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씨 세 자매
송애령, 경령, 미령 세 자매는 광동성 절강재벌( 浙江財閥 ) 宋氏家의 딸들로서 중국의 혼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 많은 인생을 살았다. 세 자매의 삶은 중국 현대사를 상징하고 있다. 진보적 사고 방식을 가졌던 아버지는 세 자매를 미국 웨슬리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러나 세자매의 가치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첫째 송애령( 쑹아이링, 宋靄齡 )은 귀국후 손문의 일을 돕다가 여자는 무엇보다 풍족한 부를 누릴 때 행복해 진다. 는 신념대로 돈을 사랑하여 1914년 은행가이자 실업가였던 공상희(쿵샹시, 孔祥熙 )와 결혼, 중국의 경제를 좌우했다.
둘째 송경령(쑹칭링, 宋慶齡, 1892.1.27 ~1981.5.29 )은 미국분위기에 젖지 않고 항상 중국을 사랑하고 중국인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손문의 비서로 있다가 1914년 손문과 결혼하였다. 당시 손문은 48세로 경령보다 26세나 연상이었으며 이미 아내와 세 자녀가 있었고 손문은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셋째 미령은 나에게서 동양적인 것은 나의 얼굴뿐이다.는 말처럼 서구적인 것을 선호했다. 권력을 사랑하여 장개석과 결혼하였다.
장개석은 야심을 위한 발판으로 전 부인과 이혼하였을 뿐 아니라 손문이 죽은 뒤 경령에게 청혼하여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경령은 손문과 함께 중국을 회생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혁명운동에 열성적이었고 공산당과 연결되었다. 남동생은 재벌인 쑹쯔원 (宋子文)이었다.
경령은 국민당을 이끄는 장개석이 등장하면서 소련으로 망명하였다가 1929년 귀국 후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서 국민당 좌파에 속하여 국민당 정권의 부패를 공공연히 비판하면서, 채원배, 노신 등과 함께 민권옹호와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에 노력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국가 부주석 등의 요직을 역임하는 등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1950년 스탈린 평화상을 받았다.
미령은 1927년 장개석과 결혼 후 장제스의 통역으로 활약, 외교정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대미관계 조정에 수완을 발휘하였으며 장개석이 서구문화사상을 받아들이도록 도왔다. 그녀는 미국의회에서 연설한 이후 미국인들이 뽑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열 명의 여성중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1936년 西安사건 때는 강경파의 의견을 제지, 서안으로 들어가 주은래와 단독 면담을 한 끝에 장제스를 석방시키는 역량을 과시하였다.
1975년 장제스 사망 이후에는 10년간 미국에서 살면서 타이완과 미국과의 유대강화에 힘썼다. 1986년 장제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가 1991년 장기요양을 위하여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남경 중산릉(손문릉) 부근에는 미령궁이 보존되어 있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경관을 보고 별장을 지은 것인데 국민당의 철수 후에도 장개석 총통 집무실과 전시실에는 송미령의 일생을 담은 사진이 최근 것까지 전시, 보존되어 있다.
세 자매의 삶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다 달랐지만 현대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