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현 소설집 『너를 닮은 사람』(문학과지성사, 2021) 중 「지나간 미래」를 읽고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실수하는 인간』(개정판 『너를 닮은 사람』), 『품위 있는 삶』, 중편소설 『가해자들』이 있다. 젊은작가상, 김준성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 작가소개에서
서사를 잘 쓰고, 인물 묘사를 잘하는 작가라는 평을 듣는 정소현 작가의 소설이다. 『너를 닮은 사람』은 8편의 단편소설이 묶인 소설집이다. 이 책의 특징은 인물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과거에 붙들려 있고, 존재의 근원을 찾아 헤맨다. 성장 과정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해서 홀로 삶을 감내해야 하는 주인공들이 자주 나온다.
「지나간 미래」는 주인공에게 앞날을 보는 능력이 생기고부터 시간 감각이 완전히 흐트러진다. 서술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다. 특별하고 낯선 시점의 서술방식의 소설이라서 인상 깊었다. 대부분의 치매를 다루는 소설에서는 치매 환자가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이나 환자를 지켜보는 사람이 서술하는 방식이다. 정신이 오락가락한 주인공의 서술에 신뢰를 가지기 힘들기 때문에 선택되는 소설기법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6·25 전쟁 중 피난 과정에서 서울역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쾌나 흘렀지만 여전히 난민들이 들끓었다.”라고 현실과 과거를 오락가락하는 구조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은 평안북도 의주의 같은 마을에서 두 해 터울로 태어나 열일곱에 결혼에 서울고보를 다니는 남편을 따라와 서울 후암동에 살림을 차렸다. 6·25는 상상도 못 하고 살았다. 전쟁이 시작되자 이웃들은 짐을 싸서 피난길에 올랐지만, 주인공은 남쪽에 연고도 없었고, 북쪽의 가족들이 피난을 내려올지도 몰라서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혹시 헤어지면, 서울역에서 기다리라고 말한다. 1·4 후퇴 때 헤어진 남편이 자던 차림에 돕바 하나만 걸친 채로 끌려갔다. 남편을 기다리며 서울역을 배회하다가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이 생겼다. 어쩌면 자기가 겪은 일 같기도 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 같기도 했다.
한 남자가 찾아온다. 남편이 보내서 왔다는 그 남자는 남편과 닮았지만, 남편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그 남자는 남편과 자기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다. 남자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찾으러 온 아들이었다. 남편이 데려오라고 했다는 말을 믿고 그 남자를 따라 그 남자의 집으로 간다.
밤새 기침을 하는 아픈 남자는 다음 날 저녁에 장을 봐와서 마지막 만찬을 준비했다. ‘아들이 엄마라고 부르자 그가 불쌍해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라고 한다. 아들과 엄마가 진실로 대화하는 부분이 주인공이 엄마인 척하고 말하는 대목들뿐이다. 남자가 아파서 쓰러져 있는 동안 잠긴 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찾으려고 집안을 뒤지다가 남편의 시계를 발견한다. 이 남자가 남편도 해치고, 자기까지 납치한 것으로 생각한다. 아들은 아버지한테 함께 가자며 약을 나눠 마신다.
“처음엔 그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었지만, 상황을 보아 내 남편의 이야기가 맞는 듯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그가 만들어 냈다고 하기엔 너무 구체적이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물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고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
몸이 아파 죽어 가는 아들의 입을 통해서 믿기 어려운 진실이 밝혀진다. 주인공은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온전치 못한 기억으로도 그 말들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자기의 과오가 너무 힘겨운 현실이기에 치매 속에 숨어버린 것은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은 약을 마시는 척하고 뱉어내지만, 아들은 그 약을 삼키고 죽어 간다. 아들이 죽고 나자, 탈출할 줄 알았지만, 완전히 고립된다. 음식도 떨어지고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미래는 더 잘 보이고, 자주 보였다. 지나간 미래가 보여주는 모습은 자기가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의 경제적 무능을 경멸하는 사람이었고, 아들에게도 혹독하게 대한다.
집에 갇혀서 수없이, 수도 없이 살려 달라고, 사람이 죽었다고 아무리 소리를 쳐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순경마저도 치매로 늘 집을 나가서 찾아야 하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주위 사람들은 구조할 시기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구조된다.
겨우 목숨을 유지해 구조되는 상황에서야 이 현실도 미래라고 착각하며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서울역에서 남편을 기다려야 한다, 그곳에서 그나마 가장 행복했고 끝을 맺는다. 가장 불행하고 무서운 때였을 전쟁이 가장 그리운 때라고 표현한다. 믿기 어려운 혹독한 공포가 있는 미래를 떠올리면서도 그곳에는 그토록 기다렸던 남편이 있다는 것에 희망을 품었고, 그토록 기다렸던 남편이 결국은 주인공의 핍박에 의해 자살했다는 것이 진실이라는 비틀고, 꼬인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책의 두 가지 서사는 전쟁에서 헤어진 남편을 기다리는 나의 이야기와 치매에 걸린 엄마를 찾아다니는 아들과 엄마의 이야기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쌍두마차로 굴러간다.
책의 내용을 따라가며 서사의 흐름을 읽었다.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살림과 인정에 몰려 치매를 앓는 엄마와 자살한 남편, 몸이 아파 죽은 아들, 각자의 처지가 너무도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이 가족이 행복하게 살았을까….
첫댓글 참 감당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룬 소설을 소개해 주었네요.
작가들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일까 생각하면서 읽었어요.
스스로는 챙겨 읽을 기회가 없는 책인데 볼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
좋은 소설들 너무 많아서 공부해 나가기도 벅찹니다. 잘 읽어 주시고 댓글도 올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