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어린 시절에는 신부님을 ‘형’이라 불렀지요. 호칭만 형이 아니었습니다. 친형처럼 다가온 신부님은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바보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고, “겸손함이 세상 모든 것을 이긴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림을 좋아하셨던 신부님은 그래서 ‘바보 예수’를 즐겨 그리셨지요.
신부님은 신비스런 과묵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수백 수천 화살이 쏟아지듯 날아오는 그런 분위기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꾸며진 겸손도 없었습니다. 늘 밝고 화창했습니다. 그런 신부님을 늘 마음으로 존경했습니다.
그런 신부님께서 어느 날 저에게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목각상 하나를 선물하셨습니다.‘팔 없는 예수’였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신부님은 그 목각상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팔 없는 예수님의 팔이 되어라.” 그리고 덧붙이셨습니다. “앞으로는 평신도가 교회의 주축이 될 것이다.”
평신도가 교회의 주축이 된다니…. 성직자가 하늘로 보이던 ‘성사부일체’(聖師父一體)의 어린 시절, 저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교회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저는 성장하면서 평신도 사도직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평신도 사도직 활성화는 여전히‘구호’에 머무르고 있는 듯합니다. 한국에선 평신도에 의해 주도되는 신앙 운동이 거의 없습니다. 인품과 학식, 신심을 두루 갖춘 평신도라 해도 한국교회에선 대접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평신도 스스로의 잘못이 더 크다고 봅니다. 평신도 단체치고 잡음 없이 굴러가는 단체가 거의 없습니다. 도대체 믿고 맡길 수가 없습니다. 본당 사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뜻이 맞지 않아도 반목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소위 ‘교회 공부’ 좀 했다는 신자들이 더합니다. 본당 활동하다가 신자들에 의해 상처 입고 냉담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한국에선 ‘평신도 종신 부제직’이 시기상조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신도 사도직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평신도 사도직이 한국교회의 토양이자, 동시에 당면한 무거운 과제를 들어 해결할 수 있는 지렛대이기 때문입니다. 소공동체 구역 반장 한 명 한 명이 모두 개신교 목사님 수준이 될 때, 어느 개신교회가 우리를 따라 오겠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학식과 신심, 인품을 두루 갖춘 평신도 명강사가 많습니다. 이들에게 자리를 열어 주어야 합니다. 오직 교회를 위해 한 인생을 바치겠다는 순수한 열정을 가진 이들도 많습니다. 이들은 멍석만 깔아주면 혼자서라도 웬만한 신앙 잔치 하나씩은 너끈히 치러낼 위인들입니다.
중국 춘추시대 고사에서 유래한‘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입니다. 평신도 사도직 활성화 없이 한국교회 발전도 없습니다.
팔 없는 예수 목각상을 떠올려 봅니다. 팔 없는 예수님의 팔이 되라 하신 신부님의 말씀도 다시 한 번 묵상해 봅니다. 이 땅의 평신도들이 모두 팔 없는 예수님의 팔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우광호 기획특집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