〕 담박(澹泊) : 제갈량이 군자의 행실로써 아들을 경계한 글에 “담박이 아니면 뜻을 밝힐 수 없고, 영정이 아니면 멀리 이를 수 없다.[非澹泊 無以明志 非寧靜 無以致遠]”고 한말이 있기 때문임. 《小學 嘉言》. 담병(譚柄) : 말할 때 손에 잡는 주미(?尾)를 말하는데, 옛날 사람들은 손에 주미를 들고 청담(淸談)을 하였다. 《天錄識餘》 /청장2-211/ 담복(?服) : 대상(大祥)을 치른 다음달 하순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내는 담제(?祭) 때 입는 옷. 흰 색이나 옥색(玉色)이다. /선조실록10/ 담소하던 노각진(魯却秦) : 노중련(魯仲連)이 진(秦) 나라 군사를 물리친 것이란 뜻이다. 노중련은 전국시대 제(齊) 나라의 고사(高士)이다. 그가 조(趙) 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 나라 군대가 조 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는데, 이 때 위(魏) 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 나라 임금을 천자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 나라가 방자하게 천자를 참칭(僭稱)한다면 나는 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 하니, 진 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후퇴시켰다 한다. 《史記 十八卷》 담소(談笑)한다는 것은 직접 싸우지 않고 말로써 적을 물리쳤음을 뜻한다. 〔월사집〕 담소하면서 …… 퇴각시켰으니 : 가만히 앉아서 계책으로 멀리 있는 적을 제압한다는 뜻으로, 《전국책(戰國策)》 제책 오(齊策五)에, “술동이와 도마[尊俎]의 사이에서 성을 뽑고 자리 위에서 적을 무찌른다.”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월사집〕 담시(曇始) : 남북조 시대 북위(北魏)의 중 담시(曇始)라는 사람이 발이 희여서 아무리 맨발로 더러운 흙길에 다녀도 그대로 희므로, 백족화상(白足和尙)이란 이름이 있었다. 여기에 한 말은 푸른 눈[蒼雪]과 흰발[白足]을 대신 쓰느라고 한 말인데, 이곳이 절이므로 대체로 중을 가리킨 말이다. /승람4/ 담실(覃室) : 담계(潭溪)의 실(室)로 옹 방강의 서재(書齋). /완당집3/ 담씨(啖氏) : 당(唐) 나라 담 조(啖助)를 가리킴. 자는 숙좌(叔佐). 조 광(趙匡)과 함께 《춘추》를 연구하였음. 송 나라 학자의 《춘추》학설이 모두 이 담씨와 조씨에게서 발단되었음. /성호9-308/ 담암(澹庵) : 송 나라의 충신 호전(胡銓)의 호, 자는 방형(邦衡), 시호는 충간(忠簡). 고종 때 진사가 되고 추밀원 편수관(樞密院編修官)을 맡았는데 금 나라가 침입하자 진회(秦檜)가 화친을 주장함에 상소하여 진회를 벨 것을 청하다가 소주(昭州)로 귀양갔다. 진회가 죽은 뒤 다시 들어와 공부 시랑(工部侍郞)이 되었다. 《宋史》 <胡銓傳> 담운미우(淡雲微雨) : 청음(淸陰) 김 상헌(金尙憲)의 “淡雲微雨小姑祠 菊秀蘭衰八月時”를 인용한 것임. /완당집 3/ 담자(?子) : 춘추시대 사람. 담국(?國)의 군(君)으로 노(魯)에 조현(朝見)하였으며 공자가 사(師)하였다고 한다. /담헌2-2/ 담장을 따라 도망치고 : 매우 황공하여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공자의 선조인 정고보(正考父)의 사당에 있는 정(鼎)에 새겨진 명(銘)에 “첫번째 벼슬을 받자 머리를 숙였고 두 번째 벼슬을 받자 몸을 굽였고 세 번째 벼슬을 받자 허리를 굽히고는 길 가운데를 피해 담장을 따라서 달아났다.[一命而? 再命而? 三命而俯 循牆而走]” 하였다. 《左傳 昭公 7년》 〔월사집〕 담장을 마주한 :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너는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배웠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마치 담장을 마주하고 선 것 같다.” 한 데서 온 말로, 일반적으로 학문을 하지 않으면 이치를 알지 못하면 담장을 마주하고 선 것처럼 앞이 캄캄하게 된다는 뜻이다. 《論語 陽貨》 〔월사집〕 담제(?祭) : 대상(大祥)을 지낸 뒤 한 달을 건너서 지내는 제사. 즉 대상을 치른 뒤 다음다음달[中月]로 초상부터 윤달을 따지지 않고 27개월이 되는 달 하순에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정하여 지내는 제사이다. 제사지내는 식은 대상의 의식과 같다. 《朱子家禮 ?條》 /명종실록15/ 담제(?祭) : 상례에 있어 대상을 마치고 한 달 뒤에 지내는 제사. 아버지가 살아있는 경우의 어머니 상에는 소상을 마치고 하게 됨. 담허(澹虛)한 …… 세우니 : 담허는 마음이 욕심이 없고 깨끗하여 비었음을 이르며, 靈臺는 신령이 머물고 있는 집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영특한 마음을 이른다. 담헌일기(湛軒日記) : 담헌(湛軒) 홍 대용(洪大容)이 1785년(영조 41) 서장관인 숙부 홍 억(洪檍)의 군관이 되어 청 나라에 다녀온 일기. /연행 7-164/ 담화(曇花) : 범어(梵語)의 꽃이름인데 3천 년만에 한 번 꽃이 핀다고 함. /완당집3/ 담회(覃懷) → 정형(井?) 답가(踏歌) : 여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늘어 서서 발로 땅을 굴러 박자를 맞추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다. 〔월사집〕 답교(踏橋) :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다리를 밟는 것으로, 서울에서는 광통교(廣通橋)를 중심으로 하여 열두 다리를 밟으면 그해의 재액(災厄)을 면한다 하였다. 그리하여 달 아래에서 줄을 지어 놀았는바, 하나의 장관을 이루었다 한다. 답렵(踏獵) : 군사 훈련을 검열하기 위하여 호위(扈衛)하는 군사만 데리고 사냥하여 짐승을 잡는 것. ○ 上親閱于箭郊 仍行踏獵(只以扈衛將士打圍獲禽 謂之踏獵) 《中宗實錄 六年四月丙戌》 ○ 傳于政院曰 有雷變且日寒 踏獵行辛 ?權停 《中宗實錄 二十八年十一月庚子》 ○上顧特進官尹任曰 近來軍務至爲解弛 今之踏獵 非爲?獵 欲爲閱武 《中宗實錄 三十一年正月戊辰》 답보(踏寶) : 황제 또는 왕의 도장을 찍는 것을 말한다. 보통 도장을 찍을 때는 답인(踏印)이라고 하지만 황제의 도장일 경우에는 보(寶)자를 써서 답보라 한다. /연행1-484/ 답청(踏靑)1 : ① 봄에 파랗게 나는 풀을 밟으며 산책함을 의미한다. 이는 중국에서 유래한 민속의 하나로서 청명절을 기하여 교외에 산책하면서 꽃과 새들을 즐기고 이를 답청 놀이라고 한다. /연산 5-52-31/ ② 삼월 삼일을 말함. /완당집3/ 답청(踏靑)2 : 음력 3월 3일. 답청절(踏靑節)이라 함. 이 날 각 마을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서 새 풀을 밟으며 화전(花煎)을 지져 먹고 하루를 즐기는데, 이 날 나비가 새로 나온다고 한다. 답청(踏靑)3 : 푸른 풀을 밟는다는 뜻으로 청명(淸明)을 전후하여 들에 나가 노는 것을 이른다. 답축(踏逐) : 찾아보다. 답사(踏査)하다. 답험(踏驗) : 논밭의 위치·토질·작황 등을 알아 보기 위하여 현지에 가서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답호(?胡) : 벼슬아치가 입는 옷의 한 가지. 예복 밑에 입는 조끼형의 것인데, 밑이 길다. 호(胡) 자는 호(●)자와 통용한 것인 듯함. /연산군 일기7-81-24/ 당 덕종(唐德宗) : 당 덕종(唐德宗)이 봉천(奉天)을 위시한 각처에서 난리가 일어나자 육 지(陸贄)의 말에 따라 조서를 내려 천하의 죄수들을 사면해 주고 임금이 스스로 잘못을 덜어놓으니, 거세고 사나운 장졸들이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고 함. 《通鑑節要 卷四十四 黨紀 德宗皇帝上》 당 태종(唐太宗)이 문학관(文學館)을 열어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등 열여덟 명을 뽑아 특별히 우대하고 번(番)을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숙직하며 경전을 토론하게 하였는데, 이를 세상 사람들이 등영주(登瀛州)라 하여 전설상 신선이 산다는 산인 영주(瀛洲)에 오르는 것에다 비겨 영광으로 여겼다. 《資治通鑑 唐高祖武德四年》 〔용재집〕 당(堂) …… 있으리 : 복자천(宓子賤)은 이름은 불제(不齊)이고 자가 자천(子賤)이며 공자의 제자인데, 그가 단보(單父)란 고을을 다스릴 때 자신은 거문고를 타고 당(堂)에서 내려오지 않았으나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한다. 《呂氏春秋 察賢》 〔용재집〕 당(唐) 나라 위응물(韋應物)의 <송최갑오상주(送崔押衙相州)>에 “예악(禮樂)은 유가(儒家)의 자제요, 영웅호걸은 연조(燕趙)의 기풍이네. [禮樂儒家子 英豪燕趙風]”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당(唐)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촉루(促漏) 시에 “남당이 점차 따스해 버들가지는 말을 맬만하니 쌍쌍이 헤엄치는 원앙이 파문을 보호한다.[南塘漸暖蒲堪結 兩兩鴛鴦護水紋]” 하였다. 파문을 보호한다는 뜻이 파문이 수면을 떠 다니는 물오리를 따라가면서 일어나는 것을 형용하였다. 〔월사집〕 당가(唐家) : 어탑(御榻)이나 신좌(神座) 위에 설치하는 것으로, 백목판(柏木板)으로 만든다. 연봉(蓮峯)과 모란(牡丹)을 조각하고 휘장을 달며 처마를 만들고 네 모퉁이에 기둥을 세우며, 안에는 쌍금봉(雙金鳳)을 새기고 동·서·북 삼면에 오봉산(五鳳山)을 그린다. 《退溪文集攷證 卷五 二葉》/고봉집3/ 당가(唐家)의 백마(白馬) : 당(唐) 태종(太宗)이 전진에서 백마를 타고 군사를 호령 지휘했던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됨. 당각지난명(唐恪之難明) : 劉備가 景帝의 子孫이라고 하여 蜀中에서 漢帝가 되어 한나라 황실의 계통을 이었는데 《資治通鑑》에서는 그의 世孫을 밝히기 어렵다 하여 正統으로 인정하지 않고 唐恪의 예를 든 것이다. /연려실기술31-7-100/ 당감(唐鑑) : 송(宋) 나라 범 조우(范祖禹)가 저술한, 당(唐)나라 고조(高祖)로부터 소종(昭宗)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대강을 논평한 사서(史書)이다. 당초에는 11권이었는데 오 상겸(吳相謙)이 주석을 붙여 24권이 되었다. /중종 8-177/ 당감의론(唐鑑議論) : 《당감》에 대한 의론. 《당감》은 송 나라 범 조우(范祖禹)의 찬으로 당 고조(唐高祖)로부터 소종(昭宗)·선종(宣宗)까지의 역사의 대강을 따서 적고 논평을 가한 책임. /성호7-272/ 당강(唐羌) : 후한 화제(後漢和帝) 때 남해(南海)에서 바치는 용안(龍眼)과 여지(?枝)가 백성의 큰 폐해가 되었는데 여남(汝南) 당 강이 상소하기를 “남쪽 지방에는 악충(惡蟲)·맹수(猛獸)가 도처에 가득한데 용안과 여지를 따다가 그 피해를 받아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물건이 대궐에 오른다 하여 반드시 장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화제가 그대로 따랐다. 《後漢書 卷四 孝和·孝?帝紀》 당개(唐介) : 송나라 강릉(江陵) 사람, 자는 자방(子方), 시호는 질숙(質肅). 일찍이 전중시어사 장요좌(張堯佐) 재상 문언박(文彦博) 간관 오규(吳奎)를 탄핵하였고, 희령(熙寧) 초년에 참지정사에 임명되어 누차 왕안석(王安石)과 더불어 쟁론하였음. 《송사》 316. 당거(撞車) : 수레 위에 철(鐵)을 덮고 당목(撞木)을 세우고 횡목(橫木)을 꿰달아매고 앞끝을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한 수레. 《三才圖會》 /동사2-89/ 당거(當車) → 절함(折檻) /동사5-152/ 당검(唐儉) : 唐나라 때에 唐儉이 적국에 사신으로 가 있는데 당나라에서 그 적국을 치려하나 당검이 죽음을 당할까 염려하니 이정(李靖)이 묻기를 “당검의 무리 때문에 군사를 쓰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당경(唐景) : 당륵과 경차. 모두 초나라 사람으로 사부(詞賦)를 잘하였다. 당고(黨錮) : 당쟁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형벌. 후한(後漢)의 말기에 환관(宦官)이 정권을 잡자, 이를 분개하여 공박한 지사(志士)들이 환관에게 미움을 받은 결과 종신 금고(終身禁錮)의 형을 받게 되었음. /성호 8/ 당고(黨錮) :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때 진번(陳蕃), 이응(李膺)등의 정인군자(正人君子)가 환관(宦官)의 발호를 미워하여 태학생들을 거느리고 환관을 공격했는데 환관들이 도리어 그들에게 조정을 반대하는 당인(黨人)이라고 몰아붙여 옥에 가두고 벼슬길을 막았으며, 영제(靈帝) 때 두무(竇武), 진번(陳蕃)등이 환관들을 죽이려 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그들과 뜻을 같이 했던 백여 명이 함께 피살되었던 사건. 당고제현(黨錮諸賢) : 후한의 환제 때 진번(陳藩)·이응(李膺) 등 우국지사가 환관의 발호를 미워하여 태학생을 거느리고 환관을 공격하니, 환관들이 조정을 반대하는 당인(黨人)이라고 몰아 도리어 이들 우국지사를 옥에 가두고 사진(仕進)의 길을 막았으며, 영제 때 두무(竇武)·진번(陳藩) 등이 환관 등을 죽이려 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그와 뜻을 같이하는 백 여명의 우국지사와 함께 피살당한 사건. 당고종(唐高宗) : 태종(太宗)의 재인(才人)인 무씨(武氏)의 미모에 혹하여 이를 황후로 삼아 천륜(天倫)을 어지럽혔음. /중종2-43/ 당고지화(?錮之禍) : 문자 그대로 당인(黨人)의 금고(禁錮)를 말하는 것인데, 후한(後漢) 말기부터 비롯된 말이다. 즉 후한 말 환제(桓帝)·영제(靈帝) 때에, 환관(宦官)들의 권세와 횡포가 심하므로 기개 있는 선배 진 번(陳蕃)·이 응(李膺) 등이 이를 비방 공격하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몰려, 당인으로 지목되는 동시에 많은 선비들이 종신 금고의 화를 당하였다. 뒤에 당인들이 다시 중신 두 무(竇武) 등과 함께 의논, 환관들을 제거하려다가 환관들에 의하여 다수의 당인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後漢書 黨錮傳》 /중종실록1-298/ 당교(唐橋) : 경상북도 함창에 있는 지명이다.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고 신라마저 도모할 계획을 하였는데, 김유신이 이것을 미리 알고 이곳에 당나라 군사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인 술을 취하도록 먹인 뒤 묻었다고 전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9 咸昌縣》 당국자학석경(唐國子學石經) : 당 현종(唐玄宗) 때 현종이 친히 주해한 《금문효경》을 원 행중(元行?)이 소를 지어 돌에 새기니, 이것을 《석대효경(石臺孝經)》이라 하고, 문종(文宗) 때에 또 12경을 새겼는데, 태화(太和) 7년(833)에 시작, 개성(開城) 2년(873)에 완성하여 장안(長安)의 태학(太學)에 안치하였으니, 일명 《개성석경》이라고도 한다. /오주16-55/ 당귀(當歸) : 當歸는 樂名이다. 글자를 풀이하면, “마땅히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되므로 옛날에 친구에게 《당귀》를 선물로 보낸 이가 있었다. 이것은 약을 보낸 것이 아니라, 《돌아가라(벼슬을 버려라)》고 풍자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퇴계집1-195/ 당기임자(當其任者) : 공보(共父)를 이름. 당나라 소종(昭宗) 때의 재상 정계(鄭?)의 고사. 정계는 형양(滎陽) 사람으로 시를 잘 지었는데 해학(諧謔)이 많아 당시에 헐후체(歇後體)라고 명명하였다. 재상에 임명한다는 조서가 내려오자 머리를 긁으며 “헐후한 정오(鄭五)가 재상이 되니 앞으로 일을 알 만하다.”고 하였던 고사가 있음. 《당서》 158. 당뇨 (唐堯)의 손위(遜位) : 요 임금이 나이 많자 순(舜) 임금에게 양위(讓位) 하였는데 순 임그미 섭정(攝政)한 지 28년 만에 요 임금이 죽었다. 《唐書 堯典》 /선조실록16/ 당당한 …… 없느니 : 가의(賈誼)가 귀양갔어도 한(漢) 나라가 융성했듯이, 용재 자신이 귀양왔어도 조선은 융성할 것이라는 뜻이다. 〔용재집〕 당대의 이태백(李太白) : 월사를 기리킨다. 월사의 성(姓)이 이씨(李氏)이고 시문(詩文)에 뛰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월사집〕 당도(當道) : 당도(當道)는 정도(正道)에 부합된다는 뜻으로서 곧 임금을 이끌어 정도에 부합되게 한다는 것. 《孟子 告子下》에 “군자가 임금을 섬길 때는 그 임금을 힘써 이끌어 정도에 부합되게 해야 한다.[君子之事君也 務引其君以當道]”하였음. /고봉집2/ 당랑거철(螳?拒轍) : 힘을 헤아리지 않고 덤벼드는 것을 말한다. 당랑은 미얀마 재비. 거 백옥(?伯玉)은 “너는 당랑을 모르느냐? 팔을 들어 수레바퀴를 항거하는 것은 이기지 못할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였다. 《莊子 人間世》 /청장2/ 당래(唐來) : 원래 백정(白丁)으로 미륵과 강도를 하였는데, 그의 날래고 용맹함이 겨룰 자 없었음. 반정할 때 김포현령 박 영문(朴永文)이 이를 부려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참여됨. /중종2-40/ 당력(唐曆)과 묘휘(廟諱) : 당의 달력과 임금이 죽으면 올리는 휘(諱)인데, 제후의 나라에 내리는 것임. 여기에서는 항복을 받아 달려고가 묘휘를 내리겠다는 뜻. /동사2-184/ 당률소의(唐律疏議): 唐代의 刑法書인 ?唐律?의 주해서. 12편 30권. 원명은 ;律疏?이나 宋대에 명칭이 바뀌었다. 500조로 되어있으며 군주의 전제정치를 다지고 봉건 윤리 및 계급제도를 공고히 하기 위한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당륵(唐勒)과 경차(景差) : 당륵(唐勒)과 경차(景差)는 초나라 대부로서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을 계승한 초사(楚辭) 작가이다. 당림(棠林) : 아가위나무 수풀, 곧 선정(善政)을 베푸는 곳. 주(周) 나라 소공(召公)이 남순(南巡)할 때 감당나무[甘棠] 아래에서 쉬어 머물기도 했다는 고사. 《詩經 召南 甘棠篇》에서 나온 문자로, 김의랑(金議郞)이 방백(方伯)으로 나가는 것을 미화하여 이르는 말이다. 발사(?舍)는 그때 소공이 임시로 집짓고 일을 보던 초막(草幕). /양촌2-100/ 당백전(當百錢) : 조선 고종 3년, 경복궁을 지을 때 만든 엽전. 한 푼이 엽전 1백 푼과 맞먹었다. /면암1-105/ 당번(幢幡) : 신전이나 불당 앞에 세우는 깃발. /연행9-61/ 당벌(黨伐) :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의견이 같은 자는 한 패[黨]로 되고 의견이 다른 자는 공격[伐]하는 것. /경세유표3/ 당벽(當璧) : 초 공왕(楚共王)이 여러 왕자의 길흉을 점치기 위하여 묘정(廟庭)에 몰래 구슬을 묻고 왕잗르을 시켜 절을 하게 했는데, 다른 오아자들은 구슬에서 어긋나고 오직 제 5자(子) 기질(棄疾)은 구슬의 정면(正面)에서 절을 하니, 이는 왕위를 계승할 조짐이라 하였다. 후일에 기질이 과연 왕위에 올라 초 평왕(楚平王)이 되었다. 《左傳昭公十三年》 /연행2-266/ 당보(塘報) : 척후(斥候)하는 군사, 즉 당보기를 가지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적의 동정과 형편을 살펴 알리는 일. 여기서는 전령(傳令)의 뜻으로 쓰였다. /선조실록12/ 당보아(塘報兒) : 적군의 동태와 형편을 살피어 알리는 임무를 띤 사람. 당보군(塘報軍) /선조실록 10/ 당부인(唐夫人) : 唐나라 博陵 사람 崔琯의 조모. 시모 長孫夫人을 지성으로 섬겨 康寧하게 여생을 마쳤는데, 長孫夫人이 죽기에 임하여 말하기를 《자손이 모두 나의 며느리처럼 孝敬한다면 崔門이 어찌 昌大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함. 그리하여 崔琯의 집에 형제 자손의 성대함이 향리의 종족 가운데 비길 이가 드문 정도로 흥성하였음. 小學 善行篇. 당비거철(螳臂拒轍) : 버마재비가 제 어깨로 수레바퀴를 떠받음. 약한 사람이 자기의 힘은 생각지 않고 억센 적에게 대항한다는 비유. /성호사설8/ 당사(唐史) : 두 중국 사신. 아래 글 참조. 〔용재집〕 당사(唐史)와 시명(詩名) : 소언겸이 당(唐) 나라 역사에 밝고 시에 뛰어났다는 것이다. 〔용재집〕 당사고(唐四庫) : 당 현종(唐玄宗)이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 있는 관부(官府)의 책을 갑(甲 : 경(經)임)·을(乙 : 사(史)임)·병(丙 : 자(子)임)·정(丁 : 집(集)임)으로 분류하여 간직하던 창고이다. /청장2-23/ 당상계제(堂上階梯) : 다음에 당상에 오를 차례가 되는 벼슬. /중종실록51/ 당상서(唐尙書) : 오(吳) 나라 상서복야(尙書僕射)인 당고(唐固). 자는 자정(子正)이고, 《국어》에 주를 달았음. 당생(唐生) : 전국 시대 양(梁) 나라 사람 당거(唐擧)를 말한다. 관상을 잘 보아 능히 사람의 장래를 점쳤다. 《史記》 권79. 당성(唐城) : 경기도 남양(南陽)의 옛이름. 당성자(唐城子) : 당성은 경기도 남양(南陽)의 고구려 때 이름이다. 홍유의(洪有義)의 본관이 남양이었으므로 이렇게 호칭한 것이다. 〔월사집〕 당수(棠樹)라 섬서(陝西)의 교화 : 당수는 감당(甘棠)이고, 섬서는 고대 주(周) 나라 때 소공(召公)의 영토이다. 주(周)나라 문왕(文王) 때 남국(南國)의 백성들이 소백(召伯)의 선정(善政)에 감사하는 뜻에서 그가 머물고 쉬었던 감당 나무를 소중히 여겨서 “무성한 감당 나무를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그 그늘에 쉬셨던 곳이니라.[蔽?甘棠 勿剪勿伐 召伯所?]”라 노래하였다 한다. 《詩經 召南 甘棠》 여기서는 허욱(許頊)이 장차 관찰사로서 선정(善政)을 남기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월사집〕 당숙종(唐肅宗) : 숙종은 현종(玄宗)의 셋째 아들로 그가 태자로 있을 때, 안 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다. 현종이 피난차 촉(蜀)으로 가던 중 마외(馬嵬)에 이르렀을 때 부로(父老)들이 길을 가로막고 태자를 머물게 하여 적을 치도록 해 주기를 칭하였다. 이에 태자가 곧 영무(靈武)로 돌아와서 제위에 오른 뒤 현종을 높여 상황천제(上皇天帝)로 삼고 곽 자의(郭子儀)에게 명하여 양경(兩京)을 수복하고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시켰다. 《唐書 卷六, 舊唐書 卷十》 당시고취(唐詩鼓吹) : 금(金) 나라 원 호문(元好問)이 편집한 책으로 당시(唐詩)를 선집(選集)한 것. /중종2-278/ 당시에 …… 방문하였지 : 경루(瓊樓)는 옥으로 꾸민 화려한 누각으로 일반적으로는 달에 있다는 선궁(仙宮)을 뜻한다. 아래 글에서 보듯이 여기서는 용재가 이씨(李氏)임으로 오얏꽃에 비유, 이렇게 말한 듯하다. 〔용재집〕 당시에 …… 보았었지 : 관우(關羽)가 오(吳) 나라의 손권(孫權)과 위(魏) 나라의 조조(曹操)를 어린 아이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월사집〕 당시에 …… 부르네 : 미인을 육년만에 다시 만나니 자신과 정을 나누었던 해월의 이름을 잊고 그저 벼슬아치인 줄만 알고 노야(老爺)라 부른다는 뜻이다. 진진(眞眞)의 병풍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당(唐) 나라 두순학(杜荀鶴)의 《송창잡기(松窓雜記)》에, “당(唐) 나라 때 진사(進士) 조안(趙顔)이 화공에게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 그려진 병풍 하나를 얻었다. 화공이 말하기를 ‘이 여인의 이름은 진진(眞眞)이니, 그 이름을 백일 동안 밤낮으로 부르면 응답할 것이고, 응답하면 백가채회주(百家彩灰酒)를 그림에 부으면 반드시 여인이 살아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조안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여인이 살아나와 웃었다.” 하였다. 여기서는 해월이 육년 동안 이 기녀를 그리워하다가 이제 다시 만났다는 뜻으로 말한 듯하다. 〔월사집〕 당시에 …… 았았는데 : 두보(杜甫)의〈증위좌승시(贈韋左丞詩)〉에 “비단 바지 입은 자는 굶어죽지 않고, 유관을 쓴 사람 몸을 그르침이 많네. [紈袴不餓死 儒冠多誤身]” 하였는 바, 이 구절을 인용하여 말한 것이다. 당시에 …… 있었으랴 : 풍운(風雲)의 제회(齊會)는 훌륭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인데 여기서는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의 만남을 가리킨다. 제갈량이 출사(出仕)하기 전 남양(南陽)의 융중(隆中)이란 곳에서 은거할 때 와룡(臥龍)이라 불리었다. 〔월사집〕 당시에 …… 터인데 : 여기서 군왕은 항우를 뜻하고 거소(居巢)는 범증(范增)이 살던 곳이다. 즉 항우가 조금만 더 참고 유방을 죽였더라면 항우가 천하를 차지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범증이 장량(張良)과 위치가 바뀌어 유후(留侯)에 봉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유(留)는 한 나라 장량(張良)이 봉토(封土)이다. 〔용재집〕 당시의 주인 : 이 시를 받을 남곤을 가리킨다. 〔용재집〕 당옥(黨獄) : 후한 환제 때 환관이 크게 성하므로, 사대부 이 응(李膺) 들이 미워하여 잡아 죽이려 하니, 환관들이 알고, “이 응이 태학 선비들과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비방한다.”고 참소하므로, 황제가 노해 이 응과 그 제자 2백여 명을 종신 금고에 처함. 영제(靈帝) 때 이 응 등이 다시 기용되자, 대장군 두 무(竇武)와 함께 환관들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여 이 응 등 2백 여 인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금고된 자가 6백 ~7백 인에 이름. /중종2-53/ 당우 삼대(唐虞三代) : 성군이 다스리는 태평 성대. 당우는 각기 요(堯) 순(舜)의 나라 이름이고, 삼대는 하(夏) 은(殷) 주(周)를 말한다. 당우(唐虞)1 : 나라 이름. 당은 요 임금의 나라이고, 우는 순 임금의 나라로서 요순을 일컫는 말이다. 당우(唐虞)2 : 순 임금 때에 3년마다 한 번씩 관리의 현부(賢否)를 고과(考課)하였는데, 세 번 고과하여 출척과 상벌을 시행하였다. 《書經 虞書 舜典》 ← 고적 /삼봉2-16/ 당우(唐虞)는 …… 멀고 : 태평성세(太平盛世)를 그리워하는 말로, 당우(唐虞)는 요(堯)·순(舜)이 다스리던 나라 이름인데, 태평성세를 일컫는다. 두보(杜甫)의 시 <우제(偶題)>에 “쓸쓸히 당우(唐虞)는 먼데, 연이어 초한(楚漢)은 위태롭구나. [蕭瑟唐虞遠 聯翩楚漢危]”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당우(唐虞)는 곧 요·순을 가리킨 것으로 당은 요의 나라 이름이고 우는 순의 나라 이름이다. 당우(唐虞)의 …… 세대 : 당은 요(堯) 임금이, 우(虞)는 순(舜) 임금이 다스린 나라 이름인 바, 곧 태평성세(泰平盛世)를 이르는 것이다. 당우(唐虞)의 읍손(揖遜) : 당우는 요(堯)와 순(舜)을 가리키며, 읍손은 읍하고 사양하는 것으로 천자의 지위를 물려주려 하자, 서로 사양하고 받지 않음을 이른다. 당육전(唐六典) : 당나라 현종(玄宗 : 이름은 융기(隆基))가 찬칙(撰勅)하고 이 임보(李林甫 : 현종의 신하)가 칙명을 받들어 주석[註]하였다. 당대의 관제를 가지고 주를 내고, 전대(前代)의 변천[沿革]한 것과 당대(當代)의 관제를 첨부하여 기록한 것. 개원(開元) 10년(722)에 수서(修書)에 착수하여 개원 27(739)에야 완성하였다. 이 책은 30권으로 되었다. 여기서는 윤리에 벗어난 자를 치죄하는 법률 책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하곡집 1/ 당음(唐音) : 당시(唐詩) 5언·7언을 모은 시집 《오칠언당음(五七言唐音)》을 말한다. 당음(棠陰) : 옛날 주(周) 나라의 소공(召公)이 남국(南國)을 순행하며 문왕의 정치를 펼 때에 혹은, 감당(甘棠)나무 아래에서 옥송(獄訟)을 처리하였는데, 후백(侯伯)으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다 뜻을 얻었다고 한다. 뒤에 백성들이 그의 은공을 사모하여 차마 그 나무를 베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당음(棠陰)이란 말은 착한 정사, 또는 그 일컫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연행5-22/ 당음(棠陰) : 옛날 주(周) 나라의 소공(召公)이 남국(南國)을 순행하며 문왕의 정치를 펼 때에 혹은, 감당(甘棠)나무 아래에서 옥송(獄訟)을 처리하였는데, 후백(侯伯)으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다 뜻을 얻었다고 한다. 뒤에 백성들이 그의 은공을 사모하여 차마 그 나무를 베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당음(棠陰)이란 말은 착한 정사, 또는 그 일컫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월사집〕 당음비사(棠陰比事) : 책 이름. 1권(卷)에 부록(附錄)이 1권임. 송(宋) 나라 사람 계 만영(桂萬榮)이 지은 것을, 명(明) 나라 상숙(常熟) 사람 오 눌(吳訥)이 산삭(刪削)하고 증보(增補)한 것임. 이 책은 계 만영이 오대(五代)의 화 응(和應)·몽(●) 부자(父子)가 지은 《의옥집(疑獄集)》의 뜻을 취하고, 송(宋) 나라 개봉(開封) 사람 정 극(鄭克)이 지은 《折獄龜鑑》을 참작하여 이 한(李翰)의 몽구체(蒙求體)를 따라 차운(次韻)한 것이 72운(韻)으로 모두 1백 44건인데 각각 주를 냈다. 오 눌이 성운(聲韻)에 구애된 것을 병통으로 여겨 법받지 못할 것과 거듭 나오는 것을 산삭하여 80조목만 남기고 또 빠진 것 33건을 더 넣었다. 그리고 부록 4건으로 따로 1권을 만들었다. 《四庫捷要 子 法家類》 당의(當依) : ‘當?’라고도 한다. 천자가 조정에서 정사를 본다는 의미. ‘?’는 조정의 문 앞에 놓던 도끼 모양을 수놓은 병풍이다. 당일자(當日炙) → 왕희지(王羲之) 당자(?子) : 관안문서(官案文書). 관안문서를 영구히 보관하기 위하여 목패(木牌)에 새겨 벽에 걸었는데, 그 모양이 당(?) 같다 하여 공문서를 “당자”라 했음. 청(淸) 나라 때 6부(6部)에 모두 당방(?房)을 두어 문서를 보관 했음. 여기서는 각 관아에 공문서도 보내지 않았다는 말임. /연행7-164/ 당자(堂子) : 사당(祠堂)·불당(佛堂)을 말함. 자는 명사에 붙는 조사로 별 뜻이 없음. /연행6-432/ 당자소(堂子所) : 불당(佛堂). 일설에는, 청대의 천자(天子)가 토·곡신(土穀神)에게 제사지낼 때 모든 귀신을 부제(?祭)하는 곳이라 함. 그리고 《천지우문(天咫偶聞)》에 의하면, 청 태조(淸太祖)가 개국 초에 미복 차림으로 요등에 가니, 명 나라 등 자룡(鄧子龍)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줄을 알고 몰래 보내주었는데, 청 태조는 그 구의(舊誼)를 잊지 않고 사신(社神)에 부사(부?祀)하게 된 것이라 한다. /연행8-185/ 당장화흔(唐將靴痕) :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에 있는 조룡대(釣龍臺)의 전설을 말한다. 나당(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당장(唐將) 소 정방(蘇定方)이 백마강에 이르자 용(龍)의 조화로 갑자기 바람이 일고 비가 ?아졌다. 그래서 백마를 미끼로 하여 그 용을 낚았는데, 그 때 용의 무게에 의하여 신발 흔적이 바위에 남아 있다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十八 扶餘縣》 /청장2-201/ 당저(當?) : 현재의 왕을 이름. 저(?)는 문병(門屛)의 사이를 말한다. 《예기(禮記)에 “천자(天子)는 당저(當?)하여 선다.”[天子當?而立] 하였다. /삼봉1/ 당절(幢節) : 깃발과 부절(符節)을 가리킨다. 당정(黨正) : 주(周) 나라 제도에, 5백 가(家)가 당(黨)이 되고 당의 장(長)을 당정이라 하였음. /성호5-312/ 당제(堂除) : 중서성(中書省)에서 사람을 뽑아 벼슬을 제수하던 일. 구제(舊制)에는 이부(二部)에서 제수했는데, 수(隋)이래로 5품 이상의 관리는 중서성에게 뽑아서 아뢴 후에 임명하였다. /삼봉2-105/ 당조(唐朝) : 원(元)나라 사람. 염초법(鹽?法)의 폐괴함을 조진(條陳) 하였음. /연행3-45/ 당종(唐宗)이 …… 얻었고 : 당종은 당(唐)나라 현종(玄宗)으로 보이나 확실하지 않으며, 공원(公遠)은 도사의 이름으로 보이나 공원의 지팡이는 미상이다. 삼장(三章)은 세 벌이고 우의(羽衣)는 신선이나 도사가 입는 옷이다. 당종지독무(唐宗之?武) : 당의 임금이 함부로 전쟁을 하여 무예를 더럽힘으로써 그가 군사적으로 실패한 것. 즉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것을 말한 것이며, 본문 8월조에도 당군이 회군하던 기록이 있다. /연행1-263/ 당중우(唐仲友) : 송 나라 금화(金化) 사람, 이름은 흥정(興正). 그는 진사로서 시정을 논하여 서강(西江)의 제형(提刑)이 되었으나 주자에게 탄핵을 받아 그만두고 경제학에 힘썼다. 저서에는 《육경해(六經解)》·《제사정의(諸史精義)》·《황극경세도보(皇極經世圖譜)》가 있음. /성호7-121/ 당직(當直) : 당직청(當直廳)의 당직 금부도사(禁府都事) /연려실기술18-4-527/ 당진(黨進) : 송 나라 장군 당 진(黨進)이 몸이 비대하고 식량이 커서 많이 먹었다.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는 배를 만지면서, “배야 내가 너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였다. 어느 사람이 옆에 있다가, “장군이 배를 저버리지 아니하였지마는 배가 장군을 저버려서 먹기 만하고 한 가지 지려(智慮)도 내지 않습니다.”하였다. /대동7-143/ 당차(當差) : 승려가 환속(還俗)하면 나라에서 정한 속인(俗人)의 노역(勞役)을 부단시키는 것. /세종실록 27-322/ 당참(堂參) : 수령·첨사·만호 등이 신임 또는 전임할 때에 이조 또는 병조에 문안하고 바치는 예물. /중종8-239/ 당참예물(堂參例物) : 관리들이 직책을 옮길 적에 바치는 예물로 정 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하의 수령 들이 임명장을 받고나서 이조(吏曹)나 의정부(議政府) 혹은 병조(兵曹)에 들러 바친다. /중종실록47/ 당참전(當參錢) : 수령이 새로 나가거나 다른 고을로 옮길 때에 단골 서리(書吏)에게 주는 돈. 당참채(堂參債). /중종실록35/ 당체(唐?) : 당체화(唐?花)는 곧 자형화(紫荊花)인데, 서로 다닥다닥 붙어서 피었으므로 형제에 비유. /해행5-570/ 당탑(??): 파도,폭포,종고(鐘鼓)등의 모든 큰 소리의 형용. 당당 당태종(唐太宗) : 당 태종(唐太宗)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적에 자기를 모해하려는 형 건성(建成 : 당시 캐자의 자리에 있었음)을 죽이고서,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였음. /대동7-571/ 당파(??) : 삼지창. 길이 7척, 창끝이 세 갈래인데 가운데의 것이 조금 길고 양쪽 것이 뒤로 오면서 가운데에 합쳐 자루에 달렸음. 또 이 무기를 쓰는 무예. /만기2/ 당표리(唐表裏) : 중국산 표리. 표리는 은사(恩賜) 또는 헌상(獻上)하는 안팎 옷감. /종종실록3/ 당풍(唐風) : 《시경》 국풍(國風)의 하나로서 진(晉) 나라의 가요를 모은 것임. 당(唐)은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기성현(冀城縣) 서쪽에 있었으며, 제요(帝堯)의 옛 도음임. 주대(周代)에 이르러 성왕(成王)의 아우 우숙(虞叔)이 당후(唐侯)에 봉하여졌는데 뒤에 곡옥(曲沃)으로 옮기고 국호를 진(晉)으로 고쳤음. 《시경》에서는 그 옛 이름을 써서 당풍이라고 했음. 진 나라 사람의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을 표현한 노래가 많이 담겨졌음. /성호1-262/ 당하지언(堂下之言) : 춘추 시대에 종멸(?蔑)이 당 아래에서 숙향(叔向)을 보고 한 마디 말을 하자 숙향이 좋다고 했음. 이로 인하여 좋은 말을 당하지언이라 함. 당현종(唐玄宗) → 갈고(?鼓) 당현종후원죽(唐玄宗後園竹) : 당 현종(唐玄宗)의 후원(後園)에 대나무가 빽빽이 났는데 죽순이 하나도 후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것을 본 현종은 제왕들을 돌아보고는 “부자와 형제간은 서로 친근히 지내기를 이 대나무처럼 하여야 한다.” 하였다. 《事文類聚 後集 卷二十四 竹》 /청장1-287/ 당형(唐衛) : 환관. 당호(堂號) : 오봉(五峯)이 준 전귀당(全歸堂)이라는 당호를 말한다. 이는 《예기(禮記)》 <제의(祭義)>의 “부모가 온전하게 낳아주셨거든 자식이 온전히 보전하여 돌려보내야 효(孝)라 이를 수 있고, 그 육체를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아야 온전하다고 할 수 있다.[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可謂孝矣 不虧其體 不辱其身 可謂全矣]”는 말에서 취한 것이다. 당화(唐華) : 임금의 딸을 비기는 말이나 출처는 미상. 당황(唐皇) : 방 사방에 벽이 없는 것을 황이라고 함. /완당집3/ 당후(堂后) : 승정원(承政院)의 주서(注書)가 거처하는 곳을 이르나 여기서는 당후관(堂后官)의 약칭으로 곧 주서를 가리킨 것이다. 당후(堂後) : 승정원의 주서(注書)가 거처하는 방을 이른다. 당후(堂后) : 조선조에 승문원(承文院)의 정7품 벼슬아치인 주서(注書)가 거처하는 곳을 가리켜 일컫는 말. 대 …… 생각하고 : 《예기(禮記)》 《사의(射義)》에 “활쏘기는 진퇴주선(進退周旋)을 반드시 예에 맞게 하고 마음과 몸을 바르게 한 뒤에 활을 잡고 조준을 하며, 그런 뒤에 명중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덕행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대(戴) : 해의 상부 주위에 나타나는 작고 둥근 운기(雲氣). 햇무리가 질 때 나타난다. /중종실록 49/ 대(帶): 그 이름을 매개하는 것이다. 개(介)는 고(鼓)·정(鉦)·무(舞)·용(甬)·형(衡)의 사이에 있으니, 무릇 네 가지는 정중이 말하는 “정중(鄭衆)”이 말하기를, “매(枚)는 종유(鐘乳)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정현(鄭玄)이 이르기를, “지금 종유(鐘乳)는 고(鼓)와 무(舞)를 끼고 있다”라고 하였다. 매 곳 마다 아홉을 두었고 사면이 36이다”라고 하였다. 대·소대(大小戴)의 예학 : 대대(大戴)는 《대대예기(大戴禮記)》의 편저자인 한 선제(漢宣帝) 때의 대 덕(戴德)이고, 소대는 《소대예기(小戴禮記)》의 편저자인 대 성(戴聖)인데 대 덕의 조카이므로 세상에서 대·소로 구분하였음. /선조수정실록/ 대가(代加) : 자궁자는 더올라갈 수 없으므로 품계에 오를 사람이 형제나 자식 종질 등에게 대신 그 품계를 받게 하는 일. /연산5-394-12/ → 자궁 대가(大家)의 …… 않는다 : 여수(女?)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의 누님으로 굴원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에 “여수는 나를 붙잡으며 서서히 나를 타이르네.” 하였다. 여기서는 누님의 당부를 대가의 훌륭한 교훈으로 생각하여 마음속에 길이 간직하고, 나이 많은 일개 여인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각(大角) : 별이름으로 동성(棟星) 또는 천동(天棟)이라 하기도 한다. 북두성의 남쪽에 등색(橙色)으로 빛나며 역일(曆日)을 헤아리는 데 기준으로 삼았다. /동사4-119/ 대각(臺閣) :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일컫는 말. 대각국사비(大覺國師碑) : 영통사대각국사비 (靈通寺大覺國師碑)를 말한다. 황해도 개성시(開城市) 용흥동(龍興洞) 오관산 남쪽 영통사터에 있는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사적비로 비문은 김부식(金富軾)이 지었으며, 글씨는 구양순체(歐陽詢體) 해서(楷書)로 오언후(吳彦侯)가 썼다. 대간(臺諫) : 대관(臺官)과 간관(諫官). 곧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집의(執義)·장령(掌令)·지평(持平) 및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사간(司諫)·헌납(獻納)·정언(正言)의 총칭. 또 때로 그 관사 곧 사헌부와 사간원의 뜻으로 쓰임. /중종3-180/ 대감화(大監花) → 화(花) 대개 …… 같은지라 : 사람의 마음은 활물(活物)이라 동일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사람마다 일어나는 생각이 다를 수 있는데도 어린애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누구나 측은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그러한 이(理)가 내면에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대갱(大羹)1 : 오미(五味)를 섞지 않은 육즙(肉汁). 조정에서 대향(大饗)의 예에 현주(玄酒 : 물)와 함께 쓰임. 시문의 풍격(風格)이 고박(古朴) 아담(雅淡)한 것을 비유하는 말. 대갱(大羹)2 : 조미(調味)하지 않고 희생의 고기를 통채로 푹 삶은 국물이다. 《예기》 교특생(郊特生)에 “대갱을 조미하지 않는 것은 그 바탕[質]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하였고, 예기(禮器)에는 “태고의 국은 그냥 육즙(肉汁)일 뿐 소금이나 매실로 간을 맞추지 않는다.” 하였다. 위의 현주(玄酒)와 이어서 설명하면, “지리하고 만연(蔓延)한 말을 성현의 말에 첨가하는 것이 마치 다른 외부적인 재료를 현주와 대갱에 첨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하였다. 대거(對擧) : 둘 이상의 과거(科擧)를 상대적으로 시행하는 일. 가령 문과시(文科試)를 설행(設行)한 경우, 그 상대로 무과시(武科試)를 아울러 설행하는 과거를 말함. /선조실록6/ 대건(大蹇) : 난처한 지경에 처했다는 뜻. 건(蹇)은 《주역(周易)》의 괘명(卦名)으로 험난함이 앞에 있어서 나아갈 수 없다는 의미이다. /선조실록32/ 대걸·소걸(大桀·小桀) : 《맹자》 고자(告子) 하에, “10분의 1을 세(稅)로 하는 것은 요순(堯舜)의 도(道)인데, 요순의 도보다 경하게 하는 것은 대맥(大貊)의 소맥(小貊)이고, 요순의 도보다 중하게 하는 것은 대걸(大桀)의 소걸(小桀)이다.” 한 데서 보인다. ← 소걸 /성호5-186/ 대경(大經) : 당·송(唐宋) 시대에 대학(大學)의 교수(敎授)과목, 또는 진사시(進士試)에서의 경서의 구분으로서, 경서의 분량에 따라 대·중·소로 나누었는데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달랐으나, 대경은 대체로 《예기》·《좌전》을 가리킴. 《당서(唐書)》 선거지(選擧志)에, “凡禮記春秋左氏傳 爲大經 詩周禮儀禮 爲中經 易尙書春秋公羊傳穀粱傳 爲小經”이라 보인다. /오주16/ 대계년(大計年) : 명 나라 때 외방(外方) 관원의 성적을 3년마다 고사(考査)하였는데, 그 해를 대계년이라 함. 경관(京官)을 고사(考査)하는 것을 경찰(京察)이라 함. /연행2-244/ 대공복(大功服) : 오복(五服)의 하나. 종형제(從兄弟)·자매(姉妹), 중자부(衆子婦), 중손(衆孫)·중손녀(衆孫女), 질부(姪婦)와 남편의 조부모(祖父母), 백숙부모(伯叔父母), 질부(姪婦), 남편이 입후일 경우 남편의 생가부모의 상사(喪事)에 아홉 달 동안 입은 복제이다. 《朱子家禮 大功條》 /명종실록15/ 대공선(大空禪) : 소승(小乘)의 편공(偏空)에 상대말로서, 대승 구경(大乘究景)의 공적(空寂)을 대공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그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 곧 대승의 열반을 말한다. /양촌2-57/ 대공친(大功親) : 대공을 입어야 하는 친족. 대공은 친소(親疎)에 따라 구분한 복상제도(服喪制度)인 오복(五服 : 참최<斬衰>·자최<齊衰>·대공·소공<小功>·시마<?麻>)의 하나로, 비교적 올이 굵은 베로 상복을 만들어 9개월 동안 입으며, 중자처(衆子妻 : 맏이 아닌 며느리)·질처(姪妻)·당형제(堂兄弟) 등이 대공친이다. /명종실록12/ 대과(大過)에서 취해온 것 : 대과는 《주역》의 괘 이름으로 매우 후장(厚葬)함을 이른다.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옛날에 장례하는 자들은 나무섶을 시신에 입혀 들 가운데에 매장하되 봉분도 하지 않고 나무도 심지 않았으며 상복을 입는 것도 일정한 기한이 없었는데, 후세에 성인(聖人)이 나무섶 대신 관곽(棺槨)을 사용하여 후장하였으니, 이는 대과에서 취한 것이다.” 하였다. 대과는 ‘매우 과하게 한다’는 뜻인 바, 상례(喪禮)는 매우 과하게 하는 것이 도리이므로 말한 것이다. 대관(大棺) : 관을 넣을 외관(外棺). “임금에게는 대관 여덟 치·속(屬) 여섯 치·벽(?) 네 치로 상대부(上大夫)에게는 대관 여덟 치·속 여섯 치로, 하대부(下大夫)에게는 대관 여섯 치·속 네 치로, 사(士)에게는 대관은 없고 관만 여섯 치의 두께로 한다.” 하였음. /성호9-501/ 대관(臺官) : 사헌부(司憲府 : 예전에 어사대<御史臺>라 부름)의 관원. 대사헌(大司憲) 이하 지평(持平)까지를 이르는 말. /중종실록 51/ 대관(代官) : 수령을 대신하여 일을 분담하는 벼슬아치. /중종8-155/ 대관문무(大觀文舞) : 남조 양(南朝梁)의 문무(文舞) 이름. 주로 궁정(宮廷)에서 아악(雅樂)으로 추는 춤의 일종이며, 교묘(郊廟)의 제사 때 추기도 하였다.《新唐書, 禮樂志 2》 대관안(大官案) : 미상. 아마도 이조(吏曹)에 비치해 놓은 대관(大官)을 지낸 자의 명부, 즉 선생안(先生案) 비슷한 것으로 대관 지낸 이의 이력 등을 기재해 놓은 문안(文案)인 듯함. /중종4-174/ 대관혈(臺官血) : 고려(高麗)의 심 양이 충간(忠諫)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형신(刑訊)을 받았다. 형신을 받으며 흘린 피가 형구에 묻은 것을 가리킨 말. ○ …… 大禪師祖英 淫穢無行 出入臥內 大駭觀聽 請加黜責 以警其餘 …… 王遂大怒命將軍林庇池允輔 鞫●于崇文館 問首發議者 關木索置 碎瓦股間 令人踏其上 血?流地 ●終不言 遂囚于巡馬所 行路者指木索血痕曰 臺官血也 《東史綱目 第十二卷上 庚辰 烈王六年 三月》 대괘(大?) : 큰 마고자. 청 나라의 예복의 한 가지. /연행5-310/ 대교(待敎) : 예문관(藝文館)의 정 8품 벼슬. /중종3-80/ 대구(大?) : 임금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입는 옷이다. ??????주례(周禮)??????에 “상제에게 제사 지낼 때에는 대구(大?)를 입고, 선왕에게 제향할 때에는 곤면(袞冕)을 쓰며, 산천에 제사 지낼 때에는 취면(?冕)을 쓴다.” 하였다. 양식은 곤룡포의 제도와 같으나 옷자락이 길고 소매가 깊으며, 겉은 검은 여우 가죽으로 한다. 띠는 누런빛 실띠를 쓰되 남교(南郊)에서는 청색과 금색(金色)으로 된 방석(方石) 4개를 쓰며, 북교(北郊)에서는 호박(琥珀)을 쓰고, 동교에서는 산호(珊瑚)를 쓰며, 서교에서는 백옥(白玉)을 쓰고, 종묘와 조회(朝會)에는 녹송석(綠松石)을 쓰는데, 모두 금을 물리고 구슬을 꿰어 엮었다. 띠 아래의 좌우편에는 금을 물린 고리에 패낭(佩囊), 표백(?帛 치렁치렁 늘어뜨린 명주 끈)을 각각 둘씩 찬다. 조주(朝珠)는 동주(東珠)를 사용한다. 대군(大君) : 易經 師卦 上六의 爻辭에 “대군의 命이 있다[大君有命]” 하였다. 대군은 임금을 가리켜 한 말이다. 대권(大卷) : 周代의 반주에 맞추어 추던 춤의 한가지. 대궐에서 하례(賀禮) : 오랑캐 후금(後金)을 물리치는 경사가 있으리라고 미리 축하하는 것이다. 〔월사집〕 대귀(大歸) : 사람이 죽어서 장례 때 무덤으로 가서 묻히는 것을 말함. 대규(戴逵) : 대 규(戴逵)는 진(晉)의 은사(隱士). 그는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벼슬하지 않고 책과 거문고를 즐기면서 살았다. 한번은 무릉왕(武陵王) 희(晞)가, 대 규가 거문고를 잘 탄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부르자 “나는 왕의 악공(樂工)은 되지 않겠다.” 하고는 거문고를 사자 앞에서 부수어 버렸다. 《晉書 卷九十四 戴逵傳》 /청장1-154/ 대규(戴逵)를 …… 없다고 : 진(晉)나라의 명필 왕휘지(王徽之)가 산음(山陰)에 살 때, 눈 내린 달밤에 갑자기 섬(剡) 땅에 살고 있는 벗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져 조각배를 타고 밤새도록 노를 저어 찾아 갔는데, 도중에 흥이 다하자 문 앞에서 그냥 되돌아왔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80 王徽之列傳》 대균(大鈞) : 고악(古樂) 중의 큰 악조(樂調). 삼국(三國)의 위(魏)에서 ‘무시(武始) 함희(咸熙) 장빈(章斌)’을 통틀어 대균지악(大鈞之樂)으로 이름함. 대근대본(大根大本) : 군덕(君德). 대금향구(大金香毬) : 도금한 향구로 혼천의(渾天儀)와 같다. 그 가운데 3층으로 된 빗장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고려도경/ 대기(戴記) : 한(漢)나라 때 대성(戴聖)이 주해(註解)한 《예기(禮記)》를 이른다. 대성은 숙부인 대덕(戴德)에게 예를 배웠는데, 대덕은 일찍이 《의례(儀禮)》를 주해하였다. 이 때문에 대덕을 대대(大戴), 대성을 소대(小戴)라 칭하고 《의례》를 대대기(大戴記), 《예기》를 소대기(小戴記)라 하여, 《의례》와 《예기》를 모두 ‘대기’라고도 칭하나 후대에는 주로 《예기》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대덕의 자는 연군(延君), 대성의 자는 차군(次君)임. 《한서》 88. 대기대용(大機大用) : 불가 용어로 대승법(大乘法)을 수지(受持)한 보살승(菩薩乘)에 이른 사람. 여기서는 연자방아의 효용을 말함. 대나(大儺) : 관상감(觀象監)이 주재하여 제석(除夕) 전날 밤 궁중에서 악귀(惡鬼)를 쫓아내던 행사. /동사4-233/ 대나무에는 …… 남았어라 : 중국의 소상강(瀟湘江) 일대에서는 나는 자줏빛 반점이 있는 대나무인 소상반죽(瀟湘斑竹)을 의미함. 전설에 의하면 순 임금의 두 비(妃)인 아황과 여영이 순 임금이 승하하자 눈물을 흘려 대나무에 뿌렸더니 얼룩이 생겼다 한다. 〔용재집〕 대낮에 …… 들리는 듯 : 두 사신의 시가 매우 뛰어나 귀신이 보고 탄복하여 울 것이라는 뜻이다. 두보(杜甫)의 기이백(寄李白)이란 시에서 이백(李白)의 뛰어난 시재(詩才)를 찬탄하여, “붓이 떨어지면 풍우가 놀라고, 시가 이루어지면 귀신이 울었지.[落筆驚風雨 詩成泣鬼神]” 하였다. 〔용재집〕 대내(大內) : 임금이 거처하는 곳. 대전(大殿)을 뜻한다. /중종실록52/ 대내마(大奈麻) → 수에간 사신 대내전(大內殿) : 조선과 왕래가 있던 일본 호족(豪族)의 하나. 백제 온조왕(溫祚王)의 원손(遠孫 : 일본 사료에는 백제 성명왕<聖明王>의 셋째아들 임성<琳聖>이라 하였음)이 주방주(周防州) 다다량포(多多良浦)에 이르러 그 자손이 대내촌(大內村)에 살았으므로 성을 다다량, 씨를 대내라 하였다고 함. 대내씨는 이때에 지금의 일본 중국지방(中國地方)의 서부와 구주지방(九州地方)의 동부를 지배하였음. 전(殿)은 존칭이며, 그 거처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임. /중종실록 35/ 대년(待年) : 죄인의 자녀가 아직 어릴 경우에 성장을 기다려서 수노하는 것을 말한다. /성호4-84/ 대노(代奴) : 상전을 위하여 송사를 대행하는 그 집의 종. /선조실록 2/ 대농(大農) : 국가의 재곡(財穀)을 맡은 관청. 대단(臺端) : 대각(臺閣)의 감찰(監察) 직책을 말함. 당(唐)나라 때 시어사(侍御使)를 ‘대단’이라고 일컬은 것에서 유래함. 대단(臺端)2 : 시어사의 직에 사대(四臺)가 있는데 내사(內事)를 실질적으로 주관하는 직을 대단이라 하고, 타인이 부를 때는 단공(端公)이라 함. 그 중에 집사를 맡은 자를 잡단(雜端)이라 함. 대대(大對) : 대책(對策). 왕구령이 나이 47세에 진사에 급제하였는데 이 대책으로 천자가 손수 장원으로 뽑음. 대대례(大戴禮) : 전한(前漢)의 대덕(戴德)이 《예기》를 줄여서 만든 85편의 책. 지금은 산일되어 40편만이 남아 있다. /성호7-48/ 대대로 …… 남았었지 :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부친은 참찬(參贊) 이몽량(李夢亮)이었다. 백사는 고인이 되었어도 그 부인이 자식을 잘 훈육하였다는 뜻이다. 〔월사집〕 대도(大挑) : 청 나라 때에, 회시에 응하여 합격하지 못한 거인 중에서 지현(知縣)이나 교직(敎職) 등에 임용하는 제도. /연행 4-250/ 대도목(大都目) : 도목 정사(都目政事). 고려와 조선조 때 관원의 치적(治績)을 종합 심사하여 그 결과에 따라 영전(榮轉)이나 좌천(左遷) 또는 파면을 시키는 일. 해마다 음력 6얼과 12월에 실시했으며 6월에 하는 것을 권무정(勸務政), 12월에 하는 것을 대정(大政)이라 함. 준말로는 도목(都目)·도목정(都目政) 도정(都正) /중종실록 46/ 대독(帶犢) : 송아지를 끌고 다니는 것. 한 선제(漢宣帝) 때 발해(渤海)에 흉년이 들어 칼을 차고 도적질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공 수(?遂)가 수령이 되자 그들로 하여금 칼을 팔아 송아지를 사게 하며 타이르기를 “무엇 때문에 송아지를 끌고 다니느냐?”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전(轉)하여 ‘도적질’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漢書 循使傳》 /양촌2-133/ 대동(戴?) : 송 나라 사람. 자는 중달(仲達). 저서에는 《역서사가설(易書四家說)·《六書故》 등이 있다. /오주16-250/ 대동(大同)1 : 여러 백성이 다함께 한다는 뜻. 부세의 명칭 대동세(大同稅)의 약칭. /성호8-322/ 대동(大同)2 : 조선(朝鮮) 시대에 현물로 바치던 공물(貢物)을 미곡으로 환산하여 바치던 제도가 대동법(大同法)인데 이 대동미(大同米)를 보내는 인편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됨. 대동(大東)의 부자(夫子) : 대동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며, 부자는 훌륭한 스승의 명칭으로 곧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가리킨 것이다. 대동미 : 대동법에 의하여 징수되는 쌀. 대동법은 조선 중기 이후 각종의 지방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제(貢物制)를 폐지하고 전결(田結)을 단위로하여 쌀, 무명 따위를 바치게 한 제도. 대동미(大同米) : 현물로 바치던 공물(貢物)을 미곡(米穀)으로 환산하여 전지 1결(1結)에 대하여 일정한 양을 거두어 들이던 쌀. /만기2/ 대동법(大同法) : 대동법은 토산(土産)을 원칙으로 한 공물(貢物)법을 쌀로 종합하여 균등하게 징수하는 수미(收米)법으로 바꾸어서 선혜청(宣惠廳)에서 거두던 세법이며, 광해군 때 경기도부터 실시하여 점차 각지로 확대하였고, 전세(田稅)·삼두미(三斗米) 등과 구별하여 대미동, 대동포, 대동전 등으로 불리웠으며, 조선 왕조 후기 공법(貢法)의 중심이 되었다. /하곡1-205/ 대동부(大同賦) : 현물(現物)로 바치던 공물을 미곡(米穀)으로 환산하여 전세(田稅)와 같이 밭[田] 1결(1結)에 대하여 일정한 양을 거두어 들이던 대동법(大同法)을 이르는데, 임진왜란 뒤에 민폐(民弊)를 덜고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광해군(光海君) 원년에 이 원익(李元翼)의 건의로 시행하였다. /성호4-310/ 대동부가미(大同浮價米) : 대동법(大同法)에 의한 부가미(浮價米). /경제2-186/ 대동비(大同碑) : 사가시전주(四家詩箋註)에 의하면 조선 때 대동전세법(大同田稅法)을 시행하면서 이민구(李敏求)가 비문을 찬(撰)하였다 한다. /청장2-259/ 대동회감(大同會減) : 일본, 특히 대마도는 dfl 나라에 세견선(歲遣船)을 보내어 그들의 산물(産物)을 바치고 우리 산물을 받아 갔는데, 효종 2년(1651)에 공무역(公貿易)의 화폐로 사용하던 공목(公木 : 목은 무명)을 3백 동에 한하여 쌀로 바꿀 수 있게 하였고, 현종 5년(1664)에 다시 1백 동을 더 허가하였다. 이것으로 통산하여 회계 제감(會計除減)한다는 뜻. /해행10-114/ 대두인(大頭人) : 머리 큰 사람이란 말로 이는 나선정벌(羅禪征伐) 때 우리 나라 군사가 모두들 벙거지[戰笠]를 썼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이 말의 출처는 흑룡강(黑龍江) 하류 지역에 사는 견부락(犬部落)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北征錄 五月 二十日條》 대들보 …… 무너져 : 스승이 별세함을 이르는 바, 위의 〈파평(坡平) 윤상사(尹上舍) 재의(在義)에 대한 제문〉의 <태산이 …… 꺾이니> 주 참조. 대들보가 꺾여 : 선생을 잃은 슬픔을 말한다. 공자가 장차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이고 철인이 쓰러질 것이다.”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듣고 ”장차 누구를 우러를 것이며 장차 누구를 본받을 것인가?“라고 하였던 일이 있다. 《예기》 <단궁(檀弓)> 대라천(大羅天) : 삼계(三界)의 밖은 사인천(四人天)이라 하고 사인천 밖은 삼청(三淸)이라 하고 삼청의 위는 대라천이라 한다. 대라천의 위에 또 구천(九天)이 있다고 함. 《酉陽雜俎 玉格》. 이상은(李商隱)의 시에 “曾記大羅天上事 群仙同日詠霓裳”이라 하였음. /완당집3/ 대랑(臺郞) : 상서랑(尙書郞)을 이른다. 대래(大來) : 군자의 도가 크게 행하여지는 시기를 말한다. 《주역(周易)》 태괘(泰卦)에 “작은 것이 가면 큰 것이 온다.” 하였고, 단사(彖辭)에 “군자의 도가 자라나고 소인의 도는 없어진다.” 하였다. /면암1-287/ 대려(帶礪) : 공신으로 책봉되었음을 뜻한다. 《사기》 한 고조(漢高祖)가 공신을 책봉하하면서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되고 태산(泰山)이 숫돌[礪]처럼 될 때까지 나라가 길이 존재하여 자손에게 이어지리라.”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용재집〕 대려(大呂) : 대종(大鍾). 주 나라 종묘의 큰 종으로서 그 중량이 매우 많이 나감. 《사기》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에 “모선생[毛遂]이 한 번 초 나라에 이르면 조 나라로 하여금 구정 대려보다 무겁게 할 수 있다.[毛先生一至楚 而使趙重於九鼎大呂]”는 말이 있음. 대려(帶礪) : 띠와 숫돌. 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작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평평해지는 것. 공신의 집 후손을 길이 단절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에 쓰인 말임. /중종실록1/ 대려(大呂) : 육려의 하나이다. 1·3·5·7·9·11번의 황종(黃鐘)·대주(大簇)·고선(姑洗)·유빈(?賓)·이측(夷則)·무역(無射)은 양(陽)으로 육률(六律)이라 하고, 2·4·6·8·10·12번의 대려(大呂)·협종(夾鐘)·중려(仲呂)·임종(林鐘)·남려(南呂)·응종(應鐘)은 음(陰)으로 육려(六呂)라 한다. 12율의 기본이 되는 소리로 대려(大呂)는 12월에 속하는 소리이며, 응종(應鍾)은 10월에 속하는 소리인데, 모두 음률(陰律)인 6여(呂)의 한 가지임. /경세유표3/ 대려(帶礪)의 맹세 : 공신의 집이 길이 그 작록을 보존함을 말함. 《사기》에 고조(高祖)가 공신의 작록을 봉하는 말에 “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되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될 때까지 나라가 길이 존재하여 자손에게 미치리라.”한 것이 있음. 대려(帶礪)의 바람 : 제왕이 공신에게 작록을 봉하면서 공신의 자손에게 영원히 그 작록이 보존되기를 비는 바람. 한(漢) 나라 고조(高祖)가 공신의 작록을 봉하는 말에 “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되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될 때까지 나라가 길이 존재하여 자손에게 미치리라.”고 한 말이 있다. 《史記 高祖功臣侯者年表》 대려지맹(帶礪之盟) :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 공신들을 나누어 봉작(封爵)하면서 약속하던 말. 즉 황하(黃河)가 작아져서 옷의 띠[帶]같이 되고, 태산(泰山)이 평탄하여 숫돌[礪]같이 되더라도 그 지위를 영구히 보전하게 한다는 의미의 말이다. /중종실록1-288/ 대려훈맹(帶礪勳盟) : 공신의 집은 영구히 대(代)를 단절시키지 않는다는 뜻. 한 고제(高帝)가 공신을 봉작하면서, “황하(黃河)가 띠[帶]처럼, 태산(泰山)이 숫돌[礪]처럼 되더라도, 한(漢)나라 종묘 사직이 있으면, 그대는 절세(絶世)하지 않으리라”고 한 고사에서 나옴. /연행록2-344-5/ 대력(大曆) : 당(唐) 나라 대종(代宗) 이예(李豫)의 연호이다. // 〔월사집〕 대렴(大斂) : 소렴(小斂)한 송장에게 옷을 거듭 입히고 이불을 싸서 관(棺)에 넣기까지의 절차를 말함. /경세유표1/ 대령리(大令梨) : 대령은 왕 헌지의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는데 직을 떠나자 왕민(王珉)이 갈음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헌지를 대령(大令)이라 하고 민을 소령(小令)이라 함. 배는 헌지의 송리삼백첩(送梨三百帖)을 말함. /완당집3/ 대로(大老)1 : 나라의 큰 인물을 말함. 《孟子 離婁章句上》에 “두 늙은이는 천하의 대로인데 돌아왔으니 이는 천하의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했는데, 그 주에 “두 늙은이는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이다.” 했다 /고봉집1/ 대로(大老)2 : 백이(伯夷)를 가리키는 바, 맹자(孟子)가 백이와 태공(太公)을 천하의 대로(大老)라고 한데서 유래하였다. 대로사(大老祠) :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위패를 모신 사당. 효종(孝宗)의 능인 영릉(寧陵)이 있는 여주(驪州)에 있음. 1785년(정조 9)에 세워졌고, 1787년(정조 11)에 정조가 여기에 대로사비(大老祠碑)를 세움. 자세한 내용은 《홍재전서》 권15 <대로사비명(大老祠碑銘)> 참조. 대뢰(大牢) :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있어 대뢰(大牢)·중뢰(中牢)·소뢰(小牢)의 등급이 있는데 대뢰는 소·양·돼지를 한 마리씩 쓰는 것이다. /연려실기술 17/ 대루 : 이른 아침에 대궐로 출근하러 나온 재상과 조정 대신들이 대궐문이 열릴 때까지 대기하는 관사(官舍)를 ‘대루원(待漏院)’이라 한다. 대루란 시간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고문진보 후집(古文眞寶後集)》에 왕우칭(王禹?)이 <대루원기>를 지어 재상이하 관리들이 해야할 의무를 각성케한 사실이 있다. 대루원(待漏院) → 대루원기 대루원기(待漏院記) : 대루원은 당·송 시대에 백관이 아침 일찍 대궐에 도착하여 궁문이 열릴 때까지 대기하는 집이다. 대루원기는 송나라 왕우칭(王禹?)이 옛날 재상의 정치에 힘쓴 것을 서술하여 당시 재상들을 경계한 글이다. /중종5-248/ 대리옥(大理獄) → 棲鵲 대마도(對馬島) : 대마도는 일본 구주(九州)와 우리 나라 사이에 있는 섬.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에는 도주(島主)가 우리 나라 봉작(封爵)을 받았음. 《類選》 卷九上 經史篇七 論史門. /성호7-225/ 대맥(大貊) : 이 말은 《맹자》 고자(告子) 하와, 《공양전(公羊傳)》 선공(宣公) 14년 기사에 보이는데, 《공양전》 소에는 “14~15분의 1을 취하는 것은 대맥(大貊)의 도(道)이고, 12~13분의 1을 취하는 것은 소맥의 도이다. 그러므로 10분의 1보다 적게 징수하는 것은 대맥의 소맥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성호3-233/ 대면(對眠) : 송 나라 때 소식(蘇軾)이 그 아우 소철(蘇轍)을 만나서 《어찌 알랴, 풍우의 밤에 다시 이렇게 대하여 서로 잘 수 있을지?[那知風雨夜 復此對相眠]》라고 한 말이 있다. 대명(大名) …… 법 : 성대한 명성을 얻으면 화를 초래하기 쉬워 오래 있기 어렵다는 뜻으로 《사기(史記)》 월세가(越世家)에 보이는 범려(范?)의 말이다. 〔용재집〕 대명(大明)의 해와 달 : 대명은 명(明)나라를 높여 칭한 것으로, 곧 옛날 명나라의 좋은 시절을 말한 것이다. 대명력(大明曆) : 금 태종(金太宗) 때 사천관(司天官) 양 급(楊級)이 처음으로 만든 역서(曆書). 뒤에 중수(重修)를 거쳐 명(明) 나라에서 썼음. /중종실록46/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 1461년에 명나라의 이현(李賢) 등이 편찬한 지리 책. 중국 전역(全域)과 조공국(朝貢國)의 지리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90권 60책의 활자본이다. 대명종맥(大明宗脈) : 청 나라가 중원을 점령한 뒤도 명 나라 황자(皇子)들이 강남(江南)에 나라를 세우고 몇 해동안 유지하였다. /해행5-535/ 대모고(玳瑁膏) : 거북 껍질로 만든 관자(貫子)인데, 여기서는 게의 알을 형용한 것이다. /청장2-210/ 대무(大武)1 : 주(周)의 음악 대무(大武)2 → 무역(無射) /성호7-191/ 대무맥화(大無麥禾) : 큰 흉년이 들어 보리·벼 등의 곡물이 전멸 상태가 된 것을 이름. 《春秋 莊公 28年》 /중종4-21/ 대무불연자(大繆不然者) : 크게 잘못되어 그러하지 못한 것. 선생을 비서랑(秘書郞)에 임명한 것. 대방(大方) : 식견이 높은 사람을 말한다. 대방(大防) : 禮法을 坊이라 하는데 이것은 堤防과 같이 制限이 된다는 뜻이다. /연려실기술6/ 대방(帶方)은 …… 제압하리라 : 대방은 한강 이북 경기도 지방과 자비령(慈悲嶺) 이남 황해도 지방을 총칭한 옛 이름이며, 공제(控制)는 통제함을 이르고 팔만(八蠻)은 남쪽지방에 있는 여덟 개의 오랑캐를 이르는 바, 보통 구이(九夷)·팔만(八蠻)이라 하여 여러 이민족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대배(大拜) : 가장 높은 지위에 임명되는 것으로 영의정(領議政)이나 좌의정(左議政)·우의정(右議政) 등의 정승에 오름을 이른다. 대보 원외랑(大寶員外郞) : 대보는 임금을 가리키고, 원외랑은 좌랑(佐郞)의 별칭이다. 즉 임금의 측근에서 근무하는 관청의 좌랑인 듯하다. 참고로 고려 시대에 ‘상의대보문 동지춘추관(密直副使商議大寶文同知春秋館)’이라는 직책이 보인다. 대보(大寶) : 제왕(帝王)의 위(位)를 이름. 周易의 계사(繫辭)에 성인의 대보는 위(位)[聖人之大寶曰位]이라 하였음. /연산4-292-10/ 대보(大報): 천신(天神)을 보편적으로 제사지내는 것. 대보단(大報壇) : 명(明)나라가 멸망한 뒤에 조선조에서 명나라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세운 제단(祭壇)으로 명나라의 태조(太祖)와 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사하였는 바, 숙종 30년(1704) 12월 창덕궁(昌德宮) 금원(禁苑) 옆에 설치하였다. 대보잠(大寶箴) : 당(唐) 태종(太宗)의 즉위 초에 장 온고(張蘊古)가 경계로 삼게 하기 위하여 지어 바친 6백여 마디의 전편(全篇)이 압운(押韻)으로 된 글. /연7-476-10/ 대부(大夫)는 …… 없다 :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보인다. 〔월사집〕 대부(大夫)로 봉할 :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러 갔다가 갑자기 비바람을 만나 소나무 아래로 몸을 피하고, 그 소나무가 공이 있다 하여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대부(大夫)로 봉(封)하였다. 《史記 秦始皇本紀》 〔용재집〕 대부도행(大夫徒行) : 공자의 말에 《나는 대부(大夫)의 벼슬을 지냈으니 걸어 다닐수 없다.》하였다. /연려실기술33-7-457/ 대부송(大夫松) : 진시황(秦始皇)이 태산에 놀러 갔다가 도중에 비를 맞나 다섯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였다. 그 소나무에게 대부(大夫)의 벼슬을 주었다. /연려실기술4-1-401/ 대분(戴盆) : 사마 천(司馬遷)이 임 안(任安)에게 보낸 글에 나온 말. 동이[盆]를 머리에 이면 하늘을 볼 수 없고 하늘을 보려면 동이를 일 수 없다는 것으로, 억울하고 슬픈 심정을 뜻함. /성호4-275/ 대붕(大鵬)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새 이름. 북쪽 바다에 크기가 수 천 리나 되는 곤(鯤)이라는 고기가 있는데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된 것이 붕(鵬)이라고 함. 이것이 남쪽 바다로 날 때는 구만 리를 날아올라 여섯 달을 가서야 쉰다고 함. 대붕(大鵬)의 날새 : 북해(北海)의 대붕(大鵬)이란 큰 새가 남해(南海)로 옮겨 갈 때 구만리(九萬里)나 높이 날아 올라서 여섯 달을 날아간 뒤에 한 번 쉰다고 한다. 《莊子 逍遙遊》 여기서는 벼슬길에서 뜻을 크게 펼치는 것을 뜻한다. 〔월사집〕 대비(大比) : 3년마다 한 번씩 시행하여 관리(官吏)의 덕행과 도예(陶藝)를 고사(考査)하던 일. 《周禮 地官 鄕大夫》 여기서는 3년 만에 한 번씩 시행하는 과거를 말함. /중종실록44/ 대비각기(大悲閣記) : 동파 대비각기에, “재계지율(齋戒持律)하고 강송기서(講誦其書)하여 숭식탑묘(崇飾塔廟)하는 것이 불(佛)의 가르침이거늘 혹자는 재계지율이 무심(無心)만 못하고 강송기서가 무언(無言)만 못하고 숭식탑묘기 무위(無爲)만 못하다 하니 무심 무언 무위는 배불리 먹고 즐기는 것과 같으니 이는 크게 부처님을 속이는 것이다.” 함 대비법(大比法) : 3년마다 현능(賢能)한 사람을 등용하는 시험 방법. 《주례(周禮)》 지관(地官) 향대부(鄕大夫)에 “3년이 되면 크게 과거를 보여 그 덕행과 도예(道藝)를 고사하여 현능한 자를 일으킨다.” 하였다. 3년마다 한 번씩 과거보이는 것을 대비과(大比科)라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자·오·묘·유년에 실행하고는 식년과(式年科)라 하였다. 《大典會通 禮典 諸科》 /연행4-331/ 대빈·대사·향음·향사(大賓·大祀·鄕飮·鄕射) : 대빈은 중국의 사신 등 국빈(國賓)의 접대이고, 대사는 종묘(宗廟)·사직단(社稷壇) 등에 제사하는 국가적인 제사이고, 향음은 온 고을의 유생(儒生)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향음주례(鄕飮酒禮)이고, 향사는 시골 한량(閑良)이 모여 편을 갈라 활쏘기를 겨루는 일임. /선조수정실록1/ 대사(大赦) : 왕이 처음 즉위하여 특혜로 죄인을 석방하는 것. /중종2-110/ 대사(大使) : 제왕(帝王)의 명을 받아 일을 집행하는 임시 사절(使節)을 이르는 말. 뒤에는 주로 특파되어 출순(出巡)하는 대신(大臣)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대사(大射) : 제후(諸侯)가 제사가 있으면 여러 신하와 함께 화살을 쏘던 의식. 많이 맞힌 자는 제사에 참여하고 ?히지 못한 자는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성호5-267/ 대사(大祀) :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원구단(?丘壇)·사직단(社稷壇)의 제사. /연6-147-73/ 대사(大?): 주(周)나라 12월에 천자가 모든 신에게 제사 지내던 제사 이름 대사공(大司空): 官名. 春秋 때 晉의 土木에 관한 일을 맡아봄. 漢代에는 御史大夫를 고친 이름. 明·淸 때는 工部尙書를 이름. 대사도(大司徒) : 대사도(大司徒)에는 “제공(諸公)의 땅은 봉강(封疆)이 사방 5백리, 제후(諸侯)의 땅은 봉강이 사방 4백 리, 제백(諸伯)의 땅은 봉강이 사방 3백 리, 제자(諸子)의 땅은 봉강이 사방 2백 리, 제남(諸男)의 땅은 봉강이 사방 1백 리”라는 등으로 되어 있고, 직방씨(職方氏)에는 “직방씨는 4이(夷)·8만(蠻)·7민(?)·9맥(貊)·5융(戎)·6적(狄)의 수를 관장하고…… 구복(九服)의 방국(邦國)을 분별하여 사방 1천 리는 왕기(王畿), 그밖의 사방 5백 리는 후복(侯服), 그 밖의 사방 5백리는 전복(甸服), 그 밖의 사방 5백 리는 남복(男服), 그 밖의 사방 5백 리는 채복(采服), 그 밖의 사방 5백 리는 위복(衛服), 그 밖의 사방 5백 리는 만복(蠻服), 그 밖의 5백 리는 이복(夷服), 그 밖의 사방 5백 리는 진복(鎭服), 그 밖의 사방 5백 리는 번복(藩服) …… ” 등으로 되어 있다. /청장2-101/ 대사례(大射禮)1 : 임금이 교사(郊祀)·묘사(廟祀)에 참여할 선비를 뽑기 위하여 시행하던 활쏘기 의식. 대사례(大射禮)2 : 임금이 성균관에 나아가 석전(釋奠)을 지낸 뒤에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는 예(禮) /중종실록39/ 대사마(大司馬) : 병조 판서의 별칭이다. 대산(大山) : 이상정(李象靖 : 1710-1781)의 호, 자는 경문(景文), 관향은 한산(韓山). 저서로서 《대산집(大山集)》 54권 27책 외에 편찬한 책들이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등 다수가 있음. 대산(大山) 소산(小山) : 한 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문인들을 불러모아 저술에 종사하여 각기 사부(辭賦)를 짓게 하고 이를 분류하여 일컫기를 대산 소산이라고했는데, 마치 《시경》의 대아(大雅) 소아(小雅)가 있는 것과 같은 뜻이었음. 대상(代喪) : 할아버지의 상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하는 상. 즉 승중복(承重服) /명종실록2/ 대상(大象)을 잡고서 가매 : 대상은 대도(大道)이다. 《도덕경》 35장(章)에, “대상을 잡으면 천하가 귀의한다.[執大象 天下往]” 하였다. 〔용재집〕 대생(大笙)을 ······ 한다 : 여러 관대가 박통 속에 있는 것이 새집의 형상과 같은 까닭에 대생(大笙)을 소(巢)라하고, 큰 것이 선창(先唱)하면 작은 것이 화답(和答)하기 때문에 소생(小笙)을 화(和)라 한다. 《樂考 7, 增補文獻備考, 卷96》 대서(帶犀) : 서대(犀帶), 곧 서각(犀角)으로 장식한 띠를 띠다. 1품(品)인 관원은 관복에 서대를 띠니, 서대를 띤다는 것은 곧 1품 벼슬아치가 된다는 뜻이다. /중종10-35/ 대선취재(大禪取才) : 승과(僧科)를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에 합격하여야 선종(禪宗)에 있어서 가장 낮은 법계(法階)인 대선이 됨. /중종4-339/ 대설(大雪) : 원제목은 ‘큰 눈이 올 때 말 위에서. 경부의 시에 차운하다.[大雪馬上 次敬夫韻]’이다. 〔용재집〕 대설·인설(對說·因說) : 대설은 수평적(水平的) 측면에서 대구(對句)로 말하는 것이고, 인설은 수직적(垂直的) 측면에서 이어서 말하는 것. /고봉집3/ 대성(戴星) : 새벽 별이 지기 전에 공무(公務)하러 간다는 뜻. /동국 4-192/ 대성(臺省) : 조선조에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일컫는 말. 대성(臺城): 城의 이름. 지금의 南京市 북쪽 玄武湖 가에 있으며, 苑城이라고도 한다. 咸和 연간에 修繕하여 新宮이라고도 불렀으며, 宋·齊·梁·陳이 모두 이곳을 宮으로 삼았다. 대성(臺省)과 관각(館閣) : 대성(臺省)은 관제의 하나로 상서성(尙書省)의 이명(異名)이나, 여기에 말한 대성은 조선조(朝鮮朝)의 사헌부·사간원에 대한 총칭(總稱)이요, 관각(館閣)은 홍문관·규장각(奎章閣)을 말한다. ← 관각 /여한 66/ 대성(大成)의 괘 : 대성은 크게 이루어진 것으로, 3획(?)의 괘인 팔괘(八卦)를 소성(小成)으로 보아 6획의 괘인 육십사괘(六十四卦)를 가리킨 것이다. 대성(大聖)이 …… 같다네 : 대성은 대성인으로 공자(孔子)를 가리키는 바, 공자와 일반인은 곧 바다와 길바닥의 장마물처럼 큰 차이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대소(大蘇) : 대소는 소식(蘇軾 1036~1101)을 가리킨다. 그의 자는 자첨(子瞻)이며 호는 동파(東坡)로, 소철(蘇轍)의 형이기 때문에 대소라 한 것이다.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과 함께 ‘삼소(三蘇)’로 일컬어지며, 이 삼부자(三父子)는 다같이 문호(文豪)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가운데 나란히 손꼽힌다. 대소산(大小山) : 대산 소산. 대소시관(大小試官) : 참방(參榜)한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에 試官의 아들이나 사위등이 合格하였을 때엔느 그 시관은 자리를 옮긴다. /연려실기술37-8-369/ 대소아(大小兒) : 한 나라 이형(?衡)이 당시의 명사들을 평하면서, “대아(大兒)는 공문거(孔文擧)이며 소아(小兒)는 양 덕조(楊德祖)요 그 밖에는 볼것이 없다.” 하였다. /연려실기술18-4-597/ 대소초(大小招) : 산중의 은거를 노래한 초은사(招隱士)를 가리킨다. 한(漢) 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문사(文士)들을 모아 사부(辭賦)를 짓게 하고는 이들을 대산(大山)과 소산(小山), 두 부류로 나누었는데, 이 중 소산에 속하는 문사가 지은 초은사(招隱士)는 산중 생활의 궁고(窮苦)함을 극도로 형용하여 둔세(遁世)의 선비들을 풍자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초은사에, “계수나무 숲 우거져 산이 그윽하니, 구불텅 뻗은 줄기 가지 서로 얽혔어라.[桂樹叢生兮山之幽 偃蹇連?兮枝相?]”와 같은 산중의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고, 그 후 좌사(左思), 육기(陸機) 등이 역시 초은사 계열의 작품들을 지으면서 산중의 청려(淸麗)한 풍경을 주로 형용함으로 해서 오히려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산림에의 은거를 찬미하는 식으로 변천하였다. 〔월사집〕 대솔(帶率) : 존귀한 사람을 모시고 다니는 하인을 대솔 하인이라 함. 대수(帶水) : 임진강(臨津江)의 일명. ○ 臣謹案 我國大川 …… 次北曰帶水(臨津江) 《經世遺表 卷二 冬官工曹》 대수지명(大樹之名) : 후한 때 풍 이(馮異)가 겸손하여 제장들이 공을 다툴 적이면 언제나 큰 나무 밑으로 피해가 있었으므로, 대수장군(大樹將軍)이란 별명이 붙게 된 고사. 《後漢書 馮異傳》 /선조실록18/ 대순(大舜) : 요(堯) 임금의 뒤를 이어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린 성군(聖君)으로서 요 임금에게 발탁되기 전 미천할 때는 역산(歷山)에서 농사짓고 하빈(河濱)에서 질그릇을 굽고 뇌택(雷澤)에서 고기를 잡는 일을 했다. 대숲에 슬픈 음향 : *중국의 소상강(瀟湘江) 일대에는 자줏빛 반점이 있는 소상반죽(瀟湘斑竹)이란 대가 자라는데, 전설에 의하면 순(舜) 임금이 승하하자 두 비(妃)인 아황(蛾皇)과 여영(女英)이 눈물을 흘려 대나무에 뿌렸더니 얼룩이 생겼다 한다. 〔용재집〕 대승기증(大勝氣證) : 열이 많이 나는 증상. 시사가 위급한데 신참이 때를 놓침을 말함. 대시참(待時斬) : 참형(斬刑)을 집행하는데 대시수(待時囚)와 부대시수(不待時囚) 두 종류가 있었음. 대시수는 봄, 가을을 전후하여 집행하였고, 부대시수는 재판이 확정된 후 곧 집행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대시참이란 사형집행기간을 끝 기다렸다가 참수형을 시행하는 것임. /연3-149-11/ 대식홍모(大食紅毛) : 서쪽 나라를 이름. /완당집3/ 대신들이 …… 여겼습니다 : 가생(賈生)은 한(漢) 나라 가의(賈誼)를 가리키고, 강관(絳灌)은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관영(灌?)을 가리킨다. 가의는 불과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문제(文帝)의 깊은 신임을 얻어 태중대부(太中大夫)로 발탁되어 복색(服色), 제도(制度), 관명(官名) 등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하다가 당시 대신이었던 주발 · 관영 등의 참소를 입었다. 그리하여 문제의 신임을 잃고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어 설흔셋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漢書 賈誼傳》 〔월사집〕 대실(大室) : 종묘의 본전(本殿) /세종실록 1-67/ 대씨(大氏) : 발해국(渤海國)의 왕. /완당집3/ 대씨(戴氏) : 한나라 때 대덕(戴德)과 그의 조카 대성(戴聖). 모두 후창(后蒼)에게 예를 배웠는데 사람들은 대덕을 대대(大戴), 대성을 소대(小戴)라고 불렀으며, 대덕이 전한 예 85편을 《대대례(大戴禮)》라 하고 대성이 전한 예 49편을 《소대례(小戴禮)》라고 함. 대덕의 자는 연군(延君), 대성의 자는 차군(次君)임. 《한서》 88. 대아(大雅)1 : 《시경》 대아(大雅)를 가리키는 바, 대인 군자(大人君子)를 뜻한다. 〔용재집〕 대아(大雅)2 : 높은 덕과 큰 재주. 대아(大雅)는 …… 울리니 : 상대의 시(詩)가 문단에 명성을 떨쳤다는 말이다. 대아는 원래 《시경(詩經)》을 구성하는 사시(四始), 육의(六義) 중 ‘대아’를 이르는데, 시가(詩歌)의 정성(正聲)이라는 뜻으로, 상대의 시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대악(大樂): 큰 음악. [禮·樂記] 大樂與天地同和, 大禮與天地同節. 대악정(大樂正) : 주(周) 나라 때 벼슬 이름. 악관(樂官)의 우두머리. /성호사설9/ 대안도(戴安道) : 진(晉) 나라 사람인데 이름은 규(逵)임. 왕 자유(王子猷)가 산음(山陰)에 살 때에 야설(夜雪)이 처음 개자 승월(乘月)하여 대 규를 찾아갔다가 그 문에 미쳐 되돌아 섰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흥을 타고 왔다가 흥을 타고 가는데 반드시 대 안도를 볼 게 뭐가 있느냐.”고 하였음. /완당집3/ 대야(大冶)가 …… 부리도다 : 대야는 훌륭한 주공(鑄工)이며 추범(錘範)은 물건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망치와 거푸집을 이른다. 대어(對語) : 자정이 경연에서 주상에게 진언한 말. 대언(代言) : ① 고려 대의 관직. 충선왕(忠宣王) 2년에 승지(承旨)를 대언이라 개칭하였는데, 공민왕이 한때 승선(承宣)으로 고쳐 불렀으나, 얼마 안 가서 다시 대언으로 환원하였다. /성호사설 3/ ② 임금의 말을 대신 하는 것. /선조실록20/ 대업(大業)원년 : 서기 605년, 신라 진평왕(眞平王)27년, 고구려 영양왕(?陽王)16년, 백제 무왕(武王)6년 대여(臺輿) :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을 이름이다. 《후한서》 제남안왕전(濟南安王傳)에 ‘여마 대례(輿馬臺隷)’라고 보이는데, 그 주에 ‘대례는 천직(賤職)이다.’라 하였다. /성화5-161/ 대여악관(大予樂官) :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영평(永平) 3년에 대악(大樂)을 고쳐서 대여악(大予樂)으로 했는데, 이에 따라서 대악관(大樂官)이 대여악관으로 고쳐졌다. /오주17-83/ 대역(大逆) : 십악(十惡 : 가장 큰 열 가지 죄악)의 하나. 종묘(宗廟)·산릉(山陵)·궁궐(宮闕)의 훼망(毁亡)을 꾀하거나 훼망한 죄. 《大明律 名例律 十惡》 /중종실록1/ 대역모반(大逆謀反) : 모반(謀反)은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한 죄, 모대역(謀大逆)은 종묘(宗廟)·산릉(山陵) 등을 훼손한 죄, 모반(謀反)은 본조(本朝)를 배반한 죄, 대불경(大不敬)은 왕실에 불경한 죄, 악역(惡逆)은 부모와 조부모 등을 구타하거나 죽인 죄, 불효(不孝)는 부모에게 불효한 죄, 불목(不睦)은 일가간에 화목하지 않은 죄, 부도(不道)는 무죄한 1가(家) 3인을 죽인 죄, 불의(不義)는 소속 상관을 죽인 죄, 내란(內亂)은 지친간에 간음한 죄. /삼봉2-300/ 대역반좌율(大逆反坐律) : 고변(告變)함에 있어 대역(大逆)으로 고변한 것이 무고였을 경우에, 무고 입은 자에게 과한 죄만큼 무고한 자에게 과죄(科罪)하는 것임. /선조실록16/ 대연(大硯) : ‘대연석(大硯石)’ 참조. 대연(大衍) : 50의 수를 말함. 점서(占筮)의 법에 서죽(筮竹)이 50개의 가지인 까닭으로 일컫는 말임. 이 50은 천수(天數) 1 3 5 7 9와 지수(地數) 2 4 6 8 10를 합한 총수임. 이 가운데 1을 제외하고 49의 수로써 천지간의 만상(萬象)을 점침. 《周易 繫辭》. 대연(大衍) : 대연의 역법(易法)을 말함. 당승(唐僧) 일행(一行)의 저술임. /완당집3/ 대연석(大硯石) : 상품(上品)의 큰 벼루.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규장각(奎章閣) 등의 관서에서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벼슬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 것으로 생각됨. 대연수(大衍數) : 《역》에 있어 하늘의 생긴 수 셋과 땅의 생긴 수 둘로 잡아, 천지의 생수(生數)인 다섯을 각각 열까지 늘려 이룬 수 50을 일컫는 말로서, 즉 점을 칠 때 사용하는 산대 50개를 말한다. 이는 천수(天數) 1·3·5·7·9를 합친 25와 지수(地數) 2·4·6·8·10을 합친 30을 합쳐 모두 55인데, 대수(大數)를 들어 50으로 하였다. 이 중에서도 실지 사용하는 수는 49이다. /오주연문-16/ 대영(大盈) : 창고 이름. 곧 대영고(大盈庫). 이것은 당 현종(唐玄宗) 때 보화(寶貨)를 저장하던 창고임. 《舊唐書 食貨志》 /중종4-342/ 대옹(戴?) : 남조(南朝)의 송(宋) 나라 사람, 자는 중약(仲若). 봄날 한 말의 술을 가지고 말하기를 “가서 꾀꼬리소리를 들으려고 한다.”고 한 일이 있다. 《事文類聚》 後集 四五 《羽蟲部》 <鶯> 대완(大宛) → 대완종(大宛種) 대완구(大碗口) : 일종의 화기(火器) /성호9-109/ 대완불탁(大椀不托) : 큰 사발의 국수. 성의를 쌓아서 때를 기다려 봉사를 발한다면 끝내 그 시기를 맞추지 못하고 정란에 죽을 것이니 눈 속에 얼어 죽어 내가 죽은 뒤에 비록 다행히 좋은 시절을 만난다 해도 나는 볼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 큰 사발의 국수를 먹는 것과 같다는 말로 비유함. 대완종(大宛種) : 대완은 서역(西域)의 나라 이름인데, 그 나라에서 한혈마(汗血馬)라는 좋은 말을 산출함. 고려 충렬왕 3년에 원 세조(元世祖)가 제주(濟州)를 방성(房星) 분야(分野)라 하여 목마장(牧馬場)을 만들었음. /성호5-129/ 대왕(代王) : 한 문제(漢文帝)가 등극하기 전에 대왕(代王)에 피봉되어 있었는데, 본문의 이야기는 혜제(惠帝)가 붕어한 뒤에 문제가 대신의 추대를 받고 경사(京師)를 들어오던 때의 일임. 《通鑑節要 卷6 孝惠皇帝》 /중종4-96/ 대왕소래(大往小來) : 《주역》에서 군자의 도[陽]가 떠나고 소인의 도[陰]가 이르는 비괘(否卦)의 뜻을 말함. 대왕의 바람 : 초(楚) 나라 양왕(襄王)이 난대궁(蘭臺宮)에서 노닐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자 옷깃을 열어젖히면서 “쾌재라! 이 바람이여. 과인이 서민들과 공유하는 것이로다.” 하니, 송옥(宋玉)이 곁에서 응대하기를, “이는 오직 대왕의 바람일 뿐입니다. 서민들이 어찌 공유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던 데서 유래한다. 《文選 十三卷 宋玉 風賦》 〔용재집〕 대왕의 큰 바람 : 3권 ‘정순부(鄭淳夫)가 부채를 선물한 데 사례하다’ 주 참조. 〔용재집〕 대외중신(大?重信) : 명치 시대인. 1838~1873년에 정한론(征韓論)을 반대하고 대장경으로서 대구 보이통(大久保利通)을 보좌하여 서남역(西南役)의 군비 조달과 전후(戰後)의 재정 정리에 노력하고, 1914년에는 내각을 조직하기도 하였음. /해행10-398/ 대요(大撓) : 황제가 대요에게 명해서 5행(行)을 연구하고 북두 칠성의 운행을 알아내도록 명해서 비로소 60갑자(갑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경세 2-9/ 대요(大堯)는 …… 같다 : 대요와 대순(大舜)은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높여 부른 것이며, 위의 내용은 《논어》 요왈편(堯曰篇)과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각각 보인다. 대요산(大曜山) : 미상이나, 역시 고인이 된 벗이 살던 곳인 듯하다. 〔용재집〕 대우(大禹) : 중국(中國) 고대(古代)의 성왕(聖王)인 우왕(禹王)의 경칭(敬稱) 대우(對偶) : 한문 문장에 쓰는 수사법(修辭法)의 하나인데, 대개 사람 마음의 향배(向背)와 연우(聯偶)의 자연 추세에서 구성되는 것임. ‘부자자효(父慈子孝)’, ‘구밀복검(口蜜腹劍)’, ‘천향국색(天香國色)’ 등을 들 수 있다. /삼봉집1/ 대우(大禹)의 구주(九疇) : 대우는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을 높여 부른 것이며, 구주는 홍범구주(洪範九疇)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칙의 아홉 가지 종류인바, 오행(五行)·오사(五事)·팔정(八政)·오기(五紀)·황극(皇極)·삼덕(三德)·계의(稽疑)·서징(庶徵)·오복(五福)과 육극(六極)이다. 옛날 우왕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 낙수(洛水)에서 거북이 나왔는데 등에 1에서부터 9까지의 배열된 무늬가 있었는바, 이것을 낙서(洛書)라 칭한다. 우왕은 이것을 보고 홍범구주를 만들었는데, 뒤에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전하니, 《서경》의 <홍범(洪範)>이 바로 그 내용이다. 대우(大禹)의 신정(神鼎) : 구정(九鼎). 우(禹)임금 당시에 구주(九州)에서 바치는 금을 주조하여 만든 것. 《전국책(戰國策)》 <동주(東周)>에 “주(周)나라에서 은(殷)나라를 쳐서 구정을 얻었는데 일정(一鼎)에 구 만 명이 당겼으니 구정에는 팔십 일 만 명이었다.”는 말이 있음. 대우/변려(對偶/騈儷) : 이른 바 사륙문(四六文)은 당(唐)대부터 있었음. 송(宋) 때 사과(詞科)를 오로지 이로써 사람을 채용함. 대우변려(對偶騈儷) : 이른 바 사륙문(四六文)은 당(唐)대부터 있었음. 송(宋) 때 사과(詞科)를 오로지 이로써 사람을 채용함. 대운(岱雲) : 오 난설의 기유도서(記遊圖序)의 대악관운(岱岳觀雲) 조에 “癸丑五月 謁翁覃溪先生於太安使院 同遊東岳 秦松漢栢 黛色參? 由南天門登封禪臺 俯視雲影千峯散落平地”라 하였음. /완당집3/ 대월재(對越齋) : 조선조의 문신인 김취문(金就文 : 1509-1570)의 호. 자는 문지(文之), 관향은 선산(善山). 호를 또한 구암(久庵)이라 하기도 하였음. 1537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명종 때 청백리에 녹선(綠選)되었으며 1568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뒤에 대사간에 이르렀음. 대위(大圍) : 대과(大科)와 같은 말로 문과 시험을 말한다. 옛날 과장(科場)에는 일반인의 통행을 금하기 위하여 가시나무 울타리를 둘러쳤었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봉집/ 대유(大有) : 《주역》의 대유괘(大有卦)는 임금이 높은 위(位)에 있는 상(象)이며, 겸괘(謙卦)는 겸손하여 자기의 몸을 낮추는 상이다. 대유(大有) : 두 가지 뜻이 있음. 첫째는 《주역》 64괘의 하나로서 크게 형통하여 문명이 드러난 형상을 말하고, 둘째는 크게 풍년이 들어 태평한 세상을 말함. 대유령(大庾嶺) : 중국 강서성(江西省) 대유현(大庾縣)에 있는 고개 이름인데, 이곳에는 매화가 많으므로 ‘매령(梅嶺)’이라고도 한다. /청장1-53/ 대융(大絨) : 쾌자처럼 웃옷 위에 걸치는 겉옷. /열하1-31/ 대은(大隱) : 사람이 많은 가운데 숨는 것을 말함. 진(晋)나라 왕강거(王康?)의 <반초은시(反招隱詩)>에 “소은(小隱)은 릉수(陵藪)에 숨고, 대은(大隱)은 시조(市朝)에 숨는다[小隱隱陵藪 大隱隱市朝]”는 구절이 있음. 《문선(文選)》 대은자(帶銀資) : 관복에 은으로 만든 띠를 띠는 자급(資級), 곧 3품. 《經國大典 禮典 帶》 /중종실록 9/ 대의(臺議) : 사헌부(司憲府)의 의논. 대관(臺官)의 공의(公議). 또 그로 말미암은 헌의(獻議) /중종3/ 대의멸친(大義滅親) :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를 돌보지 않는다는 말. 이 말은, 춘추 시대 위(衛) 나라 석후(石厚)가 공자(公子) 주우(州?)와 함께 환공(桓公)을 죽이니, 그의 아버지 석 작(石?)이 그 아들을 죽이자, 군자가 “석 작은 순실한 신하다. 주우를 미워하는데 후가 거기에 참여되었으니, ‘대의를 위해 친속을 멸한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라고 평한 데 보임. 《春秋左傳 隱公 年四》 /연행11-427/ 대이(敦彛) : 대(敦)와 이(彛). 대는 서직(黍稷)을 담는 그릇. 이는 종묘에 비치하는 주기(酒器). /연행5-214/ 대인부(大人賦) : 사마 상여(司馬相如)가 무제(武帝)에게 신선술(神仙術)에 너무 혹하지 말라고 간한 글. 일설에는 상여가 부를 꼭 지어 바쳐야겠는데 무슨 말로 만들지 몰라서 애를 쓰던 차에 어떤 노인이 꿈에 와서 대인부를 짓도록 했다 함. /성호9-305/ 대인지사(大人之事) : 《맹자(孟子)》에 ‘유대인(惟大人)이아 위군격군심지비(爲能格君心之非)’라고 함. 대일통(大一統) : 春秋의 思想이 大一統이다. 즉 天子를 높여서 유일한 통일자(統一者)로 받든다는 뜻인데 여기에는 명나라를 받들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것을 말한다. /연려실기술30-7-9/ 대자(大者) : 윗 글의 대근대본(大根大本). 대잠(玳簪) : 대모갑(玳瑁甲)으로 만든 비녀. /성호 9-63/ 대잠도(大岑島) : 只今의 忠淸南道 禮山郡 대장(大壯) : 양(陽)이 성하고 음(陰)이 쇠하여 군자의 도가 승세할 상을 보인 것. 곧 극도로 흥성(興盛)함을 뜻한다. 《易經 雷天大壯卦》 /양촌 2-23/ 대장(大匠)을 …… 말입니까 : 《노자(老子)》 74장(章)에 “대저 큰 목수[大匠]를 대신해서 자귀질을 하면 자기 손을 다치지 않는 이가 드물다.” 한 데서 유래한 말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대신 맡아서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경우를 비유한 말이다. 〔월사집〕 대장군전(大將軍箭) : 무게가 50근, 길이가 6자인 무쇠로 된 화살. 30근의 화약을 폭발시켜 내쏘면 9백 보(步)를 날아간다. /명종실록10/ 대장무무(大壯武舞) : 남조 양(南朝梁)의 무무(武舞) 이름. 주로 교묘(郊廟) 제사와 조하(朝賀) · 향연(饗宴) 때 추던 춤으로 도끼와 방패를 가지고 춤을 추는데, 통치자의 무공(武功)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新唐書, 禮樂志》 대장부 : 맹자가 대장부의 조건을 이렇게 말한 것[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이 있다. 《孟子 ?文公章下》 대재(大祭) : 국가에서 지내는 큰 제사, 곧 대사(大祀). 국가의 제사를 대사·중사(中祀)·소사(小祀)로 나누어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사직(社稷) 등의 제사는 대사, 선농(先農)·선잠(先蠶) 등의 제사는 중사, 그 밖의 것은 소사로 한다. 《經國大典 禮典 祭禮》 /중종실록51/ 대전(大傳) : 공자가 찬술한 《역》 《계사》. 대전관(代奠官) : 임금과 왕세자 등을 대신하여 전(奠)을 올리는 임시 직책. /중종실록45/ 대전속록(大典續錄) : 經國大典이 편찬된 이후의 六典에 관한 사실을 편찬한 책. 성종23년에 이극증(李克增)에게 명찬(命撰) 하였음. /연산5-454-11/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전통편(大典通編)을 기본으로 나라의 규칙과 격식을 보충하여 실은 책. 조선 고종(高宗) 2년(1865)에 조두순(趙斗淳) 등이 임금의 명령을 받아 엮은 조선조 최후의 법령집. /해행10-406/ 대점(大漸) : 병이 위독하다는 뜻. 서경(書經) 고명편(顧命篇)에, “병이 크게 더쳐서 위태롭게 되었다.[疾大漸惟幾]” 하였음./연2-78-15/ 대정(大政) : 도목정사(都目政事)를 일컫는 말이다. 여름 6월과 겨울 12월에 성적 평가를 통한 관리의 임명을 끝내고 새롭게 시작되는 정사(政事)를 말함. /성호사설6/ 대정(大庭) : 태고 시대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나라 이름. /고봉집2/ 대제(待制) : 당(唐)나라 때 시작된 벼슬 이름. 매일 교대로 대기(待機)하여 천자의 고문(顧問) 노릇을 하며 조칙(調勅)을 초(草)함. /세종실록44권 49/ 대제(大堤) :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에 있는 제방(堤防). 악부(樂府)에 대제곡(大堤曲)이 있다. 〔월사집〕 대제곡(大堤曲) : 대제는 호북성(湖北省) 양양(襄陽)에 있는 제방의 이름인데 이것을 제목으로 한 악곡인 바,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때부터 옹주곡(雍州曲)에 이러한 명칭이 있었으며 대제행(大堤行) 등도 유행하였다. 대조(大挑) : 청(淸) 나라에서는 선비를 뽑는 것을 《조선(挑選)》이라 칭함. /연행7-421/ 대조(大朝) : 여기서는 선조(宣祖)가 있는 데를 일컫는 말. 임진왜란 때에 국세(國勢)가 위급하므로 조정을 나누어 선조가 있는 데를 대조(大朝), 광해가 있는 데를 소조(小朝)라 하였다. /선조실록 14/ 대조(待詔)로 금마문(金馬門)에 은거했단 : 대조란 조명(詔命)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천자의 비답, 응화(應和)하는 문장 등을 작성하는 일을 맡는 관원이다. 한(漢) 나라 때 징사(徵士)로서 정관(正官)이 없는 사람은 대조를 맡았는데 그 중 뛰어난 사람은 금마문(金馬門)에서 대조를 맡았다 한다. 〔월사집〕 대조규개(大鳥圭介) : 1833~1911. 일본 정치가. 병고현(兵庫縣) 출신. 1889년 주청특명전권공사, 1893(고종 30) 주한특명전권공사로 내한하였었다. 동학혁명 때 청과 절충하다가 청일전쟁의 실마리를 만든 자이기도 하다. 뒤에 추밀원 고문이 되었다. /해행11-88/ 대조근(大朝覲) : 제후들이 크게 회동하여 천자를 알현하는 것. 제후의 사시(四時)의 조근은 대조근이라 하지 않는다. /삼봉2-24/ 대족(大簇) → 황종(黃鍾) /성호7-191/ 대종(代宗) : 대종은 당(唐) 나라 제 8대 임금 이 예(李豫). 곽 애는 당 나라 명신(名臣) 곽 자의(郭子儀)의 여섯째 아들. 승평공주(昇平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말다툼하다가 “당시의 아버지가 천자(天子)인 것을 믿고 그러는가? 우리 아버지는 천자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공주가 성이 나 달려가서 아뢰니, 대종이 달래고 타일러 돌려 보냈었다. 《唐書 卷一百三十七》 /중종실록51/ 대종(大宗) : 예법(禮法)에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이 있는데, 여기서는 종묘(宗廟)는 대종이요 인조(仁祖)의 생가(生家)인 정원군(定遠君)은 소종이 된다. /연려실기술22-5-370/ 대종백(大宗伯) :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달리 이르는 말. 대종법(大宗法) : 백세(百世)가 되어도 옮기지 아니하는 종(宗)을 대종(大宗)이라 하며, 이를 봉사(奉祀)하는 종손(宗孫)을 대종손이라 함. /세종실록45-14/ 대죄(待罪) : 죄주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관리가 그 관직에 있는 것을 겸손하여 이르는 말. /연6-129-63/ 대주(大註) : 소주(小註)와 대칭되는 말로 주자(朱子)의 집주(集註)를 이른다. 영락대전본(永樂大全本)은 주자의 집주를 큰 글자로 쓰고 기타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을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엮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대주정(大晝停) : 임금이 거둥 도중 한낮에 쉬면서 점심을 먹는 것. /중종실록43/ 대지조수(臺池鳥獸) : 《시경》 대아(大雅) 영대편(靈臺篇)에, “왕이 영유에 계시니 우록이 거기 있도다. 우록은 탁탁하거늘, 백조는 학학하도다. 왕이 영소에 계시니 아! 그득하게 고기가 뛰논다.[王有靈??鹿攸伏 ?鹿濯濯 白鳥鶴鶴 王在靈沼於?魚躍]” 하였는데 맹자가 양 혜왕(梁惠王)과 이야기하면서 “백성이 싫어한다면 비록 《대와 못, 새와 짐승》[臺池鳥獸]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홀로 즐길 수 있을 것입니까?” 하였음. 《孟子 梁惠王 上》 /연 6-194-18/ 대진(大盡) : 큰 달[大月] /고려사절요 제 3권 1-205/ 대질(大?) : 아주 늙은 노인. 대차왜(大差倭) : 지위가 높은 우두머리 차왜. 차왜는 차송(差送)되어 온 왜인의 뜻으로, 곧 일본의 사자(使者)이다. 그 임무에 따라, 고부차왜(告訃差倭)·고경차왜(告慶差倭) 등 여러 가지 호칭이 있다. 당초에는 차왜라는 것이 없고 다만 연례(年例)로 송사(送使)가 있었는데, 광해군 1년(1609)에 세견선(歲遣船)을 줄인 이후로, 청할 일이 있거나 무역(貿易)을 바라는 때이면, 지위 있는 자를 시켜 서계(書契)를 보내었으나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었는데, 인종 때에 대마도주와 평 조흥(平調興 : 유천 조흥(柳川調興)임.) 사이에 말썽이 일어나 그 귀추가 염려되므로,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차왜를 허락하니, 그 뒤부터 여러 구실로 차왜를 보내 왔다. 《增正交隣志 差倭》 /해행10-16/ 대착(代?) : 《노자(老子)》 74장(章)에 “대저 큰 목수[大匠]를 대신해서 자귀질을 하면 자기 손을 다치지 않는 이가 드물다.” 한 데서 유래한 말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대신 맡아서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경우를 비유한 말이다. 〔월사집〕 대책(對策) : 과거 시제의 일종으로, 어떤 사건에 대하여 처리책(處理策)을 논구(論究)하는 문장. /세종실록1-72/ 대척화(大尺花) → 화(花) 대천세계(大千世界) : 불교 천문학에서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고 4방에 4대주(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대철위산(大鐵圍山)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이것을 1세계 또는 1사천하(四天下)라고 함. 사천하를 천 개 합한 것을 1소천세계, 소천세계를 천 개 합한 것을 1중천세계, 중천세계 천개 합한 것이 1대천세계임. 이 1대천세계에는 소천·중천·대천의 3종의 천(天)이 있으므로 1대 3천세계, 또는 3천대천세계라고 함. /연행4-541/ 대체(大體)의 규모 :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과 같은 것이다. 대초명적(大哨鳴鏑) : 화살의 한 가지로, 쏘면 소리가 나는 특수한 화살. /연려실기술1-30/ 대축(大祝) : 종묘(宗廟)나 문묘(文廟), 또는 기우제를 지낼 때에 축문(祝文)을 읽는 사람. /중종실록47/ 대춘(大椿) : 나무이름. 상고에 대춘(大椿)이란 나무가 있었는데, 한 절후인 봄이 8천 세, 가을이 8천 세였다고 함. 《莊子 逍遙遊》 그리하여 후세에 사람의 장수를 축원하는 말로 쓰임. /연8-438-16/ 대충(對衝) : 묘 터의 지형과 방위에 따라서 어떤 방위에는 딴 묘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곳. /경세 1-157/ 대취타(大吹打) : 취타(吹打)와 세악(細樂)을 갖춘 군악. 취타는 나팔·호적(胡笛)·대각 따위의 취주악기와 바라·징·북 따위의 타악기의 합주이며, 세악은 장구·북·피리·저·깡깡이 등으로 편성된 군악이다. /연행9-118/ 대치(大癡) : 원 나라 화단의 사대가 중 한 사람인 황 공망(黃公望)의 호. /완당집3/ 대치사관(代致詞官) : 잔치 때 영의정이나 왕세자 등이 임금에게 올리는 치사를 대신 읽던 벼슬. /명종실록11/ 대팽(大彭) : 성찬(盛饌)을 이름. 周易 鼎에 “대팽(大烹)으로써 성현(聖賢)을 기른다.”[大烹而養聖賢] 하였음. /연산4-60-25/ 대평(大坪) 영공(令公) :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 1777~1861)을 말함. 정재가 살았던 것이 대평이었기 때문에 일컫는 말임. 대평어람(大平御覽) : 宋 나라 때에 편찬한 백과사전 격의 책. /고려사절요1-357/ 대포(大?) : 임금이 전국민에게 주식을 나누어 주고 마음껏 놀게 하는 것. /연려실기술1-289/ 대풍가(大風歌) : 한(漢) 고조(高祖)가 경 포(?布)의 반란을 치고, 고향에 들러 연회하면서 적은 노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풍이 일어나니 구름이 인다. 위엄을 해내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네, 어떻게 맹사를 얻어서 사방을 지킬 것인가?” /동사강목4/ 대하(大夏) : 운문(雲門) /성호7-191/ 대하(大夏)1 : 《漢書》 應?의 주에 의하면 서역에 있는 나라라 하였다. 대하(大夏)2 : 주(周)나라의 무(舞). 대하공죽(大夏?竹) : 장 건(張騫)이 대하(大夏)에 가서 공죽장(?竹杖)을 보았다. 공(?)은 대완국(大宛國) 땅 이름 거기서 명죽(名竹)이 남. 《史記 大完列傳》 /해행5-143/ 대학 …… 대목 : 《대학》 장구(章句)에 지선(至善)을 풀이하여 “사물의 당연한 표준[事物當然之極]”이라 하고, 혹문(或問) 격치장(格致章)의 정자(程子)의 설을 인용하여 총론(摠論)한 곳에서는 오로지 “당연하여 그만둘 수 없는 것[所當然而不容已]”만 말한 것을 가리킨다. 대학(大學) : 오지(五止)를 푼 말이다. 《대학》의 삼강령(三綱領) 가운데 맨 마지막 강령이 지선(止善)인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예시한 것이 오지(五止) 즉, 지어인(止於仁), 지어경(止於敬), 지어효(止於孝), 지어자(止於慈), 지어신(止於信)이다.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 : 팔조목은 여덟 가지 조목으로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이른다. 대학연의(大學衍義) : 송 나라 진덕수(眞德秀)가 편찬한 책으로 《대학》의 뜻에 따라 여러 경전을 인증하고 역사를 참고하여 부연한 것인데 모두 43권으로 되었음.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 송(宋)의 진 덕수(眞德秀)가 지은 《대학연의》를 보충하여 명(明)의 구 준(丘濬)이 지은 책. /중종실록38/ 대학의 차서(次序) : 《대학》 경(經) 1장(章)에 보이는 팔조목(八條目)의 공부 차서를 가리킨다. 대한(大限) : 큰 한계란 뜻으로 죽음을 가리킨다. 대합(大蛤) : 옛날에는 대합조개가 기운을 뿜어내어 신기루(蜃氣樓)를 만든다고 여겼다. 〔월사집〕 대행(大行) :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에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 대행왕(大行王) 또는 대행대비(大行大妃)라고 함. 대행대왕(大行大王) : 임금의 초상을 대행(大行)이라 칭하는데 그에 대한 설명이 두 가지가 있음. 하나는 대행(大行)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하였고, 하나는 시(諡)의 법에, “큰 행실을 지닌 이는 큰 이름을 받고, 작은 행실을 지닌 이는 작은 이름을 받는다.” 하였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붕(崩)하여 시호가 정해지지 않았고, 사왕(嗣王)은 새로 즉위하였으니 신하들의 칭하는 말이 마땅히 구별이 있어야 할 것이므로 대행(大行)이라 한다. 말하자면, 큰 덕행이 있으니 반드시 큰 이름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대행인(大行人) : 《주례》에 보이는 관명으로서 천자와 제후 사이에 중대한 교제의 예의(禮儀)를 주관하는 관리, 사신의 임무를 맡은 사람을 말함. 《周禮》 <秋官> 大行人. 대행인(大行人) → 행인(行人) 대행조(大行朝) : 선왕의 조정. 대행왕은 임금의 승하한 뒤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 /연1-159-1/ 대행황제(大行皇帝) : 대행(大行)은 제왕(帝王)이나 후비(后妃)가 죽은 뒤, 시호(諡號)를 아직 울리기 전의 칭호임. /연8-432-21/ 대향(大享) : 국가에서 지내는 큰 제사. 곧 대사(大祀) 등의 제사를 대사, 선농(先農)·선잠(先蠶) 등의 제사를 중사, 그 밖의 것을 소사로 한다. /중종실록43/ 대향절목(大享節目) : 대향은 대팽(大烹)과 같은 뜻으로 주역의 ‘대향으로 성현을 기른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서 성찬을 말한다. 즉 제사 지내는 음식인데 절목은 그 내용이다. /연행1-489/ 대현(大賢)의 후손 :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후손임을 말한다. 대호(大瓠)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보이는 박으로, 다섯 섬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크다 한다. 〔용재집〕 대호(大濩) → 이측(夷則) /성호7-191/ 대홍사첩리(大紅紗帖裏) : 다홍색 사로 지은 첩리. 사는 발이 곱고 성기며 얇고 가벼운 견직물(絹織物)의 한 가지. 첩리는 철릭. 곧 무관(武官)의 공복(公服)중의 한 가지로서, 허리에 주름이 있고 넓은 소매가 달렸음. /연 8-303-36/ 대홍탑호(大紅塔胡) : 답호는 예복(禮服) 밑에 입는 쪼끼 모양의 벼슬아치가 입는 옷의 한 가지. /연8-269-60/ 대화(大火) : 대화심성(大火心星)으로 이 별이 서쪽으로 내려가면 더위가 가고 가을이 오기 시작한다고 한다. 《시경》 빈풍(?風) 칠월(七月)에 “칠월에 대화심성이 서쪽으로 내려가면 구월에는 두터운 옷을 준다.[七月流火 九月授衣]” 하였다. 〔월사집〕 대화(大和) : 음양이 회합(會合)하는 충화(?和)한 기운. 대화(大禍) : 정강지변(靖康之變)을 가리킴. 북송(北宋) 정강(靖康) 2년에 금군(金軍)이 남하(南下)하여 송도(宋都) 변경(?京)을 함락시키고 휘종(徽宗) 흠종(欽宗)을 인질로 잡아감. 대황(大黃) → 초석(硝石) 대희(大嬉) : 주 무왕(周武王)의 큰 딸이며, 진(陳) 나라 시조 유우만(有虞滿)의 비(妃). /성호사설6/ 댁상(宅相) : 외손을 뜻한다. 택상이란 집터의 풍수적(風水的) 모습. 진(晉) 나라 위서(魏舒)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외가(外家)인 영씨(寗氏) 집에서 길러졌다. 영씨 네가 집을 새로 지었는데 집의 풍수를 보는 자가 “귀한 외생(外甥)이 나올 것이다.” 하니, 외조모가 내심 위서를 떠올렸다. 이에 위서가 “응당 외가를 위해 택상을 이루겠다.” 하였는데 과연 상서랑(尙書郞)이 마흔 남짓한 나이에 상서랑(尙書郞)이 되었다. 《晉書 魏舒傳》 〔월사집〕 댁상손(宅相孫) : 외손을 뜻한다. 택상이란 집터의 풍수적(風水的) 모습. 진(晉) 나라 위서(魏舒)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외가(外家)인 영씨(寗氏) 집에서 길러졌다. 영씨 네가 집을 새로 지었는데 집의 풍수를 보는 자가 “귀한 외생(外甥)이 나올 것이다.” 하니, 외조모가 내심 위서를 떠올렸다. 이에 위서가 “응당 외가를 위해 택상을 이루겠다.” 하였는데 과연 상서랑(尙書郞)이 마흔 남짓한 나이에 상서랑(尙書郞)이 되었다. 《晉書 魏舒傳》 〔월사집〕 더디다 탄식하노니 : 공자가 고국인 노(魯) 나라를 떠날 때 “더디고 더디다, 나의 걸음이여![遲遲 吾行也]” 하면서 천천히 감으로써 부모의 나라를 떠나는 아쉬움을 나타냈었다. 《孟子 離婁 下》 〔용재집〕 더러움 …… 뒤따랐네 : 팽함(彭咸)은 은(殷)나라의 훌륭한 대부(大夫)로 군주의 잘못을 간하다가 듣지 않자, 물속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굴원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어찌 깨끗하고 깨끗한 몸으로 남의 더러움을 받겠는가. 내 차라리 소상강(瀟湘江) 강물에 뛰어들어 강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희디흰 결백한 몸으로 세속의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 쓰겠는가.” 하였으므로 이것을 인용한 것이다. 더럽힐 듯 여겨서요 : 백이(伯夷)는 악인(惡人)의 조정에 서는 것을 매우 수치로 여기고 향인(鄕人)과 서 있을 때 그 관이 바르지 않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가 마치 자신을 더럽힐 듯이 여겼으므로 아무리 제후들이 정중한 예우로 초청하여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孟子 公孫丑 上》 여기서는 고인의 벼슬이 높지 않은 것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탐탁찮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월사집〕 더불어 …… 없다 : 《논어》 자한(子罕)에 보이는 구절이다. 권(權)이란 권도(權道) 또는 권변(權變)의 뜻으로 사물의 경중(輕重)을 헤아려 의리에 맞도록 하는 것이다. 덕(德)으로써 사람을 사랑하는 :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에 “군자는 사람을 사랑하기를 덕으로써 하고 소인은 사람을 사랑하기를 고식적인 방법으로써 한다.[君子愛人也以德 細人愛人也以姑息]” 하였다. 〔월사집〕 덕기(德機) : 생기(生機)와 같은 말로 덕기를 막았다는 것은 생기를 완전히 잃음을 의미하는 바,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보인다. 덕례지효(德禮之效) : 《논어》 위정(爲政)에 “법령으로써 지도하고 형벌로써 규제한다면 백성은 형벌은 면하겠지만 수치심은 없을 것이다. 덕으로써 지도하고 예로써 규제한다면 백성은 수치를 알아 착한 길로 나아갈 것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삼봉2-302/ 덕불고 필유인 : 공자가 《덕은 외롭지 않은지라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고 한 말이 있음. 《論語》 <里仁>. 덕불고(德不孤) : 덕이 있는 사람은 고립되지 않는다는 뜻임. 《論語 里仁》에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 하였음. /고봉집2/ 덕빈(德嬪) : 명종(明宗)의 세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빈(嬪) 윤씨(尹氏)로 본관은 무송(茂松). /선조실록12/ 덕소(德昭) : 덕소는 태조의 차자(次子). 태종 때 유주(幽州)를 정벌하는 데 따라갔는데 제(帝)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군중(軍中)이 놀라자. 덕소를 세우려고 모의하는 자가 있었다. 태종이 이 말을 듣고 기쁘게 여기지 않았다. 정벌에서 돌아와 불벌이 불리하다 하여 오래도록 포상을 하지 않으므로 덕소가 그것을 말하니 태종이 크게 노하여 “네가 스스로 임금노릇하기를 기다렸으니, 아직도 늦지 않다.” 하였다. 그래서 덕소는 물러나와 자결하였다. 《宋史 卷二百四十四 燕王德昭傳》 /삼봉집2/ 덕수(德水) : 이안눌(李安訥)의 본관이다. 〔월사집〕 덕수(德水)가 …… 길렀나니 : 고인이 덕수 이씨(德水李氏)였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월사집〕 덕수자(德水子) : 용재 자신을 가리킨 것으로, 그의 본관이 덕수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용재집〕 덕수자(德水子) : 용재 자신을 지칭한 것으로, 그가 덕수 이씨(德水李氏)이기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용재집〕 덕에 …… 된다네 : 천도(天道)인 원(元)·형(亨)·이(利)·정(貞)은 사시(四時)의 춘(春)·하(夏)·추(秋)·동(冬)과 통하는 바, 원은 봄에 해당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덕에 들어가는 글 : 《대학》을 가리킨다. 정이천(程伊川)은 일찍이 “《대학》은 공씨(孔氏)의 유서(遺書)로 초학자들이 덕에 들어가는 문(門)이다.” 하였다.《大學章句》 덕에 들어가는 책 : 《대학(大學)》을 가리킨다. 정이천(程伊川)은 일찍이 《대학》은 “공씨(孔氏)의 유서(遺書)로 처음 배우는 자들이 덕에 들어가는 문(門)이다.” 하였다. 덕우(德祐) : 송(宋) 나라 공종(恭宗)의 연호. 즉위 초에 계속되는 원(元) 나라의 침범으로 국력(國力)이 약화되었는데, 진 의중(陳宜中)이 상소하여 당시 권신(權臣)이었던 가 사도(價似道)를 처벌하여 나랏 일을 그르친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綱鑑易知錄 卷八, 南宋紀 二》 /선조수정실록 2/ 덕운(德雲) : 《華嚴經》에 “善財童子問法於德雲比丘”라 하였는데 이 덕운은 요원(了元)을 말함. 소 식 시의 주에 의하면 불인선사(佛印禪師)의 이름이 요원인데 금산사(金山寺)의 주지로 있을 때 동파가 옥대(玉帶)를 남겨 산문(山門)을 지키게 하니 요원은 납군(衲裙)으로 보답하였다고 한다. /완당집3/ 덕유여모(德?如毛) : 詩經에 있는 구절인데 《덕의 수레[?]는 가볍기가 털과 같아서 만드는 사람이 적도다》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9-256/ 덕유일(德惟一) : 《서(書)》 함유일덕(咸有一德). 덕은 …… 모였고 : 사사(士師)는 옛날 형법(刑法)을 맡은 장관이다. 여섯 무신 등의 출전은 미상이다. 덕을 봄이지 : 덕을 살펴 알 수 있다는 뜻에서 활쏘기를 관덕(觀德)이라 한다. 〔용재집〕 덕음(德音) : 백성에게 은덕을 펴는 교서(敎書)나 명령. /동문선4-149/》 덕응방(德應房) : 사복시(司僕寺)의 한 분장(分掌)으로서 왕녀 이하의 교여(轎輿)에 관한 일을 맡음 ‘덕응’은 ‘덩’임. /중종4-340/ 덕이 …… 있도다 : 《논어》 태백(泰伯)에 공자가 “크도다. 요(堯)의 임금됨이여! 높고 높아서 오직 하늘만이 크거늘 요가 이를 본받으셨으니 그 덕이 넓고 넓어 백성들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도다.” 하였고,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문왕(文王)이 이미 별세하셨으니, 문(文)이 여기 나에게 있지 않으랴.” 하였고, 《논어》 팔일(八佾)에 공자가 “주(周) 나라는 하(夏) · 은(殷) 이대(二代)를 보아서 예(禮)를 만들었으니, 찬란하도다. 그 문(文)이여! 나는 주 나라를 따르겠노라.” 하였다. 여기서는 당시 임금의 큰 덕은 말로 형용할 수 없고 그 찬란한 문물인 시문(詩文)이 있어 그 덕을 기술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용재집〕 덕이 …… 했어라 : 덕성(德性)이 저절로 모습에 드러나는 것이다. 《대학》 전(傳) 6장에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한다.[富潤屋 德潤身]” 하였다. 〔월사집〕 덕종(德宗) : 742-805. 당의 13대 황제. 대종(代宗)의 장자. 이름은 적(適). 대종 때 천하병마원수(天下兵馬元帥)에 임명되어 노왕(魯王)에 봉해지고, 대력(大曆)14년(779)제위에 올랐다. 재위 초기에 양염(楊炎)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양세법(兩稅法)을 시행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 지방 번진 세력의 발호를 막아 중앙집권 기반을 다졌다. 781년 서진지난(四鎭之亂)을 초래하고 2년후 경원(涇原)의 병변을 맞아 봉천(협서)奉天(陝西)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이후 환관 세력의 발호로 실권을 박탈당했다. 덕천(悳泉) : 성기운(成璣運, 1877~1956)의 호, 자는 순재(舜在), 관향은 창녕(昌寧). 덕풍군(德?君) : 덕종(德宗 : 추존, 성종의 아버지)의 큰아들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서자. 이름은 이(●) /중종실록42/ 덕행과(德行科) : 《논어(論語)》 〈선진(先進)〉에서 공자(孔子)의 제자들을 특장에 따라 네 덕목으로 분류하여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伯牛), 중궁(仲弓)이고,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 자공(子貢)이고, 정사(政事)에는 염유(?有), 계로(季路)이고,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이다.” 하였다. 민세량의 덕행이 안연 다음 가는 정도로 훌륭하다는 의미이다. 덕황(德皇) : 한(漢) 나라 안제(安帝)는 그 아버지 청하왕(淸河王)을 높여 덕황으로 삼았다. /연려실기술22-408/ 덕흥군(德興君)1 : 고려의 왕족, 충선왕의 셋째 아들로서 이름은 혜(?)이다. 원 나라 황제에게 아부하여 고려에 많은 해를 끼쳤다. 기황후(奇皇后) 김용(金鏞) 최유(崔濡) 등과 모의하여 원 나라로부터 고려왕으로 책봉받고 1364년 최유와 함께 고려에 침입했다가 안우경(安遇慶) 최영(崔瑩) 등에게 참패하고 원 나라로 되돌아갔다. 덕흥군(德興君)2 : 중종(中宗)의 제7자로서 선조의 아버지. 이름은 소(?) 뒤에 대원군(大院君)으로 봉해졌음. /고봉집3/ 덧업이 …… 은덕이어라 : 우로(雨露)는 성은(聖恩)을, 건곤(乾坤)은 왕과 왕비를 뜻한다. 〔월사집〕 도(道) : 도는 형이상의 것이요, 기는 형이하의 것이다. 기는 도를 구현(具現)하는 수단·방법·재료·도구이다. /하곡1-55/ 도(度) : 사람의 생사를 바다에 비유하고 열반(涅槃)을 피안(彼岸)에 비유할 때 생사를 초월하여 피안에 이르는 경지를 이러 도(度)를 얻는다고 한다. 또 출가(出家)한 승려에게는 관에서 주는 신분증명서 격인 도첩(度牒)을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을 도승(度僧)이라 한다. /동사2-41/ 도(堵) : 악기를 다는 틀을 말함. 도(徒)·유(流)·부처(付處)와 충군(充軍) : 모두 형벌의 명칭으로서, 도형(徒刑)은 5등급으로 나누어 복역(服役) 기간은 1년에서 3년까지이고 복역 반 년과 곤장 10대로 한 등을 삼는 것. 유형(流刑)은 귀양보내는 것, 부처는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것. 충군은 군대에 편입시키는 것임. /중종2-110/ 도(道)가 있는 …… 있습니다 : 봉황새는 국가의 훌륭한 신하를 비유한 것으로, 이건창이 태평한 나라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새가 날아가니 깃털이 펄럭여 또한 앉을 자리에 앉도다. 왕께서 훌륭한 선비가 많아 충분히 부리신다.” 하여 훌륭한 신하를 봉황새에 비유하였으며, 또 “봉황새가 우니, 저 높은 뫼에서 울도다. 오동나무가 자라니, 저 아침해가 뜨는 동산에서 자라도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 하였는바, 봉황의 성질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죽실(竹實)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 하므로 말한 것이다. 도(道)야 …… 상관이랴 : 14권 ‘유하(柳下)의 내침’ 참조. 〔월사집〕 도(道)와 …… 견고하였어라 : 도는 형이상(形而上), 기(器)는 형이하(形而下)를 뜻하는 말로 《주역》 계사 상(繫辭上)에 보인다. 여기서는 형이상하(形而上下)의 이치를 담은 경전과 주석이 전해지고, 이것을 공부하는 자세가 견고하다고 칭찬한 것이다. 〔월사집〕 도가(棹歌) : 뱃노래. 본문에서는 무이도가(武夷棹歌)를 의미함. 주자(朱子)가 무이정사에 있으면서 구곡의 경치를 따라 지은 시로서 서시(序詩)와 함께 모두 칠언절구(七言絶句) 열 수로 되어 있음. 도가(徒歌): 반주 없이 여럿이 함께 부르는 노래이다. 도간(陶侃) : 당(唐)나라 사람. 자(字)는 사행(士行), 광주(廣州)와 형주(荊州)의 자사(刺史)를 지내고 태위(太尉)에 이르렀음. 도간(陶侃) : 자는 사행(士行)이다. 강서성(江西省) 파양(?陽) 출신인데 도연명(陶淵明)의 증조부이다. 서진(西晉)의 혜제(惠帝) 때 강하 태수(江夏太守)가 되고, 영가(永嘉)의 난 때 무창(武昌)을 지켜 공을 세웠다. 명제(明帝) 때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서 왕돈(王敦)의 반란과 소준(蘇峻)의 변을 평정하는 등 통군(統軍) 40여 년 동안 많은 공을 세워 진나라 왕실을 위하여 충성하였다. 벼슬이 시중태위(侍中太尉)에 이르렀고,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졌다. 도간(陶侃) : 진(晉) 나라 때 도 간은 8주 도독(都督)을 지내는 등 41년 동안 장상(將相)의 자리에 있었다. 그의 일화에, 젊을 때 꿈속에서 여덟 날개가 나서 하늘로 올라가 아홉 개의 하늘문을 들어가는데 여덟 번째까지 통과하고 마지막 문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문지기에게 맞아 떨어졌다. 그런데 그가 8주 도독이 되어 국가의 병권(兵權)을 휘어잡고 있을 때 몰래 왕의 자리를 엿보고 싶은 뜻이 생겼지만 그때마다 날개가 부러졌던 꿈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억제하였다고 하였다. 《晉書 卷六十六 陶侃傳》 /선조수정실록2/ 도간(陶侃)과 범방(范滂) : 도간은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재상이며 범방은 후한(後漢) 때의 명사(名士)인데 모두 훌륭한 어머니를 두었다. 도감(都監) : 상장(喪葬)·혼인 등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에 그 일을 맡아보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하는 관사(官司). 여기서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영접도감(迎接都監)이다. /중종실록42/ 도감당상(都監堂上) : 도감은 국혼(國婚)·국상(國喪) 등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에 임시로 설치하는 관서. 당상은 도감의 일을 지휘 감독하는 제조(提調) /연1-12-6/ 도검(韜鈐) : 옛적의 병서(兵書)인 《육도(六韜)》와 《옥검(玉鈐)》을 아울러 일컫는 말로서 일반적으로 병서를 지칭함. 경우에 따라서는 병법의 모략(謀略)이나 무장(武將)을 지칭하기도 함. 도견(陶甄) : 도공(陶工)이 녹로(?? : 회전하여 둥근 그릇을 만드는 제구)로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들므로 성왕(聖王)이 천하를 잘 다스림을 비유한 말. 《晋書》 도결(道訣) : 윗구절의 약초밭과 호응하여 도가(道家)의 불로장생(不老長生)의 비결을 뜻한다. 〔월사집〕 도계진상(到界進上) : 새로 부임한 감사(監司)·병사(兵使)·수사(水使) 등이 임금에게 그 지방의 토산품(土産品)을 바치는 것. 별례진상(別例進上)의 하나로 볼 수 있음. /중종실록 3/ 도고(?鼓) : 도고는 자루가 있는 조그만 북으로 음악이 끝날 때 연주된다. 도곡(陶穀) : 자는 수실(秀實), 후주(後周)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송 태조(宋太祖)가 등극(登極)한 후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였음. 《송사(宋史)》 도곡전(陶穀傳)에, “初太祖將受禪 未有禪文 穀在旁 出諸懷中而進之曰 已成矣 太祖甚薄之”라고 보임. /중종시록5/ 도공(悼公) : 진 도공은 춘추 시대 진 나라 29대 왕인데, 진(晉) 여공(?公)을 시해(弑害)한 난 서(欒書) 등이 그를 영립(迎立)하려고 하자, 그는 “임금을 세우는 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명(命)을 내게 하려는 것인데, 임금을 세워놓고 그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임금은 세워 무엇하겠는가?” 하고는 그들과 맹약을 단단히 한 후에 신절(臣節)을 지키지 않은 신하 7명을 쫓아냈다.<左傳 成公 十八年> /동사184/ 도관(都官) : 형조 판서의 별칭. 또는 형조의 당상관(堂上官) /세종실록 1-60/ 도관상서(都官尙書): 南朝 宋나라 때 둠. 六尙書의 하나. 都官·水部·庫部·功論의 四曹를 통괄하여 軍事 및 刑獄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도구(??) : 노(魯) 나라 지명. 《좌전(左傳)》 은공(隱公) 11년 기사에 ‘우보(雨父)가 은공의 아우 환공(桓公)을 죽이자고 청하므로 은공은 거절하고 임금의 자리를 떠나 도구로 가려고 하였다. 우보는 화가 미칠까 두렵게 여겨 나중에 환공과 공모하여 은공을 죽이고 환공을 임금으로 세웠음.’ /성호사설7/ *전하여 관직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는 곳의 뜻으로 쓰인다. 도규(刀圭) : 약을 헤아리는 기구로, 칼과 비슷하며 위는 뾰족하고 가운데는 패였는 바, 후세에는 의술(醫術)이나 약물(藥物)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도균(陶勻) : 왕자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 균은 도기를 제조할 때에 쓰는 선반(旋盤). 물(物)이 순환하는 것을 비유해서 쓰는 말인데, 여기서는 교화가 크게 순환해서 나쁜 것도 좋게 된다는 뜻임. /경제유표3/ 도기(到記) : 성균관 학생은 동·서재(東西齋)에 기숙하고, 아침·저녁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였는데 식당에는 학생의 명부가 비치되어 있고, 식사 때마다 학생들이 서명하였다. 이것을 도기라 하는데, 도기는 곧 성균관 학생의 출석부에 해당하는 것이다. /중종실록5/ 도기어(道其語) : 공수의 말을 말함. 도끼 …… 일으키니 : 매우 뛰어난 글 솜씨를 뜻한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영(?) 땅의 사람이 코끝에 백토(白土)를 파리 날개처럼 묻혀놓고 장석(匠石)을 시켜 그것을 깍아내게 하였다. 장석이 바람을 일으키며 도끼를 휘둘러 마음대로 깍아내어 백토를 다 깍아내었는데도 코를 다치지 않고 그 영 땅의 사람도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하였다. 〔용재집〕 도남(圖南) : 대붕이 날개를 펴고 남명(南冥)으로 날아가려고 한다는 뜻으로, ‘웅대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도남택(道南宅) : 동한(東漢) 말엽, 오(吳) 나라 손책(孫策)의 집안이 서주(舒州)로 이사하였을 때 주유(周瑜)가 그와 우정이 두터워 도남(道南)에 있는 자신의 큰 저택을 양보해 주어 손씨 집안을 살게 하고 스스로 한 집안 사람처럼 친밀하게 지냈던 고사가 있다. 매우 우정이 두터운 친구 사이를 뜻한다. 〔월사집〕 도남택(道南宅) : 동한(東漢) 말엽, 오(吳) 나라 손책(孫策)의 집안이 서주(舒州)로 이사하였을 때 주유(周瑜)가 그와 우정이 두터워 도남(道南)에 있는 자신의 큰 저택을 양보해 주어 손씨 집안을 살게 하고 스스로 한 집안 사람처럼 친밀하게 지냈던 고사가 있다. 매우 친분이 두터운 사람의 집을 뜻한다. 〔월사집〕 도년(徒年) : 도형(徒刑). 조금 무거운 죄를 범한 자를 어느 고을에 정속(定屬)시켜 노역(勞役)에 종사하게 하는 형벌인데, 1년으로부터 반년씩 더하여 3년까지의 5등급이 있다. /명종실록12/ 도년정배(徒年定配) : 도년은 도형(徒刑)에 의하여 처벌하는 햇수를 말하는 것으로 1년에서 3년까지를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한 등급마다 장(杖) 열대와 반년을 가감하여 배소(配所)를 정하는 것. /선조실록15/ 도다익(都多益) : 두투락 댕기. 계집아이 드리는 댕기로서 자주 빛의 헝겊을 두 끝이 뾰족하게 겹쳐 포개고 그 허리를 접은 곳에 댕기를 달았는데 그 종댕기를 머리 가닥에 넣어서 만듦. /연8-223-33/ 도당(都堂) : 의정부(議政府)의 별칭. 여기서는 의정(議政) 등을 말하는 것이다. /경세1-205/ 도당록(都堂錄) → 홍문록(弘文錄) /중종3-141/ 도덕경(道德經) 1부(部)를 받은 : 노자(老子)가 함곡관(函谷關)을 지나면서 관령(關令) 윤희(尹喜)에게 《도덕경》 오천 자를 써 주었다 한다. 여기서는 월사를 노자에 비긴 것이다. 〔월사집〕 도덕과 ……진동하였네 : 신주(神州)는 중국을 가리키는 바, 양천 허씨 집안의 인물과 문장이 중국을 진동시켰음을 말한 것이다. 도도(滔滔)히 …… 물이니 : 도도는 큰 물이 세차게 흐르는 모양으로, 《시경(詩經)》 《제풍(齊風)》 <재구(載驅)>에 “문수(汶水)가 도도히 흐르거늘, 길가는 사람들이 많고 많도다. [汶水滔滔 行人??]” 하였으며, 창주의 물은 창랑(滄浪)의 물로, 《맹자(孟子)》 《이루장(離婁章)》에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나의 갓끈을 빨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나의 발을 씻겠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 하였다. 도도불귀(??不歸) : 《詩經 幽風 東山》에 “我?東山 ??不歸”라 하였음. /완당집3/ 도도수수(陶陶遂遂) : 화기로운 모습.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及祭之後 陶陶遂遂 如將復入然”이라고 보임. /성호8-145/ 도도평장(都都平丈) : 문자도 분명히 가리지 못하는 몽학(蒙學) 선생을 말함. 옛날에 어떤 사람이 학동에게 《논어》를 가리키면서 “郁郁乎文”을 읽힐 때에 “都都平丈”이라 한 데서 나온 말. /완당집3/ 도도히 …… 사죄하노라 : ‘홀로 깨어 있는 사람’이란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굴원이 어부사(漁父辭)에서, “뭇사람들은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 하였는데, 용재 자신은 술에 취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용재집〕 도동록(道東錄) : 성호(星湖)가 퇴계(退溪)의 언행 가운데 요긴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퇴계의 문집과 언행록 등에서 발췌하여 분류 편찬한 책. 뒤에 《이자수어(李子粹語)》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는데 도체(道體), 위학(爲學)으로부터 이단(異端), 성현(聖賢)에 이르기까지 12조목으로 구성되었음. 도동서원(道東書院) : 대구직할시 달성군 구지면(求智面) 도동리(道東里)에 있는 서원. 선조 38년(1605)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동왕(同王) 40년에 도동(道東)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숙종 4년(1678)에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도두(刀斗) : 다리가 셋이고 작은 자루가 달린 작은 냄비로, 군중에서 낮에는 이것에 음식을 익히고 잠에는 이것을 두들겨 야경(夜警)의 신호로 삼았다. 일명 초두(?斗)라 한다. 〔용재집〕 도랍(刀臘) : 양면에 날이 있는 칼. 《周禮 考工記》 주(註)에 “도씨(桃氏)가 칼을 만드는데 납(臘)의 넓이가 2촌 반이다.” 하였고, 소(疏)에 “양면에 다 날이 있음.” 이라고 하였다. /완당집3/ 도략(韜略) : 옛날의 병서(兵書)인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을 아울러 일컫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병서나 모책의 뜻으로 쓰인다. 도략(韜略) : 육도(六韜)·삼략(三略)의 약. 전(轉)하여 병서(兵書) 또는 군략(軍略)을 이름. /삼봉2-243/ 도량산(道場山) → 정형(井?) 도령(陶令) : 도잠(陶潛)을 말하는데 도잠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낸 적이 있기 때문에 일컫는 말이다.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놓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했으며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짓기도 하였다. 도령(陶令) : 진(晉)나라의 처사(處士)인 도연명(陶淵明)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냈다 하여 이렇게 칭한 것이다. 도연명은 특히 국화를 사랑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갈건(葛巾)을 쓰고 다니다가 술을 걸러 먹었다 한다. 이 시는 도연명의 잡시(雜詩)를 본뜬 것으로 보이는 바, 그 일부를 소개한다. “집을 지은 것은 사람이 사는 경내에 있으나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 없네.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하여 이럴 수 있는가. 마음이 속세와 머니 지역이 절로 궁벽해지네.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고 한가로이 남산을 보노라.〔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도령(陶令)의 …… 맡기노라 : 도령은 도연명(陶淵明)이 일찍이 팽택현령(彭澤縣令)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며, 갈건(葛巾)은 갈포(葛布)로 만든 두건(頭巾)인 바, 도연명은 갈건을 쓰고 다니다가 술이 익은 것을 만나면 두건을 벗어가지고 술을 걸러 마셨으므로 말한 것이다. 도로(都盧) : 서역(西域)의 나라 이름. 그곳의 사람은 몸이 가벼워 나무를 잘 오르므로 함부로 잘 돌아 다니는 것을 비유한 것임. /완당집3/ 도록사(道錄祠) → 승록사(僧錄祠) /연행1-449/ 도룡(屠龍) : 용을 잡는 솜씨라는 뜻, 특히 문필의 기량이 뛰어나게 높은 것을 비유한다.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편에, 주평만(朱?漫)이 용 잡는 기술을 지리익(支離益)에게 배우는데 천금의 재산을 다 없애고 3년만에 기술은 배우게 되었으나 그 묘법을 써 볼 곳이 없었다.“ 하였음. 그래서 기술만 높고 쓸 곳이 벗는 것을 도룡지기(屠龍之技)라 칭함. /성호9-414/ 도룡(屠龍)의 수단 : 도룡은 용을 잡는 것으로, 뛰어난 학문이나 기예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莊子 列禦寇》 도류(徒流) :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의 약칭. 도형은 중한 죄를 범한 자를 관에 매어 두고 노역(勞役)을 시키는 형벌로 1년에서 3년까지 5등급이 있는데, 1년의 경우는 장륙십(杖六十), 1년 반은 장칠십, 2년은 장팔십, 2년 반은 장구십, 3년은 장일백을 병과함. 유형은 죄가 매우 중하나 사형할 수는 없는 자를 먼 지방으로 보내 종신토록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로, 이천리(二千里)·이천 오백리·삼천리의 3등급이 있고 모두 장일백을 병과함. /중종실록35/ 도륜(陶輪) : 《維摩詰經》에 “斷取三千大千世界 如陶家輪 着右掌中 擲過恒沙世界之外”라 하였음. /완당집3/ 도를 …… 일반이로고 : 일반(一斑)은 표범의 무늬 하나로 전체의 작은 일부분이다. 주 상인이 도의 깊은 경지를 얻었기에 그가 하는 말에서 그 깊은 경지의 일부분이나마 드러난다는 뜻이다. 〔월사집〕 도를 들었다 : 방빈왕(方賓王)이 《논어》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의 뜻을 물었던 것이다. 도리(?黎) : 길에 들어가 중이 된 총각을 높이 부르는 말. /명종실록16/ 도리(桃李) :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주시관(主詩官)이 되어 많은 인제를 뽑았으므로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천하의 桃李가 모두 公의 門下에 있다.” 하였다. 도리(桃李)의 오솔길 : 앞의 주(註) ‘분분히 …… 자인가’ 참조. 〔용재집〕 도리어 …… 하도다 : 일본과는 불공대천의 원수 사이지만 조선의 안위를 염려하여 양국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고 일본의 조선에 대한 태도를 보고 국론(國論)을 정하고 이번 사행(使行)을 보내게 되었다는 뜻이다. 〔월사집〕 도리원(桃李園) : 앞의 <주> 이백(李白) 참조. 도림(桃林) : 전설에 과보(?父)라는 선인(仙人)이 해를 쫓아 가다가 목이 타서 죽을 때 지팡이를 던지자 숲이 되었다 한다. 옛날 지명.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영보(靈寶)의 서쪽, 협서(陜西) 동관(潼關)의 동쪽지역으로 주 무왕(周武王)이 소를 방목하였다. 도림(桃林) → 화산(華山) 도말(塗抹) : 생각하지 않고 글을 내리쓰는 것을 이름. 《낭환기(琅環記)》에 “신필(信筆)로 도말(塗抹)했으나 스스로 천연(天然)의 맛이 있다.” 하였음. /해행7-375/ 도망(悼亡) : 상처(喪妻)를 이름. 진(晉) 나라 반 악(潘岳)이 상처를 하고 도망시(悼亡詩) 세 수를 지었는데 그 시가 전송되어 뒷사람이 상처를 당한 용어를 쓰고 있음. /완당집3/ 도맥(道陌) :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사당이 있었던 곳. 중국의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승상(丞相)이던 제갈량(諸葛亮)의 자는 공명(孔明)인데,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의 부흥에 힘썼으며 시호는 무후(武侯)이다. 그가 죽자 그가 있었던 곳의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려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파촉(巴蜀)의 백성들이 도맥(道陌)에서 제사를 드렸고, 중서랑(中書郞) 상충(向充) 등의 건의로 면양(沔陽)에 사묘(祠廟)가 세워졌음. 도목(都目) : 도목정사(都目政事)라고도 함. 해마다 6월과 12 월에 실시하는 현직 벼슬아치들의 성적을 따져 벼슬을 올려 주거나 떼어버리는 일. 일을 한데 몰아서 행하거나 적는 것. 그러한 행사·문서를 뜻하기도 한다. 국어사전 등에는 도목을 도목정사(都目政事)의 준말로 잡고, 도목정사는 ‘해마다 유월과 섣달에 벼슬아치의 성적에 따라 벼슬을 떼어버리거나 좋은 데로 올리거나 하던 일’ 등으로 해설되어 있다. 그러나, 도목이란 도록정사의 준말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고, 도목안(都目案)·도목단자(都目單子) 등 문서에도 쓰이고 행사에도 쓰이는 말이며, 도목정사는 경우에 따라 한 해에 한 번 내지 여섯 번 있었다.《中宗實錄 三十八年 九月 甲子》 도목장(都目狀) : 지방 관청의 종 및 시정(侍丁)·봉족(奉足)·호수(戶首) 등의 이름을 기록한 장부. /중종실록40/ 도목정사(都目政事) : 관원들의 치적(治績)을 고과(考課)하는 것. 경관(京官)의 경우는 해당 관서(官署)의 장이, 외관(外官)의 경우는 해당 관찰사가 종합 심사하여 그 성적에 따라 영전시키거나 좌천시킨다. 음력 6월과 12월에 실시하는데 6월에 하는 것을 권무정(權務政), 12월의 것을 대정(大政)이라 한다. /중종실록49/ 도무황제(道武皇帝): 拓跋珪. 昭成帝의 嫡孫. 諡號가 道武이고, 廟號는 太祖이다. 晉의 太元 11년에 즉위하여 국호를 魏로 바꾸고 平城에 도읍하였다. 劉顯, 劉衛辰의 여러 부락을 평정하고, 燕을 정벌하였으며, 中山을 포위하고 慕容寶를 격파하는 등 무공이 뛰어났다. 재위 기간은 386~408년(23년)인데, 아들 淸河王 紹에게 시해되었다. 연호는 登國, 皇始, 天興, 天賜 등이다. 도문(到門) : 과거에 급제해서 홍패(紅牌)를 받아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벌이는 잔치. /경세3-443/ 도문(桃門) : 부귀한 사람의 집. 도문학(道問學) : 학문을 행하는 것. 즉 학문을 극진히 쌓아 도체(道體)의 세밀한 데까지 다한다는 뜻. 《中庸 第二十七章》 /서애 2-63/ 도미 : 거르지 않은 전내기 술을 지칭하기도 하고 장미과에 속하는 꽃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꽃은 초여름에 연푸른 빛을 띠고 피는데, 그 빛깔이 도미 술과 비슷하다 하여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용재집〕 도미주(??酒) : 도미(??)는 원래 장미과에 속하는 꽃으로 초여름에 연푸른 빛을 띠고 핀다. 거르지 않아 맛이 진한 전내기 술의 빛깔이 이 꽃과 비슷하다 하여 도미주라 부른다. 〔월사집〕 도방(都房) : 큰 화방(花房 : 꽃술)을 이른다. 송옥(宋玉)의 구사(九辭)에 “도방에 나풀거리는 것들 섞여있네.〔紛??乎都房〕” 하였는데, 그 주(註)에 “도(都)는 큼이요 방(房)은 화방이다.” 하였다. 도백(屠伯) : 도자(屠者)의 우두머리. 《후한서(後漢書)》 혹리열전(酷吏列傳)에, “延年受屠伯之名 豈虛也哉”라는 말이 있고, 《진서(晉書)》 구희전(苟晞傳)에, “晞以嚴刻立功 人不堪命 號曰屠伯” 이라는 말이 보이는데, 여기에서 도백이라 함은 사람을 죽이기 좋아하는 포악한 권력자를 의미하는 것임. /성호6-236/ 도복(陶復) : 혈거(穴居) 시대의 주거 형태. 《시경》 대아(大雅) 면편(?篇)에 “고공단보가, 움집에 살아서, 집이 있지 않았네.[古公亶父 陶復陶穴 未有家室]”라고 한 말이 있음. 도부(到付) : 관찰사가 수령의 장보(狀報)에 답하는 문서. 《中宗實錄 六年二月丁未》 도부(桃符) : 새해를 맞이하여 재앙을 쫓는 부적을 말함. 복숭아 나무 가지는 사특한 귀신을 쫓는 구실을 한다고 하여 일컫는 말임. 도부(刀夫) : 추남(醜男)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나 출처는 미상. 도사(都事) : 각 감영에서 관사의 일을 돕는 한 벼슬. 종5품으로 관사 다음가는 벼슬이다. 도사(都事) : 감영(監營)의 종5품 벼슬. 감사(監司)의 다음가는 벼슬로, 지방 관리의 규찰(糾察)과 과시(科試)를 맡아 보았다. /중종3-55/ 도사(陶謝) : 도연명(陶淵明)과 사령운(謝靈運)의 병칭. 두보(杜甫)의 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 “어찌하면 시상(詩想)이 도연명 사령운 같은 이를 얻어서 그로 하여금 시 짓게 하고 함께 노닐꼬.[焉得思如陶謝手 令渠述作與同遊]” 하였다. 〔용재집〕 도사(道使) : 지금의 도지사와 같은 직책. 고려는 성종 2년에 전국에 12목을 두었다가, 성종 14년에 전국을 10도(道)로 나누고, 12주(州)에 절도사를 두었다가 현종 때에 전국을 오도·양계로 나누고, 그 밑에 4도호부 8목을 두었다. /고려도경/ 도사(倒?) : 신을 거꾸로 신는 일. 남을 반가이 맞이하자면 마음이 급해서 신을 제대로 신지 못한다는 뜻에서 생긴 문자다. 《위지(魏志)》 왕 찬전(王粲傳)에 “蔡邕才學顯著貴重朝廷常車騎塡巷賓客盈坐聞餐在門倒?迎之”란 말이 보임. /연행8-209/ 도산(塗山) : 하 나라 우왕(禹王)이 나이 30에 후비를 취한 나라 이름. 우 임금이 이 나라 임금의 딸을 부인으로 취하여 아들 계(啓)를 낳았음. 도산(陶山)1 : 조선 중기의 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말함. 도산(陶山)2 : 조선 중기의 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학문을 강학한 곳인데 여기서는 퇴계를 말한다. 퇴계에 대해서는 아래의 주 참조. 도산(陶山)의 …… 정한강(鄭寒岡) : 도산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가리킨 것이며, 학봉(鶴峯)은 김성일(金誠一 : 一五三八~一五九三)의 호이고 서애(西厓)는 유성룡(柳成龍 : 一五四二~一六0七)의 호이며, 유일재(惟一齋)는 김언기(金彦璣 : 一五二0~一五八八)의 호이고 한강(寒岡)은 정구(鄭逑 : 一五四三~一六二0)의 호이다. 네 사람은 모두 퇴계의 문인으로 김성일은 자가 사순(士純)이고 본관이 의성(義城)인 바, 一五六八년(선조 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후 정언(正言)·장령(掌令)·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고, 一五九0년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등을 맡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에 배향(配享)되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유성룡은 자가 이현(而見)이고 본관이 풍산(豊山)인 바, 一五六六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특히 임진왜란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언기는 자가 중온(仲溫)이고 본관이 광산(光山)으로 진사에 합격한 후 도산(陶山)에 살면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정구는 자가 도가(道可)이고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다. 일찍이 오건(吳健)에게 수학하였으며, 퇴계와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성주(星州)의 회연서원(檜淵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도산(陶山)의 애통 : 도산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사시던 지명으로 곧 퇴계가 별세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경북 예안(禮安)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우고 제자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며 사물을 대하는 감회와 학문의 수양을 읊은 시조이다. 예안은 지금의 안동(安東)에 편입되었는바, 도산서당은 지금의 도산서원의 옛터이다. 도산옹(陶山翁) : 퇴계 선생을 말함. 퇴계 선생이 만년에 도산서당을 건립하고 이 곳에서 강학(講學)했기 때문에 일컫는 말임. 도산장(陶山莊) : 퇴계(退溪) 이 황(李滉)이 학문을 강마하던 곳. 선조 7년(1574)에 서원(書院)이 세워져 지금까지 전함. /성호5-21/ 도산지절요(陶山之節要) : 도산은 이 황(李滉)의 호. 절요(節要)는 이 황이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있는 주자의 편지를 뽑아 엮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말함. 30권 10책. /면암1-28/ 도산지회(●山之會) : 도산은 회계산(會稽山)으로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에 있다. 옛날 우(禹) 임금은 제후들을 도산에서 모으니, 폐백을 갖고 온 나라가 만(萬)이나 되었으며, 회계산에서 여러 신에게 제사하였다. 《春秋左傳 哀公七年, 國語 魯語》 /청장 1-141/ 도삼년(徒三年) : 도형(徒刑)의 최고 형량. 도형은 1년에서 3년까지 있는데, 이를 5등급으로 나누어 장(杖) 10대와 복역 반년을 1등급으로 삼아 차이를 둔다. 도서(賭墅) : 별장을 걸고 내기를 함. 晋書에 “謝安이 형의 아들 玄과 함께 바둑을 두어 별장을 걸고 내기를 했다[謝安與兄子玄圍碁賭別墅]》”는 기록이 있음. 도서(圖書) : 어진 정치를 펴려는 황준량의 높은 포부와 기상을 표현한 말이다. 봉황은 원래 태평성대에나 나타나는 상서로운 새인데, 옛날 황제(皇帝)가 낙수(?水) 위에서 노닐 때 봉황이 도서(圖書)를 입에 물고 내려오자 황제가 절을 하고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여기서 봉황은 황준량이고 도서는 그가 품은 이상이다. 《춘추합성도(春秋合誠圖)》 도서(圖書)1 : 통상을 허락한 왜인에게 발급한 동인(銅印). 반으로 나누어 오른쪽은 왜인에게 주고, 왼쪽은 예조에 보관하고, 그 인본(印本)을 삼포(三浦)에 나누어 주어 해당 왜사가 올 때에 맞추어 보아, 그 진위(眞僞)를 가렸다. /중종실록5/ 도서(圖書)2 :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하도는 복희씨(伏羲氏)가 천하를 다스릴 때 용마(龍馬)가 하수에서 나옴에 드디어 그 무늬를 본받아 팔괘(八卦)를 그린 것을 말하고, 낙서는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에서 글이 나왔는데 이를 본받아 베풀어서 홍범(洪範)을 지었던 것을 말함. 도선(道詵) : 신라 말기의 중, 호는 옥룡자(玉龍子)이며, 속성(俗姓)은 김(金). 고려의 역대 왕은 그를 매우 높여 현종(顯宗)은 대선사(大禪師), 숙종(肅宗)은 왕사(王師), 인종(仁宗)은 선각국사(先覺國師)의 존호를 각각 주었음. 그의 음양지리학설은 중국에서 건너 온 것을 고려화(高麗化)한 것이며, 우리 나라 절터는 그가 정한 것이 많다 함. 시호(諡號)는 요공(了空)임. 풍수(風水)와 음양학(陰陽學)에 조예가 깊어 고려 태조의 출현을 예언하였다. 우리 나라 풍수지리학의 시조임. /성호7/ 도선주(都船主) : 우리 나라에 오는 여러 척의 배를 한 단위로 한 선주(船主)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는 선주. /중종실록52/ 도성 …… 신선이로세 : 후금(後金)이 침입하려는 시국의 위태한 상황을 겪지 않고 떠났다는 뜻이다. 〔월사집〕 도성 …… 않지 : 자공(子公)은 한(漢) 나라 진탕(陳湯)의 자. 그가 당시 권병(權柄)을 잡고 있던 거기장군(車騎將軍) 왕음(王音)의 신임을 받고 있음을 알고 군수(郡守) 진함(陳咸)이 여러 차례 뇌물과 함께 편지를 보내 도성에 들어가 내직에 종사할 수 있게 해주기를 청하였다 한다. 《漢書 陳咸傳》 〔용재집〕 도성 …… 있었어라 : 송(宋) 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낙양(洛陽)에 사는 15년 동안 예궐(詣闕)할 때마다 위사(衛士)들이 모두 손을 이마에 앉고 공경스럽게 바라보면서 “이 분이 사마 상공(司馬相公)이시다.” 하였다 한다. 《宋史 司馬光傳》 이원익은 생전에 이미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므로 일생을 마치지 않아도 그 인품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평판은 이미 알 수 있었다는 뜻이다. 〔월사집〕 도성유(都聖兪) :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정언(廷彦), 호는 양직(養直), 본관은 성주(星州). 한강 정구와 낙재 서사원의 문인으로 문장과 행실이 당대에 출중하였다. 도소(屠蘇) : 약초 이름. 이를 넣어 빚은 약주(藥酒)로 정월 초하루 아침에 마시면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장수한다고 함. 도소주(屠蘇酒) : 설날에 마시면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장수한다는 도소(屠蘇)를 넣은 약주. 약술로 한약재인 육계(肉桂), 산초(山椒), 백출(白朮), 길경(桔梗), 방풍(防風) 등을 넣어 빚는 술이다. 일설에 옛사람이 도소옥(屠蘇屋)에서 술을 만듦으로 도소주라 하는데 화타(華陀)의 비방임. /연산4-448-4/ 도수(盜嫂) : 《史記 陳平世家》에 “平雖美丈夫如冠玉矣 …… 平居家時 盜其嫂”라 하였음. 도승(度僧) : 경에게 도첩(度牒)을 줌. 또 그것을 받는 중. /연산군/ 도승(渡丞) : 나루를 관장하는 관원. 나중에는 진도별장(津渡別將)으로 개칭(改稱)하였는데 수상한 사람을 검문 검색하는 권한이 부여되었음. /중종실록40/ 도시(都試) : 조선조에 병조(兵曹) 훈련원(訓練院)의 당상관(堂上官) 또는 지방의 병사(兵使)가 해마다 봄과 가을에 무재(武才)를 시험하여 뽑든 과시(科試). 도신(塗莘)1 : 우(禹) 임금이 도산(塗山)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문왕(文王)이 신(莘) 땅의 여인, 태사(太사)를 아내로 맞이했던 데서 온 말이다. 〔용재집〕 도신(塗莘)2 : 황후나 왕후의 친정 나라. 주 나라 문왕(文王)이 신(莘)에서 태사(太?)를 취하여 무왕(武王)을 낳았고, 하 나라 우왕(禹王)이 도산(塗山)에서 후비를 취하여 계(啓)를 낳았음. 도안(道安) → 부견(符堅) /삼봉1-339/ 도암(陶菴) : 이재(李縡, 1680~1746)의 호. 자는 희경(熙卿), 관향은 우봉(牛峰). 도야(陶冶) : 도(陶)는 기와를 굽는 사람이요 야(冶)는 풀무장이인데 이는 화육(化育) 재성(裁成)의 뜻을 빌어서 표현한 것임. 《회남자(淮南子)》에 “천지를 포괄하고 만물을 도야한다.” 하였음. /삼봉1-125/ 도어사(都御史) : 대사헌(大司憲) /연려실기술17-4-383/ 도역(徒役) : 도형(徒刑)을 죄목으로 복역(服役)하는 것. 1년에서 3년까지 5등급임. /명종실록 16/ 도역후(淘礫後) : 《晉書 孫綽傳》에 “淘之沃之 瓦礫在後”라 하였음. 정한 것은 앞서고 거친 것은 뒤에 있다는 것임. /완당집3/ 도연명(陶淵明) : 진(晉) 나라 시상(柴桑) 사람 도잠(陶潛). 자는 원량(元亮), 세칭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한다.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이 되었을 때 군(郡)에서 독우(督郵)를 보냈는데, 현리(縣吏)가 띠와 의관을 갖추고 그를 보라고 하자 “오두미(五斗米)를 위하여 구차히 향리의 소아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하고 그날로 인끈을 풀고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고향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노닐었다고 한다. 《진서》 94.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말하지 말라’는 것은 현감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만류하는 말인 듯하다. 도연명(陶淵明)의 …… 않겠는가 : 유연(悠然)은 한가로운 뜻인 바, 도연명의 잡시(雜詩)에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하였으므로 여기에서 유연을 취하여 호로 삼은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의 국화 : 4권 주 ‘동쪽 울 밑 국화’ 참조. 〔용재집〕 도연명(陶淵明)의 다섯 아들 : 차례로 서(舒), 선(宣), 옹(雍), 단(端), 통(通)이었음. 다섯 아들이 모두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답해 하면서 그것을 천운으로 돌리고 술을 마신다고 하는 내용의 <책자(責子)>라는 시를 읊었음. 여기서는 모암공(茅菴公)이 다섯 아들을 남들에게 드러내 놓고 자랑하지 않았음을 비유함. 도연명(陶淵明)의 돌아감 : 도연명은 진(晉)나라의 처사로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이 되었으나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돌아왔으므로 말한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시편 :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이라 노래한 도연명의 잡시(雜詩)를 가리킨다. 《古文眞寶 前集》 〔용재집〕 도연명(陶淵明)처럼 …… 있으랴 : 도연명이 한번은 중구절(重九節)에 술이 없어 울 밑의 국화꽃만 한 웅큼 따서 쥐고 있자니 멀리 흰옷 입은 사람이 오는 게 보였는데, 바로 군수(郡守) 왕홍(王弘)이 술을 보낸 것이었다 한다. 《南史 隱逸傳》 〔용재집〕 도연명의 시 <음주이십수(飮酒二十首)> 가운데 제5수에 “結廬在人境 사람이 많은 곳에 집을 지으나 而無車馬喧 거마의 시끄러움이 없네 問君何能爾 그대여 어찌 능히 이럴 수 있는가 心遠地自偏 마음이 멀면 땅이야 절로 호젓한 법 採菊東籬下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따고 悠然見南山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네 山氣日夕佳 산 기운 밤낮으로 아름다운데 鳥飛相與還 나는 새와 함께 돌아오네 此間有眞意 이 사이에 진의가 있나니 欲辨已忘言 분변하고자 함에 이미 말을 잊노라”라고 읊었는데, 곧 여기에서 ‘유연’의 뜻을 취함. 도연명처럼 …… 지으니 : 도연명은 팽택 령(彭澤令)이 된 지 80여 일만에 독우(督郵)에게 머리를 숙이기 싫어 인끈을 풀고 돌아온 뒤 그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었다. 《晉書 卷94》??? 도열(桃?) : 상사(喪事)에서 상서롭지 못한 것을 제거하는 의식을 할 때 쓰는 도구 《禮記 檀弓下》에 “임금이 신하의 상(喪)에 갈 때는 무축(巫祝)으로 하여금 도열(桃?)을 잡고 상서롭지 못한 것을 제거하게 한다.” 하였다. /선조실록23/ 도온(道?) : 진(晉) 나라 사안(謝安)의 질녀이며, 왕응지(王凝之)의 처(妻)로 매우 총명하였다고 한다. 사안이 눈 내리는 날 집안 사람과 모여서 글뜻을 이야기하다가 “백설이 분분히 내리는 것이 무엇과 같은가?” 하자, 조카인 호아(胡兒)가 “공중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 다소 비길만합니다.[撒鹽空中差可擬]” 하였다. 이에 질녀인 사도온(謝道?)이 “버들솜이 바람에 나는 것[柳絮因風起]으로 비유하느니만 못합니다.” 하니, 사안이 크게 웃으며 즐거워하였다 한다. 〔월사집〕 도올(??) : 춘추시대의 초(楚) 나라 역사. /성호8-389/ 도옹(陶翁)의 책자음(責子吟) : 도옹은 도연명을 가리키고, 책자음은 그가 지은〈책자(責子)〉라는 시를 가리키는 바, 이 시는 귀밑머리에 백발이 생기는 나이에 비록 다섯 아들이 있으나 모두 지필(紙筆)을 잡고 공부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이를 스스로 천운(天運)이라 여기고 우선 술을 마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도요(桃夭) : 《시경(詩經)》의 편명. 문왕(文王)의 후비 태사(太?)가 현숙하여, 남녀의 질서가 유지되고 혼인은 적시에 이루어지며, 나라에 환과(鰥寡)가 없음을 칭송한 노래. /중종7-87/ 도요시(桃夭詩) : 《시경》 <주남(周南)>의 ‘도요편(桃夭篇)’을 말함. 《대학》의 전 제9장에서 이 시를 인용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음. 桃之夭夭 도화가 어여쁨이여 其葉?? 그 잎이 무성하구나 之子于歸 이 사람이 시집감이여 宜其家人 그 집안 사람에게 잘 하네 도요장군(度遼將軍) : 한(漢) 나라 장군의 명호(名號). 도요는 요수(遼水)를 건넌다는 뜻으로 한 소제(漢昭帝) 때 도요장군을 두었는데, 범 붕우(范朋友)가 이를 맡아 요동(遼東)의 오환(烏桓)를 쳤음. 그 후 후한(後漢) 때에도 이를 두어 오원(五原)에서 흉노(匈奴)를 방어했음. /연행10-134/ 도우(都?) : 도유우불(都兪??). 도유는 찬성, 우불은 반대를 말한다. 옛날 요(堯)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할 때 각기 서로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말함에서 유래하여 군신간에 정사를 토론하고 심의하는 뜻으로 쓰인다. 도원(道院) : 당시 한적한 군재(郡齋)의 통칭이다. 도원(桃源) : 무릉도원(武陵桃源).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일컬어진 바가 있는데, 이 세상 밖의 별천지를 말함. 진(秦) 나라 때에 백성들 몇 사람이 포악한 정치를 피하여 궁벽한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산골에 숨어서 자손이 5백~6백 년이나 숨어 살았다 한다. /해행5-459/ 도원결의(桃園結義) : 이 말은 소열이 관우(關羽)·장비(張飛) 두 장수와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었다는 고사. /성호8-193/ 도원량(陶元亮) : 진(晉) 나라 시상(柴桑) 사람, 이름은 연명(淵明)이고 원량은 자임. 일명 잠(潛)이라 하고, 세칭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함. 진 나라가 망하고 유송(劉宋)이 서자 정절을 지켜 율리(栗里)에 살았음. 《晉書》 九十四. 도원량(陶元亮)의 글귀 : 원량은 진(晉)나라 때의 은사(隱士)인 도연명(陶淵明)의 자이다. 일명은 잠(潛)인데 팽택현령(彭澤縣令)이 되었다가 3개월만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어 유명하다. 새와 구름의 글귀란 귀거래사에 ‘구름은 무심히 산구멍에서 나오고 새는 느릿느릿 날아 돌아올 줄을 안다.〔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한 글을 가리킨다. 아래의 도팽택(陶彭澤) 역시 그를 가리킨 것이다. 도유(都兪)1 : 도는 왕의 의견에 찬탈할 때 신하가 내는 탄미의 소리요, 유는 신하가 제시한 의견에 왕의 환영 내지 허락의 뜻을 나타낼 때 내는 소리다. 《書經 堯典·舜典·大禹謨》 /중종실록39/ 도유(都兪)2 : 도유우불(都兪??)의 뜻. 도유는 찬성 우불은 반대를 말하는데 옛날 요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할 때 각기 서로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말함에서 유래하여 군신간에 정사를 토론하고 심의하는 뜻으로 쓰임. 도유나(都維那) → 綱維 도유우불(都兪??)1 : 모두 감탄사이다. 상대방의 말에 찬동할 때에는 도와 유를 쓰고 찬동하지 않을 때에는 우와 불을 쓴다. 군주와 신하가 자유롭게 정치를 논하고 의리를 모으는 요순시대 도덕 정치의 상징어이다. 도유우불(都兪??)2 : 본래는 감탄사(感歎辭)로 쓰던 말인데, 후세에는 군신(君臣)간에 서로 합심(合心)하여 토론하는 말로 쓰임. 즉 도유(都兪)는 합의에 찬성하는 것이요, 우불(??)은 그렇지 않다는 말로서 서로 가부를 토론하는 것. /중종실록2/ 도율(陶栗) : 도율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가리킨다. 도은(陶隱) : 고려말(高麗末)의 문신 이숭인(李崇仁)의 호. 그의 자는 자안(子安)이고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용재집〕 도은거(陶隱居) : 은거는 양(梁) 나라 도 홍경(陶弘景)의 자. 갈 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을 읽고 양생(養生)에 뜻이 있어 구곡산(句曲山)에 들어가 화양은거(華陽隱居)라고 호하였다. 저서에 《학원(學苑)·《본초경집주(本草經集註)》 등이 있음. /성호6-116/ 도이년반(徒二年半) : 오형(五刑)의 하나로 2년 반 동안 복역(服役)하는 형벌. 1년에서 반 년씩 차등을 두어 3년까지 다섯 등급이 있고, 장(杖)은 60에서 10대씩을 한 등급으로 1백 대까지 다섯으로 나누어 병과하였다. /선조실록3/ 도인(導引) : 도가(道家) 양생법(養生法)의 하나. 호흡 부앙(呼吸俯仰)하고 수족을 구부렸다 폈다 하여 기혈을 충족시키며 신체를 가볍게 하는 것. /성호5-127/ 도인(導引)과 벽곡(?穀) : 모두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으로서, 도인을 몸과 수족을 굴신(屈伸)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이고, 벽곡은 화식(火食)을 하지 않고 생식(生食)을 하는 것이다. /고봉집2/ 도인법(導引法) : 신선(神仙)이 되고 오래 사는 양생(養生)법 중의 하나로, 신체의 운동과 호흡법을 말한다. /연려실기술16-4-169/ 도인죽(桃仁粥) : 도인(桃仁)은 복숭아 씨 가운데 있는 물렁물렁한 부분을 말하는데, 《본초강목》에는 피를 잘 통하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를 이용한 것 같다. /연행1-833/ 도인지목(渡人之木) :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는 불법의 진리를, 강을 건네 주는 뗏목에 비유하여 쓰는 말. 뗏목이 강을 건네 주듯이, 불법이 중생을 제도해 주는 진리임을 체득하는 것을 말하는데, 《금강경(金剛經)》에 따르면, 불법을 체득한 뒤에는 뗏목 즉 불법 자체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正信希有分 第六》 /양촌3-50/ 도자에게 …… 기뻐하였고 :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햇볕이 뉘엿뉘엿 장차 지려하는데,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대도다.[景??以將入 撫孤松而盤桓]”라고 하였다. 도잠(陶潛) : 진(晉) 나라 시상(柴桑) 사람, 자는 원량(元亮), 세칭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한다. 본문에서 《송국(松菊)》을 말한 것은 도잠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삼경은 곧 거칠어졌으나 송국은 오히려 남아 있구나.[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읊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도잠(陶潛) : 진(晉) 나라 시상(柴桑) 사람, 자는 원량(元亮), 세칭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함.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이 되었을 때 군(郡)에서 독우(督郵)를 보냈는데, 현리(縣吏)가 띠와 의관을 갖추고 그를 보라고 하자 “오두미(五斗米)를 위하여 구차히 향리의 소아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하고 그날로 인끈을 풀고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고향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노닐었다고 함. 《진서》 94. 도잠(陶潛) : 진(晋)의 처사(處士)로 41세 때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웃사람의 제재가 싫고 전원(田園)이 그리워 재직한 지 80일 만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음. 《陶淵明集 文 歸去來兮辭 子序》 /고봉집/ 도잠(陶潛)도 …… 돌아갔지 :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의 자는 원량(元亮)이고 또 다른 이름이 잠(潛)이다. 그가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으로 있을 때 군(郡)에서 독우(督郵)를 보냈는데, 현리(縣吏)가 의관을 갖추고 만나뵈라고 하자 “오두미(五斗米)를 위하여 구차히 향리의 소아(小兒)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하고는 즉시 인끈을 풀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용재집〕 도잠(陶潛)의 국화 : 도잠은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 그의 잡시(雜詩)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하였다. 〔용재집〕 도잠(陶潛)의 취미 : 도잠은 도연명(陶淵明)이 은둔한 뒤에 고친 이름인 바, 도연명은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는 고향의 전원에 돌아가 소나무와 국화를 심고 한가롭게 살았으므로 말한 것이다. 도장(道長) : 군자가 세력을 얻어 조정에 진출함을 뜻한다. 《주역》 태괘(泰卦) 단전(彖傳)에 “양이 안에 있고 음이 밖에 있으며 강건함이 안에 있고 유순함이 밖에 있으며 군자는 안에 있고 소인은 밖에 있으니, 군자의 도가 자로 소인의 도가 사라지는 것이다.[內陽而外陰 內健而外順 內君子而外小人 君子道長 小人道消]” 한 데서 온 말이다. 〔월사집〕 도장(道藏) : 서적(書籍)을 저장한 곳. /성호7-20/ 도장(導掌) : 조선 시대 관둔전(官屯田)이나 궁둔전(宮屯田)을 관리하던 사람. /경세2-212/ 도적 : 옛날 지배 계급의 역사에서는, 정의를 들고 일어서서 항쟁하는 농민들은 모두 도적이라 일컬었다. /열하1-279/ 도정(都正) : 조선 시대 종친부, 돈녕부, 훈련원의 정3품 벼슬이다. 도정절(陶靖節) : 정절(靖節)은 도 잠(陶潛)의 시호(諡號). 그는 지취(志趣)가 고결하고 영리(榮利)를 사모하지 않았다. 그의 시는 뜻이 깊고 맑았으며 문장 또한 고고하였다. 《晋書 卷九十四 列傳 第六十》 /명종실록14/ 도정절(陶靖節) : 진(晉) 나라 은사(隱士)인 도연명(陶淵明). 자는 원량(元亮)이고, 일명 잠(潛)이라 하며 세칭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한다. 진 나라가 망하고 유송(劉宋)이 서자 정절을 지켜 심양(?陽)에 들어가 살았는데, 당시에는 팽택현(彭澤縣)에 속한 땅이었고 지금은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서남쪽에 있다. 도제(道齊) : 정치를 함에 있어 “덕(德)으로써 인도하고, 예(禮)로써 가지런히 한다.[道之以德 齊之以禮]를 아울러 이른 말. 《論語 爲政》 /명종실록14/ 도조(屠釣) : 주 문왕(周文王)이 패왕(覇王)을 보필할 사람을 얻으리라는 점괘를 얻고 사냥하러 나가서 과연 위수(渭水)가에서 여 상(呂尙)을 만났다.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우리 선군(先君) 태공(太公)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주(周)에 오고 주가 이 때문에 홍할 것이라 하셨다. 우리 태공이 그대를 바란 지 오래다.’ 하였다. 그러므로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고 함께 돌아가 사(師)로 세웠다. 여상의 본성은 강(姜)이고 봉성(封姓)을 따라 여 상이라 하며, 강태공 또는 여망(呂望)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조(屠釣)는 소·양 따위를 잡고 고기를 낚는다는 뜻으로, 비천한 일에 종사하는 자를 이르는 말로 쓰이는데, 여 상이 처음에는 조가시(朝歌市)에서 소를 잡고 뒤에는 위수 가에서 고기를 낚았었다. 《史記 卷三十二 第太公世家》 /선조실록10/ 도조(屠釣)에 이름 숨기고 : 도(屠)는 도살업이고 조(釣)는 낚시질이다. 주(周) 나라 강태공(姜太公)이 문왕(文王)을 만나기 전 일흔 살에는 조가(朝歌)에서 도살업을 하고 아흔 살에는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을 하였다는 고사를 차용하였다. 《韓詩外傳 7卷》 〔월사집〕 도주(道州) : 위 양성(陽城) 참조. 〔용재집〕 도주(道州)1 : 경상 북도 청도(淸道)의 옛 이름. 도주(道州)2 : 송 나라 때 한 탁주(韓??)가 도학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많은 유학자를 연루 시켰다. 그 때 채 원정(蔡元定)이 주 희(朱熹)와 함께 모함을 받고 도주(道州)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명을 받은 즉시 집에도 들리지 않고 아들 침(沈)과 함께 3천 리를 걸어서 갔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홀로 다녀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 홀로 자도 이불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그대들은 내가 죄를 받은 것 때문에 나태하게 되지 말라.” 하였다. 《宋史 卷四百三十四 蔡元定傳》 /선조수정실록2/ 도주공(陶朱公) :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신하 범 여(范?)의 별명이 도주공(陶朱公)인데, 줄여서 ‘도주’라 한다. 돈을 모으는 재주가 비상하여 3번이나 천금을 모았다고 한다. /연행9-36/ → 범 여(范?) /경세2-226/ 도중(屠中)의 …… 보누나 : 도중은 백정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바, 한(漢) 나라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어렸을 적에 회음의 한 백정이 한신을 멸시하여 여러 사람 앞에서 모욕하기를 “네가 비록 장대하고 칼차기를 좋아하나 속은 겁장이일 뿐이다. 용기가 있으면 나를 찌르고 용기가 없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라.” 하자, 한신이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몸을 구부려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서 시정의 모든 사람들에게 겁장이라고 비웃음을 당한 일이 있는 바,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史記》 〈淮陰侯列傳〉 도중거(到仲擧): 陳나라 사람. 洽의 아들. 자는 德言. 관직은 尙書左僕射에 이름. 封號는 建昌縣公. 아들인 郁에게 속아 下獄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도지신서(桃枝神?) : 신서는 악귀(惡鬼)를 물리치는 신(神). 《山海經》에 “창해(滄海)의 도삭산(度朔山)에 큰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뻗은 가지를 귀문(鬼門)이라 하여 모든 귀신들이 이곳으로 출입하며, 이 위에 신서(神?)·울률(鬱壘)이라 하는 두 신이 있어 나쁜 귀신을 잡아서 호랑이에게 먹인다.” 하였다. /청장2-231/ 도직(盜直) : 농민들을 무리하게 징발해서 각처를 수비(守備)하도록 하는 일을 의미한 듯하나 미상. /중종실록 34/ 도차(圖箚) : 토계의 진성학십도차(進聖學十圖箚)를 가리킴. /고봉집3/ 도차축저(到此築底) : 저(底)는 근본을 말하고 축(築)은 궁극을 말하는 것이니 근본의 끝까지 가서 더 갈데가 없음을 말함. 도참(圖讖) → 부명(符命) 도처에 …… 않는구나 : 도처에서 비바람을 만나 갈 길이 늦어짐을 뜻하는 듯하다. 〔용재집〕 도처에서 …… 알겠노라 : 《주역》 계사 상(繫辭上)에 “천리(天理)를 즐기고 천명(天命)을 안다.(樂天知命)” 하였다. 여기서는 굳이 높은 곳을 오르지 않고 힘이 부치면 곳곳마다 쉬어 가는 것을 천리에 따라 즐거이 노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용재집〕 도척(盜?) : 춘추시대 때의 큰 도적이다. 춘추시대 노(魯)나라 유하혜(柳下惠)의 아우인 류척(柳?). 9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남의 우마(牛馬)와 부녀(婦女)를 마음대로 탈취하기도 하고 제후에게 횡포를 부렸던 천하의 대도(大盜)이다. 맹자(孟子)가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을 행하는 사람은 순(舜) 임금의 무리이고,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을 쫓는 사람은 도척의 무리이다.”고 하였다. 도철(??) :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악수(惡獸)의 이름으로, 탐욕이 많고 악한 사람을 비유하는 데 쓰인다. /성호사설3/ 도철(塗轍) : 차의 궤도(軌道)에 따라서 행하는 길이니, 인륜에서는 곧 부자(父慈), 자효(子孝) 등을 말한 것이다. 이 때목은 이러한 길이 아무리 많더라도 결국 하나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곡2-293/ 도첩(度牒) : 출가(出家)하여 중이 된 사람에게 일정한 보상(補償)을 받고 내주는 허가장(許可狀) 《經國大典 禮典 度僧》 /중종실록 34/ 도첩(度牒)이나 호패(號牌) : 도첩은 중이 되는 허가증. 성명과 아버지의 이름, 외조부의 이름, 연령·본관 등을 기입하고 중이 된 후 3개월 안에 선종(禪宗)·교종(敎宗)에 신고하여 시험을 본 다음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도첩을 내줌. 《經國大典 禮典 道僧》 호패는 바로 신분증임.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차게 했는데 2품 이상은 아패(牙牌), 3품 이하는 각패(角牌), 생원·진사는 황양목(黃楊木), 사서인(士庶人)은 소목방패(小木方牌), 공사천(公私賤)은 대목방패(大木方牌)로 하였다. /명종실록11/ 도청낭관(都廳郎官) : 나라에 큰 예(禮)나 역사(役事)가 있을 때에는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도감에는 사무를 총관하는 도청(都廳)과 분장(分掌)하는 방(房)을 두고 도청과 각방에는 낭관(郎官 : 자급(資級)이 낭인 관원, 곧 5품 이하의 관원) 및 원(員)을 둔다. /중종실록42/ 도체(道體) : 안부(安否)를 물을 때에 長體니 尊體니 하는 말을 쓰는데 특히 道德이 높은 사람에게는 道體라 한다. /연려실기술33-7-389/ 도체찰사(都體察使) : 대신이 군무로써 왕명을 봉행하기 위하여 지방으로 출장할 때에 붙이는 칭호. 의정 대신은 도체찰사, 정1품 이하는 도순찰사(都巡察使) 종 1품 이하는 순찰사라고 한다. /중종4-169/ 도총부산행(都摠府山行) : 도총부에서 번(番)드는 군사들의 군장(軍裝)을 점검(點檢)할 때, 부당한 방법으로 군사들에게 금품을 갈취하는 것. 도총섭(都總攝) : 임진 왜란 때 승군(僧軍)의 우두머리. /선조실록12/ 도충(桃?)·반비(?飛) : 시경의 소비(小毖)장에서 나온 말인데 도충은 뱁새(??)로 작은 새를 의미하고 반비는 번득이며 나르는 모양으로 큰새를 의미함. 옛말에 뱁새가 화해서 독수리[?]가 된다는 말이 있으므로 처음에는 소인의 화가 대수롭제 않은 것 같지만 끝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는 뜻임. /연산3-303-4/ 도퇴갹(桃椎?) : 당 나라 주 도퇴(朱桃椎)가 산속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면서 그는 항상 짚신을 삼아 길거리에 갔다 두었는데, 사람들은 그 짚신을 보고 “주 거사(朱居士)의 신이다.” 하고 쌀로 바꾸어 갔다. 《新唐書 卷一百九十六 朱桃椎傳》 /동국3-42/ 도패(度牌) : 중의 자격을 인증하는 패. 중이 된 자는 3개월 이내에 선종(禪宗) 또는 교종(敎宗)에 고하고, 선종·교종에서 송경(誦經)을 시험하여 예조(禮曹)에 보(報)하면, 예조는 임금에게 아뢴 뒤에 정전(丁錢 : 중이 된 장정 한 사람마다 바치는 돈. 정전은 정포<正布> 30필)을 거두고서 도패를 내어 준다. 도첩(度牒)이라고도 한다. /중종실록42/ 도팽택(陶彭澤) : 진(晉)나라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이었던 도연명(陶淵明)을 말함. 팽택령이 된지 팔 십일 만에 세모(歲暮)가 되었는데 군(郡)에서 독우(督郵)를 보내어 띠를 묶고 와서 보라고 하자 오두미(五斗米)를 위하여 구차히 향리의 소아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고 그날로 인끈을 풀고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함. 도피(到彼) : 피(彼)는 난계. 건영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에 난계를 경유함. 도필(刀筆) : 서리(書吏)의 직무를 이름.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대쪽에 칼로써 붓을 대신하여 글자를 새겼던 故事에서 나온 말. /연산5-544-24/ 도하상(渡河象) : 하수를 건너는 향상(香象)을 이름. 《涅槃經》에 “저 급히 흘러가는 하수에 능히 코끼리가 떠가는 것 같다.[如彼?河 能漂香象]” 하였고, 《傳燈錄》에는 “부처 곁에 함께 있어 듣고 이야기한 똑같은 법에도 증(證)한 바가 천심이 있어 비하자면 토끼·말·코끼리 세 짐승이 하수를 건너는데 토끼는 건느면 뜨고 말은 절반이 빠지고 코끼리는 철저히 흐름을 끊고 가는 것과 같다.”라 하였음. 문자를 철저히 평하는 데 인용하여 씀. 도학(圖學) : 이곳 출신의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을 말한다. 도해량(渡海糧) : 우리 나라에 왔다가 돌아가는 일본 사신 및 대마도의 특송 사자(特送使者)에게 바다를 건너는 동안 먹게 하기 위해 지급하는 식량. /중종실록52/ 도해보(都諧甫) : 도응유(都應兪). 해보는 그의 자(字)이다. 도헌(都憲) : 조선 시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의 별칭이다. 도형(徒刑) : 오형의 하나. 비교적 죄가 중한 자를 관에 예속시켜 노역(勞役)에 종사하게 하는 형별. 1년·1년 반·2년·2년 반·3년의 5등급이 있고, 1년은 장육십(杖六十), 1년 반은 장칠십, 2년은 장팔십, 2년 반은 장구십, 3년은 장일백이 병과된다. /중종실록51/ 도형주(陶荊州) : 진(晉)나라 도간(陶侃)을 말함. 자는 사행(士行).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지냈으므로 도형주라 일컬음. 도호(都護)의 …… 높아졌느니 :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라는 벼슬이 학사(學士)인 이준경(李浚慶)이 부임함으로 인하여 그 격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월사집〕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으나 : 인조(仁祖) 원년에 황해도 장연현(長淵縣)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월사집〕 도홍(陶泓) : 도흥은 벼루를 가리키며, 한유(韓愈)가 붓·먹을 의인화(擬人化)해서 쓴 모영전(毛潁傳)에 보인다. /삼봉1-51/ 도홍경(陶弘景) : 남북조(南北朝)사람으로 자는 통명(通明)이며 화양진인(華陽眞人)이라 호하였다. 수많은 책을 읽어 다방면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특히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지리(地理)·의학(醫學)에 조예가 깊었다. 도홍경(陶弘景) : 도 홍경은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도사(道士)로, 제(齊) 나라 고제(高帝) 때 제왕시독(諸王侍讀)을 지내다가 뒤에 구용(句容)의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였는데, 양(梁) 무제(武帝)가 즉위한 후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으므로 산중재상(山中宰相)으로 불렸다. 여기서는 최 충을 도 홍경에 비유했다. /동사4-103/ 도화(桃花) : 당(唐)의 지근(志勤)이 위산(僞山) 영운원(靈雲院)에서 공부하면서 도를 깨치려는 일념으로 침식을 전폐하고 정진하던 어느 봄날, 미풍(微風)에 나부껴 떨어지는 복숭아 꽃을 보는 순간에 대자연과 내가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가 진리의 장벽을 열었다 한다. /양촌3-117/ 도환불족(盜環不族) → 범필불사(犯?不死) 도회(韜晦) : 세상에 재주와 덕을 감추고 어리석은 듯이 처세하는 것. /연려실기술30-7-7/ 도회(都會) : 일종의 과거 예비시험. 관찰사(觀察使)나 유수(留守)가 해마다 자기 관할 유생들에게 보이는 소과 초시(小科初試)로, 제술(製述)과 고강(考講), 두 가지 시험을 보여서 합격한 사람만 다음해에 보이는 생원·진사의 복시(覆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음. 《經國大典 禮典》 /중종실록40/ 도회관(都會官) : 공도회(公都會) 과시(科試)를 보이는 감영(監營)·유수도(留守都)를 말함. 공도회는 매년 관찰사(觀察使)와 유수(留守)가 지방 유생(儒生)에게 보이는 소과(小科), 즉 초시(初試)인데, 이에 합격한 자는 다음에 중앙에서 보이는 생원(生員)·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함. /중종2-100/ 도회관(都會官) : 여러 가지를 한데 모아서 셈하는 일을 맡은 벼슬아치. 도회처(都會處) : 관찰사(觀察使)의 관리 아래 교생(校生)들에게 강시(講試)·제술(製述) 시험을 보이는 장소를 가리킨다. /명종실록9/ 독(?) : 신주 모시는 궤./퇴계집2-213/ 독거(犢車) : 소가 끄는 수레, 즉 우거(牛車)를 가리킨다. 독경(篤敬)이 …… 하였도다 : 공자의 제자 자장(子張)이 행함을 물은 것에 대해 공자가 《말이 충신하며 행실이 독경하면 비록 오랑캐 나라라도 행하려니와, 말이 충신하지 못하며 행실이 독경하지 못하면 비록 주리라도 행하랴?[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 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 行乎哉]》고 한 말이 있음. 《論語》 <衛靈公>. 독공(篤恭) : 공송함을 돈독히 함을 말한다. 《중용》 33장에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공손함을 돈독히 함에 천하가 평화로와지는 것이다.[是故 君子 篤恭而天下平]”이라는 말이 있다. 독권관(讀卷官) : 과거(科擧)를 보일 적에 두었던 임시 관직으로, 전시(殿試)의 시험관. 시험을 감독하고 글장을 채점하여 어전(御前)에서 우수한 것을 읽었음. 의정(議政) 1인과 종2품 이상의 문관 2명으로 구성하였음. /중종실록37/ 독권관(讀券官) : 임금이 친히 임한 과거에 임시로 임명하는 종2품 이상의 시관(試官). 시권(試券)을 읽고 그 내용이 잘 되었는지를 임금께 설명하는 일을 맡았다. 정3품 이하의 시관은 대독관(對讀官)이라 한다. 독누(篤?) : 향목(香木)으로, 그 수지(樹脂)를 향으로 쓴다. 독누향. /고려도경/ 독단(獨斷)1 : 자기 단독의 단언이라는 뜻. 채 옹(蔡邕)이 옛 제도를 논고(論考)하고 유문(遺文)을 기록한 책으로 《백호통의(白虎通義)》·《풍속통의(風俗通義)》와 함께 한 대(漢代) 학문 연구의 중요한 자료임. /성호7-286/ 독단(獨斷)2 : 현주(賢主)는 위에서 독단으로 신하를 독책(督責)해야 한다는 설. 독대(獨對) : 대신이 임금을 뵈울 때에는 반드시 承旨와 史官이 따라 들어가는 데, 특수한 경우에는 중지와 사관을 물리치고 혼자만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연려실기술30-7-340/ 독락수(獨樂?) : 《자치통감(資治通鑑)》 편찬을 주관한 사마광(司馬光)을 가리킨다. 그가 자기의 정원을 독락원(獨樂園)이라 명명하였기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古文眞寶 後集 獨樂園記》 〔용재집〕 독락원(獨樂園) : 북송(北宋)의 명재상인 사마광(司馬光)이 살던 집으로 낙양(洛陽)에 있었다. 독립(獨立) : 어버이 모심을 말함.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다른 날 또 홀로 서 계시거늘 …… ”[他日又獨立]에서 나온 말임. /삼봉 1-171/ 독보적 …… 어진 게지 : 문장에 탁월한 채수(蔡壽)의 명성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벼슬에서 용감히 물러난 것이 더욱 훌륭하다는 뜻이다. 〔용재집〕 독부(獨夫) :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民心을 잃어 고립된 것을 獨夫라 한다. /고려사절요 1-19/ 독서당(讀書堂) : 연소한 문관들 중에 특히 문학에 뛰어난 사람을 선출하여 휴가를 주어 특별히 학업을 연마하게 한 서재로서, 세종(世宗) 8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제도를 만들고, 성종(成宗) 때에는 구용산(舊龍山)에 있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독서당으로 하고, 이를 또 호당(湖堂)이라고도 하였다. /중종실록4/ 독서록(讀書錄) : 설 선(薛瑄)의 저술이며, 오 여필(吳與弼)의 《거업록(居業錄)》과 같이 심성학화된 명초의 정주적 저술의 대표적인 것이다. /연행1-359/ 독선(獨善) : 자기 일신만을 수양함을 말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고인이 곤궁하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와 선을 함께 한다[古之人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는 말에서 유래함. 독성(獨醒)으로 중취(衆醉)를 따르는 : 독성은 홀로 깨어 있는 것이고 중취는 술 취한 듯 지각이 없는 뭇사람들로,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온 세상이 흐린데 나만 홀로 맑고 뭇사람들은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古文眞寶 後集》 〔월사집〕 독소북교(纛所北郊) : 독신(纛神) 게 제사지내는 곳. /만기2/ 독실하고 공경함 : 《중용》 제33장에, “군자는 스스로 독실하고 공경하게 행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천하가 태평하게끔 한다.〔君子篤恭而天下平〕”라고 하였다. 독우 : 평원독우(平原督郵)의 준말로 좋지 않은 술을 뜻한다. 진(晉) 나라 환온(桓溫)의 주부(主簿) 중에 술을 잘 감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술을 먹어 보고 좋은 술은 ‘청주종사(靑州從事)’라 하고 나쁜 술은 평원독우라 하였다 한다. 《世說新語 術解》 〔용재집〕 독우(督郵)1 : 옛날 군수 보좌관의 칭호. 또는 소속 고을을 순찰하면서 관리의 성적을 조사하는 순찰관(巡察官)의 별칭이기도 함. /성호8-54/ 독우(督郵)2 : 우역(郵驛)에 관한 일을 감독한다는 뜻으로 찰방(察訪)을 달리 이르는 말. 독표(獨豹) : 거위를 말함. /완당집3/ 독현(獨賢) : 자기 혼자만이 노력한다는 뜻임. 시경(詩經) 북산(北山)에 “莫非王臣我從事獨賢”에서 나왔음. /연산4-184-9/ 돈견(豚犬) : 자기 아들을 남에게 말할 때 낮추어 《돈견》이라 하는데, 그 유래를 보면, 오대(五代) 때에 양주(梁主) 주온(朱溫)이 진주(晋州) 이극용(李克用)의 죽음을 틈타서 진나라를 치다가 극용의 아들에게 크게 패하자, “자식을 낳거든 이아자(李亞子)처럼 낳아야 한다. 내 아들은 돼지나 개다.” 하여 후세에 자기 아들을 서로 말할 때 사용하였다. /동문선5-168/ 돈계선생 : 돈계(遯溪)는 허후(許厚)의 별호이다. 돈녕부(敦寧府) : 조선조에 왕실의 친척들을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 돈녕부와 중추부 : 돈녕부는 왕실(王室)의 가까운 친척간의 돈목(敦睦)을 도모하기 위한 사무를 맡은 관청이고, 중추부(中樞府)는 일정한 직장(職掌)은 없이, 문무 당상관(文武堂上官)으로서 임직(任職)이 없는 사람을 우대하는 의미로 설치한 관청임. /연6-112-45/ 돈서(敦敍)의 의리 : 구족(九族)에게 돈독하게 베푸는 것 가리킨다. 돈어(豚魚) : 몽매한 돼지와 물고기. 복어를 말함.《주역》 중부괘(中孚卦)에 “믿음이 돈어에 미친다.[信及豚魚]”고 하는 말이 있다. 돈오(頓悟) : 頓悟와 漸悟는 佛家의 用語인데, 점오는 점차로 깨어서 眞理를 깨달아 안다는 말이요, 돈오는 창졸간에 갑자기 깨달아 안다는 뜻이다. 주자학파에서 陸象山學派를 佛家의 돈오에 가깝다고 비방한다. /퇴계집1-418/ 돈옹(遯翁)의 책 : 돈옹은 주자(朱子)의 호의 하나이다. 〔월사집〕 돈장(敦匠) : 장인(匠人)을 감독하는 직책. 또는 공조 판서를 가리키기도 함. 돈체사(頓遞使) : 길에 주식(酒食)을 준비하여 군대에게 제공하는 것을 돈(頓)이라하고 우역(郵驛)을 설치하는 것을 체(遞)라 하는데 그 일을 관장하는 벼슬이다. /연1-78-41/ 돈피장(?皮匠) → 서피장(黍皮匠) 돈화문(敦化門) : 창덕궁의 정문. /만기2/ 돈후(墩?) : 흙담을 쌓아서 만든 파수보는 망대. /만기2/ 돌다리 …… 잇닿을거나 : 진시황이 바다 돌다리를 놓아 해 뜨는 곳을 구경하려 하자, 신인(神人)이 돌을 몰아서 바다에 넣는데, 돌이 빨리 가지 않는다고 신인이 채찍질하자 돌이 피를 흘렸다 한다. 《藝文類聚 七十九卷》 〔월사집〕 돌돌괴사(??怪事) : 모함을 받고 귀양간, 억울한 심정을 나타낸 말. 돌돌괴사는 놀랄 만한 괴이쩍은 일을 말하는데, 즉 내가 어째서 이 지경이 되었을까 후회하는 뜻이다. 동진(東晉)때 은 호(殷浩)가 모함을 받고 조정으로부터 먼 곳에 추방당하였으나 조금도 원망한 빛이 없이 하루종일 ‘돌돌괴사(??怪事)’ 넉 자만 쓰고 있었다 한다. 《晉書 卷七十七 殷浩傳》 돌아가 …… 왔으리 : 월사가 평양영위사가 되었으므로 평양에 가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월사집〕 돌아가고픈 …… 깨닫겠고 : 공명(功名)을 추구하다가 직무에 몸이 묶여서 고향으로 돌아가고파도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월사집〕 돌아가고픈 생각 : 금강산으로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다. 〔월사집〕 돌아가는 …… 가네 : 패교(?橋)는 패수(?水)의 다리로 패수는 장안(長安)에 있는 물 이름인 바, 당(唐) 나라의 정계(鄭?)가 “눈내리는 날 나귀를 타고 패교를 건너면 시상(詩想)이 절로 난다.” 하였는 바, 이 일을 인용하한 것이다. 돌아가는 …… 느끼노라 : 1권 ‘장한(張翰)의 배’ 참조. 〔월사집〕 돌아가는 …… 생각하지만 : 함양(咸陽)은 진(秦) 나라의 수도인데, 여기서는 명(明) 나라 천자가 있는 연경(燕京)을 가리킨다. 〔월사집〕 돌아가는 …… 좋으련 : 석양이 물들 때까지 술을 마시며 놀자는 뜻이다. 〔월사집〕 돌아가는 …… 허락할지 : 천비사의 제향(祭享)에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돌아오는 사행길에 참여해서 한 바탕 시주(詩酒)로 방광(放狂)해도 될런지라고 말한 것이다. 〔월사집〕 돌아가실 …… 반듯하였지 : 역책(易?)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을 말한다. 증자(曾子)가 돌아가실 때 일찍이 계손(季孫)에게 받은 대자리에 누워 있었다. 시중들던 동자가 이에 대해 말하자 증자가 자신은 대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깔 수 없다 하고 예전에 깔던 자리로 바꾸게 한 다음 운명했다. 《禮記 檀弓上》 돌아갈 …… 때이로세 : 내일이면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북두성 자루가 돈다는 것은 장차 날이 밝을 것임을 뜻한다. 〔월사집〕 돌아보건대 …… 어질다오 : 단목(端木)은 공자(孔子)의 제자 자공(子貢)의 성(姓)으로 이름은 사(賜)인 바, 공자가 일찍이 자공이 인물을 비교하자 “사(賜)는 어진가보다. 나는 그럴 겨를이 없노라.” 하였는 바, 이 일을 인용하여 나 또한 자공처럼 한가롭게 인물을 견주어 볼 겨를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論語》〈憲問〉 돌아올 …… 잡겠구나 : 해낭(奚囊)은 시를 넣는 주머니로, 당 나라 시인 이하(李賀)가 출타할 때 그의 종[奚奴]의 등에 지은 시를 넣을 비단 주머니를 지고 다니게 했던 데서 유래하였다. 운경이 이번 여행길에 많은 시를 지어 가지고 와서 나를 보여주어 깜짝 놀라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놀라 칼자루 잡는다는 것은 2권 ‘우연히 짓다[偶題]’ 주(註) 참조. 〔용재집〕 돌을 …… 흘렸고 : 진시황이 바다 돌다리를 놓아 해 뜨는 곳을 구경하려 하자, 신인(神人)이 돌을 몰아서 바다에 넣는데, 돌이 빨리 가지 않는다고 신인이 채찍질하자 돌이 피눈물을 흘렸다 한다. 《藝文類聚 七十九卷》 〔용재집〕 돌을 떨어뜨리다가 :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지 않고 도리어 해치는 것이다.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에 “깊은 함정에 떨어지자 아무도 손을 당겨 구해주는 사람은 없고 모두들 도리어 안으로 밀쳐 넣고 또 돌을 떨어뜨렸다.” 하였다. 〔월사집〕 돌을 채찍질한 진시황 : 2권 ‘돌다리 …… 잇닿을거나’ 참조. 〔월사집〕 돌이켜 성찰하라 : 《논어》〈학이(學而)〉 편에서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나는 하루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피노니, 남의 일을 하는 데 성실하지 못하였는가, 친구와 사귀는 데 신(信)이 없었던가, 배우기만 하고 익히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明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하였다. 동 선인(董仙人) : 앞의 주 ‘동공(董公)’ 참조. 〔용재집〕 동(冬) : 생선을 헤아리는 단위. 동·서적전(東西籍田) : 조선 시대 종묘에 제사지낼 쌀을 생산하던 두 곳의 전답. 동적전은 지금의 서울 전농동(典農洞)에 있었고, 서적전은 지금의 개성(開城)에 있었다. 《萬機要覽 財用編二》 /명종실록3/ 동가강(?家江) : 만주 요녕성(遼寧省) 임강현(臨江縣) 서북에 있는 삼차자(三?子)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흘러들어감. 한 대(漢代)에는 비류수(沸流水)로 불리워졌으며, 명말(明末)에 와서 동성(?姓)이 이 유역에 많이 살았기 때문에 동가강으로 불리워지게 되었음. 우리 나라에서는 파저강(波猪江)으로 불렀음. 오늘날에는 혼하(渾河), 혼강(混江) 등으로 불리워짐. 기타 문헌에 동가강(?家江)으로 나오기도 함. /성호1-258/ 동가회(動?灰) : 동짓날 그 시각에 갈대를 태워 재[灰]를 만들어 땅에 묻으면 동지의 시각에 재가 날린다. /해행5-623/ 동각(東閣)1 : 동합(東閤)과 같은 말로서 동향의 작은 문이다. 한(漢) 나라 때 공손홍(恭孫弘)이 승상(丞相)이 되어서 동각을 열어 현사(賢士)를 초빙했던 것으로 인하여, 재상이 현자를 맞이하는 자리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고을원이 정사를 보는 동헌(東軒)의 의미로 쓰인 듯하다. 동헌은 때로 바로 고을원을 지칭하기도 한다. 본문에 이른바 동각(東閣)에 봉정(奉呈)한 작품이란 《연대사에서 곽 성주에게 봉정하다[蓮臺寺奉呈郭城主]》라는 시를 말한다. 동각(東閣)2 : 매화 꽃이 많이 핀 관아이다. 양나라의 하손(何遜)이 양주(揚州) 고을의 동각관(東閣官) 매화에 심취하였다. 동각(東閣)3 : 손님이나 어진이를 접대하는 곳을 뜻하는 말로, 한(漢) 나라 때 평진후(平津侯) 공손홍(公孫弘)이 재상이 되어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지은 객관(客館)의 이름이다. 〔월사집〕 동각(東閣)에서는 매화 : 관청의 매화를 뜻한다. 남조(南朝) 양(梁) 나라 하손(何遜)이 건안왕(建安王)의 수조관(水曹官)으로 양주(楊州)에 있을 때 관청 뜰에 매화 한 그루가 있어서 매일같이 그 나무 아래서 시를 읊곤 하였다. 그 후 낙양(洛陽)에 돌아갔다가 그 매화가 그리워서 다시 양주로 발령해주길 청하여 양주에 당도하니 매화가 한창 피었기에 그는 매화 나무 아래서 종일토록 서성거렸다. 두보(杜甫)의 화배적등등촉주동정송객봉조매상억견기(和裴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記)에 “동각의 관매가 시흥을 움직이니 도리어 하손이 양주에 있을 때 같구나.[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楊州]” 하였다. 〔월사집〕 동각(東閣)의 관매(官梅) : 관청의 매화를 뜻한다. 남조(南朝) 양(梁) 나라 하손(何遜)이 건안왕(建安王)의 수조관(水曹官)으로 양주(楊州)에 있을 때 관청 뜰에 매화 한 그루가 있어서 매일같이 그 나무 아래서 시를 읊곤 하였다. 그 후 낙양(洛陽)에 돌아갔다가 그 매화가 그리워서 다시 양주로 발령해주길 청하여 양주에 당도하니 매화가 한창 피었기에 그는 매화 나무 아래서 종일토록 서성거렸다. 두보(杜甫)의 화배적등등촉주동정송객봉조매상억견기(和裴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記)에 “동각의 관매가 시흥을 움직이니 도리어 하손이 양주에 있을 때 같구나.[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楊州]” 하였다. 〔월사집〕 동각(東閣)이 …… 것을 : 14권 ‘동각(東閣)의 관매(官梅)’ 참조. 〔월사집〕 동강(桐江) : 선비들의 기개를 높여 준 것이 후한(後漢)의 국운을 유지케 했다는 뜻. 엄 광(嚴光)이 광무황제의 부름을 거역하고 이 동강 가에서 낚시질하며 살았으나, 광무는 그에게 신하될 것을 강요하지 않고 뜻대로 살게 했는데 이를 말한다. 《後漢書 嚴光傳》 /중종실록 34/ 동강(東岡)1 : 김우옹(金宇?, 1540~1603)의 호. 자는 숙부(肅夫), 본관은 의성(義城),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동강(東岡)2 : 벼슬에 나가지 않고 물러나 있는 곳. 《후한서》 <주섭전(周燮傳)>에 《선세(先世)로부터 훈총(勳寵)이 줄을 이었는데 그대만 어찌 유독 동강(東岡)의 비탈을 지키는가?》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동강(東岡)을 지키며 살아가리라 :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겠다는 뜻이다. 후한(後漢)의 주섭(周燮)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자 그의 종족이 “선세(先世)로부터 훈총(勳寵)이 줄을 이었는데 그대만 어찌 유독 동쪽 산비탈[東岡]을 지키는가?” 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後漢書 周燮傳》 〔월사집〕 동갱(銅坑) : 매화가 많이 나는 곳임. /완당집3/ 동거(同居) : 정군의 아들·동생·사위 등 동가자가 군사로 있는 것을 말함. /세종실록 12-325/ 동경(東京): 東漢의 도읍인 洛陽을 당시 사람들이 東京이라 하였고, 漢의 옛 도읍인 長安을 西京이라 하였다. 동경금고(東京禁錮) : 후한 환제(後漢桓帝) 때 당화(黨禍)가 일어나 천하의 명사(名士)들을 당류(黨類)로 지적하여 하옥(下獄)시키거나 금고시켰고, 영제(靈帝) 때 이 응(李膺)·범 방(范滂) 등 1백여 명을 살해한 고사를 말한다. 《後漢書 桓帝紀·靈帝紀》 /명종실록 16/ 동고(東皐) : 명종과 선조 때의 명신인 이준경(李浚慶)의 호이다. 동고(東皐) 강 상공(姜相公) : 조선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봉해짐. 동공(董公)1 : 동공은 한(漢) 나라 때 신성(新城) 사람으로 한 고조 유 방(劉邦)이 낙양(洛陽)에 이르렀을 때 “항 우(項羽)는 자신의 주군(主君)인 초 회왕(楚懷王)을 시해한 죄인이니 군사들에게 상복(喪服)을 입혀 발상(發喪)하고 쳐야 명분이 선다.”고 역설하자, 그에 따라 발상하였다. 뒤에 광무(廣武)에서 열 가지 죄를 수죄(數罪)할 적에 항 우가 답변을 못했고, 그 뒤 해하(垓下)에서 결국 유 방에게 패하여 항 우는 자살하고 말았다. /史記 卷八 高祖本紀/ 선조수정실록 3/ 동공(董公)2 : 조선 성종(成宗) 때 명(明) 나라로부터 사신 와서 우리 나라의 풍토를 읊은 조선부(朝鮮賦)라는 장편을 남긴 동월(董越)을 가리킨다. 그가 총수산비(蔥秀山碑)를 지었다. 4권 총수산비(蔥秀山碑)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아래 시의 동 학사(董學士)도 이 사람을 가리킨다. 〔용재집〕 동관(冬官) : 《주례》에서 사계절로 관직을 임명한 데서 나온 말로, 공조(工曹)에 해당한다. 〔용재집〕 동관(東觀) : 궁중의 장서각(藏書閣)이다. 본래 동한(東漢) 때 낙양의 남궁(南宮)에 있던 건물인데 여기서 반고(班固) 등이 《한서(漢書)》를 수찬(修撰)하였고, 장제(章帝)와 화제(和帝) 때 황궁의 장서각으로 삼았다. 〔용재집〕 동관(?管) : 대롱이 붉게 장식된 붓. 옛날에 여사(女史)가 이것을 잡고 궁중의 정령(政令)및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했다고 함. 동관(童貫) : 동 관(童貫)은 송 휘종(宋徽宗) 때 환관. 그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병권을 장악하여 흉노를 치러 하롱(河?)으로 들어가 고골룡(古骨龍)에 이르러 장수 유법(遺法)을 시켜 삭방(朔方)을 치게 하였으나 패하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 이겼다는 것짓 보고를 하였다. 그 후 군정이 문란해져 금군(禁軍)이 다 도망하였다. 《宋史 卷四百六十八 童貫傳》 /삼봉2-85/ 동관(東觀) : 서명. 송(宋) 나라 황백사(黃伯思)가 찬한 것으로 종정이기(鐘鼎彛器)의 관지(款識)와 고문 기자(古文奇字)가 많이 실려 있다. /오주17-131/ 동관(冬冠) : 술[酒]의 별칭. 추운 겨울에 보자를 쓴 것처럼 따뜻하다는 뜻이다. 이 규보(李奎甫)의 시에, 술은 무서운 추위도 견딜 수 있어 酒能防凜冽/ 항간에서 이것을 동관이라 한다네 俗諺號冬冠/ 그대 같은 대머리는 禿首如吾子/추위를 막아 보지 않으려나 能無備禦寒/ 하였다. 《東國李相國集 卷十六 冬日與僧飮戱贈》 동관(冬官) : 육경(六卿)을 천관(天官)은 총재(?宰), 지관(地官)은 사도(司徒), 춘관(春官)은 종백(宗伯), 하관(夏官)은 사마(司馬), 추관(秋官)은 사구(司寇), 동관(冬官)은 사공(司空)으로 나누었는데, 동관(冬官)의 사공(司空)은 곧 공조(工曹)에 해당됨. /연6-103-40/ 동관(?管) : 자루가 붉은 붓. 옛날에 여사(女史)가 그런 붓을 가지고 궁중의 정령(政令)이나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하였다. 《詩經 ?風 靜女》 /동국4-305/ 동관(潼關) : 중국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후한(後漢) 이래의 관(關)의 이름. 황하(黃河)의 크게 굴곡(屈曲)하는 데에 있어 군사상의 요해지. 섬서(陝西) 산서(山西) 하남(河南) 세 성(省)의 요충지임. 안록산의 난군이 침략한 곳. 동관(?管) : 한 대(漢代)에 상서승(尙書丞), 상서랑(尙書郞)에게 매달 하사하던 붉은 대롱의 큰 붓으로, 후에는 조정에서 관직을 맡고 있음을 뜻하게 되었다. 〔월사집〕 동관여론(東觀餘論) : 송(宋) 황 백사(黃伯思)가 찬(撰)한 책으로 그의 아들 잉(●)이 엮어낸 것이다. 고문(古文)·기자(奇字)·종정(鐘鼎)·이기(彛器)·관식(款式) 등을 밝게 변증하고 있다. 총 2건이다. /오주17-189/ 동관한기(東觀漢紀) :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반 고(班固)·유 진(劉珍)·채 옹(蔡邕) 등이 지었다는 일종의 잡기. /성호8-209/ 동교요(董嬌饒) : 미인(美人)의 이름. 명 나라 이 정(李禎)이 지은 《전등여화(剪燈餘話)》란 소설이 있음. 그러나 두 자미가 인용한 것으로 본다면, 이 동교요라는 미인은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음. /성호2-29/ 동구에서 저물녘 읊다[洞口晩賦] : 원제목은 ‘후동의 산 입구에서 저물녁 읊다.[後洞山口晩賦]’이다. 〔용재집〕 동국(東國) …… 돌려보냈지 : 무술년(1598)에 변무사(辨誣使) 부사(副使)로 북경에 갔던 것을 가리킨다. 2권 무술조천록(戊戌朝天錄) 참조. 〔월사집〕 동국병감(東國兵鑑) :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때로부터 고려 우왕(禑王) 때 까지의 조선과 중국 사이의 30여 차례의 전쟁 사실을 기록한 책. /연려실기술1-342/ 동국의 …… 상경(上卿)이었지 : 무술년(1598)에 월사가 35세의 나이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승진되어 변무사(辨誣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명(明) 나라에 가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던 일을 가리킨다. 〔월사집〕 동국통감(東國通鑑) : 신라 초기부터 고려 말기까지를 기록한 사서. 조선 시대 서거정(徐居正)과 정효항(鄭孝恒) 등이 왕명(王命)에 따라 편찬하였음. 성호7-294/ 동군(東君) : 봄을 맡은 신(神). 봄. 동방의 군주란 뜻으로 동황(東皇)이라고도 칭하는 바, 봄은 동방에 해당하기 때문에 봄의 신(神)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동군(東君) : 전설상의 신선 동왕(東王) 즉 목공(木公)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동방의 임금이란 뜻을 은연중에 머금고 있다. 동군(東君)의 소식 : 동군은 봄의 신으로 곧 봄소식을 말한 것이다. 동궁(?弓) : 붉게 칠한 활. 왕이 공신에게 주어서 정벌을 명하는 데 쓰였음. 《詩經 小雅》 /해행4-202/ 동궁(桐宮) : 태갑(太甲)을 유폐(幽閉)시켰던 동(桐) 땅의 궁. 태갑(太甲 : 하<夏> 나라 제 4대 임금)이 즉위하여 3년 동안 방종하고 포학하여 탕(湯)의 법을 준수하지 않고 덕(德)을 어지럽히므로 이 윤(伊尹)이 동(棟)에 궁을 지어 탕의 무덤 가까이 있게 하여 세상의 일에 미혹되지 않게 하였다. 태갑이 동궁에서 지낸 3년 동안에 허물을 뉘우치고 마침내 진실한 덕을 이루니, 이 윤이 맞아들였다. 《書經 商書 太甲上》 /선조수정실록 2/ 동궁(東宮)의 연상(延祥) : 동궁은 세자궁(世子宮)이며 연상(延祥)은 축복(祝福)과 같은 뜻이다. 동궁지사(桐宮之思) : 은(殷) 나라 태갑(太甲)이 왕위(王位)에 올랐으나 암우(暗愚)하므로 이 윤(伊尹)이 동궁으로 추방하여 덕을 쌓게 했음. 그 후 개과 천선하므로 다시 모셔다가 왕위에 앉혔음. /연6-465-16/ 동귀부(銅龜符) : 임금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 궁궐에 출입할 때 신표로 삼은 것. 동어부(銅魚符)라고도 한다. 《당서》 <백관지(百官志)> 동기(童欺) : 두보의 모육위풍우소파가(茅屋爲風雨所破歌)에 “南村群童欺我老無力”이란 어귀가 있음 이 연(聯)은 자기의 신세를 두 보에게 비하여 쓴 말임. /완당집3/ 동기창(董其昌) : 명 나라의 학자·서화가. 어려서부터 천재적 기풍이 있어 글씨에서 여러 대가를 초월하여서 독보(獨步)의 경지를 개척하였고, 그림 또한 송·원의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았다. /연행9-128/ 동남(童男)은 …… 돌아올꼬 : 앞의 주 ‘듣자니 …… 남았었다지’ 참조. 〔월사집〕 동남동녀(童男童女) : 진 시황(秦始皇)이 서 불(徐?)을 시켜서 동남동녀 5백 인을 데리고 삼신산(三神山)에 불사약(不死藥)을 캐러 보냈는데, 서 불은 해 도(海島)에서 임금노릇을 하고 돌아가지 않아서 일본에 그 유적(遺蹟)이 있다 함. /해행5-362/ 동년(同年) 곽당후(郭堂後) : 동년은 함께 동방급제(同榜及第)한 자를 가리키며 당후(堂後)는 당후관(堂後官)으로 원래 중추원(中樞院)의 정7품 벼슬이었는데, 정종 2년(1400)에 중추원의 승지(承旨)가 독립하여 승정원이 설치되면서 이 곳으로 소속이 바뀌고 뒤에 주서(注書)로 고쳐졌는 바, 곽당후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동년(同年)1 :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 즉 동방급제(同榜及第)를 말함. 동년(同年)2 : 함께 과거에 응시하여 동방(同榜)에 급제한 사람끼리 서로 일컫는 말. /세종실록1-86/ 동녕위(東寧衛) : 동녕위는 홍무 13년에 설치되고 그 밑에 동녕·여직·남경·해양(海洋)·초하(草河)의 5천호소를 두었다가 뒤에 중·중좌 두 천호소로 된바, 적수자(適戍者)를 충당한 요동의 위소의 하나임. 《대명일통지 권25》 /연행 1-345/ 동당(東堂)1 : 과거 시험장으로 곧 식년과(式年科) 또는 증광시(增廣試)를 이른다. 동당은 진(晋) 나라 궁전 이름으로, 현량(賢良)을 뽑아 시험보이던 곳이다. /명종실록14/ 동당(東堂)2 : 조선시대에 과거의 문과 시험을 달리 이르는 말. 동당(同堂)의 …… 화 :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가리킨다. 숙종(肅宗) 6년(1680) 경신(庚申)에 서인(西人) 일파가 남인(南人)을 조정에서 대거 축출한 사건으로, 현종(顯宗) 15년(1674)의 예송(禮訟)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 일파가 숙종의 신임을 받지 못하자, 서인(西人) 김석주(金錫?)와 김익훈(金益勳) 등이 당시의 영상(領相) 허적(許積)의 서자(庶子)인 허견(許堅)이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세 아들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등과 함께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허적 일가족과 윤휴(尹?)가 살해되고, 남인 일파가 대거 축출되어 서인 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동당(東堂)의 회시(會試) : 동당은 진(晉) 나라 궁전(宮殿)인데, 극 선(?詵)이 이곳에서 본 과시(科試)에 급제한 옛 이야기 때문에 후세에서 진사시(進士試 : 조선의 문과에 해당)의 시장(試場)을 뜻하는 말로 쓴다. 여기서 동당이라 함은 동당시, 곧 문과를 말하는 것이다. 문과는 성균관·한성부 및 각도에서 초시를 보이고 초시 합격자를 서울에 모아 복시를 보여서 최종 합격자를 뽑고 다시 전정(殿庭)에서 보이는 전시(殿試)에서 서열을 매기는데, 회시라 함은 복시·전시를 말하는 것이다. 동당이실(同堂異室) : 한 종묘에 신실만 각각 모시던 제도. 옛날에는 천자의 종묘가 일곱이었으니, 태조의 묘가 하나고 좌소(左昭)·우목(右穆)이 각각 셋이었다. 후세에 와서는 이 동당 이실이란 제도로 변했다. /성호사설7/ 동당지(東堂紙) : 증광시 고시장의 시험지. /만기2/ 동당초시(東堂初試) : 유생들에게 시험보이는 것으로 초시와 복시(覆試)가 있다. 동당은 본래 진(晉) 나라의 궁전인데 극 선(?詵)이 이 동당에서 시험을 본 것에서 유래하여 식년과(式年科)를 뜻한다. /서애2-180/ 동대(東岱) : 동대는 중국의 태산(泰山)이요, 좌이(左伊)는 중국 낙양(洛陽)이 왼쪽에 흐르는 이수(伊水)를 말한 것이다. /승람3/ 동도(東都) : 당나라 문희(聞喜) 사람 배도(裴度)는 헌종 때에 재상이 되어 회서(淮西)를 토평(討平)하여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은 공으로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졌는데, 후에 환관이 권력을 천단(擅斷)하여 사기(士氣)가 저상되자 드디어 동도(東都)에 별장을 지어 녹야초당(綠野草堂)이라 하고 명사들과 함께 문주(文酒)를 일삼으며 세상 일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당서》 170. 동도(東都)의 붕당(朋黨) : 동도는 후한(後漢)의 서울 낙양(洛陽)이고 붕당은 동류의 사람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 자신들과 견해를 달리 하는 세력을 배척하는 것을 말함. 동도(東都)의 처사 : 초야에 사는 훌륭한 선비를 뜻한다. 18권 ‘처사(處士)의 …… 없구나’ 참조. 〔월사집〕 동도주(東道主) : 동도주는 《春秋左傳 僖公 三十年》에 촉지무(燭之武)가 한 말로 주인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국왕인 선조를 가리킴. 선조로부터 많은 물자 공급을 받은 것을 말함. /선조실록 22/ 동도주인(東道主人) : 주인의 처지가 되어 손님을 안내하고 보살피는 사람. 《용재수필(容齋隨筆)》에 “진(秦)·진(晋)이 정(鄭)을 에워싸매, 정 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진(秦)이 어찌 공을 버리고서 동도주(東道主)가 되지 않는가?’ 한 것은 아마도 정이 진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라 하거니와, 지금 세간에서 주인을 동도라고 함은 이 때문이다 …… ” 하였음. /연행4-489/ 동도지례(東道之禮) : 손을 맞는 예를 말한다. /동국3-312/ 동도편(東島篇) : 동래여씨(東萊呂氏) : 송(宋)나라의 학자인 여조겸(呂祖謙)을 말함. 자(字)는 백공(伯恭). 주희(朱憙), 장식(張?)과 함께 동남삼현(東南三賢)이라 일컬어졌음. 경사(經史)에 치중하였고 절강학파(浙江學派)를 열었음. 저서로는 《동래집(東萊集)》,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 등이 있음. 동량군(?량郡) : 경기도 삭녕군(朔寧郡)의 일부였던 승령현(僧嶺縣)의 신라 때 이름이다. 여기서는 삭녕군을 가리킨다. 〔월사집〕 동로(東魯) 왕씨(王氏) : 곧 원대(元代) 동평(東平) 사람 왕정(王禎). 옛 노(魯) 나라의 땅을 산동(山東)·산서(山西)로 나누어 동로·서로라 한다. 동평은 산동에 속한다. /종종실록51/ 동뢰(同牢) : 신랑과 신부가 교배(交拜)를 마치고 나서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이른다. 동뢰연(同牢宴) : 예식 때 신랑과 신부가 교배(交拜)하는 예를 마치고 나서 술잔을 나누는 것. /중종실록49/ 동룡(銅龍) : 동룡문(銅龍門). 한 나라 때 태자궁(太子宮)의 문 이름. 문루(門樓) 위에 동룡(銅龍)의 장식이 있었으므로 일컫는 말임. 또한 제왕의 궁궐을 지칭하기도함. 동룡각(銅龍閣) : 동룡(銅龍)이 있는 누각인 바, 동룡은 구리로 만든 용머리인데 용의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도록 제조되었다. 동루(東樓) : 동루(東樓)는 우(禹)의 후예 동루공(東樓公)을 말한다. 주 무왕(周武王)이 그를 기(杞) 땅에 봉하여 하(夏) 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史記 杞世家》. /연행6-283/ 동릉(東陵) : 진(秦) 나라의 동릉후(東陵侯) 소평(召平)을 말함. 진 나라가 망하자 포의(布衣)로 가난하게 살았는데, 장안성 동쪽에 외를 심어 맛이 달았기에 세칭에 ‘동릉과(東陵瓜)’라는 말이 있음. 《사기》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동릉과(東陵瓜) : 진(秦) 나라 동릉후(東陵侯)인 소평(召平)이 진 나라가 망하자 포의(布衣)로 가난하게 생활하며 장안성 동쪽에 외를 심었는데 그 외가 좋았으므로 세속에서 이를 ‘등릉과’라고 했다고 함. 《史記》 54. 동릉과(東陵瓜) → 邵平之瓜 동릉과(東陵瓜)에 물을 주지 : 진(秦) 나라의 동릉후(東陵侯) 소평(召平)이 나라가 망하자 포의(布衣)로 장안성 동쪽에 가난하게 살면서 외를 가꾸었는데 그 맛이 달아 세칭 ‘동릉과(東陵瓜)’라 하였다. 《史記 蕭相國世家)》 여기서는 직경(直卿) 홍언충(洪彦忠)이 배소(配所)에서 채소밭 가꾸는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고사를 차용하였다. 우암(寓庵)은 홍언충의 호이다. 〔용재집〕 동리(東里) : 춘추 시대 정(鄭) 나라 지명으로 대부 자산(子産)이 살았던 곳이다. 자산이 당시에 다른 나라에 보내는 국서(國書)를 윤색(潤色)했는데, 여기서는 글을 윤색하는 재능을 뜻한다. 《論語》 《憲問》. 동리국(東籬菊) : 도연명(陶淵明)이 9월 9일에 동쪽 울타리[東籬]에 핀 국화를 따고 있었다. /해행5-473/ 동리에는 …… 재주 : 공자가 일찍이 “정(鄭) 나라에서는 외교문서를 만들 때에 비침(裨諶)이 초고를 만들고, 행인(行人)인 자우(子羽)가 수식을 하고, 동리(東里)의 자산(子産)이 윤색을 하였다.” 하였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동리처사(東籬處士) : 국화를 의인화(擬人化)하여 말한 것임. 《花史》동리는 동쪽 울타리인 바, 진(晉)나라 때 처사인 도연명(陶淵明)의 잡시(雜詩)에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면서 한가롭게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하였으므로 곧 도연명을 가리킨 것이다. 동리황화(東籬黃花) : 동진(東晉) 말기에 도연명(陶淵明)이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딴다’[採菊東籬下]라는 말을 시에 쓴 뒤로 국화를 의미하게 되었음. /대동14-138/ 동림(東林) : 명(明) 나라 때 송(宋) 나라 학자인 양 시(楊時)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한 동림서원(東林書院)에 속했던 일군(一群)의 학자. 시국 정치를 비판한다 하여 위충현(魏忠賢)의 세도 때 큰 옥사를 일으켰는데 소위 동림당고(東林黨錮)라는 것임. /성호사설8/ 동림(東林)으로 …… 물었네 : 동림은 절을 뜻한다. 이덕형이 양근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월사집〕 동림(東林)을 나왔었지 : 4권 ‘내가 …… 감사하오’ 여기서는 단순히 멀리까지 배웅해주었음을 뜻한다. 〔월사집〕 동림(東林)의 …… 얘기하도다 : 동림은 진(晉) 나라 혜원(慧遠)이 머물던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로, 여기서는 절을 뜻한다. 월사가 이십년 전에 머물던 절의 스님이 찾아와서 그 당시의 일, 또는 절의 경치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월사집〕 동림(東林)의 달 : 동림은 사찰(寺刹)의 이름으로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에 있는 바, 진(晉)나라 때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유유민(劉遺民), 뇌차종(雷次宗), 종병(宗炳) 등 18명과 이곳에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여 유명하다. 동림당인(東林黨人) : 명 신종(明神宗) 때 태자를 세우는 문제로 좌천을 당한 고헌성(顧憲成)·고번룡(高樊龍)이 주동이 되어 조직된 당파. 동림서원(東林書院)을 근거지로 재야(在野)의 학자나 불평 분자를 규합, 시정(時政)을 논한 것이 시초가 되어 끝내는 조정의 관리까지 모여 대정당이 되었고, 이에 대항하는 반대파와의 논쟁으로 명 나라가 멸망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음. /성호 7-78/ 동림지화(東林之禍) → 백마(白馬) /면암3-60/ 동명(東銘)과 서명(西銘) : 송(宋) 나라의 장 재(張載)가 자기의 서재(書齋) 동쪽 벽과 서쪽 벽에 걸어 놓았던 경계에 관한 잠언(箴言)임. /중종실록47/ 동몽교관(童蒙敎官) : 어린이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서울과 각 군·현(郡縣)에 두었던 벼슬. 처음에는 동몽훈도(童夢訓導)라고 했다. /대동13-119/ 동몽훈(童蒙訓) : 3卷으로 되어 있으며 여본중(呂本中)이 지은 책이다. 여본중은 자가 거인(居仁)이며 여조겸의 조부이다. 동무(東武) : 막부 장군(幕府將軍)이 있는 강호(江戶), 또는 장군의 별칭. 일본 천황(天皇)이 있는 경도(京都)가 강호의 서쪽에 있으므로 서경(西京)이라 하는 데에 비해, 서경의 동쪽에 있는 무가(武家)의 뜻으로 동무라 한다. /해행10-48/ 동무음(東武吟) : 악부시(樂府詩)의 동무음행(東武吟行)을 가리키는데, 그 의작(擬作)들이 주로 덧없는 인생을 탄식하는 투이다. 여기서는 객회(客懷)와 신세 탄식을 내용으로 한, 월사의 원작(原作)을 가리킨다. 〔월사집〕 동문(同文) : 중국과 같은 문화권이라는 뜻. 《中庸 二十八章》에 “지금 천하가 수레의 궤도가 같고 글을 쓸 때 문자가 같고 행도의 윤리가 같다.” 하였다. /명종실록10/ 동문에는 …… 열렸어라 : 진(秦) 나라 때 동릉후(東陵侯)에 봉해졌던 소평(召平)이, 진 나라가 멸망한 뒤 평민(平民)이 되어 장안(長安)의 동쪽 성문 밖에다가 오이를 심었는데, 맛이 좋고 색이 오색(五色)인 오이가 열렸다. 이리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가 심은 오이를 가리켜 ‘오색과(五色瓜)’ 또는 ‘동릉과(東陵瓜)’라고 하였다. 후에 이 고사는 벼슬을 버리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가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다. 《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동문의 외 : 동릉과(東陵瓜). 진(秦) 나라 동릉후(東陵侯)인 소평(召平)이 진 나라가 망하자 포의(布衣)로 가난하게 생활하며 장안성 동쪽에 외를 심었는데 그 외가 좋았으므로 세속에서 이를 ‘동릉과(東陵瓜)’라고 했다고 함. 동문의 전별 : 동문(東門)은 장안(長安)의 동도문(東都門). 한(漢) 나라 때 소광(疏廣)과 그의 조카 소수(疏受)가 칭병(稱病)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공경대부들이 장안(長安) 동도문 밖에 모여 대대적으로 전별(餞別)의 잔치를 베풀었던 데서 유래한다. 《漢書 疏廣傳》 〔용재집〕 동문일궤(同文一軌) : 천하가 통일되어 글은 글자가 같고, 수레는 수레[軌]의 제도가 같다는 말이다. [書同文 : 車同軌] 동문휘고(同文彙考) : 동문휘고는 129권 60책(冊)으로 된 조선시대 외교 문서집이다. 정조(正祖) 8년(1784)에, 정창순(鄭昌順) 등이 왕명으로 승문원(承文院)에 있는 자료를 가지고 편한 것으로, 인조(仁祖) 21년(1643) 이후의 사실이 수록되었다. /해행11-39/ 동발(銅?) : 동발(銅?): 동발, 잡라, 제금 향발 따위의 총칭. 직경 20~30㎝ 접시모양의 둥근 동판으로 중앙에 끈을 꿰어 양손에 하나씩 들고 마주침. 서양악기의 심벌즈와 같음. 동방삭(東方朔) : 전한(前漢) 武帝 때의 사람으로 文辭에 뛰어나고 滑稽를 잘하여 諷諫의 의미를 붙여 임금을 많이 깨우쳤으며, 특히 삼 천 갑자를 살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음. → 동산서붕(銅山西崩) 동배주창류(同杯酒娼類) : 한 잔의 술을 같이 마신 창녀(娼女). 곧, 한 사내에게 약속하고 몸을 맡긴 창녀. ○ 至於士大夫間 常時同杯酒娼類 公然奪奸 ?面無恥 《中宗實錄 二十三年 二月》 동번국(東藩國) : 명나라에서 조선을 자기네의 속국이라 하여 동쪽 울타리[東藩]라는 뜻으로 동번국이라 하였다. /연려실기술16-4-114/ 동벽(東壁)·서벽(西壁)·남상(南床) : 홍문관원의 별칭. 홍문관원이 사진(仕進)하여 앉는 좌차(座次)가 그 벼슬의 별칭이 되었으니, 곧 직제학(直提學)·전한(典翰)·응교(應敎)·부응교(副應敎)를 동벽, 교리(校理)·부교리(副校理)·수찬(修撰)·부수찬(副修撰)을 서벽, 박사(博士)·저작(著作)·정자(正字)를 남상이라 했다. 그리고 모두 경연을 겸임하였으며, 부제학에서 수찬까지는 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동벽(東壁)1 :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동쪽 벽[東壁]에 두 별이 있어 문장을 주관하니, 천하의 도서를 갈무리한 비밀 창고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문장을 주관하는 한림원을 뜻하고 있다. 〔용재집〕 동벽(東壁)2 : 벼슬아치가 사진(仕進)하여 모여 앉을 때, 좌석의 동쪽에 앉는 벼슬, 곧 의정부의 좌참찬(左參贊), 홍문관의 응교(應敎)와 부응교(副應敎), 통례원(通禮院)의 인의(引儀) 등을 일컬음. /중종5-70/ 동봉(東峰)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별호이다. 동봉니환(東封泥丸) : 동관한기(東觀悍記)에, “외효(??)의 장수 왕 원(王元)이 말하기를, ‘청컨대, 일환니(一環泥)로써 대왕을 위하여 동으로 함곡관(函谷關)을 봉쇄하겠다.’ 하였다.” 하였음. 즉 험요(險堯)한 지대는 지키기가 쉽다는 뜻임. /해행4-214/ 동봉행수(董奉杏樹) : 삼국시대에 동봉(董奉)이 여산(廬山)에 숨어 살면서 남의 병을 치료하여 주고는 돈을 받지 않고 살구나무를 심어 달라 하여 수년 만에 십만주(十萬株)가 되었다. /동국5-287/ 동빈(洞賓) : 당나라 여암(呂巖)의 자이다. 동빈은 선인(仙人)이 되어 인간 세상에 다니면서 기이(奇異)한 전설을 많이 퍼쳤다. /연려실기술16-4-159/ 동사(銅絲) : 안록산의 난리에, 현종의 그 아들 숙종이 그 아버지도 모르게 임금이 되고, 현종을 퇴위시켜 감금하다시피 하며, 현종이 두통이 난다고 철사로 머리를 동여 실상 제 명에 죽지 못하였으나, 명혜제는 그의 숙부 영락제(永樂帝) 주체(朱?)에게 위를 빼앗겼으나 오히려 제명에 죽었다는 의미이다. /열하2-52/ 동사(董史) : 춘추시대 진(晋) 나라 사관 동호(董狐)의 직필. 영공(靈公)이 조순(趙盾)을 죽이고자 함에 조순이 달아나다가 국경을 넘지 않아서 조천(趙穿)이 영공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조천을 토벌하지 않았는데, 동호가 《조순이 그 임금을 시해했다.[趙盾弑其君]》고 기록했다. 이를 두고 공자가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관이다. 법대로 기록하여 숨기지 않았다.[董狐古之良史也 書法不隱]》고 말했다. 《春秋左傳》 <宣公 二年> 동사(東?) : 황태자의 책봉을 알리는 조서(詔書)를 반포하러 오는 명(明) 나라 사신을 접반(接伴)하기 위하여 의주(義州)로 갔던 일을 가리킨다. 9권 서문 참조. 〔월사집〕 동사(東?)의 …… 모였었지 : 만력(萬曆) 신축년(1601), 황태자를 책봉을 알리는 조서(詔書)를 가지고 오는 중국 사신을 맞아하기 위해 당시 대제학으로 있던 월사를 비롯하여 박동열(朴東說), 이안눌(李安訥), 홍서봉(洪瑞鳳), 차천로(車天輅), 한호(韓濩), 권필(權?), 이효언(李孝彦) 등 당대의 명사(名士)들이 사행(使行)에 선발되었다. 〔월사집〕 동사백(董思白) : 명 나라 동기창(董其昌)을 말함. /완당집3/ 동산 가운데의 …… 것이요 : 감곽(甘藿)은 해산물(海産物)인 미역을 이른다. 맹종(孟宗)은 오(吳)나라 강하(江夏)사람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한겨울에 어머니가 병들어 죽순을 먹고 싶어하였다. 할 수 없이 대나무 숲에 들어가 슬피 울었더니, 갑자기 죽순이 땅에서 나왔으므로 이것으로 국을 끓여 어머니에게 드렸는 바, 동산 가운데에서 미역이 나온 것은 추운 겨울에 죽순이 나온 맹종의 고사처럼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동산(洞山) : 당(唐) 나라 고승의 이름. 곧 양개선사(良价禪師). 선종(禪宗) 조동종(曹洞宗)의 조(祖), 성은 유씨(兪氏). 만년에 동산(洞山)에 살면서 명성을 떨쳤으므로 산 이름이 별호가 되었음. /여한46/ 동산(桐山) : 동백산(桐栢山). 당(唐) 나라 사람 동소남(董召南)이 안풍(安豊)에 살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를 받들고 처자를 거느리고 살았는데, 한퇴지(韓退之)가 그의 이러한 삶을 두고 <동생행(董生行)>이란 글을 지으면서 그 글의 서두에 안풍의 산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하여 멀리 회수(淮水)의 발원인 동백산을 일컬었음. 동산(東山)1 : 절강성(浙江省) 상우현(上虞縣) 서남(西南)에 있는 산 이름인데, 진(晋) 나라 사안(謝安)이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또한 기녀(妓女)를 데리고 유연(遊宴)하였다고 함. /해행10-444/ 동산(東山)2 : 중국 동진(東晋)의 명신(名臣) 사안(謝安)을 가리킨다. 그가 출사(出仕)하기 전에 40세까지 동산(東山)에 은거(隱居)하였으며, 그는 이 때 산천을 유람하면서 늘 기생을 데리고 다녔다 한다. 동진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8년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친히 백만 대군을 지휘하여 동진의 수도(首都)에서 멀지 않은 비수(肥水)에까지 쳐들어왔는데, 사안은 동진의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에 임명되어 군대를 먼저 보내고 자기는 출발 전일 별장에 나가서 친구와 함께 별장을 내기로 걸고 바둑 두어 크게 이겼을 만큼 담대하고 도량이 컸다 한다. 〔월사집〕 동산(東山)은 …… 매였으니 : 동산은 회계(會稽)의 동산으로 이곳에 은거(隱居)한 사안(謝安)을 가리킨다. 진(晉)나라의 명재상인 사안은 자가 안석(安石)으로 경륜과 지략이 뛰어나 명망이 높았는데 회계의 동산에 은거하여 따르지 않자, 당시 사람들은 “안석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니, 창생들을 어찌하려는가.”라고 말하였으므로 상대방을 사안에 견주어 말한 것이다. 동산(東山)의 사부(謝傅) : 사부는 동진(東晉) 중기의 명신(名臣)인 사안(謝安)으로, 그의 증직(贈職)이 태부(太傅)이므로 이렇게 부른다. 그가 출사(出仕)하기 전 동산(東山)에 은거하면서 기생을 데리고 산천을 유람하며 풍류를 즐겼다 한다. 〔용재집〕 동산(東山)의 천고의 뜻 : 동산은 진(晉)나라의 명재상인 동산거사(東山居士) 사안(謝安)을 가리키는 바, 그는 풍류를 좋아하여 일찍이 회계(會稽)의 동산에 은거하였는데, 뒤에 세상에 나와 명재상이 되었으나 항상 은거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으므로 말한 것이다. 동산서붕(銅山西崩) : 한(漢) 나라 효무제(孝武帝) 때 미앙궁(未央宮) 전전(前殿)의 종(鍾)이 아무런 까닭없이 저절로 울어서 삼일 동안 그치지 않았다. 동방 삭(東方朔)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동(銅)은 산(山)에서 나왔으니 비하면 자식이 되고 산은 동을 생산하였으니 비하면 어머니(母)가 된다. 자식과 어머니는 서로 감응이 되는 것이다. 산이 무너질까 두려워하여 종이 먼저 우는 것이라 했다. 사흘 뒤에 남군태수(南郡太守)가 글을 올려 산이 20여 리나 무너졌다”고 아뢰었다. 《世說政事》 /여한-331/ 동산서붕(銅山西崩) 낙종동응(洛鍾東應) : 서로 감응하는 것에 대한 비유로서 世說新語 政事篇에서 나온 말인데, 殷荊州가 遠公에게 易의 體를 묻자 遠公이 이 말로써 대답하였음. 동산시(東山詩) : 동산은 《시경(詩經)》 빈풍(?風)의 편명으로 주공(周公)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주나라 왕실을 전복시키려는 은(殷)나라의 무경(武庚)과 관숙(管叔) 등을 토벌하고 돌아와 출전한 군사들을 위로한 내용이다. 동산에 --- …… 작게 여김 : 맹자의 말에 《공자가 동산에 올라보고 노 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에 올라보고 천하를 작게 여겼다.[孔子 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고 한 것이 있음. 《맹자》 <진심장 상(盡心章上)>. 동산은거(東山隱居) → 사안(謝安) /성호7-44/ 동상(東床) : 사위를 뜻하는 말. 진(晉) 나라 때 극감(?鑑)이 문생(門生)을 시켜 왕도(王導)의 집에 가서 사윗감을 고르게 하였는데, 다른 자제들은 모두 옷차림을 가다듬었으나 왕희지(王羲之)는 동쪽 평상 위에 배를 내놓고 누워 떡을 먹고 있었다. 이에 왕희지를 사윗감으로 골랐다 함. 《晉書 王導傳》 동생(董生) : 당나라 사람 동소남(董召南). 안풍(安豊)에 은거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를 받들고 처자를 거느리고 살았다. 한퇴지(韓退之)가 그의 이러한 삶을 두고 <동생행(董生行)>이란 글을 지은 것이 있다. 동생법(童生法) : 청(淸) 나라 강희(康熙) 때에 생긴 과시(科試) 제도의 하나. 주·현·부(州縣府)에서 동생(童生)을 고취(考取)함에 그 숫자를 제한하지 않았으며, 주·현·부의 지방 고시에 합격하여 동생이 된 자는 중앙 고시(考試)에 응시할 자격을 줌. /연행4-185/ 동생행(董生行) : 당나라의 한퇴지(韓退之)가 동소남(董召南)의 선행을 읊은 글. 동소남은 당나라 사람으로 안풍(安豊)에 은거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를 받들고 처자를 거느리고 살았는데, 한퇴지가 그의 이러한 삶을 두고 글을 지었다. 동서(東序) : 동쪽 담장으로 당(堂) 위에는 동쪽과 서쪽에 각기 하나의 담장이 있는 바, 동쪽에 있는 것을 동서(東序), 서쪽에 있는 것을 서서(西序)라 한다. 동서금표(東西禁標) : 연산군 때 서울의 서쪽인 사직동(社稷洞)으로부터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에 이르기까지 그 안의 인가를 모두 철거하고 표(標)를 세워 인민의 입주를 금지하였다. 이를 동서금표라 하였는데, 이 때 이를 철폐토록 하였음. /중종1-20/ 동서명(東西銘) : 횡거(橫渠)가 그 서실의 양쪽 창문에 명(銘)을 써 걸었는데 동쪽은 《폄우(?愚)》라 하고 서쪽은 《정완(訂頑)》이라 했다. 이천(伊川)이 “이런 이름은 사람들의 논쟁의 실마리가 될 수 있으니 차라리 그냥 동명 서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여 횡거가 이에 따랐다. 동서무(東西?) : 문묘(文廟) 안에 유현(儒賢)들을 배향한 동쪽 행각(行閣)과 서쪽 행각. /연행2-174/ 동서문자(同書文字) : 글에 문자를 같이 함. 대전(大篆)이 사용하기에 불편하므로 진 시황때 이 사(李斯)가 소전(小篆)을 지어 문자를 통일한 것을 이른다. 이 말은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28년 조에 “器械一量 同書文字”라 하고, 동 26년 조에도 “車同軌 書同文字”라고 보인다. 또 《중용(中庸)》에는 “今天下 車同軌 書同文”이라 하였다. /오주17-140/ 동서벽(東西壁) : 어떤 관청이건 관원이 사진(仕進)하면 장관이 정면, 그 다음은 위계(位階)에 따라 동·서로 갈라 앉는데, 동쪽에 앉은 것을 동벽, 서쪽에 앉은 것을 서벽이라 한다. 의정부는 삼공(三公)이 정면, 좌·우 찬성이 동벽, 좌·우 참찬이 서벽에 앉는다. /중종실록52/ 동선(董宣) : 왕의 자녀가 아무리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더라도 강직한 사람은 꺽지 못한다는 것. 창두는 종이고 강항령은 강직하여 권세 있는 자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는 사람을 말함. 한 광무제(漢光武帝) 때 동 선(董宣)이 낙양령(洛陽令)으로 있을 때 호양공주(湖陽公主)의 종이 살인을 하자 공주의 죄를 성토하고 그 종을 때려 죽였다 광무제가 노하여 공주에게 머리를 숙여 사과하게 하였으나 끝내 버티어 광무제로부터 강항령이란 별칭을 받고 돈 30 만 냥을 하사 받았다. 《後漢書 卷七十七 董宣傳》 /선조실록 34/ 동성(動星) → 엄광(嚴光) 동소남(董召南) : 당(唐)나라 사람으로 안풍(安豊)에 은거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를 받들고 처자를 거느리고 살았음. 한퇴지(韓退之)가 그의 이러한 삶을 두고 <동생행(董生行)>이란 글을 지었음. 동소남(董召南) → 가계회구(家鷄懷狗) /연행51/ 동승서(童承敍) : 명(明)의 면양(沔陽) 사람. 자(字)는 한신(漢臣) 또는 사주(士疇)이고, 호(號)는 내방(內方)이며, 정덕(正德) 16년 진사. 실학(實學)을 폈으며, 《평한록(平漢錄)》·《면양지(沔陽志)》·《내방선생문집(內方先生文集) 등이 있다. 원문의 董은 童의 잘못임. 《國朝獻徵錄 권19》 /연행1-410/ 동시(?矢) : 붉은 색의 화살. 옛날에 동궁(?弓)과 함께 왕이 공신에게 정벌을 명할 때 하사했다. 《書經》 <周書> 文侯之命 동시(東市)에 …… 제 : 처형될 때를 뜻한다. 동시는 형장을 뜻한다. 한(漢) 나라 경제(景帝) 때 강직한 신하 조조(晁錯)이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천자의 권위를 강화시켜 사직(社稷)을 편안케 하고자 법령(法令) 30장(章)을 개정했다가 제후들의 반발과 간신배의 참소로 조복(朝服)을 입고서 동시에서 처형되었다. 《史記 ?錯列傳》 〔용재집〕 동심인성(動心忍性) : 마음을 요동시켜 수고롭게 하며 성품을 굳건히 참아내게 하는 것을 말한다. 《孟子》 《告子章下》 동악(動樂) : 궐희(闕戱) 때의 놀이의 한 가지. 사학(四學)에서 보낸 사신을 예조(禮曹)에서 대접할 때 어린 아이에게 솥뚜껑을 치며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 四學遺使來朝 以鷄爲海靑而獻之 禮曹宴來使 饋一杯酒 肴用熟豆 令齋直小兒 擊鼎盖歌而侑之 名曰動樂 《?齋叢話 卷之九》 동악(東岳) : 동악(東岳)은 인조(仁祖) 때의 문신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호로, 자는 자민(子敏)이고 시호는 문혜(文惠)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光海君) 때 경주부윤을 거쳐 예조참의를 지내고, 인조(仁祖) 때 예조판서가 되었다. 저서에 《동악집(東岳集)》이 있다. 동악(東岳)과 동고(東皐) : 동악(東岳)은 조선 인조(仁祖) 때의 문신인 이안눌(李安訥)의 호이며, 동고(東皐)는 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인 최입(崔?)의 호인데, 두 사람 모두 뛰어난 문장가였다. 동안사(同安寺) : 옛 사람이 동안사에서 종소리를 듣고 도를 깨달은 일이 있다. /해행5-469/ 동애(東崖) : 허자(許磁)의 호가 동애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남중(南仲)으로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고, 1541년 형조 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귀국, 대사헌을 거쳐 예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이기(李?)의 측근에게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죽었다. 뒤에 홍문관에서 그의 무죄를 상주하자 명종이 관작을 복구시키고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문집으로 《동애유고(東崖遺稿)》가 전한다. 동야(東野) : 唐나라 武康 사람 孟郊의 字. 시문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고 나이 오십에 대과에 급제했으나 평생을 불우하게 보냈음. 성격이 강개하여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는데 韓退之가 한 번 보고서 忘形交를 맺었음. 東野가 江南으로 갈 때에 韓退之가 送孟東野序를 지어서 보냈는데 그 글 가운데 東野가 시로써 일세를 울렸다고 하였음. 동야(東野)는 …… 탔었지 : 동야는 대과(大科)에 급제하고도 평생을 빈한(貧寒)하게 보낸 당(唐) 나라 시인 맹교(孟郊)를 가리키고 이부(吏部)는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하고 조주(潮洲)로 귀양간 당 나라 문장가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맹교는 역시 동시대의 시인 가도(賈島)와 교한도수(郊寒島瘦)라 병칭되어 빈한한 시인의 대명사처럼 불린다. 〔용재집〕 동야필(東野畢) : 옛날 말을 어거하던 사람. 《가어(家語)》 안회(顔回) 편 참조. /성호5-144/ 동약(?約) : 한 나라 때 왕 포(王褒)가 지은 글로서 종을 사들이는 문권이 기록 되어 있다. /경세 3-145/ 동양(東陽) : 함경도 평산(平山)의 옛이름이다. 〔월사집〕 동양동당(東陽東堂) : 동양은 법명(法名). 동당은 일본 선종(禪宗)의 위계의 하나로 전 주지(前住持)를 칭하는 것. /중종실록 42/ 동어(凍魚) : 동수어(凍秀魚)의 준말로 겨울철에 잡아서 얼린 숭어. 또는 숭어 새끼를 뜻하기도 한다. 〔용재집〕 동어(銅魚) : 태수(太守)의 관직을 상징하는 부절(符節)로 동어부(銅魚符)라고 한다. 고인이 고부 군수(古阜郡守)를 역임하였으므로 이 말을 쓴 것이다. 〔월사집〕 동연회(同蓮會) : 같은 해에 연방(蓮榜)에 급제한 사람들끼리 가지는 계회(契會)이다. 〔월사집〕 동열(同列) : 범공이 동파와 동열이다. 동영(東榮) : 정방(正房) 동쪽의 옥익(屋翼)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빈소가 차려진 곳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영(東營) : 창덕궁 동쪽에 있던 어영청의 분영. /만기 2/ 동오(童烏) : 한 나라 양웅(揚雄)의 아들. 9세에 이미 아버지가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는 것을 도울 정도로 총명했으나 일찍 죽었음. 동오경(董五經) : 촉중(蜀中)에 살던 예언자로 종종기이하게 마친 일이 간혹 있었다. /연려실기술2-1-193/ 동오계발(動寤啓發) : 근심(君心)을 가리켜 한 말. 동와(●瓦) : 수키와. 정사(亭?)·전각(殿閣)에 사용하는 기와. /연행5-241/ 동요(棟撓) : 주역(周易) 대과(大過) 구삼(九三)에 “기둥이 흔들리니 흉하다”[棟撓凶] 하였음. /연산4-59-23/ 동우지곡(童牛之?) : 어린 소가 틀에 발이 매여 있는 것. 자유롭지 못하게 함을 뜻함. /연2-96-19/ 동원(東園) : 관서(官署)의 이름. 처음 진한(秦漢) 시대에 설치되었으며 능묘(陵墓) 안의 기물, 장구(葬具)의 제작과 공급 등의 일을 관장하였음. 동월(董越) : 명 나라 때 사람. 자는 상구(尙矩), 시호는 문희(文僖), 효종(孝宗) 때 우서자(右庶子) 벼슬로 우리 나라에 사신으로 옴. 저서로 《규봉문집(圭峯文集)》·《사동일록(使東日錄)》이 있음. /연 8-89-21/ 동위(銅?) : 동룡문(銅龍門). 한 대(漢代)의 태자(太子)의 궁문(宮門). 문 위에 동룡이 있음. 곧 세자빈(世子嬪)이 됨을 이르는 말. /연대 8-386-50/ 동위이좌(同位異座) : 서열이 형제인 경우 소목(昭穆)은 같은 위(位)로 하고 자리만 따로따로함. /선조수정실록1/ 동유(董?) : 동중서(董仲舒)의 장막을 말한다. 한(漢) 나라 때 동중서는 일찍이 박사(博士)가 되어 학문에 전념하느라 장막을 내리고서 강의하였으며, 제자들에게 차례로 학업을 가르치므로 혹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한다. 《漢書 卷五十六 董仲舒傳》 /청장 1-106/ 동유(董?)를 …… 던졌다 : 동유는 전한(前漢)의 학자인 동중서(董仲舒)의 서재에 있는 휘장이고, 반필(班筆)은 후한(後漢)의 명사인 반초(班超)의 붓을 이른다. 동중서는 일찍이 학문에 몰두하여 3년동안 서재의 휘장을 걷지 않았으며, 반초는 집이 가난하여 남의 서기(書記)로 있다가 붓을 던지고 장군이 되어 서역(西域)을 개통하고 봉후(封侯)의 영광을 누렸는 바, 곧 학문의 길을 버리고 무예(武藝)에 종사하여 군관(軍官)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동이 …… 주노라 : 직경(直卿) 홍언충(洪彦忠)이 이 당시 배소(配所)에서 채소밭 일을 맡고 있었다. 6권 ‘직경과 공석이 자진(子眞)의 시에 차운하여 보여주기에 나도 다시 화답하다’ 원주(原註) 참조. 〔용재집〕 동이 두드리며 노래하며 : 장자(莊子)의 아내가 죽어 혜자(惠子)가 문상(問喪)하러 갔더니 장자가 다리를 뻗고 천연덕스럽게 앉아서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하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본래 삶이 없었고 몸이 없다가 이제 본래 없는 상태로 돌아갔으니 슬퍼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대답하였다. 《莊子 至樂》 〔월사집〕 동이 세운 듯 : 지형이 매우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것을 뜻한다.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에 “지세가 편리하니, 제후(諸侯)들에게 군사를 출동시켜 보내는 것이 비유하자면 마치 높은 지붕 위에서 동이의 물을 거꾸로 세워서 붓는 듯하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월사집〕 동인(同寅) : 군신(君臣)이 함께 공경하여 정사(政事)에 힘씀을 뜻한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동인협공(同寅協恭)”이라 하였다. 〔용재집〕 동인(銅人) : 동(銅)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서 궁궐 문과 종묘 문에 세워 장식하던 것. 동적(銅狄)이라고도 함. 《後漢書 力術傳》에 “계자훈(?子訓)이 장안(長安) 동쪽 패성(覇城)에서 한 늙은이와 함께 동인을 마사(摩?)하며 서로 이르기를 “마침 이것을 지어붓는 것을 보았는데 이미 5백 년이 가까웠다.” 하였음. 소 식의 시에 “摩?古銅人 歲月不可計”라 하였음. 동인(同仁) :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준말로, 중국과 이민족의 구분을 두지 않고 천하를 하나로 보는 천자의 인덕(仁德)을 뜻한다. 〔용재집〕 동인협공(同寅協恭) : 신하들이 서로 조심하여 공사(公事)를 받들고 마음을 합쳐 공경(恭敬)을 이룬다는 뜻. 《시경》 고요모(皐陶謀) 편에, 《동인 협공》이라 하였는데, 그 주서에, 《군신은 마땅히 그 조심하고 두려워 함을 같이하고 그 공경함을 합쳐야 한다.》 [君臣當同其寅畏協其恭敬]하였음. 동자 : 탕왕(湯王)이 정벌(征伐)을 시작한 동기. 여기서는 동자 한 명도 허술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 즉 탕이 박(毫)에 살 적에 이웃한 갈백(葛伯)이 방종하고 무도(無道)하여 그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자, 탕이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으니 희생(犧牲)과 자성(?盛)이 없어서 라고 하였다. 그러자 우양(牛羊)을 보내주고 박 땅의 사람들을 보내어 농사를 지어주게 하였는데 음식도 함께 보내주었다. 그런데 서육(黍肉)을 뺏기 위해 서육을 날라다 주던 동자를 갈백이 죽였기 때문에 갈백을 정벌하였다. 《孟子 ?文公 下》 /명종실록10/ 동자(董子) : 동중서(董仲舒). 한 나라 때의 학자로 소시에 《춘추》를 전공하여 경제(景帝) 때에 박사(博士)가 되었는데 휘장을 드리우고 강송(講誦)함에 그 얼굴을 볼 수 없었고 3년 동안 정원을 내다보지 않고 학문에만 독실하니 학사(學士)들이 모두 존중했다. 일찍이 《인인은 그 의(義)를 바르게 하고 그 이(利)를 꾀하지 않으며, 그 도를 밝히고 그 공을 꾀하지 않는다.[仁人者 正其誼 不謀其利 明其道 不計其功]》고 한 말이 있다. 《史記》 <儒林列傳> 동자(董子) : 동중서(董仲舒)의 존칭. 이 말은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에 자세히 보임. /성호9-211/ 동자과(童子科) : 당대(唐代)에 10세 이하 동자에게 실시하던 과거. 10세 이하 동자로 경서(經書)에 능통한 자에게 실시하되, 경서를 암송시켜 매권(每卷) 전체를 조금도 결함 없이[十分] 통하는 자는 관직에 참여시키고, 다음 칠분(七分)쯤 통하는 자는 출신(出身)에 참여시킴. /연행7-346/ 동자기(童子伎): 童子는 金剛童子를 말하며, 西方無量壽經佛의 化身이다. 동자기는 분노하는 童子의 모습을 드러내고, 손에 金剛杵를 들었다. 동자습(童子習) : 명 나라 주봉길(朱逢吉)이 지은 아동교육 교재. 동자의가범패(童子倚歌梵唄): 梵唄는 불교의 의식 음악. 또는 如來의 공덕을 찬송하는 노랫소리를 이름. 동작(動作) :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平秩動作”이라 하였고 그 주에 動作은 봄철에 농사를 시작하는 것을 말한 것이라 하였음. /연산4-330/ 동작(動作)의 업(業) : 농사일을 말함. 《書經 堯典》에 “동작을 평질한다.[平秩動作]”고 하였고, 그 주(註)에 “평(平)은 고르게 함이요, 질(秩)은 일어나는 것이다. 동작(動作)은 봄철에 그 해의 농사일을 시작하는 것으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하였다. /중종실록37/ 동작대(銅雀臺) → 조 조(曹操) 동작와연(銅雀瓦硯) : 중국 삼국 시대 조 조(曹操)가 지은 동작대(銅雀臺)의 기와로 만든 벼루. /성호11-63/ 동잠실(東蠶室) : 양주의 아차산 밑에 있는데 환관이 관장함. /만기2/ 동장(銅章) :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의 신표로서 구리로 만든 관인(官印)을 말함. 동장(銅章)을 …… 것을 : 심열(沈悅)이 황해도의 고을 수령으로 부임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월사집〕 동장(銅章)이 …… 빛났습니다 : 동장은 구리로 만든 인부(印符)로 수령들이 차고 다녔는바, 곧 지방관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동재(桐梓) : 오동나무와 가래나무. 아름다운 재목을 말함.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 성균관이나 향교(鄕校)의 동쪽에 있는 집을 동재, 서쪽에 있는 집을 서재라 하는데, 여기에서 유생들이 글을 읽었다. /중종실록 46/ 동적(銅狄) : 구리로 주조한 상(像)으로 진(晉)나라 때 관내후(關內侯)였던 색정(索靖)은 천하가 장차 혼란할 줄을 알고 낙양(洛陽)의 궁궐문 앞에 세워진 구리로 만든 낙타상을 가리키며 “장차 네가 가시나무 속에 있는 것을 볼 것이다.” 하였는데, 그후 오호(五胡)의 침공으로 진나라는 결국 남쪽으로 천도(遷都)하고 말았다. 동적전(東籍田) : 서울 동쪽에 있는 적전. 묘사(廟社)의 제향(祭享)에 쓸 곡식을 심는 전담으로 흥인문(興仁門)밖에 있었음. /중종실록34/ 동전(東銓) : 병조(兵曹) /연려실기술18-4-486/ 동접록(同接錄) : 같은 곳에서 함께 공부하던 사람을 기록한 서책. 동정(動靜) : 고려 시대에 이부(吏部)가 해마다 백사(百司)의 서리(胥吏)를 가려서 유임시키거나 이동하는 것. ○ 吏部 每歲調選百司胥吏 有仍有徙 名爲動靜 《東史綱目 第十上》 동정(?庭) : 궁중의 뜰. 옛날에 궁중의 섬돌은 붉은 색으로 했기 때문에 일컫는 말임. 동지(??)라고 하기도 함. 동정(東井) : 정수(井宿)를 말하는데 이십팔수 중에 남방주작(南方朱雀)에 있는 별자리이다. 《史記 陳餘篇》에 “한왕(漢王)이 관(關)에 들어오매, 오성(五星)이 동정에 모였다.” 하였다. /동사1-307/ 동정(東征) → 백주(柏舟) 동정(東井)에 …… 모였기로 : 동정은 별자리 이름으로,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이다. 오성(五星)은 수(水) · 화(火) · 금(金) · 목(木) · 토(土)의 오대행성(五大行星)으로, 이 다섯 별이 한 방위에 나란히 이어져서 보이는 것은 매우 특이한 길조(吉兆)라 한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진(秦) 나라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갔을 때 오성이 동정에 모였다 한다. 이는 여기서는 우리 나라가 동쪽에 위치하였고 길운(吉運)을 맞았음을 뜻하는 듯하다. 〔용재집〕 동정호 …… 다음 : “나는 그대를 위해 황학루는 때려부술 터이니, 그대도 나를 위해 앵무주를 뒤엎어주오.[我且爲君?碎黃鶴樓 君亦爲我倒却鸚鵡洲]”라 한 구절을 차용하였다. 〔월사집〕 동정호(洞庭湖) : 중국의 파릉(巴陵)에 있는 유명한 호수. /해행5-449/ 동제(銅?) : 양 무제(梁武帝)가 양양(襄陽) 땅의 동요(童謠)에 있는 “양양백동제(襄陽白銅?)”를 근거로 지었다는 악부곡(樂府曲)이다.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 “양양의 아이들이 일제히 손뼉을 치며 거리를 막고서 다투어 백동제를 부른다.[襄陽小兒齊拍手 ?街爭唱白銅?]” 하였다. 여기서는 상대방이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부임하 때문에 차용하였다. 〔월사집〕 동조(東朝)1 : 동궁(東宮), 즉 세자(世子)를 말함. 동조(東朝)2 : 태후(太后)·대비(大妃)의 궁전. 한(漢)나라 때에 황태후가 상시 거처하던 장락궁(長樂宮)이 황제의 거처인 미앙궁(未央宮)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이렇게 부르게 됨. /연2-57-52/ 동조구(董糟丘) : 당(唐) 나라 이백(李白)의 억구유기초군원참군(憶舊遊?郡元參軍)이란 시에, “추억하노니 낙양의 동조구가 나를 위해 천진교(天津橋) 남쪽에 주루(酒樓)를 지었었지.” 하였다. 〔용재집〕 동조서도(東棗西桃) : 제삿상을 말하는 것인데, 원래 복숭아는 제사에 사용하지 않으나 신선들이 먹는 과일을 들었기 때문에 쓴 것이다. 한(漢) 나라 때 방사(方士)였던 이소군(李少君)은 “일찌기 해상(海上)에 유람하다가 안기생(安期生)이 오이만한 큰 대추를 먹는 것을 보았다.” 《漢書 卷二十五 郊祀志》 하였는데, 안기생은 옛 기생은 옛 신선의 이름이며, 서왕모(西王母)라는 천도(天桃)가 있었는데 이 복숭아를 먹으면 천년을 산다 한다. 한(漢)의 동방삭(東方朔)은 이 복숭아를 3개 훔쳐 먹어 3천 살을 살았다 한다. 《漢書 卷六十五 東方朔傳》 /청장1-150/ 동주(銅柱) : 구리 기둥을 세워 국경을 표시한다는 것인데, 중국 한(漢)나라 때 마 원(馬援)이 남쪽의 먼 나라 교지(交趾)를 정벌하고 구리 기둥으로 경계 표시를 하였던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대동야승9/ 동주(洞主) : 서원의 원장을 일컫는 말. 동주(同舟) : 한 배를 타고 함께 위험을 헤쳐나는 것이다. 당시 명(明) 나라와 조선이 모두 청(淸) 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월사집〕 동주(東珠) : 혼동강(混同江)과 오랍(烏拉) 영고탑(寧古塔)의 여러 하천에서 산출되는 보옥(寶玉). 맑고 희며 큰 것은 5분(分) 정도, 작은 것은 콩알만하다. 청 나라에서는 이것을 왕공(王公) 등의 관식(冠飾)으로 썼는데 구슬의 다과로 관등(官等)·품질(品質)을 구분하였다. /연행5-191/ 동주(銅柱)가 …… 의지하였도다 : 동주는 국경을 뜻한다. 12권 ‘일남(日南)의 …… 재주로세’ 참조. 신묘한 계책으로 국경을 잘 지키게 되었다는 뜻이다. 〔월사집〕 동주(銅柱)에 …… 멀고 :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 주(注)에, “마원(馬援)이 교지(交趾)에 이르러 동주(銅柱)를 세워 한(漢) 나라의 국경으로 삼았다.” 하였다. 제봉(提封)은 강역(疆域)이다. 여기서는 조선에 전쟁의 파란이 잠잠해졌음을 뜻한다. 〔월사집〕 동주(?酒) : 마유(馬乳)로 만든 술. 동마주(?馬酒). /연행5-214/ 동주군(東周君) : 주 나라가 도읍을 동쪽 낙읍(洛邑)으로 옮긴 뒤인 제13대 임금 평왕(平王) 이하의 왕들을 가리킴. /성호사설9/ 동주늑명(銅柱勒名) : 후한(後漢) 마 원(馬援)이 교지(交趾)를 평정하고 구리기둥을 세워 한(漢)의 경계를 표했음. 《後漢書 馬援傳》 /해행5-182/ 동주이선생(東州二先生) : 손복(孫復)과 석개(石介)를 말함. 동주표(銅柱標) : 한나라 마 원(馬援)이 교지(交趾)를 평정하고 동주(銅柱)를 세워서 한나라 경계를 표지(標識)하였다. /해행5-456/ 동중서(董仲舒) : 하북성(河北省) 광천현(廣川縣) 출신. 일찍부터 《공양전(公羊傳)》을 익혔으며 경제(景帝) 때는 박사가 되었다. 장막(帳幕)을 치고 제자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제자도 있었으며, 3년 동안이나 정원에 나가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무제(武帝)가 즉위하여 크게 인재를 구하므로 현량대책(賢良對策)을 올려 인정을 받고, 전한의 새로운 문교정책을 제정하였으며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유교 정치를 확립하였다. 뒤에 강도상(江都相)이 되었다. 저서에 《동자문집(董子文集)》과 《춘추번로(春秋繁露)》 등이 있다. 동중서(董仲舒) : 한(漢)나라의 학자로 소시에 《춘추(春秋)》를 전공하여 경제(景帝) 때에 박사(博士)가 되었는데 휘장을 드리우고 강송(講誦)함에 그 얼굴을 볼 수 없었고 3년 동안 정원을 내다보지 않고 학문에만 독실하니 학사(學士)들이 모두 존중하였고, 무제(武帝) 때에 누차 대책(對策)을 올려 무제의 중망(重望)을 입었음. 일찍이 “인인(仁人)은 그 의(義)를 바르게 하고 그 이(利)를 꾀하지 않으며 그 도(道)를 밝히고 그 공(功)을 꾀하지 않는다.”고 한 말이 있음.《사기》 《유림열전(儒林列傳)》. 동지(??) : 궁정(宮庭)의 뜻. 천자의 섬돌은 붉은 칠로 꾸미므로 이르는 말. /연행6-432/ 동지사(冬至使) :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에 보내는 사신으로 상사(上使)·부사(副使) 및 서장관(書狀官)의 삼사(三使)가 있음. /중종실록46/ 동지시(冬至詩) : 송 나라 소강절(邵康節)이 지은 동지시(冬至詩)에 “동지 자시반(子時半)에 하늘 마음이 고치고 옮김이 없네.” 하였다. /해행5-592/ 동진(東晋) : 동진의 원제 때 당시 북방은 제족(諸族)이 할거(割據)하고 동진은 기우 강남(江南)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제는 안일만을 추구하고 국토 수복에는 뜻이 없었다. 《通鑑節要 晋紀 元皇帝》 /선조실록16/ 동진사(同進士) : 과거 등급의 하나. 고려 시대에는 과거에서 을과(乙科) 3인, 병과(丙科) 7인, 동진사(同進士) 23인, 합하여 33인을 자·오·묘·유년에 뽑았는데, 조선 정종 때 동진사를 고쳐서 정과(丁科)라 했다. 《高麗史 選擧志 燃藜室記述 政敎典敎》 /삼봉1-285/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 : 진사시의 제 4·5등급 제자의 호칭. 서 긍은 진사에 급제하지 못했으나 《고려도경》을 저술한 공을 기려 동진사출신의 자격을 준 것이다. 《宋史 卷一五五 選擧一》 /도경/ 동쪽 …… 가까웠어라 : 동쪽 마을은 월사의 집이 있는 곳을 가리키고 남쪽 교외는 현재 월사가 대명(待命)하고 있는 곳이다. 자극(紫極)은 명(明) 나라 천자의 대궐이고, 청양(靑陽)은 봄이다. 군신(君臣)의 만남을 풍운(風雲)의 제회(際會)라 한다. 즉 월사가 중국으로 가서 명 나라 천자를 만났고, 지금 우거하고 있는 교외에는 봄이 왔다는 뜻이다. 〔월사집〕 동쪽 …… 돌아오시길 : 도연명(陶淵明)의 음주시(飮酒詩)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하였다. 중양절(重陽節)에는 국화꽃을 따서 꽃잎을 술에 띄워 마시는 풍속이 있다. 〔월사집〕 동쪽 …… 뿐이네 : 동쪽 귀퉁이는 해가 뜨는 곳을 가리키며, 상유(桑楡)는 뽕나무와 느릅나무로 지는 해의 그림자가 뽕나무와 느릅나무 끝에 남아 있다 하여 해지는 곳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풍이전(馮異傳)>에 “동우(東隅)에서는 잃었으나, 상유에 수습한다. [失之東隅 收之桑楡]” 하였는 바, 이 말을 인용하여 이미 지난 세월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남은 세월을 잘 도모해야함을 말한 것이다. 동쪽 …… 효빈(效?)하노니 : 효빈은 월(越) 나라 미인 서시(西施)가 위장이 아파 얼굴을 찡그리면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는데, 동쪽에 살던 못생긴 여인이 이를 흉내내었던 데서 온 말로, 주제넘게 남의 흉내내는 것을 꼬집는 말이다. 여기서 ‘동쪽 집 사람’은 용재(容齋) 자신을, 윗 구절의 ‘큰 종’은 신영희를 가리킨다. 〔용재집〕 동쪽 산비탈 : 벼슬에 나가지 않고 물러나 있는 곳을 뜻한다. 《후한서(後漢書)》 주섭전(周燮傳) “선세(先世)로부터 훈총(勳寵)이 줄을 이었는데 그대만 어찌 유독 동쪽 산비탈[東岡]을 지키는가?”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월사집〕 동쪽 울 밑의 국화 : 4권 주 ‘동쪽 울 밑 국화’ 참조. 〔용재집〕 동쪽 울 밑의 국화꽃 : 17권 ‘동쪽 …… 돌아오시길’ 참조. 〔월사집〕 동쪽 울밑 국화 : 중구절에 국화꽃을 술에 띄워 마시는 풍속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잡시(雜詩)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하였다. 〔용재집〕 동쪽으로 청전(靑殿)에 돌아오는 날 : 입춘을 말한다. 사계절에 있어 동쪽은 봄에 해당되고, 청전(靑殿)은 제왕이 봄에 거처하는 궁전이다. 동창(東窓) : 송나라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무고하여 죽일 계획을 할 때에 자기 집 동창에서 안해와 비밀히 의논하였다하여 진회를 동창이라 하였다. /연려실기술5-259/ 동창지계(東窓之計) : 송(宋) 나라 진 회(秦檜)가 부인 왕씨와 동창에서 귤(橘)을 희롱하면서 악 비(岳飛) ㅈ구일 계획을 하였음. /대동6-356/ 동책(董策) : 한 나라 동중서(董仲舒)의 대책(對策). 무제(武帝) 때에 누차 대책(對策)을 올려 무제의 중망(重望)을 입은 일이 있음. 동척(銅尺) : 건초(建初) 동척의 원품(元品)에 “建初六年八月十五日造”라고 전예(篆隸)간의 문자로 명각(銘刻)된 것인데 옹 성원(翁星原)이 추사에게 진척(眞尺)의 척본(拓本)과 목척(木尺)의 척본 두 종을 기증하였음. /완당집3/ 동천(洞天) :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동부(洞府)의 이름이다. “대천(大天) 안에 36소(所)의 동부가 있으니 제일 왕옥산(第一王屋山)의 동부의 이름은 소유청허지천(小有淸虛之天)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에는 땅이 없는 것을 의심한다[擬無地]와 조그맣게 하늘이 있다.[小有天]의 대(對)가 됨으로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 /승람3/ 동천(洞天) : 산에 싸이고 내에 둘린 경치 좋은 곳. 또는 신선이 사는 세계. 동천(東遷) : 주(周) 나라 평왕(平王)이 도읍을 동쪽 낙읍(洛邑)으로 옮긴 것을 말함. /성호 7-218/ 동천(同天)의 수치 :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를 씻지 못한 수치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에 대한 것이다. 〔월사집〕 동추(?騶) : 말을 타고 높은 관원을 위해서 호령하며 벽제(?除)하는 길 인도자로, 붉은 옷과 붉은 모자를 착용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월사집〕 동춘(同春) :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호, 자는 명보(明甫), 관향은 은진(恩津)이다. 1624년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이 후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657년 이후 벼슬에 종사하여 찬선, 대사헌, 병조 판서,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동취(同臭) : 벗 사이에 한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난초의 향기와 같다[同心之言 其臭如蘭]는 것을 말함.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8장. 동취인(銅臭人) : 돈을 가지고 관작(官爵)을 사거나 돈 많은 사람을 기롱하는 칭호임. 추한 때 최 열(崔烈)이 돈을 가지고 벼슬을 샀는데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여 동치라고 칭했다. 《後漢書 卷五十二 崔?列傳》 /명종실록15/ 동타(銅駝)1 : 구리로 만든 낙타이다. 진(晉)나라 색정(索靖)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낙양궁문(洛陽宮門)에 있는 동타(銅駝)를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마침내 네가 가시덤불 속 속에 뒹굴고 있는 것을 보게 되겠구나.” 하였다 한다. 곧 국가의 멸망을 표상하는 상징물이다. 동타(銅駝)2 : 구리로 만든 낙타인데, 예전에는 서울 거리에 그런 낙타를 만들어 세웠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면 그 번화한 거리가 깨어진 기왓장만이 남았고 그 옆에 그 구리 낙타가 아직도 남아서 서 있다고 한 말이 있다. /승람3/ 동탁(董卓) : 동한(東漢)의 임조(臨?) 사람, 자는 중영(仲穎). 사납고 지모가 많았음. 영제(靈帝) 때 관직이 전장군(前將軍)이 되고 병주목사(幷州牧使)가 되었는데, 영제가 죽자 병사를 끌고 서울에 들어가 환관들을 죽이고 사태가 평정되자 스스로 상국이 되어 소제(少帝)를 폐위하고 하태후(何太后)를 시해한 뒤 헌제(獻帝)를 세웠음. 동탁이 당시에 음란하고 흉폭하여 그 해독이 조야에 미쳤는데, 원소(袁紹) 등이 병사를 일으켜 토벌하자 헌제를 끼고서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여 스스로 태사(太師)가 되어 찬탈하려는 뜻이 있었다. 후에 왕윤(王允)이 여포(呂布)를 끌어들여 이를 죽이게 한 다음 가산을 몰수하고 멸족시켰음. 《후한서》 102. 동파(東坡) : 송 나라의 문장가인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이고 동파(東坡)는 호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동파(東坡)를 …… 출발이리라 : 용재가 잠두에서의 놀이를 소동파의 적벽에서의 놀이에 비기어, 소동파의 넋을 불러 마음으로 함께 노니니, 오늘이 인생에 있어 새출발을 하듯이 즐겁다는 것이다. 〔용재집〕 동파(東坡)의 방법 : 동파 소식(蘇軾)이 말한 술 빚는 방법. 소식의 중산송료부(中山松?賦)에, “뽕나무 느릅나무에서 재료를 거두어 중산의 송료를 담근다.[收薄用於桑楡 製中山之松?]” 하였다. 〔용재집〕 동팔참(東八站) : 요동에서 탕참(湯站)까지에 이르는 여덟 곳의 역참으로 중국 동쪽에 있다고 하여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월사집〕 동평(東平)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여덟째 아들인 동평왕(東平王) 유창(劉蒼)을 가리킨다. 그는 경술(經術)을 좋아하고 지혜가 있었음. 명제(明帝)가 “일간에 동평왕이 집에 있으면서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라고 묻자, “선(善)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여기서는 풍산군이 왕실(王室)이므로 이에 비긴 것이다. 〔월사집〕 동평관(東平館) : 일본의 사자가 서울에 오면 묵게 하고 접대하는 관사(館舍). 한성부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었으며, 뒤에 이 근처를 왜관동(倭館洞)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때에 없어졌으므로 확실한 위치는 모르나 지금의 인현동(仁賢洞)·충무로(忠武路) 5가 사이쯤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평왕(東平王) : 한나라 광무황제의 여덟 째 아들 유창(劉蒼)인데, 광무황제가 집에 거처할 때에 무엇을 즐기느냐고 물으니,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제일 즐겁다고 대답하여 유명하다. /여지 1-321/ 동평왕(東平王) 창(蒼) : 후한 광무제(光武帝)의 여덟째 아들. 경술(經術)을 좋아하고 지혜가 있었음. 명제(明帝)가 조칙을 내려 “일간에 동평왕이 집에 있으면서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선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습니다.”라고 했다고 함. 시호는 헌(憲). 동평왕창(東平王蒼) : 성명은 유창(劉蒼)이요, 어머니는 광열왕후(光烈王后)이다. 광무제(光武帝)의 8째 아들이며, 명제(明帝)의 아우다. 젊어서 경사(經史)를 좋아하였고 본래 지혜가 많았으며, 공경(公卿)과 더불어 관면(冠冕)ㆍ거복(車服)에 대한 제도를 의정(議定)하게 하였다. 그리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낙이다[爲善最樂].” 하였으며, 광무제(光武帝)가 수명(受命)하자 중흥송(中興頌)을 지어 올렸는데, 그 문장이 전아(典雅)하였다. 시호를 헌(憲)이라 하였다. 동평위일기(東平尉日記) : 정재륜(鄭載崙)의 저서(著書). 《동평기문(東平記聞)》이라고도 한다. 정재륜은 효종(孝宗)의 사위로 자(字)는 수원(秀遠), 호는 죽헌(竹軒)이다. /성호3-103/ 동포전(洞布錢) : 대원군(大院君)이 섭정할 때 장정 한 사람에게 1녕에 2민(緡)씩 받아들이던 세금. ○ 甲子初 雲峴力任衆怨 移而均諸貴賤 一丁歲納二緡 謂之洞布錢 《梅泉野錄 卷之一上》 동표(銅標) : 동주(銅柱)와 같은 말이다. 12권 ‘일남(日南)의 …… 재주로세’ 참조. 〔월사집〕 동표(銅標)의 …… 마 정남(馬征南)이로세 : 마 정남은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가리킨다. 그가 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마원은 지금의 월남(越南)에 해당하는 교지국(交趾國)을 정벌하여 한(漢) 나라의 국경을 넓혔다.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 주(注)에, “마원(馬援)이 교지에 이르러 동주(銅柱)를 세워 한(漢) 나라의 국경으로 삼았다.” 하였다. 〔월사집〕 동필(?筆) : 대롱이 붉게 장식된 붓으로서 옛날에 여사(女史)가 이것을 잡고 궁중의 정령(政令)및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했다고 한다. 여자의 문필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동필(董筆) : 동필(董筆)은 동호필(董狐筆)의 약칭으로 사실을 숨김없이 바르게 쓴 춘추 시대 진(晋) 나라 사관(史官) 동호의 사필(史筆)을 말하는데, 고봉이 37세 때인 1563년 8월에 당시의 권신 이량(李樑)에게 미움을 사서 예문관(藝文館) 벼슬에서 체직되었음. 《高峯集 年譜》 /고봉집 2/ 동학사(董學士) : 조선 성종(成宗) 때 명(明) 나라로부터 사신 와서 우리 나라의 풍토를 읊은 조선부(朝鮮賦)라는 장편을 남긴 동월(董越)을 가리킨다. 〔용재집〕 동합(東閤)1 : 동각(東閣)과 같은 말로 동향의 작은 문이다. 한(漢) 나라 때 공손홍(恭孫弘)이 승상(丞相)이 되어서 동각을 열어 현사(賢士)를 초빙했던 것에서 유래한 말로, 재상이 어진 이를 초대하는 곳을 뜻한다. 〔월사집〕 동합(東閤)2 : 합은 작은 문, 동향은 정문(庭門)을 피해 빈객을 인접하여 요속과 구별하기 위한 것임. 동해(東海) : 후한 광무제(光武帝)의 맏아들. 시호는 공(恭)이고 동해왕(東海王)에 봉해졌음. 월산 대군(月山大君)이 덕종(德宗)의 맏아들임을 비유함. 동해(東海)의 효부(孝婦) : 전한 시대 사람. 젊어서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었으나 시어머니 봉양을 매우 잘했는데, 개가시키려고 해도 듣지 않았다. 그의 시어머니는 나이 늙어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스스로 목 메어 죽었는데, 그의 딸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죽었다고 고발하였다. 관원이 잡아갔는데 거짓 자복하자 사형하니, 온 고을이 3년을 가물었다. 다음 태수(太守)가 까닭을 알아내고서, 소를 잡아 그의 무덤에 제사하고 비를 세우니 큰 비가 내렸다. 《說苑 貴德》 /중종실록 52/ 동해공왕(東海恭王) : 후한(後漢), 유강(劉彊)의 봉시호(封諡號). 동해에 …… 없으리 : 큰 물결은 전란을 뜻한다. 후금(後金)의 침략이 그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감군을 위로한 것이다. 〔월사집〕 동해의 …… 따르고 : 노중련(魯仲連)은 전국시대 제(齊) 나라의 고사(高士)이다. 《사기(史記)》 18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노중련이 조(趙) 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 나라 군대가 조 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는데, 이 때 위(魏) 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 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 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 하니, 진 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후퇴시켰다 한다. 동해의 늙은이 : 강태공(姜太公) 여망(呂望). 주(周) 나라 동해(東海) 사람이므로 동해의 늙은이라 한 것이다. 본성은 강씨(姜氏)인데 그의 선대가 여(呂)에 봉해졌기 때문에 여상(呂尙)이라고 한다. 자는 자아(子牙), 노년에 위수(渭水)의 북쪽에서 낚시하며 은거하고 있었는데, 문왕(文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만나서 함께 이야기하고는 크게 기뻐하여 “우리 태공이 그대를 바란 지 오래이다.[吾太公望子久矣]”라고 했으므로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부른다. 문왕은 그를 수레에 태우고 함께 돌아와 스승으로 대우했다. 이 때의 나이가 여든이었는데, 여든까지 곤궁했다가 여든이 되어서야 영달했다고 하여 ‘궁팔십 달팔십(窮八十 達八十)이라는 말이 있다. 《史記》 권32. 동해의 파신(波臣) :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장주(莊周)가 수레 바퀴 자국을 돌아보니 붕어가 있었다. 장주가 묻기를 ‘붕어가 왔구나. 그대는 무엇을 하는 자인가?’ 하니 붕어가 대답하기를 ‘나는 동해(東海)의 파신(波臣)이다. 그대는 몇 말의 물로 나를 살려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기서는 월사 자신을 가리킨다. 〔월사집〕 동향(桐鄕) : 선조가 벼슬하던 곳. 한(漢) 나라 주읍(朱邑)이 젊었을 때 동향(桐鄕)의 색부(嗇夫)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자손이 그를 동향에 장사지내자 백성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든 일이 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일반적으로 고을원이 되어 은혜를 끼친 고을을 말한다. 《漢書》 五九. 동향대제(冬享大祭) : 겨울에 지내는 대제. 종묘(宗廟)에는 정월·4월·7월·10월 상순(上旬)에, 영녕전(永寧殿)에는 4월·7월 상순에, 사직(社稷)에는 2월·8월의 첫 무일(戊日)과 납일(臘日)에 제사한다. 《經國大典 禮典 祭禮》 /중종실록 51/ 동현(董賢) : 한(漢) 나라 운양인(雲陽人)으로 자(字)는 성경(聖卿). 애제(哀帝)의 총애를 받아 왕의 좌우에서 떠난 적이 없었으며 고안후(高安候)에 봉해졌음. 22세에 벼슬이 대사마(大司馬) 위장군(衛將軍)에 이르렀는데 애제가 죽가 왕 망(王莽)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돌아가서 자살(自殺)하였음. 《漢書 卷九十三》 /중종실록34/ 동호(董狐) : 동호는 춘추(春秋) 때 진(晉)의 사관(史官)인데, 진 영공(晉靈公)이 조돈(趙盾)을 죽이려 하자 조 돈이 도망갔었다. 조 천(趙穿)이 영공을 죽인 뒤에 조 돈이 돌아왔는데, 동 호는 사기에 ‘조 돈이 그 임금을 죽였다.’고 썼다. 그래서 조 돈이 자기가 죽이지 않았다고 하자 동 호는 ‘그대는 일국의 정경으로 도망을 하면서 국경을 넘지도 않았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토벌하지도 않았으니, 그대가 죽인 게 아니고 누구인가?’ 했다. 이 사건으로 공자는 ‘동 호는 훌륭한 사관이며, 조 돈은 훌륭한 대부다.’ 했음. 《左傳 宣公 二年》 /삼봉집1/ 동호(東湖) :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독서당(讀書堂)을 말한다. 세종조에 처음으로 독서당을 설치해서 시간을 주어 독서하게 한 다음 등용하였는데 당시에는 산사(山寺)에서 독서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동호(東湖)에다 독서당을 지었다. 작자 자신이 옛날 독서당에 있기 때문에 그 때를 회상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동호(東胡) : 중국의 소수 민족으로 흉노의 서쪽에 살고 있었다. 〔월사집〕 동호(董狐) : 춘추 시대 진(晋) 나라 사관으로서 직필로 사실을 기록하였음. 영공(靈公)이 조순(趙盾)을 죽이고자 함에 조순이 달아나다가 국경을 넘지 않아서 조천(趙穿)이 영공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조천을 토벌하지 않았는데, 동호가 “조순이 그 임금을 시해했다.[趙盾弑其君]”고 기록했음. 이에 공자가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관이다. 법대로 기록하여 숨기지 않았다.[董狐古之良史也 書法不隱]”고 말하였음. 《춘추좌전》 선공(宣公) 2년 조. 동호(?弧) → 동궁(?弓) 동호(東湖) …… 배 : 한강에서 유근의 유해(遺骸)를 운구하는 배이다. 〔월사집〕 동호(銅壺)에 …… 가물거리는데 : 동호는 구리로 만든 항아리로 물시계의 통을 이르며, 불등(佛燈)은 불사(佛寺)의 등불을 이른다. 동호(董狐)와 남위(南威) : 모두 춘추시대의 직필(直筆)로 유명한 사람임. 진(晉) 나라의 태사(太史) 동호가 조 순(趙盾)이 임금인 영공(靈公)을 시해한 일을 직필한 일이 있다. 《春秋左氏傳 宣公 二年》 남위는 제(齊) 나라의 사관(史官)인 남사(南史)를 말하는 것 같다. 제 나라 최 서(崔抒)가 그 임금을 시해하자 태사(太史)가 그 사실을 기록하니 죽였다. 그 아우가 또 이어 기록하니 죽였고, 셋째 아우가 기록하니 그대로 두었다. 남사는 태사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달려오다가 이미 기록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春秋左氏傳 襄公 二十五年》 /명종실록5/ 동혼후(東昏侯) : 남북조(南北朝) 시대 제(齊) 나라 제 5대 임금 소 보권(蕭寶卷)의 시호. /성호8-386/ 동홍(冬烘) : 겨울에 불 땐 듯이 뜨거운 것. 겨울에는 머리가 식어서 차야 할 텐데 그렇지 않고 뜨듯하다는 말로, 당(唐) 나라 정 훈(鄭薰)이 시험관이 되어, 안 표(顔標)를 안 진경(顔眞卿)의 후손인 줄로 잘못 알고 장원을 매겼다는 고사이다. 전(轉)하여 훈장(訓長)을 기롱하는 말로 쓰인다. /양촌집2/ 동홍선생(冬烘先生) : 모든 사물에 어두운 사람을 조롱하는 데 쓰이는 말로서, 주로 시골 서당방 고루한 훈장에 비유함. 당(唐) 나라 정 훈(鄭薰)이 시관(試官)이 되어 안표(顔標)를 안진경(顔眞卿)의 후예로 오인하여 장원을 시켰는데, 사람들이 조롱하기를 “시관의 두뇌가 너무 동홍(冬烘)하다.” 했음. /연행7-343/ 동화(東華)1 : 동화제군(東華帝君)의 약칭으로 신선인 동왕공(東王公)의 별칭이다. 동화(東華)2 : 본래는 천정(天庭)의 동쪽에 있는 별자리 이름인데, 대궐문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조정에서 벼슬하였음을 뜻한다. 〔월사집〕 동화(東華)3 : 조선(朝鮮)의 별칭이다. 동황(董黃) : 동사백(董思白)과 황대치(黃大癡)를 말함. /완당집3/ 동황(東皇) : 봄을 맡은 신(神). 《尙書緯》에 “봄에 동황이 되고 또 청제(靑帝)가 된다.” 하였다. /청장관전서 1/ 동황제(東皇帝)니 서황제(西皇帝) : 당시 일본의 천황은 자신을 해가 뜨는 나라의 황제라 칭하여 동황제라 하고, 중국 황제를 해가 지는 나라의 황제라 칭하여 서황제라 한 사실을 가리킴. 이는 일본국은 떠오르는 해처럼 장차 흥성할 나라이고 중국은 지는 해처럼 장차 쇠망할 나라라는 뜻을 내포하였음. /선조실록 8/ 동회(桐淮)의 옛 은거하던 곳 : 동(桐)은 동백산(桐柏山)이고 회(淮)는 회수(淮水)인 바, 한유는 동생행에서 “회수가 동백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멀리 흘러 천리를 쉬지 않는데 비수(?水)가 그 곁에서 나와 천리를 흘러가지 못하고 백리를 흐르다가 회수로 들어간다. 수주(壽州)의 속현(屬縣)에 안풍(安豊)이 있는데 안풍현의 사람인 동소남(董邵南)이 여기에 은거(隱居)하며 의로운 행실을 한다.” 하였다. 동효(動爻) : 효(爻)가 변동되는 것이니, 곧 양효(陽爻)는 음효(陰爻)로 되고 음효는 양효로 되는 것이며, 이에 따라 괘(卦)도 변함. /성호6-209/ 돛대의 까마귀 : 돛대 위에 까마귀 모양으로 만들어진 풍향계(風向計)로, 정처없는 생활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용재집〕 되 오랑캐 방비하느라 : 진시황이 점을 쳐서 ‘진(秦) 나라를 명망시킬 자는 누구인가’를 묻자, 점장이가 호(胡), 즉 북방의 오랑캐인 되라 하여, 이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한다. 〔용재집〕 두 …… 감돌리라 : 형수(荊樹)는 자형화(紫荊花)란 화초로 형제를 뜻하고, 훤당(萱堂)은 어머니를 뜻한다. 즉 형제의 무덤이 있는 곳에 나란히 묻혔고 죽어서도 넋이 어머니가 계신 곳을 찾아오리라는 뜻이다. 〔월사집〕 두 …… 마시라 : 6권 ‘푸른 눈길’ 참조. 여기서는 모두 반가운 사람끼리의 만남임을 말하였다. 〔용재집〕 두 …… 발탁되었고 : 두 깃발은 내직(內職)에서 ?겨 외임(外任)으로 나가는 일휘출수(一麾出守)를 두 번 당하였다는 뜻인 바, 곧 상대방이 두 번 연이어 지방 수령으로 나간 것을 이르는 것이다. 두 구슬 : 풍채와 재능이 매우 뛰어난 두 사람을 뜻하는 말로, 위에 보이는 손번(孫蕃)과 그 숙부 왕몽조(王夢祖)를 가리킨다. 〔월사집〕 두 귀를 …… 마시라 : 요(堯) 임금이 당대의 고사(高士)인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넘겨주겠다고 하자, 그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고 영수(潁水)의 물에 귀를 씻었다 한다.《莊子 逍遙遊》 여기서는 신선을 세계를 노래할지라도 세상을 버려서는 안 되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용재집〕 두 눈이 …… 보내는데 : 위(魏) 나라 혜강(?康)의 시 증수재입군(贈秀才入軍)에 “눈으로 멀리 돌아가는 기러기를 보내고 손으로 오현금을 뜯는다,[目送歸鴻 手揮五絃]”라 한 대목을 차용한 것으로, 매우 자적(自適)함을 뜻한다. 〔용재집〕 두 늙은이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형제를 가리킨다. 이들은 고죽국(孤竹國) 사람으로, 무왕(武王)의 은(殷) 나라 정벌을 만류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 죽었다 한다. 〔용재집〕 두 대(代)의 존장(尊章) : 존장은 남편의 부모로 곧 시부모를 이르는바, 두 대의 존장은 시조부모와 시부모를 가리킨다. 두 병마(病魔) : 고황(膏?)을 이르는 바, 고는 가슴 밑의 작은 비계이고 황은 가슴 위의 얇은 막(膜)인데 병이 이속에 들면 치료하지 못한다 한다. 두 섭(燮) : 바로 뒤에 나오는 정여섭(鄭汝燮)과 정군섭(鄭君燮)을 가리킨 것이다. 두 소씨(疏氏) :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의 명신(名臣) 소광(疏廣)과 조카 소수(疏受)를 말한다. 관직이 높아지고 명성이 널리 퍼졌으나,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라면서 이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천자(天子)는 황금 20근을, 태자는 50근을 각각 하사하였고, 공경대부(公卿大夫) 친구들은 동도문(東都門) 밖에서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었는데,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그들을 어진 대부라고 칭찬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漢書 卷71》 두 왕비 : 아황과 여영. 〔용재집〕 두 정자(程子) :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의 형제를 이른다. 두강(頭綱) : 차의 이름. 《北苑茶錄》에 “백차(白茶)와 승설(勝雪)은 경칩(驚蟄) 전에 따서 경사(京師)에 올라오므로 두강옥아(頭綱玉芽)라 일렀다.” 하였음. /완당집3/ 두건(斗建) : 농력(農曆)의 월건(月建). 옛날에 북두성의 운행으로 월령을 계산하였다. 북두성의 자루가 가리키는 별자리를 두건(斗建)이라 부름. 예를 들어 정월(正月)은 인(寅)을 가리켜서 건인(建寅)의 달을 만들고, 이월(二月)은 묘(卯)를 가리켜서 건묘(建卯)의 달을 만듦. 두건(頭巾) : 머리에 ㅆ는 건(巾)으로, 녹태책(鹿胎?)이라 하는 것인데, 4개의 띠가 달린 두건이다. /고려도경/ 두견(杜鵑) : 새 이름. 두우(杜宇)·자견(子鵑)·자규(子規)라고도 한다. 촉 왕 두우(杜宇)의 호(號)는 망제(望帝)니, 선위(禪位)하고 화하여 자규(子規)가 되었다 한다. 《太平實宇記》 《형초 세시(荊楚歲時記)에 “두견의 소리를 먼저 듣는 사람은 이별할 수가 생기고 그 소리를 흉내내면 피를 토하게 된다.” 하였다. /해행8-426/ 두곡(斗斛) : 한 말을 두(斗), 열 말을 곡(斛)이라고 하는데 본문에서는 바다와 같이 넓은 것에 비하여 적은 양이라는 것을 말함. 두곡(斗斛) : 한 말을 두(斗), 열 말을 곡(斛)이라고 함. 두공부(杜工部) : 당 나라의 시인 두보(杜甫)를 말한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많은 서적을 박람하고 시를 잘 지어 표현이 능란했으며 시국을 근심하고 당대의 사실을 잘 읊었으므로 그의 시를 시사(詩史)라고 일컫는다.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두공부라고 한다. 두공부(杜工部)의 우과소단시(雨過蘇端詩) : 두공부는 당나라의 시성(詩聖)인 두보(杜甫)를 가리키며, 우과소단시는 우중(雨中)에 소단이란 사람을 방문한 시이다. 두광국(竇廣國) : 자는 소군(小君) 봉호는 장무후(章武侯) 한(漢) 경제(景帝)의 외숙. 어릴 때 가난하여 남에게 팔려갔는데, 누이가 황후되었다는 것을 듣고 호소하여 형 장군(長君)과 같이 밭과 집을 하사 받아 장안에서 살았다. 주발(周勃) 등이, “출신이 미천하니 스승을 가려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여, 행검있는 선비를 가려 같이 지내게 하였는데, 둘다 겸양한 군자가 되어, 감히 부귀한 것으로 남에게 교만하지 않았다. /연6-195-20/ 두교(杜喬) : 후한 때 사람. 자는 숙영(叔榮). 순제 때 대사농(大司農)이 됨. 양기(梁冀)의 자제 다섯 사람 및 중상시(中常侍) 등이 공 없이 모두 봉작(封爵)된 일을 절간(切諫)하다가 참소를 받아 옥사함. 《後漢書 卷 63》 두구(杜句) : 두보(杜甫)의 시구(詩句). 두보의 시 <곡강(曲江)>에 “사람이 태어나서 일흔 살 사는 이가 드물다[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였다. 두구(荳?) : 약용 또는 조미료로 쓰이는 과실. 육두구(肉荳?) /연행10-311/ 두구(荳?)의·····이누나 : 두구는 육두구(肉荳?)라고도 하는 풀로 엷은 황색 꽃이 피고 열매는 약용으로 쓰인다. 중국의 남방 사람들은 이 풀의 꽃이 활짝 피지 않고 봉오리만 맺혀 있는 것을 함태화(含胎花)라 하여 어린 처녀가 아기를 밴 것에 비유한다. 이로 인하여 일반적으로 처녀에 비유된다. 두목(杜牧)의 증별시(贈別詩)에 “열세 살 남짓 예쁘고 아리따운 소녀. 두구 가지 끝에 이월 초순 찬 기운이라.[????十三餘 荳?梢頭二月初]” 하였다. 〔월사집〕 두궤(杜?) : 춘추 시대 진(晉) 나라 사람. 순영(荀盈)이 죽어 장례를 치르기 전에 평공(平公)이 술을 마셨는데, 두 궤가 밖으로부터 종고(鍾鼓) 소리를 듣고 들어와 옆에 있던 사 광(師曠), 이 조(李調) 등에게 술을 부어 주며 평공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고사가 있음. 《禮記 ?弓》 /연행11-452/ 두기(杜夔): 魏나라 河南 사람. 자 公良. 漢 靈帝 때 음악을 잘 알아 雅樂郞이 되었다. 劉表에 의지하다 나중에 魏나라로 들어가 軍謀祭酒가 되어 太樂의 일에 참여했으며, 비로소 雅樂을 창제하였다. 左延年 등이 비록 음악에 묘함이 있었으나, 正音을 잘하고 옛것을 좋아하는 것은 夔에 미치지 못하였다. 文帝가 항상 賓客함에 있어 그로 하여금 생황을 불고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였는데, 어려워하는 기색이 있자 속으로 좋아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나중에 축출되어 죽었다. 두남(斗南) : 북두(北斗) 이남이라는 말로서 천하를 뜻함. 당 나라 때 인인기(藺仁基)가 적인걸(狄仁傑)을 칭송하여 《적공의 어짊은 북두 이남에 한 사람 뿐이다.[狄公之賢 北斗以南 一人而已]》 라고 한 말이 있다. 《唐書》 <狄仁傑傳> 두남(斗南)에 으뜸 : 당(唐) 나라 인인기(藺仁基)가 적인걸(狄仁傑)을 두고 “적공(狄公)의 어짊은 두북(斗北) 이남에서 한 사람일 뿐이다.” 한 데서 온 말로 명성이 매우 높음을 뜻한다. 〔월사집〕 두담(斗膽) : 삼국시대 촉(蜀) 나라 장수 강유(姜維)가 죽었을 때 보니 담이 크기가 말통만하였다는 데서 온 말로 매우 담이 큼을 뜻한다. 《三國志 蜀志 姜維傳 裵松之注》 〔월사집〕 두도(杜?) : ?-315년. 자는 경문(景文), 촉군(蜀郡) 성도(成都) 사람으로, 서진(西晉)때 유민(流民)의 우두머리이다. 두도(竇滔) → 錦字 두두인(頭頭人) :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 두려운 …… 것을 : 승냥이와 범은 후금(後金)의 오랑캐를 가리킨다. 공자가 “말이 충성스럽고 미더우며[忠信] 행(行)이 돈독하고 공경스러우면 비록 만맥(蠻貊)과 같은 오랑캐 나라에서도 행할 수 있다.”고 한 말을 차용한 것이다. 《論語 衛靈公》 〔월사집〕 두로(杜老)의 기재(奇才) :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진 당(唐) 두보(杜甫)의 탁월한 시적(詩的) 재능을 말한다. 〔용재집〕 두로유한(杜老遺恨) : 두 보(杜甫)가 지도(地圖)를 보다가 지은 시에,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가지 못한 것을 한탄한 시가 있다. /해행5-547/ 두류(逗?) : 군법(軍法)에 두류죄(逗?罪)가 있는데 이것은 진격하여야 할 경우에 머뭇거려서 기회를 놓친 것을 군법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연려실기술16-4-190/ 두류산 …… 때문이리 : 두류산 단속사의 승려가 주었기 때문이라는 표면적인 뜻 외에도, ‘단속(斷俗)’이 뜻하는 바 속세를 끊은 곳에서 왔기 때문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용재집〕 두륙(杜陸) :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와 육유(陸游). 두륜산(頭輪頂) : 해남(海南)에 있음. /완당집3/ 두릉(杜陵) : 당(唐) 나라 때 시성(詩聖)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용재집〕 두릉(杜陵)과 위곡(韋曲) : 당(唐) 나라 때의 두 지명. 각기 두씨(杜氏)가 와 위씨(韋氏)가 세거(世居)한 곳으로서, 이 두 가문은 누대에 걸쳐 귀족이었음. 두릉(杜陵)은 …… 베고 : 폐에 병 든다는 것은 오늘날 당뇨병과 같은 소갈증(消渴症)을 앓아 늘 갈증을 느끼고 있음을 뜻한다. 두릉(杜陵)은 두보(杜甫)의 일족이 세거(世居)하던 곳으로 두보를 뜻한다. 두보의 반조(返照)에 “노쇠한 나이에 폐에 병이 들어 오직 베게를 높이 벤다.[衰年病肺唯高枕]” 하였는데, 《두시택풍당비해(杜詩澤風堂批解)》의 택당(澤堂)의 주(註)에 “폐의 기운을 가라앉혀야 하므로 베게를 높이 베는 것이다.” 하였다. 〔월사집〕 두모(杜母) : 후한(後漢)의 두시(杜詩)를 남양(南陽) 사람들이 어머니처럼 친애하여 부른 칭호이다. 그는 남양 태수가 되자 편리한 농기구를 제조하고 수리 시설을 다스리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자 남양 사람들이 《전에는 소부가 있더니 뒤에는 두모가 있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後漢書》 <杜詩傳>. 두목(頭目) : 군졸을 거느리는 우두머리. 여기서는 사신 행차에 수행하는 두목을 말하는 것인데, 요동(遼東)에서 차출되는 것이 상례이다. /중종실록42/ 두목(杜牧) : 당 나라 때의 시인. 자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 두보(杜甫)와 구별하여 소두(小杜)라고 부름. 두목이 장미를 두고 읊은 시가 있음. 두목(頭目) : 무역을 목적으로 따라온 중국상인. /명종실록2/ 두무악(頭無岳) : 남방 해변에서 해채(海採)를 생업으로 하는 제주인(濟州人). 이들은 조주(操舟)·잠수(潛水)에 능하였다. 두무악은 본디 한라산(漢拏山)의 이명(異名). ○ 漢拏在州南 一曰頭無岳 又云圓山 《世宗實錄 地理志 濟州牧》 ○ 訓鍊院都正邊處寧來啓曰 臣常啓 慶尙道船其便利不及於全羅道船遠甚 …… 本道觀察使李克墩賞按全羅道必知之 請令克墩同水使審視 且沿海頭無岳甚多 濟州漢拏山或名頭無岳 故俗稱濟州人爲頭無岳 …… 此輩善操舟 若用之以當倭賊 誠爲有益 《成宗實錄 二十三年二月己酉》 ○ 柳順汀啓曰 …… 頭無岳(卽?人) 以海採爲業船載妻子 滄海爲家 今因倭變 官拘其船 無以卿生 …… 其船輕快 國家可賴其用 海岸近處勿禁往來何如 《中宗實錄 五年六月己酉》 두발흑장(頭髮黑長) : 건(乾)은 오행(五行)의 금(金)에 속하고, 감(坎)은 오행의 수(水)에 속하여, 오행상생(五行相生) 법에 금은 수를 생하고, [金生水] 수는 방위로 북방, 오색(五色) 중 흑(黑)에 해당되므로 머리가 검게 자란다는 것이다. /오주16-134/ 두방(杜房) : 당 태종(唐太宗) 때의 명재상인 두여회(杜如晦)와 방현령(房玄齡)을 병칭이다. 〔월사집〕 두백(杜伯) : 두 백은 주 선왕(周宣王) 때의 대부로 죄 없이 피살되었는데, 뒤에 선왕이 사냥나갔다가 두 백이 활로 자기를 쏘는 변괴를 당하고는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주었다. 《國語 周語上》 두보(杜甫) : 당 나라의 시인.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많은 서적을 박람하고 시를 잘 지어 표현이 능란했으며 시국을 근심하고 당대의 사실을 잘 읊었으므로 시사(詩史)로 일컬어졌음. 두보(杜甫) : 안 녹산의 난에 두 보의 친구 방 관(房琯)은 전법(戰法)을 잘못 사용하여 크게 패하였고 또 식객으로 있던 동 정란(董廷蘭)이 방 관의 세력을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다가 법에 저촉되자 재상의 직에서 파면되었다. 이에 두 보가 상소하여 “죄가 가벼운데 대신을 파면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였는데, 황제가 노하여 두 보를 치죄토록 명하였고, 재상 장 호(張鎬)가 “만약 두 보를 죄로 다스리면 언로를 끊게 됩니다.” 하고, 설득하여 형벌을 면하였다. 《唐書 卷二百一 杜甫傳》 두보(杜甫)의 시 <곡강(曲江)>에 사람이 나서 일흔 살 사는 이가 드물다는 뜻으로 ‘人生七十古來稀’라고 읊은 구절이 있음. 두보(杜甫)의 시 <영회고적 5수(詠懷古跡五首)> 가운데 ‘搖落深知宋玉悲’로 시작하는 제2수에 ‘江山故宅空文藻’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인용한 말임. 두사(斗沙) : 남북조 시대 송(宋)나라 장수 단도제(檀道濟)가 군중에서 양식이 떨어졌는데, 적이 그 틈을 노릴까 염려하여, 군량이 새로 도착된 것처럼 꾸미노라고 밤에 모래를 말질[斗]하여 헤아리는 소리를 외쳐 적을 속였더니, 아침에 적들이 양식 더미가 쌓인 것을 보고는 퇴각 하였다. /대동 6-533/ 두사인(杜舍人) : 사인은 중서 사인(中書舍人)으로 당(唐)나라 때 두목(杜牧)이 일찍이 이 벼슬을 하였기 때문에 그를 지칭한 것이다. 두삼(竇參) : 당 나라 사람으로, 중서시랑 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를 지냈는데, 조정에서 당을 만들어서 탐장(貪臟)이 극심하여 집에 필백(匹帛)을 가득 쌓아두었다 함. 뒤에 조카인 두 신(竇申)의 일에 연좌되어 사사(賜死)되었음. /대동15-79/ 두성(斗星)·우성(牛星) : 두 별 이름으로 오(吳)·월(越) 지방의 분야(分野)에 해당한다. 유 신(庾信)의 애강남부(哀江南賦)에 “상수·한수에서 길이 나누어지니 두성·우성을 바라본다.” [路己分於湘漢 星猶望於斗牛] 하였다. /청장1-28/ 두소(斗?) : 두(斗)는 한 말[斗]. 소(?)는 한 말 두 되 들이의 죽기(竹器)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변변하지 못한 사람이란 뜻임. /세종실록11-28/ 두송(杜松) : 명말(明末)의 장군. 산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다가 청군(淸軍)과 싸워 전사했다. /여한188/ 두숭(斗嵩) : 북두(北斗)와 숭산(嵩山). 신하가 임금을 축수하는 말. 두십이(杜十姨) → 오자수(伍?鬚) : 양용수(楊用修)가 말하기를 “항주(杭州)에 두 습유의 묘(廟)가 있는데 촌(村) 학구가 두십이(杜十姨)라 쓰고 드디어 여상(女像)으로 만들어 유 령(劉伶)과 짝을 지었다.” 하였고, 또 무식한 자가 오자서를 오자수로 잘못 쓴 것을 말함. /완당집3/ 두씨(杜氏) : 두보(杜甫)를 말함. 두보가 일찍이 촉(蜀) 땅에 거처한 적이 있었는데, 검각(劍閣)은 촉(蜀) 땅으로 가는 길에 있는 대검(大劍)과 소검(小劍)을 말한다. 한 두씨(竇氏) : 후한 초기의 유명한 외척 일가인데 처음 두융(竇融)이 광 무제 때에 등용되기 시작한 후로 그 일가가 한조에 벼슬하였으며 그 중에도 장제(章帝)·환제(桓帝)의 황후가 모두 두씨이므로 두씨의 세력은 더욱 조정에 충만하게 되었음. /연산3-317-14/ 두씨통전(杜氏通典) : 두 우(杜佑)가 찬했음. 식화·선거·직관·예·악·병·형·변방의 8문으로 나누고, 위는 황제에게 당 나라 천보(天寶 : 당 현종의 연호 742~755)까지의 정전(政殿)을 기록했음. /성호7-87/ 두약(杜若) : 두약(杜若)은 창포의 일종으로 보라빛 꽃이 피는데 습한 땅에 생장한다. /승람4/ 두약(杜若) : 일명 두형(杜衡)으로 향초의 이름이다. 두억시니 막으니 : 순(舜) 임금이 사흉(四凶)을 유배시켜 사방의 변병으로 보내어 두억시니[?魅]를 막게 하였다 했다. 《左傳 文公 十八年》 여기서는 용재 자신이 귀양왔음을 나타내고 있다. 〔용재집〕 두억시니를 막고 : 순(舜) 임금이 사흉(四凶)을 유배시켜 사방의 변병으로 보내어 두억시니[?魅]를 막게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左傳 文公 十八年》 여기서는 용재 자신이 먼 변방으로 귀양왔음을 뜻하고 있다. 〔용재집〕 두여회(杜如晦) : 모두 당 태종(唐太宗)의 개국 공신. 방 현령은 모책을 잘 세웠고 두 여회는 결단을 잘 내렸으므로 방모 두단(房謀杜斷)이라 했다. 《舊唐書 卷 六十六 房玄齡杜如晦傳》 /중종실록 50/ 두예(杜預) : 진(晋) 나라 사람. 자는 원개(元凱). 박학하여 두루 통했다. 하남윤(何南尹)·진주자사(秦州刺史)를 역임하고 탁지 상서(度支尙書)에 이르렀으며, 군공(軍功)으로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졌다. 저서에는 《좌씨경전집해(左氏經傳集解)》·《석례(釋例)》·《춘추장력(春秋長曆)》 등이 있다. 《三國志十六·晋書三十四》 /오주연문16/ 두예벽(杜預癖) : 진(晋) 두원개(杜元凱). 그가 장군인 한편 학문이 깊었고, 특히 《좌전(左傳)》을 몹시 즐겨하여 스스로 《좌전벽》이 있다 하였다. /해행5-217/ 두우(杜佑) : 당 나라 사람. 자는 군경(君卿). 태보(太保)로 퇴직하였고, 유 질(劉秩)이 지은 《정전(政典) 35편에 2백 편을 더 보충하여 《통전(通典》이라고 이름하였음. /성호11-134/ 두우(斗牛) :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북방의 두성과 우성임. /고봉집2/ 두우(杜宇) : 주(周) 나라 말의 촉왕(蜀王)인 망제(望帝)의 이름. 죽어서 원혼이 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음. 그 울음 소리가 처절하여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시름을 자아내게 한다고 함. 자규(子規) 또는 촉혼(蜀魂)이라고 부르기도 함. 두우(斗牛) 사이의 기색(氣色) : 두우는 북두성과 견우성(牽牛星)이다. 조선에 와 있는 양 감군이 자신이 와 있는 곳을 은하수 가의 두우(斗牛)에 비긴 것이다. 위 주 ‘박망(博望)’ 참조. 〔월사집〕 두우성(斗牛星) : 진 나라 때에 장화(張華)가 천문(天文)을 보니 두성(斗星)과 우성(牛星) 사이에 이상한 기운이 쏘아 뻗치므로 그 기운이 생긴 곳을 찾아 땅 밑에서 보검(寶劍)을 파낸 일이 있는데 여기서는 충의(忠儀)에 죽은 사람의 기운을 말한다. /연려실기술15-4-28/ 두우성(斗牛星)을 보노니 : 두우성이란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으로 모두 북쪽에 있는 별로, 여기서는 임금이 있는 한양의 도성을 의미한다. 즉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용재집〕 두유전(竇攸傳) → 표서지변(豹鼠之辨) /오주17-56/ 두인(豆人) : 그림 속의 콩알 만한 사람이란 뜻으로,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의 형상을 일컫는 말이다. /청장2-252/ 두자(杜子) : 당(唐) 나라의 시인 두보(杜甫)를 말한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이다. 많은 서적을 박람하고 시를 잘 지어 표현이 능란했으며 시국을 근심하고 당대의 사실을 잘 읊었으므로 시사(詩史)로 일컬어졌다. 두목(杜牧)과 구별하여 노두(老杜)라고 한다. 《唐書》 二0一. 두자(杜子)는 …… 싶어했으니 : 두자는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의 검문(劒門)이란 시에, “내 장차 조물주를 죄책하고자 하노니, 첩첩 산들을 깍아내고 싶어라.[吾將罪眞宰 意欲?疊?]” 하였다. 〔용재집〕 두주(杜周) : 한 나라 두연(杜衍) 사람. 장탕(張湯)의 정위사(廷尉史)였음. 성품이 음흉하고 가혹하고 각박했으며 윗사람의 뜻을 살펴서 남을 모함하기를 잘 하였음. 《사기》 123. 두찬(杜撰) : 시문(詩文)이나 저술(著述) 등을 전고(典故)함도 없이 마음대로 기술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송(宋) 나라 때 두 묵(杜?)이 시를 짓는데, 거의가 율(律)에 맞지 않았으므로, 일이 격에 맞지 않는 것을 두찬이라고 하게 되었다 하기도 하고, 도가(道家)의 5천여 서적 중 《도덕경(道德經)》 2권을 빼고 나면 모두 두광정(杜光庭)이 지은 것으로 허탄(虛誕)한 소리가 많았으므로 두찬이라고 했다고도 하며, 또한 한(漢) 나라 때 전하(田何)는 《역경(易經)》에 능했는데, 그의 제자 두 능(杜陵)이 선생을 따라 두 전생(杜田生)이라고 비웃었던 것이 두원(杜園)으로 와전되고 다시 두찬으로 와전되었다고도 한다. /오주17-136/ 두초(斗?) : 역량이 작은 평범한 사람이란 뜻. 《論語 子路》에 공자가 “아, 두초인 사람을 어찌 헤아려 볼 것 있느냐? 한 데서 온 말. /중종실록 35/ 두초당의 …… 차운하다 : 두초당(杜草堂)은 당(唐) 나라의 시성(詩聖) 두보(杜甫)를 이르는데, 그의 시 <등악양루(登岳陽樓)>를 차운한 것이다. 두타(頭陀) : 범어(梵語) Dhuta의 음역(音譯). 번뇌(煩惱)를 떨쳐 버리고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탐착(貪着)을 떠난다는 뜻인데, 승려(僧侶)의 뜻으로도 쓰임. /연행6-470/ 두타행(頭陀行) : 두타는 범어 Dhuta의 음역인데 뜻으로 번역하면 번뇌의 티끌을 제거하여 의식주(衣食住) 등에 탐착하지 않고 청정한 자세로서 불도를 수행하는 것. 그러므로 두타행은 청정행(淸淨行)·고행(苦行)·난행(難行)의 뜻을 가졌으며 12두타행이 있다. 부처의 10대 제자 가운데 정법을 전부 받은 가섭존자(迦葉尊者)는 두타 제일로 유명하다. /동사 3-58/ 두탕호청사(杜蕩護淸司) : 연산 때 늙은 흥청(興淸)들이 말썽을 일으킬까봐 집을 마련하여 살게 하고 관리하던 곳. 《燕山君日記 十二年 六月 丁丑條條》 두통첩(?痛帖) : 장 욱의 초서 서간(書簡)으로 두통첩이 있음. /완당집3/ 두헌(竇憲)과 양기(梁冀) : 두헌은 후한 화제(和帝)의 어머니 두태후(竇太后)의 형이고 양기는 順帝의 황후인 梁皇后의 형인데 두사람이 모두 외척으로서 집권(執權) 전횡(專橫)하다가 斬刑당하였음. /연산5-456-26/ 두호지언(杜鎬之言) : 두 호는 송 나라 덕종(德宗)때 직학사(直學士)로 있었는데, 덕종이 두 호에게 묻기를, “‘하수에서는 그림이 나왔고 낙수에서는 글이 나왔다.’고 하니 어찌된 일인가?”하니, 두 호는 예사로 왕흠약(王欽若)의 말과 같이 “성인이 신도(神道)로써 교화를 베푼 것입니다.” 하매, 덕종이 봉선(封禪 : 천자가 하늘과 산천에 제사하는 것)하기로 결정하였다. 《宋朝綱目》 두회기렴(頭會箕斂) : 부세(賦稅)가 과중함을 이름. 漢書 진여전(陳餘傳)에 “두회기렴(頭會箕斂)으로 군비(軍備)를 장만하므로 재력이 고갈되라” 하였고 그 주에 “관리가 그 집에 당도하여 인두(人頭)로서 헤아려 곡식을 내게 해서 키로 거두어 간다는 뜻이다” 하였음. 두후(竇后) : 혹자가 “주 발(周勃)이 반역한다.”고 고발하여 치려 할 때, 두후가 “강후(絳侯 주 발)가 여씨(呂氏)를 칠 때 옥새를 가지고 북군(北軍)을 거느렸거늘, 그 때 반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이제 작은 고을에서 반하겠습니까?”하니, 문제(文帝)가 석방하였음. 《史記 絳侯世家》 /중종2-51/ 둑(纛) : 대가(大駕)나 군대의 행련 앞에 세우던 대장기(大將旗). 큰 창에 소의 꼬리를 달거나 또는 극(戟)에 삭모(?毛)를 달아서 만듦. /중종실록41/ 둑제(纛祭) : 대가(大駕)나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는 대장기(大將旗)에 지내는 군기제. 대체로 뚝섬(纛島)에서 지냈다. /중종실록 46/ 둔괘(遯卦) : 육십사괘의 하나로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에 산이 있는 상이라 한다. 양은 쇠하여 가고 음은 성하여 가므로 군자는 퇴피(退避)하되 점점 자라나는 음을 억제하는 것이 좋고, 소인은 점점 진출하며 뜻을 굳히는 뜻이 있다 한다. /선조실록19/ 둔사(遁辭) : 어떠한 일에 대하여 책임 또는 관계를 피하려는 말. 《맹자(孟子)》 공손추상(公孫丑上)에 “둔사에 그 궁(窮)함을 안다.” [遁辭 知其所窮] 하였다. /삼봉1-315/ 둔옹(遁翁) : 이 집(李集)의 별호. /삼봉95/ 둔전(屯田) : 지방에 주둔(駐屯)한 군대(軍隊)의 군량(軍糧)이나 관청의 경비에 쓰기 위하여 경작하는 전지(田地). /명종실록3/ 둔전(屯田)의 지구전 : 한(漢) 나라 조 충국(趙充國)이 흉노를 토벌할 때, 기병을 파하고 보병을 편성하여 요새지에 둔전을 일구어 지구전을 계획한 고사임. 《漢書 趙充國傳》 /중종실록 40/ 둔촌(遁村) : 이집(李集, 1314 - 1387)의 호. 고려말의 학자로서 자는 호연(浩然), 본관은 광주(廣州).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였음. 둘도 없는 …… 잃었다 : 국사(國士)는 나라의 훌륭한 선비로 오(吳)나라의 침공을 받고 죽은 관우(關羽)를 가리킨 것이다. 뒷날 …… 터이니 : 안석(安石)은 동진(東晉) 중기의 명신(名臣)인 사안(謝安)의 자(字)로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그는 동산(東山)에 은거하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비로소 벼슬길에 비로소 벼슬길에 나가 외적(外敵)을 물리치고 내정(內政)을 닦는데 탁월한 공을 세워 벼슬이 태보(太保)에 이르렀다. 여기서는 김안로가 훗날 사안과 같은 나라의 기둥이 될 무거운 짐을 떠맡을 것이 하였다. 〔용재집〕 드넓은 …… 통하나니 : 저수지의 물을 수로(水路)를 통해서 논으로 보내는 것이다. 〔월사집〕 드높은 …… 서성였지 : 희락당(希樂堂) 김안로(金安老)가 부쳐보낸 시의 높은 풍격(風格)에 화운하기 위하여 고심한다는 것이다. 〔용재집〕 드문 …… 거문고로세 : 《도덕경》 41장(章)에, “큰 음은 소리가 드물다.[大音希聲]” 하였다. 〔용재집〕 득룡망촉(得龍望蜀) : 사람의 탐욕(貪慾)이란 채우면 채울수록 더하는 것으로서 물릴 줄 모른다는 뜻임.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가 농서(?西)의 외 효(??)를 격파하고 촉(蜀)의 공손 술(公孫述)을 격파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점령지인 영천(穎川) 지방에서 도적떼가 일어나자, 광무는 자기가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을 한탄하여 한 말임. 《後漢書》 득상(得喪) · 영욕 : 부귀 빈천을 두고 말한 것이다. 득수(得水) : 풍수지리에서 쓰는 말로 산속에서 나와 산속으로 흐르는 물을 일컬어 묘지에서 보아 흘러 들어오는 것을 得水라 하고 흘러 나가는 것을 破水라 함. /연1-49-23/ 득신(得臣) : 노 나라 대부 숙손득신(叔孫得臣), 환공(桓公)의 증손이고 시호는 장숙(莊叔). 문공(文公)의 장례에 제 나라에서 와준 것에 대해 사례하기 위하여 제 나라에 사신으로 갔음. 《左傳 文公 十有八年》. 득실(得失) : 《대학》 원문에 보이는 “강고(康誥)에 이르기를 ‘천명(天命)은 일정하지 않다.’ 하였으니, 선(善)하면 얻고[得] 선하지 못하면 잃음[失]을 말한 것이다.”라고 한 대목을 가리킨다. 〔월사집〕 득실(得失)의 증험(證驗) : 번잡한 것의 잘못[失]과 통창한 것의 옳음[得]을 여기서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득실장단(得失長短) : 동보의 득실장단. 보보가 의외의 화를 만나 항상 원한과 불평의기가 있어 종종 언사에 말하기 때문에 글머리에 경계하여 말하기를, “세간 영췌 득실이 본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다.”하고 여기서 또 이로써 충고하는 것이다. 득양(得養)·실양(失養), 조존(操存)·사망(捨亡) : 《孟子 告子上 牛山章》에 잘 기르면[得養] 자라지 않는 물건이 없고, 잘못 기르면[失養] 사그라지지 않는 물건이 없다는 말과, 마음을 잡으면 보존되고[操存] 놓으면 없어진다[捨亡]는 말을 가리킨다. /고봉집/ 득자하풍자(得佐下風者) : 구령의 막속자(?屬者)가 됨. 득차기력(得此氣力) : 선가의 작세 용력하는 기력. 듣자니 …… 남았었다지 :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에 “안기선생(安期先生)은 낭야(琅?) 부향(阜鄕) 사람으로 동해 가에서 약을 팔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천세옹(千歲翁)이라 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이 동쪽으로 노닐다 만나서 사흘 밤낮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금은 보화를 주었으나, 모두 그대로 남겨 두었으며, 한 통의 편지와 한 쌍의 붉은 옥으로 만든 신발[赤玉?]을 남겨 두었는데 그 편지에 ”몇 해 뒤 봉래산에서 나를 찾으라.“ 하였다. 이에 진시황이 서시(徐市) 등을 시켜 동남 동녀(童男童女) 수백 명을 데리고 동해에 배를 띄워 봉래산을 찾아가게 하였다.” 하였다. 〔월사집〕 들보에 비친 달빛 :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두보(杜甫)가 두보(杜甫)가 이백(李白)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인 몽이백(夢李白)에 “지는 해가 들보에 가득 비치니 오히려 그대의 안색을 보는 듯해라[落月滿屋梁 猶疑見顔色]” 하였다. 〔용재집〕 들보에는 달빛만 몽롱하리라 :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두보(杜甫)가 이백(李白)을 그리워하며 지은 몽이백(夢李白)에 “지는 해가 들보에 가득 비치니 오히려 그대의 안색을 보는 듯해라[落月滿屋梁 猶疑見顔色]” 한 데서 유래한다. 《古文眞寶前集》 〔월사집〕 들보의 먼지 날린다 : 소리가 매우 맑고 애절함을 뜻한다. 한(漢) 나라 때 노(魯) 땅의 사람 우공(虞公)이란 이가 노래를 매우 불렀는데 그가 소리를 내면 매우 맑고도 애절하여 들보의 먼지가 움직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太平御覽 57권》 〔월사집〕 들으니 …… 촉망되었네 : 오성(鰲城)은 경주(慶州)의 별칭이며 탄복랑(坦腹郞)은 배를 드러낸 사람으로 남의 사위를 일컫는 바, 옛날 진(晉)나라의 치감(?鑒)이 사윗감을 구하기 위하여 왕도(王導)의 집안에 가서 왕씨의 자제들을 간선(看善)하였는데 딴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간택되기 위하여 몸가짐을 조심하였으나 왕희지(王羲之)만은 홀로 배를 드러내고 방약무인(傍若無人)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본 치감은 왕희지를 사윗감으로 선택한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암랑(巖廊)은 조정(朝廷)을 이른다. 등 뒤에 물을 둔 陣法이니 물러서면 물에 빠져 죽는 수밖에 없으므로 기를 쓰고 살 길을 찾게 될 것을 이용한 것. 등(等) : 죄벌(罪罰)의 등급. 《대명률(大明律)》의 장형(杖刑)을 예로 들면, 장(杖) 60부터 10단위씩 더하여 장 1백까지의 5등이 있는데, 장 1백을 2등 감한다면 장 80이 된다./중종3-232/ 등(藤) …… 깨었어라 : 송(宋) 나라 진관(秦觀)은 자가 소유(少游)이다. 그가 처주(處州)에 좌천되어 있을 때 꿈 속에서 지은 장단구(長短句)에 “술 취해 등 나무 그늘 아래 누웠노라니 동서남북 방위를 도무지 모를레라.[醉臥古藤陰下 了不知南北]”이란 구절이 있었는데 그 후 등주(藤州)에 머물 때 광화정(光華亭)에서 취해서 자다가 일어나 옥 사발로 샘물을 떠서 마시고는 웃으면서 죽었다 한다. 즉 꿈 속의 등 나무가 등주를 뜻했던 것이다. 《冷齋夜話》 덧없는 인생살이가 미리 운명으로 정해져 있음을 뜻한다. 〔월사집〕 등가(登歌) : 고대(古代)에 거행했던 제전(祭典). 궁중 연례(宴禮)나 제향(祭享)때에 당상(堂上)에 악기를 배설하고 조종(祖宗)의 공덕(功德)을 노래하는 악(樂). 등가(登哥)라고도 함. /세종실록27/ 등가(鄧家) : 임금의 외가. 후한의 화희(和熹) 등항후(鄧皇后)의 친정이 등씨였으므로 일컫는 말이 아니가 생각됨. 등거(登車) : 동한(東漢) 사람 범 방(范滂)이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기주(冀州)의 도적들을 평정하러 떠날 때 수레에 올라 개연히 천하를 깨끗하게 할 뜻을 가졌었다 함. 《後漢書 卷六十七黨錮列傳》 /삼봉1-158/ 등공(藤公) : ① 계포(季布)가 초(楚)나라 항적(項籍)의 장수가 되어 자주 한 고조(漢高祖)를 괴롭혔는데, 항 적이 멸망하자, 고조는 계포를 잡기 위해 천금(千金)을 현상금으로 내 걸고서, ‘만약 집에 숨기는 이가 있으면 3족(族)을 죄하리라’ 하였다. 등공(藤公)이 계포를 숨겨두고 있는 주씨(朱氏)의 말대로 한 고조에게 계포의 사면을 말하니, 고조가 계포를 사면(赦免)하고 불러서 낭중(郎中)에 제배[拜]하였다. 《通鑑節要 卷五》 /여한십가문초/ ② 하후 영(夏侯?)을 이름. 하후 영이 등령봉거(?令奉車)가 되었으므로 등공이라 칭했음. 한 신이 항 우에게서 도망하여 한왕(漢王)에게로 갔으나 별로 쓰임이 되지 못하고 법에 걸려 참형을 받게 되었는데, 등공은 그를 기이하게 여겨 석방하고 한왕에게 말하여 치속도위(治粟都尉)를 시켰음. /성호사설7/ 등관(鄧?) : 등 관은 송 신종(宋神宗) 때 사람으로 왕 안석에게 아부하여 집현전 교리가 되었는데, 도성에 와 있던 고향 사람들이 그를 비웃고 꾸짖으니, 등 관이 말하기를 “비웃고 꾸짖는 일은 너희들 멋대로 하라. 좋은 벼슬은 내가 하겠다. ” 하였다. 《宋史 卷三百二十九 鄧?傳》 등나무 …… 것 : 송(宋) 나라 진관(秦觀)은 자가 소유(少游)이다. 그가 처주(處州)에 좌천되어 있을 때 꿈 속에서 지은 장단구(長短句)에 “술 취해 등 나무 그늘 아래 누웠노라니 동서남북 방위를 도무지 모를레라.[醉臥古藤陰下 了不知南北]”이란 구절이 있었는데 그 후 등주(藤州)에 머물 때 광화정(光華亭)에서 취해서 자다가 일어나 옥 사발로 샘물을 떠서 마시고는 웃으면서 죽었다 한다. 즉 꿈 속의 등 나무가 등주를 뜻했던 것이다. 《冷齋夜話》 〔월사집〕 등단(登壇) : 대장이 됨을 말함. /경세3-443/ 등도(?道) : 돌로 쌓아 올려서 만든 길. 석단(石段) /연행5-358/ 등돈(??) : 돌을 쌓아 올려 앉을 수 있도록 위가 편편하게 된 곳. /연행5-3382/ 등록(謄錄) : 과거에 필적(筆跡)에 의한 부정을 막기 위해서 시권(試券)을 다른 사람에게 쓰게 하는 것. /성호4-240/ 등롱금(燈籠錦) : 중국 촉(蜀) 지방에서 생산되는 최고급의 비단으로, 금(金)으로 등롱(燈籠) 무늬를 넣어 짠 비단임. 송(宋) 나라 인종(仁宗) 때, 문언박(文彦博)이 촉(蜀)의 장관이 되어 등롱금을 짜서 인종의 총희(寵姬)인 장귀인(張貴人)에게 환관(宦官)을 통하여 바치고 집정(執政)이 되었다 한다. 《宋史 卷三百十六 唐介傳, 宋明臣言行錄》 /명종실록 14/ 등룡(登龍) : 후한(後漢)의 이응(李膺)은 자가 원례(元禮)인데, 선비들이 그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명성이 높아지므로 그의 접대를 받는 것을 등용문(登龍門), 즉 용문(龍門)에 오른다 하였다. 《後漢書 李應傳》 여기서는 중국 사신을 모신 주연(酒筵)에 참석한 것을 가리킨다. 〔월사집〕 등루(登樓)를 읊으리요 : ‘차마 고향 생각을 노래할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왕찬(王粲)이 형주 자사(荊州刺史)의 유표(劉表)의 식객으로 있을 때 성루(城樓) 위에 올라가 울울한 마음으로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등루부(登樓賦)에 “참으로 아름답지만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잠시인들 머물 수 있으리요.[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 하였다는 고사를 차용하였다. 〔월사집〕 등륙(?六) : 눈〔雪〕의 신(神)이라 한다. 등림(鄧林) : 훌륭한 인재가 나는 곳을 뜻한다. 도림(桃林)인데, 중국의 전설에 과보(?父)라는 선인(仙人)이 해를 ?아 가다가 목이 갈해서 죽을 때 지팡이를 던지매 등림이 이룩되었다 한다. /열하1-216/ 등문(登門) : 등용문(登龍門)의 준말. 13권 ‘등용(登龍)’ 참조. 〔월사집〕 등문객 : 등용문객(登龍門客). 고봉의 인정과 추천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말함. 《後漢書 卷六十七 李膺傳》에 “이응의 명망이 높아 그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을 세상에서는 용문에 올랐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고봉집2/ 등문고(登聞鼓) : 백성이 임금에게 무엇을 간하거나 또는 자기의 원정을 호소하려 할 때 쳐서 이를 알리게 할 목적으로 조정(朝廷)에 달아 두었다는 북. 신문고(申聞鼓)의 별칭. /성호7-157/ 등백도(鄧伯道) : 진(晉) 나라 등유(鄧攸)로 백도는 그의 자(字)인 바, 등유가 하동 태수(河東太守)로 있을 때에 석륵(石勒)의 난을 만나 아내와 함께 자기의 자식과 동생의 자식을 데리고 도망하다가 여러 차례 도적을 만나자 둘 모두 보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식을 버리고 조카를 살렸는데, 뒤에 벼슬이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으나 끝내 후사가 없었다고 한다. 《晉書》〈鄧攸傳〉 등봉(登封)의 일 : 등봉은 태산에 올라 봉선(封禪)하는 것으로, 제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일을 뜻한다. 〔월사집〕 등분(等分) : 녹봉을 지급하는 분기(分期). 석 달씩 나누어 춘등(春等)·하등(夏等)·추등(秋等)·동등(冬等)으로 구분하다. /중종실록46/ 등사(騰蛇): 운무(雲霧)를 일으키며 몸을 감추고 난다는 뱀. 등사성(騰蛇星) : 별이름. 등사(騰蛇) 22성(星)은 영실성(營室星) 북녘에 위치해 있는데 천사(天蛇)이다. 수충(水蟲)을 주관(主管)하며 나라의 태평을 암암리에 돕는다. 그 별이 남쪽으로 옮아가면 크게 가물고 북쪽으로 옮아가면 큰 물이 진다고 함. 《晋書 天文志》 /중종실록37/ 등산(登山) : 원제목은 ‘산을 오르며 시를 짓다. 경부의 시에 차운하다.[登山有作 次敬夫韻]’이다. 〔용재집〕 등산하는 나막신 : 등산극(登山?). 2권 ‘종성(宗聖)이 교자(轎子)를 선물한 데 답례하다’ 주(註) ‘나막신’ 참조. 〔용재집〕 등시(燈市) : 옛날 정월 보름날에 등불놀이를 했는데, 그 때가 오면 수일 전부터 각 점포에서 여러 가지 빛깔의 화등(花燈)을 교묘하게 만들어 현란하게 달아 놓으면 손님들이 구름처럼 모여 그것을 사갔다. 그래서 이것을 ‘등시’라 했다. /연행11-363/ 등영(登瀛) : 등영주(登瀛洲)의 준말. 영주는 전설상의 선산(仙山). 선비가 군주의 총영(寵榮)을 얻은 것이 마치 선개에 오른 것같다는 비유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태자로 있을 때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 등 18인을 학사(學士)로 삼아 정사를 자문하자, 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여 영주에 올랐다고 말했다 함. 《新唐書 卷二百二 ?亮傳》 /고봉집/ 등영주(登瀛洲) : 신선의 사는 곳인 영주산(瀛洲山)에 올랐다는 뜻으로 매우 영광스러운 일에 비유된다. 당 태종(唐太宗)이 문학관(文學館)을 열어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등 열여덟 명을 뽑아 특별히 우대하고 번(番)을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숙직하며 경전을 토론하게 하였는데, 이를 세상 사람들이 등영주(登瀛州)라 하여 영광으로 여겼다. 《資治通鑑 唐高祖武德四年》 〔월사집〕 등왕(?王) : 唐나라 高宗의 아들 元?. ?王에 봉해졌던 까닭으로 일컫는 말임. 등왕각(?王閣) : 중국의 강서(江西) 남창(南昌)에 있는 정자. 당나라 고종(高宗)의 아들 원영(元?)이 강주자사(江州刺史)로 있으면서 이 누각을 세웠는데 당시에 등왕에 봉해졌던 까닭으로 등왕각이라고 일컬음. 당의 문학가 왕발(王勃)이 등왕각에서 열리는 문회(文會)에 닿기가 어려웠을 때 바람이 배를 휘몰아서 마당(馬當)에서부터 남창(南昌)까지 하루에 도달하여, 《등왕각시서(?王閣詩序)》를 짓고서 이름을 드날렸다. 등왕각(?王閣)에서 …… 이으리요 : 중국 사신의 훌륭한 싯구를 이어서 지을 사람이 누구이겠느냐는 뜻이다. 앞의 주 ‘안개와 …… 몫이로세’ 참조. 〔월사집〕 등용문(登龍門) : 용문산(龍門山) 밑에 있는 큰 여울, 강해(江海)의 고기들이 그 아래 모여 여울을 뛰어오르면 용(龍)이 된다 함. 《三秦記》. 과거(科擧)에 장원급제함을 뜻함. /해행5-187/ 등우(鄧禹) → 구순(寇恂) 등유(鄧攸) → 백도(伯道) /삼봉1-160/ 등을 …… 같네 : 《사기》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효문황제(孝文皇帝)가 우승상(右丞相) 주발(周勃)에게 천하에 한해 전곡(錢穀)의 출입이 얼마인지를 물었는데, 주발이 대답하지 못하고 땀이 나서 등을 적신 사실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다만 이를 차용하여 날씨가 매우 더워 등에 땀이 남을 형용한 것이다. 등자(?子) : 예전에 지방의 원님으로 민치를 잘 한 사람은, 갈려고하는 날에 백성들이 가지 말고 우리 고을에 더 있어 달라고 떼로 모여와서 붙잡는다. 그 때에 수레에도 매달리고 말에도 매달려서 말등자가 끊긴다는 말이다. /승람 4/ 등자경(?子京) : 송 나라 사람. 인종(仁宗) 때인 경력(慶曆) 4년(1044)에 파릉(巴陵) 군수로 나가서 이듬해 악양루(岳陽樓)를 중수했음. 악양루의 아름다운 광경은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있음. 등자경(?子京) : 이름은 종량(宗諒), 하남(河南) 사람. 범중엄과 동년에 진사가 됨. 중엄이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자기의 후임으로 천거하였으나 공전(公錢)을 유용한 죄로 탄핵을 받았는데 중엄이 극력 구제하여 강(降) 일등에 그치게 하니 유사(有事)시에 그 재능을 쓰기 위함이다. 등장(等狀) : 관청에 연명으로 하소연 하는 것을 말한다. 등재(鄧梓)와 예장(豫樟) : 등재는 등림(鄧林)의 가래나무로 등림은 전설속에 나오는 큰 숲이라 하며 가래나무는 좋은 재목이다. 예장은 예장(豫章)으로도 쓰는 바, 예(豫)는 침(枕)나무이고 장(樟)은 장나무로 역시 좋은 재목인데 사람의 뛰어난 재질(材質)과 기국(器局)을 비유한다. 등제계본(等第啓本) : 매년 가을 각도에서 그해 농사의 작황을 9등급으로 사정해서 호조(戶曹)를 통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감사의 장계이다. /영종실록14/ 등준(登俊) : 등준시(登俊試). 조선조 세조(世祖) 때 특별히 베푼 인재 등용의 제도로서 경재(卿宰) 이하의 문관을 시험한 과거의 종류. 등준시(登俊試) : 임시로 보이던 과거(科擧). 세조(世祖) 12년(1466) 7월에 임금이 친히 제목을 정하고 신숙주(申叔舟)·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 등을 불러 종친(宗親)과 문신 중에서 자원하여 응시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종친부시(宗親赴試)의 시초였다. 그 뒤 10월에 무과 등준시를 실시하여 최적(崔適) 등 많은 인재를 선발하였다. /중종10-206/ 등준시(登俊試)와 발영시(拔英試) : 등준시는 세조(世祖) 때 특별히 재상(宰相) 이하의 문관을 시험하기 위하여 설치한 과거로 등준과(登俊科)를 말함. 발영시는 세조 때 임시로 베푼 과거로 세조 12년(1466) 단오절에 종친과 문무 백관을 모아 술을 내리고 글을 지어 그 중 뛰어난 자를 선발하였음. /중종실록39/ 등통(鄧通) : 등 통은 한 문제의 총신(寵臣). 그가 일찍이 문제의 종기를 입으로 빨았는데 문제가 좋지 않아 하면서 묻기를 “세상에서 누가 나를 제일 사랑하겠는가?” 하자 등통은 태자라고 말했다. 그래서 문제는 태자를 불러 종기를 빨라고 했더니, 태자는 어렵게 여겼다. 문제가 죽고 태자가 즉위하자, 이 일로 미움을 받아 굶어 죽게 되었다. 《史記 卷一百二十五 ?幸列傳》 /삼봉2-144/ 등통(鄧通) : 전한(前漢) 남안(南安)사람으로 문제(文帝)에게 총애를 받아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으며, 촉(蜀)땅의 동산(銅山)을 사하받고 동산에서 생산되는 구리로 돈을 주조하여 큰 부자가 되었으나, 문제가 죽고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죄를 받고 재산이 적몰(籍沒)되어 끝내 굶어죽었다. 《사기》 <영행열전(?幸列傳)>. 등파(藤婆) : 죽부인(竹婦人)의 일종. /완당집 3/ 등패(藤牌) : 등나무 줄기로 엮어 만든 방패. 또 이것과 길이 3척 2촌의 칼 또는 길이 7척의 표창을 함께 써서 적을 치고 막는 무예. /만기2/ 등항성(登降城) : 풍기에 있는 성 이름이다. 전설엔 고려 태조가 남정(南征)할 때 여기서 머문 지 7일 만에 백제의 항복 문서가 도착하여 이렇게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萬機要覽》 등황(謄黃) : 천자(天子)의 조서(詔書)를 뜻함. 천자의 조서가 내리면 행당 성(省)의 독무(督撫)가 누런 종이에 등서하여 소속 주현(州縣)에 반포한 데서 생긴 말. 《淸會典事例》 /중종실록42/ 등후(鄧后) : 마후(馬后)는 후한 명제(後漢明帝)의 황후(皇后)인 명덕황후(明德皇后) 마씨(馬氏)로, 마원(馬援)의 딸. 후궁(後宮) 중에서 덕이 으뜸이었고 사가(私家)의 일을 조정에 요구하지 않았으며 황후가 된 뒤에도 검소한 복장을 착용하였다. 《後漢書 明德馬皇后妃》 등후(鄧后)는 후한 화제(後漢和帝)의 황후(皇后)인 등씨(鄧氏). 우(禹)의 손녀, 훈(訓)의 딸. 화제가 승하한 뒤에 상제(?帝)와 안제(安帝)를 차례로 세웠는데, 태후(太后)로서 20여 년 동안 임조(臨朝)하면서 덕정(德政)이 많았다. 《後漢書 卷十上》 /명종실록15/ 등후(鄧侯)의 영화 : 등후는 후한(後漢) 때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를 도와 천하를 평정한 등우(鄧禹)를 가리킨다. 그는 젊은 나이에 천하를 평정하고 재상인 사도(司徒)가 되었으며 고밀후(高密侯)에 봉해졌으므로 말한 것이다. 등훈석구지책(鄧訓石臼之策) :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사람인데 호타하(??河)와 석구하(石臼河)의 수로(水路)를 수리하여 곡식을 수송하자는 계획. /성호5-130/ 등희(燈戱) : 해전은 북경성 내성 서직문(西直門)밖에 있는 지명(地名)으로, 이 곳에 창춘원(暢春園)·이화원(?和園)·원명원(圓明園)이 있음. 등희는 등절(燈節)의 놀이인데, 민간에서는 정월 13일부터 17일까지 사이에, 거리에 깁·유리 따위로 채식(彩飾)한 등롱(燈籠)을 벌여 달고, 고금의 고사(故事)를 그린 그림이나 공작(工作)한 소품(小品) 등을 늘어 놓아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는 따위 놀이를 한다. 《畿輔通志》 《燕京歲時記 燈節》 원명원에 황제가 거둥하여 벌이는 등희에 관한 기사는 1월 13일기에 보임. /연행 6/ 따스한 …… 마시고 : 눈 내리는 날 부유한 집안의 호사로운 풍류를 뜻한다. 소금장(銷金帳)은 금색 실을 넣어서 짠 정교한 휘장이다. 고아주(羔兒酒)는 일명 양고주(羊羔酒)로 이름난 미주(美酒)이다. 원(元) 나라 송백인(宋伯仁)의 《주소사(酒小史)》에 “산서(山西)에는 양고주이다.” 하였다. 송(宋) 나라 황도풍월주인(皇都風月主人)의 《녹창신화(綠窓新話)》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도곡(陶穀)이란 학사(學士)가 당 태위(黨太尉) 집에 있었던 기생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눈 녹인 물로 차를 끓이면서 “당 태위 집에는 이러한 풍류를 몰랐겠지?” 하자, 그 기생이 대답하기를 “그는 거친 사람이니, 어찌 이러한 풍류가 있겠습니까. 다만 따뜻한 소금장 안에서 가기(歌妓)의 노래를 들으며 양고주를 마실 줄 알 뿐입니다.” 하니, 도곡이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월사집〕 따스한 봄볕 흰 눈 : 양춘백설가(陽春白雪歌)을 뜻하는 바,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이란 글에서 그 고사가 보인다. 어떤 사람이 영중(?中)에서 처음에 하리파인(下里巴人)이란 노래를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양아해로(陽阿?露)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고 양춘백설가(陽春百雪歌)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곡조가 더욱 높을 수록 그에 화답하는 사람이 더욱 적었다. 《文選 四十五卷》 여기서는 격조 높은 시를 뜻한다. 〔용재집〕 땀이 나고 손가락에 피가 흘렀는데 : 한유(韓愈)의 〈제유자후문(祭柳子厚文)〉에, “서투른 목수가 나무를 깎으면 손가락에 피가 흐르고 얼굴에 땀이 나는데, 뛰어난 목수는 곁에서 구경하며 손을 옷소매 속에 움츠리고 있다[不善爲? 血指汗? 巧匠傍觀 縮手袖間].” 하였다. 땅 …… 있건만 : 평양성(平壤城)의 남쪽에 은(殷) 나라의 기자(箕子)가 와서 실제로 정전(井田)을 구획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다. 〔월사집〕 땅 아래 …… 초효를 얻고 : 《주역》 <복괘(復卦)>의 뜻을 말한다. 이 괘는 다섯 개의 음효(陰爻) 아래 하나의 양효(陽爻)가 자라기 시작하는 것인데, 동지가 되어 양의 기운이 비로소 자라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땅에 …… 퍼지지만 : 성어(成語)로 척지금성(擲地金聲)이라 하여 훌륭한 시문을 뜻한다. 진(晉) 나라 손작(孫綽)이 천태산부(天台山賦)를 짓고 벗 범영기(范榮期)에게 “이 글을 땅에 던져보았더니 금석의 악기 소리가 나더라.” 하기에, 범영기가 읽어보고는 과연 칭찬이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 한다. 《晋書 孫綽傳》 여기서는 당시 지정 남곤(南袞)의 집에서 함께 놀았던 사람이 지은 시가 아직 남아 있음을 뜻한다. 뒤의 구절로 보아, 갑자사화로 참변을 당한 박은(朴誾)을 가리키는 듯하다. 〔용재집〕 땅은 …… 나도다 : 창사정(彰賜亭)이란 이름으로 인해 이 지역의 성가(聲價)가 더 무거워졌다는 뜻이다. 〔월사집〕 땅은 …… 천리이네 : 묘형(卯兄)은 묘생(卯生)의 형이라는 뜻으로 소철(蘇轍)이 기묘생(己卯生)이기 때문에 동파(東坡) 소식(蘇軾)을 가리키는 바, 동파는 일찍이 남쪽으로 귀양간 일이 있으며, 상숙(湘叔)은 한상(韓湘)의 숙부란 뜻으로, 한유(韓愈)를 가리키는데, 한유는 조주자사(潮州刺史)로 폄직(貶職)된 일이 있으므로 말한 것이다. 땅은 …… 하느니 : 부임하는 백천(白川)이 조박(趙璞)의 모친이 계신 고을이고 또 풍광이 좋은 곳이어서 공무의 여가에 시를 많이 읊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월사집〕 때때로 …… 있으리 : 이 모임에 작자가 끼어 있음을 뜻하고 있다. 〔용재집〕 때때옷 : 부모님 앞에서 재롱을 부리기 위해 입는 옷이다. 앞의 주석 ‘노래자’ 참조. 뗏목 : 사신의 행차를 뜻한다. 〔월사집〕 뗏목 …… 돌아올거나 : 중국으로 사신 갔다가 돌아옴을 뜻한다. 12권 ‘가을 …… 것을’ 참조. 〔월사집〕 뗏목 띄우는 것 : 5권 주 ‘바다에 뜰 뜻’ 참조. 〔용재집〕 뗏목 타고 : 한(漢) 나라 때 장건(張騫)이 뗏목을 타고 먼 외국인 대하(大夏)로 사신 갔던 데서 유래하는 바, 외국으로 사신 감을 뜻한다. 〔용재집〕 뗏목을 …… 항복받았지 : 육가가 문제(文帝)의 조칙을 받들고 사신 가서 남월왕을 복종시킨 것을 말하였다. 식(軾)은 수레의 앞쪽에 가로 놓인 나무로, 이를 잡고 몸을 숙이는 것은 수레를 타고 있을 때 예(禮)를 갖추는 것이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패권을 다툴 때 그의 책사(策士) 역이기(?食其)가 언변을 구사하여 설득하자 제(齊) 나라 성 70개가 투항하였다 한다. 이를 두고 “역생(?生)이 식(軾)에 엎드린 채 제(齊) 나라 성 70여 개를 항복시켰다.” 하였다. 〔월사집〕 뗏목을 타고 싶어라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천하가 어지러움을 탄식하여, “도가 행해지지 않는구나.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리니, 나를 따를 이는 유(由)일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용재가 ‘어지러운 세상을 버리고 차라리 공자처럼 바다에 뗏목을 띄우고 멀리 떠나는 편이 낫다’고 하고 있다. 〔용재집〕 뗏목타고 …… 날렸지 : 한 무제(漢武帝) 때 장건(張騫)이 흉노를 친 공으로 박망후(博望侯)에 봉함을 받고 대하(大夏)에 사신 갔다가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아 천하(天河)에 이르렀다는 《박물지(博物志)》의 고사를 원용하여 부사(浮?)는 흔히 국가간의 사신 행차를 의미한다. 또 바닷가의 어떤 사람이, 해마다 8월이 되면 부사(浮?)가 오고가는데 이곳을 지나는 시기를 어기지 않으므로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 배를 타고 가봤다. 10개월 만에 어떤 곳에 이르니, 성곽(城郭)과 궁실(宮室)이 있으며 그 안에 베를 짜는 여자가 있고, 한 사나이는 물가에서 소를 끌어 물을 마시게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여기가 어디냐.’ 물으니, 대답이, ‘엄군평(嚴君平)을 찾아가서 물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바로 돌아와 촉(蜀) 지방에 가서 엄군평에게 물으니, 엄군평이 말하기를, “모년 모월에 객성(客星)이 견우성(牽牛星) 위치를 범했다.” 하였다. 그 날짜를 헤아려 보니 바로 자신이 천하(天河)에 당도한 그 날이었다고 하는 고사가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전한다. 여기서는 문맥상으로 보아 김광준이 일본으로 사신을 가서 그의 문명을 일본 본토에 떨치고 돌아왔다는 찬사이다. 또 …… 떠났어라 :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유근(柳根)이 인조(仁祖)를 모시고 강화도로 왕을 호종하던 중 지금의 김포(金浦) 월곶면(月串面) 군하리(郡下里)에 있던 통진(通津)에서 죽었다. 〔월사집〕 뜨거운 …… : 《시경(詩經)》 대아(大雅) 상유(桑柔)에 “누가 뜨거운 물건을 쥐고서 물로 씻지 않을 수 있으리요.[誰能執熱 逝不以濯]” 하였다. 〔월사집〕 뜬소문 : 거듭 언급이 되면서 사실처럼 믿어지게 된 허무맹랑한 참소(讒訴)를 말한다. 저잣거리에는 호랑이가 나오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이 세 차례나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모두들 그렇게 믿게 된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戰國策 魏策》 뜰 가운데 잣나무 : 한 승려가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어떤 것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하고 묻자, 조주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고 답했던 말에서 차용한 것임. 뜰 앞의 나무 : 어떤 승려가 “어떤 것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하고 묻자 조주선사(趙州禪師)가 “뜰 앞의 잣나무이다.” 하였다 한다. 이것이 선종(禪宗)의 유명한 화두(話頭)인 정전백수자화(庭前栢樹子話)이다. 〔월사집〕 뜰앞의 …… 깊구나 : 북당(北堂)은 집 뒤에 있는 당으로 어머니가 계신 곳을 이른다. 원추리는 일명 망우초(忘憂草)로 훤초(?草)라고도 하는 바, 《시경(詩經) 위풍(衛風) 백혜(伯兮)》에 “어이하면 훤초를 얻어 집뒤〔背〕에 심을꼬〔焉得?草 言樹之背〕” 하였는데, 주(註)에 배(背)는 ‘북당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남의 자친(慈親)을 훤당(萱堂)이라 칭한다. 뜰에 …… 가득하고 : 난곡(鸞鵠)은 봉황의 일종인 난새와 고니로 훌륭한 자제를 가리키는 바, 음덕(陰德)을 쌓아 봉황과 같은 자제가 많음을 말한 것이다. 뜰에 가득한 난옥(蘭玉) : 지란(芝蘭) · 옥수(玉樹)의 준말로, 남의 자제를 지창하는 말이다. 진(晉) 나라 때 큰 문벌을 이루었던 사안(謝安)이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자기 집 뜰에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월사집〕 뜰의 풀 : 주돈이(周敦?)가 살던 곳 창 앞에서 풀이 무성히 자라도 베지 않기에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나의 의사(意思)와 마찮가지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풀의 살려는 뜻[生意]이 자신의 살려는 뜻과 같기 때문에 베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주돈이는 풀을 통해서 천지가 생생(生生)하는 뜻을 보았던 것이다. 《近思錄 十四卷》 〔용재집〕 뜻 …… 있음 : 이 구절은 《장자》 외물편(外物篇)에 보이는 득어망전(得魚忘筌)과 뜻이 통한다. 즉 왕 통판 자신이 하는 말 그 자체에 집착하지 말고 그 속에 담긴 뜻을 보아야 진리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진전(眞詮)이란 진리를 담은 글, 또는 해설이다. 〔월사집〕 뜻을 …… 낫다오 : 선조의 뜻을 계승하여 이루는 것이 아들을 많이 둔 것보다 나음을 말한다. 뜻이 …… 않네 : 어미 잃은 까마귀가 먹이를 구해 어미에게 먹이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 없어,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어미가 살던 가지에 남아서 슬피 우는 것을 이른 것이다. 백낙천(白樂天)의 〈자오야제시(慈烏夜啼詩)〉에 “까마귀가 어미를 잃고서 까악 까악 슬픈 소리를 토하네. 밤낮으로 다른데로 날아가지 않고, 몇 해 동안 옛 숲을 지키고 있네. [慈鳥失其母 啞啞吐哀音 晝夜不飛去 經年守故林]” 하였다. 뜻이 …… 없어라 : 서로 뜻이 통하니 처음 사귀었어도 오래 사귄 것만 같다는 것이다. 〔용재집〕 뜻이 굳으니 …… 심었으리라 : 동황(東皇)은 동쪽을 맡은 황제로 곧 봄의 신(神)을 이르며, 백제(白帝)는 백색을 맡은 신으로 눈속에 피는 매화는 굳이 봄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으며 백제가 심었기 때문에 하얀 꽃이 피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띠 느슨히 매고 : 1권 ‘만포진(滿浦鎭)으로 부임하는 이태수(李太?)를 전별하며’ 주(註) 참조. 〔용재집〕 띠를 느슨히 매고 : 학문이 뛰어난 선비로서 장수의 직임을 맡은 사람을 뜻하는 말로, 진(晉) 나라 양호(羊祜)가 군진(軍陣)에 있을 때 항상 가벼운 갖옷을 입고 띠를 느슨히 맨 채 선비의 풍모를 보였 〔월사집〕 띠에만 적어 두지 : 중요한 말을 잊지 않도록 허리에 맨 띠에 적어 두는 것으로, 공자가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에 관해 말하자 자장(子張)이 이를 띠에 적었던 데서 유래한다. 《論語 衛靈公》 〔용재집〕 띠풀이 뽑혀 나오듯 : 《주역》의 태괘(泰卦)의 초구효사(初九爻辭)에 “띠풀을 뽑음으라 그 무리로써 가는 것이니 길하다.[拔茅茹 以其彙往 吉]” 하여, 군자(君子)가 벗들과 함께 나아감을 말하였다. 선류(善類)가 많이 등용되었음을 뜻한다. 〔월사집〕 라고 한 구절이 있다. 래교소운(來敎所云) : 조정에서 별도의 관직 임명이 있음을 말함. 려(旅) : 하늘이나 산천에 올리는 제사이다. ‘季氏旅於泰山’<논어ㆍ팔일편> 력저(?樗) : 상수리나무와 가죽나무. 무용(無用)의 재목으로 재주 없는 사람, 또는 쓸모 없는 사람을 비유함. 렴계(濂溪) : 송(宋) 나라의 학자인 주돈이(周敦?)의 호이다. 자는 무숙(茂叔)이다. 평소에 연꽃을 사랑하여 <애련설(愛蓮說)>을 지었다. 뢰천(雷天) : 《주역》 《대장괘(大壯卦)》를 말함. 이 괘는 “군자가 예가 아니면 밟지 않는다.[非禮不履]”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 류(類) : 천신과 오제에게 지내는 제사의 이름 류를 따라 --- …… 베풀었으니 : 《주역》에 “이끌어 베풀며 류를 따라 자라게 하면 천하의 능사가 마칠 것이다.[引而伸之 觸類而長之 天下之能事畢矣]”라는 말을 근거로 한 것인데, 한 가지 일 한 가지 의를 말미암아 미루어 나가서 다른 사물에 미친다는 뜻임. 《周易 繫辭上傳》. 류심춘(柳尋春)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 자는 상원(象元), 호는 강고(江皐), 서애 류성룡의 후손이다. 류연(柳淵)의 변고 : 《조선왕조실록》 명종 19년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다. 대구부(大丘府)에 살던 유유(柳游)가 10여 년 전에 마음의 병을 앓아 미쳐서 떠돌아 다니다가 해주(海州) 경내에 흘러들어와 우거(寓居)하였다. 첩(妾)을 얻어 머물러 살았는데 혹 유유라 일컫기도 하고 혹 성명을 바꾸어 채응룡(蔡應龍)이라고도 하더니, 올봄에 첩을 데리고 서울에 왔다. 그의 매부(妹夫) 달성 도정 식(達城都正식)이 소문을 듣고 불러 보았더니, 떠돌아 다니면서 고달픈 나머지에 얼굴 모습은 변하였으나 말과 동작은 실지로 유유이었다. 유의 아우 유연(柳淵)은 대구의 본가에 있었는데 식이 연에게 통지하여 연에게 데리고 가게 하였다. 연이 올라와서 서로 보고는 드디어 함께 돌아가는 중에, 맏이 자리를 빼앗아[奪嫡] 재산을 모두 차지하려는 못된 꾀를 내어 결박을 지우고 상처가 나도록 구타하고는 그 형이 아니라고 하면서 대구부에 소송하였다. 부사(府使) 박응천(朴應川)은 유연의 말을 먼저 믿고는 단지 유유만을 가두었는데 유유의 아내 백씨(白氏)가 그때까지 그의 집에 있었다. 만일 대면하게 하였으면 당장 분별할 수 있었으니 의심스러워서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유유가 병을 얻어 보방(保放)되자 연이 형을 해치는 꾀를 행하도록 하여 끝내 증거를 없애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형을 해쳐 인륜을 어지럽힌 자를 즉시 시원하게 다스리지 않았으므로, 온 도의 사람들은 모두 통분스럽게 여기었다. 뒤에 언관(言官)의 아룀으로 인하여 금부(禁府)에 내려 추국(推鞫)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연이 그 죄를 자복하였다. 류연귀(柳淵龜) : 1867 - 1938. 자는 응하(應夏), 호는 염암(恬庵), 관향은 전주(全州). 류자후(柳子厚) : 당 나라의 문장가 류종원(柳宗元), 자후(子厚)는 그의 자임,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그 부친의 이름은 진(鎭)이고 관직은 시어사(侍御使)였는데 이력은 <선시어사부군신도표(先侍御使府君神道表)>에 상세하다.//// 교유한 76인의 이름은 보이지 않음. 재고 요망//// 류척(柳?) : 대도(大盜)로서 악명이 높은 도척(盜?)을 말함. 춘추시대 노(魯)나라 유하혜(柳下惠)의 아우. 9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남의 우마(牛馬)를 빼앗고 남의 부녀(婦女)를 취하고 제후에게 포악하게 굴어 천하에 횡행하였음. 류태좌(柳台佐) : 1763-1837. 자는 사현(士鉉), 호는 학서(鶴棲), 관향은 풍산(豊山). 1794년(正祖 18년)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급제, 이후로 주서(注書)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 등을 거쳐 1829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한성우윤(漢城右尹)을 거쳐 이듬해 예조와 호조의 참판이 되었음. 저서로는 《학서집(鶴棲集)》 《국조고식(國朝故寔)》 《천휘록(闡揮錄)》등이 있음. 류필영(柳必永) : 1841~1924. 자는 경달(景達), 호는 서파(西坡), 관향은 전주(全州). 류하혜(柳下惠)의 화(和) : 류하혜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전금(展禽)이고 유하(柳下)를 식읍으로 하였으며 시호는 혜(惠)이다. 맹자가 일찍이 “유하혜는 성인 가운데 화한 덕을 가진 사람이다.[柳下惠聖之和者也]”라고 말한 바가 있다. 《孟子 萬章章下》 마(麻) : 정승때 임명할 때, 백마(白麻)에 사령장을 썼으므로 이어서 연유하여 정승의 사령장을 마라고 하였다. /연려실기술1 1-36/ 마가은(馬價銀) : 중국에서 국경 경비와 오랑캐 막은 데에 쓰는 은이다. /연려실기술 16 4-126/ 마각(馬角) : 戰國時代 燕나라 태자 丹의 고사. 丹이 秦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었는데 돌려 보내주기를 청하자, 秦王이 말하기를 “까마귀가 희게 되고 말에 뿔이 난다면 돌아갈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는데, 天地神明이 도운 탓인지 그러한 현상이 있게 되어 단이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하는 말이 《論衡》 <感虛>에 있음. 여기서는 竹塘公이 燕京에서 보필하고 있던 世子가 풀려서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사실을 말함. 마간(馬肝) : 한 대(漢代) 장군의 명호인데, 무제(武帝)가 방사(方士) 소옹(少翁)을 문성장군에 봉했음. 말간[馬肝]이 독하여 문성(文成)이 그것을 먹고 죽었다. 史記 封禪書 /해행5-53/ 마갈(磨蝎) : 별자리 이름. 마갈궁(磨蝎宮)의 약칭. 좌절이나 비방의 운을 상징하는 별. 마감(磨勘)1 : 원래 송대(宋代)에 관리의 성적을 고사(考査)하는 제도였는데, 후세에는 일정한 재직 연한에 의하여 진급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마감(磨勘)2 : 이두로서 ‘끝내다’ ‘마치다’라는 뜻이다. 마경(馬卿) :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키는 말로, 그의 자가 장경(長卿)이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는 소갈병(消渴病)을 앓아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하여 무릉(茂陵)에 살다가 죽었다. 《史記 司馬相如列傳》 〔월사집〕 마경(馬卿) : 한(漢)나라 때의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말함. 그의 자가 장경(長卿)이었으므로 그렇게 일컬음. 문장에 재능이 있었고 특히 부(賦)에 능했는데 소갈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무릉(茂陵)에 물러나 지내다가 죽었음. 《사기》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마고(麻姑) : 건창군 남성현에 있는 산 이름. 폭포와 석지(石池)가 있음. 마고노선(麻姑老仙) : 마고(麻姑). 선녀의 이름. 마고상해(麻姑桑海) : 마고는 고대의 여선(女仙)인데 스스로 말하기를, “벽해가 세 번 상전이 된 것을 보았다.” 하였음. /완당집3/ 마고선(麻姑仙) : 마고산(麻姑山)에 사는 여신. 안진경의 麻姑仙壇記에 “손톱은 새발톱과 같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지두화(指頭畵)를 말한 것이므로 빌려 쓴 것임. /완당집3/ 마고조(麻姑爪) : 선녀의 이름. 손톱이 길어서 등을 긁기에 좋다는 전설이 있다. /열하2-14/ 마구간에 …… 품었으니 : 조조(曹操)의 시에, “늙은 준마는 마판에 엎드려 있어도 뜻은 천 리 밖에 있고, 열사는 늘그막에도 장대한 마음은 그치지 않는다.〔老驥伏?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칩거(蟄居)하는 것을 비유한다. 마군(馬群) : 말의 무리. 인재를 비유하는 말이다. 마군(魔軍)을 …… 거두누나 : 마군은 마음 속의 번뇌망상을 뜻한다. 즉 차가 마음 속의 번뇌망상을 씻어주었다는 것이다. 〔용재집〕 마귀(麻貴) :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원군(援軍)을 이끌고 온 명(明) 나라 제독(提督)인데 평택 부근에 진을 쳤었다. /청장2-259/ 마납(磨衲) : 고려 특산의 귀중한 직물로 만든 가사. 六祖壇經 /고려도경/ 마단림(馬端臨): 1254-1323. 南宋말 元初의 사학자. 자는 貴與. 樂平(강서성)출신. 經史에 능통했다. 19세 때 承事郞이 되고 咸淳 9년(1273)漕試에 장원급제했으나 부친의 병을 핑계로 省試에 나아가지 않았다. 남송이 망한 후 은거하다가 만년에 元에서 臺州儒學敎授를 지냈다. ?通鑑?에 典章부분이 미비하고, ?通典?에 누락부분이 많으며, 자신 역시 國亡을 겪은 터라 20여년간 각고 노력하여 大德 연간(1297-1307)에 ?文獻通考?를 편찬했다. ?대학집전(大學集傳)?등. 마도견(磨兜堅) :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철경록(輟耕錄)》에 “양주(襄州) 곡성현(穀城縣) 성문 밖 길가에 석인(石人)이 있는데, 그 배를 깎고 글자를 새기기를 마도견(磨兜堅)이라 했으니 삼가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했다. 마도건(磨兜?)이라고도 한다. 마두(瑪竇) : 곧 이마두(利馬竇)로 마테오·리치(Matteo Ricci)의 한역명(漢譯命)이다. 이탈리아 제스이트파(派)의 선교사로, 1587년 남경(南京)에 들어가 당시 명(明) 나라의 고관·명사들에게 천문(天文)·지리(地理)·수학(數學)을 가르쳤고 그후 중국 최초의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제작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조선 인조(仁祖) 때의 정두원(鄭斗源)과 숙종(肅宗) 때의 이이명(李?命) 등이 중국에 들어가 그의 천주교(天主敎)·천문(天文)·역산(曆算)에 관한 번역서를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밖에 우리 나라 실학파(實學派)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이곳에 “마두(瑪竇)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의 저서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의 역서로는 《건곤체의(乾坤體義)》·《산술개론(算術槪論)》 등이 있다. /오주17-128/ 마등(馬鄧)1 : 동한(東漢)의 명덕황후(明德皇后) 마씨(馬氏)와 화희황후(和熹皇后) 등씨(鄧氏)의 합칭. 마후는 후한 명제(後漢明帝)의 후(后). 덕(德)이 뛰어나고, 사가(私家)의 일을 가지고 조정에 청탁하지 않았으며, 명제가 죽고 장제(章帝)가 즉위하여 외숙(外叔)들을 봉작(封爵)하려 하자 마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등후는 후한 화제(後漢和帝)의 후, 처음에 액정(掖庭)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는데 행동에 법도가 있고 용모가 아름다웠고, 음후(陰后)가 폐출(廢黜)되자 황후가 되었으며, 화제가 죽은 뒤 상제(?帝·안제(安帝) 때에 태후(太后)로서 10여년 동안 정사에 임하여 덕정(德政)이 되었다. /연8-384-39/ 마등(馬鄧)2 : 후한의 명덕(明德) 마항후(馬皇后)와 화희(和熹) 등항후(鄧皇后)의 친정 마씨와 등씨의 집. 왕실의 외척을 말함. 마래기[抹額] : 청(淸) 나라 때 관리들이 쓰던 모자의 한 가지. 둘레가 넓고 운두가 낮아 투구와 비슷하며, 증자(曾子)에서부터 거듭한 상모로 빙 둘러 덮었음. 취음하여 한자로 말액(抹額)이라 씀. /연행7-36/ 마량(馬梁) : 지금의 충청도 서천군(舒川郡) 서면(西面) 마량리(馬梁里) 지역으로, 조선시대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있던 군영(軍營)이었다. 〔용재집〕 마루(摩壘) : 적진의 보루(堡壘) 가까이 바싹 다가가는 것이다. 《좌전》 선공(宣公) 12년 조(條)에, “허백(許伯)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적군에게 싸움을 거는 자는 매우 빠르게 수레를 몰고가 적의 보루 가까이 다가갔다가 돌아온다.’ 하더라.” 하였다. 〔용재집〕 마른 오동에 부쳤어라 : 마른 오동은 오동나무로 만든 악기를 뜻한다. 즉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고 마음을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악기에 부치고 살았다는 뜻이다. 〔월사집〕 마릉(馬陵) : 제(祭) 나라 손빈(孫?)이 위(魏) 나라 방연(●涓)과 싸울 적에 마릉(馬陵)의 좁은 골짜기에다 복병(伏兵)하고 방연을 유도해서 잡았음. → 방연(●涓) /해행7-354/ 마린(馬藺) : 식물명.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草本)으로 호택(湖澤)의 낮고 습한 곳에서 많이 나고 모양은 택란(澤蘭)과 흡사하나 다만 향기가 없음. 마문(馬文) : 지방으로 출장가는 관원에게 역말을 사용하도록 발급하는 발마공문(發馬公文)의 준말. /선조실록10/ 마반(馬班) : 《사기》를 지은 사마천(司馬遷)과 《한서》를 지은 반고(班固)의 합칭. 〔용재집〕 마보사(馬步射) :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법과 도보(徒步)로 활을 쏘는 법. /연행5-242/ 마복파(馬伏波)1 : 중국 후한 시대(後漢時代)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이름.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정벌(征伐)할 때에, 상시 율무 열매를 먹고 열대지방의 장기(?氣)를 이겨내었으므로, 교지를 평정하고 환군(還軍)할 적에 율무 열매를 수레에 싣고 돌아왔더니, 그가 죽은 후에 어느 사람이 글을 올려 참소하기를, ‘전에 싣고 돌아온 것이 모두 명주(明珠)와 문서(文犀)이다.’라고 한 사실이 있음. /해행총재10/ 마복파(馬伏波)2 :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을 말함. 자는 문연(文淵)이고 복파장군(伏波將軍)이었으므로 마복파라고 함. 일찍이 그의 두 조카에게 경계한 말에 “나는 너희들이 남의 과실을 듣거든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듣는 것처럼 하여 귀로는 들을지언정 입으로는 말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하였음. 《소학》 <가언(嘉言)> 마봉(麻蓬) : 쑥이 삼밭 가운데서 자라면 저절로 곧아진다는 말로서 사람이 주위의 도움을 받아 바르게 됨을 비유함. 마불식속(馬不食粟) → 첩불의백(妾不衣帛) 마상(馬上) : 《사기(史記)》 육가전(陸賈傳)에, “육가가 고조(高祖)에게 늘 시서(詩書)를 이야기하니 고조가 꾸짖으면서, ‘내가 마상에게 천하를 얻었는데 뭐 시서를 배울 필요가 있겠느냐?’하니 ‘그렇지 않습니다. 말을 타고 싸움터에서 천하를 얻었다 하더라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한 것을 이름. /성호사설7/ 마상득지(馬上得之) : 유랑(劉郞)은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가리킨 것이며, 마상(馬上)은 말의 등을 말한 것으로 싸움을 가리킨다. 고조는 본래 글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육가(陸賈)가 때때로 고조에게 시서(詩書)를 말하였더니 고조는 “나는 마상에서 천하를 얻었으니 무엇 때문에 시서를 일삼겠는가.”하고 꾸짖으매, 육가는 “마상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마상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야 있겠습니까?” 하였다. 《漢書 卷一 高帝紀 卷四十三 陸賈傳》 /청장1-55/ 마상선(馬尙船) : 거룻배, 또는 통나무를 파서 만든 배 따위 작은 배. 마상이 /연산2-438-16/ 마상성(馬上聲) : 악부(樂府)의 곡명(曲名). 명비는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비(妃). 왕소군(王昭君)이 진문제(晉文帝)의 휘(諱)를 피하여 명비라 하였다. 한인(漢人)이 명비가 멀리 흉노(匈奴)에게 시집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 이 노래를 지었다 한다. 《唐書 樂志》 /해행8-388/ 마상쌍검(馬上雙劍) : 말을 타고 쓰는 쌍검. 모양은 쌍검과 같음. /만기2/ 마상월도(馬上月刀) : 말을 타고 쓰는 월도. 모양은 월도와 같음. /만기요람2/ 마상재(馬上才) : 말 위에서의 8가지 무예. 말 위에서 삼혈 총을 쏘는 것, 말의 좌우로 말 등을 넘는 것. 말 위에 죽은 듯이 가로 눕는 것. 말 다리 밑으로 몸을 감추는 것. 말 위에 물구나무서는 것, 머리를 말 꼬리 쪽으로 두고 말 위에 세로 눕는 것, 말의 몸통 좌우로 몸을 감추거나 좌우로 넘는 것. /만기요람2/ 마상편곤(馬上鞭棍) : 길이 6척 5촌의 단단한 나무로 만든 막대 끝에 쇠사슬로 이은 길이 1척 6촌의 자편(子鞭)이 달려 있는데, 말을 타고 쓰는 무기임. 그 무예. /만기2/ 마속(馬謖) → 공심위상(攻心爲上) /성호8-99/ 마승(馬乘) : 마승은 말 네 필로, 고대에 대부가 되면 말 네 필이 끄는 수레를 탔다. 즉 대부를 뜻한다. 〔월사집〕 마시(馬市) : 중국이 금, 비단, 소금, 차 따위를 가지고 변방 유목민들의 말과 바꾸던 시장이다. 〔월사집〕 마신묘(馬神廟) : 마조(馬祖)·선목(先牧)·마사(馬社)·마보(馬步)의 4신(四神)을 모신 사당. 홍무때부터 제사 지냄. /연행1-374/ 마아(?兒) : ① 마아형명(?兒形名)의 준말. 군사훈련할 때에 사용하는 군대의 신호법. /중종실록37/ ②마아는 습진(習陣)할 때 쓰는 제구이고, 형(形)은 기(旗), 명(名)은 북[鼓]인데, 이것으로 군사들을 지휘한다. /중종실록44/ 마아습진(馬兒習陳) : 마아는 사람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습진용(習陣用) 제구(諸具)인데, 이것으로 군사 훈련하는 것을 말한다. /중종실록 46/ 마욕(麻欲) : 미역의 방언. ○ 藿者海帶也一方言曰麻欲一 《經世遺表 藿說》(장순범) 마우풍(馬牛風) : 매우 먼 거리로 떨어진 것을 형용한다. 춘추시대 초자(楚子)가 자기 나라로 쳐들어온 제 환공(齊桓公)에게 “임금께서는 북해(北海)에 살고 과인은 남해에 사니 바람난 소나 말[風馬牛]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입니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左傳 僖公 四年》 〔용재집〕 마운두성(?雲頭城) : 《신증동국여지승람》 회령도호부(會寧道護府) 고적(古跡)에, “운두성이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는 기록이 보임. 마운두성은 운두성을 말하는 것임. /성호1-269/ 마원(馬援) : ① 후한 명제(後漢明帝)의 황후 마씨의 아버지. 마 황후는 친정의 이익을 구하지 않아, 장제(章帝)가 마원 형제를 봉하고자 하였으나, 황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음. /중종실록 2/ ②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명장 자는 문연(文淵), 시호는 충성(忠成), 복파장군(伏波將軍) 이라고도 하는데, 교지(交趾)를 정벌하여 평정함. 後漢의 茂陵 사람, 자는 文淵이다. 일찍이 빈객들에게 “남아는 마땅히 전쟁에 나아가 변방의 들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신이 쌓여서 돌아와야 한다”고 하는 慷慨한 말을 했는데, 뒤에 과연 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시호는 忠僖. 《後漢書》 54/연6-195-21/ 마원(馬援)의 진충(盡忠) : 마원은 광무제(光武帝) 때의 명장으로 한(漢)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막대한 공을 세웠다. 그가 흉노(匈奴)를 정벌하러 갈 때 “남아는 의당 변방의 전장터에서 죽음을 바쳐 말가죽에 시체가 싸여 돌아와 장사지내져야 할 것이다. 어찌 침상에 누워 아녀자의 손에 죽을 수 있으리여.” 하였는데, 후에 병든 몸으로 무릉(武陵) 오계(五溪)의 만이(蠻夷)를 정벌하러 가서 적을 크게 무찌르고 군중에서 죽었다. 〔월사집〕 마위전(馬位田) : 역마를 먹여 기르기 위한 위전. 위전은 기본 재산인 전토(田土)의 뜻으로, 그 수익으로 일정한 공적 목적의 비용에 충당하는 전토. 마유(馬乳) : 포도의 일종으로, 당 태종(唐太宗)이 고창(高昌)을 정벌하고 가져온 것이라 한다. 《事文類聚 二十五卷 葡萄》 〔용재집〕 마융(馬融) : 후한(後漢)의 학자로서 자는 계장(季長)이다. 학식이 해박하고 재능이 높아 천여 명의 문도들을 가르쳤는데, 당대의 석학인 정현(鄭玄) 노식(盧植) 등이 그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後漢書》 권60 상. 마을 이름이 …… 것이다 : 지형이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있는 바,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오성(五性) 가운데 인은 동쪽, 의는 서쪽에 해당하므로 말한 것이다. 마음 …… 않네 : 사시사철 푸르른 대나무를 가리켜 읊은 말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진(晉)나라 때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숭상하여 죽림(竹林)에서 술과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완적(阮籍)·혜강(?康)·산도(山濤)·상수(尙秀)·유령(劉伶)·완함(阮咸)·왕융(王戎)을 가리킨다. 마음 …… 없지만 : 17권 ‘단단(斷斷)’ 참조. 〔월사집〕 마음 강하게 가지노라 : 정희량이 귀양온 처지이므로, 술을 마셔서 마음을 강하게 하여 울적함을 달래라는 것이다. 〔용재집〕 마음에 …… 것 : 중양절(重陽節)에 국화 꽃잎을 술잔에 띄워 마셔서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용재집〕 마음에 …… 것이다 : 《대학》 원문에 인용된 기욱(淇澳) 시의 구절을 집주(集註)에 의거하여 풀이한 것이다. 엄밀(嚴密)은 슬(瑟) 자의 뜻을, 강의(剛毅)는 한(?) 자의 뜻을 풀이하였다. 선저(宣著)는 환히 드러난다는 뜻으로 혁(赫) 자의 뜻을, 광휘는 훤(喧) 자의 뜻을 풀이하였다. 〔월사집〕 마음에 간직한다오 : 백사의 덕을 마음에 간직한다는 뜻이다. 《시경》 소아(小雅) 습상(?桑)에 군자를 만난 즐거움을 노래하여 “마음으로 사랑하니 어이 말하지 않으리오만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거니 어느날인들 잊으리요.[心乎愛矣 遐不謂矣 中心藏之 何日忘之]” 하였다. 〔월사집〕 마음에 병이 들어 : 진실을 알지 못하고 엉뚱하게 오해하여 마음에 병이 든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실 때 벽 위에 걸린 활 그림자가 술잔 속에 비쳐 뱀처럼 보였다. 그래서 술잔 속에 뱀이 있어 이 뱀을 먹은 것이라고 착각하여 심하게 병을 앓았다. 뒤에 그것이 활그림자임을 깨닫자 금방 병이 나아 회복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琅?代醉編 蛇影》 마음은 …… 달려있고 : 마음이 항상 임금을 향해 있다는 말이다. 북극(北極)은 하늘의 중추(中樞)인 북극성(北極星)으로, 임금을 비유한다. 마음은 늘 붉고 : 변치않는 충성을 지닌 단심(丹心)을 뜻한다. 〔월사집〕 마음을 …… 말씀하였네 : 미위(微危)는 도심(道心)은 미묘하고 인심(人心)은 위태로움을 이른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니, 정(精)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하였는 바, 이 내용은 순(舜)임금이 우왕(禹王)에게 황제의 지위를 물려주려 하면서 경계한 말씀으로 성왕(聖王)의 도통(道統)이요 마음을 수양하는 최고의 요결이라 한다. 마음을 …… 있다네 : 신재 주세붕의 스승 방유녕(方有寧)이 마음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변용하여 이렇게 읊은 것이다. 마음을 닦고 밝히지 않아 막힌 것을 비유함. 맹자가 고자(高子)에게 마음을 닦기에 잠시라도 간단을 두어서는 않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산길이 잠간 사이에 사람이 다니게 되면 길이 되고 잠시라도 다니지 않게 되면 띠풀로 막히게 된다.[山徑之蹊間 介然用之而成路 爲間不用則茅塞之矣]”고 하였음. 《맹자》 《진심장 하(盡心章下)》. 마음을 함께 하는 깊은 우정을 말한다.《주역》동인괘(同人卦)에 대한 공자의 설명에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함에 그 예리함이 쇠붙이를 끊는다.[二人同心 其利斷金]”는 말에서 유래한다.《周易》繫辭上傳 第八章 마의(麻衣) : 과거하기 전에 입던 옷. 과거에 급제하면 이 옷을 벗게 된다. /동사3-290/ 마의도사(麻衣道士) : 송 나라 은자 진단(陳?)의 스승. 전약수(錢若水)가 젊을 때 진단을 찾아가 이 마의도사에게서 상을 보았는데, “신선은 될 수 없고 다만 귀한 벼슬은 할 수 있다.” 라고 했다는 것. 《상산야록(湘山野錄)에 이런 말이 적혀 있음. /성호9-315/ 마이생풍(馬耳生風) : 바람이 말[馬]의 귀에 스쳐도 아무 감각이 없듯이,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말이다. 소식(蘇軾)의 화하장관육언시(和何長官六言詩)에 “시조의 공자에게 말해보았자 말 귀의 동풍과 무엇이 다르랴.”[說向市朝公子 何殊馬耳東風] 하였다. /청장1-96/ 마이진(●?津) : 사천성(四川省) 미산현(眉山縣) 동쪽 파리강(?璃江)에 있는 나룻터. 당희종(唐僖宗) 때에 좌습유(左拾遺) 맹소도(孟昭圖)가 글을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였다가 마이진에 던져져 죽었음. 《方輿勝覽》 /중종실록 36/ 마자수(馬?水) : 마자수(馬?水)는 압록강의 별칭. /연행 11-260/ 마저작침(磨杵作鍼) : 고생을 무릅써가며 정진한다는 말. 李太白이 소시에 글을 읽다가 이루지 못한 채 버리고 떠났는데, 길에서 ?은 노파가 쇠로 만든 절구공이를 가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묻자, 노파가 대답하기를 침을 만들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드디어 학업을 마저 마쳤다는 고사가 있음. 마정(馬鄭) : 후한(後漢)의 학자인 마융(馬融)과 정현(鄭玄)을 말한다. 마융의 자는 계장(季長)이며 학식이 해박하고 재능이 높아 많은 문도를 배출하였다. 정현의 자는 강성(康成)이며 일찍이 태학에서 공부하여 여러 경전에 박통하고 다시 관중에 가서 마융(馬融)에게 10년 남짓 배우고 동래(東萊)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당고(黨錮)의 화가 일어나자 14년 동안 피금(被禁)되어 은거한 채 경업(經業)을 닦아 많은 저서를 이루고 경전에 박흡(博洽)한 일대의 순유(純儒)였다. 이들의 학문적 특징은 경전의 의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주소(註疏)에 치중하였다. 마융에 대해서는 《後漢書》 권60 상에, 정현에 대해서는 《後漢書》 권35에 자세하다. 마정란(馬廷鸞)의 눈물 : 마정란이 국사를 걱정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간 일. 송 도종(宋度宗)이 마정란의 재상직 사임을 만류하자, 정란은 눈물을 흘리면서 “신은 언제 죽을지 모르니 다시 폐하를 뵙지 못할 것입니다. …… 폐하께서는 원로 대신들과 영구한 계책을 도모하소서.”하고 물러갔다. 《宋史卷四百十四 馬廷鸞列傳》 /선조실록33/ 마정방종(磨頂放踵) : 이마를 갈아서 발뒤꿈치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니, 곧 자신의 몸을 잊고 남을 위하여 노력함을 뜻한다. 면암집2/ 마제(?祭) 출정(出征)할 때에 전지(錢地)에서 지내는 제사인데, 군법(軍法)을 창시(創始)한 이에게 지내는 제사임 /세종실록 15-31/ 마제수(馬蹄袖) : 옷소매에 말굽 모양으로 만들어 손등을 덮게 된 것. /연행7-453/ 마제지편(馬?之篇) : 제는 제(蹄)와 같으니, 곧 《장자(莊子)》 마제편을 말한 것이다. /청장2-241/ 마조(馬曹) : 말을 관장하는 관청이다. 찰방은 역참에 소속된 벼슬이므로 마조라 한 것이다. 진(晉) 나라 왕자유(王子猷)의 고사를 사용하였다. 왕자유가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기병참군(騎兵參軍)으로 있으면서 머리는 쑥대 같고 허리띠는 풀어헤친 채 자기 직무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 환충이 “그대는 무슨 관서(官署)를 맡는가?” 하고 묻자 “무슨 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말을 끌고 오는 것을 보니, 아마도 마조인 듯합니다.” 하였고, 또 “관서에는 모두 얼마의 말이 있는가?” 하자 “말을 상관하지 않으니 어떻게 그 숫자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말이 근래 얼마나 죽었는가?” 하자 “산 것도 모르는데 죽은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未知生 焉知死]” 하였다. 《世說新語 簡傲》 〔월사집〕 마조(馬弔) : 투전40장을 가지고 노는 중국의 놀음감. /열하1-288/ 마조(馬曹)에서 …… 고였었고 : 마조(馬曹)는 말을 관장하는 관청이다. 이 구절은 진(晉) 나라 왕자유(王子猷)와 왕희지(王羲之)의 두 고사 를 차용하여 월사가 백사와 한 관서(官署)에 근무했음을 말하였다. 왕자유가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기병참군(騎兵參軍)으로 있으면서 머리는 쑥대 같고 허리띠는 풀어헤친 채 자기 직무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 환충이 “그대는 무슨 관서(官署)를 맡는가?” 하고 묻자 “무슨 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말을 끌고 오는 것을 보니, 아마도 마조인 듯합니다.” 하였고, 또 “관서에는 모두 얼마의 말이 있는가?” 하자 “말을 상관하지 않으니 어떻게 그 숫자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말이 근래 얼마나 죽었는가?” 하자 “산 것도 모르는데 죽은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未知生 焉知死]” 하였다.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이 ‘업무를 보라’는 상관의 말에 대꾸도 않은 채 수판(手板), 즉 홀(笏)로 턱을 고이고서, “서산에 아침이 오니, 상쾌한 기운이 이는구나.” 한 고사를 차용하였다. 《世說新語 簡傲》 〔월사집〕 마조단(馬祖壇) : 방성을 제사하던 단. 동대문 밖에 있었다. /대동1-241/ 마주하고서 …… 토한다 : 몸은 쇠잔하지만 시를 지을 때는 기운이 넘친다는 뜻이다. 소식(蘇軾)의 차용장완(龍張琬)에 “아노라 그대 곤궁과 시름 속에서 늙지 않고 오히려 맑은 시 있어 기운이 무지개 토하는 줄[知君不向窮愁老 尙有淸詩氣吐虹]” 하였다. 〔월사집〕 마천곡(摩天鵠) : 운필(運筆)의 태도를 말한 것임. /완당집3/ 마첩(馬帖) : 공무(公務)로 여행하는 관리는 각역에 배치되어 있는 말을 이용할 수 있는데, 이 역마를 이용할 수 있는 증명서. 여기서는 말의 등록 문서. /명종실록10/ 마치 : 두엄더미 따위에서 잘 자라는 흔한 나물인 쇠비름으로, 소인에 비유된다. 두보(杜甫)의 원관송채(園官送菜)에, “고거는 가시가 바늘과 같고 마치는 잎이 또한 번성하여라. 푸릇푸릇한 채소의 빛은 밭 가운데 묻혀 있도다.[苦?刺如針 馬齒葉亦繁 靑靑嘉蔬色 埋沒在中園]” 하였다. 〔용재집〕 마침 …… 있으랴 :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이백은 술 한 말에 시가 백 편이라.[李白一斗詩百篇]” 하였다. 〔용재집〕 마판에 …… 생각하네 : 천리마가 마구간의 마판에 앉아 지난날 천만리를 달리던 때를 생각한다는 것으로써 노년에 부질없이 청춘의 일을 회상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마판에 --- …… 잊었고 : 천리마가 마판에 엎드려서 천 리를 달린 뜻을 잊고 있다는 것은 세상에 자신의 기량을 펼칠 뜻을 버렸음을 말한다. 마패(麻牌) : 노호(老胡)의 칭호로 왕래하는 조선 사행을 호행하는 자다. ○ 麻牌卽老胡之稱 而護行東國往來使命者也 《燕行錄選集 3 燕途紀行中》 마패아역배(麻貝衙譯輩) : 마패는 중국 축에서 나온 영송관(迎送官)으로 호행(護行)을 맡은 관원. 아역은 통역을 담당한 차통관(次通官). /연행4-468/ 마하(摩訶) : 사찰을 가리킴. 불가(佛家)의 용어로 원래 불가사의한 일이나 훌륭함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사찰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마한(馬韓) : 옛 삼한(三韓)의 하나. 당시 방백을 맡은 곳이 옛 마한의 땅임을 나타냄. 마혁(馬革) : 시체를 싸는 말가죽을 말한다. 후한의 마원(馬援)이 말하기를 《남아가 마땅히 변야(邊野)에서 싸우다가 죽어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 장사지낼 뿐이니 어찌 침상에 누워 아녀자의 수중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 일이 있다. 《後漢書》 <馬援傳>. 마화지(馬和之) : 송 고종(高宗) 때의 화가. 인물 산수에 능하였으며, 모시(毛詩) 3백 편을, 한 편에 한 폭씩 그린 모시도(毛詩圖)로 더욱 유명함. /연행10-247/ 마후(馬后) : 마원(馬援)의 딸로서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황후가 되어 사가(私家)의 일로써 조정에 구하지 않았으며, 명제가 죽고 장제(章帝)가 즉위하여 외가의 모든 구씨(舅氏)에게 봉작(封爵)하려 했으나, 마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음. 《後漢書 皇后紀 第十》 /성호사설9/ 마흔이 …… 알겠구나 : 공자가 “후생(後生)이 두려월할 만하니 앞으로 오는 이들이 어찌 지금의 나만 못하다고 장담할 수 있으리요. 그러나 마흔 살이나 쉰 살이 되어도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면 이는 또한 족히 두려할 것이 없다.” 하였다. 《論語 子罕》 〔월사집〕 마힐(摩詰) : 唐나라의 시인 王維의 字. 관직이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는데 세칭 왕우승(王右丞)이라고 함. 시서(詩書)에 두루 능했는데 더욱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하였음. 그는 시(詩) · 서(書) · 화(畵)의 삼절(三絶)로 유명하다. 唐書 202. 막고산인(?姑山人) : ?姑射山에 仙人이 있는데, 살결이 氷雪같이 희고 깨끗하며 아름다워서 處子와 같았다. 《莊子》 /퇴계집1-23/ 막긍행명(莫肯行明) : 당시(1384년 무렵)는 고려가 명 나라와 국교가 원할하지 못하여 명에서는 고려에 출병하겠다고 위협하고 세공(歲貢)을 엄청나게 요구했으며, 심지어는 고려에서 간 사신까지 처벌하여 유형(流刑)을 보내므로 사신을 가려 하지 않았다. /삼봉1-193/ 막부(幕府) 중 사람 : 뛰어난 인재를 뜻하는 말. 남조(南朝) 제(齊) 나라 위장군(衛將軍) 왕검(王儉)의 막부에 인재가 많아 당시 사람들이 그의 막부에 들어가는 것을 일러 부용지(芙蓉池)에 들어간다 하였다. 유고지(庾?之)가 왕검의 명을 받고 위장군장사(衛將軍長史)가 되자, 소면(蕭緬)이 왕검에게 보낸 편지에, “당신의 막부엔 얻기 어려운 인재가 많은데, 유고지가 그 중에서 맑은 물에 떠서 부용꽃을 의지하니, 어쩌면 그리도 아름다운가.” 하였다. 《南齊書 庾?之傳》 〔용재집〕 막북(漠北) : 고비사의 북쪽의 땅. 즉 외몽고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오랑캐들이 서식하고 있는 북방을 의미한다. /연산5-109-31/ 막수(莫愁) : 당(唐) 나라 때 석성(石城)에 살았던 여자로서 노래를 잘 불러 악부(樂府) 가운데 막수악(莫愁樂)이란 악곡이 전한다. 낙양(洛陽)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석성(石城) 사람이라 하기도 한다. 막수악(莫愁樂) : 막수는 옛 악부(樂府) 가운데 나오는 전설적인 여인으로 석성(石城) 사람이었는데 13세에 시집가 노씨(盧氏)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다 한다. 막수유(莫須有) : 계사존고 악무목옥론(癸巳存稿岳武穆獄論)에 의하면, 막(莫)이 한 단어로 《아마》하고 의심하는 것이고, 수유(須有)가 한 단어로 《있을 것이다》고 가정한 것이니 즉 반신반의의 뜻. 그러므로 사실이 분명치 않은 사건을 있을 것이라고 추단(推斷)하는 옥사를 《막수유지옥(莫須有之獄)》이라 한다. 이 말의 어원은, 송(宋)의 충신(忠臣)인 악비(岳飛)를 죽이려고 무함하는 진회(秦檜)가, “사실은 분명치 않지만, 아마 있을 것이다.”[雖不明其事禮 莫須有]하자, 악비를 편드는 한세충(韓世忠)이 “‘아마 있을 것이다.’는 세 글자가 어떻게 천하를 복종시키겠는가?”[莫須有三字 何以服天下]에서 나왔다. 《宋史 岳飛傳》 /대동15-354/ 막야(?邪) : 중국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오(吳)의 간장(干將)이 만든 명검(名劍)의 이름이다. 간장(干將)이 칼을 만들 때 철즙(鐵汁)이 내리지 않으매, 그의 처인 막야(莫邪)가 용광로에 들어가 희생됨으로써 만들어진 고사(故事)가 있다. 《吳地記》 /동사강목1/ 막야검(??劍) : 옛날 명검(名劍)의 이름으로 간장검(干將劍)과 함께 자웅을 이룸. 막야검(莫耶劍)이라고 하기도 함. 막연(幕燕) : 장막 위에 둥지를 튼 제비.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으면서 그 기미를 모르는 것을 비유함. 《左傳 襄公 二十九年》. 막좌(幕佐) : 막하(幕下)에서 보좌하는 자로 관찰사(觀察使)를 보좌하는 도사(都事)나 절도사(節度使)를 보좌하는 평사(評事)를 이른다. 만 …… 소나무도 : 역시 두보의 고백행에서, “큰 집이 무너지려면 들보가 필요한 법, 산처럼 무거워 만 마리 소가 고개 돌리누나.[大廈如傾要梁棟 萬牛回首丘山重]”이라 한 구절을 차용하였다. 〔용재집〕 만 균(鈞) : 매우 무거운 것을 뜻함. 1균은 30근. 《가산지언(賈山至言)》에 ‘뇌정(雷霆)이 치는 곳에는 꺾어지지 않을 것이 없고, 만 균이 누르는 곳엔 뭉개지지 않을 것이 없다.’고 했다. /중종실록 49/ 만강(蠻江) : 중국 남방의 강으로, 이 지역은 무덥고 장기(?氣), 즉 습기가 많아서 풍토병이 잘 걸리는 곳이라 예로부터 유배지가 되어왔다. 여기서는 단순히 유배지를 뜻한다. 〔월사집〕 만개의 …… 내고 : 대지의 바람 소리를 형용한 말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큰 땅덩어리가 숨을 내뿜는 것을 바람이라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모르지만 일단 일어났다고 하면 만 개의 구멍이 노하여 부르짖기 시작한다.[萬竅怒號]”라는 말이 있다. 만고(萬古)에 …… 통했어라 : 주자와 장남헌(張南軒)은 남악(南嶽) 형산(衡山)을 오르고, 용재 자신은 서울의 남산을 올랐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용재집〕 만고에 …… 매였었네 : 금등(金?)은 쇠사슬로 충정어린 글을 이른다. 옛날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병들어 위독하자, 주공(周公)은 무왕을 위하여 사당에 가서 선조들에게 무왕 대신 자신이 죽을 것을 청하고 무왕의 병환이 속히 쾌차하기를 기원한 다음 이 내용을 적은 글을 함속에 넣어 쇠사슬로 봉함하였다. 그후 무왕을 이어 즉위한 성왕(成王)은 이 금등을 발견하여 옛날 주공이 선조들에게 기원한 글을 얻으니, 이것이 곧 《서경(書經)》의 금등편이다. 백일(白日)은 태양으로 군주를 상징하는 바, 곧 군주에 대한 충정을 말한 것이다. 만관(蠻館) : 4권 ‘느낌이 있어’에 보이는 오만관(烏蠻館)이다. 〔월사집〕 만국의 …… 젖누나 : 천하의 모든 나라들이 천자의 은택을 입었다는 뜻이다. 〔월사집〕 만기(萬幾) : 임금이 보살피는 정무. 그 기무(機務)가 많기 때문에 일컫는 말임. 고요(皐陶)가 우(禹) 임금에게 고하기를 《안일과 욕심으로 나라를 가르치지 마시어 경계하고 두려워 하소서. 하루 이틀에 기무가 만 가지나 되나이다.[無敎逸欲有邦 兢兢業業 一日二日萬幾]》라고 한 말이 있음. 《書經》 <皐陶謨>. 만기지가(萬幾之暇) : 천자가 정사를 보고 난 여가. 만나는 …… 흘렸고 : 장륜의 부친이 월사와 친구인데 작고하여 아직 상중(喪中)이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만나면 죽은 벗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월사집〕 만년에 …… 있다 : 동강(桐江)은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에 있는 물이름으로 후한(後漢)의 은사(隱士)인 엄광(嚴光)이 은둔하여 낚시질한 곳이며, 일사(一絲)의 바람은 작은 바람으로 조병문(趙秉文)의 시에 “유월에도 푸른 부들 밑에는 시원한 기운이 생기니 낚시배 위에 일사의 바람이 인다.〔六月?生靑蒻底 釣魚船上一絲風〕” 하였는 바, 곧 만년에 한가로이 낚시질하며 여생을 보냈음을 말한 것이다. 만년정논(晩年定論) : 양명이 《주자만년정론설》을 내세워 “주자(朱子)는 초년·중년에는 격물·궁리 등 지리한 학문에 힘썼으나, 만년에 그것을 후회하고, 성의 정심의 공부 즉 덕성을 높이는 공부에 더 힘썼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나정암(羅整菴)이 이를 반박한 일이 있었다. /하곡1-114/ 만동묘(萬東廟) : 송시열(宋時烈)의 유명을 받아 문인 권상하(權尙夏)가 숙종 30년(1704)이 충북 괴산(槐山) 화양동(華陽洞)에 명 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사당을 세웠다. 이는 신종이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도와 준 데 대한 보답이었는데, 대원군(大院君)이 집정하자 이를 철폐, 신주와 편액(扁額)은 서울 대보단경봉각(大報壇敬奉閣)으로 옮겼다. 《肅宗·英祖·純祖·憲宗實錄》 /면암집2/ 만라가(滿刺加) : 마라카(Malacca)의 음역(音譯). 말레이 반도 서남쪽에 있는 지명. /연행1-45/ 만랑(漫浪) : 방종(放縱)하여 세속의 구속을 받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3권 ‘침류당(枕流堂)’ 주(註) 참조. 〔용재집〕 만랑(漫郞) :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형해(形骸) 밖을 방랑하는 문사(文士)를 뜻하는 말. 당(唐) 나라 안진경(顔眞卿)의 용주도독겸어사중승본관경략사원군표묘비명(容州都督兼御史中丞本管經略使元君表墓碑銘)에서 “원결(元結)이 양수(?水) 가에 살면서 자칭 낭사(浪士)라 하고 《낭설(浪說)》 7편을 지었다가, 뒤에 낭관(郎官)이 되자 당시 사람들이 낭자(浪者)도 부질없이[漫] 벼슬을 하는가?” 하고는 ‘만랑(漫郞)’이라 불렀다 한다. 〔용재집〕 만력(萬曆) : 명(明)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573년부터 1619년까지 47년 동안이다. 만력(萬曆)의 …… 높아라 : 만력은 명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이고, 삼단(三壇)은 숙종(肅宗) 때 창덕궁 안에 설치한 대보단(大報壇)을 가리키는 바, 이는 명(明) 나라 태조(太祖)와 신종(神宗),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던 곳인 바, 곧 명(明) 나라가 이미 망하여 만력 시대의 역사를 읽을 수 없고, 대보단만 높이 솟아 있음을 탄식한 말이다. 만뢰(萬?) : 천지간의 모든 소리, 즉 인뢰(人?) 지뢰(地?) 천리(天?). 《莊子 齊物論》. 만리 …… 받들었고 : 이흘(李?)이 인조(仁祖) 7년 사은사(謝恩使)로 사명을 받고 서해 뱃길로 명(明) 나라에 가다가 홀로 살아서 하표(賀表)와 변무주문(辨誣奏文)을 바치고 옥하관(玉河館)에서 병사하였다. 〔월사집〕 만리 …… 지켜왔지 : 중국 사신은 조선으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왔고, 조선은 천년토록 중국의 변방을 지키는 제후로서의 소임을 다해왔다는 뜻이다. 〔용재집〕 만리 변방에 유배살이 : 한유(韓愈)가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렸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된 것을 가리킨다. 〔용재집〕 만리라 …… 마음일레 : 나라가 전란에 휩싸여 있는 시국이므로 강호의 모든 물들이 자신의 눈물인 듯 느껴지고, 자기 일신의 근심과 즐거움은 모두 나라 위한 신하의 것이라는 뜻이다. 〔월사집〕 만리라 …… 받았나니 : 매우 멀고 험한 길이라 신명의 덕택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는 뜻이다. 〔월사집〕 만리라 …… 없어라 : 국경을 지키는 튼튼한 성이 있어서 나라가 태평하다는 뜻이다. 주(周) 나라 때 주공(周公)이 섭정하여 천하가 잘 다스려지자 월상국(月裳國)의 사신이 흰 꿩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하늘에는 폭풍우가 없고 바다에는 큰 파도가 일 지 않은 지 3년이 되었으니, 아마 중국에 성인(聖人)이 계셔 그러한 듯합니다.” 하였다. 〔월사집〕 만리를 …… 흘린다지 : 대완(大宛) 지방에서 나는 천리마를 한혈마(汗血馬)라고 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월사집〕 만리석묵연(萬里石墨緣) : 추사가 유인원(劉仁願)의 평백제비(平百濟碑)를 탁본하여 옹방강에게 보내준 일. 석묵은 옹방강의 서루(書樓) 이름. /완당집3/ 만리의 …… 걷혔어라 : 쉽사리 적을 무찔렀음을 뜻한다. 17권 ‘만리의 …… 있으니’ 참조. 〔월사집〕 만리의 …… 있으니 :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계책으로 멀리 있는 적을 제압한다는 뜻으로, 《전국책(戰國策)》 제책 오(齊策五)에, “술동이와 도마[尊俎]의 사이에서 성을 뽑고 자리 위에서 적을 무찌른다.”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는 지난 해, 즉 1583년 5월에 만주의 추장 누르하치가 요동을 침략하였는데 이 해 4월에 명(明) 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농천(?川)에 있는 적을 믈리친 일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듯하다. 〔월사집〕 만리장성(萬里長城) → 자대(紫臺) 만리후(萬里侯) : 후한(後漢)의 반초(班超)가 집이 가난하여 문서를 서사(書寫)하는 품을 팔아 모친을 봉양하고 살았는데, 관상 보는 사람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제비의 턱이고 범의 머리이니, 만리후(萬里侯)에 봉해질 상(相)이다.” 하였다. 그 후 과연 그 말대로 서역을 평정하고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班超傳》 〔월사집〕 만법(萬法) : 만사(萬事)를 말함. 만보상(萬寶常): 북제(北齊)-수(隋)나라 초기의 사람. 수척률(水尺律)이란 악기를 만들고, 《악보(樂譜)》64권을 저술했으나 전하지 않음. 만사화(萬士和) : 자는 사절(思節), 호는 이암(履菴), 의흥(宜興)사람. 가정(嘉靖) 20년에 진사, 만력(萬曆) 초에 예부 상서에 기용되었음. 《明史 列傳 76, 毘陵人品記 卷9》 /연행1-444/ 만상(萬象)이 …… 빛나누나 : 만상은 온갖 만물(萬物)을 이르고, 구유(九有)는 구주(九州)와 같은 말로, 우(禹) 임금이 중국을 아홉 개의 주(州)로 나눈 것을 이르는 바, 곧 천하(天下)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만상군관(灣上軍官) : 평안북도 의주(義州)의 별칭. 만부(灣府)라고도 함. /연행3-152/ 만석군(萬石君) : 한 나라 때 석분(石奮)을 말함.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건(建)이고 다음은 갑(甲), 을(乙), 경(慶)이었으니, 이들이 모두 효근(孝謹)으로 이름이 있었음. 이들 5부자의 녹봉을 합하여 모두 만석이었음. 《史記 萬石君列傳)》. 만세(萬世) → 수에 간 사신 만세를 …… 도사 : 한(漢) 나라 원봉(元封) 원년(元年) 봄에 무제(武帝)가 숭산(嵩山)에 올라갔는데, 이졸(吏卒)이 모두 세 차례 높이 ‘만세(萬歲)’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 만세야(萬歲爺) : 천자(天子)를 경칭하는 말. /연행11-30/ 만수(晩修) :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 1711~1781)을 말함. 대산이 일찍이 소동파(蘇東坡)의 시 가운데 “하사가 늦게 도를 들으니, 애오라지 졸로써 스스로 닦네[下士晩聞道 聊以拙自修]”라는 구절에서 취하여 그 서재에 ‘만수(晩修)’라는 편액을 붙이고, 평소 일용의 체험 가운데 깨우침이 있는 것을 수시로 기록하여 29세에 《만수록(晩修錄)》이라는 저서를 남겼음. 만수(漫水) : 두만강(豆滿江)의 일명. ○ 我國大川 西北曰 …… 其在極北者曰漫水(豆滿江) 《經世遺表 卷二 冬官工曹》 만수과(萬壽科) : 중국 천자의 탄일(誕日)이라 하는데, 이 만수절을 경축하기 위해 보이던 과거. /연행4-145/ 만수태극(萬殊太極) : 천지 만물을 구성하여 많은 작은 태극으로 나뉘어진 상태임. /성호사설1/ 만승(萬乘) : 병거 만 대를 낼 만한 나라 즉 천자(天子)의 나라를 뜻함. /성호사설8/ 만악(?樂): 음악의 조화를 돕기 위해 넣는 여러 가지 소리. 잡악(雜樂). 만약 …… 놀라리라 : 자운(紫雲)은 당(唐) 나라 두목(杜牧)이 어사(御史)로 낙양(洛陽)에서 근무할 때 자주 출입하던 이원(李愿)의 집 기생 이름이다. 두목이 다짜고짜 이 기생을 찾고는 그녀를 달라고 하자, 어처구니가 없어 이원은 고개를 숙인 채 웃고 기생도 고개를 돌리고 크게 웃었다 한다. 《唐詩紀事 杜牧》 소식(蘇軾)의 문이공택음부국박가대취(聞李公擇飮傅國博家大醉)에 이 고사를 차용, “자운이 할 말 있으니 그대 아느뇨? 분사의 직책 맡은 어사일랑 불러오지 말라네.[紫雲有語君知否 莫喚分司御史來]라 하였다. 여기서는 그 의미를 뒤집어 만약 기생을 불러 황신(黃愼)을 보게 한다면, 두목처럼 여색을 탐내지 않음을 알고 그의 풍류를 높이 인정할 것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황신이 당시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있었기 때문에 어사(御史)라 불렀던 것이다. 〔월사집〕 만약 …… 다르랴 : 잘못이 있으면 즉시 고쳐야지 미적미적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맹자가 “이제 날마다 그 이웃집 닭을 훔치는 어떤 사람이 있거늘 누가 그에게 ‘이는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하니, 그 사람이 ‘숫자를 줄여서 달마다 한 마리씩 닭을 훔쳐 내년이 오길 기다린 뒤 그만두겠습니다.’ 하는 식이로다.” 하였다. 〔월사집〕 만약 …… 뿐이겠는가 : 신야(莘野)는 유신국(有莘國)의 들로 옛날 이윤(伊尹)이 이곳에서 농사짓다가 탕왕(湯王)의 정중한 초빙을 받고 세상에 나가 상(商)나라를 일으켰다. 조양(朝陽)은 아침햇볕이 떠오르는 동산(東山)으로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새가 저 높은 산에서 울도다. 오동나무가 저 조양에서 자라도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 하였는 바, 봉황새는 오동나무에 둥지를 트는 영조(靈鳥)로 훌륭한 선비를 상징한다. 여기서는 “남명이 만약 이윤처럼 초빙되어 세상에 나왔다면 어찌 일반적인 훌륭한 선비에 그칠 뿐이겠는가.” 라는 뜻이다. 만약 …… 않았으리 : 한(漢) 나라 개관요(蓋寬饒)의 자가 차공(次公)이다. 하루는 평은후(平恩侯) 허백(許伯)이 새 집을 낙성하여 벌인 잔치에 가서 허백이 손수 술을 따루어 권하자 “나에게 술을 많이 주지 마오. 나는 술 주정뱅이[酒狂]입니다.” 하니, 이에 승상 위후(魏侯)가 웃으면서 “차공은 깨어 있을 때도 주정을 부리는데 굳이 술을 마셔야만 주정을 부리겠는가?” 하니,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질시하였다. 《漢書 蓋寬饒傳》 여기서는 차공이 만약 타락의 맛을 알았으면 술을 버리고 타락을 마셨을 터이고 따라서 술을 많이 따루지 말라는 따위의 경계는 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용재집〕 만약 …… 주시오 : 자신을 은근히 노자(老子)에 비겨 말한 것이다. 1권 주 ‘푸른 …… 나가서’ 참조. 〔월사집〕 만언(萬言)의 솜씨 : 매일 만언의 긴 문장을 지을 수 있는 솜씨라는 뜻으로, 재기(才氣)가 넘치고 문사(文思)가 민첩함을 뜻한다. 당(唐) 나라 이백(李白)의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 “청천데 날마다 만언의 문장을 시험하되 문장이 완성되길 말에 기대어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데서 유래한다. 《古文眞寶 後集》 〔용재집〕 만일 …… 걱정할까 : 혜가(?家)는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인 혜강(?康)의 아들 혜소(?紹)의 집안을 이르는바, 큰 아들이 일찍 요절하자, 종손인 한(翰)을 양자로 삼았다. 백도(伯道)는 동진(東晉)의 재상인 등유(鄧攸)의 자(字)인데, 후조(後趙) 석륵(石勒)의 난을 만나 어린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하다가 두 아이를 온전히 보전할 수 없자, “아우가 일찍 죽고 오직 한 조카만이 있으니 도리상 후사(後嗣)를 끊을 수 없다.” 하여, 자기 자식은 버리고 조카만 데리고 떠났는데 끝내 후사가 없었다. 만장(滿臟) : 장물(臟物)이 가장 많은 액수에 차다. 《大明律 刑罰 受臟》에 의하면, 벼슬아치로서 법을 어겨서 재물을 받은 것이 환산하여 돈 80관(貫) 이상이 되면 교형(絞刑)에 처하는데, 장물이 80관 이상인 것을 만장이라 한다. /중종실록10/ 만전(蠻?)1 : 고려에서 생산되는 견지(繭紙)를 이른다. 만전(蠻?)2 : 오랑캐들이 쓰는 종이. 곧 필적을 얻기 위해 들고 오는 그들의 지물. /해행9-316/ 만전지식(萬錢之食) : 진(晋)나라 때의 정승인 하증(何曾)은 굉장한 식도락하는 사람으로 한때에 만전(萬錢)을 들여서 음식을 장만하였어도 먹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한탄하였다 했다. /대동5-62/ 만절필동(萬折必東) : 중국에서 시냇물이 아무리 구비 돌아도 끝내는 동쪽 바다로 들어가듯이 우리 나라도 명(明) 나라를 종주국으로 모시는 충성이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월사집〕 만정(萬井) : 고대에 사방 1리(里)의 땅을 1정(井)이라 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천가만호(千家萬戶)의 번화한 저자를 뜻한다. 〔월사집〕 만정(?亭) : 무이(武夷) 일곡(一曲)에 있는 만정봉(?亭峯). 만종(萬鍾) : 6곡 4두(六斛四斗)를 종이라 한다. 만 종은 가장 만은 녹을 말한다. /하곡2-185/ 만촉(蠻觸) : 사소한 일로 인하여 서로 반목하여 크게 다투는 것을 말함. 만(蠻)과 촉(觸). 장자(莊子)가 가설적으로 말한 두 작은 나라 이름. 《莊子 則陽》에 와우(蝸牛) 즉 달팽이의 왼쪽 뿔에는 만씨(蠻氏)의 나라가 있고 오른쪽 뿔에는 촉씨(觸氏)의 나라가 있어, 서로 땅을 다투어 싸워서 시체 수만을 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작은 일을 가지고 부질없이 다투는 것을 풍자하는 말이다. /중종7-83/ 만취(晩翠)1 : 김사원(金士元)의 호가 만취당(晩翠堂)이다. 만취(晩翠)2 : 송 나라 재상이었던 범질(范質)이 그 형의 아들이 벼슬을 올려 주기를 구했을 때, 조급히 굴지 말 것을 깨우친 시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그 시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灼灼園中花 화려한 정원 가운데 화초 早發還先萎 일찍 피지만 도리어 먼저 시들고 遲遲澗畔松 더디게 자라는 계곡 사이 소나무 鬱鬱含晩翠 울창하게 늦도록 푸른 빛 머금네 범질의 자는 문소(文素),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졌으므로 범노공이라 한다.《小學》 <嘉言> 만하육진(滿河六鎭) : 이조 세종 때에 김종서(金宗瑞)를 시켜서 두만강 가에 여섯 진을 설치한 것. 즉 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온성(穩城)·종성(鍾城)·회령(會寧). → 육진(六鎭) /경세1-146/ 만호(萬戶) : 조선 시대 각 도의 진(鎭)에서 군사를 통솔하는 종4품의 무관 벼슬이다. 만환(漫?) : 원래 문체의 파손 또는 퇴색된 것을 칭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말을 얼버무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알아듣지 못하게 한 것임. /연행7-221/ 많이들 …… 있었지 : 원숭이가 중국 남방에 많이 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월사집〕 말 …… 없고 : 공자가 주(周) 나라로 가서 태묘(太廟)를 둘러보았더니 우측 계단 옆에 금으로 빚은 사람, 금인(金人)이 있는데 그 입을 세 겹으로 봉(封)하고 등에 “옛날에 말을 삼가한 사람이다.”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한다. 《劉向 說苑 敬愼》 〔용재집〕 말 …… 하랴 : 중국 사신들이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조선으로 다시 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다. 〔용재집〕 말 거꾸로 탄 건 : 술 취해서 말에 거꾸로 실려서 가는 것이다. 〔용재집〕 말갈(靺鞨) : 만주(滿洲) 동북 지방에 있던 퉁구스의 한 종족. 대조영(大祖榮)은 속말 말갈(粟末靺鞨)을 이끌고 발해국(渤海國)을 세웠고 흑수 말갈(黑水靺鞨)은 여진국(女眞國)을 세웠다. /성호사설7/ 말감(末減) : ① 가장 가벼운 형벌에 처하는 것. /연2-219-32/ ② 가장 낮은 등급(等級)으로 낮춤. 법률(法律)이 허용하는 한 가장 가벼운 처벌규정(處罰規程)을 적용하는 것을 말할 뿐이 아니라, 조세(租稅)를 징수(徵收)하는 경우 등에도 마찬가지이다. 《中宗實錄 十二年 八月 甲子》 말계(末契) : 하교(下交)와 같은 말로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적은 사람과 사귐을 뜻하는 바, 서로 교제하는 사이에 상대방을 높일 때 쓰인다. 월사가 심희수보다 16세나 어리다. 〔월사집〕 말계(末契)에 의탁하고 : 하교(下交)와 같은 말로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적은 사람과 사귐을 뜻하는 바, 서로 교제하는 사이에 상대방을 높일 때 쓰인다. 〔용재집〕 말대필절(末大必折) : 위가 약하고 신하들이 강성하면 제어하기가 어렵다는 비유. 《좌전(左傳)》 소공(昭公) 11년조에 ‘끝이 크면 꺾어지고, 꼬리가 길면 흔들기 어려운 법’[末大必折 尾大不掉]이라 보임. /중종4-230/ 말도 …… 것이요 : 후한(後漢) 때 환전(桓典)은 환관들이 권병(權柄)을 잡고 있는데도 전혀 거리낌 없이 행동하였는다. 그가 늘 총마(?馬)를 타고 다녔는데, 경사(京師)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길을 가다가 멈춰서 총마를 탄 시어사(侍御使)를 피하라.” 하였다. 《後漢書 桓典傳》 여기서는 사간원의 관원을, 사람들이 위엄에 눌려 피한다는 뜻이다. 〔용재집〕 말리(茉莉) : 물푸레나무 과(科)에 속하는 상록 관목으로서 관상용 또는 향유(香油) 원료를 채취하기 위하여 재배한다. 이 나무는 수토(水土)를 따라서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말마다 …… 이네 : 시어가 모두 아름답다는 의미이다. 이백의 시 ?오야제(烏夜啼)?에서 “베틀에서 비단 짜는 진천의 여인이여, 안개같이 푸른 비단은 창 너머서 들려오는 말소리.[機中織錦秦川女 碧紗如煙隔窓語]”라고 하였다. 말망(末望) : 어떤 후보자를 주의(注擬)함에 있어서, 제1인을 수망(首望), 제2인을 부망(副望), 제3인을 말망이라 함. 수점(受點)은 위의 재결을 얻었다는 뜻. /중종실록 4/ 말명(末命) : 임종(臨終)할 때의 유언(遺言). 서경(書經)에, “임금이 옥궤(玉?)에 기대어 말명(末命)을 도양(道揚)하였다. [王后憑玉? 道揚末命]”하였다. 말선(襪線) : 버선의 끈. 재능이 짧음을 뜻한다. 《북몽쇄언(北夢??????言)》 5권에 “조정의 선비 이태하(李台瑕)가 ‘한팔좌(韓八座)의 기예는 마치 버선실을 풀어 놓은 것 같아 한 가닥도 긴 것이 없다.’ 하였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월사집〕 말을 …… 뛰어났네 : 성인(聖人)은 공자(孔子)를 가리키는 바, 공자가 일찍이 옛날 여관집 주인의 상(喪)을 만나 곁말을 벗겨 부의(賻儀)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말을 …… 법 :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를 차용하였다. 〔용재집〕 말을 먹이고 : 원문은 ‘抹’인데, 문맥상 ‘?’의 오자로 보아 고쳐 번역하였다. 말이 …… 부끄럽나니 : 두릉(杜陵)은 당(唐) 나라 때 두씨(杜氏) 일족이 세거(世居)하던 곳으로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의 시 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서 자신의 시 짓는 자세를 말하여 “나의 성격이 좋은 싯구를 몹시 좋아하여 시어(詩語)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노라.[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 하였다. 〔월사집〕 말작(末作) : 고대에 농업을 중시해서 상공업을 말작이라 하였음. 《주례》태재(太宰) 9부(賦)의 소(疏)에 “先王 以農爲本 故謂之平民 非農民者爲末作”이라 했다. /경세유표3/ 말질(末疾)1 : 사지(四肢)에 걸리는 병. 여기서는 발에 걸린 종기를 가리킨다. 〔용재집〕 말질(末疾)2 : 사지(四肢)에 걸리는 일종의 중풍과 같은 병이다. 〔용재집〕 말채찍 : 춘추전국 시대 때 진(晉) 나라 사회(士會)가 진(秦) 나라에 머물다가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 진(秦) 나라 대부 요조(繞朝)가 말채찍을 주었던 고사가 있다. 후세에 시문(詩文)에서 증별(贈別)의 뜻으로 쓰인다. 〔월사집〕 말통만큼 큰 담 : 삼국시대 촉(蜀) 나라 장수 강유(姜維)가 죽었을 때 보니 담이 크기가 말통만하였다는 데서 온 말로 매우 담이 큼을 뜻한다. 《三國志 蜀志 姜維傳 裵松之注》 〔월사집〕 말흘탄(末訖灘) : 본군 북쪽 25리에 있는데 근원은 양덕현(陽德縣)에서 나와 평양 대동강으로 흘러 들어감. /완당집3/ 말희(末嬉) : 하(夏)나라 마지막 임금 걸(桀)의 비(妃)로서 자태는 아름다웠으나 덕이 부족했는데 걸이 그 말을 들어 정사를 어지럽혔음. 마침내 걸과 말희는 은(殷)나라 탕왕(湯王)에게 추방당하여 남소(南巢)에서 죽었음. 맑고 …… 속였구나 : 어부사(漁父辭)에, 어부가 “뭇사람들이 모두 취했거든 어째서 술지게미를 먹고 묽은 술을 마시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처신하여 스스로 ?겨나고 말았습니까?” 하고 묻자, 굴월이 “어찌 청결한 몸으로 더러운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차라리 상강(湘江)에 가서 강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내지, 어찌 결백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 하였다. 여기서는 용재 자신이 술을 마시는데 반해 굴원이 맑고 깨끗함을 지키느라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용재집〕 맑고 투명하며 : 〈우계시서(愚溪詩序)〉에는 ‘透’가 ‘秀’로 되어 있다. 의미상의 변화는 없다. 맑은 …… 것을 : 중양절에는 국화꽃을 술에 띄워서 마시는 풍속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월사집〕 맑은 …… 당하누나 : 이 때 호수에 배를 띄우고 놀았기에 이렇게 말한 듯하다. 〔용재집〕 맑은 …… 않으나 : 오늘밤도 날씨가 맑아 어김없이 밝은 추석 달이 떴다는 뜻이다. 〔월사집〕 맑은 …… 이었으니 : 가문의 명성을 두 형제가 이었음을 뜻한다. 정광성의 아버지 정창연(鄭昌衍)은 좌의정, 형 정광경(鄭廣敬)은 대사헌 · 이조참판, 조부 정유길(鄭惟吉)은 좌의정에 벼슬이 이르렀다. 고조는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다. 〔월사집〕 맑은 …… 절하리 : 선산(仙山)인 한라산에 올라가 신선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요단(瑤壇)은 좋은 옥으로 만든 대(臺)로,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한다. 〔월사집〕 맑은 …… 했구려 : 백접리(白接?)는 백로의 깃으로 장식한 모자로, 진(晉) 나라 때 고사(高士) 산간(山簡)이 즐겨 썼다 한다. 백사(白沙)가 아이종 한 명만 데리고 동루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월사집〕 맑은 낮의 향로를 대하고 : 서산(西山) 진덕수(眞德秀)의 <심경찬(心經贊)>에 “밝은 창 앞 비자 나무 책상에서, 맑은 낮에 향불을 피우고, 책을 펴고 엄숙히 앉아, 나의 마음을 섬기노라.[明窓?? 淸晝?薰 開卷肅然 事我天君]”는 구절이 있다. 맑은 얼음 한 가닥 : 일조빙(一條氷)이라 하여 청환(淸宦)의 귀한 직함을 뜻한다. 여기서는 백사 이항복이 월사를 가리켜 말하였다. 〔월사집〕 망(望) : 어느 직임에 합당한 후보자. 관리 임명에 앞서 전조(銓曹)가 그 벼슬에 합당한 후보자를 임금에게 천거하는데 이것을 의망(擬望)이라 한다. 삼망(三望)을 주의하는 것이 상례이나, 합당한 후보자가 모자라거나 특정한 사람을 그 벼슬에 임명해야 할 까닭이 있으면 이망(二望 : 두 사람의 후보) 또는 단망(單望 : 한 사람의 후보)을 주의하는 경우도 있다. /중종실록 43/ 망고(網?) : 물고기나 鳥獸를 잡는 그물. 망궁례(望宮禮) : 황태자의 탄일(誕日)에 정전(正殿)에 중국 궁정(宮庭)을 본뜬 자리를 만들어 놓고 국왕이 왕세자 이하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하배(賀拜)하는 의례(儀禮). 《世宗實錄 五禮儀 嘉禮 皇太子千秋節望宮行禮儀》 망궐례(望闕禮) : 망궐례(望闕禮)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관[外官]이나 사신(使臣)이 객사(客舍)에 안치된 궐패(闕牌)에 절하던 예식을 말한다. 이는 외관이나 사신이 왕을 공경하고 충성을 다한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왕과 궁궐을 상징한 나무에 궐(闕)자를 새긴 패를 만들어 각 고을 관아의 객사에 봉안해 놓고 예를 올렸다. /해행 6/ 망기(忘機) : 《열자(列子)》에, “바닷가의 한 사람이 매일 해오라기와 친하게 놀아서 해오라기가 사람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내일은 해오라기 한 마디를 잡아서 내가 보게 하여라’하였더니, 이 이튿날에는 해오라기들이 공중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하였다. 그것은 전에는 해오라기를 어떻게 하겠다는 기심(機心)을 잊었던 때문에 해오라기들도 무심하게 친해진 것이요, 뒤에는 ‘해오라기를 잡겠다’는 기심이 있기 때문에 해오라기가 피한 것이다. /대동14-257/ 망기(望記) : 그 직임에 합당한 자를 적은 문서. 곧 후보 명단. 망단자(望單子)·망통(望筒)이라고도 한다. /중종실록42/ 망기(忘機) : 기심(機心)을 잊는 것으로 기심은 물건을 해치는 나쁜 마음을 이른다. 망념작광 극념작성(罔念作狂 克念作聖) : 書經 多方篇에 《성인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이 되고, 광인이라도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될수 있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는 말이 있음. 망단자(望單子) : 三望을 기록한 단자. 관원을 임용할 경우에는 3인의 후보자를 추천하여 그 중의 한사람이 지명을 받아 임명함을 원칙으로 한다. 망단피령(?緞披領) : 망룡(?龍)을 그린 비단으로 만들어서 어깨에 걸치는 것. 《피(披)》는 걸치는 옷. /연행6-222/ 망대형(亡大兄) : 망대형은 진 간문제(晋簡文帝)의 세자인 도생(道生). 성품이 조급하고 예도(禮度)에 어긋나는 일이 많아 유폐되어 24세 때 죽었다. 사마 순지(司馬珣之)는 서양왕(西陽王) 사마 양(司馬?)의 현손(玄孫). 《晉書 卷六十四 列傳 第三十四》 /선조실록 31/ 망룡(?龍) : 망은 구렁이인데 용 모양과 같으므로 용 그린 비단을 망룡사(?龍紗)라 함. /연7-72-20/ 망민(罔民) : 백성의 무지(無知)함을 역이용하여 죄망(罪網)에 걸려 들게 하는 것을 뜻하는 말. 《孟子 梁惠王上》 /명종실록6/ 망부계(亡?計) : 적이 고의로 포로를 도망쳐 보내어 거짓 정보를 누설함으로써 양장군의 군대를 적진으로 유인하였던 듯하다. 〔월사집〕 망사대(望思臺) → ① 정형(井?) ② 무제의 태자가 강충의 모함을 받자 강충을 죽이고 무제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자살하니 무제가 후회하여 망사대를 지어 아들을 생각하였다. /동문선 4-145/ 망상(罔象) : 물속의 괴물(怪物). 《史記 孔子世家》에 “물속의 괴룡(怪龍)을 망상이라 한다.” 하였다. /청장관전서1/ 망석구(忘射鉤) : 죽이려고 하던 것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말. “노(魯)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자규(子?)를 들여 보낼 적에 관중(管仲)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거(?)의 길을 막고 소백(小白 : 환공을 말함)을 쏘아서 그 화살이 소백의 대구(帶鉤)에 맞았었다.” 하였다. 《史記 齊世家》 /해행8-327/ 망시수(亡是?) : 망시공(亡是公)이라고도 하며 실제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을 뜻한다.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자허부(子虛賦)에서 자허(子虛) · 오유선생(烏有先生) · 망시공(亡是公), 세 가공의 인물을 설정하여 문답을 전개하였던 데서 유래한다. 〔용재집〕 망실(望實) : 덕망과 실상. 곧 명실(名實). 망양지탄(亡羊之歎) : 예전 양주(楊朱)라는 사람에게 이웃에서 심부름하는 아이를 좀 빌려달라 하므로 양을 몇 마리나 잃었기에 많은 사람이 필요한가 하고 되물으니, 갈려 가는 길이 많아서 여러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찾지 못하고 돌아왔으므로 왜 못 찾았는가 하고 물으니, 갈림길이 가면 갈수록 더 갈라져 있어서 그 사람보다 갈림길이 더 많으므로 찾지 못하였다 한다. 그래서 양주가, “이웃사람의 갈림길이 많으므로 양을 잃었고, 배우는 사람[學者]은 이목이 많아서 본성을 찾지 못한다.”고 탄식하였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양주읍기(楊朱泣岐)라 한다. 승람4/ 망운(望雲) :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당(唐) 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태항산(太行山)에 있을 때 그의 어버이는 하양(河陽)에 있었는데 하늘에 흰구름이[白雲]이 외로이 떠 있자 좌우의 사람들에게 “나의 어버이가 저 아래 계신다.” 하고는 서글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구름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그 자리를 떠났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新唐書 //狄仁傑傳》 〔월사집〕 망운지사(望雲之思) : 타향에 있는 자식이 고향의 부모를 그리는 마음.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병주(竝州)의 법조참군(法曹參軍)이 되어 태행산(太行山)에 올라 흰 구름이 외로이 나는 것을 보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우리 어버이가 저 밑에 계신다”고 하면서, 울음한 마음으로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구름이 사라진 뒤에 내려왔다고 한다. 《唐書 狄仁傑傳》 /양촌3-109/ 망원정(望遠亭) : 지금 제 2 한강교 근처에 있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지은 정자(亭子). 망원동이라는 동명(洞名)도 여기에서 유쾌함. /경세3-388/ 망이(望夷)의 말(馬) : 망이는 진(秦) 나라 궁전인 망이궁(望夷宮)의 약칭. 진 나라 승상 조고(趙高)가, 진 나라 국권(國權)을 독차지하려 하나 군신(君臣)들이 따라주지 않을까 염려하여 군신들을 꼼짝하지 못 하게 하기 위해, 이세 황제(二世皇帝)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 하자, 이세는 웃으면서 ‘승상이 착각했나?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구나.’하고 좌우에 물으니, 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혹은 ‘말’이라고 대답하기도 하였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를 모두 법으로 다스렸으므로, 그후로는 군신들이 모두 조고를 무서워하여 감히 그의 허물을 말하지 못했다는 고사이다. 즉 웃사람을 농락하여 위세를 마음대로 부리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史記 卷六 秦始皇本紀》 /명종실록4/ 망이(望夷)의 화(禍) : 망이는 진(秦) 나라 때 궁궐로 조고(趙高)가 이세(二世) 황제 호해(胡亥)를 이곳에 죽였다 한다. 〔용재집〕 망인지자(亡人之子) : 도망친 사람은 괴외. 아들은 출공 첩(出公輒)을 이름. 괴외가 추방된 뒤 영공이 죽자, 위 나라에서는 괴외의 아들 첩을 임금으로 세웠다. 그 진(晉)나라 조씨(趙氏)에게 망명해 있던 과외는 조씨의 도움을 얻어 환국(還國)하려 하였으나 위 출공은 군사를 동원하여 부자간에 공방전을 벌였다. 그 4년 뒤 괴외는 위 나라의 권신 공회(孔?)의 도움으로 출공 첩을 몰아내고 드디어 임금이 되었다. 이가 바로 위 장공(衛壯公)이다. 출공은 노(魯) 나라로 망명하였다가 3년 뒤에 다시 호나국하여 임금이 되었음. 《史記 衛康叔世家》 /성호8-339/ 망저군(望諸君) : 성명은 악의(樂毅), 망저군은 봉호(封號). 전국(戰國) 때 연(燕)나라 사람. 어질고 군사를 좋아하여 소왕(昭王)의 아경(亞卿)이 되고, 상장군(上將軍)에 제수되어 연(燕)·조(趙)·초(楚)·한(韓)·위(魏) 다섯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제(齊)의 70여 성(城)을 함락시켜, 그 공으로 창국(昌國)에 봉해짐. 《史記 八十》 /연행6-351/ 망전(忘筌) : 《장자》》 외물(外物)에 보이는 득어망전(得魚忘筌)의 준말로, 본래는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는다’는 것으로, 도를 얻으면 그 수단을 버린다는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서는 강 가에서 낚시질하는 늙은이가 물고기 잡기를 잊은 채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있음을 뜻하고 있다. 〔용재집〕 망정혼취(望呈婚娶) : 임금의 일가가 자기 자녀(子女)와 어느 사대부(士大夫)의 자녀를 결혼(結婚)시키기를 바란다고 나라에 청하면 그 사대부 집에서는 원지 않더라도 억지로 혼인하게 하는 제도(制度) ○ 宗室蓮城君●等上書 請依祖宗例 從望呈婚娶事 下宗簿寺 - 宗室子女年當婚嫁 聽其家所自願與士大夫某人子女爲婚 雖非士大夫情願 抑使婚娶所謂舊制- 《中宗實錄 五年 十一月 癸酉》 망제(忘蹄) : 망전(忘筌)이라고도 하는데, 《장자(莊子)》 외물(外物)의, “통발은 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니 일단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어버리고,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니 일단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를 잊어버린다.[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는 말에서 나왔다. 여기서는 세상사를 초월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망제(望帝) : 주 나라 말의 촉왕(蜀王). 이름이 두우(杜宇)인데, 타인에게 위(位)를 전하고 서산(西山)에 들어가 숨었다가 뒤에 죽어서 원혼이 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음. 그 울음 소리가 처절하여 능히 객수를 자아낸다고 함. 자규(子規) 촉혼(蜀魂)이라고 부르기도 함. 후인들이 망제의 덕을 사모하여 두견새의 울음을 듣고 절을 하였다는 전설을 말한다. 망조병(忘助病) : 아주 잊어 버리는 것과 서두르는 병. /퇴계집 5 2-369/ 망질(望秩) : 산천(山川)을 바라보고 희생(犧牲)·폐백(幣帛)·위차(位次)들의 차서(次序)를 맞추어 제사한다는 뜻. /세종실록 47-150/ 망참(妄參) : 참석할 자격이 있고 또 참석해야 할 조정 공론을 잊어버리고 참석하지 않은 경우에 철벌하는 죄명인 듯함. /연8-130/ 망천(輞川) 그림 : 서문 주 ‘망천(輞川)’ 참조.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망천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있는 시내로, 당(唐) 나라 때 유명한 시인 왕유(王維)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사랑하여 별장을 두고 벗들과 어울려 시주(詩酒)를 즐겼다 한다. 《新唐書 文藝傳》 〔월사집〕 망천(輞川)2 :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서 발원하는 물이름인데 풍광이 매우 빼어나다고 함. 당 나라 시인 왕유(王維)가 이 곳에 별장을 짓고 망천의 열 두 가지 승경(勝景)을 정하고는 배적(裴迪)등과 함께 서로 창화(唱和)하였다고 함. 《新唐書 文藝傳》 〔월사집〕 망천(輞川)의 장원 : 서문 주 ‘망천(輞川)’ 참조. 〔월사집〕 망천(輞川1) : 당(唐) 나라 시인 왕유(王維)를 가리킨다. 망천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있는 시내로, 당(唐) 나라 때 유명한 시인 왕유(王維)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사랑하여 별장을 두고 벗들과 어울려 시주(詩酒)를 즐겼다 한다. 《新唐書 文藝傳》 〔월사집〕 망촉(望蜀) : 더 바라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사람이 만족을 알지 못함이 괴롭다. 이미 농 땅을 얻었는데 다시 촉 땅을 바란다.[人苦不知足 旣得? 復望蜀]”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망탁(莽卓) : 동한(東漢)의 왕망(王莽)과 동탁(董卓)을 가리킨다. 왕망은 왕위를 찬탈하여 자칭 황제가 되고 신법(新法)을 만들어 백성을 괴롭히다가, 만년에 광무제(光武帝)가 기병(起兵)함으로 인해 상인 두오(杜吳)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동탁 역시 음란하고 흉악한 자로 왕위를 농락하며 찬역을 도모하다가 끝내는 여포(呂布)에게 살해되었다. 《漢書 卷九十九, 後漢書 卷一百二 英雄記抄》 /선조실록17/ 망탕산(芒?山)에 천자의 기운 : 진시황이 늘 ‘동남방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 하여, 동쪽으로 행차하여 그 기운을 누르고자 하였는데, 훗날 한 고조(漢高祖)가 된 유방(劉邦)이 자신이 장본인이라 여겨 망탕산으로 숨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오색 구름이 떴다 한다. 《史記 高帝本紀》 〔용재집〕 망합(莽哈) : 본명은 아령개망합(阿令介莽哈)으로, 망합은 종성(鍾城) 근처에 세력 있는 추장이다. 국가에서 그들의 회유하기 위해 연산군 9년에 가선대부의 준직(準職)을 제수하였다. 《燕山君日記 11月 5日》 망해도법(望海圖法) : 망해도법은 곧 바다 가운데 있는 산을 육지에서 건너다보고 그 거리를 측정하는 산법(算法) /연행7-42/ 망향대(望鄕臺) : 망향대는 본래 한 성제(韓成帝) 때의 장군. 왕궤(王潰)가 변방을 지키러 갔다가 왕망(王莽)이 찬역하자 궤(潰)가 호(胡)로 도망와서 부하들과 함께 대를 쌓아 거기에 올라 고향 있는 곳을 바라본 곳이다. 여기서는 이 능의 처지가 그와 비슷하므로 원용(援用)한 것이다. /삼봉집 1/ 매(?) : 매(?)는 등의 고기이니, 마음 위에 있어 물(物)에 느끼지 못하고 사사 관계됨이 없음이다. /담헌1-150/ 매각(梅閣) : 고을원의 처소를 말하는데, 동헌(東軒)과 같은 말이다. 매검매우(賣劒買牛) : 칼을 팔아 소를 삼. 전쟁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음을 말함. [漢書 循吏 ?道傳]에 齊나라 習俗이 사치롭고 자자분한 꾀나 부리고, 농사짓기 싫어하는 것을 보고, ?道가 몸소 검약하면서 백성에게 農學을 권하여, 長劍을 가진 者는 그걸 팔아 소를 사게 하고, 短刀 가진 이는 그걸 팔아 송아지를 사게 하니 마침내 郡中이 모두 넉넉해졌다고 함. 매고(枚皐) : 한나라 사람 매승(枚乘)의 아들, 자는 소유(少孺). 무제 때 랑(郞)이 되었으며 해학(諧謔)을 좋아하여 동방삭(東方朔)에 비겨졌음. 부(賦)를 잘 지었으며 문사(文思)가 민첩하였음. 《한서》 51. 매곡(昧谷) : 해 지는 서쪽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중국에서 서쪽인 즉 서역(西域)을 말한다. /오주연문-17/ 매궤환주(買櫃還珠) : 초(楚) 나라 사람이 목란(木蘭)의 궤를 만들어 주옥으로 장식을 하고 그 안에 옥을 넣어 정(鄭) 나라 사람에게 팔았더니, 정 나라 사람이 그 궤만 사고 옥을 돌려 주었다는 고사. 귀하게 할 것을 천하게 하고, 천하게 할 것을 귀하게 했다는 비유. 《韓非子 外儲說》 /면암집3/ 매대은(梅大隱) : 오숭량을 말함. 오숭량이 사인(私印)을 “梅隱中書”라 각하였음. /완당집3/ 매도관(梅都官) : 송 나라 매 요신(梅堯臣).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을 지냈음. /완당집3/ 매륜(埋輪) : 수레 바퀴를 땅에 묻고서 수레를 멈추게 하여 대열(隊列)이 흩어짐을 방지하는 일. 후한(後漢) 사람 장강(張綱)이 지방 풍속을 순찰하라는 명을 받자, 먼저 요로(要路)의 간신(奸臣)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主張)하면서, 수레 바퀴를 땅에 파묻고 가지 않았다는 고사(故事). 《後漢書 卷五十六 張綱》 /중종실록 50/ 매륜지어사(埋輪之御史) : 후한 때의 장강(張綱)을 말한다. 그가 어사로 임명 되어 지방 풍속을 바로 잡으라는 명을 받았으나, 먼저 요직에 있는 간신을 없애라고 하여 낙양에 차륜을 묻고 나가지 않았으며, “어찌 호리(狐狸)를 그대로 두랴”하면서 양기(梁冀)등을 탄핵하였다. 뒤에 광능태수(廣陵太守)가 되어 광능의 족 장영(張?)을 설복시켰다. 《後漢書》 /율곡집1/ 매복(枚卜) : 관원에 뽑히는 것을 말함. 《서경》에 “공이 있는 신하를 두루 점쳐서 오직 그 길함을 따른다.[枚卜功臣 惟吉之從]”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 유래함. 《書經 大禹謨》. 매복(梅福) : 전한(前漢) 말기 구강군(九江郡) 수춘(壽春) 사람으로 벼슬이 남창위(南昌尉)이며, 자는 자진(子眞). 《상서(尙書)》와 《곡양춘추(穀梁春秋)》에 밝아 군(郡)의 문학(文學)이 되었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갔다. 그 뒤 왕망(王莽)이 한 나라를 찬탈하자 처자를 버리고 구강(九江) 지방으로 간 뒤로는 종적이 묘연했다. 얼마 후 회계(會稽)에서 매복을 본 사람이 있는데, 변성명하고 도술을 배워 신선이 되었다 하며 중국 남부 지방에 그가 수련했다고 전하는 유적이 많다. 《한서》 67 매사(?師) : 동방 소수민족의 노래와 춤에 대한 사무를 맡은 벼슬아치. 매사골(買死骨) : 옛날에 어느 임금이 천리마(千里馬)를 사려고 금 천 근을 주어 보냈었더니 가본즉 천리마는 죽었다. 심부름하는 사람이 그 죽은 말의 뼈다귀를 금 5백 근을 주고 사왔다. 임금이 꾸짖으니 대답하기를 ‘죽은 천리마의 뼈를 5백금에 사왔다는 소문이 나면 앞으로 천리마가 올 것입니다.’ 하였더니, 과연 얼마 후에 산 천리마를 몰고 온 사람이 많았다. /해행5-641/ 매사마골(買死馬骨) : 전국(戰國) 때 곽외(郭?)가 연 소왕(燕昭王)에게 한 말로, 천금으로 천리마를 사러 갔던 연인(涓人 : 궁인)이 천리마가 죽고 없어 5백금을 주고 죽은 그 말뼈를 사왔더니, 1년 안에 천리마가 세 마리나 왔다는 고사인데, 즉 훌륭한 선비를 초치하려면 그만 못한 선비부터 후대하여 초치해야 한다는 비유. 여기서는 “사내가 한번 죽는 것은 면할 수 없으니 죽은 영혼이라도 기생들 틈에서 놀자.”한 것이, 죽은 말뼈라도 사들이는 의사와 같다는 뜻. /연행9-27/ 매산(梅山) :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호. 자는 백응(伯應), 관향은 남양(南陽). 시호는 문경(文敬). 매서운 …… 끄누나 : 북풍이 매섭게 불어서 야외에서 글씨를 쓰려니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춘추시대 노(魯) 나라 복자천(宓子賤)이 단보(亶父)라는 고을 다스리러 갈 때 노 나라 임금이 참소하는 사람의 말을 믿고 자신을 신임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이에 그는 계책을 내어 두 사람의 서리(書吏)로 하여금 글씨을 쓰게 해놓고 자신이 곁에서 팔뚝을 잡아 끌면서 방해해놓고 글씨가 좋지 못하면 노기를 띠었다. 이에 서리가 글씨 쓰기를 포기하고 떠났고, 노 나라 임금이 탄식하면서 그 뜻을 알아차렸다 한다. 《呂氏春秋 具略》 〔용재집〕 매선(埋扇) : 부채를 땅 속에 묻는 것으로, 후기(候氣)의 한 가지 방법이다. 《수서(隋書)》 율력지에 “후제(後齊)의 신도방(信都芳)은 율관(律管)으로 후기하고 구름의 색채를 관찰했다. 일찍이 사람을 대해서 말하다가 하늘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맹춘(孟春)의 기(氣)가 이르렀다’ 하였는데 사람이 가서 율관을 징험해보니 재가 날아서 이미 기에 응하고 있었다. 그는 달마다 기를 관측하였는데 모두 그의 말과 어긋남이 없었다. 또 윤선(輪扇) 24개를 만들어 땅속에 묻고 24기를 관측했는데 한 기가 이를 때마다 한 부채가 저절로 움직이고 다른 부채는 멈추어 있었으며, 율관의 재와 서로 맞아 마치 부절(符節)을 맞추는 것 같았다.” 하였다. /오주17-81/ 매선(梅仙)1 : 매복(梅福)을 말함. 자는 자진(子眞). 젊어서 장안(長安)에서 배워 《상서(尙書)》와 《곡량춘추(穀梁春秋)》에 밝아 남창위(南昌尉)에 보임되었음. 뒤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났더니 왕망(王莽)이 집정하자 하루 아침에 처자를 버리고 구강(九江)으로 떠나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졌음. 그 뒤 회계(會계)에서 그를 본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성명을 바꾸고 오주(吳州)의 저자에서 문지기가 되었다고 함. 《한서》 67. 매선(梅仙)2 : 매선은 한(漢) 나라 때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자 처사를 버리고 신선이 되었다는 매복(梅福)을 말하는데, 그의 자(字)가 자진이다. 《漢書 卷六十七 梅福》 여기서는 매선을 빌려 매화의 일종인 것처럼 해학적으로 말한 것이다. /청2-251/ 매성유(梅聖兪) : 이름은 요신(堯臣), 당서 편찬에 참여하고 시로 구양 수와 교제 했음. 저서에 《당재기(唐載記)》·《모시소전(毛詩小傳)》·《완릉집(宛陵集)》이 있음. /성호사설7/ 매식(每食) : 《시경》 진풍(秦風) 권여(權輿) 장에, “나에게 하옥이 웅장했는데 지금은 매양 밥 먹을 적에도 넉넉한 것이 없구나.”라는 데에 보인다. /성호사설7/ 매실(梅實) …… 노래하고 : 결혼의 길일이 왔음을 의미한다. 《시경(詩經) 소남(召南) 표유매(?有梅)》에 “떨어지는 매실이여! 그 열매가 일곱 개로다. 나를 구하는 여러 남자들은 길일에 맞추어 올지어다.〔?有梅 其實七兮 求我庶士 ?其吉兮〕” 하였는 바, 윤집규(尹執圭)가 후취(後娶)를 정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매실이 …… 살림에랴 : 소동파(蘇東坡)의 <화전사기기제화(和錢四寄其弟?)>라는 시에 “어제 밤에도 빙화가 아직 기둥이었는데 새벽에 매자가 이미 사람을 살리네.[昨夜氷花猶作柱 曉來梅子已生人]”라고 하였는데, 매자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다른 나무보다 빨리 익어서 사람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단지 화창한 봄날이 찾아와 매실이 이미 생겨났음을 말한 듯하다. 매아(賣兒) : 자손이 귀하거나 자식을 낳아도 번번이 죽거나 하는 가정에서, 아이의 수명을 위해 부처·큰 바위·큰 나무 등에 수명 장수에 대한 여러 가지 뜻의 글자를 새기는 일. /연행11. 222/ 매양 …… 내렸지 : 동군은 동중서(董仲舒)를 말하는데, 《사기》 《유림열전(儒林列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중서는 한(漢) 나라의 학자로 소시에 《춘추(春秋)》를 전공하여 경제(景帝) 때에 박사(博士)가 되었는데, 휘장을 드리우고 강송(講誦)함에 그 얼굴을 볼 수 없었고 3년 동안 정원을 내다보지 않고 학문에만 독실하니 학사(學士)들이 모두 존중하였다고 한다. 매오(梅塢) :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禮安面)에 있는 지명. 매우(賣友) : 역기(?寄)는 전한 초의 재상 역상(?商)의 아들이요, 자는 황(況)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의하면, 한 나라의 제 2대 혜제(惠帝)가 죽은 다음 여후(呂后)가 여러 여씨(呂氏)를 등용하여 한 나라의 황실이 기울어졌는데 대신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이 역기를 시켜 군권을 장악한 역기의 친구 여녹(呂祿)을 권고해서 거느린 군사를 주발에게 인도하게 하니 여기서 주발 등은 군사력을 발동하여 여씨 일가 및 그 일당을 섬멸하고 한실(漢室)을 회복할 수 있었다. /중종5-296/ 매우(梅雨) : 초여름의 장마로, 매실(梅實)이 누렇게 익을 무렵에 장마가 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바, 황매천(黃梅天)이라고도 칭한다. 매위(?韋) : 꼭두서니 빛의 가죽으로 만든 군복, 군사(軍事)를 뜻함. 적색 가죽으로 만든 군복. 매잉(買剩) : 비장(裨將)들이 곡부(穀簿)에 밝지 못해서 각 고을의 국창(國倉)에 남는 곡식을 영리(營吏)들이 파는 것을 말함. 한 섬에 2백냥 짜리를 50~60냥에 팔아버리므로 이를 사면 큰 이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앞을 다투었다 한다. ○ 余在康津 每見吏屬 直指錢五六百兩走全州貿穀於營吏 還取於縣倉 名之曰買剩 謂諸邑皆有剩穀 營吏發賣 其一苦直二百者 或以五六十買之 以爲大利 爭先射之 一縣如此 諸邑可知 以此觀之 裨將不曉穀簿 使國用蕩竭 民膏?盡 多此類可不愼擇 《與猶堂全書 第十七卷 爲舍弟鐄贈言條》 매잠(海岑) : 정해현 동부에 위치한 산 이름. 전한 말의 학자로 은자가 된 매복(梅福) 자는 자진(子眞)의 은거지로 알려진 곳. 고려·일본 등지의 외항선이 이 곳으로 길을 잡아 항행하였다. /도경/ 매장사(埋葬使) : 흉년이 들어 중앙에서 진휼사(賑恤使)를 파견하면, 지방 수령들은 진휼에 성심을 다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면하기 위해 굶어서 죽어가는 백성들을 도랑에 쳐넣고 덮어버림으로써, 지적을 피했다. 이래서 백성들이 진휼사를 매장사라고 했었다. ○ 尹殷輔曰 祖宗朝 以大臣發遣 而使之賑救 然若有飢餓垂死之民 則其守令及勸農等 皆治罪 故幸有垂死之民 則恐賑恤使見之 納之溝瀆而掩之 非徒不能賑救 而反爲致死者甚多 以此時人語曰 非賑恤使乃埋葬使也 賑恤之事 名存實無 甚爲未使…… 《中宗實錄 二十四年 十一月 壬子》 매조부모부모교부대시율(罵祖父母父母絞不待時律) : ‘조부모·부모에게 욕한 자는 부대시로 교형에 처한다는 법률 조문’의 뜻. 《大明律 刑律 罵祖父母父母》에는 다만 “무릇 조부모·부모에게 욕한 자와 처첩(妻妾)으로서 지아비의 조부모·부모에게 욕한 자는 교형에 처하되, 친고(親告)하여야 처벌한다.”고만 하였고, ‘부대시’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참형(斬刑)·교형은 형이 확정된 뒤 추분후 춘분전에 집행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 때에 집행하는 것을 대시(待時)라 하고, 죄질(罪質)이 나빠서 이 때가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 집행하는 것을 부대시라 한다. /중종9-273/ 매종덕(邁種德) : 邁는 勇往力行의 뜻. 種은 편다는 뜻임《書經 大禹謨》에 “고요는 힘써 덕을 펴니 그 덕이 백성에게 내렸다(皐陶邁種德 德乃降)”이라 하였음. 매좌(買座) : 조선 후기 과거제도의 문란으로 생긴 폐단의 하나. 회시(會試)에는 일정한 정원이 있어 첩(帖)을 가진 자만이 시험장에 들어 가는데, 한 번 강(講)에서 떨어지면 백권(白券)을 가지고 퇴장당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가난하고 글을 잘 못하는 사람을 찾아가 첩을 사서 다시 응시했는데, 이를 매좌라 하였다. ○ 入會試者定額 故禁最嚴 一被講黜 則抱白券而退 且雖得帖 一帖只一人 其餘莫得入 於是訪貧而無文者 而買其帖 謂之買座 言 帖一座也 《梅泉野錄 卷一上》 매준골(買駿骨) : 좋은 말을 사려면 죽은 말의 뼈라도 사야 한다는 것으로 간절히 현자(賢者)를 구하는데 쓰는 말. 옛날 연 소왕(燕昭王)은 제(齊)에게 패망한 뒤에 왕위에 올라 어진 사람을 구하여 제 나라에 보복하려 하였다. 이에 곽외(郭?)에게 훌륭한 사람을 천거하여 줄 것을 청하였더니 곽외는 “엣날 어떤 왕이 천금(千金)을 가지고 천리마(千里馬)를 사려고 하였으나 구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연인(涓人 : 환관)을 시켜 천리마를 구하긴 했으나 말은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연인은 죽은 말의 뼈를 오백금(五百金)을 주고 사왔더니 이 소문을 듣고 1년이 못되어 천리마가 3마리나 이르렀다 합니다. 만일 왕께서 진정 어진 사람을 구하신다면 저부터 먼저 쓰십시오. 이렇게 하시면 저보다 훌륭한 사람이 곧 올 것입니다.” 하였다. 《戰國策 燕策》 /청장1-106/ 매창수구(梅窓秀句) : ① 정몽주(鄭夢周)가 일본 사신으로 가서 지은 시에, “매화 핀 창밖에 봄빛이 빠르고 목판 덮은 지붕에는 빗소리가 많다.”[梅窓春色早 板屋雨聲多]라 하였다. /해행5-415/ ② 매창판옥(梅窓板屋) /해행5-323/ 매처(梅妻) : 매화를 아내에 견주어 칭한 것으로 매형(梅兄)이라고도 한다. 매하(每下) : 매(每)는 최(最)와 유(愈)의 뜻. 매학(梅鶴) : 처자를 말함. 임포(林逋)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임포는 송 나라 전당(錢塘) 사람으로 자는 군복(君復)인데, 명리를 구하지 않고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여 20년 동안 성시(城市)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시서화(詩書畵)에 능했으며 특히 매화시가 유명하다. 장가들지 않아 자식이 없었으며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스스로 짝을 삼으니, 당시에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했다. 사후에 화정선생(和靖先生)이란 호를 받았다. 《宋史》 四五七 매형(梅兄) : 매화의 아칭(雅稱)으로, 송(宋) 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수선화(水仙花)에, “향기 머금은 흰 꽃잎 성을 기울일 듯하니, 산반은 아우요 매화는 형이로세.[含香體素欲傾城 山礬是弟梅是兄]” 하였다. 《古文眞寶 前集》 〔용재집〕 매화곡(梅花曲) : 젓대의 곡(曲) 중에 낙매화(落梅花)라는 곡이 있다. 〔월사집〕 맥(貊) : 孟子에는 白圭라는 사람이 20분의 1의 세금을 받겠다고 할 때 맹자는 20분의 1의 적은 세금을 받는 것을 맥(貊)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맥은 세금을 적게 받기로 알려져 있었다. 산해경(山海經) 주에는 장성 북쪽에 있는 맥은 예맥(濊貊)의 옛 땅이라 하였음. /연산3-98-6/ 맥도(貊道) : 세제(稅制)의 한 자기로 국가의 유지를 고려하지 않고 아주 작은 세금을 거두는 것을 말함. 정상적인 부세는 9분의 1 또느 10분의 1을 전세로 받는 것이 상레인데, 맥도는 20분의 1을 받는 것을 말함. 《孟子 告子上》 /선조실록 31/ 맥상상(陌上桑) : 악부 상화곡(相和曲)의 이름. 조왕(趙王)이 맥상에서 뽕을 따던 왕인(王仁)의 아내 나부(羅敷)의 아름다운 자태를 탐내어 그녀를 범하려 할 적에 그녀가 이 노래를 지어 거절하였다고 한다. ??????古樂府 陌上桑??????. 일설에는 노(魯) 나라 추호(秋胡)의 아내 일을 노래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백(李白)이 지은 ?맥상상(陌上桑)?도 진(秦) 나부(羅敷)의 일을 가지고 지은 것이다. 맥성(麥城) : 옛 성의 이름으로 호북성(湖北省) 당양(當陽)의 동남쪽에 있었는 바, 관우가 오나라의 여몽(呂蒙)에게 패하여 이 성으로 와 있다가 사로잡혀 죽었다. 맥수(麥秀) : 기자(箕子)가 은(殷)나라의 옛 도읍이 폐허가 되고 그 곳에 기장만 무성한 것을 보고 망국의 슬픈 심정을 읊은 시. 《사기》 <송세가(宋世家)>. 맥수(麥穗) : 箕子가 殷나라의 옛 도읍이 폐허가 되고 그 곳에 기장만 무성한 것을 보고 망한 나라에 대한 상심을 읊은 시. 麥秀라고 하기도 함. 맥수(麥秀) : 맥수가(麥秀歌)의 줄임말로 옛날 기자(箕子)가 은(殷)나라의 옛 도성을 지나다가 궁궐터가 모두 보리밭이 되어 보리가 패는 것을 보고 고국이 망한 것을 서글퍼하여 읊은 노래이다. 이 때문에 왕조가 멸망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맥수(麥秀)·서리(黍離)의 슬픔 : 맥수는 조국이 멸망한 것을 슬퍼하는 노래로 은(殷) 나라 기자(箕子)가 조국이 멸망한 뒤 고도(古都)를 지나면서 부른 노래임. 서리는 나라가 망하고 종묘·궁전이 무너져 그 터가 기장밭이 된 것을 탄식하는 노래로 동주(東周)의 대부가 호경(鎬京)을 지나면서 읊은 노래임. /선조실록33/ 맥수가(麥秀歌) : 《사기(史記)》 미자세가(微子世家)에 “기자(箕子)가 주(周) 나라에 조회하는 길에 은(殷) 나라 옛 도읍을 지나다가 궁실(宮室)은 무너지고 화서(禾黍)만 우거진 것을 보게 되자, 이 노래를 읊었다.” 하였음. /성호9/ 맥주(麥舟) : 보리를 실은 배인데, 상사(喪事)를 돕는 일, 즉 부의(賻儀)를 뜻함.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아들 요부(堯夫)를 시켜 고소(姑蘇)에서 보리 5백 석을 운반해 오게 했다. 요부가 배에 보리를 싣고 단양(丹陽)에 이르렀을 적에, 석만경(石曼卿)을 보았는데, 만경은 돈이 없어 부모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요부는 보리배를 주고 홀몸으로 왔다. 그리고 만경이 부모의 장사를 치르지 못하고 있는 사정을 중엄에게 말했다. 그러자 중엄은 그러면 왜 보리배를 주지 않았느냐고 했다. 요부는 주고 왔습니다. 그 후 이말이 전하여 부의로 되었다. 《冷齋夜話》 /대동17-311/ 맥주(麥舟) : 송(宋)나라의 문정공(文正公) 범중엄(范仲淹) 부자가 보리를 실었던 배를 고스란히 벗의 장례에 부조하여 도왔던 고사가 있음. 맥추(麥秋) : 음력 오월의 이칭. 여기서는 보리밭을 가리킨다. 〔월사집〕 맨 정신으로도 주정하였으니 : 한(漢) 나라 개관요(蓋寬饒)는 자가 차공(次公)인데 너무도 강직하여 걸핏하면 관리들을 탄핵하였다. 하루는 평은후(平恩侯) 허백(許伯)이 새 집을 낙성하여 뭇 벼슬아치들이 축하하러 갔지만 그는 가지 않다가 초청을 받고서야 가서는 허백이 손수 술을 따루어 권하자 “나에게 술을 많이 주지 마오. 나는 술 주정뱅이[酒狂]입니다.” 하였다. 이에 승상 위후(魏侯)가 웃으면서 “차공은 깨어 있을 때도 주정을 부리는데 굳이 술을 마셔야만 주정을 부리겠는가?” 하니,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질시하였다. 《漢書 蓋寬饒傳》 〔용재집〕 맨손으로 …… 없어라 : 용도 잡고 고래도 잡는다는 것은 박우 형제의 시문이 가진 힘이 웅걸하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추루(?樓) 도주(倒洲)의 기세란 황학루를 부수어 버리고 앵무주를 엎어버린다는 말로 역시 시문의 힘이 웅굉함을 의미한다. 이백(李白)의 ?강하(江夏)에서 남릉 현령 위빙(韋?)에게 주다(江夏贈韋南陵?)?라는 시에 “내 이제 그대 위해 황학루 부수리니, 그대 또한 나를 위해 앵무주 엎어주오.[我且爲君?碎?鶴樓 君亦爲吾倒却鸚鵡洲]”라고 하였다. 맷돼지 같은 놈 :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 난을 일으킨 안록산(安祿山)을 가리킨다. 〔월사집〕 맹가(孟嘉) : 진(晉) 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만년(萬年)이며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을 지냈다. 용산낙모(龍山落帽)의 고사로 특히 유명하다. 1권 ‘쇠잔한·····놀랄만한데’ 참조. 〔월사집〕 맹가(孟嘉) → 취모절(吹帽節) /해행5-473/ 맹계이본(孟戒二本) : 맹자의 말뜻은 자기 부모만을 높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다시 부모처럼 위하면 근본이 둘이 된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남에게 立後한 사람이 본생 부모를 양부모와 같이 높이면 근본이 둘이 된다는 뜻이다. /퇴계집6 1-101/ 맹광(孟光) : 후한(後漢) 때 양홍(梁鴻)의 아내, 자는 덕요(德耀). 서른 살에 매우 성대하게 치장을 하고 양홍에게 시집갔는데 이레가 되도록 양홍이 대꾸를 하지 않자 맹광이 추계(椎?)와 포의(布衣)로 앞에 나서자 양홍이 그제서야 기뻐하며 《이것이 바로 양홍의 아내로다.》하였다고 함. 맹광(孟光) → 梁鴻 맹광(孟光)에 짝하였고 : 어질고 예를 아는 아내를 일컫는다. 후한(後漢) 때 맹광(孟光)이 서른 살에 양홍(梁鴻)에게 시집가서,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베로 만든 치마를 입고서 남편을 감히 마주 보지 못하고 밥상을 눈썹 높이에 맞추어 들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일민열전(逸民列傳)》 <양홍전(梁鴻傳)> 맹교(孟郊) : 중당(中唐)의 시인. 자는 동야(東野), 나이 오십에 대과에 급제했으나 평생을 불우하게 보냈음. 저서로는 《맹동야집(孟東野集)》이 있음. 맹교한산(孟郊寒酸) : 맹교는 당 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동야(東野)이며, 가도(賈島)는 역시 당 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낭선(浪仙)인데, 한유(韓愈) 등과 맥락을 같이하는 중당(中唐)의 시인이다. 흔히 교한도수(郊寒島瘦)라 하는데, 이는 송 나라의 소식(蘇軾)이 당 나라 사람의 시풍(詩風)을 비평한 말이다. 즉 맹교의 시는 한산(寒酸)하여 살풍경하고, 가도의 시는 메말라서 힘이 없다는 뜻이다. 《蘇東坡集 卷三十五 祭柳子玉文》 /청장 1-222/ 맹덕(孟德) : 조조(曺操)의 자(字). 그가 적벽강(赤壁江) 싸움 직전에 배 위에서 창을 비껴 들고 자작시(自作詩)를 읊었다. 《赤壁賦》 /해행5-106/ 맹명(孟明) : 맹명은 춘추시대 진(秦) 나라 사람으로 백리해(百里奚)의 아들. 진 나라의 장수로 진(晉)과 효(?)에서 싸워 크게 패하자 진(秦)의 대부와 좌우 신하들이 진 목공에게 이번 패배는 맹명의 죄이니 반드시 죽이라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나중에 팽아(彭衙)의 싸움에서도 패하였으나 끝내 진(晉)을 이기고 서융(西戎)의 패국(覇國)을 이룩하였다. 《春秋左傳 文公 元年·二年》 /선조실록6/ 맹명(孟明)과 조말(曹沫) : 맹명은 춘추 시대 진(秦) 나라의 명신 백리해(百里奚)의 아들. 진(晉) 나라에 세 번이나 패전했는데도 오히려 써주었으므로 진 나라가 두려워하였고 마침내 승리하였음. 그리하여 진 나라를 패자(?者)가 되게 만들었음. 《左傳 文公 二·三年》 조말은 춘추시대 노(魯) 나라 사람. 제(齊) 나라와 싸우다가 세 번 패전했는데 비수(匕首)를 품고 제 환공(齊桓公)을 위협하여 잃었던 땅을 회복했음. 《史記 卷八十六》 /선조실록 10/ 맹모(孟母)는 …… 옮기었지 : 맹자(孟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사는 곳을 옮겼다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의 고사를 차용하였다. 〔용재집〕 맹박(孟博) : 후한(後漢) 범방(范滂)의 자이다. 범방이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기주(冀州)로 나가기 위해 말고삐를 잡으면서 개연히 천하를 맑게 정화시킬 뜻을 다짐했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范滂傳?????? 이후로 이 고사는 관찰사로 나가는 사람들의 선정을 축원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맹부(盟府) : 충훈부(忠勳府)의 별칭 /세종실록15/ 맹분(孟賁) : 진(秦) 나라 무왕(武王) 때의 장사로서 하육(夏育)과 함게 힘이 세기로 유명하였음.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 맹분은 전국(戰國)시대 제(齊) 나라의 역사(力士), 하육은 중국 고대 위(衛) 나라의 역사이다. /면암 1-158/ 맹사마(孟司馬) : 맹가(孟嘉)를 말함. 진(晉) 나라 사람. 참군 사마(參軍司馬)로서 9월 9일에 용산(龍山)에 노닐면서 모자를 떨어뜨린 고사(故事)가 있음. /삼봉1-168/ 맹상군(孟嘗君)1 : 맹상군이 진(秦)에게 구금당하여 도망치는데, 함곡관(函谷關)에 닿았으나, 닭이 울기 전에는 문을 열지 못하므로 그 부하에 있는 자가 닭울음을 잘하여 관문을 열게 하였다. /열하2-355/ 맹상군(孟嘗君)2 : 戰國時代 齊나라 사람으로 성은 田氏이고 이름은 文. 端午에 태어났는데, 당시의 단오에 태어난 자식의 키가 문 높이 만큼 되면 부모에게 해롭다는 말이 있어, 文의 아버지가 버리도록 했으나 그 어머니가 버리지 않고 키우다가 나중에 들켜서 아버지가 노하자, 文이 말하기를 《사람이 하늘에서 명을 받는 것이지 문에서 명을 받는 것이 아니니, 만약 문에서 명을 받는 다면 문의 높이를 높이면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고 함. 史記 孟嘗君列傳. 맹세에 얽매이진 않지만 : 굳이 술을 끊기로 맹세하고 술을 안 마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용재집〕 맹시사(孟施舍) :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서 싸움에서 비록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두려워함이 없었다. 《孟子》 《公孫丑 上》 맹씨(孟氏) : 맹자(孟子)를 말하는데,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좋은 이웃을 택하기 위해 세 번 이사한 사실을 두고 당 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서(?王閣序)>에 읊기를 非謝家之寶樹 사가의 보수가 아니고 接孟氏之芳隣 맹씨의 이름다운 이웃을 접했네 라고 한 말이 있는데, 본문에서 《아름다운 이웃》을 말한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古文眞寶》 맹양양(孟襄陽) : 당 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을 이름. 그는 일찍이 설중(雪中)에 건려(蹇驢)를 타고 패교(覇橋)에 가서 매화를 구경한 일이 있음. 소식의 시에 “又不見 雪中騎驢孟浩然皺眉吟詩肩聳山”의 글구가 있음. /완당집3/ 맹의자(孟懿子) : 춘추 시대 노 나라 대부 중손하기(仲孫何忌). 맹자(孟子) 경춘장(景春章) : 《맹자》〈공손추 하〉2장을 가리킨다. 맹자(孟子)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데 있어서,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 것[勿忘勿助]을 경계한 데서 나온 비유. 밭의 싹이 빨리 자라지 않음을 답답하게 여겨 이를 뽑아 올린 송(宋) 나라 사람이 있었는데,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말했다. 이에 그 아들이 달려가 보니 싹이 다 말라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음. 《孟子》 <公孫丑 上>. 맹자(孟子)는 …… 아니라오 : 《맹자(孟子) 이루상(離婁上)》에 “정사를 다스림이 어렵지 않으니, 군주가 큰 가문에게 죄를 얻지 말아야 한다. 큰 가문이 사모하는 바를 한 나라가 사모하고, 한 나라가 사모하는 바를 천하가 사모한다. 그러므로 덕교(德敎)가 유행하여 사해(四海)에 넘치는 것이다.” 하였는 바, 큰 가문은 훈구(勳舊)의 세가(世家)를 가리키며, 죄를 얻는다는 것은 군주가 나쁜 짓을 하여 원망과 노여움을 사는 것을 이르는데, 이는 군주가 신하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도리를 다하여 훈구의 대신들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맹자(孟子)는 …… 자처하셨는데 : 공손추(公孫丑)가 “선생님께서 제(齊) 나라 경상(卿相)의 지위에 올라 도를 행할 수 있게 된다면, 이로 말미암아 패도(覇道)와 왕도(王道)를 행할 수 있을지라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마음이 동요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니, 맹자가 “그렇지 않다. 나는 마흔살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였다. 《孟子 公孫丑 上》 맹자가 “오직 대인이라야 능히 임금의 마음이 그릇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惟大人爲能格君心之非]”고 한 말이 있음. 《맹자》 《이루장 상(離婁章上)》. 맹자가 “우산의 나무가 일찍이 무성하여 아름다웠으나 대국의 교외에 있어서 도끼로 베었으니 아름다울 수가 있겠는가? (중략) 사람들이 그 민중산이 된 것을 보고 일찍이 재목이 없었다고 하니 이 어찌 산의 본성이었으랴?[牛山之木 嘗美矣 以其郊於大國也 斧斤伐之 可以爲美乎 人見其濯濯也 以爲未嘗有材焉 此豈山之性也哉]”하여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이 본디 착한 성품을 타고 났으나 물욕가 기품의 질곡을 받아 황폐하여 금수와 같이 되었음을 비유하였음. 《맹자》 《고자장구 상(告子章句上)》 맹자가 대장부의 조건을 말하면서 “부귀가 능히 그 뜻을 넘치게 하지 못하며 빈천이 능히 그 뜻을 옮기게 하지 못하며 위무가 능히 그를 굴하게 하지 못한다.[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고 하였음. 《맹자》 《등문공 하(?文公下)》. 맹자가 사람이 무슨 일이든 결과에 도달하는 것을 두고 우물을 파는 것에 비겨서 “일을 함이 있는 자는 비유하자면 우물을 파는 것과 같으니 9인의 깊이까지 우물을 팠더라도 샘의 물줄기에 이르지 못하면 오히려 우물을 버린 것과 같다.[有爲者 ?若掘井 掘井九?而不及泉 猶爲棄井也]”고 한 말이 있음. ‘인(?)’은 인(?)과 통하는데 길이의 단위로서 8척이 1인임. 《맹자》 <진심장 상(盡心章上)>. 맹자수단(孟子手段) : 제 선왕이 호화(好貨) 호색(好色)을 말했을 때 맹자는 호화 호색을 나쁘다 하지 않고 화색(貨色)으로부터 위정(爲政)의 단서를 끄집어내어 선왕이 인욕을 절제하고 천리를 보전하도록 인도한 수단을 말함. 맹자의 말에 “문왕을 기다린 뒤에 흥기하는 이는 보통 사람이고, 호걸의 선비같은 경우는 비록 문왕이 없더라도 홀로 흥기한다.[待文王而後興者 凡民也 若夫豪傑之士 雖無文王獨興] 《맹자》 《진심장 상(盡心章上)》. 맹자의 말에 “원천히 혼혼하여 주야로 쉬지 않는지라 구덩이에 가득 찬 뒤에 나아가 사해에 이른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고 한 것이 있음. 《맹자》 《이루장하(離婁章下)》. 맹자재고(孟子才高) : 맹자는 천자(天姿)가 초매(超邁)하기 때문에 배우기가 어렵고 안자(顔子)는 천자(天姿)가 순수하고 공부가 진밀(縝密)하여 진덕(進德)이 차례가 있기 때문에 학자가 힘 쓸 곳이 있다. 선생이 남헌의 찰식단예(察識端倪)를 병되이 여겨 존양(存養)이 학문의 본령(本領)임을 역설함. 맹자지소기(孟子之所譏) : 맹자가 사람이 자기 밭을 버리고 남의 밭을 김메는 것을 꾸짖음. 곧 남에게서 구함이 많고 자신에게 구하는 것이 적음을 한탄한 말. 맹자지희(孟子之喜) : 악정자(樂正子)가 정사를 맡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맹자는 기뻐서[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다. 《孟子 告子下》 /고봉집3/ 맹자질서(孟子疾書) : 《사서질서(四書疾書)》 중의 하나. 이익(李瀷)이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 중 중요한 문구에 자기 뜻을 붙여 해설한 것. /성호사설8/ 맹정요(孟貞曜) : 당(唐)나라 때의 시인인 맹동야(孟東野)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요(貞曜)는 그가 죽은 뒤에 친구들이 지어준 사시(私諡)이다. 그는 시에 매우 능했으나, 평생을 곤궁하게 살았다. 맹종(孟宗) : 삼국시대 吳나라 江夏 사람으로 字는 恭武. 그의 어머니가 죽순을 좋아했는데 겨울철이라서 죽순이 아직 나지 않았을 때 孟宗이 대밭에 들어가 슬피 탄식하니 효성의 소치로 죽순이 돋아나자 이를 어머니께 드렸다고 하는 고사가 있음. 맹종지효(孟宗之孝) : 맹종은 삼국(三國) 시대의 강하(江夏) 사람으로 자(字)는 공무(恭武)이다. 어머니가 죽순(竹筍)을 즐겼는데, 겨울철에 죽순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맹종이 대숲으로 들어가 슬피 탄식하니 갑자기 죽순이 나왔다고 한다. 《三國志 卷四十八 孫晧傳註》 맹진(孟津) → ① 정형(井?) ②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 나라를 칠때에 8백 명의 제후(諸侯)가 맹진에서 모였었다. 맹진지사(孟津之師) :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상(商) 나라 주(周)를 칠 때에 1월 2일 계사(癸巳)에 출정하여 26일 무오(戊午)에 맹진(孟津)을 건넜다. 그때의 형편으로 보면 주(紂)는 무리가 많고 무왕은 군사가 적었으므로 힘으로는 대항할 수 없었으나, 무왕의 어진 덕에 백성이 열복하여 주의 포학을 쳤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書經 武成》 /해행11-440/ 맹진회년(孟津會年) : 무왕(武王) 13년에 은(殷) 나라 주왕(紂王)을 치기 위하여 맹진(孟津)에서 제후들과 크게 회합(會合)했을 때이다. 〔월사집〕 맹참모(孟參謀) : 당 나라의 시인 맹교(孟郊)를 가리킴. 자는 동야(東野). 늙어서 정여경(鄭餘慶)의 참모를 지냈다. /삼봉 1-79/ 맹헌자(孟獻子)·1 : 춘추 시대 노 나라의 어진 대부(大夫) 중손멸(仲孫蔑)임. 다섯 사람의 벗이 있었는데, 이들은 헌자가 세력 있는 가문(家門)임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 헌자와 사귀었음. 세력에 아부하는 세속 사람을 멀리 초월하고 있음. 맹자는 그들 다섯 사람 중에서 두 사람만 이름을 기억하고 다른 세 사람은 기억하지 못했음. 《孟子 萬章下》 /성호6-235/ 맹헌자(孟獻子)2 : 춘추 시대 노(魯) 나라 대부 중손멸(仲孫蔑). 그의 말에 “말을 기르는 집에서는 닭이나 돼지의 이익을 살피지 않고, 얼음을 쓰는 집에서는 소나 양을 기르지 않고, 식읍이 있는 집은 백성에게 세금을 착취하는 신하를 기르지 않으니 그러한 신하를 두기보다는 차라리 도신을 둘 것이다.[畜馬乘 不察於鷄豚 伐氷之家 不畜牛羊 百乘之家 不畜聚斂之臣 與其有聚斂之臣 寧有盜臣]”라고 했다. 혈구(?矩)라고 하는 것은 남의 입장을 미루어서 행하는 도리인데, 맹헌자의 이 말은 위의 사람이 아래 사람의 이익을 침범해서는 불가함을 헤아린 것으로서 “비록 닭이나 돼지를 기르는 작은 이익이라도 오히려 백성과 다툴 수 없는데, 임금이 세금을 착취하는 신하를 두어서 백성을 학대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는 말이다. 맹호(猛虎) : 《漢書 卷七十七 蓋諸葛劉鄭孫毋將何傳 第四十七》에 “간대부(諫大夫) 정창(鄭昌)이, 충직 우국(忠直憂國)하는 관요(寬饒)가 일을 말한 것이 적당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법관에 걸린 것을 민망하게 여겨 상서(上書)하여 관요를 칭송하기를 ‘신은 들으니 산에 맹수가 있으면 그 때문에 여곽을 못 캐고 나라에 충신(忠臣)이 있으면 간사(奸邪)한 무리가 일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 ’ 했다.” 하였다. /선조실록2/ 맹호연(孟浩然) : 성당(盛唐) 때 양양(襄陽) 출신의 성당(盛唐) 전원시인(田園詩人). 맹호연이 금란전(金?殿)에서 숙직하던 왕유(王維)의 초대를 받고 가서 함께 고금의 풍아(風雅)를 담론하는데, 홀연 현종(玄宗)이 그곳으로 행차하였다. 맹호연이 침상 아래에 숨었는데 왕유가 사실을 숨길 수 없어 현종에게 아뢰니, 현종이 맹호연을 불러 시를 읊게 하였다. 이에 맹호연이 “재능이 없어 밝으신 임금에게 버림 받고, 병이 많아 벗들과도 사이가 멀어졌네.[不才明主棄 多病故人疏]” 하니, 현종이 “짐은 사람을 버린 적이 없다. 경이 스스로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으면서 어찌하여 이러한 시를 지었단 말인가.” 하고는, 종남산(終南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唐?言》 〔용재집〕 맹획(孟獲) : 남중(南中)의 추장. 제갈 양과 싸워 일곱 번 붙잡혔다가 일곱 번 용서받은 후에 항복하여 심복(心腹)이 됨. 칠종칠금(七縱七擒). 《三國志 蜀志 諸葛亮傳》 머리 …… 월계화 : 연꽃은 문과급제(文科及第)를 이르고 월계화는 소과급제(小科及第)를 이르는 바, 옛날에 대과(大科)인 문과에 급제한 자에게는 월계화를 내리고 소과에 합격한 자에게는 연꽃을 내려서 머리에 쓰게 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머리 …… 천오(天吳) : 수신(水神)을 가리킨다. 《산해경(山海經)》에 “조양곡(朝陽谷)의 신(神)을 천오(天吳)라고 하는데, 이 신이 수백(水伯)이다.” 하였다. 머리 긁었더뇨 : 그리움이나 번뇌 따위로 마음이 괴로운 모습을 형용한 것으로, 《시경》 패풍(?風) 정녀(靜女)에, “사랑하되 만나지 못하여 머리 긁으며 머뭇거리도다.[愛而不見 搔首??]” 하였다. 〔용재집〕 머리 적시건 말건 : 술이 흠뻑 취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역》 미제괘(未濟卦) 상구(上九)의 단사(彖辭)에 “술을 마셔 머리를 적심은 또한 절제를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월사집〕 머리가 …… 없다 : 한청(汗靑)은 옛날에 종이가 없어 죽간(竹簡)을 사용할 때 대나무를 불로 구워서 수분을 빼내어 글 쓰기에 좋도록 하는 것으로, 저술을 완성하는 것을 뜻한다. 이 구절은 당(唐) 나라 유지기(劉知幾)의 《사통(史通)》 오시(?時) 편에 보인다. 〔월사집〕 머리를 …… 남았네 : 동진(東晋)의 도간(陶侃)이 젊어서 큰 뜻이 있었으나 집이 매우 가난하였다.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범규(范逵)가 ?아 왔는데 대접할 것이 없자, 그의 어머니 담씨(湛氏)가 자식을 위해 스스로 머리채를 잘라 양식을 장만하여 성심으로 대접하였다고 한다. 후에 이 고사는 성심으로 객을 대접하는 것을 비유하거나, 남의 어머니의 어짊을 기리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진서(晉書)》 《도간전(陶侃傳)》 머리엔 …… 못한다 : 눈 속에 핀다는 설중매(雪中梅)를 연상한 표현이다. 〔용재집〕 먼 …… 드러냈구나 : 달이 뜨거나 동이 트려는 즈음에 산 위쪽이 가는 선 모양으로 먼저 밝아오는 광경을 형용하였다. 〔용재집〕 먼저 근심 :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묘당(廟堂)에 높히 있을 때는 그 백성을 근심하고 강호에 멀리 있을 때는 그 임금을 근심하니, 이는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때 즐거운가. 반드시 천하가 근심하기에 ‘먼저 근심’하고 천하가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古文眞寶 後集》 〔월사집〕 먼저 근심하는 뜻 : 지사(志士)나 인인(仁人)은 천하 국가의 근심을 천하 사람들보다 먼저 걱정한다는 뜻으로,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선비는 의당 천하의 근심거리는 남보다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운 일은 남보다 뒤에 즐거워해야 한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멀리 …… 그리워한다오 : 물화(物華)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이르며, 율정(栗亭)은 중국의 현명(縣名)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호(號)로 사용하였으나 여기서는 율리(栗里)의 정자란 뜻으로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 듯하다. 율리는 도연명이 살던 곳으로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때로 머리를 들고 멀리 바라보니 구름은 무심히 산골짝에서 나오고 새는 느릿느릿 날아 저녁에 돌아온다.〔時矯首而遐觀 雲無心以出岫〕” 하였다. 멀리 …… 돌아오리라 : 자신이 가는 길이 비록 잘못되었지만, 일찍 그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더 이상 멀리 가지 않고 곧 바른 길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이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거니와 앞으로 갈 길을 잘 가야지. 길을 잃은 것이 멀지 않으니, 지금 판단이 옳고 지난날이 틀렸음을 알겠노라.[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塗其未遠 覺今是而昨非]” 한 말을 원용한 것이다. 멀리서 …… 매만진다 : 임금이 행차할 때 울리는 음악 소리를 듣고 자기를 찾아올까봐 처소로 돌아가서 화장을 고친다는 뜻이다. 〔월사집〕 멈춘 구름 : 성어(成語)로 정운(停雲)이라 하는데, 도연명(陶淵明)의 정운(停雲)이란 시의 자서(自序)에, “정운은 친우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였다. 〔용재집〕 멈춘 구름 : 성어(成語)로 정운(停雲)이라 하여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의 정운(停雲)이란 시의 자서(自序)에, “정운은 친우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였다. 〔용재집〕 멍청하기 …… 몰라라 : 재여(宰予)란 제자가 낮잠을 자자 공자가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거름 흙으로 만든 담장은 흙손질할 수 없다.” 하였다. 《論語 公冶長》 공견(攻堅)은 학문을 잘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예기》 학기(學記)에 “학문을 잘하는 사람은 마치 목수가 견고한 나무를 다듬듯이 한다.[善問者如攻堅木]” 한 데서 유래한다. 즉, 낮잠에 푹 빠져 공부는 팽개치고 있음을 뜻한다. 〔용재집〕 멍청한 …… 때문 : 무능한 자신이 사행(使行)에 끼이게 된 것은 전적으로 벗들이 자기를 가만 놔두지 않고 추천했기 때문이라는 뜻인 듯하다. 〔용재집〕 면거시(綿車詩) : 물레를 읊은 시로, 면거(綿車)는 솜으로 실을 뽑아내는 물레를 가리킨다. 면구(?駒) : 춘추시대 제(齊) 나라 사람으로 노래를 잘 불렀다는 사람. 그가 高唐에 살매 齊右 사람이 교화되어 다 노래를 잘 불렀다 한다. /연산5-67-43/ 면대(面對) : 임금에게 직접 아뢰는 것을 말한다. /연려실기술4 1-451/ 면멱(面?) : 멱(?)은 수학 용어이니, 고대에는 물체의 외위(外圍)를 멱이라고 하였다. 적(積)은 곱해서 얻은 답(答)이다. 옛날에는 직경을 3으로 곱해서 원주(圓周)의 면적을 알아냈다. 여기에 나오는 황종관(黃鍾管)의 직경을 3푼으로 해서 둘레를 9푼으로 계산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여기의 적은 면멱(面?) 9푼을 관(管)의 길이 9촌으로 곱하여 황종관의 체적을 구한 것이다. 《수서(隋書)》 율력지에 “옛살의 9수(數)는 원주율(圓周率)이 3, 원경율(圓徑率)이 1이었으니, 그 방법이 소략하고 어긋난 것이다.” 하였다. /오주15-87/ 면박(面縛):2 두 손을 등 뒤로 묶고 얼굴은 앞을 향함. 투항의 표시. 면박(面縛)1 : 양손을 뒤로 돌려서 묶은 것. 면은 얼굴을 앞으로 향하게 하는 것. 일설에 면은 면(面) 곧 배(背)의 뜻으로 뒤로 손이 가게 묶다는 뜻이라 하고, 또 일설에서 면박을 반대를 뜻하는 것으로 앞으로 가게 묶는 것이라 하나, 후자는 통용되지 않음. /연7-569-88/ 면사(面紗) : 너울이니 즉 흑색의 얇은 깁으로 만들어 여자가 나들이 할 때 머리에 쓰는 것. /연산4-367/ 면산(綿山) : 중국의 山西省 介休縣 동남쪽에 있는 산. 春秋時代에 介子推가 이 곳에 은거했기 때문에 또한 介山이라고 부르기도 함. 면수(綿岫)를 …… 표하였네 : 면수는 면산(綿山)으로 중국의 산서성(山西省) 개휴현(介休縣)에 있는 산인데 일명 개산(介山)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후일 진(晉)나라의 문공(文公)이 된 중이(重耳)는 일찍이 모함을 당하고 망명하였는데, 이때 개자추(介子推)라는 부하가 수행하여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정성껏 중이를 돌보았으나 중간에 탈락하고 말았다. 그후 중이는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고 수행하였던 가신(家臣)들에게 모두 은전(恩典)을 내렸으나 개자추만은 까맣게 잊었다. 개자추는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에 은둔하여 살았는데, 중이는 그가 면산에 있다는 말을 듣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중이는 면산에 불을 놓아 개자추가 깊은 산속에서 나오기를 기대하였으나 개자추는 나오지 않고 그대로 불타 죽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가 불타 죽은 것을 가엾게 여겨 그가 죽은 날 밥을 해먹지 않고 찬밥을 먹으니, 이 때문에 한식(寒食)의 명절이 생기게 되었다 한다. 그후 중이는 개자추를 위해 면산을 특별히 보호하고 사당을 지어 그의 넋을 위로하였다. 면신(免新) : 새로 관직에 나오는 관원이 재직(在職) 관원을 집으로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는 것. 면신례(免新禮), 또는 면신벌례(免新罰禮)라고도 한다. /중종실록 39/ ← 허참례(許參禮) /성호5-93/ 면신례(免新禮) : 처음 관직을 시작할 때 행하던 의식을 말함. 면약호(面藥壺) : 안면에 바르는 약물을 넣은 병. 면약을 바르면 추위와 더위를 막는다 한다. /고려도경/ 면역법(免役法) : 왕 안석 신법의 한. 부역에 나갈 만한 사람이 없는 집에서는 대신 돈을 내고 부역을 면제받던 제도. 조역전(助役錢)이라고도 한다. /경세2-330/ 면옹수(面雍樹) : 《한서(漢書)》 하후영전에, “項羽大破漢軍 漢王不利馳去 見孝惠魯元載之 漢王急馬 罷虜在後 常?兩兒棄之 ?常收載行 面雍樹馳”라 하고, 면옹수치(面雍樹馳)에 대한 주에는, ‘高祖欲斬之 故?圍樹走 面向樹也’라 했는데, 이는 복건(服虔)의 말이고, 또 소림(蘇林)은, ‘南方人 謂抱小兒 爲雍樹面者 以面首向臨之也’라고 했는데, 유봉세(劉奉世)는 이 소림의 해석이 옳다 하였음. 또 성호는 이 ‘常?兩兒’라는 발(?)자를 궐(蹶)자로 적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성호8-123/ 면우(?宇) 곽종석(郭鍾錫 : 1846-1919) : 자는 명원(鳴遠)이고 관향은 포산(苞山 : 玄風)이다. 면장(面墻) : 시를 공부하지 않아 식견이 꽉 막혔음을 뜻한다.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너는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배웠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마치 담장을 마주하고 선 것 같다.” 한 데서 온 말로, 일반적으로 학문을 하지 않으면 이치를 알지 못하여 앞길이 캄캄하게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論語 陽貨》 〔용재집〕 면전(勉?) : 힘쓸지어다. 면절정쟁(面折廷諍) : 면전에서 직간(直諫) 하나는 것. 史記에 진평(陳平)이 왕릉(王陵)더러 말하기를 ‘지금 면절정쟁(面折廷諍)하기는 내가 그대만 같지 못하다’ 하였음. /연산4-310/ 면주(綿酒) : 솜에 묻힌 술로서 소박한 제물을 말한다. 옛날 문상하는 사람이 닭 한 마리를 마련하고 술을 솜에 묻혀서 닭 속에 넣어가지고 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면주(綿酒) : 솜에 묻힌 술로서 소박한 제물을 말함. 옛날 문상하는 사람이 닭 한 마리를 마련하고 술을 솜에 묻혀서 닭 속에 넣어가지고 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함. 면주갑사(綿紬甲士) : 활도 못 쏘는 갑사를 깔보아 이르는 말. ○ 金?曰 此言當矣 臣屢爲守令 故得以知之 甲士豈有親射者乎 贈賂色吏 潛爲投屬 故雖赴防之人 無一人彎弓者也 是以其隣里人輕賤之 謂之綿紬甲士也 《中宗實錄 二十三年 十一月 辛丑》 면주전(綿紬廛) : 관의 인가를 받아서 면주를 전대(專貸)하는 곳을 말함. 면주전은 육주비전(六注比廛)의 하나인데, 육주비전은 선전(線廛)·면포전(綿布廛)·면주전·지전(紙廛)·저포전(紵布廛)을 각각 한 주비(注比)로 하고 내어물전(內魚物廛)과 청포전(靑布廛)을 합해 한 주비로 함. /선조실록 24/ 면지(綿漬) : 소박한 제물을 말함. 술을 솜에 적셔 이것을 닭 속에 넣어가지고 무덤 앞에 가서 제물로 드린 것에서 유래함. 《世說新語》 德行. 면질(??) : 《시경》 <대아> 면편(?篇)의 주제가 주 나라 문왕이 일어남이 본디 태왕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하는 것인데, 그 시의 제 1장에 “면면한 외 넝쿨이여, 백성이 처음 산 것이, 칠저의 강가로부터였네.[??瓜? 民之初生 自土沮漆]”라고 한 말이 있음. 면천(免賤) : 특별한 공로나 또는 대가를 내고 천인(賤人)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함. /선조실록 28/ 면철(綿綴) : 면철의 철(綴)은 철(?)의 잘못이다. 면철은 병이 무겁고 기식(氣息)이 끊어질 듯하며 마음이 쇠하고 정하지 못하여 다스릴 수 없는 것을 말한다. /하곡1-193/ 면체(??) : 야외(野外)에서 예(禮)를 익힐 때, 새끼를 둘러 조정(朝廷)의 표시를 하고 띠[芳]를 묶어 열지어서 관작(官爵)의 고하를 표시하던 일로, 한 고조(漢高祖) 때 숙손 통(叔孫通)이 제사 1백여 인과 야외에서 실시하였음. 《史記 叔孫通傳》 /삼봉집1/ 면체(綿?) : 위차(位次)를 정하여 예악(禮樂)을 익히는 일을 말함. 한 나라 설현(薛縣) 사람 숙손통(叔孫通)이 일찍이 문학으로 명성이 있었는데, 고조(高祖) 때에 천하가 처음으로 평정됨에 제생(諸生)을 불러 야외에서 띠풀을 묶어 위차를 표시하고 한 달 남짓 예악을 익히게 한 다음 고조에게 보이자, 고조가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따라 익히게 하였음. 《史記》 99. 면체례(綿?禮) : 야외(野外)에서 예(禮)를 익힐 때 새끼를 둘러 조정(朝廷)을 표시한 것을 면(綿)이라 하고, 띠를 묶어 열지어서 관작(官爵)의 고하를 표시한 것을 체(?)라 한다. 숙손통이 처음 의례(儀禮)를 제정할 때에 여러 선비들을 데리고 교외에 나가서 면체(綿?)를 하고 연습하였다.《史記 卷99 叔孫通傳》 면피(面皮) : 인정(人情)으로 주는 물건. 우리 나라 연행 사신(燕行使臣)을 따라간 의원(醫員)들이 그곳 사람의 병을 고쳐주면 그들은 비단·서화(書畵) 등을 주었는데 이를 ‘面皮’라 하였다. ○ 曾聞此處人 問疾於我醫 勿論其效有無 皆有所贈 謂之面皮 《金昌業, 老稼齋燕行日記 卷四 五月 二十三日》(서 경요) 면향(免鄕) : 향리(鄕吏)의 신역(身役)을 면함. ○上命 軍功一等加三資 堂上及資窮者親授一資 …… 收職牒者還給加二資 資窮者代加 鄕吏免鄕雜類及賤人給綿布十五匹 …… 前銜資窮者代加收用 鄕吏己身免役 …… 《中宗實錄 卷十一五年庚午 五月 甲申》 면후(冕?) : 면류관. 대부 이상이 쓰는 예관(禮冠)의 종류. 멸과악(滅過惡): 過惡은 錯誤·罪惡을 이름. 죄악을 없앤다는 의미. [周禮·地官·州長] 正月之吉, 各屬其州之民而讀法, 以考其德行道藝而勸之, 以糾其過惡而戒之. 명 원제(明元帝): 拓跋嗣. 道武帝의 長子. 이름은 嗣. 시호는 明元. 묘호는 太宗. 재위기간 409~423년. 연호는 永興·神瑞·泰常 등. 晉 나라 義熙 5년에 拓跋紹를 죽이고 즉위하였다. 어진 이와 능한 이를 등용하여 국내를 안정시키고 국외에 힘을 떨쳤으며, 柔然을 격파하고 長城을 쌓았다. 儒生을 예우하고, 史傳 보기를 좋아하여 新集 30편을 撰述하였다. 명(銘) : 금석(金石)·기물(器物) 등에 새겨서 늘 자신을 반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경계의 글. /중종실록 48/ 명(命)은 …… 개고 : 파죽지세로 적을 무찌르는 명운(命運)이 와 조선땅에 왜적을 몰아내게 되었다는 뜻이다. 〔월사집〕 명(蓂)의 …… 졌어라 : 요(堯) 임금이 뜰에 명(蓂)이라는 식물이 초하루에서 보름까지 하루에 한 잎씩 생기고 보름이 지난 후 그믐까지는 하루에 한 잎씩 져서 일력(日曆)의 역할을 했다 한다. 〔월사집〕 명가(鳴珂) : 말굴레의 장식품이라고도 하고 또는 악기라고도 한다. /삼봉집1/ 명갈(溟碣) : 아득히 넓은 바다를 말함. 명검(名檢) : 법도. 명경(明經) : 선비를 선발하는 과목의 한 가지로서 경학에 밝은 사람을 선발하는 제도임. 한(漢) 무제(武帝) 때 처음으로 시행하였음. 명경과(明經科) : 식년 문과 초시(初試)의 한 분과(分科)로 생원시. 식년 문과 초시에는 제술과(製述科)와 명경과가 있는데 오경(五經)에서 《춘추(春秋)》를 제외한 사경(四經)과 사서(四書) 가운데서 하나를 골라 시험하였음. /중종실록37/ 명계유문(明季遺聞) : 명(明) 나라 말엽(末葉)의 이야기들을 수록한 책. /성호7-102/ 명고방시(鳴鼓榜示) : 북을 치고 방문을 붙여서 널리 알린다는 뜻으로 곧 죄인을 몹시 책망하는 데 흔히 쓰는 말이다. /선조실록14/ 명공지지(明公之知) : 왕재상이 선생을 알아주는 지우(知遇). 명관(命官) : 시관의 하나. 특별히 과거를 보이는 경우, 임금이 과장에 친림하여 직접 임명하는 사관 /중종실록 50/ 명광(明光)에서 붓을 휘두르길 : 명광은 한(漢) 나라 때의 궁전인 명광전(明光殿)으로 이곳에서 천자의 조칙(詔飭)을 작성하였다. 큰 붓은 훌륭한 문장력을 뜻한다. 〔월사집〕 명광궁(明光宮) : 한 무제(漢武帝) 때 건립한 궁전 이름인데, 일반적으로 대궐의 대명사로 쓰인다. 명광전(明光殿)에서 대필(大筆)을 휘둘렀고 : 명광전은 한(漢) 나라 때의 궁전으로 이곳에서 천자의 조칙(詔飭)을 작성하였다. 큰 붓은 훌륭한 문장력을 뜻한다. 〔월사집〕 명교(名敎) : 인륜(人倫)의 명분을 밝히는 유교를 말하는 것인데, 곧 도덕의 교. 단적으로 노장(老莊) 사상에는 명교의 에법을 좁다 하였다. /동문선1-35/ 명교(名敎) …… 되었다만 : 명교는 인륜을 중시하는 유교(儒敎)이다. 즉 편운 스님이 인륜을 버리고 출가(出家)하였으므로 명교의 죄인이라는 것이다. 〔월사집〕 명교(名敎)의 …… 걱정이로세 : 명교(名敎)는 유교(儒敎)를 달리 이르는 말. 유교의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즐거움은 내면에서 얻어지는 것인데, 장자(莊子)와 같은 무리들이 굳이 현실을 떠나 자연에 은거하길 추구하는 것은 마치 여름에만 사는 쓰르라기가 봄과 가을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격이라는 것이다. 3권 ‘중열(仲說)과 더불어 사화(士華)의 북원(北園)에 노닐며’ 주(註) 참조. 〔용재집〕 명구(鳴球) : 玉磬 명구(鳴球) : 옥으로 만든 경쇠[玉磬]의 이름. 《서경》 익직(益稷)에 순(舜) 임금의 음악인 소소(簫韶)를 말하면서, “명구를 치고 금슬을 어루만지면서 노래한다.” 하였다. 〔용재집〕 명금동각(鳴琴東閣) : 동각(東閣)은 재상이나 감사 수령의 거처하는 집인데, 여기서는 자기의 아버지가 있는 군위현(軍威縣)의 동헌(東軒)을 말한 것이다. 공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에 원으로 있으면서 거문고를 타면서 백성을 잘 다스렸다. /해행5-389/ 명기(明器) : ① 장사 지낼 때 무덤속에 시체와 함께 묻는 여러 가지 기물(器物) /연1-270-16/ ② 명(名)은 작호(爵號). 기(器)는 거복(車服)을 이름. /연6-101-37/ 명기(名器) : 관작(官爵)을 말함. 명(名)은 벼슬이름 기(器)는 거복(車服)으로 관직을 말함. 명당(明堂) : ① 天子의 太廟 /퇴계집7/ ② 명당은 천자가 상제(上帝)·선조(先祖)에게 계사를 올리고 제후의 존비를 밝히고 제례(制禮), 작악(作樂)하고 도량(度量)을 반포하여 천하에 복종하게 하는 곳. 즉 천자가 제후(諸侯)에게 조회받고 정령을 펴는 등의 큰 전례(典禮)를 거행하는 남면(南面)한 당(堂). 벽옹(?雍)은 주위를 수택(水澤)으로 둘렀으므로 벽옹이라 한다. 곧 태학(太學)이다. 명제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친히 벽옹에 친히 벽옹에 나아가 양로례(養老禮)를 거행하고 제유(諸儒)를 시켜 경서(經書)를 가지고 문답(問答)하게 하니, 교문(橋門)을 둘러싸고 관청(觀聽)하는 진신(搢紳)이 억만(億萬)으로 헤아릴 만큼 많았다. 《資治通鑑 漢紀 卷三十六 孝明皇帝上 永平二年》 /명종실록42/ 명당(明堂) : 고대(古代) 제왕(帝王)이 정교(政敎)를 펴서 밝히던 지방(地方). 조회(朝會)·제사(祭祀)·경상(慶賞)·선사(選士)·양로(養老)·교학(敎學) 등의 큰 의전(儀典)을 모두 여기에서 거행함. 유래와 제도에 대해서는 《예기》 명당위편(明堂位篇)에 상세함. 명당위(明堂位) : 이 편에는 주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도와 제후를 명당(明堂)에서 조회시킨 일과 성왕이 노(魯) 나라에 천자의 예악(禮樂)을 내려 주어서 노 나라가 이를 행한 일에 대한 것들이 기록되었다. 명당은 왕자(王者)의 태묘(太廟)로 정교(政敎)를 행하는 당(堂)이다. /청장관전서2/ 명덕(明德)·신민(新民) : 명덕(明德 : 타고난 본성)을 밝히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덕을 날로 새롭게 한다는 뜻. 《대학(大學)》 제1장에 “대학의 도(道)는 명덕을 밝힘에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至善)에 그치는 데에 있다.”하였음.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삼봉1-337/ 명도 선생이 …… 화기(和氣)였다 : 《近思? 卷14 總論聖賢》???에 “유안례가 말하였다. 명도 선생은 덕성이 충만하고 완전하여 순수하고 온화한 기운이 얼굴과 등에 가득하였으며,……[劉安禮云, 明道先生德性充完, 粹和之氣, ?於面背. 樂易多恕, 終日怡悅. 立之從先生三十年, 未嘗見其忿?之容.]”라고 하였다. 명도(明都) : 상고에 南方을 일컫는 말. 명도(明道) : 송(宋)나라 때의 학자. 이름은 호(顥), 자는 백순(伯淳). 유정부(游定夫)가 명도(明道)가 있는 곳으로부터 와서 양귀산(楊龜山)을 방문했을 때 양귀산이 그 온 곳을 묻자 유정부가 “봄바람의 온화한 기운 가운데 세 달 동안 앉았다가 왔다.”고 대답한 일이있음. 《송원학안》 권14 <명도학안(明道學案)> 명도(溟島) : 큰 바다 속의 섬을 이른다. 명도소견(明道所見) : 소자문의 《문견록》 주에 “명도가 말한 원풍 대신 공정(共政)의 설은 범충선의 말과 같다.” 함. 명량(明良) : 舜 임금이 신하들과 노래로 서로 和答하였는데 그 노래에, “元首는 밝고 신하는 어질[良]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고려사절요 1-336/ 명량가(明良歌) :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서로 만나 태평 성세(太平盛世)를 이룬 노래. 《書經 益稷》에 “순(舜)이 ‘신하들이 기쁘게 나서야 임금이 정사에 흥기되고 백관의 공적이 커진다.’고 노래하니, 신하 고요(皐陶)가 ‘임금이 밝아야 신하가 어질고 모든 정사가 잘 됩니다.’라고 화답하였다.” 하였다. /양촌3-63/ 명량지가(明良之歌) ← 명량가(明良歌) /동사4-161/ 명력(蓂曆) : 달력. 옛날 요(堯) 임금이 뜰에 명(蓂)이라는 식물이 초하루에서 보름까지 하루에 한 잎씩 생기고 보름이 지난 후 그믐까지는 하루에 한 잎씩 진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유래하는 말임. 명령 : 나비, 나방 류의 유충(幼蟲). 일반적으로 양자(養子)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데, 나나니벌[??]은 항상 자기 새끼가 아닌 명령을 취해다 기르는데서 유래한다. 명령(螟?)1 : 명령은 뽕나무벌레인데, 과라(??)라고 하는 나나니벌이 이 벌레를 물어다가 마취시켜 알을 까놓으면, 약 1주일 후 성충(成蟲)이 되어 벌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나나니벌이 명령을 업어다가 ‘나를 닮아라. 나를 닮아라.’하고 오랫동안 정성을 들이면 뽕나무벌레가 나나니벌로 변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남의 아들을 대려다가 키우는 것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스승이 선(善)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명령의 새끼를 과라가 업어간다. 네 자식을 잘 가르쳐 너를 닮게 하라.〔螟?有子 ??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 하였다. 명령(螟?)2 : 유령(劉伶)의 〈주덕송(酒德頌)〉에 “술 취한 대인 선생(大人先生) 옆에 두 호걸이 모시고 섰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나나니벌[??]과 배추벌레[螟?] 같았다.” 하는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명령(螟?)의 아이 : 명령은 뽕나무벌레로 양자(養子)를 비유하는 바, 과라(??)라고 하는 나나니벌이 이 벌레를 물어다가 마취시켜 알을 까놓으면 약 1주일 후 성충(成蟲)이 되어 벌이 된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나나니벌이 명령을 업어다가 ‘나를 닮으라’고 오랫동안 정성을 들이면 뽕나무벌레가 나나니벌로 변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키우는 것에 비유하였는 바,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명령의 새끼를 과라가 업어간다. 네 자식을 잘 가르쳐 너를 닮게 하라. [螟?有子 ??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 하였다. 명령(??) : 수명이 긴 나무. 명령유자과라부지(螟?有子??負之) : 이 말은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보이는데, 주자는 “땅벌이 뽕나무벌레를 가져다가 나무 구멍에서 품고 있으면 7일 만에 땅벌 새끼로 변화한다.” 하였다. /청장2-136/ 명륜당(明倫堂) : 성균관(成均館) 안의 한 건물. 강학(講學)하는 곳. /중종실록 51/ 명릉(明陵) : 숙종(肅宗)과 그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능. 명리(明?) : 태자 또는 태자의 지위를 말함. 명막(冥漠) : 명막군(冥漠君)인데 묘 앞의 망주석을 말함. /완당집3/ 명막군(冥漠君) : 진(晉) 나라 사혜련(謝惠連)의 제고총문(祭古?文)에 “성북(城北)에서 고총을 파니 명지(銘誌)가 없어 명자(名字)와 시대를 알 수 없어 임시로 명막군이라 해둔다.” 하였다. 여기서는 그냥 오래된 무덤이라는 뜻이다. /청장2-260/ 명복(命服) : 천자가 내린 관복(官服). 주(周) 나라 관질(官秩)에 일명(一命)에서 구명(九命)까지 있었는데, 각각 그 명수(名數)에 따라 일정한 관복이 있었다. 《詩經 小雅》 “복기명복(服其命服)” 조 주에 “명복은 천자가 내린 관복이다” 하였다. /양촌집3/ 명부(明府) : 군수(郡守) 현감(縣監) 등을 일컫는 말이다. 명부(命婦) : 봉호(封號)를 받은 부인의 총칭. 왕궁 세자궁에 딸린 내명부(內命婦)와 종실 및 문무관의 아내인 외명부(外命婦)로 구별됨. /중종2-73/ 명부정(名不正) :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다.”[名不正則言不順]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인데, 즉 조선이라고 해야 할 데에 조선이라고 하였으니 그 이름을 부르기가 순조롭다는 뜻. ← 언불순 /삼봉2-232/ 명성(明·誠) : ① 유가(儒家)의 윤리사상으로 명은 광명 명백을 말하고 성은 진실하여 허위가 없는 것을 말함. 《中庸》에 “성(誠)으로부터 도에 밝아지는 것은 천부의 본성이라 하고 도에 밝은 것으로부터 진실의 성으로 돌아오는 것은 인위의 교화라고 한다. 성이 있으면 곧 도에 밝아지고 도에 밝으면 또한 성에 도달할 것이다.” 하였음. /고봉집2/ ② 성은 실천의 노력. 명은 탐구의 노력을 뜻한다. 《中庸 二十一章》에 “성(誠)으로부터 명(明)해짐은 성(性)이라 하고 명으로부터 성해짐은 교(敎)라 하니 성하면 명해지고 명하면 성해진다.” 하였음. /고봉집2/ ③ 명덕(明德)과 성의(誠意). 명덕은 《대학(大學)》 삼강(三綱)의 하나이고 성의는 팔조목(八條目)의 하나임. /고봉집2/ 명성(明誠) : 실덕(實德)으로 말미암아 자연히 밝고, 선을 밝힌 것으로 말미암아 그 선을 확충하는 것. 자사(子思)가 천도와 인도의 뜻을 설명하기 위하여 《정성으로부터 밝힘을 성이라 하고 덕을 밝힘으로부터 정성에 이르는 것을 교라고 하니 정성이면 밝게 되고 밝게 되면 정성에 이른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고 한 말이 있음. 《中庸章句》 二一章. 명소(命召) : 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것. 또 그 할부(割符). 임금이 은밀하게 부를 때에 사용하는 것으로 모양이 둥글며 그 일면(一面)에는 《명소……직(命召……職)》이라 쓰고 그 곁에 연호와 월일을 쓰며, 다른 일면에는 임금이 친압(親押)하여, 반을 갈라서 한쪽은 명소될 사람에게 보내고 다른 한쪽은 궁중에 둔다. /중종3-203/ 명소부(命召符) : 원서(原書)에 명소(命召)라 한 것을 편의상 부(符)자를 붙였다. 명소는 국왕이 의정대신·포도대장·3군문대장·병조판서 등의 신료(臣僚)를 부를 때에 사용하는 쪼갠 병부로 모양이 둥글며, 한쪽에는 명소모직(命召某職)이라 쓰고, 옆으로 연호와 월일을 쓰며, 한쪽에는 국왕의 화압을 친서(親署)하고, 이를 반으로 쪼개어 오른쪽의 부분은 소환하는 신료에게 보내며, 왼쪽의 부분은 궁중에 보관한다. /만기2/ 명수(明水) : 현주(玄酒)라고도 함. 옛 적 제사에 깨끗한 물을 항아리에 담아서 현주로 하였음. /대옹3-140/ 명승(冥升) : 《주역》 승괘(升卦) 상륙(上六)의 효사(爻辭)에 보이는 말로 무턱대고 위로 올라가고 그칠 줄 모르는 것이다. 〔월사집〕 명승(明昇) → 진이(陳理) 명신록(名臣錄) :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의 약칭으로, 송(宋) 나라 주 희(朱熹)가 지었음. 전집(前集) 10권·후집 14권 송대 명신의 문집과 전기를 발췌한 것. 후에 이유무(李幼武)가 속집 8권·별집 26전·외집17전을 증보했음. → 송조명신록(宋朝名臣錄) /성호7-74/ 명신절옥(名愼折獄) : 비(賁)괘 대상(大象)에, “서정을 밝히고 옥을 결단하는 일을 과감하게 아니 한다.”[明庶政 无敢折獄]라는 것과, 풍(豊)괘 대상에, “옥을 결단하며 형을 이룬다.”[折獄致刑]라는 것과, 여(旅)괘 대상에, “형 씀을 밝게 하고 신중하게 하며 옥을 머물러 두지 아니한다.”[明愼用刑 而不留獄]라는 구절만 보일 뿐, 이 구절과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삼봉2-312/ 명엽(蓂葉) : 옛날 요(堯) 임금의 뜰에 명(蓂)이라는 식물이 초하루에서 보름까지 하루에 한 잎씩 생기고 보름이 지난 후 그믐까지는 하루에 한 잎씩 진다고 함. 여기에서 유래하여 달력을 뜻하는 말로 쓰임. 명옥대(鳴玉臺) : 경상 북도 안동군 서후면 봉정사(鳳亭寺) 입구에 있음. 명원(明園)의 좋은 일 : 조존성의 집에서 명사(名士)들이 모여서 놀던 시절을 가리킨다. 〔월사집〕 명원제(明元帝) : 북위 제2대 왕인 태종 명원제(太宗 明元帝) 409 - 423)를 말함. 명월선소(明月仙蕭) : 선인(仙人) 소사(簫史)와 진녀(秦女) 농옥(弄玉)의 고사를 이름. 여기서는 재취부인마저 죽었다는 말로 쓴 것임. /완당집3/ 명윤(螟胤) : 양자(養子)를 말함. 명의(名義) : 노론은 민비를 위하여 희빈을 죽이는 것을 명의라 하고 남인 소론은 세자를 보호하여 세자를 해치려는 자들을 최죄하는 것을 명의라 한다. /연려실기술38-8-464/ 명의록(明義錄) : 2권 3책. 정조(正祖)가 왕세손 시절 자신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한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 등을 역적으로 단죄 사사하고, 자신을 옹위한 홍국영(洪國榮) 정민시(鄭民始) 서명선(徐明善)의 충절을 선양 중용한 후, 이 사건의 전말을 공표하여 충역(忠逆)을 밝히고자 간행된 책. 1771년(정조 1)에 간행되었음. 김종수(金鍾秀)의 발문이 있음. 명이(明夷) : 《주역》의 괘 이름. 땅[地]밑에 불[火]이 있는 형상인데, 나아가면 반드시 손상을 입기 때문에 군자가 어려움을 알아서 정고(貞固)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하였음. 명이(明夷) : ① 현명한 인물이 뜻을 얻지 못하고 참소를 근심하며 비방을 두려워하는 상(象)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에 가리키는 말로 쓰였음. 《易經 明夷卦》 /중종실록 36/ ② ‘명철하면서 상하다’ 곧 기자는 어진이로서 득지(得志)하지 못하고 참기(讒譏)를 근심한다는 뜻. /동사강목1/ 명이입복(明夷入服) : 간악한 자가 왕의 측근에 달라 붙어 있음을 뜻함. 명이좌복(明夷左服) : 明夷는 주역의 卦 이름인데 夷는 상한다는 뜻임. 즉 밝은 태양이 점점 상하여 땅속으로 들어가는 형이 있다는 것임. 左服은 本卦의 四爻에 “왼쪽 배로 들어가서 명이(明夷)의 마음을 얻었다.” 하였는데 주속에 “음침한 곳으로 들어가서 임금의 마음을 포착했다.” 하였음. /연1-381-387/ 명자(冥資) : 죽은 사람을 위해 명복을 비는 데 쓰이는 자료. 즉 불경(佛經)을 가리킨다. /양촌3-168/ 명자명야(命者名也) : 《史記張耳傳》의 “少時嘗亡命”이라는 주에 “명(命)은 이름이니, 즉 명적(名籍)에서 탈출하여 도망하는 것이다.” 하였다. /중종실록45/ 명적(鳴鏑) : 명전(鳴箭), 우는 살. 끝에 순무꼴[蕪菁形]로 속이 비게 깎은 나무를 달아 쏘면 공기에 부딪쳐 울리는 소리가 나게 만든 화살. /연행4-412/ 명전(名田) : ① 사전(私田)의 일종. 새로 개간한 땅이나 또는 매입한 전지에 소유자의 이름을 기록한 것. /경세유표3/ ② 점전(占田)을 말한다. 사들인 전지(田地)에 소유자의 이름을 붙인 것. 오로지 독점하여 경작하는 전지를 말한다. /여한십가문초/ 명제(明帝): 後漢의 제2대 황제(재위 57~75). 이름 劉莊. 光武帝와 陰皇后의 넷째 아들. 桓榮에게 師事하여《春秋》《尙書》에 통달하였다. 즉위 후 유학자를 고관에 임명하여 禮敎主義에 힘쓰고 빈민구제, 농업진흥, 租賦·刑餘者의 감면에 힘쓰는 등 내정 충실을 꾀하였다. 또 燒當羌을 토벌하고 北흉노를 격퇴하는 등 외정에도 관심이 컸다. 班超에게 서역제국을 귀순시켜 西域都護·戊己校尉를 부활시켰다. 명조(鳴條) : 나뭇가지가 폭풍에 울리지 않는 것으로 태평성세를 이른다. 명주(明珠) …… 법 : 연어알을 명주에 비겼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서역의 교지국(交趾國)을 정벌하고 율무를 종자로 삼으려고 수레 가득 싣고 돌아왔는데, 그가 죽은 뒤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명주(明珠)를 수레에 가득 싣고 왔다’고 무함하자 무제가 이 말에 속아 크게 노하였다 한다. 《後漢書 馬援列傳》 〔월사집〕 명주(明珠) …… 뿐이리요 : 상대의 시편을 극도로 칭찬한 것이다. 연성(連城)은 연성벽(連城璧) 또는 연성옥(連城玉)이라고 하는데, 여러 성과 맞바꿀 만한 가치를 지닌 진귀한 구슬로 전국시대(戰國時代) 때의 보배이다. 전국시대 조(趙) 나라 혜문왕(惠文王)이 초(楚) 나라의 화씨벽(和氏璧)을 얻었는데, 진(秦) 나라 소왕(昭王)이 그 구슬을 열 다섯 성과 바꾸자고 제의한 것에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史記 廉頗藺相如列傳》 〔월사집〕 명주(明珠)를 …… 알겠구려 : 좋은 시편을 남에게 주기 아까워하는 줄 알겠다는 뜻이다. 2권 주 ‘암암리 던져지니’ 참조. 〔월사집〕 명주가 …… 돌아왔다고 : 고을의 수령이 선정을 베풀어 효험이 나타난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때 합포(合浦)에는 좋은 구슬[明珠]이 생산되어 백성들이 그것을 캐어서 생업으로 삼았으나, 그곳의 태수(太守)가 탐욕을 부려서 구슬로 사리(私利)를 채우니, 구슬이 문득 다른 고을로 옮겨 가 버려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이 때 맹상(孟嘗)이 태수로 와서 선정을 행하니 1년 만에 다시 구슬이 돌아왔다고 한다. 《後漢書 卷76 孟嘗列傳》 명지(名紙) : 과거에 응시할 적에 응시자의 성명과 신상 사항을 적은 시험지. /선조실록 28/ 명찬(鳴贊) : 명·청대(明淸代)의 관명(官名)이다. 홍로시(鴻?寺)에 소속되어 있으며, 행도(行導)와 행례(行禮)·창찬(唱贊)의 일을 관장한다. 《歷代職官表》 /연행1-482/ 명철(明哲) : 《시경》 대아(大雅) 증민(?民) 편에 “명철이란 안전한 것을 택하고 위험한 것을 버려 그 몸을 온전히 잘 보존하는 것”[明哲謂擇安去危善全其身]이라 하였으니, 자기 신명(身命)을 보전하는 데 명철하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사람을 은근히 기풍(譏諷)하는 의사가 포함되어 있다. /경세 3-10/ 명초(命招) : 명패(命牌)로 부르는 것. 임금이 직위 높은 관원을 따로 부를 때에는 부신(符信)을 쓰는데 그 모양은 둥글며 그 한 면에 부름을 받는 자를 쓰고 곁에 날짜를 쓰며 또 한 면에는 왕이 친히 수결을 한다. 이 부신을 반으로 갈라, 한 쪽은 궁중에 두고 다른 한 쪽을 부름 받는 자에게 보낸다. 명소(命召), 패초(牌招), 패소(牌召)라고도 한다. /중종10,12/ 명추(鳴騶) 소리 듣노라 : 고관대작을 수행하면서 앞에서 말을 타고 벽제(?除)하는 졸개. 여기서는 강재(强哉)의 행차를 기다린다는 것을 뜻한다. 〔용재집〕 명출산서(名出山西) : ‘무장(武將) 출신이라’는 뜻, ‘진·한 이래로 산동(山東)에서 재상이 나고 산서에서 무장이 난다.’ 한 데서 나온 말. 《漢書 趙充國辛慶忌傳贊》 /중종 3-343/ 명토(命討) : 덕이 있는 이를 명하고[命德] 죄가 있는 이를 책하는[討罪] 일을 말함. 명패(命牌) : 임금이 신하를 부를 때 쓰는 둥근 형태의 부신(符信). 한쪽 면에는 부르고자 하는 신하의 관직, 예를 들어 영의정을 부르고자 하면 ‘명소영의정(命召領議政)’이라 쓰고 옆에 연월일을 씀. 다른 쪽에는 임금이 친히 서명하여, 이것을 둘로 쪼개어 오른편 조각은 부르려는 신하에게 보내고 왼쪽 것은 궁중에 둠. /중종실록37/ 명편(鳴鞭) : 지휘하는 가죽 줄. 힘을 들여 휘두르면 소리가난다. 그러므로 명편이라고 한다. 《歷代職官表》 /연행록선집1/ 명포(名捕) : 도적이나 짐승을 잡기로 유명한 사람. /연려실기술21 5-245/ 명학 호작(鳴鶴好爵) : 중부(中孚) 구이(九二)의 효사(爻辭)에, “우는 학이 그늘에 있거늘, 그 새끼가 화답하도다. 내게 좋은 벼슬 있으니, 내 그대와 함께 하리로다.”[鳴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니, 이 효상은 그윽한 데 있으면서도 신의를 잃지 않았으므로 동류들이 서로 응함을 말한 것. /성인 6-176/ 명학(鳴鶴) : 周易의 中孚卦 九二爻에 덕을 갖춘 군자가 幽隱한 곳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절로 따르는 이치를 말한 것으로 《우는 학이 그늘에 있으거늘 그 새끼가 이에 화답한다.[鳴鶴在陰 其子和之]》는 말이 있음. 명행(冥行) : 무턱대고 행함을 말한다. /성호7-28/ 명행(溟?) : 천체(天體)가 형성되기 전의 자연원기를 말함. /고봉집1/ 명헌거사(明軒居士) : 청(淸) 나라를 배척하고 명(明) 나라를 높였으므로, 명(明)자로 호(號)를 삼아 부른 것이다. 명현(暝眩) :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諫言을 아찔할 정도로 어지러운 약에 비겨서 하는 말이 있음. 《書經》 <說命 上>에 “만약 약이 독하여 어지럽지 않으면 그 병이 낳지 않는다[若藥弗暝眩 厥疾弗?]”고 한데서 기인함. 명협(蓂莢) : 상서(祥瑞)를 가리키는 서초(瑞草)로 요(堯) 임금의 뜰에 났었다고 하는데 매달 1일부터 잎이 하나씩 나고 매달 16일부터 잎이 하나씩 떨어진다고 함. 여기에서 유래하여 일력(日曆)의 뜻으로 쓰임./명종실록 1/ 명홍(冥鴻) : 높이 하늘을 나는 기러기로서 고사(高士)를 비유함. 양자 법언(揚子法言)에, “기러기가 높이 날아가 버리는데 활 쏘는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였다. /대동7-441/ 명홍(冥鴻)에 …… 있었지요 : 명홍은 하늘 높이 나는 기러기로서, 여기서는 고인을 가리킨다. 당(唐) 나라 이하(李賀)가 소년 시절 당대에 문명(文名)이 높던 한유(韓愈)와 황보식(皇甫湜)의 방문을 받고 지은 고헌과(高軒過)에 “내가 지금 날개 드리우고 명홍에 붙었으니, 훗날 뱀이 용 되는 것에 부끄럽지 않으리.[我今垂翅附冥鴻 他日不羞蛇作龍]” 하였다. 〔용재집〕 명화강도(明火强盜) : 떼를 지어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에게서 재물을 약탈하는 강도. /중종실록 48/ 명훼보(名卉譜)를 …… 충분할테니 : 명훼보란 이름난 화훼(花卉)를 적은 책이란 뜻으로, 이러한 책을 짓는다면 파초가 그 속에 충분히 들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용재집〕 몇 길의 …… 아름다우니 : 공자의 제자(子貢)이 공자의 덕을 궁궐의 담장에 비겨 《공자의 담장은 수 인의 높이인지라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넉넉함을 볼 수 없다.[夫子之牆 數?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고 한 말이 있음. 《論語》 <子張>. 몇 묘(畝) : 묘는 원음이 무인 바, 1묘는 약 1백평 정도인 것으로 추측된다. 몇 번이나 …… 뚫었고 : 관녕(管寧)의 고사. 관녕은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자는 유안(幼安)이다. 《삼국지(三國志)》 11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관녕은 검소하게 항상 백모(白帽)를 썼으며 황건적(黃巾賊)의 난에 요동(遼東)으로 피하여 갔는데, 그 곳에서 따르는 사람이 많아 한 고을을 이룰 정도였고 이들에게 시서(詩書)를 강론하여 교화(敎化)를 이루었다. 일찍이 한 나무 걸상에 50년 동안 꿇어 앉아서 지내고 다리를 펴지 않았는데 그 걸상 위에 무릎이 닿은 곳이 모두 뚫어졌다고 한다. 몇 해나 …… 슬퍼했던가 : 궁도는 몹시 곤궁한 처지이다. 고국(故國)에 봄풀이 무성한 것을 보고 전란에 휩싸인 시국을 슬퍼한 것이다. 〔월사집〕 모개(毛?) : 중국의 삼국시대 평구(平丘) 사람으로 자는 효선(孝先). 젊어서 현리(縣吏)로 있을 때부터 청렴 공평하기로 일컬어졌고, 현위(顯位)에 있을 때에도 항시 검소함으로써 사람들을 거느렸으므로 그때의 벼슬아치들은 청렴에 힘쓰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함. 《三國志 卷十二》 /중종시록38/ 모격(毛檄) : 모의(毛義)가 받든 부의 임명장[府檄]이란 뜻으로, 어버이 봉양을 위한 벼슬살이를 말한다. 후한(後漢)의 모의가 모친 생존 시에는 부격(府檄)을 받으면 기뻐했으나, 모친 사후에는 일절 벼슬길을 사양했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9 劉平等傳 序》 모경(冒耕) : 주인의 승낙이 없이 남의 땅에 농사를 짓는 것. /중종실록 41/ 모곡(耗穀) : 양곡을 대여하였다가 받아들일 때 창고에서의 손실을 대비하여 미리 10분의 1을 더 받아들여 놓은 곡식. 모공(毛公) : 붓을 의인화한 것이다. 〔용재집〕 모공(冒功) : 없는 공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선조실록 20/ 모과를 …… 기다리니 : 모과는 과일 중에 천한 것이며, 경(瓊)은 아름다운 옥이고 거(?)는 몸에 차고 다니는 패옥(佩玉)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주옥과 같이 아름다운 문장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형편없는 시를 지어 주고 주옥처럼 아름다운 화답을 바란다는 뜻이다. 《시경》 《위풍(衛風) 목과(木瓜)》에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었는데 나는 아름다운 옥으로 보답하였다.〔投我以木瓜 報我以瓊?〕”라고 하였는바, 여기서는 이 말을 역으로 인용한 것이다. 모과를 …… 놀라노라 : 경거(瓊?)는 아름다운 옥과 패옥(佩玉)인 바, 《시경(詩經) 위풍(衛風) 목과(木瓜)》에 “모과를 던져줌에 경거로써 보답하다.〔投之以木瓜 報之以瓊?〕”하였는데, 이는 좋지 못한 물건을 줌에 매우 아름다운 물건으로 갚아줌을 이른다. 모과를 …… 받았던가 : 모과는 과일 중에 천한 것이며, 경(瓊)은 아름다운 옥이고 거(?)는 몸에 차고 다니는 패옥(佩玉)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주옥과 같이 아름다운 문장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형편없는 시를 지어주고 주옥처럼 아름다운 화답을 바란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목과(木瓜)》에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었는데 나는 아름다운 옥으로 보답하였다.〔投我以木瓜 報我以瓊?〕”라고 하였는 바, 여기서는 이 말을 역으로 인용한 것이다. 모과를 …… 하여 : 모과는 과일 중에 천한 것으로, 형편없는 시를 지어서 주옥(珠玉)처럼 아름다운 시에 화답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목과(木瓜)>에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었는데 나는 아름다운 옥으로 보답하였네.〔投我以木瓜 報我以瓊?〕”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 말을 역으로 인용한 것이다. 모군(茅君) : 전설상의 인물로서 제(齊) 나라 사람인데, 구곡산(句曲山)에서 수도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모씨(茅氏) 형제를 말한다. 모군(毛君) : 후한(後漢)의 여강(廬江) 사람 모의(毛義)을 말함. 자는 소절(少節)이고 집이 가난했으나 효행으로 칭송이 높았음. 장봉(張奉)이 그의 명망을 사모하여 그를 방문하자 마침 부(府)에서 수령(守令)으로 부르는 격문(檄文 : 召書)이 이르니 모의가 격문을 받들고 안으로 들어가며 기쁜 안색이 있었는데, 장봉은 마음속으로 그를 비천하게 여겼다. 그 뒤 모의의 어머니가 죽자 조정에서 불러도 가지 않으니, 그제서야 장봉은 그가 전일에 기뻐했던 것은 어머니를 위하여 자신의 뜻을 굽혔던 것이라고 탄식하였음. 《後漢書》 69. 모군(茅君)의 …… 금고(琴高) : 모군은 전설 속의 인물로 강소성(江蘇省) 구용현(句容縣) 구곡산(句曲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 바, 모영(茅盈)과 모충(茅衷), 모고(茅固) 3형제이므로 삼모군(三茅君)이라 하며 구곡산을 모산(茅山)이라고도 친한다. 금고는 주(周)나라 말기 조(趙)나라 사람인데 거문고를 잘 탔으며 뒤에 탁수(??????水)에서 잉어를 타고 하늘에 올라 신선이 되었다 한다. 《列仙傳》 모귀희렵(暮歸喜獵) : 정호(程顥)가 소년 시절에 사냥을 좋아하였으나, 주돈이(周敦?)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닦고는 스스로 사냥을 즐기는 병통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저물 때 전사(田舍)에서 사냥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기뻐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近思錄》 /고봉집3/ 모기(?期) : 나이가 많아 80세로부터 100세에 이름을 이른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제순(帝舜)이 말씀하기를 “이리 오라. 너 우(禹)야! 짐이 제위(帝位)에 있은 지가 33년이니 모기[?期]하여 부지런히 해야 할 정사에 게으르니, 너는 태만히 하지 말고 짐의 무리를 거느리라.” 하였는 바, 주(註)에 ‘90을 모(?)라 하고, 100세를 기(期)라 한다.’ 하였다. 모기(?期) : 여든 살을 ?라고 하고 백 살을 期라고 하는데, 오래 사는 것을 말함. 모기령(毛奇齡) : 청대(淸代)의 학자. 자(字)는 대가(大可)이며, 학자들이 서하 선생(西河先生)이라 일컬었음. 명말(明末)의 선비로서 명(明) 나라가 멸망한 후 은둔(隱遁) 하였다가, 강희(康熙) 연간에 한림원 검토관(翰林院檢討官)에 임명되어 명사(明史)를 찬수(纂修)하고는 사임하고, 다시 관도(官途)에 나서지 않았음. 경학(經學)에 저서(著書)가 많았으나 송학(宋學)의 그릇된 점을 지적한 것이 있음. 《경집(經集)·문집(文集) 등 2 백여 권의 저술이 있음. /해행10-466/ 모당(慕堂) : 손처눌(孫處訥 : 1553~1634)의 호. 조선 중기의 유학자.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기도(幾道).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여헌 장형광, 낙재 서사원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우려다가 친상을 연이어 당하여 실행하지 못했다. 난리가 끝난 뒤에 향교의 재건에 앞장서서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고, 내암 정인홍이 퇴계 선생을 배척하는데 대항하여 척사부정(斥邪扶正)의 글을 지어 도내 사림을 규합하였다. 대구의 청호서원에 제향된다. 모당(茅堂) : 송 나라 호령(胡寧)을 말함. 안국(安國)의 아들이고 자(字)는 화중(和仲). 안국이 춘추전(春秋傳)을 지을 때 수찬 검토가 모두 령의 손을 거쳤으며 《춘추통지(春秋通旨)》를 지었음. 학자들이 모당 선생이라고 불렀음. 《宋史》 435. 《宋元學案》 34. 모당공(慕堂公) : 모당(慕堂)은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의 호로, 자는 원례(元禮)이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으로, 선조(宣祖) 1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수찬, 이조참의, 예조참의를 지내고, 선조 29년에 형조참판을 거쳐 대사성, 안동부사, 청주목사를 역임하였고, 광해군 때에 대사헌, 개성유수를 지냈다. 저서에 《모당유고(慕堂遺稿)》가 있다. 모당선생(慕堂先生) : 모당(慕堂)은 홍이상(洪履祥 : 1549-1615)의 호. 자는 원례(元禮), 관향은 풍산(豊山). 1579년(宣祖 1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이후로 정언 수찬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1609년 대사헌에 이르렀음. 동강 선생이 돌아가신 후 만사를 지은 것이 있음. 모두(?頭) :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로 오랑캐[胡]를 상징하는 별이다. 태계(泰階)는 삼태성(三台星)으로, 상계(上階)는 천자, 중계(中階)는 제후·공경대부, 하계(下階)는 사(士)·서인(庶人)을 상징하는 바 삼계(三階)가 화평하면 천하가 평안하여 태평을 이룬다고 한다. 여기서는 왜적이 쇠망하고 천하가 태평해짐을 뜻한다. 〔월사집〕 모든 …… 가졌지 : 시로 주변의 사물을 남김없이 읊어내었다는 뜻이다. 〔용재집〕 모래 …… 불고 : 몰래 남을 비방하고 중상함을 비유하는 것인데, 백거이(白居易)의 <독사(讀史)>라는 시에 “모래를 머금고 사람의 그림자를 쏘면 병에 걸리나 그 사람은 알지 못한고 교묘한 말로 사람의 죄를 얽으나 죽음에 이르도록 그 사람이 의심하지 않는다.[含沙射人影 雖病人不知 巧言構人罪 至死人不疑]”라고 하였다. 함사는 함사역(含沙??????)이라는 해충인데, 일명 ‘단호(短狐)’라 하기도 한다. 모로(慕老) : 호가 모당(慕堂)인 홍군서를 가리킨다. 그의 이름은 이상(履祥)이고 군서(君瑞)는 그의 자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월사집〕 모릉(摸稜) : 가부를 결정짓지 않는 모호한 태도. 당무후(唐武后) 때의 재상(宰相)이었던 소미도(蘇味道)가 열을 명백히 결단하지 않으므로 남이 그 까닭을 물으니 아무 말 없이 걸상의 모서리[稜]만 만지고[摸] 있었다. 그래서 그를 모릉재상이라 하였다. 《唐書 蘇味道傳 宛姿》 /명종실록2/ 모리(某里) : 경남 거창군에 있는 지명. 동계(桐溪) 정온(鄭蘊 : 1569 - 1641)이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척화(斥和)를 주장했다가 이듬해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자 명(明) 나라에 대한 의리를 잊을 수 없다고 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이 곳에 들어와 여생을 마쳤던 일이 있음. 자는 휘원(輝遠), 관향은 초계(草溪), 시호는 문간(文簡). 모모(?母) : 상고시대 황제(黃帝)의 넷째 비(妃)의 이름. 아주 추부(醜婦)였으므로 널리 추녀(醜女)의 뜻으로 쓰임. 아주 못생긴 여자였으나 현덕이 있었다 함. 못난 여자의 대명사. /성호8-63/ 모모(?母)와 돈흡(敦洽) : 모모는 황제(黃帝)의 넷째 비(妃). 그는 얼굴이 못생겼으나 현명하였고, 돈흡은 전국시대 진(陳)의 추녀(醜女) 이름. /동국3-183/ 모문룡(毛文龍) : 중국 명(明)나라의 무장(武將)이다. 명나라는 청(淸)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에게 계속 패전하자, 광해군 14년(1622) 모문룡으로 하여금 후금에게 빼앗긴 요동지방을 수복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철산(鐵山)의 가도(?島 : 되섬)에 진을 치고 조선에 군량과 무기를 지원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후 모문룡은 명나라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다가 원숭환(袁崇煥)에게 참형당하였다. 모반 대역(謀叛大逆) : 《大明律 名例律 十惡》 중의 두 가지인 모반과 모대역(謀大逆). 모반은 사직(社稷 : 나라)을 위망(危亡)하게 하려고 꾀한 것이고, 모대역은 종묘(宗廟)·산릉(山陵 : 곧 능을 말한다.)·궁궐 등을 훼망(毁亡)하려고 꾀한 것. (여기서 ‘꾀한 것’이라 함은 꾀하였거나 실행한 것을 다 포함한다. 이하 본문의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죄’까지 모두 이와 같다.) 모반·모대역을 처벌하는 법규는 《大明律 刑律 謀反大逆》에 보인다. 이하 본문의 열거된 사(赦)에서 제외한 죄는 《明例律 常赦所不原》에 준하는 것이며, ‘상사소불원’이라 함은 보통 사에서는 용사(容赦)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십악을 범한 것, 사람을 죽인 것, 관의 재물을 훔친 것, 강도, 절도, 방화, 무덤을 파낸 것, 장물(臟物)을 받은 것, 사기, 간통, 꾀어서 사람을 매매한 것, 간악한 무리를 결성한 것, 참언(讒言)으로 남을 죽게 한 것, 짐짓 범인의 죄를 경하게 하거나 중하게 한 것, 죄정을 알면서 짐짓 석방한 것 등이 포함된다. 이런 죄는 고의로 범행하여 죄를 진 것으로 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중종10-71/ 모반(謀反)·대역(大逆)·모반(謀叛) : 모반은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꾀하는 것. 대역은 종묘·산릉·긍궐을 훼손하려 꾀하는 것, 모반은 본국을 배반하려 타국에 몰래 따르는 것. 《大明律 十惡》 모발(茅拔) : 군자가 동류들과 함께 조정에 진출함을 뜻한다. 《주역》 태괘(泰卦) 초구효(初九爻)에 “띠풀의 엉킨 뿌리는 뽑는 격이라 동류들과 함께 감이니 길이다.[拔茅茹 以其彙征 吉]”에서 온 말이다. 〔월사집〕 모색(茅塞) : 사람이 마음을 닦지 않아 막힌 것을 비유하는 말. 맹자가 고자(高子)에게 마음을 닦기에 간단을 두어서는 않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산중의 길은 잠간 사이에 사람이 다니게 되면 길이 되고 잠시라도 다니지 않게 되면 띠풀로 막히게 된다.[山徑之蹊間 介然用之而成路 爲間不用則茅塞之矣]”고 하였음. 《孟子》 <盡心章下>. 모색(茅塞) : 산길이 띠풀에 덮여서 막힌다는 말로 마음을 닦지 않아 막힌 것을 비유함. 맹자가 고자(高子)에게 마음을 닦기에 간단을 두어서는 않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산중의 길은 잠간 사이에 사람이 다니게 되면 길이 되고 잠시라도 다니지 않게 되면 띠풀로 막히게 된다.[山徑之蹊間 介然用之而成路 爲間不用則茅塞之矣]”고 하였음. 《맹자》 <진심장 하(盡心章下)>. 모수(毛遂) : 모수는 전국(戰國) 시대의 조(趙) 나라 사람. 진(秦)이 조의 도성(都城)인 한단(邯鄲)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조에서는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을 시켜 초(楚)에 가서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평원군이 초에 가서 합종(合從)을 의논하였으나 아침부터 정오까지 일이 결정되지 않자, 평원군의 식객(食客) 모수가 검(劍)을 만지며 계상(階上)에 올라가 “합종은 초를 위하는 것이요, 조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하니, 초왕(楚王)이 사직(社稷)을 바쳐서 따르겠다고 하였다. 《史記 卷七十六 平原君傳》 /선조실록18/ 모시(毛詩) : 모전(毛傳). 한(漢) 나라의 모형(毛亨)이 《시경고훈전(詩經?訓傳)》을 지어 모장(毛?)에게 전수하여 지금의 《시경》을 전했기에 일컫는 말임. 여기에 《시경》 전편을 해설하는 대서(大序)와 각편을 해설하는 소서(小序)가 있음. 모연수(毛延壽) : 한 대(漢代)의 화가(畵家). 인물화(人物畵)에 능하였음. 원제의 궁인 왕 장(소군)이 뇌물을 보내지 않으므로 그 상(像)을 일부러 추하게 그려 바친 것이 드러나서 기시(棄市)의 형(刑)을 받았다 함. /성호7-108/ 모영(毛潁) : 붓의 별칭. /양촌2-161/ 모용(茅容) : 東漢의 陳留 사람으로 字는 季偉. 40이 될 때까지 농사만을 지었으나 몸가짐이 경건하고 부모를 잘 봉양했는데, 郭林宗이 보고 절하며 어질다고 칭찬하고 배우기를 권하여 마침내 德을 이루게 하였음. 後漢書 98. 모용(慕容): 오호십육국시대에 연(燕)나라를 세운 선비(鮮卑)의 姓. 모용준(慕容儁): 319~360). 前燕의 제2대 왕(재위 348∼360). 慕容?의 둘째아들로, ?의 뒤를 이어 燕王이 되었다. 後趙의 영토를 잠식하고, 350년 계(:北京)에 도읍을 정했다. ?魏의 후조를 멸망시키고, 352년 제위에 올랐다. 357년 허베이성[河北省] ?으로 천도하여 화북(華北:화베이)의 동부에 군림하게 되었다. 모월(?鉞) : 백모(白?)와 황월(黃鉞). 장군이 군대를 지휘하는 의장(儀仗)으로서 군권(軍權)을 뜻함. 《書經 牧誓》. 모의(毛義) : 후한(後漢)의 여강(廬江) 사람, 자는 소절(少節)이고 집이 가난했으나 효행으로 칭송이 높았는데, 장봉(張奉)이 그의 명망을 사모하여 그를 방문하자 마침 부(府)에서 수령(守令)으로 부르는 격문(檄文 : 召書)이 이르니 모의가 격문을 받들고 안으로 들어가며 기쁜 안색이 있었다. 이에 장봉은 마음속으로 그를 비천하게 여겼는데, 그 뒤에 모의의 어머니가 죽자 조정에서 불러도 가지 않으니, 그제서야 장봉은 그가 전일에 기뻐했던 것은 어머니를 위하여 자신의 뜻을 굽혔던 것이라고 탄식하였다. 《後漢書》 69 모자 떨어뜨리는 바람 : 진(晉)나라 맹가(孟嘉)의 풍류에 관련된 고사를 차용하였다. 환온(桓溫)이 9월 9일에 용산(龍山)에서 주연을 베풀었을 때 바람이 불어 맹가의 두건이 땅에 떨어졌으나 맹가가 몰랐는데, 환온이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게 하고 그의 행동을 보고자 하였다. 맹가가 한참 후 변소에 간 동안 환온이 모자를 주어다 그 자리에 두고 손성(孫盛)에게 명하여 맹가를 조롱하는 글을 지어 맹가의 좌석에 붙여 두게 하니 맹가가 돌아와 보고 곧바로 화답했는데 그 글이 매우 아름다워 모두 찬탄하였다 한다. 《晋書 孟嘉傳》 여기서는 미리 약속된 서산(西山)에서의 모임을 뜻하고 있다. 〔용재집〕 모자 바람에 떨구던 : 진(晉)나라 맹가(孟嘉)의 풍류에 관련된 고사를 차용한 것으로, 1권 국화 주(註) 참조. 여기서는 지난 해 중양절(重陽節) 용재가 벗들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용재집〕 모자(毛子) : 모자는 동한(東漢) 여강(驪江)의 효자 모의(毛義)임. 부(府)에서 수령을 삼겠다는 격(檄 : 벼슬을 하라고 부르는 문서)을 보내자 모의는 그 격을 받들고 희색이 만면했었는데, 나중에 그의 어머니가 죽으니 벼슬을 버리고 공거(公車)로 불러도 가지 않았다고 함. 《後漢書 卷三十九 劉平等傳序》 /고봉집2/ 모자토계(茅茨土階) : 요 임금이 천자가 되어 명당(明堂)을 짓되, 흙으로 섬돌을 3척(尺)으로 쌓고 띠로 지붕을 이어 자르지 않은 것을 말한다. 《太平御覽 百卉茅》 모장(毛?) : 육국(六國) 때 모형(毛亨)이 ‘시훈고(詩訓誥)를 지어 가전(家傳)하였는데 모장이 더욱 정밀하게 연구하여 관장경(貫長卿)에게 전수하였다. 지금에 전해지는 《시경》은 곧 모형과 모장이 전한 것이므로 《모시(毛詩)》라고도 한다. 《漢書藝文志》 /오주16-17/ 모재(慕齋) : 조선조의 문신 학자인 김안국(金安國 : 1478-1543)의 호. 자는 국경(國卿).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의 형. 1503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어서 박사 부수찬 부교리 등을 역임. 1517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장하고, 농서(農書) 잠서(蠶書)의 언해(諺解) 《벽온방(?瘟方)》 《창진방(瘡疹方)》 등을 간행 보급하였음. 인종(仁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溪書院)에 제향되었음. 시호는 문경(文敬). 모재당곡(母在堂哭) :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 나라 사람 화주(華周)·기양(杞梁)이 전사(戰死)했는데 그의 아내들이 슬피 울었으므로 나라의 풍속이 변해졌다는 고사가 있음. 《孟子 告子 下》 /연행1-84/ 모저(茅?) : 모초(茅草)로 싼다는 말이니, 곧 봉후(封侯)를 뜻한다. 왕자(王子)가 오색의 흙으로 사(社)를 만들고, 제후를 봉할 적에는 각각 그 방위에 맞는 흙을 나눠주어 사를 세우게 했는데, 황토(黃土)로 덮고 백모(白茅)로 싼[?]다 하였다. 《書經 禹貢 厥貢惟五色條傳》 /동국이상국집4/ 모적(?賊) : 뿌리와 마디를 갉아 먹는 해충(害蟲) /성호3-226/ 모적(冒籍) : 원적(原籍)을 사칭(詐稱)함. 곧 원적에 실린 성명·연령·신분 등을 속여서, 자기에게 해당되는 일을 모면하거나 해당되지 않는 일에 참여하려 하는 것. /연행6-411/ 모전(毛傳) : 《모시(毛詩)》, 즉 《시경(詩經)》을 말함. 한(漢)나라의 모형(毛亨)이 《시경》의 고훈전(?訓傳)을 지어 모장(毛?)에게 전수하여 지금의 《시경》을 전했기에 일컫는 말임. 모조(茅?) : 옛날에 천자가 왕후(王侯)를 봉할 때 백모(白茅)로 진흙을 싸서 주는 것으로써 봉하는 곳의 토지와 권력을 주는 것을 상징함. 모주과(牟珠顆) : 즉 마니(摩尼)의 보주(寶珠)인데 용왕(龍王)의 뇌에서 나온 것으로 청정옥(淸淨玉)이라 이름. /완당집3/ 모쪼록 …… 마오 : 앞의 주(註) ‘거 땅에 …… 말게나’ 참조. 〔용재집〕 모척(毛尺) → 금일(黔日) 모초(茅焦) : 진시황(秦始皇)의 어머니가 음란(淫亂)하여 간부(奸夫)와 함께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시황(始皇)이 폐하였다가 모초(茅焦)의 간(諫)함을 듣고 다시 화합하였다. /연려실기술20 5-167/ 모추입현(毛錐立見) : 전국시대에 조국(趙國)이 진국(秦國)의 침략을 당하여 초국(楚國)에 원조를 청하려 가는데 수행원(隨行員)에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인재 20 인을 선택하는데 1인이 부족하였다. 평원군의 문하(門下)에 객(客)으로 있던 모수(毛遂)가 “제가 가겠습니다.”하고 자천(自薦)하였다. 평원군이 묻기를 “자네가 나의 문하(門下)에 있은 지 몇 해인고?”하니 모수(毛遂)가 답하되 “3년입니다.”하였다. 평원군이 말하기를, “훌륭한 인재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錐]과 같아서 그 끝이 곧 드러나는 것인데 자네가 나의 문하에 있는 3년 동안에 내가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자네가 특별한 것이 없는 것이다.”하니 모수(毛遂)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에는 주머니 속에 들겠습니다. 전일에 벌써 주머니에 들어갔더라면 끝만 나올 뿐이겠소. 송곳자루까지 다 나왔을 것입니다.”하였다. /해행5-610/ 모친[萱?] : 훤위(萱?)를 남의 어머니의 존칭으로 쓰는 것은 훤당(萱堂)또는 훤실(萱室)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옛날에 어머니는 북당(北堂)에 거처했는데 그 뜰에 원추리를 심었으므로 일컫는 말이다. 모토(茅土) : 天子가 제후를 봉해 줄 때에 띠[茅]에다 흙을 싸서 나누어 주었다. /고려사절요 1권 1-26/ 모토(茅土)를 받아 : 모토는 띠풀과 흙으로 고대에 제후왕을 봉하게 되면 봉지(封地)가 있는 방향에 따라 흙을 띠풀에 싸서 주었는 바, 곧 제후로 봉해짐을 말한 것이다. 방향에 따른 색깔은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이며 이러한 흙으로 단(壇)을 쌓되 위에는 황토를 덮었다. 모퇴(?追) : 모퇴(?追)는 위모(委貌)와 무퇴(毋追)인데 다같이 치포관(緇布冠)의 이름으로 《禮記 郊特牲》에 “위모는 주 나라의 제도이며, 장보는 은 나라의 제도이며, 무퇴는 하후씨의 제도이다.”[委貌周道也 章甫殷道也 毋追夏后氏之道也]하였다. 자형을 서로 비교하기 위하여 저자가 일부러 ‘貌’자를 ‘?’자로 옮긴 것이다. /청장2-96/ 모포 …… 깍다가 : 거북의 등에서 털을 깍아 모포를 만든다는 뜻으로, 소식(蘇軾)의 동파(東坡)란 시에, “거북의 등에서 털을 깍은들 그 언제나 모포를 만들 수 있으랴[刮毛龜背上 何時得成氈]” 한 구절에서 유래하였. 성어(成語)로는 괄모귀배(刮毛龜背)라 한다. 〔용재집〕 모혜(茅蹊)의 비난 : 맹자의 진심편(盡心篇)에 있는 말. “산골짜기 좁은 길이 사람들이 자주 많이 다니므로 큰 길이 되더니, 사람 통행이 중단되어 풀이 우거져 길이 막힌다.”고 하였는데, 학문하는 사람이 학문을 중도에 그치면 마음이 거칠어지고 막혀버린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하곡1-92/ 모호(?弧) : 춘추 시대 정 나라 임금의 기(旗) 이름. 정 나라 임금이 허(許)를 정벌할 때 영고숙(潁考叔)이 이 기를 취하여 먼저 오르자 자도(子都)가 아래서 활을 쏘아 이를 쓰러뜨림에 하숙영(瑕叔盈)이 또 이 기로써 오른 뒤, 정 나라 군사들이 다 오른 일이 있음. 후에는 일반적으로 군기(軍旗)를 가리키는 말로 쓰임. 《左傳 隱公 十一年》. 모화관(慕華館) : 조선 때 중국 사신(使臣)을 영접(迎接)하던 곳. 태종(太宗) 7년(1407) 지금의 서대문(西大門)밖에 건립하여 모화루(慕華樓)라 하고 그 앞에는 영은문(迎恩門)을 세웠다. /서애집2/ 모화관(慕華館) : 조선조 때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처소로서, 조선조 초기부터 명(明)나라에 대하여 극진한 사대 정책(事大政策)을 쓰게 되어 서울 서대문 밖에 영은문(迎恩門)과 모화루(慕華樓)를 세웠는데, 세종 12년(1430)에 이것을 모화관이라고 하였다. 목가(木稼) : 목가(木稼)는 목개(木介)의 별칭인데 극심한 추위로 나무에 얼어붙은 얼음이며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함. 송 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지은 한기(韓琦)의 만사에 “나무 고드름에 고관이 떨었다는 말 들었는데 산이 무너진 오늘 철인이 돌아갔네.[木稼曾聞達官? 山頹今見哲人萎]” 라고 하였음. 《石林詩話》 /고봉집2/ 목개(木介) : 나무 가지에 빗물이 젖었다가 졸연히 추위를 만나면 얼음이 응결되는 것이니, 목빙과 같음. /성호1-316/ 목객(木客) : 《南康記》에 “산간에 목객이 있어 형체는 완전한 사람인데 다만 새 발톱을 지었다. 높은 나무에 깃드는데 일명 산정(山精)이라 한다.” 하였음. /완당집3/ 목격도존(目擊道存) : 《장자》 전자방(田子方)에 보이는 말로, 굳이 말하지 않고 눈만 마주쳐도 서로 도가 통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서로 대면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통할 수 있도록 시 한 수를 적어달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월사집〕 목계(木溪) : 강혼(姜渾)의 호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호(士浩)이고,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장류(杖流)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대제학, 공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나 김일손(金馹孫)에 버금갈 정도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저서에 《목계집(木溪集)》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목고(穆考)께서는 …… 돌아보사 : 목고는 주(周)나라 무왕(武王)을 가리키는 바, 무왕이 죽고 나이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한 고사를 들어 정조(正祖)의 영혼이 새로 즉위한 순조(純祖)를 묵묵히 도울 것을 기대한 말이다. 목공(穆公) : 《書經 秦誓》에 나오는 목공은 오제(五帝)나 삼왕(三王) 같은 성인이 아닐 뿐아니라, 그 말의 내용 또한 지난날의 잘못을 말로만 뉘우친 데 불과할 뿐인데, 공자가 《서경》을 산정(刪定)할 때 이를 빼버리지 않고 남겨둔 것을 말한다. /명종실록3/ 목공(木公) : 서왕모(西王母)와 병칭되는 선인(仙人)의 이름이다. 목공(木公)1 : 보통 금모(金母), 즉 서왕모(西王母)와 병칭되는 선인(仙人)의 이름으로, 신선의 대명사이다. 목공(木公)2 : 신선인 동왕공(東王公). 동부(東父)라고도 하며 서왕모(西王母)와 병칭하여 동화제군(東華帝君)이라고 함. 목과(木瓜) : 《시경》 《위풍(衛風)》의 편명. 위나라가 적인(狄人)에게 패하여 조읍(漕邑)에 나가 처했을 때 제나라 환공(桓公)이 구제하여 거마(車馬)와 기복(器服)을 주니 위나라 사람들이 이를 고맙게 생각하여 후하게 보답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 시를 지었다고 함. 목과로 …… 봐주었지 : ‘ <시경》 위풍(衛風) 목과(木瓜)에 “나에게 목과를 주거늘 경거로써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라 한 대목을 차용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목과(木瓜)는 자기의 시문(詩文)을 낮추어 하는 말이고 경거(瓊?)는 상대방의 시문을 높해서 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작자가 시를 보내어 지정이 시로 답한 것을 말하고 있다. 천리마는 지정에, 절름발이 나귀는 작자 자신에 비기고 있다. 〔용재집〕 목관(木棺)과 항석(抗席) : 장구(葬具)의 이름. 묘혈(墓穴) 위의 티끌을 막기 위하여 사용한다. 《儀禮 旣夕禮 注》 /성호사설5/ 목노(牧老) : 고려말의 문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나머지는 2권 ‘사화(士華)에게 주어 관등(觀燈) 약속을 하다’ 주(註) 참조. 〔용재집〕 목노(木奴) : 목노는 귤의 별명. 오국(吳國)의 이형(李衡)이 가족 몰래 용양현(龍陽縣)에 귤(橘) 1천 나무를 심어 두고는 죽을 때에 아들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용양현에 천두(千頭)의 목노(木奴)를 남겼으니 장래에 너에게 해마다 비단 1천 필을 바쳐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해행5-503/ 목눌(木訥) : 질박하고 둔한 품성. 공자가 《강의하고 목눌함이 인에 가깝다.[剛毅木訥 近於仁]》고 한 말이 있음. 《論語》 <子路>. 목락(木酪) : 풀과 나무를 가지고 만든 죽의 일종이다. 목란선(木蘭船) : 향목(香木)의 일종인 목란으로 만든 배를 이른다. 목릉(穆陵) …… 곡하였오 : 목릉은 선조(宣祖)의 능이다. 선조와 비(?) 의인왕후(懿仁王后), 그리고 이 인목대비의 상(喪)으로 세 번 곡한 것이다. 〔월사집〕 목릉(穆陵)1 : 조선조 선조(宣祖)의 능이다. 이 때 금계가 목릉의 수릉관(守陵官)으로 있었던 것이다. 〔월사집〕 목릉(穆陵)2 :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임구현(臨?縣)에 있다. 목릉촌(穆陵村) : 목릉은 선조의 능이다. 선조의 능이 있는 마을이다. 〔월사집〕 목리(木李) : 자신의 시문(詩文)을 낮춘 말이다. <시경》 위풍(衛風) 목과(木瓜)에 “나에게 목리를 주거늘 경거로써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라 한 대목에서 온 것이다. 〔용재집〕 목마름 …… 맡는다 : 매실의 맛이 매우 시므로, 매실을 상기하면 입 안에 침이 고여 갈증을 달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용재집〕 목목(穆穆) : 심원(深遠)하 모습. 목목(穆穆)하고 황황(皇皇)하여 : 목목은 공경함이고 황황은 아름다움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가락(假樂)>에 “녹을 구하고 백복(百福)을 얻은지라 자손이 천(千)이며 억(億)이로다. [干祿百福 子孫千億] 목목(穆穆)하고 황황(皇皇)하여 제후에게 마땅하고 천자에게 마땅하다. [穆穆皇皇 宜君宜王]” 하였다. 목상(木像) : 후한(後漢) 하내(河內) 사람인 효자 정 난(丁蘭)의 고사. 정 난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으므로 목상을 깎아 놓고 살아 있는 부모를 모시듯이 공양하였다. 그런데 이웃에 사는 장 숙(張叔)이라는 사람이 술에 취하여 목상의 머리를 막대기로 두드렸는데 나중에 돌아온 정 난이 못마땅해 하는 목상의 모습을 보고 아내에게 물어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정 난은 장 숙을 칼로 살해했고 그 때문에 관에 체포되어 갔는데, 그 때 목상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한다. 《風俗通 愆禮》 /선조실록3/ 목생(穆生) : 한(漢) 나라 초 원왕(楚元王)의 신하. 그는 단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초 원왕은 항상 그를 위하여 단술[醴酒]을 내왔다. 그 뒤 원왕의 손자 무(戊)에 이르러서 단술을 내지 않자 목생은, “단술을 베풀지 않는 것은 임금이 게을러졌기 때문이다.”하고 떠나 버렸다. /성호사설8/ 목서화(木犀花) : 어떤 사람이 황룡회당선사(黃龍晦堂禪師)에게 법을 물었더니, 선사는 “뜰 앞에 있는 목서화(木犀花)의 향기를 맡았는가?” 하였다. “향기를 맡았습니다.”하니 “그러면 더 말할 것 없다.” 하였다. /해행5-412/ 목숙(穆叔) : 춘추 시대 노 나라 대부 숙손표(叔孫豹). 시호가 목(穆)이므로 목숙이라고 함. 목숙(穆叔)이 …… 하였으니 :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의 숙손표(叔孫豹)로 시호(諡號)가 목자(穆子)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그는 일찍이 “가장 훌륭한 사람은 덕을 세움이 있는 것이요, 그 다음은 공을 세움이 있는 것이요, 그 다음은 좋은 말을 남기는 것이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하였는 바, 덕을 세운다는 것은 요(堯)임금과 순(舜)임금 같은 성인(聖人)을 이르고, 공을 세운다는 것은 홍수를 다스려 백성들을 구제한 우(禹)임금과 같은 분을 이르고, 좋은 말을 남긴다는 것은 좋은 글과 말을 남긴 사람을 이른다. 원문에는 ‘목백(穆伯)’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참고하여 수정하였다. 목숙(??) : 거여목, 콩과의 다년초로 마소의 사료나 비료로 쓰이며 어린 잎은 식용하기도 한다. 목숙(??)이 담긴 쟁반 : 학생을 가르치는 교관(敎官)의 가난한 생활을 뜻한다. 당(唐) 나라 설령(薛令)이 동궁(東宮)의 시독관(侍讀官)으로 있으면서 자기 신세를 슬퍼하여 지은 시에 “아침 해가 둥글게 떠올라 선생의 소반을 비추누나. 소반에는 무엇이 있느뇨. 목숙만이 이리저리 놓여 있구나.[朝日上團圓 照見先生盤 盤中何所有 ??常欄干]” 한 데서 유래하였다. 목숙은 말먹이 풀로 몹시 조악한 음식을 뜻한다. 〔월사집〕 목승(木繩) : 나무의 먹줄로, 바른 간언(諫言)을 뜻한다. 《서경》 열명 상(說命上)에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 하였다. 〔월사집〕 목앵(木罌) : 나무로 만든 병. 한 신이 위왕 표(魏王豹)를 사로잡을 때 임진(臨晉)에서 이 목앵을 타고 복병을 건너가도록 한 계획. /성호사설7/ 목야(牧野) : 무왕이 주(紂)와 싸우던 들판 이름. 《서경(書經)》 주서(周書) 목서(牧誓) 편에 보임. /성호사설9/ 목어(木魚) : 불교의 경전을 읽을 때 두드리는 기구. 나무로 잉어처럼 만들었는데, 속이 비고 비늘이 새겨졌다. /성호4-230/ 목여지아(穆如之雅) : 《시경》 대아 증민편(大雅丞民篇)을 가리킴. 이는 주 선왕(周宣王) 때 중산보(仲山甫)가 제(齊)로 성을 쌓으러 가는데 윤길보(尹吉甫)가 그를 전별한 시다. 그 맨 끝 구에 ‘길보가 송을 지으니 목(穆)함이 청풍 같도다’[吉甫作誦穆如淸風]라는 글귀가 있다. /삼봉1-243/ 목여청풍(穆如淸風) : 시가 매우 화락(和樂)하고 의미가 심장함을 뜻한다. 周 나라 宣王의 신하 尹吉甫가 지은 선왕의 중흥한 공덕을 칭송한 시에 있는 말이다. 《시경》 대아(大雅) 증민(烝民)에, “윤길보(尹吉甫)가 송시(誦詩)를 지으니, 심장(深長)하기 청풍과 같도다.[吉甫作誦 穆如淸風]” 하였다. 〔월사집〕 목옹(牧翁) : 고려말기의 문신 이색(李穡 1328~1396)을 가리킨다. 그의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와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고려 말 삼은(三隱) 중의 한 분이다. 목옹(牧翁)의 …… 청신(淸新)해라 : 풍영루(風詠樓)에 목은(牧隱)의 이색(李穡)의 기문(記文)과 도은의 시가 함께 걸려 있었던 듯하다. 〔용재집〕 목왕(穆王) : 목왕은 주 소왕(周昭王)의 아들로 즉위하자마자 팔준마(八駿馬)를 타고 서정(西征)에 나가서 돌아올 줄 모르고 방탕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서국(徐國)에 조회하는 제후가 많았었다. 곧 이 서국을 쳐서 멸하였으나 계속하여 견융(犬戎)을 정벌하였으므로 이로부터 황복(荒服)이 내조(來朝)하지 않았다. 《史記 卷四 周本紀 第四》 목왕(穆王)이 타고다녔던 준마 : 주(周) 나라 목왕이 천하를 주유하면서 요지(瑤池)에 당도하여 서왕모(西王母)를 만나기까지 하였는데, 이 때 타고 다녔다는 여덟 필을 준마로, 그 이름은 절지(絶地), 번우(?羽), 분소(奔宵), 초영(超影), 유휘(踰輝), 초광(超光), 등무(騰霧), 협익(挾翼)이라 하기도 하고, 적기(赤驥), 도려(盜驪), 백의(白義), 유륜(踰輪), 산자(山子), 거황(渠黃), 화류(華?), 녹이(綠耳)라 하기도 한다. 〔용재집〕 목요(木妖) : 제택(第宅)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치장하는 사람을 기록하는 칭호. 당(唐) 나라 내신(內臣)이었던 융수(戎帥)가 지나치게 정관(亭館)을 치장하여 시속이 그를 목요라고 호칭한 데서 유래되었다. /명종실록 15/ 목욕(沐浴)의 청(請) : 경건한 마음으로 역적을 토벌하기를 청하는 것. 춘추 시대 진성자(陳成子)가 자기 임금인 간공(簡公)을 시해하니, 공자(孔子)가 목욕하고서 조정에 나아가 노 애공(魯哀公)에게 진성자를 토벌하고자 청한 데서 연유한 말. 《論語 憲問》 목용(繆?) : 한(漢) 나라 사람, 자는 예공(豫公). 소시에 부친을 여의고 형제 네 사람이 한 집에 살면서 재산을 공유했는데, 각자 결혼 후 형제의 부인들이 분가하기를 원하고 자주 다투는 말이 있자, 목용이 문을 닫고 스스로 회초리를 치면서 자신이 가도를 바르게 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었다. 이에 여러 아우와 그 부인들이 목용의 말을 듣고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다시 종전의 행실을 바꾸어 돈목하게 지냈다는 고사가 있다. 《小學》 《善行》 목우(木偶)의 …… 비웃으니 : 목우는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이고 토우(土偶)는 진흙으로 만든 허수아비인 바, 《사기(史記) 맹상군전(孟嘗君傳)》에 목우가 토우를 보고 “이제 장마가 질 터이니, 그대는 비를 맞으면 그대로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라고 말하자, 토우는 대답하기를 “나는 원래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대는 이제 홍수에 떠밀려 정처없이 떠돌아다닐 것이다.” 하고 비웃었다는 옛 고사를 든 것이다. 목우경(睦禹卿) 장흠(長欽 1572-1642) : 호는 고석(孤石)이고 본관은 사천(泗川)으로, 이 때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역모 사건을 막으려다 탄핵을 받고 청풍군수로 좌천되었던 것이다. 〔월사집〕 목우유마(木牛流馬) : 중국 삼국 시대 제갈 양이 창제한 것으로, 군량을 운반하는 데 사용했던 수레. 그 모양은 우마(牛馬)와 같고 기계를 설치하여 운행이 자유롭게 되어 있었다. 《三國志 蜀書 諸葛亮傳》 /명종실록 5/ 목융(繆?)은 …… 덮었으니 : 목융은 한(漢) 나라 사람으로 자가 예공(豫公)인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 네 명이 재산과 가업을 함께 하였는데, 각각 아내를 맞이함에 이르러서는 분가를 요구하자,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한 것을 자책하여 스스로 종아리를 치니, 이를 본 아우와 아내들이 모두 뉘우치고 사죄하여 마침내 화목한 생활을 하였다고 하며, 강굉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자가 백회(伯淮)인데, 두 아우인 중해(仲海)·계강(季江)과 우애가 지극하여 항상 한 이불을 덮고 함께 잤으므로, 강굉공피(姜肱共被)라는 고사가 생기게 되었는 바, 이 고사를 들어 형제간의 우애를 말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독행열전(獨行列傳)》, 《강굉전(姜肱傳)》 목은(牧隱) : 고려 말의 학자 이색(李穡 : 1328∼1396).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이고, 목은(牧隱)은 그의 호이다. 찬성사 이곡(李穀)의 아들이자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학문과 문학이 뛰어났으며 정치에도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문하에서 권근(權近),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을 하며, 저서에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목은(牧隱) 노인 : 고려말의 문호 이색(李穡)의 자가 목은(牧隱). 2권 ‘사화(士華)에게 주어 관등(觀燈) 약속을 하다’ 주(註) 참조. 〔용재집〕 목인(木人) → 무고(巫蠱) 목인(牧人)이 …… 누구인고 : 《시경》 소아(小雅) 무양(無羊)에, “목인이 꿈을 꾸니 사람이 물고기가 되며 조 깃발이 여 깃발이 되도다. 태인(太人)이 점을 쳐보더니, 사람이 물고기가 됨은 실로 풍년 들 조짐이요, 조 깃발이 여 깃발이 됨은 집안이 번창할 조짐이로다 하였다.[牧人乃夢 衆維魚矣 ?維?矣 大人占之 衆維魚矣 實維豊年 ?維?矣 室家溱溱]” 하였다. 〔용재집〕 목자(穆子) : 노 나라 숙손표(叔孫豹)의 시호. 계무자(季武子)가 장차 삼군(三軍)을 일으키려 할 때 목자에게 고함에 목자가 말리지 못한 채 동조하여 삼군을 일으켜서 공실을 셋 으로 나누어 각기 하나씩 차지하였음. 《左傳 襄公 十有一年》. 목자(木子) : 목자는 이(李) 자로 이씨(李氏)의 개국(開國)을 뜻하고, 주초(走肖)는 조(趙) 자로 조준(趙浚)을 가리킨다. 당시에 목자장군검(木子將軍劍)이라 하여 이성계(李成桂) 장군을, 주초대부필(走肖大夫筆)이라 하여 조준(趙浚)의 문필(文筆)을, 비의군자지(非衣君子智)라 하여 배극렴(裵克廉)의 지혜를 이르는 말 등이 유행하였다. 《燃藜室記述 卷二 太宗朝故事本末》 /명종실록 3/ 목전(木箭) : 나무로 만든 화살. 무과(武科)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때에 사용하였음. /선조실록 10/ 목제(穆帝): 晉의 임금. 재위 345-361. 목좌상(睦左相) : 좌의정을 역임한 목내선(睦來善 1617~1704)을 가리킨 것이다. 목차계(木叉戒) : 梵語에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는 漢譯으로 《별해탈(別解脫)》이라 하는 데 毅生·偸盜·射淫·妄語·兩舌·惡口 등 일곱가지 業을 방지하는 계(戒)이다. 목천(木天) : 학사(學士)가 거처하는 비각(?閣)의 별칭. 한림원(翰林院)을 말함. 목천자전(穆天子傳) : 서기전 5세기경의 중국 최고의 역사 소설책. 주 목왕(周穆王)이 천제(天帝)의 딸 서왕모(西王母)를 만나고, 남방 여행 중 미인 성희(盛姬)와 연애하여 결혼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런데 진 태강(晋太康) 2년(281)에 급현(汲縣) 사람 부준(不準)에 의해 위 양왕(魏襄王)의 무덤에서 발굴된 것이어서 워낙 결자가 많다. /청장2-149/ 목탁(木鐸) : 정교(政敎)를 베풀 때 목탁을 가지고 길로 다니면서 울린다는 것.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天將以夫子爲木鐸”이라 하였음. /성호사설8/ 목후(沐?) : 사람 축에 끼이지 못하는 짐승같은 이가 옷만 훌륭하게 입었다는 말로 유방의 적수였던 항우(項羽)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記)〉에 항우가 “진(秦)나라 궁궐을 불태워 버리고 유방(劉邦)을 추방한 다음에 부귀를 누리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하겠다.”라고 큰소리칠 때, 어떤 자가 “항우의 사람됨은 원숭이를 목욕시키고 갓을 씌운 것과 같다.[沐?而冠耳]”라고 했다고 한다. 목후이관(沐?而冠) : 사람답지 않은 이가 옷만 훌륭하게 입었다는 비유.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記)에, 초(楚) 나라 항우(項羽)가 진(秦) 나라 궁궐을 불태워 버리고 유방(劉邦)을 추방한 다음에 부귀를 누리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한다고 큰소리칠 때, 어떤 자가 이를기를, “항우의 사람됨은 원숭이를 목욕시키고 갓을 씌운 것처럼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人言 楚人沐?而冠耳 果然]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성호8-145/ 몰오영(沒吾寧) : 죽을 때는 마음이 편안하여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으로 장재(張載) 《西銘》의 “존오순사 몰오영야(存吾順事 沒吾寧也)”에서 나온 말임. /고봉집2/ 몰파비(沒巴鼻) : 파는 자루이고 비는 꼭지인데 파악(把握)이 없는 것을 말함. /완당집3/ 몸 가볍기 : 신선처럼 몸이 가벼워 세상을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용재집〕 몸 지키는 검 : 외적(外敵)을 막아 천하를 평안케 하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다. 두보(杜甫)가 토번(吐蕃)의 칩략을 막기 위해 공동산(??山)에 주둔하고 있던 가서한(哥舒翰)에게 보낸 시 투증가서개부이십운(投贈哥舒開府二十韻)에 “몸을 막는 장검 한 자루를 공동산에서 빗겨 들고 싶다오.[防身一長劒 將欲倚??]” 하였다. 《古文眞寶 前集》 〔월사집〕 몸뚱이 잊으니 : 서로 아무런 허물이 없이 친한 사이인 망형(忘形)의 교분을 뜻한다. 〔용재집〕 몸뚱이가 …… 빌미로구나 : 《도덕경》 13장(章)에,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은 내 몸뚱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하였다. 〔용재집〕 몸이 …… 어리석었지 : 그대는 좌천되어 경치가 좋은 양양(襄陽)으로 부임하니 이제 좋은 산수를 구경하며 풍류를 즐기는 벼슬살이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되었는데, 나는 어리석게도 조정의 높은 벼슬에 눌러 있다 찬축(竄逐)되었다는 뜻이다. 〔월사집〕 몸이 봉황지(鳳凰池)에 이른 : 봉황지는 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에 금원(禁苑)에 파놓았던 연못으로, 이곳 가까이에 임금을 측근에서 보좌하여 중요한 기무(機務)를 관장하는 중서성(中書省)이 있었던 까닭에 중서성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송(宋) 나라 이방(李昉)이 단번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10년만에 재상의 지위에 오른 여몽정(呂蒙正)을 축하하여 “일거에 맨 먼저 용호방에 오르고, 십년만에 몸이 봉황지에 이르렀다.[一擧首登龍虎榜 十年身到鳳凰池]” 하였다. 〔월사집〕 몸채는 …… 상징하도다 : 옛날에는 하늘의 형상이 둥글다고 인식했고, 천(天) · 지(地) · 인(人) 셋을 삼재라 하였다. 몸채가 둥글고 발이 셋인 솥[鼎]의 형상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용재집〕 못 …… 끊어지고 : 못 가는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굴원이 쫓겨나서 강담(江潭)에서 노닐고 못 가에서 시를 읊조렸다.” 한 데서 온 말로, 귀양지를 뜻한다. 유배 생활하면서 매우 애를 끊는 슬픔에 젖었다는 뜻이다. 〔월사집〕 못 …… 치솟누나 : 《주역》 건괘(乾卦)에서 득세하지 못한 군자(君子)를 못에 잠긴 용, 즉 잠룡(箴龍)으로 표현했고,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겨우 몇 길 높이로 쑥대 사이를 나는 메추라기를 구만리 장천(長天)을 나는 대붕(大鵬)과 대비시켰다. 요컨대 이 구절은 위의 두 구절과 이어서, 군자는 뜻을 잃고 소인이 득세하는 시국을 개탄한 것인 듯하다. 〔용재집〕 못 …… 후회했지 :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를 용사한 것으로, 여기서는 역시 귀양살이하고 있는 정희량(鄭希良)의 모습을 형용하고 있다. 정희량이 전원으로 돌아간 도연명(陶淵明)을 흠모하여, 자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혼암(昏暗)한 연산조(燕山朝)에 홀로 직언하다가 귀양오게 된 것을 뉘우친다는 것이다. 〔용재집〕 못 가에서 …… 몸 : 찬축(竄逐)된 신세를 뜻한다.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굴원이 쫓겨나 강 가에 노닐어 못 가를 거닐면서 시를 ?조리매 안색이 초췌하고 형용에 생기가 없었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월사집〕 못 가에서 살게 된다면 : 유배 생활을 뜻한다. 14권 ‘못 가에서 …… 몸’ 참조. 〔월사집〕 못 돌아간다고 말했던고 : 예전에 머물던 절의 스님과 만날 때마다 벼슬을 그만 두고 산 속으로 돌아가 은거해야 하는데 아직 못 돌아가고 있다고 탄식했다는 뜻이다. 〔월사집〕 못난 …… 보았지요 : 경신년(1620)에 월사가 변무진주상사(辨誣陳奏上使)로 북경에 갔다가 신종(神宗)의 붕어와 광종(光宗)의 즉위를 모두 보게 되었다. 경신조천록(庚申朝天錄) 상(上) 서문 참조. 〔월사집〕 못의 …… 못하고 : 종영(鍾嶸)의 《시품(詩品)》 《사씨가록(謝氏家錄)》에 “강락(康樂)이 아우 혜연(惠連)을 대할 적마다 문득 아름다운 말을 얻었는데, 뒤에 영가서당(永嘉西堂)에 있을 적에 하루 종일 시를 생각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잠결에 홀연히 혜연을 보고 곧 ‘못에 봄풀이 생겨난다[池塘生春草]’라는 구절을 얻었다. 그러므로 일찍이 말하기를 ‘이 말은 신의 도움이 있은 것이지 내 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강락은 남조(南朝) 송(宋) 나라의 양하(陽夏) 사람 사영운(謝靈運)을 말한다. 강락공(康樂公)을 습봉(襲封)했으므로 사강락(謝康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명계가 사제 자립을 그리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몽 장군(蒙將軍) : 진(秦) 나라 때의 장군 몽염(蒙恬). 시황(始皇)이 죽은 뒤 조고(趙高)가 조서(詔書)를 위조하여 그에게 사사(賜死)하자 자살했는데, 여기의 말은 바로 그가 죽음에 임해서 한 말이다. /여한 175/ 몽견재유진(夢見才猶進) : 육조 시대 강문통(江文通)의 고사. 문통은 하룻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오색 붓을 주기에 받았는데 그 후부터 문장이 날로 새로워졌다 함. /삼봉1-156/ 몽괘(蒙卦) : 周易의 卦 이름인데, 위에는 산이 있고 아래는 샘물이 나는 山下出泉의 형상으로 되었음. 몽괴안(夢槐安) : 원문의 몽괴안(夢槐安)은 남가몽(南柯夢)과 같으며, 다음과 같은 고사에서 인용된 것이다. 당(唐) 나라 순우분(淳于?)이 낮에 홰나무 밑에서 자다가 꿈에 괴안국(槐安國)에 가서 괴안국왕의 딸에게 장가들고 남가군 태수(南柯郡太守)에 봉해지는 등 극도로 현영(顯榮)하였다. 그러다가 깨었더니, 홰나무 밑엔 개미집이 있고, 그 안에는 큼직한 한 마리의 개미만이 있더라는 것이다. 《異聞錄》 그러므로 개미의 별명을 괴안왕(槐安王)이라고도 한다. /연행8-184/ 몽금척(夢金尺) : 이조 때 궁중(宮中) 연회에 쓰던 무악의 명칭. /열하 1-458/ 몽기(蒙?) : 여귀(?鬼) 또는 신명(神明). 눈이 넷인 것은 방상(方相), 둘인것은 몽기다. /동국3-154/ 몽두(蒙頭) : 죄인을 잡아올 때 천일(天日)을 못 보도록 그 죄인의 얼굴을 싸서 가리는 물건. 쇠가마 같은 것으로 씌우다가 뒤에 와서는 죄인의 도포 자락을 잘라서 씌웠음. /해행9-274/ 몽득(夢得) : 몽득은 유우석(劉禹錫)의 자(字). 그는 시문에 능하였으며, 당순종(唐順宗) 때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郞)으로서 탁지 염철안(度支鹽鐵案)을 주관하면서 세도를 믿고 권세 있는 인사들을 함부로 대하다가 헌종(憲宗) 때에 벼슬을 빼앗기고 가련한 신세가 되어 비분한 뜻에서 죽지사(竹枝辭)와 문대균(問大鈞)·적구년(謫九年) 등의 부(賦)를 짓기까지 하였다. 《舊唐書 卷一百六十 劉禹錫傳》 /동국3-174/ 몽득양필(夢得良弼) : 殷나라 高宗의 꿈에 上帝가 어진보필 한 사람을 주었다. 꿈을 꾼 뒤에 그 사람을 기억하여 사방으로 찾아서 전설을 얻었다. /연려실기술9 10-261/ 몽령(夢齡) : 주 무왕(周武王)의 꿈을 상제(上帝)가 그에게 아홉 살을 더 연장해 주었다고 한 고사를 말함. /명종실록1/ 몽롱춘추(朦朧春秋) : 최두기는 멋모르고 변절한 오삼계가 상투를 보고 명(明)을 생각해서 울었다 하고, 또 전겸익이 청(淸)에 벼슬까지 한 것을 지사인 듯 칭찬하였음이 모두 《몽롱춘추》라는 것이다. /열하2-182/ 몽백(夢白) : 자신이 죽을 것을 안다는 뜻으로 분수에 맞게 처신한다는 뜻. 진(晉)의 사안(謝安)이 병이 깊어지자, 친우에게 ‘옛날 환온(桓溫)이 살았을 때 내가 항상 온전하지 못할까 염려했더니, 꿈에 문득 온의 수레를 타고 16리쯤 가다가 한 마리 흰닭을 보고 그쳤던 일이 기억난다. 온의 수레를 탄 것은 그 재위를 대신함이고, 16리는 금년이 16년째이고, 백계(白鷄)는 유(酉)를 맡았는데 금년 태세(太歲)가 유에 있으니, 내 병이 아마 낫지 않을 것이다.’하고, 곧 상소하여 위(位)에서 물러나더니, 얼마 안 되어 죽었다. 《晉書 謝安傳》 /양촌2-180/ 몽복(夢卜) : 제왕이 어진 정승을 얻음을 말함 은 고종(殷高宗)은 꿈을 꾸어 부열(傅說)을 얻고, 주 문왕(周文王)은 점을 쳐서 강태공(姜太公)을 얻었다는 데서 유래된 말. 《書經 周書 秦誓》 /중종실록 4/ 몽사(蒙四) : 《주역(周易)》 몽괘(蒙卦)의 육사(六四)를 말함. “ …… 象曰 困蒙之吝獨遠實也 …… ”라고 보인다. /성호8-274/ 몽사(??) : 해가 지는 곳이다.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황제의 만사에 “정호의 용은 점점 멀리 사라지고, 몽사에는 태양이 지금 막 잠겼어라.[鼎湖龍漸遠 ??日初沈]” 하였다. 《白樂天詩集 卷16 開成大行皇帝挽歌詞》 몽양(蒙養) : 어려서 바른 도리로 기르는 것을 말한다. 《주역》에 “어려서 바른 도리로 기르는 것이 성인을 이루는 공이다.[蒙以養正 聖功也]”라고 하는 말이 있다. 《周易》 《蒙卦》 彖傳. 몽염(蒙恬) : 진 시황(秦始皇) 때의 장수이자 붓[筆]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기도 함. 《설문(說文)》 통훈정성(通訓正聲)에 의하면, 쟁(爭)은, 옛날에는 다섯 줄을 대에 설시하여 축(筑)과 같이 만들었는데, 몽염이 열 두 줄로 고치고 모양을 비파처럼 만들었으며 대를 나무로 바꾸었다 함. /연행록선집2/ 몽익(夢翼) : 도간(陶侃)은 진(晋) 나라 때의 명장이다. 그는 젊었을 때에 꿈에 날개[翼] 여덟이 돋쳐 하늘로 날아 올라갔는데 아홉 문이 있었다. 여덟 문은 통과하고 아홉째 문에 이르니 문지기가 한 날개를 쳐서 분질렀다. 이것으로 뒤에 비방을 당하였음. /대동16-222/ 몽장(蒙莊) : 장주(莊周)를 가리킨다. 그는 원래 초(楚) 나라 몽현(蒙縣) 출신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몽수(夢?)라고도 칭한다. /고봉집1/ 몽장고리(蒙莊苦李) : 장자(莊子)와 노자(老子)를 일컫는 말. 장자는 몽현(蒙縣) 사람이며, 노자는 초(楚) 나라 고현(苦縣)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청장1-246/ 몽장화접(蒙莊化蝶) : 《莊子 齊物論》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나는 나비이었는데, 이윽고 깨어 보니 깜짝 놀라는 장주였다." [莊周 蒙爲蝴蝶 ??然蝴蝶也 …… 俄然覺 則 ??然周也]한 데서 나온 말이다. /청장1-96/ 몽주(蒙周)는 …… 이야기했지 : 몽주는 장자(莊子)를 지칭한다. 장자가 몽(蒙) 땅 칠원(漆園)이란 곳의 관리(官吏)로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을 보면, 장자가 꿈 속에 나비가 되어 날아다녔는데 자신이 나비인지 나비가 자신인지 몰랐다 하며, 《장자》 첫머리에 소요유(逍遙遊) 편을 두어 상대적 현실세계의 제약을 벗어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절대적 자유의 세계에 노니는 경지를 이야기하였다. 〔용재집〕 몽죽(夢竹) : 서성백(徐星伯)의 호로 이름은 송(松)이다. 서씨이기 때문에 서막을 빌려 말한 것이다. /완당집3/ 몽중필(夢中筆) : 양(梁) 나라 강엄(江淹)이 꿈속에 신인(神人)으로부터 오색 붓을 받고서 문필(文筆)이 크게 훌륭해졌다는 고사. 《南史 江淹傳》 여기서는 강견(江堅)이 강문통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임. /연행6-488/ 몽촌상공(夢村相公) : 몽촌은 김수(金?)의 호인 바, 우참찬(右參贊)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으므로 상공(相公)이라 칭한 것이다. 몽충(蒙衝) : 고대의 전함(戰艦). 배가 좁고 길고 견고하며 겉은 생우피(生牛皮)로 덮고 전후 좌우에 활쏘는 구멍이 있으며 속력이 빨라 적선에 돌입하는데 쓰였음. /연행11-185/ 몽치이저(蒙稚而著) : 《주역》 잡괘(雜卦)에, “몽괘는 잡되지만 광명하다.”[蒙雜而著]라고 되어, 잡되다는 잡(雜)자가 치(稚)자의 오류임을 논한 것. /성호7-21/ 몽필(夢筆)은 …… 걷어올리고 : 몽필은 뛰어난 글재주를 뜻하는 말로, 중국 남조(南朝) 때의 강엄(江淹)이 어릴 적에 자칭 곽박(郭璞)이란 사람이 채색 붓을 주는 꿈을 꾸고부터 문장이 크게 진보하였다 하고, 이백(李白)이 어릴 때 그가 사용하는 붓 끝에서 오색 ?이 피어나는 꿈을 꾼 뒤로 글재주가 뛰어나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한다. 지는 해를 걷어올린다는 것은,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노 양공(魯陽公)이 한(韓) 나라와 한창 전쟁을 하는데 해가 저물려 하자 창을 휘둘러 해를 걷어서 90리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한다. 이는 역량이 굉대(宏大)함을 비유한다. 〔용재집〕 묘(苗) : 여름에 하는 사냥 묘(廟) → 교(郊) 묘견(廟見) : 新婦가 시집와서 사당[廟]에 처음 뵙는 것. /연려실기술 9 10-241/ 묘계질서(妙契疾書) : 朱子가 지은 장횡거(張橫渠)의 贊에 《妙契疾書》라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장횡거가 밤에 자리에 누웠다가 의리에 대하여 새로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곧 일어나서 붓으로 빨리 썼다[疾書]는 말이다. 妙契는 미묘하게 알아냈다는 뜻이다. /퇴계집 1-201/ 묘군(卯君) : 원래는 묘년(卯年)에 태어난 사람을 말하는데, 아우를 지칭하는 말로 쓰임. 송 나라 때 소식(蘇軾)이 그의 아우 소철(蘇轍)의 생일을 축하는 시에 “동파가 이로써 묘군에게 축수하노니, 그대는 어려서부터 나와 함께 고전을 스승으로 삼았다네[東坡持是壽卯君 君少與我師皇墳]”라는 말에서 유래함. 동파(東坡)는 소식의 호. 묘금(卯金)의 …… 압도하도다 : 묘금은 유씨(劉氏)를 뜻하는 바 한(漢) 나라 종실(宗室)을 가리키고, 제로(齊魯)는 공자와 맹자가 탄생한 나라들로 문교(文敎)가 흥성한 곳이다. 유탁(劉鐸)이 명가(名家)의 후손으로 추로지향(鄒魯之鄕)할 자기 고을에서도 우뚝한 존재라는 것이다. 〔용재집〕 묘금(卯金)이 …… 사라지자 : 유씨(劉氏)의 왕조인 한(漢) 나라가 멸망했음을 뜻한다. 묘금은 묘금도(卯金刀)를 줄인 말로 ‘유(劉)’를 파자(破字)한 것이다. 〔용재집〕 묘당(廟堂) : 조선 시대 의정부(議政府)를 일컫는 말이다. 묘당(廟堂)의 …… 하네 : 묘당은 의정부(議政府)와 같은 정부의 최고기관을 이르며 지과(止戈)는 무자(武字)의 파자(破字)로 전쟁을 중지함을 이르는 바, 진정한 무는 무력을 행사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나 무력을 저지하는 것이라 한다. 묘대부(墓大夫) : 모든 묘지(墓地)를 주관하는 벼슬. /성호7-286/ 묘리는 …… 조리한다오 : 추산(推算)은 미루어 계산하는 것으로 북송(北宋)의 역학자(易學者)인 강절(康節) 소옹(邵雍)은 매화를 보고 점을 쳤으며, 또 매실(梅實)은 옛날 조미료로 사용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묘무 비연(妙舞飛燕)·석가세존(釋迦世尊) : 앞은 기녀들을, 뒤는 임금을 예찬한 말. 또한 비연은 전한 평제(前漢平帝)의 후(后) 조씨(趙氏)의 이름인데, 처음 가무를 배울 때 그 몸이 날렵하다 하여 그렇게 이름했음. /성호사설6/ 묘사(廟祠): 廟宇와 祠堂. 묘수좌(猫首座) : 실제로 사림(士林)을 중히 여기지 않으면서도 사림을 중히 여기는 체하고 기묘년에 파직된 사람들을 등용하자고 제창한 김 안로를 비난하는 뜻으로, 늙은 고양이가 쥐들을 속여 결국은 잡아먹고 만다는 얘기에 빗댄 내용인데, 이 고양이가 쥐들에게 수좌(首座)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묘수좌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中宗實錄 二十九年 七月 丁亥》 묘습(繆襲) : 186-245. 삼국(三國) 위(魏) 동해(東海) 난릉인(蘭陵人). 자(字)는 희백(熙伯). 어려서 학문에 재주가 있어 저술한 것이 많았다. 관직이 상서(尙書) · 광록훈(光祿勳)에 이름. 묘승(廟勝) : 옛날 무슨 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종묘(宗廟)에 필승(必勝)의 책을 고했다는 데서 유래된 말. 즉 묘산(廟算), 묘책(廟策)과 같은 말. 《한서(漢書)》 조충국전(趙充國傳)에 보임. /성호사설9/ 묘신(卯申) : 조석(朝夕)의 끼니를 말함. 묘연일속(?然一粟) : 지극히 작은 것을 뜻한 말임. 소식의 적벽부(赤壁賦)에 “其??於天地 ?蒼海之一粟”이라 하였음. /완당집3/ 묘웅(妙雄) : 부처를 묘각(妙覺), 또는 대웅(大雄)이라 하는 바 이 두 이름을 병칭한 것임. 묘유(苗劉) : 묘유(苗劉)는 남송(南宋) 첫째 황제인 고종(高宗) 때의 황제 친위대(親衛隊)의 대장으로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고종을 퇴위하게 하고 일곱 살 난 고종의 아들 부(敷)를 황제로 추대하였는데, 뒤에 실패하여서 처형당한 자로 두 사람의 성이다. 어린 황자 부(敷)도 처형당했는데, 그것은 황제의 의사가 아니요, 그 신하들의 소위였다. /대동10-208/ 묘은(畝銀) : 지무(地畝)에 과세하는 세은 /연행3-214/ 묘적교비(苗賊敎匪) : 묘적은 묘족(苗族)의 난적(亂賊)의 뜻. 중국 남방 지방에 살아온 묘족의 하나. 교비는 백련교(白蓮敎)의 난비(亂匪)인데 백련교는 원(元) 나라 때 한산동(韓山東) 부자(父子)가 창설한 비교(秘敎)로서 명·청대를 통하여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켰음. /연행7-165/ 묘정 배향(廟庭配享) : 죵묘에 각왕의 위차(位次)에 따른 대신의 배향(配享)이 있는데 그것은 생전에 그 왕과 특히 친근하고 공로가 있는 대신으로 한다. 그런데 묘정이라함은 왕의 위차 앞에 바로 모시지 못하고 그 아래 모시기 때문에 묘정이라 하고 배향이라 함은 같은 자리에 앉지 못하고 아래 자리에 앉는 것을 말한다. 묘제(墓祭) : 고대에는 없었고 진한(秦漢)시대부터 비롯되었음. 묘제(墓祭)는 …… 제사할지라도 : 《가례(家禮)》에 상세히 보인다. 묘주(卯酒) : 새벽에 마시는 술을 이름. 백거이(白居易)의 묘시주시(卯時酒詩)에 “末如卯時酒 神速功力倍”라 하였음. /완당집3/ 묘지(卯地) : 卯方. 묘방은 24方位의 하나. 즉 동쪽을 중심으로 한 15°의 각도 /연산5-141-23 묘현(廟見) : 여자가 시집가서 처음으로 시집의 사당에 들어가 배례(拜禮)하는 일. 묘휘(廟諱) → 당력(唐曆) 무 원형(武元衡) : 당(唐) 나라 말기의 어진 재상이었으며 헌종(憲宗) 때(서기 806~820)에는 평장사(平章事)로 병마(兵馬)의 권한을 맡기도 하였다. 이 때 창의절도사(彰義節度使) 오소성(吳少誠)의 손자 원제(元諸)가 군사를 놓아 노략질을 하며 반란을 일으키므로 정부에서 대병을 출동하여 토벌하는데, 평로(平虜)절도사 이사도(李師道)가 원제를 사하여 주기를 청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으니, 그만 자객을 보내어, 무 원형을 살해하는 폭거로 나왔다. 《十八史略 第 5 卷》 /중종실록1/ 무(武) : 주 무왕(周武王)이 지은 악(樂).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 “子謂武盡美矣 未盡善也”라 하고, 그 주에, ‘武 武王樂也 以征伐取天下 故未盡善’이라 하였음. /성호8-112/ 무(茂) → 호관삼로(壺關三老) /성호9-141/ 무(?)에는 금(禁)이 있고 : 무(?)는 질그릇으로 된 술그릇이며 금(禁)은 술그릇의 받침대이다. 무강(武姜) : 정 장공(鄭莊公)의 어머니인 무강이 작은 아들의 반역을 도았으므로 장공(莊公)이 다른 곳에다가 따로 거치(居置)시켜 놓고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나 영고 숙(潁考叔)의 말에 감동되어 다시 모자 간에 화합(和合)하였다. 무개일(務開日) : 소송(訴訟)에 관한 사무를 보는 날로 추분일(秋分日)을 말함. 주로 농한기인 추분에서 춘분(春分)까지 소송을 정리하였기 때문에 하는 말. /중종실록46/ 무거(武擧) : 문거(文擧)에 대한 말로 무관(武官)을 뽑기 우한 과거(科擧)를 말함. /중종실록41/ 무검격집(撫劍擊楫) : 동진(東晋)의 조적(趙?)이 중원(中原)을 수복하려고 양자강을 건너면서 중류에서 삿대를 치며 맹세하였다. /해행5-457/ 무겸 선전관(武兼宣傳官) : 무신(武臣)으로서 선전관을 겸임하는 것. /경세1-208/ 무겸(武兼) : 조선조의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을 말함. 무겸청(武兼廳) : 조서조의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의 청사를 말한다. 무경 칠서(武經七書) : 병법에 관한 7가지 책. 곧 《육도(六韜)》·《손자(孫子)》·《오자(吳子)》·《사마법(司馬法)》·《황석공 삼략(黃石公三略)》·《위료자(尉?子)》·《이위공 문대(李衛公問對)》의 총칭. /중종실록8/ 무경(武庚) : 은 나라 마지막 임금 주(紂)의 아들. 이름 녹보(祿父). 주 나라 무왕이 혁명한 후 은 나라 옛 도읍에 봉해서 대를 잇도록 했는데 후에 관숙(管叔)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주공에게 죽임을 당했음. 《史記 殷本紀》. 무고(巫蠱) : 한 무제(漢武帝)가 방사(方士)들을 독신(篤信)하자 궁중에 무사(巫事)가 성행했다. 무제가 병이 들었을 때 강충(江充)이 무고(巫蠱) 때문이라고 하자 그를 시켜 궁중을 수색케 했더니, 태자궁(太子宮)에서 나무로 만든 사람[木人]이 많이 나왔다. 이에 겁을 먹은 태자는 강충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자살했다. 《通鑑節要 漢紀 武帝》 /중종7-82/ 무고(武庫)의 …… 가졌고 : 1권 ‘장막 …… 나누고’ 참조. 〔월사집〕 무고옥(巫蠱獄)과 무씨(武氏)의 화 : 무고옥은 한 무제(漢武帝) 때 있은 옥사. 당시 방사(方士)·무당의 무리가 궁인(宮人)을 고혹시켜 목인(木人)을 궁중에 묻어 제사하였는데, 우연히 무제가 병이 들자 간신 강충(江充)은 여태자(戾太子)와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므로 황제의 병을 무고에서 별미가 되었다 하고 궁중의 목인을 파내어 태자 궁중에서 목인을 가장 많이 얻었다고 상인하였다. 이에 여태자는 군사를 일으켜 강충을 목베고 반역으로 몰려 자살하였다. 뒤에 전천추(田千秋)에 의해 태자가 신원되었다. 무씨(武氏)의 화는 당(唐) 나라 칙천무후(則天武后)의 친정 조카 무 삼사(武三思) 등이 무후의 세력을 믿고 전천(專擅)하여 정사를 어지럽히고 조신을 많이 죽인 일이다. 《唐書 卷二百六 外賊列傳》 /선조수정실3/ 무고작산(無故作散) : 사고 없이 현직을 해임당하고 산관(散官)에 임명된 자. 산관이란, 일정한 관직이 없고 품계만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산직(散職) 또는 산계(散階)라고도 한다. /중종4-49/ 무곡(舞曲) : 위의 <소륵악(疏勒樂)>의 한 종류로, 춤을 출 때 사용하던 반주악곡이다. 또한 “원복(元服)”이라 불린다. 무공(武公) : 춘추시대 위(衛)나라 임금으로 강숙(康叔)의 8세손. 이름은 화(和). 《국어(國語)》 《초어(楚語)》에 무공(武公)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무공이 9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나라에 경계하기를 “경(卿) 이하로 사(士)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있는 이는 모두 나를 늙었다고 하여 버리지 맑고 반드시 나에게 경계하여 나를 훈도(訓導)하도록 하라.”고 말하고 이에 억계(懿戒)를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고 함. 주에 따르면 의(懿)는 억(抑)으로 읽는데 억계(抑戒)는 《시경》 《대아》의 <억편(抑篇)>이라고 함. 무공(武公)의 나이 : 무공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화(和)인데, 55년간 재위하고 95세에 별세하였다. 그는 선정을 베풀었으며, 95세가 되어서도 벼슬아치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경계하라.” 하였는바, 《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과 《<소아(小雅) 빈지초연(賓之初筵)>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라 한다. 무공대부(武公大父) : 무산신관의 제26계. 구관(舊官)으로는 황성사(皇城使)였다. 《宋史 卷一六六》 /도경/ 무군(撫軍) : 나라에 전쟁(戰爭)이 있을 때에 임금이 밖으로 나가고 세자가 안에서 지키는 것을 감국(監國)이라 하고 세자가 전쟁에 나가는 것을 무군(撫軍)이라 한다. /연려실기술17-4-244/ 무극(無極)1 : 극이 없다는 뜻이며, 태극의 별칭.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무극이면서 태극 …… 무극의 진(眞)과 이오(二五 : 음양과 오행)의 정(精)이 묘하게 합하여 엉겨서 …… [無極而太極……無極出眞 二五出精 妙合而凝 …… ]라 하였다. /삼봉1-306/ 무극(無極)2 : 초(楚) 나라 간신 비 무극(費無極)이 태자 소부(太子少傅)로 평왕(平王)에게 태자를 참소하여 부자(父子)를 이간하니, 태부(太傅) 오사(伍奢)가 이를 구원하려다가 피살되고, 그 아들 오자서(伍子胥)가 화를 피하여 오(吳) 나라로 도망, 그는 오(吳)를 도와 초(楚)를 쳐 영(?)에 들어가 평왕(平王)의 시체를 파내어 매[笞] 3백을 쳐 아비의 복수를 하였음. 《史記》 /중종2-51/ 무극(無極)3 : 충청북도 음성군(陰城郡) 금왕읍(金旺邑) 무극리(無極里)에 있던 역(驛). 〔용재집〕 무극(無極)을 …… 하였으니 : 염계(濂溪) 주돈이(周敦?)가 지은 태극도설(太極圖說)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말한 것으로 이는 ‘무극이면서 태극’이란 뜻이다. 무극옹(無極翁) : 송 나라의 학자인 주돈이(周敦?)를 말함. 자는 무숙(茂叔), 호는 렴계(濂溪). 송대(宋代)의 이학(理學)을 열었음.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어 무극(無極) 태극(太極)을 말하였으므로 무극옹이라고 일컬음. 무내태조계(無乃太早計) : 《장자(莊子)》 《제물편》에 “달걀을 보고 밤 시각을 알고자 하고 활을 보고 올빼미 구이를 먹고자 하니, 무내태조계(無乃太早計)가 아닌가.”라 함. 너무 멀리 생각하여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아니함을 심하게 한 말임. 동보가 선생에게 큰 임무를 담당하라고 권하였기 때문에 하는 말임. 무녀성(?女星) :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로 여성의 운수를 관장하는 별이라 한다. 〔월사집〕 무단 향곡(武斷鄕曲) : 시골에서 세가(勢家)가 백성을 권세로 억압함. /명종실록 5/ 무단미(無端米) : 고려 공민왕 때, 국가 용도(用度)가 부족하자 정한 세액(稅額) 외의 쌀과 콩을 백성들로부터 가세(家勢)에 따라 차등을 두어 더 거두던 일. ○ 恭愍三十一年九月 以調度不給 增斂於民 大戶米豆各一石 中戶米豆各十斗 小戶米豆 各五斗 各之曰無端米 民甚苦之(無端方言無妨) 《高麗史 志三十三 食貨二》 무단히 …… 누렇군 : 호수가 있는 시골에서 잠시 동안 벌이는 술자리에 밭둑의 콩을 삶고 게를 잡아 삶아서 안주로 삼는다는 것이다. 〔월사집〕 무단히 …… 보노니 : 남가일몽(南柯一夢)의 고사를 차용한 것으로, 순우분(淳于?)이란 사람이 느티나무 남쪽 가지 아래서 잠을 자다가 꿈속에 괴안국(槐安國)에 이르러 온갖 부귀를 누리고 깨서 보니 자기가 노닐던 곳이 바로 뜰 앞 큰 느티나무 아래였고 그 곳에 개미굴이 있어 개미들이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한다. 〔용재집〕 무단히 …… 아쉬워하노라 : 계절이 덧없이 흘러 방초가 우거진 여름이 가고 나뭇잎이 지는 가을 온 것을 안타까워하는 뜻에서 말한 듯하다. 〔용재집〕 무당리(武當里) : 중국 양양부(襄陽府)에 있는 산이름인데 풍경이 아름다움. 또 무당현(武當縣)이 있음. /완당집3/ 무대우인홍수(誣大禹湮洪水) : 우(禹)는 하(夏)의 개국(開國) 임금인데, 요 임금 때 사공(司空)으로 수토(水土)를 평정하고 9주(州)를 개척하여 그 지방의 토의(土宜)를 보아서 공물을 정하였다. 《史記 卷二 夏本紀》 홍수를 막히게 했다는 것은 그와 반대로 무함한다는 뜻이다. /면암3-23/ 무덕(武德) : 한(漢) 고조(高祖) 4년에 만든 아무(雅舞). 무덕악(武德樂): 雅樂曲. 漢 高祖 4년에 武로써 亂을 평정한 사실을 찬미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調는 日月調·中曲(근대의 소곡)·新樂(고악)으로 구성되었으며, 박자는 序(16박자)·破(12박자)·急(12박자)의 3부로 구별되었다. 그러나 박자 중 序와 破는 전해지지 않아 현재 急만이 남아 있다. 무덤에 해묵은 풀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붕우의 무덤에 해묵은 풀이 있으면 곡(哭)하지 않는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세상을 떠난 지 한 해가 지났음을 뜻한다. 〔월사집〕 무도(舞蹈) : 조정(朝廷)의 배하(拜賀) 때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의절(儀節). /동사4-191/ 무량수전(無量壽殿) :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abha)을 봉안한 불전. /고려도경/ 무려(武呂) : 당 나라 무후(武后 : 則天武后)와 한 나라 여후(呂后)를 말함. 무후는 처음에 당(唐) 태종(太宗)의 재인(才人)이었는데 태종이 죽은 후 중이 되었다가 고종이 서자 다시 궁으로 들어와 황후가 되었음. 고종이 죽고 중종(中宗)이 서자 무후가 정사를 천단하여 중종을 폐위하고 예종(睿宗)을 세웠다가 또 폐위하고 스스로 칭제(稱帝)하고 나라 이름을 주(周)라고 하여 음학(淫虐)을 자행하였음. 여후는 한(漢) 고조(高祖)의 황후인데 이름이 치(雉)이고 혜제(惠帝)를 낳았음. 혜제가 죽자 소제(少帝)를 세우고는 조정에 임하여 칭제하고 소제를 죽이고는 항산왕(恒山王) 의(義)를 세워 황제를 삼고 친정의 여러 여씨들을 왕으로 봉하였음. 무록(無祿)의 슬픔 : 불행을 당한 슬픔을 말한다. 《시경》에 民今之無祿 사람이 지금 불행을 당한 것은 天夭是? 하늘이 재앙을 내려 해쳤기 때문일세 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詩經》 <小雅> 正月篇. 무릉(武陵) : 무릉도원(武陵桃源).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일컬어진 바가 있는데, 이 세상 밖의 별천지를 말한다. 무릉(茂陵) : 지명.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시문에 재능이 있었는데 소갈병(消渴病)을 앓아 벼슬을 그만두고 이 곳에 물러나 지내면서 여생을 마쳤음. 무릉(茂陵)의 봉선초(封禪草) : 탁월한 문장을 뜻한다.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죽기 전에 봉선서(封禪書)라는 글을 남기고 아내에게 “사자(使者)가 와서 글을 찾거든 바치라.” 하였다. 〔월사집〕 무릉군(武陵郡) : 신선세계와 같이 아름다운 곳이란 뜻이다.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무릉군의 어부가 고기를 잡다가 산간 시내에서 떠오는 복사꽃을 보고 그 근원을 찾아가다가 도화림(桃花林)을 만났다. 그곳에는 진(秦)나라의 학정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마치 신선처럼 살고 있었는데, 나온 뒤 다시 그곳을 가 보려고 하였으나 길을 잃어 가지 못했다. 《陶淵明集 卷6 桃花源記》 무릉도원(武陵桃源) → ① 도원(桃源) /해행5-459/ ② 진(晋) 나라 때에 한 어부(漁父)가 배를 타고 길을 잃어 무릉(武陵)의 시내의 근원으로 들어갔더니 도화(桃花)가 가득하고 세상과 격리된 촌락이 있었다. 그것을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하였다. /해행5-549/ 무릉어부(武陵漁父) : 진(晋)나라 때에 무릉(武陵)의 한 어부(漁父)가 배를 타고 물을 올라가 산속으로 들어갔더니, 수원(水源)이 막다른 곳이 한 구멍이 있었다. 그리고 들어간 즉 안에는 들이 있고 촌락이 있는데 수백 년간 세상과는 통하지 않고 복숭아 나무를 많이 심었었다. /동국5-287/ 무릎 …… 읊으매 : 제갈량(諸葛亮)의 포슬음(抱膝吟)을 차용하였다. 2권 ‘자탄(自嘆)’ 주(註) 참조. 〔용재집〕 무릎 …… 통하지 :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서로의 마음을 모르는 경우도 있고, 시대가 다른 옛날 사람일지라도 나와 뜻이 통하기도 한다는 것으로, 유상곡수하던 이들의 주흥과 자기의 주흥이 서로 통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용재집〕 무릎을 …… 노래한다 :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불렀다는 포슬음(抱膝吟)을 뜻하는 바, 이 노래는 고인(高人)과 지사(志士)가 심회를 담고 있다. 〔용재집〕 무릎을 …… 읊조리고 : 포슬음(抱膝吟).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출사(出仕)하긴 전 남양(南陽)에서 몸소 농사를 지을 때 양보음(梁甫吟)이란 노래를 지어 매일 새벽과 저녁이면 무릎을 감싸 안은 채 길게 불렀던 데서 유래한 말로, 고인(高人)과 지사(志士)가 시를 읊어 심회를 푸는 것을 뜻한다. 무릎을 용납함 :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무릎을 용납할 정도의 작은 집이지만 수월하고 편안함을 알겠네[審容膝之易安]”이라는 구절이 있다. 무릎을 자주 껴안노라 : 제갈량(諸葛亮)의 포슬음(抱膝吟)을 차용한 것으로, 무릎을 껴안고 시를 읊어 심회(心懷)를 푸는 것이다. 2권 ‘자탄(自嘆)’ 주(註) 참조. 〔용재집〕 무망(无妄) : 병이 드는 것을 말함. 무망(无妄)의 재앙 : 《주역》 무망괘(无妄卦)의 육삼 효사(六三爻辭)에 보이는 내용으로 온전함을 구하다가 뜻밖에 당하는 재앙을 이른다. 무망(无妄)의 화 : 무망은 망녕됨이 없다는 뜻으로 원래《주역》의 괘 이름인데, 무망의 화란 잘못한 것이 없이 억울하게 당하는 화를 이른다. 무망재거(毋忘在?) : 곤란했던 시절을 잊지 말라는 뜻. 제 환공(齊桓公)이 공자(公子) 시절 왕위 계승전에서 공자규(公子糾)를 편들던 관중(管仲)에게 거(?)에게 허리띠에 화살을 맞았다. 왕위에 오른 뒤 관중을 재상으로 중용하자 관중이 어느 술자리에서 어려웠던 옛일을 잊지 말라고 깨우쳐 준 고사. 《管子 卷十一 小稱 三十二》 /선조실록15/ 무맹(武孟) : 앞의 주 ‘무휴(無虧)’ 참조. 무면지불탁(無麵之不托) : 불탁은 국수, 즉 밀가루 없는 국수를 말하니, 불가능한 일을 말함. 곧 쌀이 없으니 흉년을 구휼할 수 없음을 말함. 무목(武穆) : 송(宋)나라의 충신 악비(岳飛)의 시호. 자는 붕거(鵬擧). 금(金)나라의 침공을 받았을 때 악비가 주선진(朱仙鎭)에서 금병(金兵)을 크게 격파하고 곧바로 하수(河水)를 건너 올라가고자 하였으나, 당시에 진회(秦檜)가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십이금자패(十二金字牌)를 내려 악비를 소환하고는 옥에 가두어 죽였음. 《송사(宋史)》 365 무목왕(武穆王) : 무목은 송 나라 악비(岳飛)의 시호이며, 악왕(鄂王)에 추봉(追封)되었기 때문에 일컫는 말이다. /성호6-258/ 무묘(武廟) → 관왕묘(關王廟) 무무(武舞) → 문무(文舞) /동사4-232/ 무무(武舞): 雅舞의 한 가지. 文舞와 상대됨. 주대에 시작되었다. 춤출 때 손으로 도끼와 방패를 들고 통치자의 武功을 칭송하며 郊廟祭祀와 朝賀, 宴享 등 大典에서 쓴다. 무무(貿貿)하여 …… 없습니다 : 무무는 사람이 무식하여 혼우(昏愚)함을 이르며 금록(禽鹿)은 금수(禽獸)와 같은 말이다.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傳)에 ‘금록시육(禽鹿視肉)’이라고 보이는데, 색은(索隱)의 주에 “금록은 금수와 같은 말로 이는 금수가 단지 고기를 보고 먹을 줄만 알뿐 딴 지식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무변(武弁) : 중국 고대의 주(周) 나라 때 무관이 쓰던 관(冠)의 하나인데, 일반적으로 무관(武官)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무변(拇騈) : 엄지손가락 옆에 더 생긴 손가락으로 무용지물을 비유하는 말. 《莊子 騈拇》 무병자구(無病自灸) : 긁어 부스럼이라는 뜻. 병이 없는데 공연히 뜸을 떠서 자기 몸에 흉터를 남기는 것을 비판한 말. 《莊子 盜?》 /선조실록4/ 무복(無服) : 상제에서, 오복(五服)의 범위를 벗어나 상복을 입지 않는 친척관계. 무복(誣服) : 죄를 따짐에 있어 사실이 아닌 범행을 자백하는 것. /연2-91-12/ 무부(武夫) : 당(唐) 나라 헌종(憲宗) 때의 무장(武將) 이우(李祐)를 이름. 그가 ‘칙명을 어기고 마필(馬匹)을 진상하였다.’는 이유로 시어사(侍御史) 온조(溫造)의 탄핵을 받았을 때, ‘내가 밤에 채주(蔡州)에 들어가 오원제(吳元濟)를 잡을 때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온 어사(溫御史)에게 맘이 멀어졌다.’ 하였다 한다. 《舊唐書 溫造傳》 /중종3-127/ 무부(武夫) : 옥 비슷한 아름다운 돌의 한 가지. 무불재시(無不在是) : 시(是)는 오종(吾宗). 무사지송(無思之頌) : 《시경》 노송 경편(魯頌?篇)을 이름. 이 송시는 노 희공(魯僖公)의 말[馬]이 성한 것을 읊은 시로, 맨 끝 구에 ‘사무사 사마사조(思無邪思馬斯?)란 글귀가 있다. /삼봉1-243/ 무산(巫山) :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에 “옛날 초 양왕(楚襄王)이 일찍이 고당에 노닐 때 지쳐서 낮잠을 자는데 꿈속에 한 부인이 말하기를 ‘첩은 무산의 여자로 고당의 나그네가 되었는데, 임금께서 고당에 노닌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바라건대 침석을 받들어 모시고자 합니다.’ 하니, 왕은 그를 사랑했다.” 하였다. /청장1-280/ 무산(巫山) : 중국 촉(蜀) 땅에 있는 이름난 산이다. 여기서는 성천(成川)을 촉 땅의 성도(成都)에 비겨 인용하였다. 〔월사집〕 무산(巫山)의 선녀(仙女) : 무산은 산 이름으로 사천성(四川省)과 호북성(湖北省) 경계에 있는 바, 12개의 봉우리가 있어 유명하다. 전설에 적제(赤帝)의 딸인 요희(姚姬)가 시집가기 전에 일찍 죽어 무산의 남쪽에 장례하였는데, 그녀의 넋이 신이 되었다 하는 바, 무산의 선녀는 곧 그 신을 가리킨 것이다.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 서문에 “옛날 초(楚)나라 회왕(懷王)이 일찍이 고당(高唐)에 놀러갔었는데 피로하여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 무산의 신녀(神女)를 만나 함께 사랑을 나누었다.” 하였다. 무산일단운체(巫山一段雲體) : 무산일단운(巫山一段雲)은 사패(詞牌 : 曲調)의 이름이다. 무삼사(武三思) : 당 중종(唐中宗)은 반정 후 오왕을 그리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측전무후가 자기를 태자로 삼았으므로 어차피 차지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중종의 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가 무 삼사(武三思)의 아들 숭훈(崇訓)에게 출가했는데, 그 연유로 무 삼사가 궁중에 출입하게 되어, 중종의 비인 위후(韋后)와 불륜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짧은 기간 내에 장 간지(張柬之) 등의 수중에 있는 정치 실권을 빼앗고, 그 후에는 이들 모두를 죽였다. 《資治通鑑 唐紀》 /삼봉1-217/ 무설(舞雪)과 …… 싶고 : 무설은 기생의 이름으로 보이며 패인(佩印)은 차고 있는 인부(印符)로 곧 벼슬을 버리고 기생을 따라 놀고 싶음을 말한 것이다. 무성(武城) : 춘추 시대 노(魯) 나라의 하읍(下邑).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수령이 되어 예악(禮樂)으로써 정사를 펴자 백성들이 이에 교화되어 현가(絃歌)를 일삼게 되었음. 자유(子游)가 일찍이 무성(武城)의 읍재(邑宰)가 되어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리자, 공자가 이것을 보고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割鷄 焉用牛刀]” 하고 농담을 하였는데, 이 일을 들어 말한 것이다. 《論語》 <陽貨>. 무성(武城)의 현가(絃歌) : 무성은 춘추 시대 노(魯) 나라의 현읍(縣邑)으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비현(費縣)에 있었으며 현가는 거문고·비파 등을 연주하며 시가(詩歌)를 읊는 것. 자유(子遊)가 무성의 읍재(邑宰)가 되어 백성들에게 예악(禮樂)을 가르쳤으므로, 곳곳마다 현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다. 이는 골골마다 독서하는 소리가 들려 유교가 크게 진작되리라는 말이다. 《論語 雍也》 /고봉집1/ 무성한 …… 나오니 : 선리(仙李)는 조선을 개국(開國)한 이씨(李氏)를 가리키며 진방(震方)은 동방으로 《주역(周易) 설괘전(說卦傳)》에 “황제가 진방에서 나온다〔帝出于震〕” 하였는 바, 동방은 곧 우리나라를 가리키므로 이씨왕조에 성군(聖君)이 나왔음을 말한 것이다. 무성히 …… 위해서요 : 《시경》 소남(召南) 감당(甘棠)에 “무성한 저 감당나무를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쉬시던 곳이다.[蔽?甘棠 勿剪勿伐 召伯所憩]” 하여, 남국(南國)의 백성들이 소공(召公)의 선정(善政)을 잊지 않는 뜻을 말하였다. 여기서 소백은 중국 사신을 뜻하는 듯하다. 〔용재집〕 무소 …… 쏘다녔네 : 공자가 천하를 주유한 일을 말한 것이다. 공자가 위(衛)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가던 중 들녘에서 식량이 떨어지고 시종하는 자가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하는 곤란을 겪었다. 이때 공자가 자로(子路)에게 “《시경(詩經)》에 ‘무소도 아니며 호랑이도 아니거늘 저 광야를 쏘다니느냐’ 하였는데, 우리 도(道)가 그른 것인가, 우리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詩云 匪?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 吾何爲於此]”라고 물었다.《史記 孔子世家》 무소(懋昭) : 덕을 힘써서 밝힌다는 뜻이다. 《서경(書經)》 중훼지고(仲?之誥)에서 좌상(左相) 중훼(仲?)가 탕왕(湯王)에게 말하기를 “왕께서는 큰 덕을 힘써 밝혀 백성들에게 중도(中道)를 세우소서.[王懋昭大德 建中于民]” 하였다. 〔월사집〕 무소단장(無所短長) : 재능이 없음을 무장처(無長處)라 하니 또한 단처(短處)도 없음. 무송(撫松) : 陶淵明이 彭澤令이 된 지 80만에 歲暮가 되었는데 郡에서 督郵를 보내어 띠를 묶고 와서 보라고 하자 五斗米를 위하여 구차히 향리의 소아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고 그날로 인끈을 풀고는 歸去來辭를 읊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歸去來辭의 내용 가운데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한가로이 노닌다[撫孤松而盤桓]》는 말이 있음. 무송(霧?) : 차가운 밤, 나무 가지에 물이 구슬같이 맺었다가 햇빛이 나면 곧 사라지는 것. /성호1-316/ 무수지정(無獸之庭) : 당뇨 (唐堯)가 천하를 잘 다스리매 그의 뜰 아래 온갖 짐승과 봉(鳳)이 와서 춤추고, 토기(土器)·석기(石器)의 온갖 음악이 아뢰어졌다 한다. 무숙(茂叔) : 송 나라의 학자인 주돈이(周敦?)의 자, 호는 염계(濂溪). 송대의 이학(理學)을 열었음. 본문에서 《정원의 풀이 서로 푸른 것에서 생의(生意)를 완미한다》고 한 것은, 주렴계가 창 앞에 풀을 제거하지 않은 것을 두고 혹자가 이유를 묻자 《나의 의사와 일반이다.》라고 답한 일을 두고 한 말임. 《宋元學案》 一二. 무숙(茂叔)의 가슴 : 무숙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의 자(字)인바, 주돈이는 마음속이 깨끗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고 칭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무숙야(武宿夜) :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할 때 은(殷)의 교외(郊外)에서 밤을 지새고(宿夜) 사졸(士卒)들이 모두 가무(歌舞)하며 아침을 기다렸는데, 이 고사(故事)를 무악(舞樂)으로 만든 것. 무순관(撫順關) : 봉천부(奉天府) 무순현(撫順縣)에 있는 관문. 한만(漢漫) 간에 교역이 행해지던 곳. /성호8-182/ 무술년 : 중종 33년(1538). 이해 11월에 성주 사고가 전소(全燒)되었음. /중종실록52/ 무술년 …… 입었지 : 무술조천록(戊戌朝天錄)을 간행하는 데 황여일(黃汝一)이 많이 힘을 썼다는 뜻이다. 〔월사집〕 무습(繆襲): 삼국 위인. 字는 熙伯. 尙書光祿勳을 역임. 무시(霧市) : 후한(後漢) 때 사람 장해(張楷)가 도술(道術)을 잘하여 오리무(五里霧)를 만들어 홍농산(弘農山) 속에 은거(隱居)했는데, 그를 따르는 학자(學者)들이 시(市)를 이루었다. 그래서 일컬은 말. /해행9-25/ 무신 여름에 상산(象山)이 태극변을 선생에게 써 보냄. 무신난(戊申亂) : 1728년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 등이 공모, 영조 즉위 후 실세한 소론의 호응을 얻어 밀풍군(密?君) 탄(坦)을 추대하여 왕통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이른바 무신난(戊申亂)임. 무심(無心)하여 …… 맡겨두노라 : 세상의 얻고 잃음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에 진출하거나 은퇴하는 것을 도에 따라 맡겨둔다는 것이다. 〔용재집〕 무씨 조(武氏조) : 당의 측천무후(則天武后). 고종(高宗)의 후(后)로, 고종의 사후에 그의 아들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고쳤다. 《唐書》 /동사2-245/ 무악(毋岳) : 현제 서울의 무악재를 가리킨다. 〔용재집〕 무안(武安) : 관우(關羽)를 받드는 사당 이름. 본문에서는 관우를 말함. 무안묘(武安廟) : 경상 북도 안동(安東)에 있음. 관우(關羽)를 받드는 사당. 무안왕묘(武安王廟) : 전국 시대 진(秦) 나라 장수 백기(白起)의 사당인 듯함. 그가 무안군(武安君)의 봉작(封爵)을 받았음. /연행1-250/ 무양(巫陽) : 옛날 전설상의 여무(女巫)로서 죽은 사람의 신을 부르는 역할을 함. 《楚辭 招魂》 무역(無射)·협종(夾鍾)·대무(大武) : 무역은 육률에 속한 양성의 하나. 협종은 육려에 속한 음성의 하나. 대무는 주 무왕(周武王)의 악. /성호7-191/ 무연(舞筵) : 춤을 출 때 쓰기 위하여 까는 자리. 무염(無鹽) : 무염(無鹽)은 중국 산동성 동평현(山東省東平縣)에 있는 지명.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 곳에 종리춘(鍾離春)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얼굴이 극히 추하기 때문에 40세가 되로록 시집을 못갔다. 그러나 큰 도량이 있어, 자청하여 제(齊) 나라 선왕(宣王)을 만나보고 정치하는 도리를 진언하니 선왕이 크게 기뻐하여 왕후를 삼았으며, 그 후로 제 나라는 크게 편안해졌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1/ 무염(無鹽)을 …… 꼴 :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에 “종리춘(鍾離春)이란 이는 제(齊) 땅 무염(無鹽)의 딸로 선왕(宣王)의 정후(正后)인데 지극히 못생겼다.” 하였다. 무염은 매우 못생긴 여인을, 서시(西施)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을 뜻한다. 이 구절은 《진서(晋書)》 주의전(周?傳)에 보이는 바 쌍방에게 현격한 수준의 차이가 있을 경우에 쓰인다. 여기서는 물론 월사 자신이 지은 시를 백사의 시에 비겨 말하였다. 〔월사집〕 무영귀(舞雩詠歸) : 공자가 여러 제자에게 뜻을 물으니 증점(曾點)이 최후에 일어나서 말하기를, “저는 모춘(暮春)에 춘복(春福)을 새로 입고 관자(冠者) 5~6인과 동자(童子) 6~7인을 데리고 무(舞雩)에 바람쏘이고 돌아오겠습니다.”하였다. /해행5-615/ 무예 도시(武藝都試) : 병조와 훈련원의 당상관 또는 지방의 관찰사나 병마절도사가 무사(武士)를 선발하는 시험. 매년 봄 가을에 실시함. /중종실록14/ 무예 취재(武藝取才) : 무예청(武藝廳)의 취재. 무예청은 무예 별감(武藝別監)이라고도 하며, 훈련 도감(訓練都監) 군사 중에서 뽑혀 숙위(宿衛)하는 무사(武士). 취재는 무과(武科)에 버금하는 인재 등용 시험. 무예 취재는 활쏘기와 병서(兵書)의 강(講)을 시험하여 뽑는다. 《大典 兵典 試取》 /중종4-5/ 무예청(武藝廳) : 무예별감(武藝別監)의 이명(異名). 훈련도감(訓練都監) 군사 중에서 선발되어 궁궐 문 옆에서 숙직하며 호위하는 무사. /만기2/ 무오년·갑자년 : 무오년은 연산군 4년(1498),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유자광(柳子光)을 위시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해. 갑자년은 연산군 10년(1504),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復位) 문제로 대비(大妃)·후궁(後宮) 및 많은 전직 또는 현직 관원들이 살해되고 귀양가고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중종실록 52/ 무오년의 살육 (殺戮) : 연산군 4년(1498) 훈구파(勳舊派)가 학자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충동질하여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士林派)를 대거 처단한 일. /선조수정실록3/ 무오사화(戊午士禍) : 연산군 4년(1498) 김종직(金宗直)이 기초한 사초(史草)에서 발단,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이 “이는 세조(世祖)를 비방한 글이다.” 하여, 이를 사초에 올렸던 김일손(金馹孫) 등 김종직의 제자들이 화를 당하고, 김종직은 부관 참시(剖官斬屍)를 당한 사건. 사초(史草)로 발단되었다 하여 사화(史禍)라 함. /중종2-39/ 무왕(武王)이 은(殷) 나라를 이기고 관숙 선(管叔鮮)과 채숙 도(蔡叔度)에게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의 나라를 감독하게 하였다. 무왕이 죽은 뒤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의 정사를 도왔는데 이들이 무경의 나라로써 반란을 일으키고, 또 주공이 장차 왕실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나라에 퍼뜨렸다. 까닭에 주공이 동쪽으로 2년 동안 피했다가 그것이 무고(誣告)임이 밝혀지자 돌아와 관숙과 무경을 잡아 벌하였음. 이들은 주공의 두 형이었음. 무왕지구인(武王之九人) : 주공 단(周公旦)·소공 석(召公奭)·태공 망(太公望)·필공(畢公)·영공(榮公)·태전(太顚)·굉요(?夭)·산의생(散宜生)·남궁괄(南宮括)·문모(文母)였으나, 문모는 무왕(武王)의 어머니이므로 빼고 9인이 됨. /삼봉1-441/ 무외(無畏) : 무외시(無畏施)를 말하는데 삼시(三施)의 하나임. 무서움이 없는 것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으로 부처가 대중 가운데서 설법할 적에 태연하여 두려워함이 없는 덕을 말함. /완당집3/ 무우(舞雩) : 고대에 기우제를 지내던 터.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기 자신의 뜻을 말하라고 하자 증점(曾點)이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冠者) 대여섯 사람 동자(童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 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고 말한 고사가 있음. 《논어》 <선진(先進)>. 무원(?源) : 주자(朱子)가 태어난 곳. 지금의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현명(縣名). 무위 : 無爲는 道敎, 不爲는 佛敎를 말함. 무위지리(無爲之理) : 일하는 표시와 자랑이 없이 감화하여 다스림을 말하는데, 요순(堯舜)의 정치는 이른바, “무위이화(無爲而化)”인 즉, “하는 일 없이도 다스린 자는 그 순인저[無爲而治者 其舜與之]” 하였다. 《論語》 무위지화(武?之禍) : 춘추 시대 경보(慶父)가 노 나라 민공(閔公)을 시해한 사건. ‘무위’는 문 이름. 궁중의 작은 문을 위(?)라 한다. /동사1/ 무유(無猶) : 형제간에 화목하여 서로 도모하지 않음을 이르는 바,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형과 아우가 서로 좋아하고 서로 도모하지 말라.〔兄及弟矣 式相好矣 無相猶矣〕”한 데서 취한 것이다. 그러나 횡거(橫渠) 장재(張載)는 “유(猶)는 같이 하는 것으로 아우가 형에게 공손히 하는데도 형이 아우에게 우애하지 않으면 아우 또한 형과 같이 공손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무유서(武攸緖) : 무 유서는 당(唐) 나라 무후(武后)의 친정 조카인데, 성품이 깨끗하고 욕심이 없어 무후(武后)가 정권을 잡자 벼슬을 버리고 숭산(崇山)에 숨어 살았다. 그 후 무씨(武氏)가 실패하여 화란(禍亂)을 당했으나 무 유서만은 홀로 화를 면하였다. 《唐書 卷一百八十三 外戚傳》 무음(武音) :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악(樂) /성호사설9/ 무의(無衣) : 무의는 《시경》 진풍(秦風)의 편명으로 진 나라 사람이, 진(秦) 강공(康公)이 공전(攻戰)을 좋아하여 자주 전쟁을 일으키고 백성의 소망과 함께 하지 않음을 풍자한 시인데, 여기서는 고려가 송 나라와 함께 금 나라를 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詩經 國風》 /동사4-284/ 무의(武議) : 주(周) 나라 위료(尉?)가 지은 《위료자(尉?子)》의 편명. 일종의 병서(兵書)로 손자(孫子)와 비슷함. /선조실록5/ 무의지어(無義之語) : 불가가 말하는 화두(話頭). 무이(武夷) : 산 이름. 중국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 남쪽에 있음. 주자(朱子)가 이 곳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지내면서 학문을 강론했음. 주자는 그 곳 구곡의 경치를 따라 무이도가(武夷棹歌)를 지었는데, 서시(序詩)와 함께 모두 7언 절구 열 수로 되어 있음. 무이(無耳) : 이위(以爲)의 뜻이 여기까지 이름. 무이(武夷)의 …… 풀빛이었습니다 : 무이는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무이산으로 주자(朱子)는 이곳에 정사(精舍)를 짓고 강학하였으며 조그만 못을 파놓고 “구름의 그림자와 하늘의 빛 함께 배회한다.〔雲影天光共徘徊〕”는 시를 지었다. 염계(濂溪)는 주돈이(周敦?)의 호인데 염계는 뜰에 자라는 풀을 뽑지 않고 풀이 자라는 것을 즐겁게 관찰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무이(武夷)의 금서(琴書) : 주자(朱子)가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이라는 시 12수를 지었는데, 이 가운데 <정사(精舍)>라는 제목의 시에 “거문고와 책을 사랑한 지 사십 년에, 몇 번이나 산중의 객이 되었던가? 어느날 띠집이 이루어지니, 문득 나의 천석일세.[琴書四十年 幾作山中客 一日茅棟成 居然我泉石]”라는 내용이 있음. 무이(武夷)의 장관(壯觀) : 무이는 중국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 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경치가 뛰어나 옛부터 신선이 산다는 전설이 있으며 주자(朱子)가 만년에 이곳에 정사(精舍)를 짓고 강학하여 더욱 유명하다.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 무이(武夷) 구곡(九曲)을 그린 그림. 무이는 중국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 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자(朱子)가 이 곳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학문을 강론했는데, 그 곳 구곡(九曲)의 경치를 읊은 7언 절구의 <무이도가(武夷棹歌)> 10수가 전한다. 아래 시의 내용으로 보건대, 동고선생이 송(宋) 나라 때의 화가 이공린(李公麟)이 그린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나 혹은 이를 묘사(描寫)한 그림을 소장한 듯하다.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 : 朱子가 武夷山에 살았는데 무이산에 흐르는 시내에 아홉 굽이가 있으므로 주자가 武夷九曲詩를 지었다. /퇴계집 3 2-292/ 무이정사(武夷精舍) : 무이산(武夷山)은 주자(朱子)가 학문을 가르쳤던 곳이며, 정사는 배우는 집이라는 뜻이다. /대동1-19/ 무인(武人)이 …… 하였으니 : 밀직 고세(高世)라는 사람이 자기는 무인(武人)이라 하며 돈을 내려하지 않으니, 안향이 여러 재상에게 이르기를, “공자의 도가 만세에 법을 내려주었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어버지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에게 공경하는 것이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일 ‘나는 무인인데 무엇 때문에 애써 돈을 내어 저 생도들을 양성하겠느냐’고 한다면, 이 사람은 공자를 위하지 않는 것이니, 되겠는가.” 하니, 고세가 듣고 매우 부끄러워 즉시 돈을 냈다. 《高麗史節要 卷22 忠烈王 4》 무인치(無?緇)는 변질됨이 없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굳은 것이 있지 않느냐! 갈아도 엷어지지 않고, 흰 것이 있지 않느냐!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느니라.[不曰堅乎 磨而不? 不曰白乎 涅而不緇]”하였다. 무일(無逸) : 《《서경》의 편명으로, 게으르지 말라는 말이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훈계한 글이다. 주 성왕(周成王)이 처음 정사를 하게 되자 주공(周公)이 안일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 끌을 지었다 함. 농사의 어려움과 백성을 돌볼 것과 방일에 빠지지 말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음. 《書經 周書 無逸》 /중종실록34/ 무일도(無逸圖) : 송(宋) 나라 손석(孫奭)이 송 인종(仁宗)에게 그려 바친 그림. /중종2-275/ 무일지전공(無逸之田功) : 무일은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 주(周) 나라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정사할 때에, 주공(周公)이 ‘군자(君子)는 안일이 없어야 하고 먼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하여 역대 군왕이 농사에 힘쓰던 사실을 설명하였음. /연7-293-15/ 무자(誣字)의 기롱 : 《예기》 <제통(祭統)>에 “선조에게 아름다움이 없는데 이를 일컫는 것은 속이는 것이고, 선이 있는데 알지 못하는 것은 밝지 못한 것이고, 알면서 전하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니 이 세 가지는 군자가 부끄러워 하는 바이다.[先祖無美而稱之 是誣也 有善而弗知 不明也 知而弗傳 不仁也 此三者 君子之所恥也]”라고 한 말이 있음. 무자경(無字經) : 《무자법문경》을 이름. /완당집3/ 무자년 정난기록 : 세조(世祖) 14년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의 역옥 사건을 기록한 문서인 듯 하나 상세한 것은 미상. /중종3-19/ 무작(舞勺) : 13세의 나이를 말한다. 《예기》에 “13세가 되거든 음악을 배우고 시를 외우며 작시(勺詩)에 ?추어 춤춘다.[十有三年 學樂誦詩 舞勺]”고 하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 유래한다. 작(勺)은 《시경》 《주송(周頌)》의 작시(酌詩)를 말한다. 《禮記》 《內則》 무작무상지세(舞勺舞象之歲) : 주공(周公)이 지은 춤의 이름인데, 11세로부터 신체의 발육을 위하여 추었다. /열하1-478/ 무장(無將) : 임금이나 부모를 장차 어떻게 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 《공양전(公羊傳)》 장공(莊公) 32년 조의, ‘임금이나 부모에 대해서는 장차 어떻게 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어떻게 하려 하면 주벌(誅罰)을 당하는 것이다.《君親無將 將而誅焉》에서 인용된 것으로, 봉건적 종통(宗統) 의 대의를 강조한 말임. /중종실록 4/ 무장죄(無將罪) : 하려는 의지만 있어도 죽이는 죄. 《춘추 공양전(春秋公羊傳)에 “임금과 어버이에게는 장(將)이 없는 것이니, 하려는 마음만 먹어도 죽인다.” 하였다. /면암집1/ 무재(茂才) : 수재(秀才). 한(漢)나라 이후로 관리를 뽑아 쓰는 데 시험하는 과목의 이름.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이름을 피하여 ‘수’를 ‘무’로 고쳐서 부르게 되었음. 무재(茂才) : 효(孝)·제(悌)·역전(力田)은 한 혜제(漢惠帝) 4년에 설치된 과거의 과목. 효·제는 행실이 정숙한 사람, 역전은 부지런한 사람. 여기에 천거된 사람은 역역(力役)을 면제했다. 문제(文帝) 때에는 효에 비단 5필(匹)을, 제·역전에도 비단 5필을 하사하였다. 현량(賢良)은 현량 방정(賢良方正)의 약인데, 한 무제(漢武帝) 때에 시작된 과거의 한 과목으로 직언(直言)·극간(極諫)을 잘하는 사람을 뽑았다. 무재(茂才)는 원래 수재과(秀才科)였는데, 후한(後漢)에 와서 광무제(光武帝)의 휘(諱)를 피하여 무재라고 고쳤다. ← 효제 ← 역전 /삼봉2-276/ 무재인(武才人) :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이름. 재인(才人)은 여관(女官)의 명칭으로 한·위(漢魏) 이후 삼부인(三夫人) 이외에 재인이 있었음. 측천무후는 미모가 뛰어나 14세 되던 당 태종(唐太宗) 정관(貞觀) 11년(637)에 재인으로 입궁하였고, 그 후 고종(高宗)의 사랑을 받아 황후 왕씨를 몰아내고 황후가 되었음. 후에 아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황제 위를 빼앗았다. 《資治通鑑 唐紀》 무적무막(無適無莫) : 군자가 세상에 처할 때는 옳고 그름을 한 편으로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의(義)에 비추어 보아 시비를 판별해야 한다는 말. 《論語 里仁》 /중종7-80/ 무정(武丁) : 무정 역시 상 나라의 현군으로 묘호(廟號)는 고종(高宗)이다. 국조(國祖)인 성탕(成湯)에게 제사를 지낸 다음날 장끼가 솔귀에ㅣ 올라가 우는 이변이 있자, 무정은 현신(賢臣) 조기(祖己)의 “우선 정사를 닦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명재상인 부열(傅說)을 등용하여 중흥(中興)을 이룩하였다. 《史記 卷三 殷本紀》 /고봉집1/ 무정(務停) : 춘분(春分)날부터 추분(秋分)날 까지 특정한 사건 이외의 소송처리를 정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귀농(歸農)하게 하는 것. /세종실록 56권 481/ 무정보감(武定寶鑑) : 원래는 이조 개국 초기부터 예종(睿宗) 때까지의 내우외환(內憂外患)에 관한 사건을 수록한 책. 그 후 홍 언필(洪彦弼)·윤 인경(尹仁鏡)·이기(李?)·정순붕(鄭順朋)·윤원형(尹元衡) 등이 왕명을 받들어 성종(成宗) 때부터 명종(明宗) 초기까지의 각종 내우외환에 대하여 그를 진압한 전말을 기록하고 이를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이라 하였다. 일명 《을사정난기(乙巳定難記)》 /선조수정실록1/ 무제(無題) : 이 시는 멀리 좌천 또는 유배가서 군왕을 연모하여 지은 작품으로 보인다. 무제(武帝)1: 魏나라를 세운 將軍 曹操를 이름. 자 孟德. 묘호 太祖. 시호 武皇帝라 추존되었다. 沛國의 초(安徽省 毫縣)출생. 宦官의 양자의 아들로, 黃巾의 亂 평정에 공을 세운 뒤 獻帝를 옹립하고 武略을 휘둘렀다. 華北을 거의 평정하고 남하를 꾀하였으나, 208년 孫權·劉備의 연합군과 赤壁에서 싸워 대패한 이후에도 그 세력이 江南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같은 해 丞相, 213년 魏公, 216년 魏王의 자리에 올랐으며, 정치상 실권을 잡았으나 제위에는 오르지 않았고, 220년 뤄양[洛陽]에서 죽었다.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이른바 建安文學의 興隆을 가져오게 하였다. 무제(武帝)2: 전한(前漢)제7대 황제(재위 BC 141~BC 87). 유철(劉徹). 시호 세종(世宗).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유학에 중점을 두고, BC 127년부터 제후왕국을 왕의 여러 아들에게 분봉(分封)하여 중앙집권화하였다. 무제(武帝)3: 孝武帝 元修. 효문제의 손자로 자는 孝則이다. 史書에서는 出帝라 칭한다. 처음에는 平陽王에 봉해졌는데, 高歡이 절민제를 폐하고 제로 옹립하였다. 永熙 연간 말에 고환이 병사를 일으켜 낙양으로 향하자 及이 장안으로 도망쳤는데 이를 西魏라 한다. 뒤에 宇文泰에게 毒殺되었다. 연호는 셋이었는데, 太昌, 永興, 永熙이다. 무제(武帝)4: 後漢의 초대 황제(재위 25~57). 자 文叔. 묘호 世祖. 시호 光武. 성명 劉秀. 前漢 高祖 劉邦의 9세손이다. 전한은 1세기 초 王莽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하였으며, 그가 세운 왕조 ‘新’의 末年에 각지에서 群雄이 擧兵하였을 때 유수도 허난성[河南省] 난양[南陽]의 豪族과 손을 잡고 봉기하였다. 각지로 轉戰한 끝에 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25년 뤄양[洛陽]에서 즉위하여 漢王朝를 재건하였다. 즉위 후 10년 동안 군웅의 세력들을 진압하는 데 주력하여 36년 전국을 평정하였으며, 왕망의 가혹했던 정치를 폐지하고 통일국가의 충실을 기하는 한편 軍兵을 내어 中央集權化를 꾀하였다. 또한 학문을 장려하고 명예와 절조를 중히 여기는 儒敎尊重主義를 택함으로써 後漢의 특색이 되는 禮敎主義의 기초를 다졌다. 무존(撫存) : 위로하고 휼문(恤問)함. 무주상(無住相) : 법(法)은 자성(自性)이 없는 까닭에 주착(住着)할 바가 없이 연(緣)에 따라서 일어나기 때문에 무주상이라 함. /여한 25/ 무지(無知) : 춘추시대 제 희공(齊僖公)의 모제(母弟)인 이중년(夷仲年)의 아들 공손 무지(公孫無知)임. 그는 희공에게 총애를 받아 의복(衣服)과 예질(禮秩)이 적자(嫡子)와 같았다. 그러므로 양공(襄公) 저아(諸兒)에게 물리침을 당했는데 건국 틈을 보아 임금 저아를 시해하고 임금이 되었다가 대부(大夫) 옹름(甕?)에게 죽임을 당했음. 《春秋左傳 莊公 八年》 /중종실록35/ 무지개 들보가 …… 꺾임에 : 무지개 들보는 들보의 모양이 무지개처럼 굽어 있다 하여 붙인 명칭으로 용 모양의 들보라고도 하는 바, 한 번 꺾였다는 것은 스승이 별세함을 비유한 것이다. 무지기(無支祁) : 회수(淮水)의 물귀신인데 무지기(巫支祁)라고도 쓴다.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우(禹)가 물을 다스릴 적에 세 번 동백산(桐柏山)에 이르러 회·와(淮渦)의 물귀신을 잡았는데, 그 이름이 무지기였다.”고 하였다. /성호3-88/ 무지한 …… 삼나니 : 시골 아이들이 총수산비를 부싯돌 삼아서 불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한유(韓愈)의 석고가(石鼓歌)에 “목동들 부싯돌 삼고 소는 뿔을 비비나니 뉘라서 손 대어서 어루만져 주리요.[牧童敲火牛礪角 誰復著手爲摩?]” 하였다. 〔용재집〕 무진(無盡) : 불가의 무진장(無盡藏)을 말하는데 천만 덩이의 돌을 뜻하는 것임. /완당집3/ 무진회군(戊辰回軍) : 우왕 14년 5월 요동 정벌(遼東征伐)을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 위화도(威化島)까지 이른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가 개경(開京)으로 회군한 사건을 가리킨다. /양촌3-231/ 무차기량(無此伎倆) : 기량은 재능과 같음. 차는 윗 글의 지공혈성과 추권대척을 가리킴. 무차대회(無遮大會): 국가가 施主가 되어 승려나 속인, 남녀와 귀천의 차별없이 대중을 대상으로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거나 물품을 나누어주는 법회. 이는 불교의 布施 정신에서 비롯되었으나, 널리 민심을 수렴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5년마다 한 번씩 거행되었으며, 남북조 때 성행하였다. 무애회(無?會). 무차평등대회(無遮平等大會) : 현성(賢聖)·도속(道俗)·귀천·상하를 가릴 것 없이 모두 평등한 자격으로 모이는 법회(法會)·인도(印度)에서 주로 많이 거행하였고, 중국에서는 육조(六朝) 시대에 많이 행하였다. /양촌집3/ 무참히 …… 곳이라네 : 기 복재(奇服齋)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으로, 그의 호가 복재이다. 그가 기묘사화로 유배지에서 교살(絞殺)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월사집〕 무창(武昌) : 지금의 호북성 무한에 있던 도시로써, 삼국 당시 손권의 오나라의 수도였고, 악저(鄂渚)로도 불리었으며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무창(武昌)의 고기 : 삼국(三國) 시대 오(吳) 나라의 손호(孫皓)가 도읍을 건업(建業)에서 무창으로 옮겼는데,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하여 원망이 높자 육개(陸凱)가 “차라리 건업의 물을 마실지언정 무창의 고기는 먹지 않겠네. 차라리 건업으로 돌아가 죽을 지언정 무창에 머물러 살지 않겠네. [寧飮建業水 不食武昌魚 寧還建業死 不止武昌居]”라는 민간의 동요를 들어 상소를 올린 일이 있다. 후에 이 고사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육개전(陸凱傳)> 무채북당(舞綵北堂) : 북당은 부모가 거처하는 집을 말한다. 초(楚) 나라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세에 양친을 효성으로 봉양할 적에 자기의 늙은 표시를 하지 아니하려고 어린애처럼 아롱진 채색 옷을 입고, 부모의 슬하에서 재롱을 부리며 춤도 추었다. /해행 5-389/ 무채지희 → 무채북당(舞綵北堂) /양총3-109/ 무천(巫川) : 중국에 있는데 좋은 옥이 나는 곳. 무첨(无?) : 자손이 선조의 덕을 더럽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시경》에 말하기를 夙興夜寐 아침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들어 毋?爾所生 너를 낳은 이를 더럽히지 말라 라고 하였다. 《詩經》 <小雅> 小宛篇 무측천릉(武則天陵) → 정형(井?) 무파래(無巴來) : 물푸레나무 껍질에서 나오는 푸른 색소. 후세에는 물푸레나무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됨. 본래 ‘무파래’는 지방마다 다른 발음이었으나 15세기 국어의 표기상으로는 ‘믈파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믈’이 ‘무’로 바뀐 것은 순경음화 현상과 ㄹ탈락 현상에 의한 것으로 (믈→물→무. 블→불[火]). ‘파래’는 ‘파랗다’의 약표기(約表記)인 듯하다. 조선 후기 각 지방에서는 형장(刑杖)으로 물푸레나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물푸레나무는 일명 심나무라 하며 심나무는 또 석단·번규·분계·고수·고력이라고도 한다. 그 껍질은 진피라고 하며 물에 담그면 푸르스름한 색깔이 나오는데 이것을 그때 방언으로 ‘무파래’라 하였다. ○案律 須用荊 今郡縣所用 多用?木 ?木一名石檀 一名樊槻 一名盆桂 一名苦樹 一名苦? 其皮謂之秦皮 漬水出碧色者也 方言無巴來《牧民心書 刑典 愼刑》(박희창) 무하(無何) : 무하유향(無何有之鄕)의 약칭.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말로 세상의 번거로운 일이 없는 허무자연(虛無自然)의 낙토(樂土)를 말함. 무하향(無何鄕)이라 하기도 함. 무하씨(無何氏) : 가공의 인물을 말한다. 오유 선생(烏有先生)과 같은 뜻. /삼봉1-51/ 무하유(無何有) :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인데, 허무(虛無)한 이상향(理想鄕)을 말한다. 《莊子》/동문선4 -125/ 무하유(無何有)의 시골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보이는 내용으로 적막하고 아득하여 아무것도 끝이 없는 세계로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이른다. 무하향(無何鄕) :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준말.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로 세상의 번거로운 일이 없는 허무자연(虛無自然)의 낙토(樂土)를 말함. 상대적인 세계인 현실의 제약을 벗어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이다. 여기서는 술 취해 모든 인실의 고뇌를 망각한 상태를 뜻한다. 〔월사집〕 무학경독(無虐?獨) : 경(?)은 형제가 없는 자, 독(獨)은 아들이 없는 자, 고명(高明)은 지위가 높은 자인데, 경독이라 하여 학대하거나 고명하다하여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으로, 즉 천미한 서민(庶民)이라도 선행이 있으면 권장하고, 고명한 자라도 불선(不善)이 있으면 징계하라는 것임. 《書經 洪範》 /중종2-96/ 무학생(武學生) : 무학은 송 선종(宋禪宗) 때 무성왕묘(武成王廟)에 처음으로 설치한 기관으로 태학(太學) 종학(宗學)과 함께 삼학(三學)으로 불리웠다. 《선조수정실록1》 무함(巫咸) : 옛날 신무(神武). 은 중종(殷中宗) 때 천상에서 내려왔다 한다. /동국3-217/ 무해어의리(無害於義理) : 제사와 연락(宴樂)을 겸하여 가리킴. 무현금(無絃琴) : 현(絃)이 없는 거문고. 진(晉) 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이 음률을 알지 못하면서도 무현금을 곁에 두고 매양 술이 이르면 문득 이를 어루만지며 자신의 뜻을 부쳤다고 함. 무현금(無絃琴) → 도잠(陶潛) 무협산 : 삼협(三峽)의 하나. 사천성(四川省) 무산현(巫山縣) 동쪽과 호북성(胡北省) 파동현(巴東縣) 서쪽에 있기 때문에 무산으로 이름을 삼았다. 두 언덕의 절벽이 배가 다니기에 매우 위험하다. 무형상방소(無形象方所) : 윗 글의 제극(諸極)은 형태가 있기 때문에 그 처한 위치에서 중으로써 말할 수 있지만 태극은 형상과 방위가 없기 때문에 중으로써 말할 수 없음. 무환(撫環) : 옛적에 신하가 외국으로 나갈 때에 임금이 고리[環]를 주면 돌아오라는 뜻인데 환은 환(還)자와 음이 같은 때문이다. /해행5-431/ 무환자(無患子) : 무환자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 재목은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데 쓰이는 열매는 장난감을 만들기도 함. /성호7-78/ 무회씨(無懷氏) : 상고에 인욕이 없이 순박했던 세상의 제왕. 무후(武后) : 당 고종(唐高宗)의 후(后)인 무칙천(武則天)을 가리킴. 당 고종이 붕(崩)하고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정사를 제맘대로 하다가 끝내는 중종을 폐위(廢位)하고 예종(睿宗)을 세웠다가 다시 폐위시키고 자신이 즉위하여 제(帝)라 칭한 다음 나라 이름을 고쳐 주(周)라 하고 자기 이름을 조(?)라 고치고는 온갖 음란과 학정을 자행하였음. /중종실록 37/ 무후(武侯) : 삼국시대 촉(蜀) 나라 승상 제갈량(諸葛亮)의 시호, 자는 공명(孔明). 유비(劉備)가 죽은 뒤에 유조(遺詔)를 받들고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을 보필하였으며 위(魏)를 치기에 앞서 후주에게 <출사표(出師表)>를 올리고 출정한 일이 있다. 《三國志》 三五 무후(武后) : 측천무후(則天武后). 당(唐) 고종(高宗)의 후(后). 고종이 죽고 난 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주(周)라 하였다.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중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약 15년간 전국을 지배하였다. 주나라의 전통을 따라 역법(曆法)·관명(官名)을 새로 정하는 한편, 북문학사(北門學士)들에게 명하여 ??????신궤(臣軌)????????????백료신계(百寮新誡)??????등을 찬(撰)하게 하였고, 각지에 특사를 파견하여 인재를 모았다. 또 인심을 얻기 위하여 관작(官爵)을 마구 뿌렸으며, 명당(明堂)·천당(天堂)·천추(天樞)·대불(大佛)과 같은 대건축물을 세워 국위선양에 힘썼다. 적인걸(狄仁傑)·위원충(魏元忠) 등의 명신을 적절하게 등용시켰으나, 말기에는 장역지(張易之) 형제 등 총신들이 정사를 그르쳤고, 705년 장간지(張柬之) 등이 정변을 일으켜 중종이 복위되고 당왕조가 부흥하였다. 얼마 후 측천무후는 병사하였는데, 그녀는 악랄한 책략과 잔인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요승(妖僧) 회의(懷義) 및 장역지 형제와의 추문을 남기는 등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무후(武侯)의 …… 충성이라오 : 무후는 삼국시대 촉한의 명재상인 제갈량(諸葛亮)의 시호이다. 제갈량은 일찍이 남만(南蠻)을 정벌하기 위하여 무더운 여름철 노수(瀘水)를 건너가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 무후심서(武侯心書) : 병서명(兵書名)으로 1권임. 내용은 장군이 되어 용병하는 법을 말하였으나, 《손자(孫子)》에 있는 것을 많이 표절하였다. 제갈 양(諸葛亮)이 찬(撰)하였다 하나 사실은 뒷사람의 위작(僞作)임. /성호7-128/ 무휴(無虧) : 제 나라 환공의 여섯 폐첩 가운데 장위희(長衛姬)의 몸에서 태어난 공자 무맹(武孟)을 말함. 자리를 다툰 일이란, 환공이 이미 효공을 태자로 세웠다가 역아(易牙)의 청으로 다시 무휴를 세웠는데 환공의 사후에 역아가 들어가서 시인(寺人) 초(貂)와 함께 내관(內官)에 권총(權寵)이 있는 이를 인하여 군리(群吏)를 죽이고 무휴를 세우자 효공이 송 나라로 달아난 사실을 말함. 《左傳 僖公 十有七年》. 무휼(無恤) : 무휼(無恤)은 춘추 시대 진 앙(晉?)의 차자로 후일의 조 양자(趙襄子)이다. 진앙은 무휼이 어질다고 여겨, 태자 백로(伯魯)를 폐하고 무휼을 세웠다. /동사1/ 무흘정사(武屹精舍) : 한강(寒岡) 선생이 기거하며 학문을 강론하던 정사. 한강은 이 정사 주변의 경관을 두고 무흘구곡(武屹九曲)의 시를 짓기도 하였음. 묵객경(墨客卿) : 원래는 먹을 의인화한 말로, 양웅(揚雄)의 장양부(長楊賦)에서 한림(翰林)을 주인으로 삼고 먹을 객경(客卿)으로 삼았던 데서 유래하는데, 여기서는 이 구절의 뜻으로 보아 시인묵객(詩人墨客)으로서 사대부에 오른 사람이라는 뜻으로 쓴 듯하다. 〔월사집〕 묵경(墨卿) : 성은 부(傅). 생졸 연대는 미상. 세 차례에 걸쳐 고려에 사신으로 왔었다. 《尙友錄 卷十八》 중서사인(中書舍人)은 중서성(中書省)에 속하는 관직으로, 조고제칙(詔誥制?)을 관장하는데, 문사(文士)로서는 명예스러운 지위로 여겨졌다. /고려도경/ 묵군(墨君) : 진(晋)나라 왕자유(王子猷)가 대[竹]를 사랑하여 하루도 그대[此君]를 잊을 수 없다 하셨으므로 대를 차군이라 하고 수묵(水墨)으로 그린 대를 묵군(墨君)이라 하였다. 묵기(?記) : 북송(北宋) 시대 조야(朝野)의 유문(遺聞)을 적은 일종의 야사. /성호9-200/ 묵대포(墨帶布) : 먹물을 들인 베 띠. 묵최(墨衰)의 심제인(心制人)이 띰. 묵돌(墨突) : 묵자(墨子)의 집 굴뚝. 묵자(墨子)는 천하를 다니느라 집에서 밥을 지어먹어 굴뚝이 검어질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文選 班固 答賓戱》 〔용재집〕 묵립(墨笠) : 먹물을 들인 갓. 묵최(墨衰)의 심제인(心制人)이 씀. 묵최란 베로 만든 직령(直領)에 묵립(墨笠)과 묵대(墨帶)를 갖춘 옷으로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담제 뒤와 생가(生家) 부모의 소상 뒤에 입는 것. 묵비(墨悲) : 근본은 같은데 나중은 다른 것을 탄식하는 말. 고대 중국의 묵적(墨翟)이 흰 실을 보고서, 그것이 누렇게도 물들고 검게 물들 것을 슬퍼하고, 양주(楊朱)가 기로(岐路)에 서서 남으로도 갈 수 있고 북으로도 갈 수 있음을 슬퍼하였다. 《淮南子 說林訓》 /중종7-78/ 묵비양사(墨悲梁絲) : 묵자(墨子)는 실을 물들이는 것을 보고 슬퍼했고, 양주(楊朱)는 아홉 갈래 길을 보고 울었다는 고사가 있으니, 이는 실이 청(靑)·황(黃)·적(赤)·흑(黑)등의 물감 색에 따라 각각 다른 색으로 물들여지고, 갈림길이 동(東)·서(西)·남(南)·북(北)으로 갈라지듯이 사람의 본성은 동일하나 그 처하는 환경과 습관에 따라 각각 달라짐을 생각한 때문이다. /대동5-58/ 묵수(墨綬) : 지방관이 차는 인끈이다. 〔월사집〕 묵수(墨綬)라 …… 남았느니 : 묵수는 지방관이 차는 인끈이다. 현수(峴首)는 10권 ‘현산(峴山)에서 …… 보았도다’ 참조. 지방관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공덕비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월사집〕 묵식심통(?識心通) : 말 없이 알고 마음으로 깨달음. 묵의(墨義) : 필답 시험(筆答試驗). 경의(經義)로써 사(士)를 시험할 때 필답(筆答)하게 하는 것인데 구의(口義)를 상대로 하여 된 말이다. 당(唐) 원화(元和) 때에 구의를 정지하고 묵의를 시험하였으며, 송(宋) 나라 때 십과(十科)에 아울러 묵의가 있었고, 명(明)에 와서도 인습하였다. /성호4-111/ 묵자(墨子) : 춘추 시대 魯나라 사람으로 兼愛說을 주장하였음. 일찍이 갈림길을 보고 울면서 사람이 선악의 기로에서 악에 들어감을 탄식한 일이 있음. 呂氏春秋 疑似篇. 묵자사(墨子絲) : 《顔氏家訓 慕賢》에 “묵자가 실을 물들이는 사람을 보고서 탄식하며 ‘파랑색을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랑색을 물들이면 노랗게 되니 물드는 것이란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했다.” 하였음. /완당집3/ 묵자읍사(墨子泣絲) : 묵자가 흰 실을 황색·흑색으로 물들일 수 있음을 보고 탄식하여 울었다는 고사. 사람은 습관에 의하여 그 성품의 선악을 달리 할 수 있다는 비유이다. 《淮南子 說林訓》 /양촌2-197/ 묵장소기(墨莊所記) : 장방기(張邦基)의 저작. 묵적(墨翟)·양주(楊朱) : 묵적(墨翟)과 양주는 모두 춘추(春秋)시대의 사상가(思想家). 묵적은 인(仁)을 강조하여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야 한다는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하였으며, 양주는 의(義)를 강조하여 자신의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하였는데, 뒤에 이들 사상의 병폐가 심화되자, 맹자는 묵적의 겸애설을 무부(無父)의 가르침이라 비판하였고, 양주의 위아설을 무군(無君)의 가르침이라고 비판하였다. /고봉집1/ 묵적읍사(墨翟泣絲) → 묵자읍사(墨子泣絲) /청장1-105/ 묵최(墨?) : 상복(喪服)에 검은 염색을 하는 것. 옛날 상인(喪人)이 싸움터에 나갈 때는 검은 물을 최복에 들여 입었다. 《좌전》 묵최질(墨??) 주(註)에 “흉복(凶服)을 입고 종군하기 때문에 검은 염색을 했다.” 하였다. 《左傳 僖公 三十三年》 묵칙(墨勅) : 궁중에서 직접 발표하는 칙서(勅書) 찍은 옥새(玉璽)의 빛이 검으므로 이름. /연6-101-34/ 묵태(墨胎) : 복성(複姓). 은 나라 속국이던 고죽국(孤竹國) 임금의 성. 백이 숙제가 고죽국 임금의 두 아들이었는데 주 나라 무왕(武王)이 은 나라를 정벌하자 백이 숙제가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서 먹고 세상을 마쳤음. 《史記 伯夷列傳》. 묵태씨(墨胎氏)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성(姓)으로 곧 이들을 가리킨 것이다. 묵특(冒頓) : 한(漢) 나라 때 흉노(匈奴)의 추장. 부하들에게 명적(鳴鏑)을 만들어 주고 그 명적을 다 발사하여 없애라고 명령한 다음 명령에 위반하는 자를 참(斬)하여 끝끝내 자기 명령을 실행하였음. 《사기(史記)》 흉노전(凶奴傳)에, “冒頓乃作爲鳴鏑 習勒其騎射 令曰 鳴鏑所射而不悉射者 斬之 行獵鳥獸有不射鳴鏑所射者 輒斬之 …… 居頃之 冒頓出獵 以鳴鏑射單于善馬 左右皆射之 於是冒頓知其左右皆可用” 이라고 보임. /성호8-22/ 묵형(墨刑) : 중국의 옛날 오형(五刑)의 하나. 이마에 자자하여 먹물을 넣어 표시하는 것. /연산3-375/ 문 …… 바라볼거나 : 상여가 고향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월사의 집을 지날 터이므로 치전(致奠)하기 위해 기다리겠다는 뜻이다. 〔월사집〕 문 …… 배울손가 : 후한(後漢) 때 낙양(洛陽)에 폭설(暴雪)이 내려 집집마다 사람들이 눈을 치우러 나와고 먹을 것이 없어 구걸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 때 낙양령(洛陽令)이 성안을 시찰하다가 원안(袁安)의 집에 이르러 차운 방 안에 누워 있는 그를 보고 집밖으로 나가지 않은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모두 굶어죽는 판인데 남에게 음식을 구걸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이에 낙양령이 어질다고 여겨 효렴(孝濂)으로 천거, 조용(調用)하였다. 《後漢書 袁安傳》 월사가 정사(正使)인 필운(弼雲) 즉,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에게 이러한 날 술을 마셔야지 방 안에만 있어서야 되겠느냐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월사집〕 문 …… 뿐일세 : 이 편은 용재 자신의 적소(謫所) 생활을 노래하였다. 즉 자신의 문을 지키는 병졸은 손님이 찾아오고 술자리가 벌어지기를 바랄 뿐이라는 것이다. 〔용재집〕 문 …… 울리고 : 낡은 거적자리로 만든 문이 바람에 불려 윙윙 우는 수리를 내는 것을 형용하였다. 한(漢) 나라 때 진평(陳平)의 집이 가난하여 다 떨어진 거적자리로 문을 삼았다 한다. 〔용재집〕 문 노공(文潞公) : 노공의 이름은 언박(彦博), 자는 관부(寬夫). 송 인종 때부터 네 조정에 벼슬하여 출장 입상 50여 년에 이름이 사이(四夷)에 떨쳤다. 사마 온공(司馬溫公)·부정공(富鄭公)과 함께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만들었다. /성호5/ ← 문언박(文彦博) 문(文) : 푼. 엽전을 셀 때 쓰는 단위의 하나이다. 문강(文姜) : 문강은 춘추시대 노 환공(魯桓公)의 부인이며, 제 희공(齊僖公)의 딸. 환공이 문강과 함께 제 나라에 갔는데, 문강이 그 오빠인 양공(襄公)과 간통을 했다. 이 사실을 알고 환공이 성을 내자 문강이 양공에게 고하여 환공이 피살당했다. 《左傳 환공18年》 /삼봉집1/ 문거(文擧) : 문거(文擧)는 공융(孔融)의 자, 동한(東漢) 때 사람. 감당(甘棠)은 《시경(詩經)》의 편명. 소백(召伯)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며 문왕(文王)의 정교(政敎)를 펴다가 감당(甘棠 : 아가위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가니, 뒷 사람들이 그 은혜를 사모하고 감당을 사랑하여 이 시를 지었음. 공문거(孔文擧)가 북해(北海 : 산동성의 청주부(靑州府) 동쪽 내주부(萊州府) 서쪽에 있음)에 부임하여 어진 정사를 베풀자, 뒷 사람들이 그 덕을 사모한 것. /연행2-189/ 문겸(文兼)1 : 문신 겸 선전관의 준말. /경세1-123/ 문겸(文兼)2 : 문신(文臣)의 겸직을 줄여서 일컫는 말이다. 문계(問啓) : 죄과(罪科)로 말미암아 퇴관(退官)당한 사람을 임금의 명으로 승정원의 승지가 계판(啓板) 앞에 불러 그 까닭을 물어서 아뢰는 일. /중종실록34/ 문계(聞鷄) : 진서(晋書) 조적전(祖?傳)에, “사공(司空) 유곤(劉琨)과 함께 이불을 덮고 자다가 한밤중에 황계(黃鷄) 우는 소리를 듣고 발로 유곤을 차서 깨우며 하는 말이, ‘이는 절대 나쁜 소리가 아니다.’하고, 바로 일어나 춤을 추었다.”하였음. 그래서 지사(志士)가 뜻을 두고 분발하는데 쓰임. /대동7-316/ 문곡(文曲) : 술수가에서 말하는 구성(九星)의 하나. 즉 문창성(文昌星)을 말하는데, 이 별은 문운(文運)을 관장한다고 함. 사람의 생년(生年)에 해당시켜 길흉을 점침. /연1-52-25/ 문공(文公)의 일은 《춘추좌전》 민공(閔公) 2년 조에 있고, 문공의 중흥을 노래한 시로는 《시경》 《용풍(?風)》 <정지방중(定之方中)>이 있음. 문공(文公)의 중흥을 노래한 것으로 《시경》 《용풍(?風)》 <정지방중(定之方中)>에 “한갓 사람의 마음이 성실하고 깊을 뿐만 아니라, 일곱 자 이상 되는 암말이 삼천 마리나 되도다.[匪直也人 秉心塞淵 ?牝三千]”라는 시가 있음. 문광공(文匡公) : 조선조 문신 홍귀달(洪貴達)의 시호이다. 그의 자는 겸선(兼善)이고 호는 허백당(虛白堂) 또는 함허정(涵虛亭)이다. 연산군 10년, 장형(杖刑)을 받고 함경북도 경원(慶源)으로 유배 도중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교살(絞殺)되었다. 〔용재집〕 문구(文具) : 외면치례의 형식 /연려실기술38-8-475/ 문군(文君) : 한(漢) 나라 때 촉군(蜀郡) 임공(臨?)의 부호(富豪) 탁왕손(卓王孫)의 딸 탁문군(卓文君)을 가리키는데, 그녀가 과부가 되어 친정에 와 있다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풍류에 반하여 그의 아내가 되었다. 문극(門戟) : 문에 세우는 갈래진 창. 당송(唐宋) 시대에 궁문(宮門)·묘문(廟門), 주부(州府)의 문 등에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고관의 사저(私邸)에도 주어서 세우게 하였다. 《唐書 楊汝士傳》 /동사3-63/ 문단(文壇)에서 …… 마련해야겠군 : 시 짓는 곳에 찾아다니기 위해 길 떠날 차비를 해두어야겠다는 것이다. 〔용재집〕 문단(文壇)의 …… 맡았지 : 대제학의 자리를 번갈아 맡은 것이다. 16권 ‘서경(西坰)의 ‘문형(文衡)의 큰 벼루를 보내며’란 시에 차운하다.’ 참조. 〔월사집〕 문단의 맹주 : 대제학(大提學)을 뜻한다. 〔월사집〕 문덕곡(文德曲) : 악장(樂章)에 선왕(先王)의 공덕(功德)을 칭공하는 데 있어서 문덕(文德)을 칭송한 것과 무공을 칭송한 것이 있는데 문덕곡은 문덕을 칭송하는 악장이다. /연려실기술2-1-152/ 문덕무간(文德舞干) : 순(舜)이 유묘씨(有苗氏)를 치다가 불복하매 두 뜰 사이에 간척무(干戚舞 : 문덕(文德)으로 교화시키는 춤)를 춤추니 유묘씨가 와서 복종하였다. /해행5-608/ 문덕황후(文德皇后) : 당태종(唐太宗)의 황후·장손 무기(長孫無忌)의 누이로서 독서를 좋아하고 덕이 있으며 예절을 잘 지켰음. 여칙(女則) 12권을 지음. /중종2-54/ 문득 …… 보고하누나 : 마름꽃 무늬를 새긴 거울인 능화경(菱花鏡)이라 하여 부부의 만남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여긴다. 남조(南朝) 진(陳) 나라 서덕언(徐德言)이 아내인 악창공주(樂昌公主)와 헤어지면서 능화경을 둘 쪼개어 징표로 나누어 가졌다가 마침내 부부가 다시 만나 해로(偕老)했다 한다. 그리고 꽃받침이 나란히 피어 있는 연꽃을 병체련(??蓮)이라 하여 남녀의 만남 또는 부부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긴다. 여기서는 궁녀가 임금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 〔월사집〕 문량(文樑) : 조선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ㆍ학자. 본관은 영천(永川). 이현보(李賢輔)의 아들로, 음직(蔭職)으로 평릉도 찰방(平陵道察訪)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웃에 살던 이황(李滉)과 가깝게 지내며 시를 읊고 학문을 토론하였다. 문려(文?) : 춘추시대 월(越)의 충신인 문종(文種)과 범려(范?).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도와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쳐서 회계(會稽)의 치욕을 씻었음. 문례관(問禮官) : 중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이를 맞아 인사 절차를 치르고 안내의 임무를 담당하는 임시 관직. /중종실록43/ 문뢰(聞雷) : 조 청헌(趙淸獻)이라는 사람이 59세에 우뢰를 듣고서 도를 깨달았고 인하여 호를 지비자(知非子)라고 지었다. 대체로 우뢰 소리를 들을 때 같이 조심하고 각성한다는 말. /담헌2-25/ 문립(文立) : 진(晉) 나라 때 임강(臨江) 출신으로 촉한(蜀漢) 시절 태학(太學)에서 《모시(毛詩)》와 삼례(三禮)를 공부하였으며 당시의 대학자인 초주(?周)를 사사하여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안회(顔回)와 같다는 평을 얻었다. 또한 촉한에서 상서(尙書)를 지낸 건위군(?爲郡) 출신의 정경(程瓊)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그의 나이가 80에 가깝다 하여 끝내 추천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의 공정한 처사에 감복하였다. 《晉書 卷九十一 文立列傳》 /고봉집1/ 문마(問馬) : 공자가 퇴조(退朝)하여 마굿간이 불탔다는 말을 듣고 “사람이 상했느냐 하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傷人乎 不問馬] 한다. 《論語 鄕黨》 /동사3-321/ 문명(文命) : 문교(文敎)와 같은 말로, 천자의 조서(詔書)를 뜻한다. 《書經 大禹謨》 〔월사집〕 문명(問名) : 혼례에 관한 예의 하나로, 주인이 사람을 보내 상대방의 이름. 또는 생모의 이름을 묻는다는 설이 있음. /송호7-93/ 문모(文母)1 : 주 나라 문왕(文王)의 후비 태사(太?)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뜻함. 문모(文母)2 : 주 문왕(周文王)의 비(妃). 부덕이 매우 훌륭하였고 정사에 참여하여 아들 무왕(武王)이 덕정(德政)을 베풀게 하였다. /명종실록 3/ 문묘(文廟) : 공자(孔子)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고 그의 제자·역대 거유(巨惟)와 신라·고려 이래의 저명한 유학자를 봉안한 사당. /만기2/ 문묘종사(文廟從祀) : 공자묘(孔子廟)에 배향(配享)하는 것. /연려실기술1-1-78/ 문무 길보(文武吉甫) : 문무를 겸전한 길보라는 뜻. 고대 중국 주(周) 나라의 대장 윤길보(尹吉甫)가 주 나라 선왕(宣王)때, 북방의 험윤(??)을 정벌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그 때의 어느 시인이 유월편의 시를 지어 그의 공로를 찬양하고, 아울러 그가 연회하는 데 효도와 우애로 유명한 장중(張仲)을 불러 함께 즐긴 것을 찬양하였다. /중종5-312/ 문무 출신(文武出身) : 문과(文科) 혹은 무과에 급제하여 아직 벼슬에 오르지 못한 자. /성호5-277/ 문무(文舞) : 문무(文舞)는 악생(樂生)들이 칼이나 창을 들지 않고 순 문관(文官)의 복색을 차리고 열을 지어 추는 춤이며, 무무(武舞)는 악생들이 무(武)를 상징하는 옷을 차리고 열을 지어 추는 춤이다. /동사4-232/ 문묵(文墨)이 쌓인 : 문병(文柄)을 잡고 있어 시문(詩文)을 지을 일이 매우 많았음을 뜻한다. 〔월사집〕 문문산(文文山) : 문산은 남송(南宋) 말기 송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충성을 다한 문천상(文天祥)의 호이다. 문미(門楣)로 삼을 : 집안을 빛낼 만큼 훌륭한 딸을 뜻한다. 당(唐) 나라 진홍(陳鴻)의 장한가전(長恨歌傳)에 “아들은 후(侯)에 봉(封)해지지 못하고 딸은 비(妃)가 되니 딸을 봄에 도리어 문미로 삼노라.[男不封侯女作妃 看女却爲門上楣]” 하였다. 문미는 문 위에 가로 놓인 나무인 상인방이다. 〔월사집〕 문법은 …… 정시(正始)이며 : 정시(正始)는 《시경(詩經)》이다. 진한(秦漢) 때와 같은 고문(古文)을 구사하고 시에 능했음을 뜻한다. 〔월사집〕 문비(問備) : 臺官의 물음에 被問者가 그 事情을 갖추 陳述하던 일. 朝鮮朝中期에 행하던 制度로 벼슬아치 중에 過誤를 범한 자가 있으면 臺官이 書牘으로 問難하였으니 이것을 緘辭라 하고, 被問者는 臺官의 말이 과연 옳다고 인증될 때에는 역시 書牘으로 그 事情을 갖추 진술하여 굴복하는 뜻을 보이거나, 혹은 스스로 밝혔으니 이것을 緘答이라 한다. 推考는 바로 問備의 遺意였던 것이다. 《雅言覺非推考》 문사관(問事官) : 죄인의 신문서(訊問書)를 작성하는 임시 벼슬. 지금의 법원이나 검찰청의 서기(書記)와 비슷한 일을 함. /중종실록37/ 문사랑관(問事郞官) : 죄인을 문초할 때에 기록과 낭독을 맡은 낭관. 낭관은 각 관사(官司)의 당하관(堂下官)의 총칭. 문사랑청(問事郞廳). /중종10-39/ 문사청(問事廳) → 문사관(問事官) /중종실록38/ 문산(文山) : 남송(南宋) 말기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의 호이다. 문천상은 길수(吉水)사람으로 자가 송서(宋瑞), 또는 이선(履善)이었는데, 성품이 정직하고 충성스러워 송(宋)나라를 위해 끝까지 충절을 바치다가 원(元)나라에게 사로잡혀 죽었다. 문산(文山) : 송 나라 충신 문천상(文天祥)의 호, 자는 송서(宋瑞)이다. 덕우(德祐) 초에 원 나라가 침입해오자 군사를 일으켜 근왕(勤王)의 조칙에 응하고, 위왕(衛王)이 섬에 신국공(信國公)에 봉해졌다. 조양(潮陽)에 진군했다가 원 나라 장군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여 3년 동안 연옥(燕獄)에 갇혀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宋史》 四一八 문서(文犀) : 무늬 있는 무소뿔 장식을 붙인 띠, 곧 서대(犀帶)를 말한다. /동국3-102/ 문석(文石) : 문석폐(文石陛). 무늬가 있는 돌을 다듬어서 만든 궁정의 섬돌. 궁정을 뜻하는 말. 문선(文選) : 주대(周代)에서 양대(梁代)까지의 시문(詩文)을 뽑아 모은 책. 양(梁) 나라의 소명 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편찬하였음. /연행1-107/ 문선왕(文宣王) : 공자(孔子)를 높인 시호(諡號). 당(唐) 개원(開元 : 현종(玄宗)의 연호) 27년에 공자를 문선왕으로 봉하였고, 송(宋) 상부(祥符 : 진종(眞宗)의 연호) 원년에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가시(加諡)하였으며, 원(元) 대덕(大德 : 성종(成宗)의 연호) 10년에 다시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가시하였다가 명(明) 가정(嘉靖 : 세종(世宗)의 연호) 9년에 지성선사(至聖先師)로 개칭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대성문선왕의 시호를 그대로 쓰고 있다. /청장관전서1/ 문선왕전(文宣王殿) : 唐나라 玄宗 때에 孔子를 文宣王이라 謚號하였으니 文宣王殿은 文廟를 말한다. /고려사절요 1-355/ 문성(文星) : 문성은 문창성(文昌星) 또는 문곡성(文曲星)의 준말로 이 별은 문재(文才)를 주관한다 한다. 상대방을 높여 말한 것이다. 〔월사집〕 문성(文星) : 문운(文運)을 맡은 별을 말한 것인데, 문곡성(文曲星)이라고도 칭함.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서방의 백호칠수(白虎七宿)의 첫째 별자리이다.《동관주기(東觀奏記)》에 “이경량(李景亮)이 아뢰기를 ‘문성(文星)이 어두우니 반드시 과장(科場)에 일이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했다. /삼봉1-123/ 문성(文星)의 …… 비추리라 : 문성은 16권 ‘문성’ 참조. 궁려는 흉노족(匈奴族)이 사는 반구형(半球形)으로 위를 가린 천막으로, 여기서는 후금(後金)의 여진족을 뜻한다. 즉 김숙도가 오랑캐를 진압할 수 있으리라는 뜻이다. 〔월사집〕 문성(文星)이 …… 떨어지고 : 문성은 위 ‘문성(文星)’ 참조. 모두(?頭)는 후금(後金)을 가리킨다. 12권 ‘모두(?頭)’ 참조. 〔월사집〕 문성(文星)이 …… 밝았나니 : 동악 이안눌이 문신으로서 강도(江都)의 부윤(府尹)이 되어 군사를 통솔하는 장군의 소임까지 맡게 되었음을 뜻한다. 〔월사집〕 문성객성(文星客星) : 문성은 문장을 맡은 별이요 객성은 손의 별인데, 문성은 일본 중을 가리키고 객성은 자기를 가리킨 것임. /해행6-366/ 문성공이 …… 두었으니 : 고려 충렬왕 30년(1304) 5월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양부(兩府)와 의논하기를, “재상의 직책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는데, 이제 양현고가 탕진되어 교육에 쓸 자금이 없으니, 청컨대, 6품 이상은 각기 은(銀) 한 근씩을 내고 7품 이하는 등급에 따라 베를 내게 하여 양현고에 귀속시켜서 본전은 그대로 두고 이식을 받아서 영구히 교육 자금으로 만들자.” 하니, 양부에서 이를 좇았다. 그 사실이 보고되니, 왕이 내고(內庫)의 금전과 양곡을 내어 보조하였다. 《高麗史節要 卷22 忠烈王 4》 문성후(文成侯) : 문성은 안유의 시호이며, 문성공(文成公)이라 하는 것이 통례이고, 문성후라고는 하지 않는다. /중종4-166/ 문소(聞韶) : 경상북도 의성(義城)의 옛 이름. 문소전(文昭殿) : 본디 신의왕후(神懿王后 : 태조비 한씨)의 魂殿으로 태조 5년(1396)에 세워서 인소전(仁昭殿)이라 부르다가 태종 8년(1408)에 이 이름을 고쳤다. 세종 15년(1433)에는 태조와 태종의 위패(位牌)를 모셨고, 그 뒤로 왕의 사조(四祖)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 되었는데, 명종 때에 폐지하였다. 관원으로는 종실(宗室) 존속친(尊屬親)인 도제조(都提調) 2원(員)과, 그밖에 제조·참봉(參奉) 각 2년이었다. /중종실록10/ 문수(汶水) : 노 나라 계씨(季氏)가 사람을 시켜서 자신의 사읍인 비(費)에 민자건(閔子騫)을 읍재(邑宰)로 삼으려는 뜻을 전하자 민자건이 “만일 다시 나를 찾는 일이 있으면 나는 반드시 문수 가에 가 있으리라.[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고 사양한 일이 있음. 《論語 雍也》. 문수보살(文殊菩薩) → 문수회(文殊會) /삼봉1-191/ 문수제호(文殊醍?) : 문수는 문수사리(文殊師利)임. 제호는 《涅槃經》에 “從乳出酪 從酪出生? 從生?出熱? 從熟?出醍? 最上 佛亦如是”라 하였음. 불가어에 관정제호(灌頂醍?)가 있는 데 지혜로써 사람에게 수입(輸入)함을 이름. /완당집3/ 문수회(文殊會) : 문수는 보살 이름. 문수의 행사를 말함. /완당집3/ 문시(文始) : 《한서》 예악지에 의하면 “문시무(文始舞)라는 것은 본디 순(舜)의 소무(韶舞)를 말한다. 한 고조(漢高祖) 6년에 이 소무를 고쳐 문시라고 했는데 이는 그대로 이어받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다.” 하였다. 문신(文身) “ 살갗을 바늘로 찔러 먹물이나 기타 물감으로 글씨·그림 무늬를 들이는 것. /고려도경/ 문신기영회도(文臣耆英會圖) : 송나라 司馬光이 洛陽에 노퇴하여 있으면서, 명망있는 노인들과 結社하여 耆英會라 이름하고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여기서는 국가에서 설치한 耆老所에 든 사람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말하는데 기로소는 문관 2품 이상으로 60세가 넘은 사람들의 모임을 入所시켜 敬待하는 것이다. /퇴계집 1 연보 2-178/ 문신전경전강(文臣專經殿講) : 전경은 선비를 뽑는 방법으로 시험 범위가 오직 경서(經書)만으로 한정되었는데, 성균관의 유생과 문신에게 경학을 권장하기 위하여 수시로 3~4명씩 선발하여 정전(正殿)에 불러 들여 임금 임석(臨席) 하에 행하던 강경 시험. 사서(四書)·오경(五經) 중에서 한 대목을 추첨하여 시험하고, 성적은 통(通)·약(略)·조(粗)로 매겨, 유생은 과거 시험 성적을 합산하고, 문신은 승진에 반영하였다. /중종6-114/ 문신정시(文臣庭試) : 문신(文臣)에 대하여 전정(殿庭)에서 행하는 시험. 뒤에 확정된 제도로는 임금의 특별한 명이 있을 때에 행하되 당하관(堂下官)만이 응시하며, 으뜸을 차지한 자는, 7품 이하면 6품에 올려 주고 6품 이상은 품계에 해당하는 벼슬을 주고 정 3품 당하관이면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며, 차위(次位)는 말을 내려 준다. 《續大典 禮典 諸科》 /중종실록 51/ 문약(??) : 사실을 잘못 안 것을 말함. 소식의 일유(日喩)에서 나온 말로서 세상에 태어나 해를 못 본 소경이 옆사람에게 해의 모양을 물으니 해는 구리반과 같다 하였는데 두들겨보니 소리가 나므로 종소리를 듣고 해로 알았고, 또 해의 빛이 어떻냐고 물으니 촛불과 같다 하였는데 촛대와 같이 생긴 젓대를 만져보고 햇빛으로 알았다고 한다. /완당집3/ 문양(文養) : 주 나라 문왕(文王)의 봉양. 문왕이 세자로 있을 때 아버지 왕계(王季)에게 하루에 세 번 안부를 살피고 기거와 음식 두루 효성을 지극히 하였음. 《禮記 文王世子》 문양(汶陽) : 지명.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땅. 문양(汶陽)에서 밭 갈리라 : 문양은 문수(汶水)의 북쪽이다. 춘추시대 노(魯) 나라 계씨(季氏)가 민자건(閔子騫)을 비(費) 땅의 읍재(邑宰)로 삼으려 하자 민자건이 사자(使者)에게 “나를 위해 잘 말해 주시오. 나를 다시 부르러 온다면 나는 반드시 노 나라를 떠나 제(齊) 나라의 문수 가에 가 있겠다고.”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은거(隱居)를 뜻한다. 〔월사집〕 문양지구전(汶陽之舊田) : 문양은 춘추 시대 노(魯)의 땅이었는데, 제(齊) 나라에서 빼앗겼었다. 그후 진(晉)과 제가 회맹할 때 다시 노 나라에 돌려주었다. /동사4-135/ 문언(文言) : 乾卦와 坤卦에 한하여 그의 卦辭·爻辭를 확대하여 해석한 글인데 공자가 지었다고 한다. /퇴계집7 1-160/ 문언박(文彦博) : 북송 시대의 명신(名臣). 자는 관부(寬夫), 시호는 충렬(忠烈).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러 노국공(潞國公)에 봉작되었다. 저시에 노공집(潞公集)이 있다. /중종실록8/ 문연각(文淵閣) : 전적(典籍)을 모아두고 천자에게 강독(講讀)하던 곳. 본디 명 나라 때에 설치한 것으로 청 나라 때에는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여 간직해 두고 문연각 영각사(文淵閣領閣事)·교리(校理) 등의 벼슬을 두어 맡아보게 하였다. /연행9-176/ 문연지미산(文淵之米山) : 마원(馬援)이 쌀을 가지고 만들어 보였다는 산천(山川) 및 전진(戰陣)에 관한 모형. 문연은 마원의 자(字). 마원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용장(勇將)으로, 광무가 효(?)를 칠 때 쌀을 가지고 산천의 형세 및 전진의 묘형을 가지고 작전을 설명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함. 《後漢書 馬援傳》 /해행8-201/ 문옹(文翁) : 한(漢) 나라 경제(景帝) 때의 여강(廬江) 사람. 촉(蜀) 땅의 군수가 됨에 성도(成都) 시장 가운데에 학관(學官)을 설치하여 입학자는 요역을 면제하고 성적이 우수한 자는 군현의 관리로 삼았다. 촉군(蜀郡)이 이에 문풍이 크게 떨쳐지고 교화가 크게 일어났다고 한다. 이로써 문옹은 어진 관리를 칭송하는 전고로 많이 사용된다. 《漢書 卷89 循吏 文翁傳》 문왕(文王)을 …… 백성 : 맹자가 “문왕이 출현하기를 기다린 뒤에 흥기하는 자는 평범한 백성들이니, 호걸의 선비는 비록 문왕이 없더라도 흥기한다.” 하였다. 《孟子 盡心 上》 〔월사집〕 문왕(文王)의 경지(敬止) : 《시경》 대아 문왕편에 “목목한 문왕이여, 계속하여 빛나고 경건하시도다.[穆穆文王 於緝熙敬止]”라고 한 말이 있는데 《대학》의 지어지선(止於至善)을 풀이한 전(傳)에서 이를 인용하여 부연한 바가 있음. 문왕우어어조(文王遇於漁釣) : 주 문왕(周文王)이 수렵을 갈 때 좋은 보필을 만날 점을 얻었는데, 위수(渭水)의 북쪽에서 낚시질하고 있는 강 태공(姜太公)을 만났다. 《史記 齊太公世家》 /삼봉 2-227/ 문왕정(文王鼎) : 검은 산화동(酸化銅)으로 만든 화로. 주 문왕(周文王)이 처음 만들었다고 해서 그렇게 부름. /연행5-214/ 문왕지사인(文王之四人) : 문왕을 도와 주 나라를 세운 네 신하. 괵숙(?叔)·굉요(?夭)·산의생(散宜生)·태전(泰顚)·남궁괄(南宮括) 5사람이었으나, 괵숙이 먼저 죽었으므로 4인이 되었다. /삼봉1-441/ 문왕팔괘(文王八卦) : 문왕 팔괘(文王八卦)는 인위적인 것을 상징한 것으로서 우선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로 양분(兩分)하고, 건(乾)은 부(父)요. 곤(坤)은 모(母)를 토대로 하고 있다. 건(乾)으로부터 진·감·간(震坎艮)의 3괘가 생하는데, 그 중 진(震)은 건(乾)의 초효(初爻)를 얻어서 장남(長男)이 되고, 감(坎))은 건(乾)의 중효(中爻)를 얻어서 중남(中男)이 되고, 간(艮)은 건(乾)의 상효(上爻)를 얻어서 소남(小男)이 된다고 하였다. 곤(坤)으로부터 모성(母性)을 이루어 손(巽)은 곤(坤)의 초효(初爻)를 얻어서 장녀(長女)가 되고, 이(?)는 곤(坤)의 중효(中爻)를 얻어 중녀(中女)가 되고 태(兌)는 곤(坤)의 상효(上爻)를 얻어서 소녀(少女)가 된다고 하였다. 《周易 文王八卦 次序 6面》 /하곡2-342/ 문외(門外) : 여기서는 서울의 4대문(大門) 밖을 가리킨다. /중종실록43/ 문원(文苑) : 예문관(藝文館)을 말함. /연려실기술 31 7-124/ 문원(文園)은 …… 해주니 : 문원은 소갈증을 앓았던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월사 자신을 뜻한다. 〔월사집〕 문원(文園)의 …… 달래주는 듯 : 귤의 신 맛이 갈증을 달래준다는 뜻이다.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효문원령(孝文園令)을 역임했기 때문에 문원(文園)이라 일컬는다. 그가 만년(晩年)에 소갈증(消渴症)을 앓았다 한다. 〔월사집〕 문원(文園)의 소갈증 : 소갈증은 늘 갈증을 느끼는 병으로 오늘날의 당뇨와 같은 것이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효문원령(孝文園令)을 역임했기 때문에 문원(文園)이라 일컬는다. 그가 만년(晩年)에 소갈증(消渴症)을 앓았다 한다. 〔월사집〕 문원병(文園病) : 한(漢)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효문원 영(孝文園令)에 임명되었으므로 문원이라고 불렀다. 그는 소갈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무릉(茂陵)에서 살다가 죽었다. 《史記 司馬相如傳》 문유(門?) : 문에 거는 휘장. 푸른 비단 3폭인데, 위에 거는 고리가 있어 횡목(橫木)을 꿰도록 되어 있다. 궁실 안에서 부인들이 가리개로 쓰던 물건이다. ○ 門?之制 靑絹三幅 上有提? 而橫木貫之 狀如酒? 盖宮室之中 婦人用以映蔽之具也 《高麗圖經 卷二十八 供張》(정광호) 문음(門蔭)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부조(父祖)의 공덕(功德)에 의해 얻은 벼슬. 공신(功臣) 또는 당상관의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채용하는 것인데, 이에 대한 간단한 등용 시험은 매년 정월에 있음. /선조실록 28/ 문인(文引) : 타고장을 출입하는 사람이나 타고장을 왕래하며 행상하는 상인에게 거주지 관처에서 발행하던 통행증. /명종실록13/ 문인전(聞人詮) : 자는 방정(邦正), 여요(餘姚) 사람으로 외형(外兄)인 왕수인(王守仁)을 따라서 공부했다. 가정 연간에 진사가 되었고 어사가 되어서는 산해관(山海關)을 순시하여 성과 보를 4만 길이나 수축했다. /연행1-396/ 문장 재주 : 원문의 ‘생화(生華)’를 번역한 말이다.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 이태백(李太白)이 소시에 평소 사용하는 붓머리에 꽃이 핀 것을 꿈꾼 뒤로부터 문학적 재주가 더욱 드러나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고 한 것을 원용한 말이다. 문장검(文章劒) : 안동의 천전(川前) 의성 김씨 문중에 전하는 보검(寶劒). 본명은 창포검(菖蒲劒)이었음. 청계(靑溪) 김진(金璡 ; 1500~1580)이 자손들의 학문을 권장하는 뜻으로 문장검과 함께 옥적(玉笛) 문장답(文章沓)을 학문이 성취된 자손에게 주어서 전하게 했는데, 이것은 손자 운천(雲川) 그리고 운천의 손자 경와(敬窩)에게로 전해졌음. 문장은 …… 노하리라 : 문장이 매우 뛰어나 천지창조의 기운에 참여할 정도라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 <봉선유소부신화산수장가(奉先劉少府新?山水障歌)>에 “원기(元氣)가 축축하여 병풍이 젖어드니, 진제(眞帝)가 올라가 상소하여 하늘이 울어서라네. [元氣淋?障猶濕 眞宰上訴天應泣]”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문장은 …… 법 : 미상(未詳). 앞 시에서 병중(病中)이라 한 것으로 보아, 기(氣)가 충실해야 좋은 문장을 지을 수 있는 법인데 병으로 원기를 소진했다는 뜻인 듯하다. 〔용재집〕 문장을 육정(六丁)에 부쳤어라 : 문장이 탁월하였음을 뜻한다. 한유(韓愈)의 조장적(調張籍)이란 시에 “선관이 육정 신장(神將)에게 명령하여 우레와 번개 타고 내려와 이백과 같은 문장을 데려가게 하였네.[仙官勅六丁 雷電下取將]” 하였다. 〔월사집〕 문점(文點) : 청 나라 사람. 자는 여야(與也), 호는 남운산초(南雲山樵). 시문(詩文)과 서화에 두루 능하였다. /완당집3/ 문정(問鼎) :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빼앗는다는 뜻. 춘추 시대 초(楚) 나라가 육혼(陸渾)을 치면서 주(周) 나라의 국경에서 사열식을 하였는데, 그 때 주 나라를 취할 뜻이 있어서 우(禹) 임금이 제작했다는 구정(九鼎)에 대해 물었다는 데서 연유된 말. 《春秋左氏傳 宣公 三年條》 문정(文正) : 송 나라 왕단(王旦)의 시호. 장사덕(張師德)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효우 근신(孝友謹愼)하여 가법(家法)이 있었고 세도가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찍이 왕단이 한 관료에게, “내가 평소 임금에게, ‘장사덕은 명문의 자제로 선비의 조행이 있다.’고 말했는데, 뜻밖에 나를 두 번이나 찾아와서 장원 급제했으니, 참으로 가석한 일이다. 영화란 운명에 있으므로 조용히 기다려야 하는 것인데, 만약 지레 진출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하였음. /성호5-325/ 문정(文定)과 찬녀(纘女) : 문정은 나라의 혼례(婚禮)에 있어 길일(吉日)을 점쳐 납폐(納幣)를 행하고 앞으로의 상서(祥瑞)를 정하는 일을 이르는 말. 즉 혼인을 정한다는 뜻. 찬녀는 주 문왕(周文王)의 모후(母后)로 성덕(聖德)이 있었던 태임(太任)을 이을 만한 여인(女人)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주 문왕의 비(妃) 태사(太?)를 말한다. 즉 며느리를 맞는다는 뜻. 《詩經 大雅 大明》 문정공(文正公) : 조광조(趙光祖 : 1482~1519)의 시호. 자는 효직(孝直)이고 호는 정암(靜菴)이며 본관은 한양(漢陽). 14세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 성리학(性理學)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學統)을 이어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로 중종(中宗)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훈구파(勳舊派)인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무함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선조 초기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정왕후(文定王后) : 조선조 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인 윤씨(尹氏)를 가리킴.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윤지임(尹之任)의 딸. 1545년에 인종(仁宗)이 승하하고 자기가 낳은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는데, 친정 아우인 윤원형(尹元衡)을 시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대윤(大尹) 일파를 제거하고 처벌 정치를 하였음. /선조실록8/ 문제(文帝)·경제(景帝) : 모두 전한의 황제로 절검하고, 비방하고, 비방이나 요언(妖言)을 물리쳐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린 현군이다. 《漢書 卷四 文帝紀 卷五 景帝紀》 /동사5-144/ 문제(文帝)1 : 180~BC 157. 전한(前漢)의 제 5대 임금 유항(劉恒) 묘호 태종(太宗). 고조의 둘째아들. 가의(賈誼)는 문제의 신임을 받은 문신(文臣)으로 유학(儒學)과 오행설(五行說)에 입각한 새 제도를 역설했음. 여씨(呂氏)의 난이 평정된 후 태위(太尉)주발(周勃), 승상 진평(陳平)등 중신의 옹립으로 즉위하였다. /중종실록 42/ 문제(文帝)2: 魏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220~226). 자 子桓. 시호 文帝. 曹操의 장자. 성명 曹丕. 漢나라의 헌제를 옹립하고 華北을 평정한 조조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으나, 조비는 헌제에게서 양위받는 형식으로 황제가 되어 도읍을 뤄양[洛陽]에 두고, 국호를 魏라 하였다. 즉위 후 漢나라의 제도를 개혁하고 九品官人法을 시행하여 위나라의 세력을 증강시킴으로써 吳와 蜀漢과 대항하였다. 동생 曹植과 함께 당대의 유수한 文人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문학을 장려하는 한편,「典論」「詩賦」등 100여 편을 저술하였다. 문제애백금(文帝愛百金) → 백금(百金) 문조(文晁) : 곡 문조(谷文晁)인데 그림을 잘 그렸음. /완당집3/ 문조(文藻) : 사채(詞彩), 문채(文彩)를 말함. 본문에서는 농암의 시를 두고 일컬음. 문종(文種) → 종(種) 문중자(文中子) : 왕통(王通)은 수(隋) 나라 용문(龍門) 사람인데, 자는 중엄(仲淹)이다. 어려서부터 독학(篤學)하였고, 일찍이 장안(長安)에 노닐면서 태평(太平)에 대한 십이책(十二策)을 아뢰었으나, 그 계책이 쓰이지 못할 것을 알고 하분(河汾)에 물러나 살면서 사람을 교수하여 수업한 자가 1천 명이나 되었다. 자주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죽으니 문인들이 사시(私諡)를 문중자(文中子)라 일컬었다. /삼봉집1/ 문중자(文中子) : 왕통(王通)의 시호. 알의 주 ‘왕통’ 참조. 문진(問津)1 : 나루가 있는 곳을 물음. 전하여 학문의 문로(門路)를 가르쳐 주기를 청하는 것. /면암1-37/ 문진(問津)2 : 대성(大聖)은 공자를 말하는데, 나루를 물었다고 하는 것은 공자가 당시의 은자인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는 곳을 지나면서 제자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를 묻게 한 일을 인용한 것이다. 《論語 微子》 문창(文暢) : 당(唐) 나라 정원(貞元) 때의 승려 이름. /여한 48/ 문창(文昌)1 : 문창대(文昌臺) 또는 문창성(文昌省)이라 하여 상서성(尙書省)의 이칭으로 쓰인다. 〔월사집〕 문창(文昌)2 : 북두칠성(北斗七星) 가운데의 첫째 별 이름. /성호8-446/ 문창(文昌)과 녹사(錄事) : 문창은 최치원(崔致遠)이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기 때문에 그를 가리킨 것이며, 녹사는 관명이나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창사(文昌師) : 당나라 고승의 법호이다. 한유(韓愈)가 일찍이 그를 보내면서 지어준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에 의하면, 그는 문장 짓기를 매우 좋아하여 천하를 두루 유람할 적에 길을 떠나게 되면 그때마다 반드시 사대부들에게 요청하여 자기가 뜻한 바를 시가로써 읊조려주기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한유가 본 문장을 전하며 유가의 도가 아니라 불교의 설로써 송서(送序)를 써 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유가의 도의 훌륭함을 설파하였다.《古文眞寶 後集》 /양촌3-56/ 문창성(文昌星) …… 비추리라 : 문창성은 문운(文運)을 맡은 별로,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여섯 번째 별이며, 노인성(老人星)은 사람의 수명을 맡은 별로, 남극성(南極星)을 가리킨다. 문창진군(文昌眞君) : 문창성(文昌星)을 상징한 화상. 문창부(文昌府)를 맡았다는 귀신 이름. 문창제군(文昌帝君)이라 하기도 함. 이는 곧 괴성(魁星)인데, 사람의 녹적(祿籍)이나 문장(文章)을 맡은 신(神). 과거(科擧)가 있는 해 같은 때에는 특히 수험자(受驗者)들이 신봉하였음. /연행4/135/ 문창후(文昌侯) : 최치원의 시호로 호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고 하였다. 12세 때 당(唐) 나라에 들어가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격문을 써서 이름을 날렸으며, 28세 때에 귀국하여 진성왕(眞聖王) 8년에 아찬(阿飡)의 벼슬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은거한 신라 말기의 대학자였다. /성호1-227/ 문천상(文天祥) : 송 나라 충신. 자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 신국공(信國公)에 봉해졌음. 원 나라 장군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여 3년 동안 연옥(燕獄)에 갇혀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죽음을 당했음. 《宋史》 418. 문천상(文天祥)의 충성 : 송나라 최후의 시기에 좌승상(左丞相)을 지냈다. 강서(江西) 제형(提刑)으로 있을 적에 가산(家産)을 모두 들여 군비(軍費)를 마련한 다음 1만여 명의 근왕병을 모집해서 출정했는데, 급기야 원(元)나라 장수 장홍범(張弘範)에게 붙잡혀 연경(燕京)으로 끌려갔다. 3년 동안이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절조를 지키다 죽었으므로, 원 세조(元世祖) 역시 탄복하며 ‘진남자(眞男子)’라고 일컬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宋史 卷418》??? 문천지우(問喘之憂) : 한 무제(漢武帝)때 사람 병길(丙吉)의 고사. 병길이 재상으로 있을 때 길을 가는데 서로 싸우다가 죽은 백성의 시체가 있어도 까닭을 묻지 않더니, 소가 헐떡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보자, “소가 몇 리나 걸었느냐?”고 물었다. 동행하던 관리가 이상하게 여겨 묻자 병길은 “싸우다 죽은 시체는 장안령(長安令)이나 경조윤(京兆尹)의 소관이지만 소가 헐떡거리는 것은, 아직 때가 더울 때도 아닌데 숨을 헐떡거리니 이는 기후가 조회를 잃은 것이다. 재상은 음양을 조화해야 하는 직임인데 어찌 걱정하지 않겠느냐?” 했다. 《漢書 卷七十四 丙吉傳》 /서애 1-132/ 문치(文致) : 꾸며 이룸. 문폐(文陛) : 궁궐의 섬돌, 즉 조정을 가리키는 말. 문포(免布) : 상례(喪禮)에 관을 벗고 베로 두발(頭髮)을 싸매는 것. /연행 6-243/ 문한(文翰)의 관서 :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규장각(奎章閣) 등의 관서에서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벼슬을 말한다. 문행지교(文行之敎) : 공문(孔門)의 4대 강령(綱領)인 문(文)·행(行)·충(忠)·신(信)을 말한다. 《論語 述而》 /명종실록14/ 문헌(文獻) : 일두(一?) 정여창(鄭汝昌 : 1450-1504))의 시호, 자는 백욱(伯?), 관향은 하동(河東)으로 함양(咸陽)에 살았음.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죽었음.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음. 문헌의 …… 보내오고 : 감사(監司)가 각 고을을 순시하면서 민정을 살피는 것을 뜻한다. 고대에 지방관이 민요를 채집하여 바쳤던 고사를 사용한 것이다. 〔월사집〕 문헌통고(文獻通考) : 원(元) 나라 마단림(馬端臨)의 편서(編書)로서,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을 증보하여 송대(宋代)까지의 제도와 문현을 총괄한 책. /성호5-87/ 문헌통고(文獻通考): 馬端臨이 편찬한 것으로 348권. 상고시대부터 南宋 寧宗 嘉定年間(1208-24)까지의 典章制度를 田賦, 錢幣, 戶口, 職役, 學校, 職官, 宗廟, 樂, 兵, 刑 등 24류로 나누어 기재했다. 杜佑의 通典을 근거로 송대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첨가하여 증보 형식으로 펴냈다. 인용한 고대의 經史를 文이라 하고, 학자들의 의론을 獻이라 하여 이를 서명으로 삼았다고 자서에서 적고 있다. 문현상(文絃商) : 이는 억지로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의 5음에 배비(排比)한 것이고, 실제(文絃 : 濁黃鍾, 游絃 : 仲呂, 大絃 : 無射, ?上淸 : 林鍾, ??淸 : 林鍾)와는 다른 듯하다. 또 5음을 12률에 맞추어 보면 궁은 황종, 상은 대려, 각은 고선, 치는 임종, 우는 남려이다. /오주17-103/ 문형(文衡) : 조선조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의 별칭. 문화전(文華殿) : 명(明) 나라 궁전으로, 등극(登極), 진향(進香) 등의 큰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였다. 〔월사집〕 문환(文煥) : 여문환(呂文煥). 송나라 말년의 사람으로 원나라에 항복하였음. 문황제(文皇帝) : 문황제는 명(明) 나라 제 3대 황제인 성조(成祖)임. 성조는 영락(永樂) 원년(1403)에 북평(北平)을 북평(北平)이라 하고, 영락 18년(1420)에 북경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선조실록 32/ 문회(文會) : 《論語 顔淵》의 “군자는 문(文)으로써 벗을 모은다.[君子以文會友]”에서 나온 것으로 문인의 모임을 말함. /고봉집2/ 문희(文僖) : 고려말의 명현(名賢) 우탁(禹倬 : 1263~1342)을 가리킨다. 그의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 호는 역동(易東)이고 시호가 문희이다. 성균 좨주(成均祭酒)로 치사(致仕)하였고, 정주학(程朱學)에 조예가 있었다. 〔용재집〕 문희(聞羲) :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聞慶)의 옛 이름. 문희(聞喜) 잔치 : 문희는 과거에 급제한 기쁜 소식을 들었다는 뜻으로, 진사(進士)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이른다. 문희묘(文禧廟) :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 /만기2/》 문희연(聞喜宴)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위하여 나라에서 내리는 잔치. 송 나라 때 이러한 제도가 생겼음. 묻노니 …… 번인고 : 작자 자신을 비탄한 말로, 벼슬길에 오래 묶여서 한가할 때가 없이 분주함을 말하고 있다. 〔용재집〕 묻노니 …… 어떠한가 : 월사가 있는 곳으로 와서 흰 깁을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는 편이 비가 온다고 집안에서 낮잠이나 자고 있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뜻이다. 〔월사집〕 묻노니 …… 오느니 : 진(晉) 나라 뇌환(雷煥)이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보검을 얻어 그 중 하나를 장화에게 주었는데 후에 장화가 주살(誅殺) 당하자 그 칼의 소재를 잃었다. 뇌환이 죽고 그 아들이 보검을 가지고 연평진을 지날 때 칼이 갑자기 손에서 벗어나 물에 떨어지기에 사람을 시켜 물 속에 들거가 찾게 하니, 두 마리 용만이 서리어 있고 물결이 세차게 일 뿐 보검은 보이지 않았다 《晉書 張華傳》 여기서는 검수관(劒水館) 곁에 흐르는 물의 이름이 검수(劒水)였기에 이 고사를 차용하여 희롱조로 말한 듯하다. 〔용재집〕 물 위를 걷는 버선 : 능파선자(凌波仙子)라는 물의 여신(女神)이 땅 위를 가듯이 물 위를 사뿐히 걸어가는 것을 형용하였다. 송(宋) 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수선화(水仙花)에 “능파선자가 물 위를 사뿐히 걷는 버선이여.[凌波仙子生塵襪]” 하였다. 〔월사집〕 물 위에 뜬 도경(桃梗) : 도경은 복숭아 나무로 만든 인형. 《전국책》 제책(齊策)에, “토우(土偶)가 도경에게 말하기를, ‘지금 그대는 동국(東國)의 도경으로 나무를 깍아서 사람꼴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비가 내려 치수(淄水)가 불어 그대를 떠내려 보내니, 그대는 표표히 떠서 장차 어디로 가려느냐?’ 하였다.” 한 데서 온 말로, 정처없이 표류하는 것을 비유한다. 〔용재집〕 물 위에 뜬 도경(桃梗) : 도경은 복숭아 나무로 만든 인형으로 정처없이 표류함을 뜻한다. 2권 ‘무진정(無盡亭)’ 주(註) 참조. 〔용재집〕 물간사전(勿揀赦前) : 사령(赦令)이 내리기 전에 지은 죄는 사령이 내리면 사면(赦免)되는 것이 상례(常例)이나 특수한 죄에 대하여는 사령 이전에 지은 것이라도 사면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 /중종실록37/ 물감 먹은 실 : 실을 염색하는 것을 보고 묵자(墨子)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푸른 물을 들이면 푸르게 되고, 누른 물을 들이면 누르게 되니, 넣는 데에 따라 그 색이 변하는구나.” 하였다. 《墨子 所染》 사람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심성이 바뀌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용재집〕 물개(物皆) : 《맹자》 양 혜왕 장구 (章句) 상(上)에 나오는 말로서, 물건의 경중과 장단은 저울에 달거나 자로 재어야 정확히 알 수 있듯이, 사람 마음의 사물에 대한 반응도 천리(天理)와 당위(當爲)의 법칙에 의거하여 그 경중 장단을 가름해야 한다는 뜻임. 물결 보는 법 :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물을 구경하는 데에 방도가 있으니, 반드시 그 급한 물결을 보아야 한다.[觀水有術 必觀其瀾]”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여울물을 보면 그 근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도(道)의 근본이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물고기 …… 즐거움이지 :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강물 위 다리를 거닐다가 장자가, “피라미가 조용히 노니니 이는 물고기의 즐거움이로다.” 하니, 혜자가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였다. 이에 장자가 “그대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줄 어찌 아는가?” 하니, 혜자가 “나는 그대가 아니므로 진실로 그대를 알지 못하니, 그대는 물고기가 아니므로 그대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은 분명하다.” 하였다. 《莊子 秋水》 여기서는 물고기의 자득(自得)한 모습을 보는 송상공 역시 자득하여, 물고기는 물고기대로 즐겁고 송상공의 송상공대로 즐거워야 진실로 자득한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용재집〕 물고기 꼬리 붉어진 듯 : 극도로 피로함을 이른다. 《시경(詩經) 국풍(國風) 주남(周南) 여분(汝墳)》에 “방어의 꼬리가 붉어진다〔?魚?尾〕” 하였는데, 그 주(註)에 ‘물고기는 피로하면 꼬리가 붉어진다’ 하였다. 물고기 나물 : 후한(後漢) 오군(吳郡) 사람인 장한(張翰)이 낙양(洛陽)에서 벼슬하다가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고사를 차용하였다. 《晉書 文苑傳》 〔용재집〕 물고기는 …… 접었고 : 옥와(玉瓦)는 옥처럼 아름다운 기와를 가리킨 것으로 기왓골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이어졌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물고기의 즐거움 : 1권 ‘여원(礪原) 송상공(宋相公)이 시로 읊은 화어화선첩(畵魚畵仙帖)에 제(題)하다’ 주(註) ‘물고기 …… 즐거움이지’ 참조. 여기서는 정운경의 자득한 즐거움을 뜻한다. 〔용재집〕 물기(勿旗) : 물기(勿旗)는 곧 사물(四勿)의 깃대[旗]라는 뜻이다. 《論語 顔淵》에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하였으므로, 이 물(勿)자로 기를 만들어 세운다는 말이다. /청장1-95/ 물든 실을 슬퍼했고 : 묵자(墨子)가 실을 염색하는 사람을 보고 탄식하기를, “푸른 물을 들이면 푸르게 되고, 누른 물을 들이면 누르게 되니, 넣는 곳에 따라 그 색이 변하는구나.” 한 것을 차용한 것으로, 사람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심성이 바뀌는 것을 슬퍼한다는 뜻이다. 《墨子 所染》 〔용재집〕 물러가는 익수(?首) 따르지만 : 익(?)은 백로 비슷한 새로 바람에 잘 견딘다고 하여, 옛날에는 뱃머리에 그 모양을 새기거나 그려 놓았다. 시 짓는 재능이 퇴보한다는 뜻한다. 〔월사집〕 물리소지(物理小識) : 명(明) 때의 방이지(方以智)가 지은 책. 처음에는 총론을 기술하고 그 다음엔 15문(門)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박물지(博物志)》·《물류상감지(物類相感志)》를 바탕으로 하여 물성(物性)의 원인을 미루어 밝히고 있다. 12권 /오주연문17/ 물망물조(勿忘勿助) : 孟子에 있는 말인데 <마음 공부를 하는 데로> 마음에 잊지도 말며 助長하지도 말아야 한다.[勿忘勿助] 비유하면 잊는[忘] 것은 농부가 밭을 돌보지 않는 것이며, 조장하는 것은 밭에 자라는 곡식을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하여 고갱이를 뽑아 늘어뜨리는 것[?苗]과 같다. 어느 농부가 들에 가서 자기 밭에 자라는 곡식의 고갱이를 뽑아 올리고 집에 와서 자랑하므로, 아들이 들에 가 보니 곡식은 말라 죽어 있었다고 한다. /퇴계집16~18 1-295/ 물살 …… 틈타야지 : 물살이 조금 약해지면 그 틈을 놓치지 말로 물을 건너 망해정(望海亭)에 오르자는 것이다. 〔월사집〕 물색 단자(物色單子) : 물색은 죄수나 찾는 사람의 인상(人相)을 그린 것. 즉 지금의 몽타지와 같은 것이다. 단자는 그에 대한 내용을 간단히 적은 문서. /명종실록1/ 물색(物色)은 …… 더하누나 :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면 시를 지어야 하므로 빚이 된다는 것이며, 중국 사신이 이 한강 가의 경치를 시로 읊음으로 해서 경치가 더욱 빛을 더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월사집〕 물색(物色)은 …… 똑같구나 : 물색은 생활하는 풍경을 이르며, 위야(魏野)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자가 중선(仲先)인데 시읊는 것을 좋아하고 명예를 탐하지 아니하여 촉(蜀)땅에 은거하며 초당거사(草堂居士)라 스스로 호하였다. 물색(物色)을 …… 있어서리니 : 아름다운 봄 경치가 남아 있는 것은 그대가 와서 시로 읊어주기를 기다려서라는 뜻이다. 〔월사집〕 물색은 …… 다르구나 : 예전에 왔을 때는 꽃이 피고 초목이 무성하더니 지금은 아름다운 설경(雪景)이 펼쳐졌음을 뜻한다. 〔월사집〕 물색지방(物色之訪) : 정탐해서 찾음. 《後漢書 嚴光傳》의 “광(光)이 숨고 나오지 않자. 제는 그의 어짊을 생각하여 그의 모습을 그려서 찾게 하였다.”라는 대목에서 온 말. 물시원리위거취(勿視元履爲去就) : 건도(乾道) 4년에 위원리(魏元履)가 태학 교수로써 재상의 미움을 받아 태주(台州)교수로 좌천되었는데 선생이 이 일로 인하여 극력 사직을 청하였기 때문에 왕공이 이 말을 하였음. 물약유희(勿藥有喜) : 역경(易經)에 “무망(无妄)한 병은 약을 쓰지 않고도 낫는 기쁨이 있다.”[无妄之疾 勿藥有喜]는 말이 있다. 무망은 진실하고 속임이 없다는 뜻이다. /대동10-11/ 물에 …… 아니지 : 타락은 우유를 정제해서 만든 음식으로, 오늘날의 치즈와 같은 것이다. 타락을 물에 넣고 끓여서 짐 수레를 끄는 소에게 먹인다는 뜻이다. 〔용재집〕 물원(物原) : 《물원》이란 책은 명의 나기(羅?)가 저술한 1권본이 속지부속재총서 2집에 수록되었다. /연행1-530/ 물헌웅씨(勿軒熊氏) : 송나라 건양(建陽) 사람. 이름은 화(禾), 자는거비(去非), 물헌은 호. 또한 퇴재(退齋)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음. 나라가 망한 뒤에는 고향에 돌아와 오봉서당(鰲峰書堂)을 지어 학문을 강론하니 문하생이 매우 많았음. 《송원학안(宋元學案)》 64. 뭇 사람 …… 필요하리 : 중구성호(衆口成虎), 중구삭금(衆口?金)이란 성어가있듯이, 많은 사람이 주장하면 사실무근한 것도 사실처럼 되고 터무니없는 비방도 먹혀 들게 마련인데, 이러한 때 사간원(司諫院) 관원들의 직간(直諫)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용재집〕 뭇 소리들 …… 보았지 : 월사 자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시는 모두 하찮고 상대방인 부사의 시는 매우 훌륭하다는 뜻이다. 경오(鯨鰲)는 고래와 바다 속에서 삼신산(三神山)을 떠받치고 있다는 큰 자라이다. 두보(杜甫)의 희위육절(戱爲六節)의 넷째 수에 교묘한 수사에만 치중하는 당시의 경박한 문풍(文風)을 비판하면서 “혹 비취새가 난초 위에 앉은 곳은 볼지라도 푸른 바다에서 고래를 끌어올리지는 못하지.[或看翡翠蘭苕上 未?鯨魚碧海中]” 하였다. 〔월사집〕 뭇 아름다움 : 남조(南朝) 사령운(謝靈運)의 의위태자업중시집서(擬魏太子?中詩集序)에 “천하에 좋은 날[良辰] · 아름다운 경치[美景] · 기쁜 마음[賞心] · 즐거운 일[樂事] 네 가지가 다 갖춰지기는 어렵다.” 하였고, 왕발(王勃)의 등왕각서(?王閣序)에 “네 가지 아름다움[四美]이 갖춰졌다.” 하였다. 여기서는 이러한 뜻으로 쓰였다. 〔용재집〕 뭇별들 …… 돌아가고 : 공자가 일찍이 “정사를 덕으로 하는 것은 비유하면 북극성(北極星)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뭇 별들이 그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미(靡) : 하(夏) 나라의 구신(舊臣)으로 한착(寒捉)을 멸하고 소강(小康)을 옹립하여 하 나라의 통서(統緖)를 회복시켜 중흥하게 한 사람. /선조실록28/ 미가서화(米家書畵) : 송 나라 명필 미불(米?)이 자기의 서화와 고서화를 배에 싣고 강에 떠다녔으므로 황정견은 시를 지어주기를 “澄江夜夜虹貫月 定有米家書畵船”이라 하였음. /완당집3/ 미간(微干) → 기자(箕子) 미격(薇檄) : 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조서(詔書). 미견안색(未見顔色) : 《논어》에 나오는 말이나 여기서는 다만 “아직 서로 면식이 없다.” 는 말임. 미고(靡?) : 왕사(王事)를 소홀히 하지 못한다는 뜻. 신하가 멀리 외국이나 외방에 사명을 띠고 나가 직무에 힘쓰고 자기의 수고로움은 돌아볼 겨를이 없음을 말한다. 《詩經 小雅 鹿鳴之什 四牡篇》 /명종실록13/ 미고(靡?)의 시 : 《시경》 소아(小雅) 사무(四牡) 편을 가리킨다. 그 시는 사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라 하는데, “왕사를 견고히 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도다.[王事靡? 不遑啓處]” 하였다. 〔용재집〕 미공비급문(眉公秘?문) : 미공은 명(明) 나라 진 계유(陳繼儒)의 호. 비급문은 그의 저서인데 괴벽하고 비장(秘藏)한 것들을 적었다. 그는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왕세정(王世貞)·동기창(董其昌) 등과 함께 유명하다. 《明史 卷二百九十八 陳繼儒傳》 /청장1-200/ 미기(未紀) : 기(紀)가 못되었다는 말. 기는 곧 12년을 뜻하는 것인데, 이 때가 명종 10년이므로, 12년도 못되었다는 뜻으로 말한 것임. /명종실록9/ 미남궁(米南宮) → 미불(米?) /성호 11-314/ 미남자였던 …… 축타(祝?) : 《논어》 옹야 14장에 공자(孔子)가 “축관(祝官)인 타(?)의 말재주와 송(宋)나라의 조(朝)와 같은 미모(美貌)를 갖고 있지 않으면, 지금 세상에서 환난(患難)을 면하기 어렵다.[子曰 不有祝?之? 而有宋朝之美 難乎免於今之世矣]”라고 하였다. 미노(米老) : 원장은 송 나라 미불(米?)의 자인데 천성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였다. 무위군(無爲軍)을 맡아보게 되어 처음으로 주해(州?)에 들어가자 입석(立石)을 보고 자못 기이하게 여겨 곧 포홀(袍笏)을 가져오라 하여 그 돌에 절하고 늘 석장(石丈)이라 불렀다고 한다. 《燕語》 /완당집3/ 미대(尾大) : 꼬리가 너무 굵으면 흔들지 못한다는 뜻. 《左傳 昭公 十一年》 /서애1-101/ 미대불도(尾大不掉) → 말대필절(末大必折) 미돈(迷豚) : 남에게 대하여 자기 아들을 일컫는 말로서 가돈(家豚)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미락(彌樂) : 조선의 학자인 서사원(徐思遠 : 1550 - 1615)을 말함. 호를 미락재(彌樂齋) 또는 낙재(樂齋)라 하기도 함. 자는 행보(行甫), 관향은 달성(達城). 정한강(鄭寒岡)의 문인이고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에 제향되었음. 저서는 《낙재집(樂齋集)》이 있음. 미랍(未臘) : 미월(未月)과 납월(臘月). 즉 유월과 섣달을 맞춰서 따지는 술수. /성호8-250/ 미랑(薇郞) : 자미랑(紫薇郞). 원래는 중국의 관제에 있어서 중서성(中書省) 사인(舍人)을 일컫는 말이나 여기서는 사간원 정언인 조상치(曺尙治) 자신을 지칭한다. 미원(薇垣)이 사간원의 별칭이므로 그렇게 일컫는 것이다. 미려(尾閭) : 바다 한복판에 있어서 물이 한없이 새는 곳, 그러므로 바닷물은 넘치지 않는다 한다. 《莊子 秋水篇》 경세유표2/ 미련(微連)이 …… 내리고 : 미련은 미상이며 월절(月節)은 달을 그린 깃발로 보인다. 미련함은 …… 즐거워하고 : 영계기(榮啓期)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지족자락(知足自樂)한 은사(隱士)인 바, 공자(孔子)가 무엇을 즐거워하느냐고 묻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첫째의 즐거움이고, 아들이 많은 것이 두 번 째의 즐거움이고, 내 나이 벌써 구십 다섯인 것이 세 번 째의 즐거움이다” 하였는 바, 이 일을 인용하여 작가 자신이 영계기처럼 삶을 즐겁게 살아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미로(渼老) :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을 말함. 자는 백춘(伯春), 관향은 안동(安東). 미루(迷樓) : 궁전 이름. 《古今詩話》에 “수양제(隋煬帝) 때에 새로 궁전을 낙성하고 임금이 나아가 말하기를 ‘진짜 신선으로 하여금 이곳에 놀게 하더라도 스스로 혼미하게 될 것이다.’ 하였으므로 이에 미루라 이름했다.”하였다. /청장1-281/ 미륜(彌綸) : 두루 다스림. 통섭(統攝)하여 다스리는 것을 말함. 미명(彌明) : 형산(衡山)의 도사(道士)인 헌원미명(軒轅彌明)이다. 그가 평소 친분이 있던 진사(進士) 유사복(劉師服)을 방문하였을 때 막 시로 명성이 나기 시작한 교서랑(校書郞) 후희(侯喜)가 밤중에 역시 유사복의 집으로 왔다. 후희는 헌원미명의 용모가 매우 추한 것을 보고 무시한 채 유사복과 시를 담론하고 있었다. 헌원미명이 갑자기 화로에 있는 돌솥[石鼎]을 가리키며 후희에게 “그대가 시를 잘 짓는다니 나와 이것을 제목으로 연구(聯句)를 지어보자.” 하였다. 이리하여 세 사람이 연구를 짓기 시작하여 헌원미명은 갈수록 신기한 싯구를 지었는데 유사복과 후희 두 사람은 문사(文思)가 고갈되어 굴복하고는 “스승님은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저희는 복종하오니 원컨대 제자로 삼아 주십시오. 감히 다시는 시를 논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韓愈 石鼎聯句序》 헌원미명은 한유(韓愈) 자신을 가탁한 것이라 한다. 〔월사집〕 미무(?蕪) : 향초(香草)로 천궁(川芎) 또는 궁궁이라고도 하며, 일설에는 맥문동(麥門冬)이라 하기도 한다. 미미(靡靡) : 음악 이름. 《사기(史記)》 악서(樂書)에, “陳平公 與衛靈公 置酒施惠之臺 酒? 靈公令師涓 坐師曠傍 援琴鼓之 未終 師曠撫而止之曰 此亡國之音也 不可聽 平公曰 何道出 師曠曰 師延所作也 與紂爲靡靡之樂 武王伐紂 師延東走 自投?水之中 故聞此聲者 國削”이라 하였음. /성호9-31/ 미미(??) : 힘쓰는 모습을 말함. 《시경》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에 “미미하신 문왕이여, 아름다운 성문이 그치지 않네.[??文王 令聞不已]”라는 말이 있음. 미미(??)하게 핍박해 오니 : 미미는 시문(詩文)이나 담론이 매우 흥미진진하여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즉 시문이 매우 뛰어나 상대방을 압박해올 정도라는 뜻이다. 진(晉) 나라 왕몽(王?)이 약관(弱冠)의 사안(謝安)과 만나보고는 그의 담론에 탄복하여 “이 손님은 미미하여 사람을 핍박해오는 듯하구나.” 하였다. 《晋書 謝安傳》 〔월사집〕 미미지음(靡靡之音) : 악곡의 이름. 은(殷) 나라의 악관(樂官) 사연(師涓)이 주왕(紂王)을 위하여 지었는데, 무왕(武王)이 주(紂)를 치매, 사연이 동쪽으로 달아나 복수(?水)에 익사하였음. 춘추 때 위 영공(衛靈公)이 복수 위에서 자다가 밤중에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악관을 시켜 옮겨 쓰게 하였는데 조금 뒤에 시혜대(施惠臺)에 그것을 연주하여 사광이 듣고 정지시키면서 망국의 소리이니 들을 것이 없다 하였음. /성호5-121/ 미발서(未發書) : 《중용》을 말한다. 《중용》 <수장(首章)>에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는 말이 있다. 미발지지(未發之旨) : 미발지중(未發之中)을 말함. 미병(眉屛) : 미병은 미수(眉?) 허목(許穆)과, ……………… 미복(迷復) : 끝까지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면 흉(凶)하다는 말. 《주역(周易)》 복괘(復卦)에 “상륙(上六)은 미복이니 흉하다.”[上六 迷復 凶]하였다. /동사 3/ 미봉 각소관(彌封各所官) : 미봉의 일을 집행하던 각소의 관원을 이름. 미봉이라 함은 과거를 보이는데 응시자와 시관 사이에 친분이 있을까봐 시험지를 교부할 적에 성명을 쓰게 하고는 그 성명 위에 종이를 붙이고 변호를 붙인 다음 도장을 찍어 밀봉하던 일, 그 붙인 것은 방(榜)을 쓸 적에야 개봉했음. 《宋史 選擧志》 /연행5-50/ 미불(米?) : 자는 원장(元章). 호는 해악외사(海嶽外史)·녹문거사(鹿門居士). 세상에서 미양양(米襄陽)·미남궁(米南宮)이라고 일컬음. 그는 서예(書藝)로 유명했음. /성호11-314/ 미산(眉山) :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인 소순(蘇洵)과 그 아들 식(軾) 철(轍)등 소씨(蘇氏)의 본고장으로 보각(譜閣)이란 제각(祭閣)이 있음. 미상(靡常) :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장(文王章)에, “주에 복종하니 천명이 일정하지 않다.”[侯復于周天命靡常]하였다. 즉 상나라 탕의 자손들이 도리어 주 나라에 복종하니, 천명은 일정하지 않다는 말로, 덕을 닦아야 한다고 경계한 것. /중1-228/ 미상. 방호(方壺)가 신선이 시는 방장산(方丈山)을 뜻하는 말이고 보면 홍윤성(洪允成)이 벼슬하기 전 산림에 묻혀 살았음을 뜻하는 듯하다. 〔용재집〕 미생(尾生)과 효기(孝己) : 미생은 춘추 시대 노(魯) 나라 사람.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기다리는데 여자가 오기 전에 물이 불어났다. 그래도 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다리 기둥을 붙잡고 죽었다. 효기는 은 고종(殷高宗)의 태자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선조실록12/ 미생지신(尾生之信) → 미생(尾生)과 효기(孝己) 미성(尾星) : 미수(眉宿)임.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 창룡칠수(蒼龍七宿)의 제육수(第六宿). 별 아홉이 있으며 모두 천갈좌(天蝎座)에 소속됨. /중종실록37/ 미수(眉壽) : 장수한 노인의 눈썹이 길게 빼어난 것에서 유래하여 장수를 비는 말로 쓰임. 시경에 미수만년(眉壽萬年)이란 구절이 있는데, 무수한 수(壽)를 축수한 것임. /세종실록 25-162/ 미숙(美叔) : 미숙은 《조천기(朝天記)》의 저자인 하곡(荷谷) 허봉(許?)의 자이다. 하곡은 《조천기》·연산기행시》외에도 《과강록(過江錄)》이 있고, 그의 시문집인 《하곡집(荷谷集)》이 있으며,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실려 있는 《해동야언(海東野言)》이 있어 널리 읽혔다. 그는 명·선대의 성리학자였던 허엽(許曄)의 아들이며, 그의 이복 형은 성(筬)이었고 균(筠)은 그의 동복 아우였으며, 난설헌(蘭雪軒)은 그의 매씨(妹氏)였다. /연행1-261/ 미신(美新) : 양웅(揚雄)이 큰 유학자(儒學者)로 지조(志操)가 없어서 한(漢) 나라의 역적인 왕망(王莽)이 조정에 벼슬하여 천록각(天錄閣)에서 글을 교정하였고 극진(劇秦) 미신(美新)의 글을 지었는데 미신은 왕망 신(新)은 국호를 찬송한 것이다. /연려실기술18 4-553/ 미앙궁(未央宮) : 한(漢) 나라의 유명(有名)한 궁전(宮殿)으로 한 고조(漢高祖) 때 소하(蕭何)하 지었다. 그 터는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서북쪽에 있음. /중종실록 37/ 미오(?塢) : 후한(後漢)의 간신 동탁(董卓)을 가리킨 말. 그는 미후(?侯)에 봉해진 후 임금을 폐하고 황후를 죽였다. /서애집2/ 미옹(眉翁)의 …… 능가하니 : 미수(眉?) 허목(許穆)의 글이 선진(先秦) 시대의 글보다 훌륭하다는 말이다. 선진은 선진고문(先秦古文)으로, 한(漢) 나라 이전의 고문을 가리킨다. 미우(眉宇) : 남의 얼굴을 높여 부르는 말. 지미(芝眉) 또는 지우(芝宇)라 하기도 함. 당(唐) 나라 원덕수(元德秀)의 자가 자지(紫芝)인데, 방관(房琯)이 매양 이를 보고 탄식하여 《자지(紫芝)의 얼굴을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명리(名利)의 마음이 다하게 한다.[見紫芝眉宇 使人名利之心都盡]》라고 한 말에서 유래함. 《唐書》 <元德秀傳>. 미원(薇垣) : 미원은 자미원(紫薇垣)의 약칭으로, 중서성(中書省)을 기리키는데, 조선에서는 사간원(司諫院)을 달리 이르는 말로 쓰였다. 미원(彌遠) : 송(宋) 나라 간신(奸臣). 황태자(皇太子)를 모함하여 낮추어 제왕(濟王)으로 봉하게 하였음. /대동10-15/ 미원(薇垣) : 조선조 사간원(司諫院)의 별칭. 미원(薇垣) : 추요(樞要)의 관서(官署)를 뜻함. 당 현종(唐玄宗) 때에 중서성(中書省)을 자미성(紫微省)이라 고쳐 부른 데에 말미암았으며, 포정사사(布政使司)의 이칭(異稱)으로도 씀. /연행6-446/ 미원계축시(薇院契軸詩) : 미원(薇垣)은 조선조에 사간원(司諫院)의 별칭이다. 이 시는 7언 율시의 형식으로 된 것인데 권일(卷一)에 <미원계회도(薇院契會圖)>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미원장(米元章) : 악왕은 남송(南宋)의 명장(名將) 악비(岳飛)의 봉작(封爵) /연행1-118/ 미원현(迷原縣) : 미원현은 경기도 양근(楊根)에 있는 고을. 고려 공민왕 5년에 국사(國師) 보우(普愚)가 군(郡)의 미원장에 우거하고 있다 하여 장(莊)을 승격시켜 현으로 만들었다. /완당집3/ 미월(彌月) : 달이 참. 아기를 배에 만 10개월 된 것, 또는 생후(生後) 만 1개월 된 것을 말함인데, 여기에서는 곧 생월(生月)을 뜻한다. /양촌집3/ 미유(未有) : 유미(有未)의 잘못임. 미인 : 달을 말함. 詩經 ?風 簡兮篇에 山有榛 산에는 개암이 있고 ?有? 습지에는 감초가 있도다. 云誰之思 누구를 생각하는고 西方美人 서방의 미인이로다. 라고 한 시에 근거를 둔 말임. 미인의 …… 빛나 : 진(?)은 가채와 같은 올림머리이다. 머릿결이 윤이 나고 고와 거울처럼 빛난다는 말이다. 〈서정부(西征賦)〉에 “위녀의 검은 머리칼 거울처럼 빛난다[衛?髮以光鑑]” 하였다. 미인초(美人蕉) : 《법화경(法華經)》에 세존(世尊)이 대신력(大神力)을 보인 것은 광장설과 청정법신(淸淨法身)에서 나왔다 했음. 그래서 소식의 증동림장로시(贈東林長老詩)에 “溪聲便是廣長舌 山色寧非淸淨身”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미인초를 광장설에 비유하고 나한솔을 청정신에 비유하였음. /완당집3/ 미자(微子) → 기자(箕子) 미자(彌子)도 …… 잊었다지 : 미자는 춘추시대 위(衛) 나라 영공(靈公)의 신하 미자하(彌子瑕)이다. 그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속여서 임금의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당시 위 나라의 법률에 의하면 임금의 수레를 훔쳐 탄 사람은 발뒤꿈치를 베는 월형(?刑)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미자가 자기 수레를 몰래 타고 갔다는 말을 들은 영공은 “효성스럽구나. 어머니를 위하느라 월형 당하는 것도 잊다니.” 하였다. 〔용재집〕 미장(迷藏) : 착미장(捉迷藏). 어린 아이들의 유희의 일종인데,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붙잡는 놀이. 미지(微旨) : 반드시 소황으로 법을 삼아야 한다는 미지. 미진국(微塵國) : 세계미진(世界微塵)을 가리킴. 일체(一切)의 인과가 세계미진으로 인해서 성체(成體)한다. /삼봉1-324/ 미친 …… 희롱했나니 : 마존(馬存)의 연사정(燕思亭)이란 시에, “우리들은 본시 미친듯 시 읊는 자이니, 말하노니 계산이여 우리를 기억하지 말라.[我曹本是狂吟客 寄語溪山莫相憶]” 한 구절과 의사(意思)가 흡사하다. 《古文眞寶 前集》 〔용재집〕 미형(彌衡) : 한(漢) 나라의 문인으로 재주를 믿고 오만하여 조조(曹操)를 모욕하고 ?기다 황조(黃祖)에게 의지하여 앵무부(鸚鵡賦)를 지어 칭찬도 받았으나 끝내 황조의 비위를 거슬려 피살되었다. /동문선1-50/ 미호아(米虎兒) : 송 나라 미 우인(米友仁)의 일명임. /완당집3/ 미후(?后) → 양후 민 상국(閔相國) 정중(鼎重) :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송시열의 문인이며 벼슬은 우의정에 이르렀다. 〔월사집〕 민(?) : 중국 오대(五代) 때 10 나라 중의 하나. 왕심지(王審地)가 후량(後梁)에서 민왕(?王)으로 봉해졌는데 연균(延鈞)에 이르러 황제를 자칭하고 나라를 대민(大?)이라 하였음.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지방을 영유(領有)하였었는데, 6대 36년 만에 남당(南唐)에 멸망됨. /연7-163-3/ 민(憫) : 타본에는 망(?)임. 민고(民庫) : 관청의 임시 비용으로 쓰기 위해서 백성으로부터 해마다 곡식과 돈을 거두어서 보관하던 창고. /경세유표1/ 민구이첨(民具爾瞻) : 《詩經 小雅 節南山》의 “혁혁한 태사 윤씨여, 백성이 모두 그대를 쳐다본다.[赫赫師尹 民具爾瞻]”한 데서 온 말인데, 즉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조금만 삼가지 않으면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나라까지 망하게 됨을 경계한 말이다. 이 대문은 《大學 傳十章》에서 인용하였다. /명종실록3/ 민극(民極) : 백성이 지켜야 할 도덕. 민극(民極) → 인극(人極) 민기(閔箕) : 조선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김안국(金安國)의 문인.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당대의 문장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민덕보(閔德輔) : 동년 급제한 민세량(閔世良)의 자가 덕보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석성 현감(石城縣監)을 거쳐 수찬이 되었을 때 우의정 김안로(金安老)의 득세를 비꼬다가 죄를 얻어 곽산으로 유배당하였다. 1546년(명종 1)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서장(書狀)으로 보고하였다. 민둥산에 …… 이르겠는가 : 민둥산에 오른다는 것은 《시경(詩經)》〈위풍(魏風) 척호(陟岵)〉에 “저 민둥산에 올라가 어머니를 바라본다. [陟彼?兮 瞻望母兮〕” 하였는 바, 이 말을 인용하여 어머니를 그리워하여도 만날 수 없음을 탄식한 것이다. 민락(?洛) : 송대(宋代)의 이학을 대표하는 정주학(程朱學)의 발상지를 말함. 민은 민중(?中)으로 주자(朱子)가 강학하던 곳이고, 낙은 낙양(洛陽)으로 정자(程子) 형제가 강학하던 곳임. 민모(民母) : 서자(庶子)가 아버지의 본처(本妻)를 일컫는 말. 《類選》 卷二下 人事篇二 論禮門. 《五州》 卷六民母鼻子丁外人辨證說. 민사(?史) : 송(宋) 나라 주자(朱子)의 저서인 《통감강목(通鑑綱目)》. /면암집1/ 민산(岷山)과 파산(巴山) : 모두 중국의 촉(蜀)땅에 있는 산으로 옛날 촉땅의 임금인 두우(杜宇)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어서 두견새로 화신(化身)했다 하므로 말한 것이다. 민속은 …… 말하네 : 한식(寒食)은 동지(冬至)에서 105일째 되는 절기이고, 진문공(晉文公)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 나라의 제후이다. 후에 진문공이 된 중이(重耳)가 일찍이 모함을 당하고 망명하였는데, 이때 개자추(介子推)가 그를 수행하여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정성껏 중이를 돌보았으나 중간에 탈락하고 말았다. 그후 중이는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어, 수행하였던 가신(家臣)들에게 모두 은전(恩典)을 내렸으나 개자추만은 까맣게 잊었다. 개자추는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綿山)에 은둔하여 살았는데, 진문공(晉文公)이 그가 면산에 있다는 말을 듣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자, 면산에 불을 놓아 개자추가 깊은 산 속에서 나오기를 기대하였으나, 개자추는 나오지 않고 그대로 불타 죽었다. 이에 사람들이 그가 불타 죽은 것을 가엾게 여겨, 그가 죽은 날 불을 때어 밥을 해먹지 않고 찬밥을 먹으니, 이 때문에 한식(寒食)의 명절이 생기게 되었다 한다. 그후 중이는 개자추를 위해 면산을 특별히 보호하고 사당을 지어 그의 넋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춘추(春秋)》 《좌전(左傳)》 <희공(僖公) 24년> 민속을 …… 놀라고 : 《예기》 곡례(曲禮)에 “다른 나라에 들어가면 풍속을 묻는다.” 하였다. 왕제(王制)는 선왕(先王)의 제도로 중국의 훌륭한 문물을 뜻한다. 〔월사집〕 민암(民?) : 백성은 미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바위처럼 험하니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 《書經召點》 /선조실록35/ 민오동포(民吾同胞) : 우주에 있는 만물은 똑같이 천지(天地)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으니 한 동포라는 뜻.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백성은 나의 동포이며 물건은 나의 친구이다.”[民吾同胞 物吾與也] 하였다. /청장1-107/ 민옥(珉玉) : 민은 옥과 비슷하게 생긴 돌을 가리키고, 옥은 진짜 옥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현인(賢人)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비유한 말. /중종실록 48/ 민응수(閔應洙) : 1684~1750. 자는 성보(聲甫), 호는 오헌(梧軒), 시호는 문헌(文憲), 본관은 여흥(驪興). 전라도 관찰사·대사성·대사헌·이조 판서·병조 판서·형조 판서·우의정 등을 역임했다. 민이(民彛) : 사람의 마음에 가진 상도(常道). 《시경》 <대아(大雅)> 증민편(烝民篇)에 民之秉彛 사람이 가진 떳덧한 본성인지라 好是懿德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 라는 말이 있이 있는데, 여기에서 유래함. 민인(民人) :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자로(子路)가 계씨(季氏)의 신하로 있을 때 자고(子羔)를 비(費) 땅의 원으로 삼으니, 공자(孔子)가, “학문이 얕은 그에게 사람을 다스리는 책임을 주는 것은 도리어 그 사람을 해치는 자이다.”하니, 자로가 “인민(人民)이 있으며 사직(社稷)이 있으니 하필 독서한 후에 학문을 하리까?” [有民人焉 有社稷焉何必讀書然後爲學] ← 사직(社稷) /여한68/ 민자(閔子) : 민자건(閔子騫). 이름은 손(損).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공자가 이를 두고 이르기를 《효성스럽도다! 민자건여. 사람들이 그 부모 형제의 말에 의심을 두지 않는다.[孝哉閔子騫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라고 하였음. 《論語》 <先進>. 민전(民田) : 민전은 인민의 전토 민전(民廛) : 중국 궁성제도 민정(民丁) : 부역(賦役) 또는 군역(軍役)에 소집되는 남자. 장정(壯丁)이라 일컫기도 함. /중종실록47/ 민제(愍帝) : 민제는 진 무제(晋武帝)의 손자인 사마업(司馬?)인데 전조(前趙)의 유요(劉曜) 에게 패하여 사로잡혔고, 건흥(建興) 5년 12월에 평양(平陽)에서 시해(弑害) 당하였는데 그때 나이 18세였다. 《晉書 卷五 孝愍帝紀》 /명종실록1/ 민중(?中) → 염민(廉?) /성호1-83/ 민지(閔漬) :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의 문신으로 자는 용연(龍涎)이고 호는 묵헌(?軒)이며, 시호는 문인(文仁)이고 본관은 여흥(驪興)인 바, 지(漬)는 그의 이름이다. 민지(?池) → 정형(井?) 민지부모(民之父母) : 《詩經 小雅 南山有臺》의 “훌륭한 군자여, 백성의 부모라.[樂之君子 民之父母]” 한 것을 말하는데, 이 대문은 《大學 傳十章》에서 인용하였다. /명종실록 3/ 민진원(閔鎭遠) : 1664~1736.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여흥(驪興). 이조 판서·호조 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저서에 《민문충공주의(閔文忠公奏議)》·《연행록(燕行錄)》·《단암만록(丹巖漫錄)》이 있다. 민진원(閔鎭遠) → 한호운(韓浩運) 민진후(閔鎭厚) : 1659~1720.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 관향은 여흥(驪興)이다. 1681년 생원이 되고, 168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민충단(愍忠壇) :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에 와서 싸우다가 죽은 명 나라의 군사들을 불쌍히 여겨 지은 충혼단(忠魂壇). /선조실록14/ 민형수(閔亨洙) : 영조 때 문신. 자는 사장(士長), 본관은 여흥(驪興). 민회태자(愍懷太子) : 민회태자(愍懷太子)는 전 해제의 장자(長子)로 대지에 봉해졌으나 가후(賈后)의 미움을 받아 폐출(廢黜)되었다가 황문(黃門) 손이(孫慮)에 의해 피살되었다. 해제는 그후 민회태자와 그의 아들 애태손(哀太孫) 장(臧), 충태손(?太孫) 상(尙)을 부묘하였다. 《晉書 卷一九 志第九 禮上》 /선조실록 31/ 믿음 …… 않아라 : 산나물에 벗의 믿음을 깃들여 보낸다는 뜻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용재집〕 밀(密) : 밀(密)은 주 문왕(周文王) 때의 조그마한 나라이다. “밀인이 불공하여 감히 큰 나라를 거역하였다.[密人不恭, 敢距大邦]” 하였다.《詩經 大雅》 /대동6-385/ 밀덕(密德) : 도성(都城) 석산(石山) 위의 가장 높은 곳. ○ 密德 方言也 都城石山同回曲最高處 《中宗實錄 卷五 三年戊辰 二月 戊申》 밀밀봉(密密縫) : 당 나라 맹교(孟郊)의 시에, “객지에 나가는 자식의 몸에 입은 옷은, 자모(慈母)의 손으로 기운 실[線]이네, 총총 기운 것은 더디게 돌아올 것을 준비함이네.” 하였다. /해행4-424/ 밀부(密符) : 유수(留守). 감사(監司). 병사(兵士). 수사(水使). 방어사(防禦使) 등에게 동병(動兵)할 필요가 있을 때에 응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내리는 병부(兵符). 연산4/ 밀율(密率) : 조충시 /오주 17-87/ 바늘 만드는 할미 : 당(唐)나라 때 시선(詩仙)으로 불린 이백(李白)은 서역의 무역상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촉(蜀)에서 보냈다. 학문을 위해 상의산(象宜山)에 들어갔던 이백이 공부에 싫증이 나 산에서 내려와 돌아오는 길에 한 노파가 냇가에서 바위에 도끼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백이 무얼 하는지 묻자 노파는 바늘을 만들려 한다고 대답했다. 이백이 비웃자 이백을 나무라며 부지런히 갈고 닦으면 도끼로도 바늘을 만들 수가 있다고 했다. 이 말에 크게 깨달아 이백은 학문에 각고의 노력을 바쳤다고 한다. 여기서는 떠나는 박한기(朴閑驥)에게 학문에 용맹정진하기를 당부하는 의미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方與勝覽》 |
출처: 고전번역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