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청화 스님과 월인 스님, 그리고 정토와의 만남
청화 스님, 「월인 스님 이야기」 (일용, 「법의 향기」)
월인月印 스님이라고 말씀 들어 보셨습니까? 한국 현대 승려 중에서 가장 숭배하는 어른입니다. 그이가 구산九山 스님하고 좋은 도반입니다. 구산 스님은 이발사 하다가 월인 스님은 시계 수선공 하다가 승려가 된 분이기 때문에 두 분 다 한 동갑이고 해서 굉장히 가깝게 지냈습니다. 저도 인연이 닿아서 그분하고 백장암白丈庵에서 한 철을 지냈어요. 그 뒤에 여러 차례같이 지냈고 제가 광양 사성암四聖庵에 있을 때도 같이 좀 지내고 그랬습니다.
애초에 그 양반을 제가 알게 된 것은 젊은 사람들이 한 댓이나 구례 사성암에 왔는데 거기가 굉장히 높아요. 옛날에는 교통도 사납고 그때는 섬진강을 건너서 와야 했는데 누가 특별한 사람 아니면 오질 않아요. 혼자 지낼 때도 그랬는데, 학생들이 한 댓이나 한 봉 꿀을 하나 가져왔어요. 그때는 내가 40대 조금 넘었을 때이고 아는 신도도 별로 없는데 여기까지 무슨 정성으로 누가 보내서 가져왔느냐고 하니까, 월인 月印 스님께서 보냈다고 해서 월인 스님을 한 번 만나 뵙지도 못했는데 그 양반이 나한테 무슨 뜻이 있어 보냈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고맙다고 인사했는데 (…) 그 학생들 하고 얘기를 나눈 뒤 보내 놓고 생각해보니 저보다도 훨씬 선배이고 한 번도 인사를 못 드렸는데 꿀만 받아먹고 그냥 말수가 없어서 용돈 좀 아껴 두던 것을 가지고 그때는 설탕 같은 걸 사기가 참 어려웠던 때이고 아주 귀할 때인데 시내에 아는 점포에 가서 설탕과 과자를 사서 걸망에 지고서 그 양반이 그때 함양 토굴에 계실 때예요. 묻고 물어서 올라갔는데 한 봉 벌통이 몇 개가 놓여 있고 나뭇등걸로 앉는 의자를 만들어서 한 스님이 앞만 바라보고 가만 계시는 것이 꼭 신선 같았어요. …
그때는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앉아서 베길 땐데, 토굴이니까 방이 하나뿐이지요. 아, 거기서 같이 자는데 이 양반이 한밤중에 굉장히 부대껴 하세요. 한 시간쯤 지나니까 진정이 된다고 해서 같이 정진했는데 그때 추렴이 돼 가지고 가끔 더러 지내기도 하고 백장암에서 한 철 지내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같이 공부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지만, 내가 하는 공부 방법이 마땅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당신은 화두 일변도라서 마땅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하여튼 몇십 년 동안 공부하고 온 사람을 자기가 그걸 말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말라고 한들 제가 또 말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게 왔다 갔다 친하게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니까 공부 방식이야 뭐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는 것이라고.
한번은 (…) 자기 상좌하고 같이 왔어.
“청화 스님, 나 봐. 내 얼굴 좀 보라”고 해서 “스님 얼굴 대저 참 좋습니다” 얼굴이 그 전보다도 아주 푸근하게 생각이 된단 말입니다. 이 양반이 평생 계행을 잘 지켜 참 굉장히 청정한 분이셨습니다. 비구니 스님이 뭘 줘도 여자가 줬다 해서 안 받았어요. 그럴 정도로 아주 청정한 분이고 청정하게 살았기에 옷이 없어 구산 스님께 두루마기도 얻어 입었다고 저한테 말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그전에는 서릿발 차듯이 쌀쌀하게 보였는데, 평생 토굴에서 지내면서 계행 바르고 평생 화두 하니까 의심하려면 의심하는 작업이 쉬운 것이겠습니까? 한두 번이 아니라 몇십 년 동안 의심하고 살았으니까 아무래도 표정도 그런 쪽으로 굳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 양반의 얼굴이 훨씬 푸근해요. 그러면서 “내가 지금 그 전과 달리 얼굴이 이와 같이 푸근하게 보이잖아. 다 청화 스님 덕택이야.” 그래서 “제 덕은 무슨 제 덕이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염불을 해” 그전에 만났을 때는 내가 장좌長坐 한다고 제법 공부하는 모양은 갖추니까 나한테 대놓고 그래요. “아이고 참, 청화 스님 화두 했으면 진작 깨달아 버렸을 것인데.” 이런 말도 하신 적도 있었어요. 그러면 나는 “제가 업장이 무거워서 그럽니다” 하며 웃고 그랬는데 이젠 당신이 염불한다고 그래요. 대저 얼굴이 푸근하게.
이 양반이 하도 정직하고 원칙적인 분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만나면 하여튼 다른 것 할 것 없이 염불하라고 권합니다. 자기 상좌 ○○스님이라고 나한테 오면 항시 수행법에 관해서 꼬치꼬치 질문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아주 힐난하듯이 따지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자기 스님이 그러니까 거기에 안 따라갈 수가 있습니까? 한 4~5년 전에 변산 실상사 개원식 때 그 양반이 월명암月明庵에 조실로 계셨네. 내가 왔다고 그러니까 월명암에 케이블카 비슷한 모노레일인가 하는 그것 타고 내려오셔서 만나고.
“늙은 말년이니까 청화 스님하고 꼭 같이 지내고 싶은데 청화 스님은 워낙 아는 사람이 많아 복잡하고 나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같이 지내지도 못해 섭섭하다“고 그래. 그래서 ”제 마음은 항시 스님을 모시고 같이 지내는 그런 기분입니다“ 그러고 헤어졌는데, 돌아가셨다고 해서 내가 꼭 참여하려고 마음먹었는데 49재도 참여를 못 하고 그렇게 됐네.
염불이라는 것이 보통 참선하는 사람들은 저만치 미트로 생각합니다. 방편 공부로서 참다운 참선이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깊이 공부한 분들은 그런 서투른 말을 차마 못 할 것입니다. (…) 그러니까 염불이라는 것이 아까도 말씀마따나 월인 스님 같은 분도 저는 그이가 굉장히 복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그냥 자기가 평생 한 대로 익힌 대로 가 버리는 셈인데 그때 나한테 염불한다고 한 것이 팔십 거의 다 돼서 구십 넘어서 그이가 갔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한다고 할 때 역사적으로 고찰을 잘못하면 하나에 치우쳐 버린단 말입니다.
3) 월인 스님의 본디 모습
무주 선원 「미타행자의 편지」
월인月印 노스님을 저는 뵌 적이 없습니다. 다만 들리는 말을 귀동냥으로 들었을 뿐입니다. (청화) 큰스님께서 소참법문 가운데 당신께서 존경하는 스님이 월인 노스님이라 하시며 월인 노스님과의 인연을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첫 만남은 사성암에서 정진하실 적에(1965년 42세?) 월인 노스님께서 꿀을 보내 주시었고 당신께서 고맙기도 하고 인사로 꿰맨 고무신을 신고 15리를 걸어가 백설탕을 사서, 그 당시는 백설탕이 귀하고 좋은 선물이었다고 합니다. 월인 스님이 계신 함양토굴을 찾아가시었다고 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당신께서 신도 시주 안 받고 사신다고 벌을 키웠는데 언제인가 외출하고 돌아오니 벌통을 곰? 산짐승이 다 패대기쳐 놓아 그 후로는 벌을 안 키우셨다고 합니다.
아무튼 공부 방법은 달라도 두 분께서는 청정하게 지독스럽게 사시는 코드는 맞아서 대중 처소에서 함께 정진도 하시었는데 구참 스님께서 함께 사실 적에 월인 노스님께서 큰스님께 ”청화는 화두 했으면 진즉에 깨달았네“ 하시며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제 사형 스님께서 월인 스님 상좌 하고자 찾아갔더니 월인 스님께서 ”청화 스님이 나보다 더 도인이니 청화 스님에게 가라“고 해서 제 사형 스님이 되었고, 월인 스님 상좌분은 은사 스님(청화 큰스님) 상좌가 되고자 찾아가니 ”나보다 월인 스님이 더 훌륭한 분이니 월인 스님에게 가라“고 해서 월인 스님 상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는데, 두 분께서는 연세 차이가 많이나도 (은사 스님보다 13세 위) 서로 존중하셨던 것 같습니다.
월인 노스님께서 말년에 월명암에 계실 적에 도반 스님이 찾아뵙고 인사드리는데 겨울 냉방에 전기장판 하나 깔고 앉아 계시는데, 누비 입고 인사드리는 젊은 수좌가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고 합니다. 도반 스님이 ”땔나무가 없나…“ 하고, 없으면 해드리려고 광에 가 보니 땔나무가 그림처럼 정돈되어 있었는데 당신께서는 말년까지 물 한 방울 나무 한 토막도 아끼며 정진하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일념 화두로 정진하시다가 말년에 염불 수행으로 바꾸니 수좌 스님들 사이에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옛날 어른 스님들은 말년에 염불 수행으로 회향하는 일이 종종 있는 일인데, 젊은 시절 장한 신심으로 돈오돈수頓悟頓修 하겠다고 애쓰다가 말년에는 한계를 느끼고 극락세계 왕생하여 마지막 깨달음을 얻겠다는 모습이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말세라 해도 알게 모르게 변방에서 이름 없이 애쓰는 스님네들이 계시는 것은 사실이고 증오證悟 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임을 절감합니다.
당신의 염불 수행도 정갈하시었겠지요. 열반하실 적에 시봉 하였다는 거사님을 만났는데 90 연세에 약간의 미질微疾이 있더니 두 달 만에 조용히 열반하셨다고 열반상이 주변 분들에게 신심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화두를 하던, 염불하던, 일생을 청정하게 거짓 없게 정진하며 지내신 분인데 그 공덕이 어디 가겠습니까/
다만 ”나무아미타불“은 마지막 칭념할 수 있는 부처님 명호이자 진언입니다. 108 참회문에도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부처님 명호이며 천수경에도 보살님 명호 맨 끝에 등장하는 나무 본사 아미타불입니다. 중생이기에 바로 질러가지는 못하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지막에 가서야 아미타 부처님께 정토淨土로 귀의하는 것입니다.
4) 현대판 화두 놓고 염불하세 - ”극락 발원해서 극락 가자꾸나“
『불일회보』(송광사) 「특별초대석 : ’수행승 중의 수행승, 월인 스님‘」
1994년 6월 1일.
’내가 왜 진즉 거기에 참가를 못 하고 인제사 알게 되었나‘
오히려 후회한 생각으로 남도 권하고
나도 극락 가자고 발원하고 있어.
지금 나한테는 다른 소리,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무슨 참선한다는 사람에게도
’참선해야 소용없는 짓 하지 마라.
너 차라리 공부하려면 아미타불 부르고
극락 발원해서 극락에 가자꾸나.‘
나는 그런 소리밖에는 안 하고 있어.
그래 ’아미타불을 신信하고 자꾸 염불하면 극락에 가는구만.
누구라도 어떤 사람이라도 만인이 닦으면
만인이 한 사람도 안 빠지고 다 간다‘ 그랬어.
이렇게 쉬운 법이라 이것이.
근데 난 입때껏 참선한다고 꺼떡거리고
남들 가르친다고 꺼떡거리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막심해.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러면 욕도 할 텐데,
선방에서도 내가 그렇게 하니 큰 욕은 않고
모두 더러 긍정을 하데. 일생을 참선하던 사람이
뜬금없이 정토발원을 막 하라고 하고,
나도 하고 그러니까 욕할 텐데 뭐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인제 다른 사람들도 다 지쳐서 아마 그런 것 같애.
예까지 왔으니 보물 한 권(정토삼부경) 줘야지.
가서 읽어봐. 열심히 읽어 실천하면
극락에 가서 또 만나누만.
틀림없이 내가 결정코 갈 거라 극락에….
卍 보정의 꼬리말
월인 스님에 대한 비문도 없고 탑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말년에 불교신문과 불일회보에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 것이 있고, 청화 스님과 제제가 증언한 기사를 모아 배치하고 나니 꼬리말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삶 자체가 단출했고, 수행 자세도 솔직하고 뚜렷했기 때문이다.
원아임욕명종시 진제일체제장애 면견피불아미타 즉득왕생안락찰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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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진즉 거기에 참가를 못 하고 인제사 알게 되었나' 오히려 후회한 생각으로 남도 권하고 나도 극락 가자고 발원하고 있어. 지금 나한테는 다른 소리,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무슨 참선한다는 사람에게도 '참선해야 소용없는 짓 하지 마라. 너 차라리 공부하려면 아미타불 부르고 극락 발원해서 극락에 가자꾸나.' 나는 그런 소리밖에는 안 하고 있어. 그래 ’아미타불을 신信하고 자꾸 염불하면 극락에 가는구만. 누구라도 어떤 사람이라도 만인이 닦으면 만인이 한 사람도 안 빠지고 다 간다 그랬어. 이렇게 쉬운 법이라 이것이.
근데 난 입때껏 참선한다고 꺼떡거리고 남들 가르친다고 꺼떡거리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막심해.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러면 욕도 할 텐데, 선방에서도 내가 그렇게 하니 큰 욕은 않고 모두 더러 긍정을 하데. 일생을 참선하던 사람이
뜬금없이 정토발원을 막 하라고 하고, 나도 하고 그러니까 욕할 텐데 뭐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인제 다른 사람들도 다 지쳐서 아마 그런 것 같애. 예까지 왔으니 보물 한 권(정토삼부경) 줘야지. 가서 읽어봐. 열심히 읽어 실천하면
극락에 가서 또 만나누만. 틀림없이 내가 결정코 갈 거라 극락에…()
감사합니다
오늘이 입동이네요
건강 잘 챙기세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세계 최고의 대학
미국의 하바드나
영국의 옥스포드
무엇 때문에
최고라 칭할까요?
하바드는
옥스에 비하여
전통은 일천한데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야 간단하죠.
최고의 석학과
최고의 인재가 몰려들어
최고의 대학으로
명맥을 유지하지요.
법성사 주지 인종은
인근의
德이 높은 사람들을
모이게 한 뒤
혜능의 머리를
직접 삭발하고
戒를 주었지요.
혜능이
율사(律師) 지광에게
(智光이란 법명은 포이동의 능인선원 주지가 사용하고있지요 가로롭게도....)
만분계를 받고 난 후
주지 인종은
혜능의 제자가 되었지요.
불법을 설하기에는
어설프고 황폐한
河南의 땅에서
불교 역사상
불세출의 인물로 태어난
혜능은
법성사에서
최초로 불법을 說하였지요.
혜능의 소문은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
수많은 승려들이
그의 설법을 들으려
장강을 건넜지요
바야흐로 법성사는
중국 최고의 사찰로
자리매김을 하는것이죠
옥스나 하바드같은..........
명문 중에 명문
사찰로 태어나는 것이죠.
그런데 얼마 후
혜능은 대중들에게
나는 이곳에
거처하는 것을 원치않고
내가 처음 입산했던
황매산
보림사로 돌아가겠소.
이에 주지 인종과
스님 천여명의
전송을 받으며
보림사로 돌아가는
혜능과
석별의 정을 나눴다 하네요
돌아가는 길에
韶州刺史(소주자사 지금의 도지사 급)가
대범사에서
혜능에게
法輪을 청해 듣고
이에 감복하여
無相心地의 계를
혜능에게 받았다고하네요.
이미 혜능의 단경(壇經)이
門人들 사이에
절찬리 판매되고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혜능의 줏가는
오르기만했데요
혜능이
曹溪(조계의 총 본산 보림사)에 돌아 오자
두개의 큰 법우(法遇)를 이루어
승려와 학자 수천명이
배우기를 청하였다 하네요.
의심스러운 것은
왜 하남에서 하북
자신이 입산한
보림사를 다시 찾았냐는 것이죠
혜능은
중국의 불교를
이끄는 중심으로는
하남이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부분에서
하남은 하북에
넘 뒤떨어져 있어
혜능은
하북으로 옮겨와
인재를 모우고
보림사를 발판으로
하남의 민초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부분에서
하남은 하북에
넘 뒤떨어져 있어
혜능은
하북으로 옮겨와
인재를 모우고
보림사를 발판으로
하남의 민초들에게
河北에서 불법을 배운
승려들을
하남으로 보내
포교를 할 의도가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혜능이
불교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것은
글자를 모르는
무지렁이들도
부처가 될수있다는
불교의
대중화를 이룬것이죠
그 시절
어려운 불경과
불법을 접하여
해독하는 이가
몇이나 되었겠어요.
왕족과 귀족
일부 스님들 뿐이었겠지요.
불입문자(不立文字)를
설하고
심청정즉시불(心淸淨卽是佛)이라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수행을 통하여
부처의 길을 제시한
혜능
그가 부르짓었던
禪을 통하여
견성성불 할수있는
길을 제시했지요.
위대한
한 시대의 위인을
얄팍한 지식으로
그분을 알린 내가
부끄럽네요.
부처의 법을 따르는
모든이들은
과거와 미래의
리더가 되지말고
현실에 리더가 되어야
부처의 정신은
찬란히 꽃피우고
그 안에서
제 이 제 삼의
혜능은
태어나겠지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