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쓴 일기와 편지를 모아서 엮은 필첩인 '대원군친필'. 2첩으로 구성된 본 첩에는 1872년과 1873년 무렵의 자신이 일상생활과 당시의 정세에 관해 적은 글들이 실려 있다. 가지런하고 정확한 필체에서 대원군의 섬세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 |
▲선조, 효종, 숙종의 글씨들
어필 중에서 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은 선조의 필적이다. '선묘어필(宣廟御筆)'이라는 제목의 목판본 필첩(21절 42면)에는 선조의 글씨가 실려 있다. 이 필첩은 선조(1552~1608)가 중국 문인들의 한시를 써서 의창군 광(義昌君 珖)에게 내린 것을, 1630년에 의창군이 목판으로 찍어낸 것이다. 최근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서 선조는 무능하고 시기심 많은 왕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선조는 임진왜란 후 국가 재건과 문화중흥을 이끌었던 왕이었다. 선조 시대를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선조는 서화(書畵)에 능하였는데 '선묘어필'에는 중국의 한유(韓愈), 승려 영철(靈徹), 이군옥(李群玉) 등이 지은 한시 8편과 의창군이 쓴 발문이 실려 있다. 의창군은 선조 임금께서 주신 글씨를 전쟁 때문에 분실하였는데 이제 보존된 것을 간행하여 후세에 전한다고 하였다.
'효종대왕어필(孝宗大王御筆)'(9절 16면)은 조선후기 북벌을 이끈 왕 효종의 필적이다. 이 첩은 효종(1619~1659)이 쓴 편지 4통, 물목(物目), '홍선전(紅線傳)' 등을 묶어 만든 어필첩(御筆帖)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지는 모두 4통인데, 그 중에 3통은 효종이 왕자 '봉림대군' 시절 심양(瀋陽)에 볼모로 있을 때인 1641년(인조 19)과 1642년에 인헌왕후(仁獻王后:효종의 할머니)의 친가인 능성부원군댁(綾城府院君宅)에 보낸 것이다. 초서로 쓰여진 유려한 글씨체에는 볼모로 잡혀 있는 애닯은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숙종대왕어필(肅宗大王御筆)'은 숙종(1661~1720)이 공주, 왕자, 신하들에게 내린 친필 시문을 음각하여 간행한 어필첩(御筆帖)이다. 한 눈에도 필체가 대단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숙명공주(淑明公主), 연잉군, 연령군(延齡君), 김수항(金壽恒), 남구만(南九萬), 임창군(臨昌君), 낭원군(郎原君) 등에게 내린 시문들이 음각하여 실려 있는데, 후에 영조가 되는 연잉군의 질병이 나은 것을 축하한 글이 주목된다.
1776년에 찍어 정조가 이최중에게 하사한 '영조어필' 중의 '서설(瑞雪)'. | |
'경종수필(景宗手筆)'은 경종(1688~1724)이 1696년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에 민진원(閔鎭遠)에게 하사한 글씨를 목판으로 찍은 어필첩(御筆帖)이다. 10폭으로 구성된 필첩 중에 8폭에는 경종이 대자(大字)의 해서(楷書)로 쓴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가 실려 있다. 경종의 글씨는 '주역(周易)'에서 따온 구절로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뜻이다. 민진원은 발문(跋文)에서 이 글씨를 하사받게 된 내력을 적고, 동궁의 글씨는 반듯하고 곧아 봉황이 춤추고 용이 나는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영조어필(英祖御筆)'은 영조(1694~1776)가 쓴 시구(詩句)를 정조 때인 1776년 7월에 찍어 이최중(李最中)에게 하사한 어필첩(御筆帖)이다. 1책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 부분에 정조가 1776년 7월 30일 봉조하(奉朝賀) 이최중(1715~1784)에게 영조의 어필을 하사한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영조의 어필은 4언과 5언의 시구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대자(大字)의 행서(行書)로 쓰여져 있다. '상서로운 눈이 내려 풍년을 알리니 내년 농사가 잘 될 것(瑞雪驗豊, 明農登熟, 仍此有祝, 近八親書)'이라는 내용을 담은 글 가운데 '서설(瑞雪)' 두 글자를 따서 쓴 부분에서는 영조의 힘이 느껴진다. '동궁보묵(東宮寶墨)'은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1735~1762)가 8세 때인 1742년(영조 18) 12월 11일 장악원 첨정 이익준의 아들 갑득에게 써준 글씨를 모아 엮은 필첩(筆帖)이다. '군신유의 군의신충 군신지분의(君臣有義, 君義臣忠, 君臣之分義)' 등 13자가 대자(大字)의 해서(楷書)로 쓰여져 있고, 뒤에 이익준의 발문이 실려 있다. 어린 시절부터 군왕의 역할을 가슴에 새기면서 글씨를 써 내려갔던 사도세자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섬세함이 돋보이는 흥선대원군의 글씨
규장각의 주인공 정조의 친필 글씨를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어전친막제명첩(御前親幕題名帖)'이다. 1첩 17절로 구성된 이 첩은 별군직(別軍職)과 관련된 정조(1752~1800)의 서문(序文)과 글씨, 전령(傳令)의 양식, 제명(題名) 등을 묶어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별군직은 병자호란 때에 세자의 시위군관(侍衛軍官)에서 유래하였는데, 나중에는 대전(大殿)의 호위를 맡았다. 정조는 1787년(정조 11) 별군직의 유래와 임무 등을 적은 '제어전친막제명첩(題御前親幕題名帖)'을 짓고, '어전친막(御前親幕)'과 '어전친비직려(御前親裨直廬)'를 친필로 써서 별군직에 하사하였다. 그리고 '제명(題名)'에는 1776년부터 1831년까지 별군직에 임명된 무신 108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대원군친필'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쓴 일기와 편지를 모아 엮은 필첩(筆帖)이다. 흥선대원군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김정희에게서 글씨를 배웠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특히 난초 그림에 일가견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첩으로 구성된 본 첩에는 1872년과 1873년 무렵에 자신의 일상 생활 내지는 당시의 정세 등에 대하여 적은 일기와 편지가 실려 있다. 편지의 글씨들은 추사체를 본 딴 흔적이 잘 나타나며, 가지런하고 정확하게 편지를 써 내려간 모습에서 대원군의 섬세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내용 중에는 '대동미(大同米)를 돈으로 대신 납부할 수 없느냐'는 질의에 대하여 돈으로 납부하지 말로 쌀로 내라고 하는 등 사회경제적인 관심을 나타낸 내용이 주목을 끈다.
# 왕후의 글씨, 우아한 궁체 돋보여
- 인목· 순원왕후 한글편지
- 안부 묻는 애틋함 묻어나
왕실의 편지 중에는 인목왕후와 순원왕후의 편지가 주목된다. '인목왕후필적(仁穆王后筆蹟)'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1584~1632)의 필적을 모아 엮은 필첩(筆帖)이다. 본 첩에는 1603년(선조 36)에 쓴 한글 편지, 왕발(王勃)의 '등왕각서' 일부, 도잠(陶潛)의 '사시'(四時), 작자 미상의 칠언율시 등 4편의 시문(詩文)이 실려 있다. 편지는 1603년 11월 19일에 쓴 병문안 편지로, 상당히 이른 시기의 것으로 국어사 연구에도 중요하다.
잘 접어 보관한 편지 한 통 한 통에서 여성의 섬세함을 느낄 수가 있다. 일가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당대 정치에 대한 관심 등을 표현하였고, 글씨도 우아한 궁체(宮體)로 되어 19세기 한글편지의 특징과 언어, 서체 이해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