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팔백 년 천연원시림의 바람과 향기를 담아 띄웁니다
무더위 끝없이 이어집니다. 차라리 올 여름의 이 무더위가 난데없는 일이라면 좋겠습니다. 내년, 그리고 그 이듬해에 이만큼 무덥지 않을 수 있다면 그나마 이 여름을 지낸 경험이 요긴한 체험이자 즐거운 이야깃거리로 남겠지요. 그러나 지난 며칠 새에 쏟아진 기상 전문가들의 예측에 따르면 올 여름의 무더위가 중뿔난 게 아니라, 기후 변화의 자연스런 흐름이라고 합니다. 점점 더 더워진다는 이야기죠. 몇 년 뒤에는 오월부터 여름이라 불러야 할 만큼 이른 더위가 찾아오고, 한 여름 기온은 사십 도를 웃돌 것이라는 잔인한 예상들이 이 여름을 더 못 견디게 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나무를 많이 심고 나무 곁에 더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 《나무편지》에서는 우선 알려드릴 이야기부터 전하겠습니다.
○ 날 더워도 《나무강좌》는 쉬지 않고 이어집니다 ○
다달이 둘째 주 수요일 아침 나절에 이어가는 부천시립 상동도서관의 팔월 《나무강좌》 소식입니다. 내일 화요일(팔월 칠일)이 가을을 일으켜 세우는 입추立秋이니 내일 모레의 《나무강좌》에서는 가을 맞이 채비에 나선 나무 이야기를 나눠야지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즈음의 날씨를 봐서는 도저히 가을 이야기를 입길에 올릴 수 없겠습니다. 이번 팔월 강좌에서는 지난 달 강좌의 말미에서 알려드렸던 것처럼 〈어머니의 나무, 느티나무〉 이야기를 전해드리렵니다. 팔월에 꼭 돌아봐야 할 나무로 〈나라꽃 무궁화〉도 짚어보겠습니다. 아, 참! 지난 달에 시간이 모자라 미처 들려드리지 못한 〈삶과 죽음의 변증, 정선 정암사 주목〉 이야기도 전해드리겠습니다. 무더운 날씨이지만, 나무 이야기 들으며 시원한 나무 그늘, 숲의 바람결을 느끼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올 가을엔 서강대에서 나무의 향기를 바라보세요 ○
서강대 평생교육원의 《나무 인문학》 강좌 소식도 아울러 알려드립니다. 지난 해 이맘 때에 처음 개설한 강좌입니다. 서강대 평생교육원의 《나무 인문학》 강좌는 봄 학기와 가을 학기에 제가끔 다른 내용으로 일년 내내 이어갑니다. 올 가을 강좌는 〈나무의 역사〉라는 부제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나무,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꽃,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나무 등 나무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내용으로 구성해 진행합니다. 학기 중에는 두 차례의 현장 답사 실습도 계획되어 있습니다. 오늘 낮부터 아래의 강좌 신청 페이지가 열릴 겁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http://bit.ly/2LV6Oil <== 서강대 평생교육원 《나무인문학》 강좌 신청 페이지
○ 숲 깊은 그늘까지 스며드는 불볕 더위 ○
이제 오늘의 나무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며칠 전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숲〉에 들었습니다. 국립제주박물관의 인문학 강좌가 있어서 비행기를 탄 김에 박물관 관사에서 하루 머물고 이튿날 제주 지역의 큰 나무를 답사할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질비질 흐르는 날씨에 여러 나무를 찾아본다는 건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그저 깊은 그늘의 숲에 들고만 싶었습니다. 자연스레 애써 짚어두었던 모든 나무, 모든 길을 포기하고 서둘러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숲〉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제주! 더구나 지난 겨울에 제주를 찾았을 때, 일정이 맞지 않아 다음으로 미루어두고, 그리워 했던 숲입니다.
숲이라고 해서 이 무더위를 피해가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이 숲을 찾은 며칠 전만 하더라도 본격 휴가 철이 시작하기 전이었지만, 무더위 탓에 휴가를 앞당기는 분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주말이 아닌데도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숲〉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평소와 달리 주차장에서부터 나들이객으로 붐볐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뙤약볕을 벗어나 숲 그늘에 들려고 카메라를 비롯한 몇 가지 장비를 챙겨 들고 나섰습니다. 그래봤자 활짝 피어난 수국 꽃이 반기는 입구 매표소부터 비자나무 우거진 숲길까지의 뙤약볕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 1992년부터 일반인의 관람을 허용한 비밀의 숲 ○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숲〉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원시림의 형태를 유지한 곳입니다. 세계적으로도 그리 흔치 않은 숲입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전체 숲 가운데 일부 구간에 산책로를 만들어 일반인에게 개방한 것은 1992년입니다. 얼마 되지 않은 거죠. 이어서 2012년 봄에는 산책로 일부를 정비하고 관람 구역을 조금 더 추가했습니다. 비자나무 숲이라고 하지만, 이 숲에 비자나무만 있는 건 아닙니다. 건강한 숲은 한 가지 종류의 식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비자나무가 주종이지만, 그 외에도 자귀나무, 아왜나무, 머귀나무, 후박나무, 천선과 등 제주 지역에서 자생하는 난대성 목본 식물이 다양하게 자라고, 초본식물도 다양하게 자랍니다.
숲의 비자나무들은 대개 삼백 년에서 팔백 년 정도 됐습니다. 자연 상태가 잘 보존된 숲이어서 그 안에는 새로 자라난 어린 비자나무들도 간간이 눈에 띕니다. 그러나 숲을 울창하게 만드는 나무들은 적어도 삼백 년은 넘은 큰 나무들입니다. 물론 입구의 산책로 양쪽으로는 새로 심은 어린 나무들도 있지요. 팔백 년 전에는 이 숲에서 마을 당산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비자나무 앞에서 올리는 제였기 때문인지 제를 올릴 때에는 제상(祭床)에 반드시 비자나무의 열매인 비자를 올렸다고 하지요. 제를 마치면 사람들은 제상에 올렸던 비자를 주변에 뿌렸어요. 그때 뿌린 열매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면서 이 아름다운 숲을 이루게 됐다고 합니다.
○ 숲과 나무를 보존해온 잔혹 전설 ○
이 숲에 들어설 때에는 일단 몸가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오래 전부터 이 숲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거든요. 이 숲에 들어가서 나무를 훼손하는 건 둘째 치고, 아예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해도 천벌을 받는다는 전설이 오래도록 전해왔습니다. 조금은 황당하기도 하고, 살벌해 보이기도 하는 이 전설은 이 숲을 잘 보존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이겠지요. 이 지역 사람들에게 이 숲이 대관절 어떤 존재였기에 이토록 무시무시한 전설을 만들어냈을까 궁금해질 수밖에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자나무의 특징과 그에 맞춤한 쓰임새를 알아야 합니다.
비자나무 줄기의 느낌은 여느 나무와 다릅니다. 포근하다거나 푹신하다고 해야 할 느낌을 가졌습니다. 비자나무 줄기의 이같은 특징은 좋은 목재로 쓰일 수 있는 특별한 조건이지요. 비자나무는 예로부터 아주 좋은 목재로 많이 쓰였지요. 비자나무는 특히 가구재라든가 건물의 고급 장식을 해야 하는 부분에 많이 썼습니다. 목재가 무른 듯하지만 내구성이 강해 다루기 편하면서도 오래 보존할 수 있는 고급 재료입니다. 현대에는 최고급 바둑판의 재료로 쓰인다고 합니다. 비자나무의 무른 듯하면서도 강인한 특징이 바둑 돌에 의해 생긴 흠에 대한 자연 복원력을 보장한다고 합니다.
○ 팔백 년 된 비조목이 지켜온 원시림 ○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모두 비자나무의 쓰임새는 잘 알려져 있었어요. 그런데 그 비자나무가 주로 남해안 지방에서 자라고, 그 가운데에도 제주도 비자나무는 질이 좋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제주 지역 사람들에게는 귀한 재산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심지어 제주도 비자나무 목재는 원나라에 조공으로 바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잘 지켜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아예 이 숲을 신성한 숲으로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자는 생각으로 앞의 전설을 지어내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이지 싶습니다.
절실한 이유로 만들어진 전설에 의해 지켜온 숲을 지금 산책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상들과 우리 자연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산책로를 따라 얼마 쯤 들어가면 이 숲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된 비자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됩니다. 이른바 ‘조상목’ 혹은 ‘비조목’이라고 부르는 매우 큰 나무입니다. 줄기 부분만 봐도 그가 지내온 세월의 풍상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을 만큼 융융한 이 나무의 나이는 팔백 살입니다. 팔백 년 된 원시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 거죠. 키가 그리 큰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에 살아있는 비자나무 가운데에는 이 나무만큼 장한 모습으로 큰 나무는 없을 겁니다.
○ 세월의 향취를 느끼기 위해서는 조금 더 천천히 ○
이렇게 오래 살아온 나무들을 보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냥 한 곳에서만 바라보면 나무의 웅장한 맛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나무 둘레를 빙빙 돌면서 사방에서 고르게 관찰해야 합니다. 나무는 특히 큰 나무일수록 보는 방향에 따라서 제가끔 다른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적어도 서너 바퀴 쯤 돌면서 천천히 나무를 관찰해 보세요. 처음에는 전체 모습을 위주로 바라보며 돌아보고, 다음에는 가지가 어떻게 펼쳐졌는가를 바라보며 돌고, 세 번째는 줄기 표면에 아로새겨진 세월의 풍상을 느껴보면서 돌아보세요. 아마도 나무에 담긴 팔백 년 세월의 향취가 고스란히 우리 몸으로 전해올 겁니다. 이 아름다운 숲을 팔백 년 동안 지켜낸 그의 장한 생명에 인사도 올려야 합니다.
뜨거운 날씨가 이어지는 팔월, 벌써 《나무강좌》가 들어있는 둘째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자 가장 오래 된 천연의 원시림인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 숲〉의 그늘에 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나무편지》에 담아 띄웁니다.
고맙습니다.
- 원시림 숲 그늘의 맑은 향 삽상한 바람 한껏 담아 8월 6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