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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모- 땃사 바가와또 –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3회)
Namo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청정도론 3권
제22장 지와 견에 의한 청정
ñāṇadassanavisuddhiniddeso
2.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菩提分法)p386~
Bodhipakkhiyakathā
(7) 통달지 등의 구분
Pariññādippabheda
104.통달지 등의 네 가지 역할을 설했다. 이제 그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판별을 알아야 한다.
①통달지는 세 가지이고 ② 버림과 ③ 실현도 그러하다
④수행은 두 가지로 요구한다.
105. ① 통달지는 세 가지이다: ㉠안 것의 통달지(ñātapariññā) ㉡ 조사의 통달지(tīaṇariññā) ㉢ 버림의 통달지(pahānapariññā) ㅡ 이 세 가지 통달지가 있다.(ⅩⅩ.§3)
106. ㉠ 여기서 초월지라는 통찰지는 알았다는 뜻에서 지혜이다”라고 개괄한 뒤 “어떤 법들이든 완전히 안 것이 알아진 것이다.(Ps.i.87)”라고 간략하게 설하셨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모든 것을 완전히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완전히 알아야 할 모든 것인가? 비구들이여, 눈을 완전히 알아야 한다. ··· (Ps.i.5)”라는 등의 방법으로 상세하게 안 것의 통찰지를 설하셨다. 조건과 더불어 정신 · 물질을 완전히 아는 것이 이것의 특별한 영역이다.
107. ㉡ “통달지라는 통달지는 조사한다는 뜻에서 지혜이다”라고 개괄한 뒤 “어떤 법들이든 철저하게 안 것이 조사된 것이다.(Ps.i.87)”라고 간략하게 설하셨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모든 것을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철저하게 알아야 할 모든 것인가? 비구들이여, 눈을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 (Ps.i.22)”라는 등의 방법으로 상세하게 주사의 통달지를 설하셨다.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무상, 고, 무아라고 조사함으로써 일어나는 ‘수순하는 지혜’까지가 이것의 특별한 영역이다.
108. ㉢ “버림이라는 통찰지는 버린다는 뜻에서 지혜이다”라고 개괄한 뒤 “어떤 법들이든 버린 것이 버려진 것이다(Ps.i.87)”라고 상세하게 설하셨다. 그리고 “무상을 관찰함으로써 영원하다는 인식을 버린다.(cf.Ps.i.58)”는 등의 방법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버림의 통달지라 한다. 무너짐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도의 지혜까지가 이것의 영역이고, 이 [마지막 통달지가] 여기서 뜻하는 것이다.
109. 혹은 안 것의 통달지와 조사와 통달지도 오직 이것을 위한 것이다. 어떤 법들이든 버려진 법들은 반드시 알아진 것이고 조사된 것이기 때문에, 세 가지 통달지 모두 이러한 방법으로 도의 지혜의 역할을 한다고 알아야 한다.
110.② 마찬가지로 버림도: 버림도 ㉠ 억압에 의한 버림 ㉡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 ㉢ 근절에 의한 버림으로, 이와 같이 통달지처럼 세 가지이다.
111. ㉠ 마치 수초가 덮여 있는 물 위에 항아리를 던지면 그 항아리에 의해 수초가 억눌리는 것처럼 각각의 세간적인 삼매에 의해서 장애(盖)등 반대되는 법들이 억압되는 것이 억압에 의한 버림이다.
그러나 성전에서는 “초선을 닦는 자에게 장애는 억압으로써 버려진다.(Ps.i.27)”라고 오직 장애가 억압되었다고 설하셨다. 그것은 [그때 억압이] 분명하기 때문에 설하셨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장에는 禪의 전과 후에 갑자기 마음을 덮치지 않는다. 일으킨 생간(尋)등은 본삼매(여기서는 제2선 등)의 순간에만 억압한다. 그러므로 그때 장애들의 억압은 분명하다.
112. ㉡ 마치 밤에 켜놓은 등불에 의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위빳사나의 한 부분인 지혜의 구성요소로 그와 반대되는 버려야할 법들을 버림이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이다. 즉,
①정신과 물질을 분석함으로써 유신견을 버린다.
②조건을 파악함으로써 원인이 없다는 견해(無因論)와 [신이나 창조주 등] 거짓 원인을 주장하는 견해와 의심의 때를 버린다.
③깔라빠를 명상함으로써 ‘나’라거나 ‘내 것’이라는 적집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④도와 도 아님을 구분함으로써 도 아닌 것에 대해 도라는 인식을 버린다.
⑤일어남을 봄으로써 허무하다는 견해를 버린다.
⑥사라짐을 봄으로써 허무하다는 견해를 버린다.
⑦공포가 나타남으로써 두려움을 가진 것에 두려움이 없다는 인식을 버린다.
⑧위험을 봄으로써 안락하다는 견해를 버린다.
⑨역겨움을 관찰함으로써 기뻐하는 원치 않는 상태를 버린다.
⑩해탈하기를 원함으로써 해탈을 원치 않는 상태를 버린다.
⑪깊이 숙고함으로써 깊이 숙고하지 않음을 버린다.
⑫평온으로 평온하지 않음을 버린다.
⑬수순으로 진리에 어긋나는 이해(gāha)를 버린다.
113. 혹은 열여덟 가지 중요한 위빳사나(mahāvipassanā)의 경우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은 다음과 같다.
①무상을 관찰하여 영원하다는 인식을 버린다.
②괴로움을 관찰하여 행복하다는 인식을 버린다.
③무아를 관찰하여 자아라는 인식을 버린다.
④역겨움을 관찰하여 즐거움을 버린다.
⑤탐욕의 빛바램을 관찰하여 탐욕을 버린다.
⑥소멸을 관찰하여 일어남을 버린다.
⑦놓아버림을 관찰하여 가짐을 버린다.
⑧부서짐을 관찰하여 견고하다는 인식을 버린다.
⑨사라짐을 관찰하여 쌓음을 버린다.
⑩변함을 관찰하여 항상하다는 인식을 버린다.
⑪표상 없음을 관찰하여 표상을 버린다.
⑫원함 없음을 관찰하여 원함을 버린다.
⑬공함을 관찰하여 고집(독단적인 신조)을 버린다.
⑭수승한 통찰지의 법을 위빳사나하여 실제가 있다는 고집을 버린다.
⑮여실지견을 통해 미혹으로 인한 고집을 버린다.
(16) 위험을 관찰하여 [상카라들에] 집착하는 고집을 버린다.
(17) 깊이 숙고하여 관찰함으로써 깊이 숙고하지 않음을 버린다.
(18) 물러섬을 관찰하여 족쇄의 고집을 버린다.(cf.Ps.i.47)
114. ①-⑦ 무상 등 일곱 가지 관찰로 영원하다는 등의 인식을 버리는 것은 무너짐의 관찰에서 이미 설했다.(ⅩⅩⅠ.§15이하)
⑧부서짐의 관찰은 견고하다는 인식을 분해하여 부서진다는 뜻에서 무상하다고 보는 자의 지혜다. 이것으로 견도하다는 인식을 버린다.
115. ⑨사라짐의 관찰은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현재의] 대상을 의지하여
[과거와 미래] 둘 모두 동일하다고 결정하고
소멸에 대해 확고함
이것이 사라짐을 특징으로 하는 위빳사나이다.(Ps.i.58)”
이것은 직접적인 경험과 추론으로 [삼세의] 상카라들이 무너짐을 본 뒤 그 무너짐이라 물리는 소멸에 대해 열중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쌓음을 버린다. ‘내가 노력하여 쌓은 그 [법들은] 모두 이와 같이 사그라지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볼 때 그의 마음은 쌓음으로 기울지 않는다.
116. ⑩변함의 관찰은 물질에 대한 일곱 가지 방법 등을 통해서 각각 한정한 것을 벗어나 다른 형태로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다. 혹은 일어난 것이 늙고 죽는 두 가지 형태를 통하여 변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것으로 항상하다는 인식을 버린다.
117. ⑪ 표상 없음의 관찰은 바로 무상의 관찰이다. 이것으로 영원하다는 표상을 버린다.
⑫ 원함 없음의 관찰은 바로 괴로움의 관찰이다. 이것으로 행복을 원함과 행복을 갈망함을 버린다.
⑬ 공함의 관찰은 바로 무아의 관찰이다. 이것으로 ‘자아가 있다’라는 고집을 버린다.
118. ⑭ 수승한 통찰지의 밖에 대한 위빳사나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대상을 숙고하여 무너짐을 관찰한다.
공으로 나타남이 수승한 통찰지의 위빠사나이다.(Ps.i.58)”
물질 등의 대상을 알고서 그 대상과 그것을 대상으로 가진 마음, [이 둘 모두 다] 무너짐을 모고 ‘오직 상카라들이 무너지고, 상카라들이 죽을 뿐 다시 어떤 물건도 없다’라고 무너짐을 통해서 공한 선품을 이해하여 일어난 위빠삿나가 [수승한 통찰지의 법에 대한 관찰이다]. 이것은 수승한 통찰지이고 또한 법들에 대한 위빳사나이기 때문에 수승한 통찰지의 법에 대한 위빳사나라 부른다. 익서으로 항상한 실제가 없음에 자아라는 실제가 없음을 잘 보았기 때문에 실재가 없다는 고집을 버린다
119.. ⑮ 여실지견이란 조건과 함께 정신 ∙ 물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나는 과거에 있었는가?(M.i.8)”라는 등의 방법으로 일어난 미혹 때문에 생긴 고집을 버리고, ‘세상은 자재천으로부터 생겼다’는 등으로 일어난 미혹 때문에 생긴 고집을 버린다.
120.(16) 위험의 관찰은 공포로 나타남을 통해, 일어난 모든 존재 등에서 위험을 보는 지혜다. 이것으로 어떤 [상카라도] 집착할만한 것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상카라들을] 집착함으로써 생긴 고집을 버린다.
(17)깊이 숙고함의 관찰은 해탈하는 방편을 깊이 숙고하는 지혜다. 이것으로 깊이 숙고하지 않음을 버린다.
121. (18)물러섬의 관찰은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과 수순이다. 그때 그의 마음은 약간 경사진 연잎 위의 물방울처럼 모든 상카라들의 범주로부터 물러나고, 움츠리고, 되돌아온다고 설했다.(ⅩⅩⅠ.§63) 그러므로 이것으로 족쇄에 대한 고집을 버린다. 감각적 욕망의 족쇄 등 오염원에 대한 고집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오염원에 대한 고집이란 오염원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세하게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성전에서는 “꿰뚫음(nibbedha, 위빳사나)이 함께하는 삼매를 개발하는 자에게는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을 통한 견해의 버림이 있다.(Ps.i.27)”라고 간략하게 설하셨다.
122. ㉢ 마치 벼락 맞은 나무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처럼 성스러운 도의 지혜로 족쇄 등의 법을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버림이 근절에 의한 버림이다.(§110) 이것을 두고 이와 같이 설하셨다. “부서짐으로 인도하는 출세간의 도를 닦는 자에게 근절에 의한 버림이 있다.(Ps.i.27)”
123. 이와 같이 세 가지 버림 가운데서 오직 근절에 의한 버림만이 여기서 뜻하는 것이다. 혹은 수행자가 이전에 억압에 의한 버림과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도 오직 이것을 위한 것이므로 세 가지 버림 모두 도의 지혜의 역할을 한다고 알아도 된다. 왜냐하면 어떤 자가 반대편의 왕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을 때 그가 왕이 되기 전에 행한 것에 대해서도 ‘이 모든 것은 왕이 한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124. ③ 실현도 그러하다(§104): ㉠ 세간적인 실현과 ㉡ 출세간적인 실현의 두 가지로 분류되지만 출세간적인 실현은 견(見,dassana)과 수행(bhāvana)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세 가지이다.
125. ㉠여기서 “나는 초선을 얻었고, 초선에 대해 자유자재하고, 초선을 실현하였다.(Vin.iii.93-94)”라는 등의 방법으로 전승되어 오는 초선 등을 체득(phaddana)하는 것이 세간적인 실현이다. 체득이란 얻은 뒤 ‘내가 이것을 얻었다’고 하는 실제적인 체험인데 지혜의 접촉과 맞닿은 것이다. 이 뜻에 대해서 “실현의 통찰지는 체득한다는 뜻에서 지혜이다.”라고 개괄한 뒤 “실현한 법들은 그 무엇이든 체득한 법들이다(Ps.i.87)”라고 실현에 대해 설하셨기 때문이다.
126. 비록 [禪과 道와 果처럼] 자기의 상속에 일어나지 않더라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얻은] 지혜로 알아진 법들도 실현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모든 것을 실현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실현해야 할 그 모든 것들인가? 비구들이여, 눈을 실현해야 한다.(PS.I.35)”라는 등으로 설하셨다. 다시 설하셨다. “물질을 보면서 실현한다. 느낌을 ∙∙∙ 알음알이를 보면서 실현한다. 눈을 ∙∙∙ 늙음 ∙ 죽음을 ∙∙∙ 불사에 들어가는 열반을 보면서 실현한다. 실현한 법들은 그 무엇이든 체득한 법들이다.(Ps.i.35)”
127. ㉡ 첫 번째 도의 순간에 열반을 보는 것이 봄의 실현이다. 나머지 도의 순간에 [열반을 보는 것이] 수행의 실현이다. 두 가지 모두 여기서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봅\arhk 수행을 통해서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이 지혜의 역할이라고 알아야 한다.
128. ④ 수행은 두 가지가 있다(§104): 수행은 ㉠ 세간적인 수행과 ㉡ 출세간적인 수행의 오직 두 가지가 알려져 있다.
㉠ 세간적인 계 ∙ 정 ∙ 혜를 일으킴과 그 [계 ∙ 정 ∙ 혜]를 통하여 상속을 훈습(vāsanā)하는 것이 세간적인 수행이다.
. ㉡ 출세간적인 계 ∙ 정 ∙ 혜를 일으킴과 그들을 통하여 상속을 훈습하는 것이 출세간적인 수행이다.
이 가운데서 오직 출세간적인 수행이 여기서 뜻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지혜 모두 출세간적인 계 등을 일으키고, 그 출세간적인 계 등에서 함께 생긴 조건 등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그 [출세간적인 계 등]을 통하여 [성자는] 자기의 상속을 훈습한다. 그러므로 출세간적인 수행만이 이 [도의 지혜]의 역할이다. 이와 같이,
[사성제를] 관통할 때 설한 통달지 등의 역할들을
각각의 고유성질에 따라 알아야 한다.(§32)
129. 이렇게 하여,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S.i.13)”(Ⅰ.§1)
라고 원형 그대로 [성전에서] 전승되어온 통찰지수행법을 보이기 위하여 앞에서 설한 ‘뿌리가 되는 두 가지 청정을 성취하고, 몸통이 되는 다섯 가지 청정들을 성취함으로써 통찰지를 닦아야 한다.(ⅩⅠⅤ.§32)’ 라는 그 구절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제 ‘V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ⅩⅠⅤ.§1)라는 그 질문은 대답이 되었다.
어진 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지은 청정도론의
통찰지수행의 표제에서
지와 견에 의한 청정에 관한 해설이라 불리는
제22장이 끝났다.
붓다사 사낭 짜랑 띳타뚜(3회)
(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불법이라 불리우는 법과율의 가르침이
오랜세월 훼손없이 존속하여 머무소서.
Sādhu! Sādhu! Sādhu!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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