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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스크랩 타향살이
타잔김°³о♡ 추천 0 조회 86 12.11.11 20: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타향살이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고복수 노래

 

(대사)
나라는 망하고 사나이 이름없는 풀꽃도
우리들의 눈동자도 빛을 잃고 하늘에서
지저귀던 새들도 울음을 끊쳤다
펄렁이던 희망의 등잔불도 꺼지고
하염없는밤 쓰라린밤 너무나 가혹한밤만이 밀려왔다
남산외송대 가는길에  가스등 허미하고
진고개 계다장소리 높을때 박꽃이 하얀게
이우는 초가지붕아래 들께기름으로 피운
등잔불은 우리들의 가슴속이냥 어두워고
찢어진 들창문으로 새어나는것 한숨소리뿐이었다
못살아 고향에서 ?게난 사람들이 간도 용정에서
하루빈에서 상해관에서 일본동경 지저분한 뒷골못에서
울고 있었다 고향이 그리워서 보고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부평같은 내신세가 너무나도 서려워서.

 

타향살이 몇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앞에 버드나무 올 봄도 푸르련만
버들 피리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경상남도 울산군 출신으로 어릴 때 그의 집은 국수 공장을 했었다. 유년시절에도 축음기에 매달려 노래만을 부르면서 꿈많은 어린시절을 보냈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콜럼비아레코드가 주최한 콩쿠르 부산대회에 입상하고 경성부에서 열린 본선에 진출해 3위를 차지한 것이 가수로 데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34년에 〈타향〉과 〈이원애곡〉을 발표하여 음반은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했다. 후에 〈타향살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지게 된 〈타향〉은 일제 강점기 최고의 대중가요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크게 유행했다.

이후 1936년 말에 발표한 "아 으악새 슬피우는 가을인가요"라는 가사의 〈짝사랑〉이 또다시 히트하고 이은파와의 듀엣곡인 신민요 〈풍년송〉 등으로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오케레코드와 전속 공연단인 조선악극단에서 활동하다가 1940년부터 빅타레코드의 반도악극좌로 이동하였다. 여기에서 〈알뜰한 당신〉의 인기 가수 황금심과 만나 1941년에 결혼하였다.

고복수는 채규엽, 강홍식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초기의 가수로 분류되며, 이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다. 한숨을 쉬는 듯한 분위기의 가창은 〈타향〉, 〈사막의 한〉, 〈짝사랑〉 등 한탄조의 가사로 이루어진 그의 인기곡에 잘 어울렸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남인수와 백년설이 등장한이래 인기가 수그러들면서 1940년대부터는 무대 공연 위주로 활동을 전환하게 되었다.

인기 가수였지만 인생에 굴곡이 많았기에 불운의 가수로도 기억된다. 한국 전쟁 때는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가 탈출하는 일을 겪었고, 1957년 은퇴 공연 이래 손대는 사업마다 계속 실패하여 어려운 생활을 했다. 아내 황금심이 영화 주제곡을 부르며 생계를 연명하는 사이 고복수는 서적 외판원으로 일해야 했다.

이후 투병을 하다가 뇌신경 고혈압과 식도염으로 1972년 사망했다.

황금심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녀 가운데 맏아들이 트로트 가수 고영준, 셋째 아들이 작곡가 고병준이며, 둘째 며느리는 대학가요제 출신의 가수 손현희이다. 동화가요학원을 경영할 때 배출한 제자로는 이미자와 안정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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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이광수는 '노련', 이효석 '문단의 촉망' 012. 1. 5
 


이광수


EPL 에버턴 골키퍼, 91m 필드골 '진기록'美 포켓몬 게임왕 가족, 기네스북 등재 학교폭력 희화화 웹툰 버젓이 연재 강도로부터 아이 지킨 용감한 10대 母
1939년 '신세기' 9월호에 실린 문화계 인물평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누구나 잘 아는 조선신문학의 개척자요 지금까지도 창작의 붓을 쉬지 않는 노성(老成)의 작가다. 그의 작품은 가장 많이 조선의 젊은이에게 읽혀졌고 읽히고 있다. 노련하기는 하나 기술적인 농숙(濃熟)에 그칠 뿐 새로운 제네레이?을 끄러갈 아무런 영향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요새는 오직 염불로 세고(世苦)를 잊으려고 애쓰고 있다."
식민치하 비판 성향의 종합 월간지 '신세기' 1939년 9월호에 실린 춘원 이광수에 대한 인물평이다.

   근대서지학회가 발간하는 반년간 잡지 '근대서지' 4호는 1939년 당시 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인물평을 게재한 '신세기' 9월호를 발굴해 소개했다.

 

이효석 (서울=연합뉴스, 자료사진)

  

최상암, 김정혁, 남수월, 길진섭 등 당시 평론가 등으로 활동한 이들이 문화계 인사들을 촌평했다. 일부는 우수산인(愚愁散人), 인왕산인(仁旺山人) 등 필명으로 글을 썼다.
특히 소설가와 시인들에 대한 평가는 거침이 없다.
소설가 김동인에 대해서는 "큰 키로 거러다니는 것을 보면 날카로운 데도 없고 재치도 있어 보이지 않으나 그저 꾸준한 맛이 있다"고 했으며, 시인 김동환은 "'국경의 밤'으로 한때 젊은이들을 울리드니 근래에는 그저 문단의 신사라고나 해둘가"라고 적었다.

   또 '향수' '고향' 등으로 유명한 시인 정지용은 "조선문단의 뚜렷한 존재이나 거기 비해 시는 박력도 없고 감정의 격한 움직임도 없는 듯 제조 있는 시인이나 듬직한 맛은 적은 것 같다"고 촌평했다.

 

김정구 (서울=연합뉴스, 자료사진)

  

반면 소설가 이효석("이 곳 문단의 촉망을 두 억개에 지고 있다"), 임화("평론으로 시로 그의 문단적 존재가 혜성적임은 누구나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유진오("양심적 작가로 꾸준한 작가다") 등은 높게 평가했다.
'목포의 눈물' 이난영, '타향살이' 고복수, '눈물 젖은 두만강' 김정구, '추억의 소야곡' 남인수 등 가요계를 주름잡은 대중가수에 대한 인물평도 눈길을 끈다.

   "그의 노래는 비단결같이 곱다. 곱기 때문에 그 노래 또 애수에 이어 한나절이라도 울고 싶어 한다"(고복수에 대한 평)
"그는 노래라는 것보다 우슴과 풍자를 갖고 자기의 지반을 확수(確守)하려고 한다"(김정구에 대한 평)
이 밖에 영화인과 미술인, 조선일보, 동아일보 신문사 대표 등에 대한 촌평도 실렸다.

 

 남인수 (서울=연합뉴스, 자료사진)

  

신세기는 1939년 1월 창간돼 1941년 6월 강제 폐간됐으며 르포와 문학 작품 등 다양한 내용이 잡지에 실렸다.
'근대서지'를 펴내는 소망출판 박성모 대표는 "'신세기'는 일제강점기 비판 성향의 종합 월간지"라면서 "연세대와 고대, 아단문고, 또 몇몇 개인이 소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전체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으며 해방기에 잠시 발행된 동명의 타블로이드 주간지와는 다른 잡지"라고 소개했다.
한편 '근대서지' 4호는 민족시인 신동엽의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는 당초 알려진 것보다 3년 정도 이른 1964년 12월 시 동인지 '시단' 6집에 처음 발표됐다는 내용도 소개했다.

   또 장유정 단국대 교수가 발굴한 일제강점기 노래책 '이팔청춘창가집',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 몸을 던진 김우진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등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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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본 내고향 - 이수미.정훈희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고향이 마냥 그리워 고향을 떠나온지 몇몇해 더냐 타관땅 돌고돌아 헤메는 이몸 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 꿈에 본 내고향이 마냥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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