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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 1992년
김 이 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열어놓은 창틈으로 맞바람 치는 게 보였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창밖에 빠져나가 흔들리는 커튼을 보았다.
그가 내 입 안에 체온계를 밀어넣었다가 꺼낼 때까지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체온 기록 카드에 점 한 개를 찍고, 볼펜으로 카드를 탁 쳐서 소리를 내는 게 그의 습관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도 좋다는 신호를 대신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침대 위에 걸쳐놓았던 가운을 어깨에 걸치고 바닥으로 내려섰다.
슬리퍼를 찾아 신으며, 손으로는 가운의 끈을 잡아맸다.
그리고는 곧장 벽에 붙은 달력의 날짜 하나를 초록색 매직펜으로 동그랗게 지웠다. 거꾸로 세어 올라온 수자가 팔십삼을 남기고 있었다.
곧 칠십 단위로 내려갈 것이고, 얼마 남지 않았다는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커피포트에 전기코드를 끼우고, 나는 목욕탕으로 갔다.
한두 번 치솔로 이를 닦아냈다. 물기있는 거즈로 눈가를 씻어내고 나오면서 손가락을 세워 머리칼을 훑어올렸다.
“치솔을 부드러운 것으로 쓰고 제십니까? ”
“네. 돼지털로 된 치솔이라고 하던데요. 하얀색이니까 아마 흰 돼지털인가 보죠?”
“잇몸이 시거나 아프지는 않습니까?”
“아뇨.”
나는 찻잔을 테이블에 차려놓으면서 똑같은 착각을 매일 한번씩 하게 되었다.
남편의 출근 채비를 해주며 커피를 끓이고 있는 것처럼 느끼곤 했다.
“너무 진하게 들지는 마십시오.”
“네. 많이 커피 양을 줄였어요, 반 정도로. 어떤 날은 삼분의 일 정도일 때도 있어요.”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이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가장 위대한
창조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질 않아요. 한 달에 백만 원 벌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생각은 태아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아름답고 포근한 마음으로 키워가야 합니다.”
“글쎄요? 차 드세요, 선생님.”
나는 그에게 찻잔을 들려주었다. 그의 손이 의사답지 않게 짧구 두텁다는 걸
발견했다.
벽돌 쌓는 미장이 손맛같이 껄끄렴고 뻣뻣할 거라고 상상했다.
하기야 요즘엔 무슨 일이든 버튼 누르는 작동으로 바뀌었지만, 병원에서 병고치는 일만은 사람 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까, 그의 손이 저렇게 보기 흉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왜 하필이면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섰어요?”
“그럼 어떤 것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신신경과라든가, 내과라든가 그래야 환자가 많죠. 십년 전 같으면 또 몰라요. 아이를 으례 낳고 키우는 걸로 알고 있던 시철엔 좋았겠죠.”
“듣고보니 그렇게 생각되기도 합니다만, 이미 산부인과는 인간의 생산 공장으로 변하고 있읍니다. 생산하는 기쁨처럼 더 큰 기쁨이 있을까요?”
“조물주가 된 우월감 같은 걸 느끼시나요?”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한 달에 맥만 원씩을 받고 자궁을 빌려주는 걸, 단순한 노동으로 생각한다 해도 아무 말씀하실 수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수정난을 받아키우는 건 그릇 빌려주듯이 자궁만을 빌려주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체온과 자궁을 통하여 스며들고 있는 양분, 그리고 무형의 정신력까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단순한 노동이라고 생각하시겠읍니까?”
“이런 것은 있어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는 미소한 기쁨은 있어요.”
“당신의 자궁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는 비록 모든 유전인자를 그의 부모한테서 받았다 해도 외적인 모든 조건은 당신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는 내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말을 삼키고 말았다.
만약에 호랑이의 수정난을 사람의 자궁 속에서 키웠다면 사람다운 흐랑이가
탄생 되느냐고 묻고 싶었다.
꿀은 유리병에도 넣을 수 있고, 도자기 속에도 넣을 수 있었다.
내 일부일 수 없는 것이 나의 내부에 있었다 해서 내 영향을 받는다는 건 당치도 않았다.
“선생님, 내일 바쁘세요?”
“별로.”
“제가 저녁 살께요. 내일이 월급날이거든요. 누구인지 모르지만 골빠진 사람
이 돈을 보내오는 날이에요.”
점포 번호 3ㅡ4 라는 기호가 붙여진 곳에서 날짜 어김없이 매달 송금해왔다. 그중에서 1 할은 내 현재의 인생을 위해서 쓰기로. 했다.
나는 지난달부터 이 병원 특실로 잠적했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는데 돈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앞으로 약 석 달 동안 꼴불견인 배불뚝이 모습으로 여기서 지내도록 계획되어있었다.
그것은 산모와 태아를 위한 보호이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숨어 있는 곳으로 적당했다.
감옥처럼 연금된 상태는 아니었다 해도 환자들이 드나드는 병원이었으므로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면 자연히 방에 갇혀 있어야 했다.
남들에게 알려진다 해도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웬지 구습에 묶이는 기분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애기를 자궁 안에 넣고 다닌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가 찻잔을 비우고, 문을 향해 몇 걸음 옮겨갔다.
“내일 어디서 만나죠, 우리?”
“지하 주차장에서 아홉시에 만납시다.”
“밤 아홉시요?”
“그리고 책만 읽지 말고 음악에 맞춰 가벼운 운동을 하십시오. 산후에 몸매가 일그러지지 않게 하려면 열심히 움직여야 합니다. 배의 살갗이 트지 않았으니까?”
“관심을 두지 않아서 발견하지 못했어요. 좀 봐주시겠어요?”
그는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가운의 끈을 풀고, 옷자락을 들었다.
불룩한 배가 팬티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살폈다.
손끝으로 불룩한 부위의 살갗을 늘여보더니, 옷자락을 덮었다.
“어때요?”
“아직은 트지 않았읍니다. 체질적으로 임신 초기에도 트는 사람이 있긴 하지
만, 만삭에도 트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휴우, 다행이네. 해변에도 못 갈 뻔했잖아요? 못 가보셨군요? 저 동해안 쪽에 가면 나체 해수욕장이 많아요.”
“그렇습니까?"
그는 의사여서인지 나체라든가, 여자의 배라든가, 변색해가는 유두라든가에 무관심했다.
그는 앰프의 스위치를 눌렀다. 음악을 방안에 가득 채워놓고는 나갔다.
어쩌면 그는 나를 맹한 여자로 한자락 젖혀놓고 있는지도 몰랐다.
음악에 맞춰, 팔을 위로 올리고 허리를 뒤로 젖히는 운동을 반복했다.
배의 근육을 늘이는 것으로 적합할 것 같았다.
열 번 채우기조차 어려웠다. 도무지 나는 같은 것이 반복되는 건 견디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래서 학교를 나오자마자 얻게 된 직장도, 같은 버튼을 반복하여 눌러야 하는 작업이므로 집어던지고 말았다. 어떤 직업도 버튼 누르는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간단하게도 직업을 가지는 것을 포기했다. 공원 밴치에 앉아 흐르는 전
광광고판을 읽으며 담배를 피웠다.
뒷쪽 숲속에선 신문지 푸석이는 소리가 훔쳐먹듯이 들려왔다.
지금 금방 이별을 하려는 모양인지 그들은 급한 시계초침처럼 서둘러대는 것 같았다.
그 소리에 겹쳐지듯, 나는 전광광고판에서 여자를 구한다는 광고문을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십대 여자 건강하고 일년 고용 월급 백만원 K 산부안과 병원〉
무슨 일이든 버튼 누르는 일만 아니라면 하겠다는 각오로 K병원을 찾아갔다.
출산경험이 있느냐는 첫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결혼은커녕 이제 막 학
교를 졸업한 여자에게 당치도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머뭇거리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걸 눈치챘는지, 질문자는 설문지를
내주며 기입하라고 이르곤 방을 나갔다.
출산경험 유무, 임신중절경험 유무, 첫월경 몇 세, 며칠 동안, 대수술경험 유
무 등등 펀을 맞추기 힘든 설문지였다.
그러나 나는 정확하게 성실하게 기입하곤, 맨 끝칸에 미혼이나 성경험은 있음이라고 덧붙여 써놓고 나갔다.
며칠 뒤에 K산부인과 병원에 나와달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그동안 월급 백 만 원이란 흥분에다 묘한 호기심마저 급증했다.
거기서 나는 의사인 그를 처음 만났다. 책상에 앉아 있던 그는 나를 문 앞에 세워둔 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입을 떼지 않았다.
“돈이 왜 필요합니까?”
드디어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는데 겨우 그런 말이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돈이 필요없는 사람이라면 이미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사람밖에 더 있겠느냐라는 반문을 웃음에 포함시킨 셈이었다.
“어떤 일이든 괜찮으십니까?”
“네. 그런 각오로 찾아왔어요. 여간 힘든 일이 아니고는 월급 백만 원이란 액수는 줄 리가 없을 것이라고 알고 있으니까요.”
“정신건강 상태도 정상인 것 같고, 단, 이 일에 전척으로 매달려 있어야 하는데 인내성은 어떠십니까?”
“제로에 가까와요. 같은 일은 두번 세번 연거퍼하지 못하는 성미니까요.”
“그런 종류의 일은 아닙니다.”
“좀 앉아도 될까요?”
“잠깐. 우리 그냥 밖에 나갑시다. 병원보다는 밖에 나가서 커피나 함께 마시
면서 얘기합시다.”
그는 횐 가운을 벗어 결곤 캐비닛에서 크림빛 자켓을 꺼내입었다.
안주머니에 지갑이 들어 있음을 확인해보고 방을 나섰다.
맞은편 빌딩 옥상에 있는 전망대로 공중 통로를 지나 건너갔다.
“형제나 부모 모두 계십니까?”
“있어요. 저와 무슨 상관 있어요? 자꾸만 묻지만 마시고, 어떤 일을 시키려
하시는지 간단하게 말씀하세요. 제가 죄인도 아니잖아요?”
“좀 어려운 일이어서 선뜻 말을 건네기가 곤란해서 그럽니다.”
나는 또 웃었다.
싱거움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이 혹시 아내를 구하고 있는지도 모
른다고 예감했다.
“아내를 찾으세요?”
“아닙니다. 그와 비슷한 일입니다만.”
“그럼?”
“시혐관 애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한마디로 전 찬성이에요. 왜냐하면 너도 나도 아이를 안 낳겠다면, 곧 인류
는 멸망하고 말 거예요. 기계적으로라도 종족을 보존하지 않으면 안될 단계에 접어든 느낌이 들었어요.”
“옳게 보셨읍니다.”
“그 연구를 하고 계신 닥터……누구시죠?”
“민입니다.”
“민 선생께서 저를 고용하시겠단 말씀이신가요?”
“결국 그렇게 되겠군요.”
“뭐가 그렇게 신통치 않은 대답을 하세요? 월급 백만 원에 해당하는 일이 그러니까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을 시원하게 해주세요.”
“스물셋이란 나이와 당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입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고맙군요.”
두 사람의 커피잔이 비도록 확실한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끝에만 조금씩 태우다 만 담배를 재털이에 수북이 쌓아갔고 그는 물끄러미 내 얼굴만 바라보았다.
“어렵네요.”
나는 일어날 것을 결심했다. 빈 담배갑올 구겨 재털이에 던져버렸다.
의자를 뒤로 밀었다.
“이런 얘깁니다.”
그는 나를 붙들어 앉히려는 듯 미끼를 던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얼굴에 보이고 그 자리에 눌러 앉았다.
“시험관 애기를 당신의 자궁 속에서 자라게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온 머리의 피가 어디론가 빠져버리고 만 것 같은 싸늘함을 느꼈다.
인간일 수 없는, 플라스틱 장난감 인형으로 돌아가 손도 목도 움직일 수 없는 존재로 변한 것 같았다.
“그렇게 충격을 받으실 거라고 짐작했읍니다. 다만 의논하는 것뿐이니까 제발 커피잔이나 재털이를 제게 던지지는 마십시오.”
나는 서서히 그 충격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공원에서 전광광고판의 흐름도 이와 같은 충격을 보이고 흘러가고 있었기에 내가 여기까지 끌려오게 된 것이었음을 인정했다.
일년 고용, 월급 백만 원으로도 그 모든 것을 암시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번엔 얼음 뜬 냉수 잔이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나는 얼음을 입 안에 미끄러뜨려 넣었다.
“그렇지만 시험관 애기는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잖아요? 난자와 정자의 결합이 불가능한 경우 시험관에서 결합시켜 다시 난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내 그곳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음니다만.”
“그게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난자가 생성된 자궁 속에서 자랄 수 없는 경우도 있읍니다. 모체가 병약하다든지, 자궁의 이상이 있다든지 또 다른 원인으로 출산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읍니다. 그럴 때엔 부득이 알 수 없는 위험과 모험, 막대한 경비를 무릅쓰고 결행하는 것입니다."
“미친 짓이에요.”
“예?”
“그렇게까지 하면서 아이를 가지겠단 생각이 미친 짓이란 거예요.”
그는 내 말을 두 번씩 확인하면서 짙은 실망의 표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건 말이죠, 유희에 지나지 않아요. 인간의 능력을 자랑해보려는 오만함이고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선생님이나 그런 계획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을 경멸해요. 그리고 절대로 그 유희에 참여하지 않을 거예요.”
“잠깐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 얘길 조금만 더 들어주십시오.”
“뭐라 하셔도 내 결심은 안 변해요.”
“옛날엔 아이를 대신 낳아주는 여자도 있었읍니다.”
“씨받이 말씀이군요? 그건 달라요.”
“그럼 그런 경우라면 하실 수 있읍니까?”
그는 용기를 맘껏 발휘하는 것 같았다. 이젠 말로 설득하기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고마왔어요. 이래서 말씀을 못 꺼내고 망설이던 선생 님 이셨는데 그 대접을 내가 사서 청했군요?”
“혹시 마음이 바뀌시면 다시 와주십시오. 아니, 그냥 커피를 마시러 오셔도 좋습니다.”
나는 그가 억지로 만든 여유있는 미소 위에 찬물을 끼얹어주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일어났다.
까마득히 내려다뵈는 길에 장난감 같은 자동차, 모노레일, 에스컬레이터 등이 움직이고 있었다.
공장직공이 되어버린 인간들이 꼴사납게 뒤뚝거리며 걸어다녔다.
갑자기 살고 있다는 것, 그보다도 인생이라는 자체가 시시해지고 말았다.
나른해 졌 다.
햇빛이 잘 드는 빌딩 로비에 폭신하게 놓인 긴의자에 신발을 벗어놓고 털썩하니 올라앉았다.
두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었던 그 일이 끊임없이 내 사고의 중심부에서 파문을 일으켜오고 있었다.
그의 생각을 대변하는 또하나의 내가 생성되어갔다.
그것은 가치에 관한 사념이었다. 내 생후에 있어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며 굉장한 빛과 소리를 파생시켰다.
일 년을 죽음의 시간에 저장시켰다가 재쟁시키는 것과 비교해보았다.
또는 잠자는 일 년과 날개를 얻어 달고 난 뒤의 나의 긴 인생과 비교해보기도 했다.
나는 몽유병 환자의 걸음으로 K산부인과 병원을 두번째로 찾아갔다.
그는 처음 나를 보던 날보다 더욱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안녕 하셨어요?”
“당신은 여전히 터질 듯 젊고 아름답습니다.”
“그런 낡은 대사를 쓰지 마세요. 그건 1년 전 영화, 그러니까 80년대에 있던 영화대사보다도 낡았어요.”
“아닙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요?”
“명작이란 게 요즘 어디 있어요? 모든 예술은 신문지 조각이나 텔레그래프처럼 흘러가는 것이 되고 말았어요.”
“그렇습니까?”
“공부라면 지긋지긋하게 했어요. 그것조차 뇌세포에 있는 스크린 위에 스쳐간 것 뿐이죠.”
“바로 그 말씀을 잘하셨읍니다. 당신의 자궁을 스쳐지나가는 것뿐일는지도 모르는 우리의 모혐을 시작합시다.”
모험이랄 것까지 말할 수 없지만, 그 일에 간단하게도 사인을 했다.
자궁을 빌려주는 일, 그의 말대로 꿀단지가 되는 일이었다. 기계적인 과정일
뿐이었다.
두 달 동안 나는 내 몸을 정비하기 위해 입원했다. 그 과정에선 다만 편안하고 흥미롭다는 느낌뿐이었다. 약간의 불안이 일기는 했어도 몸으로 느낄 수 없었기에 자주 그 불안이 꺼지곤 했다.
성공적으로 수정난자는 내 몸에 안착하였고, 다시 병원에서 풀려났다.
비교적 매이지 않은 생활로 돌아갔다.
승마와 스피드 놀이만 제외하곤 어떤 것도 허용되었다.
조금씩 허리가 굵어지자, 주변 친구나 자주 만나는 부모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었다.
스스로 병원에 수용되길 원하게 되었고, 그것 또한 의사가 지시하려던 차였다고 했다.
모든것이 자연스런 필요에 따른 과정이었기에 만족했다. 가끔 그와 남의 눈을 피해 외출하는 정도는 정신건강을 위해서 필요했다.
나는 몇 가지 옷을 꺼내 입어보았다.
철사로 짠 드레스를 입었다. 둥근 로보트의 패션을 따서 만든 재미있는 디자
인의 옷이었다.
사람들은 웬만큼의 무게를 몸에 지니고 다니고 싶어했다. 자꾸맏 줄어가는 지구의 중력 때문에 조금씩 현기증이 생기거나 잘 넘어지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계와 엔지니어의 도킹이라고 생각하며 슬며시 화가 치밀었다.
옛날의 여자와 의사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 일까 하고 궁리해봤다.
그는 기둥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차가 붕붕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레방아에 탄 물방울 같았다.
순간 우리가 타고 있는 차는 길 위에 던져졌다.
아무리 해도 그와 나는 기계와 엔지니어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쉽게 얻은 셈이었다.
“어디로 가죠?”
“어딜 가도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없기에 제 친구의 집으로 갑니다.”
“그 사람들도 만나기 싫어요.”
“그 친구는 남의 일을 따로 기억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 정신이상자예요?”
“아닙니다. 배우들입니다.”
“부부가 다?”
“예.”
“그럼 나도 알 만해요. 민민이란 배우?”
그들은 우주여행이라도 시간만 있으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을 만큼 돈을 많이 번 배우들이었다.
“아, 이런 꼴만 아니었어도 자신있게 만나 즐기고 싶은데 유감이네요.”
“아마, 그들은 오히려 당신의 그 모습을 부러워할 겁니다.”
“왜요?”
“그 사람들은 사람다운 요소를 모두 뺏긴 사람들입니다. 어떤 종류의 사람으로도 분장하려면 자기가 있어서는 곤란한 사람들이니까요.”
“친구시라니까 저의 직업을 그 사람들한테 얘기했겠군요?”
“가엾게도 갇혀살다시피하는 당신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냐고 부탁했읍니다.”
“저를 구경시킬 생각이시겠군요? 선생님이 작동시키고 있는 인간제조 기제의 우수성을 보여주시려구요?”
어깼거나 차는 그들의 저택으로 진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숲이 우거진 곳에 낮은 외등이 아늑하게 밝히고 있었다.
계단 모양의 저텍이 숲에 뒹굴어다니는 것처럼 서 있었다.
나는 이름도 없는 그들을 구경하러 간 여자로 그 집에 들어섰다.
TV라든가 광고판에서 거인처럼 큰 얼굴로만 보았던 그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얼굴에 밴 그림 같은 웃음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그들은 속살이 환히 들여다 뵈는 유리 섬유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살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집에서 현재 그들 부부가 공연하고 있는 연극을 비디오테이프로 보았다.
그들은 완벽하게 토막진 한마디의 인생을 꾸며가고 있었다.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러가는 것 같았다. 마치 기계 제품의 품질검사를 거친 인생인 것처럼 완전
했다.
나도 석 달 뒤에 천만 원 정도의 돈이 모아지니까, 그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맙게도 그토록 바쁜 그들이 내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들은 나를 예술가라고 불렀다. 인간을 창조하고 있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남의 흉내를 내는 그들보다 홀륭하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기계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한사코 나를 예술가라고 불렀다.
예술가보다는 바보스런 자선가에 가까웠다.
옛날에 있었다는 똥치기 직업 같은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해주고 돈을 번다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들 부부는 내게 키스를 해주었다.
여배우인 민민의 아내는 온몸을 내게 밀착시키면서 사랑한다고 내 귀에 소근댔다. 물론 그것이 그들의 습관적인 연기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날이 갈수록 이 엉뚱한 생명체의 무게를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또 그 움직임도 느끼게 되었다. 조금씩 맞닿아 있는 육체끼리의 대화에 익숙
해지기 시작했다.
비로소 나는 생명체를 키우고 있는 모성을 알게 된 셈이었다. 단순히 자궁을 빌려주는 기계가 아닌 나를 발견했다.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다리를 들어올리는 운동과 허리 꼬는 운동을 번갈아가며 했다.
이제 두 개의 수자를 남기고 그 지루했던 날들이 압축기에 눌린 듯 지난 며칠로 줄어든 느낌이었다. 그가 퇴근길에 내 방에 들려주었다.
“심경엔 별 변화가 없으십니까?”
“좀 앉으세요. 커피 끓일께요.”
“당신은 커피 마시면 안 좋습니다.”
“알아요. 이 사람이 싫다고 말하거든요.”
나는 내가 키운 생명체에 완전한 인격을 부여하고 싶었다.
“선생님은 이 사람의 부모를 알고 계시겠죠?”
“모릅니다.”
“왜 이런 짓을 한대요?”
“자궁벽의 신축력이 거의 없는 자궁에선 태아가 자라지 못합니다."
“늙은 여자인가요?”
“모룹니다. 다만 병원 기록장에 적힌 것은 그것뿐입니다.”
“어쨌든 가엾고 딱한 사람들인 것만은 틀림없어요. 요즘 세상에 자식을 두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촌스럽고, 사치스럽고, 낳을 수도 없는 주제에 돈과 기계에 의존해보자는 생각 또한 오만해요.”
“될수록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아, 미안해요. 이 사람에겐 미운 마음을 옮겨주지 않고 싶은데 말이에요.”
“분만 방법은 결정지으셨읍니까?”
“아직.”
“'재래식 자연분만이 당신의 건강과 새 생명체의 건강에 좋습니다만, 인공분만도 많은 장점이 있읍니다.”
흉터 한 줄 남기지 않고 뱃속에서 태아를 꺼내는 것이 인공분만의 장점이라고 그는 늘 말해왔다. 지금 내 경우에 있어서는 더욱 인공분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성은 자연분만을 함으로써 발생된 태아와의 관계를 이어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기계적인 과정을 거치도록 계획하고 그는 그것을 내게 권유했다.
나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 생명체, 이 사람에게 육체적으로 집착하고,
그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의 일부일는지도 모른다는데까지 이르렀다.
분만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이 수정난의 임자들, 그들의 결혼 기념일로 정한 모양이었다.
시간은 의사인 그가 컨디션 좋은 아침 일곱시로 정했다.
“그렇게 하겠어요. 기계적인 과정으로 일관하죠.”
나는 이말을 끝내면서, 그것은 나와 새 생명의 인간적 요소를 동시에 포기해버리는 듯한 감정이었다. 그러면서 조금은 씁쓸했다. 내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적 요소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말, 긴 시간을 용케도 견디어주었읍니다. 고맙습니다.”
그가 내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순간, 나는 이 감옥에서 해방되기만 하면, 먼저 그를 내 침실로 초대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그를 건너다보니까 그는 조금도 재미있는 남자일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엔지니어나 미장이 같은 노동자 같기만 했다. 그래도 어딘가 숨어 있을 듯한 아름다움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실망을 줄 뿐, 어느 한구석에도 내가 좋아하는 매력은 없었다. 짙은 눈썹, 맑은 눈, 얄팍하면서 매끄러운 입술, 숭글거리는 솜털 구멍, 약간 각진 딕 이라든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샤워를 해두십시오. 분만 후엔 당분간 샤워할 수 없읍니다.”
“좀 도와주시겠어요? 구부릴 수가 없더군요.”
“그러지요.”
그는 해부학에 쓰일 사체를 알콜로 닦아내듯 내 몸을 닦아놓았다.
다음날 새벽, 수술팀이 우르르 내 방으로 몰려들었다.
팔 오금 쪽 피부를 커트해 내고 혈관을 끄집어 내놓기 위한 작업을 벌일 셈이었다.
“기분은 어떠십니까?”
그가 뒤로 나타나며 물어주었다.
“좋아요, 아주.”
“조금도 걱정하실 것 없읍니다.”
전자 냉동판이 팔 위에 닿자마자, 곧 동전만큼의 부위엔 감각이 죽어버렸다.
와이샤쓰 단추구멍 따듯 누르는 칼로 피부를 커트하여 열었다.
나는 모니터에 나타나는 그들의 작업을 구경했다. 문득, 나는 기계적인 편리함, 그리고 삭막함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선생님, 인공분만하지 않을까봐요.”
“무섭습니까?”
“그건 아니에요.”
“어떤 수술도 모두 당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될 겁니다. 전혀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아니에요. 싫어요.”
나는 이 사람을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지난 열 달 동안 나는 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해주지 못했다. 내 자궁을 빌려 서식하고 있는 생물로 취급해왔다.
나는 어젯밤, 내 나신을 씻겨주면서 사체다루듯 기계적인 그를 보면서 공포를 느꼈다. 지금 태어나게 되는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 같은 괴물로 태어날 것을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천 이맥만 원짜리 로보트에 불과할 것이 틀림없었다. 아직은 내. 체온에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는 이 사람에게, 내가 베풀 수 있는 것은 마지막 과정만이라도 인간적인 과정을 거치도록 하는 것이었다.
커트했던 피부를 다시 봉합하고, 수술팀은 물러섰다.
좌식 분만기에 올라앉았다.
나는 책을 읽으며 진통을 기다렸다.
세월이 흐르고 과학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 세상이 왔어도, 인간의 눈을 네 개로 개량할 수 없고 생식방범 또한 편하고 보기좋은 방법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은 왜일까?
나는 새 생명을 기다리며 시간을 체크했다. 동시에 예금통장에 모여진 천 이
백만 원으로 가능한 모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진통이 올 때마다 그 계획들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여자인 나와 새로 태어날 새 생명체만이 이 세상에 남았다.
내가 여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에 새 생명은 분리되어나갔다.
뜨거운 화산의 폭발 같은 얼과 굉음을 내며 나는 나를 묶었던 사슬이 끊어져 달아나는 걸 몸으로 느꼈다. 새 생명은 하늘에서 땅으로 낙하하며 새빛을 보았다. 그 뒷날도 그 뒷날도 나는 잠에 빠진 채 일어날 수 없었다.
나흘째 되는 밤, 나는 형광등 불빛에도 눈이 시어 손으로 빛을 꺾어내며 우뚝 서 있었다.
“몹시 걱정했읍니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입술이 마르고, 혀는 입 천청에 달라붙어버린 것 같았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젖은 가제로 입술을 추겨 물기를 묻혀주었다.
“수고 많았읍니다. 당신은 이제 이곳에 처음 찾아오던 그날로 돌아가는 겁니
다.”
나는 손으로 애기를 보여달라고 청원했지만,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잊은 겁니다. 지난 일 년 동안의 시간을 완전히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그건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아시겠지요?”
그러자 나는 길고 질긴 끈에 매달려 새로 태어난 생명에 끌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일어났다.
“몇 달 걸릴 겁니다. 자궁이 완전히 수축될 때까지는 그 육체적인 접촉감을 기억 할 수밖에 없읍니다.”
“결국 기계일 수 없는 거군요?”
“당신은 성능 좋은 기계였읍니다. 지금 당신이 약간 고통받는 것은 아직 퇴화하지 못한 인간적인 요소 때문입니다.”
“선생님, 보여만 주세요. 결코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이 세상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바보로 보니까요.”
“저도 모릅니다.”
그가 차가운 뒷모습을 돌리고 내 방을 나갔다.
그는 내가 퇴원하는 날까지 날 만나주지 않았다. 다소 우둔해진 머리와 굵어
진 듯 손맛이 다른 허리를 선물받았다.
병원 밖, 아스팔트로 한 발 내디뎠을 때, 나는 휘청하고 시야가 한 바퀴 돌아가는 것처럼 착각했다. 허전한 배를 두 손으로 잡고, 중심을 빈 자궁안에 잡았다.
텅빈 배가 파도를 이기지 못하듯이, 나는 이 현기증을 견딜 수 없었다. 병원 뜰에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나는 쓰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기계가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오일이나 가스, 또는 그 어떤 힘을 빌리지 않고는 이젠 내 몸뚱이를 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걸까.
응급실의 빈벽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긴시간이 흘렀는지 짐작할 수도 없 었다.
나는 벽을 짚고 문을 더듬어 찾아냈다.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나는 또다시 모험을 기도했다. 인간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이 방법 밖엔 없었다.
나는 전광광고판이 흐르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러 가리라.
무성한 나뭇잎이 하늘을 가리고, 아직 전광광고판의 불이 켜지지 않은 낮에도 나는 거기서 시간을 보냈다. 보다 질 좋은 담배를 태울 수 있는 여자가 되었다. 풍선이 날았다. 풍선에 매달린 방울이 짤랑대며 나지막하게 날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남녀가 풍선 임자를 안고 나타났다.
공원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를 초대해주었던 배우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애기를 낳았다니. 아닐 거야. 저 아이는 내가 빌려주었던 자궁에서 자란 아이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아이를 안고 가는 아름다운 여배우를 향해 비수를 날릴 결심을 했다. 저 아름다움을 위해 나의 일 년이 죽어버렸다면, 내가 저 아름다움을 질투하여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용히 일어섰다. 그들의 뒤를 줄렁줄렁 줄지어 따르는 사람들 틈에 끼었다. 투명한 살결을 드러내고 그 굉장한 명성을 뒤집어쓴 채 우주인처럼 걷고 있는 그들을 일정한 거리에 두었다. 내가 그 여배우를 대신하여 일그러지고, 고통받고, 감금되어 있을 때, 그들은 무대 위에서 그 썩어빠진 대사를 외웠을 뿐인데 박수를 받으며 만족한 미소를 팔았다.
적어도 나는 저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한 계획에 자궁을 빌려주지는 않았다.
나는 오른손을 귀 높이로 들어올렸다.
비수를 손바닥에 감추어 찹고, 숨을 죽였다.
여배우는 걸음읕 멈추었다. 뒤따르던 구경꾼들도 동작을 멈추었다.
정지된 과녁을 향해 비수를 던졌다.
풍선과 아이가 공중에 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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