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
밀짚모자
창가 한구석 웅크리고 있던 밀짚모자가 나를 반긴다. 뜻하지 않은 인연이지만 마음이 쓰이는 건 왜인지 모를 일이다.
주인의 무심함이 궁금해진다. 주민자치센터의 동아리방이기도 한 공간이다. 한 번쯤은 스쳐간 그 자리를 충분히 기억할 수 있으련만. 어느 여인의 잦은 건망증이 아니면, 잃어버린 것에 대한 미련을 쉽게 포기하거나 먼 곳에 있어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가. 추측을 해 볼 뿐이다.
목련이 만개하던 봄날의 조우였지만, 이제는 녹음이 무성해진 여름이다. 한 계절의 변화도 외출이 없었던 모자는 알 턱이 없다. 주인이 나타나리라 기대하긴 이미 어려운 일이다. 처음엔 '아, 저 모자 아직도……' 하던 이들도 익숙해진 마주침 때문인지 더는 눈길을 주지 않는 것 같다.
분홍빛 리본 장식이 우아했던 처음과는 달리 밀짚모자에서 점점 쓸쓸함이 묻어난다. 한 여인의 손때가 묻고, 체취가 배고, 함께 한 추억을 끌어안고, 쌓이는 그리움으로 부대끼는 가슴이 보여서인가.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모자가 안쓰럽다.
얼마 전, 친구가 여동생의 초대로 미국을 가게 되었다. 평소 각별함 때문인지 내 이메일 주소를 재차 확인하며 떠났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곳에 머무는 한 달 내내 깜깜무소식이었다. 나도 친구에게 밀짚모자가 된 건 아닐까. 이국 정취에 반해 나란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을 그녀에게 은근히 심술이 나기도 했다.
친구는 서울에 돌아와서야 소식을 전했다. 미국에 머물면서 관광명소로 구경한 곳이라곤 '나이아가라 폭포'뿐이라는 서두에 웃음이 났다. 친구는 남편 사업 실패의 후유증을 크게 앓던 중이었고 미혼인 동생도 고학하는 형편이니 마음 편히 여행 다니기가 쉽지 않았던 듯하다.
게다가 친구 동생이 얻은 집은 뉴욕에서 1시간 정도 벗어난 변두리라 인터넷도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거대한 도시 미국에서도 원시인처럼 세상과 단절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더구나 주변은 온통 숲이어서 다람쥐, 토끼, 야생동물이 심심찮게 집 정원에 내려와 노는 풍경은 우리나라 깊은 산골에 온 듯 착각이 들기도 했단다. 자연스레 푸른 나무와 청정한 공기, 기계음의 소란함이 사라진 자연 속에 파묻혀 동화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나 보다.
언제부터인지 편히 잠들 날이 없었던 그녀였다. 오랜만에 얻는 평온함. 양탄자처럼 부드러운 초원에 누워 지치고 피곤했던 몸을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에 실었으리라.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복잡한 심정을 잠시라도 내려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친구의 떨림이 아직도 전해진다. '미국을 가는 동안 기내에서 창밖으로 내 몸을 날리는 상상을 몇 번이고 했단다. 그만큼 내가 처한 상황은 절박하건만 참, 이상하더라. 나 홀로 뚝 떨어져 먼 나라에서 마음껏 푸른 하늘을 보다가 어느 한순간, 내가 살아 숨 쉰다는 희열감에 펑펑 눈물이 쏟아졌어. 늘 남편을 생각하면 미움뿐이었는데 왜 그의 얼굴이 측은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더라.'
친구 남편은 사업 확장에 과도한 욕심을 부렸다. 결과는 우려한 대로였다. 한사코 만류한 아내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음을 뒤늦게 후회한들 소용이 없었다. 그 풍파로 당사자는 물론이고 친구가 대신 감당해야 할 일은 첩첩산중이다.
아마도 이번 여행은 남편과의 결별을 심각하게 고민하며 떠났던 듯싶다. 하지만, 친구는 그동안 소원했던, 아내의 자리로 묵묵히 돌아갔다. 폐인처럼 쓰러져가는 한 남자를 거두는 그녀가 고맙고 따뜻하다.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남편의 존재 의미를 더 소중하게 믿었던 모습이 아름답다.
삶의 치열한 경쟁 탓일까. 요즘 사람들은 '존재감'이란 말로 자신의 상황을 높이 평가받길 즐긴다. 그러기에 어디서든 자기만의 역할이 돋보이거나 좀 더 의미 있는 존재로 남기를 소망하는 듯하다.
'밀짚모자'는 땀 젖은 농부의 머리이든 얌전한 여인의 찰랑거리는 머리이든 누군가의 손길에 비로소 그 존재가 더 빛날 것이다. 나 혼자서 완벽한 존재는 없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 속에 생성된 자리에서 진정한 아름다움과 생명력이 솟나 보다.
아무도 누군가에게 밀짚모자가 되기를 원할 사람은 없다. 나도 그렇다.
◇임정숙 약력
▶충북수필문학회·충북여성문인협회 회원 ▶초등학교 글쓰기·논술 지도강사, 1인1책 펴내기 지도강사 ▶문학공간 수필샘 동인집 다수 공저, 2009년 수필집 '흔드는 것은 바람이다' 출간 ▶문학공간 수필부문 신인상, 2007 청주 예술공로상 수상 ▶E-mail:limjs59@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