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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성덕왕(聖徳王) >성덕왕(706년 (음))
성덕왕 ( 706년 (음) )
성덕왕
제33대 성덕왕(聖德王)註 114114 효소왕의 친동생으로 702년부터 737년까지 재위하였다.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휘(諱)는 융기(隆基), 또는 흥광(興光)이다.닫기 신룡(神龍) 2년 병오(丙午)에 흉년이 들어 인민들의 굶주림이 심하였다. 이듬해 정미(丁未) 정월 초하루(707년)부터 7월 30일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한 사람에 하루 3승(升)으로 하였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보니 모두 30만 5백 석이었다. 왕이 태종대왕(太宗大王)을 위해 봉덕사(奉德寺)註 115115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의 북천(北川)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사찰이다. 창건연대에 대해서 ≪삼국유사≫ 권2 기이2 성덕왕(聖德王)조와 권3 탑상4 황룡사종(皇龍寺鐘) 분황사약사(芬皇寺藥師) 봉덕사종(奉德寺鍾)조의 기록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데, 일연(一然)은 후자의 기록을 신뢰하여 738년(효성왕 2)에 세워졌다고 보았다. 두 기록을 아울러 봉덕사가 착공된 시기는 성덕왕대의 일이고, 완공이 효성왕 2년인 738년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이호영, 「신라 중세왕실과 봉덕사」, ≪사학지≫ 8, 단국사학회, 1974, 3~4쪽).닫기를 창건하고, 인왕도량(仁王道場)註 116116 호국(護國)을 기원하는 ≪인왕경(仁王經)≫을 강설하는 도량을 의미한다.닫기을 7일 동안 열고 크게 사면하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시중(侍中)의 직을 두었다.註 117117 시중(侍中)은 신라의 관직명으로 집사부(執事部)의 장관직이었다. 651년(진덕여왕 5)에 중시(中侍)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들어졌다가 747년(경덕왕 6)에 시중으로 개명되었다.닫기어떤 책에는 효성왕(孝成王) 때의 일이라고 한다.
註 114
효소왕의 친동생으로 702년부터 737년까지 재위하였다.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휘(諱)는 융기(隆基), 또는 흥광(興光)이다.
註 115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의 북천(北川)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사찰이다. 창건연대에 대해서 ≪삼국유사≫ 권2 기이2 성덕왕(聖德王)조와 권3 탑상4 황룡사종(皇龍寺鐘) 분황사약사(芬皇寺藥師) 봉덕사종(奉德寺鍾)조의 기록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데, 일연(一然)은 후자의 기록을 신뢰하여 738년(효성왕 2)에 세워졌다고 보았다. 두 기록을 아울러 봉덕사가 착공된 시기는 성덕왕대의 일이고, 완공이 효성왕 2년인 738년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이호영, 「신라 중세왕실과 봉덕사」, ≪사학지≫ 8, 단국사학회, 1974, 3~4쪽).
註 116
호국(護國)을 기원하는 ≪인왕경(仁王經)≫을 강설하는 도량을 의미한다.
註 117
시중(侍中)은 신라의 관직명으로 집사부(執事部)의 장관직이었다. 651년(진덕여왕 5)에 중시(中侍)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들어졌다가 747년(경덕왕 6)에 시중으로 개명되었다.
경제>경제정책>재해>재해유형
경제>경제정책>재해>재해대책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정치>법률>형법>석방·사면
정치>행정>관직>중앙관직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수로부인(水路夫人)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치다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치다
수로부인
성덕왕(聖德王) 때 순정공(純貞公)註 118118 이 곳 외에는 기록이 없어 실제 인물인지 알 수 없다.닫기이 강릉(江陵) 지금의 명주(溟州)註 119119 지금의 강릉을 가리킨다. 먼저 고구려 세력권에 포함되어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서라(河西羅)라고 하였는데 진흥왕 11년(550)에 신라 영토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권35 지리2 신라 명주(溟洲)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릉대도호 고적).닫기 태수(太守)註 120120 신라시대의 지방관으로 連率이라고도 하였다. 통일기까지 군이 군사적 성격이 강하여 幢主라는 군 지휘관 이름을 사용하였으나 통일 후 당의 영향을 받아 太守로 개칭되었다. 舍知 이상 重阿湌까지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강봉룡, ≪신라 지방통치제도연구≫,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4).닫기로 부임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곁에는 바위 봉우리가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러 있고, 높이가 천길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그것을 보고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저 꽃을 꺾어다 줄 사람은 없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종자들이 말하기를,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곳입니다”라고 하면서 모두 사양하였다. 그 곁으로 한 늙은이註 121121 이 노옹을 巫的 존재로 보는 견해가 있다(최인환, 「삼국유사 수로부인조의 역사적 성격」, ≪한국전통문화연구≫, 효성여대한국전통문화연구소, 1987).닫기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와 또한 가사를 지어 바쳤다. 그 늙은이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註 118
이 곳 외에는 기록이 없어 실제 인물인지 알 수 없다.
註 119
지금의 강릉을 가리킨다. 먼저 고구려 세력권에 포함되어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서라(河西羅)라고 하였는데 진흥왕 11년(550)에 신라 영토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권35 지리2 신라 명주(溟洲)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릉대도호 고적).
註 120
신라시대의 지방관으로 連率이라고도 하였다. 통일기까지 군이 군사적 성격이 강하여 幢主라는 군 지휘관 이름을 사용하였으나 통일 후 당의 영향을 받아 太守로 개칭되었다. 舍知 이상 重阿湌까지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강봉룡, ≪신라 지방통치제도연구≫,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4).
註 121
이 노옹을 巫的 존재로 보는 견해가 있다(최인환, 「삼국유사 수로부인조의 역사적 성격」, ≪한국전통문화연구≫, 효성여대한국전통문화연구소, 1987).
문화>문학>문학형식>가송·향가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수로부인(水路夫人) >용에게 납치된 수로부인이 한 노인의 계책으로 되돌아오다
용에게 납치된 수로부인이 한 노인의 계책으로 되돌아오다
다시 이틀 길을 가다가 또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엎어지면서 땅을 쳐보아도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또 한 노인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했으니, 이제 바다 속의 미물(傍生)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내의 백성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그 말을 따르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의 일을 물으니, [부인이] 대답하기를, “칠보 궁전에 음식은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의 음식 (煙火)이 아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부인의 옷에는 이상한 향기가 풍겼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로는 용모와 자색이 세상에서 뛰어나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려갔다.
해가
여러 사람이 해가(海歌)註 122122 이 노래는 내용과 주제가 구지가(≪삼국유사≫ 권1 기이2 가락국기)와 비슷하다. 다만 구지가는 4구체이고, 해가는 8구체이다.닫기를 불렀는데 가사는 이렇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녀를 빼앗아 간 죄가 얼마나 큰가
네가 만약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라
헌화가
노인의 헌화가(獻花歌)는 이렇다.
붉은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註 122
이 노래는 내용과 주제가 구지가(≪삼국유사≫ 권1 기이2 가락국기)와 비슷하다. 다만 구지가는 4구체이고, 해가는 8구체이다.
문화>문학>문학형식>가송·향가
정치>신이>기타>용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효성왕(孝成王) >효성왕(722년 10월 (음))
효성왕 ( 722년 10월(음) )
효성왕
효성왕註 123123 신라 3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32~742년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승경(承慶)이다.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비는 이찬(伊湌) 순원(順元)의 딸인 혜명부인(惠明夫人) 김씨이다. 재위 6년만인 742년 5월에 죽어 시호를 효성(孝成)이라고 하고 유명에 따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효성왕).닫기 개원(開元) 10년註 124124 당 현종의 연호로 이때는 성덕왕 21년(722)이다. ≪삼국사기≫ 권8 성덕왕 21년 10월의 기록(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과 일치하므로 효성왕대의 일이 아니라고 보인다.닫기 임술(壬戌)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毛火郡)에 관문(關門)註 125125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모화리와 경상남도 울주군 범서면 두산리 사이에 있는 석축 산성이다. 성덕왕 21년에 축조하였는데 모벌군성이라고도 하고 관문성이라고도 하였다. 이곳은 울산 방면에서 경주에 이르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관문성에 이어 좌우에 장성(長城)과 대점산성(大岾山城) 등이 있어서 동해 방어의 거점이 되었다. 지금은 허물어져 성문지로 추정되는 석축, 창고지, 병사지 등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 권8 성덕왕 21년 | ≪삼국사기≫ 권34 지리2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닫기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 경주(慶州)의 동남지역에 속하니, 곧 일본(日本)을 방어하는 요새였다.註 126126 ≪삼국사기≫ 권 8 성덕왕 21년 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
≪삼국사기≫ 권 8 성덕왕 30년 日本國兵船三百艘,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삼국사기≫ 권 34 지리지 신라 臨關郡, 本毛火(一作蚊化)郡, 聖德王築城以遮日本賊路의 기록으로 관문성 수축이 일본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과의 무력 충돌도 확인할 수 있다(井上秀雄, 「三國遺事와 日本關係」 ≪삼국유사의 종합적 고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닫기 둘레는 6천 7백 92보註 127127 이외에 우리나라의 경우는 尺과 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鐵盤以上 高☐☐ 以下高30步3尺 (신라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
刹柱記云 鐵盤以上 高42尺 以下183尺 (≪삼국유사≫ 권3 탑상 황룡사구층탑)人比智休波日幷工人抽兮下干支徒作受 長4步5尺1寸.....合 高10步 長14步3尺3촌(경주 명활산성비)
開元十年 壬戌十月 始築關門於毛大郡 今毛火村屬慶州東南境 乃防日本塞垣也 周迴六千七百九十二步五尺 (≪삼국유사≫ 권2 효성왕)
金京元千毛主作 北堺 受作5步5尺 (관문성 석각)닫기 5자註 128128 이로 보아 당시에 5尺 1步가 아닌 6尺 1步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6尺이 1步가 되고, 300步(1800尺)가 1里가 되는 里制는 당대 이전까지 통용되다가 당대에 이르러서는 1步가 6尺이 아니라 5尺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후 청대 말까지 5尺 1步가 사용되었다(이우태, 「古代 度量衡制의 발달」, ≪강좌 한국고대사≫ 6,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2).凡天下之田 5尺爲步 (≪구당서≫ 식화지)
起度則5尺爲步 360步爲里 (≪淸會典≫)
1步가 6尺에서 5尺으로 바뀌고 이에 따라 1里는 300步에서 360步로 조정되어 1里가 1800尺 임은 변함이 없었다. 당대에 이르러 1步가 6尺에서 5尺으로 바뀌게 된 이유는 전대에 비해 약 20% 신장된 尺度가 쓰이게 되었는데 이를 흔히 唐大尺이라고 한다. 唐大尺의 길이는 약 30cm정도인데 이렇게 尺의 길이가 늘어나게 되자 토지면적도 따라서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단위 면적당 조세를 조정하여야 하는 불편을 덜기 위해 토지 측량의 기본 단위인 步를 6尺에서 5尺으로 줄였던 것이다. 즉 1步의 길이를 전시기와 동일하게 함으로써 尺度의 변화에 따른 불편을 더는 것이 5尺1步의 목적이었다. 唐大尺의 길이는 약 30cm이므로 당대 1里는 약 540m가 된다.
중국에서는 당 이전에 6尺1步가 사용되었고 당대 이후에는 5尺1步로 하였으며 이 제도는 청대 말까지 계속되다가 民國 18년(1929) 도량형법에서 步를 없애고 里도 고쳐 150丈(1500尺)으로 하였다.닫기이고, 동원된 역부는 3만 9천 2백 62명이며, 감독관(掌員)은 원진(元眞) 각간(角干)註 129129 신라의 경위(京位) 17관등 중 최상의 관등인 이벌찬(伊伐湌)의 다른 명칭으로 이벌간(伊伐干), 우벌찬(于伐湌), 각찬(角湌), 서발한(舒發翰), 서벌감(舒伐邯)이라고도 한다. 각간이라는 관등이 생기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1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조에 기록되어 있다.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관등으로 중대에 이르러 그 위에 대각간·태대각간 등의 상위 관등을 두어 김유신처럼 국가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였다(서의식, 「신라 상대(上代) ‘간(干)’층의 형성·분화와 중위제(重位制)」,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4| 김철준, 「고구려 신라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닫기이었다.
개원 21년 계유(癸酉)(733년)에 당나라 사람들이 북쪽 오랑캐(北狄)를 치려고 신라에 청병하여註 130130 여기서의 북적은 渤海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일은 성덕왕 32년의 일로 효성왕 때의 일이 아니다. 신라는 당의 청병으로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삼국사기≫ 권8 성덕왕조에는 三十二年 秋七月, 唐玄宗以渤海·靺鞨越海入寇登州, 遣太僕員外卿金思蘭歸國.
≪구당서(舊唐書)≫ 권199 열전 제149에는 渤海靺鞨 (개원)二十年, 武藝遣其將張文休 率海賊攻登州刺史韋俊. 詔遣門藝往幽州徵兵以討之, 仍令太僕員外卿金思蘭 往新羅發兵以攻其南境. 屬山阻寒凍, 雪深丈餘, 兵士死者過半, 竟無功而還.
≪구당서(舊唐書)≫ 권199 열전 제149 신라 (개원)21년에는 渤海靺鞨 越海入寇登州. 時興光族人金思蘭 先因入朝留京師, 拜爲太僕員外卿, 至是遣歸國發兵以討靺鞨, 仍加授興光爲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
≪신당서(新唐書)≫ 권219 열전 제144에는 渤海 後十年, 武藝遣大將張文休 率海賊攻登州, 帝馳遣門藝發幽州兵擊之, 使太僕卿金思蘭使新羅, 督兵攻其南. 會大寒, 雪袤丈, 士凍死過半, 無功而還.
≪신당서(新唐書)≫ 권220 열전 제145에는 新羅 初渤海靺鞨掠登州, 興光擊走之, 帝進興光寧海軍大使, 使攻靺鞨닫기 사신 6백 4명이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註 123
신라 3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32~742년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승경(承慶)이다.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비는 이찬(伊湌) 순원(順元)의 딸인 혜명부인(惠明夫人) 김씨이다. 재위 6년만인 742년 5월에 죽어 시호를 효성(孝成)이라고 하고 유명에 따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효성왕).
註 124
당 현종의 연호로 이때는 성덕왕 21년(722)이다. ≪삼국사기≫ 권8 성덕왕 21년 10월의 기록(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과 일치하므로 효성왕대의 일이 아니라고 보인다.
註 125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모화리와 경상남도 울주군 범서면 두산리 사이에 있는 석축 산성이다. 성덕왕 21년에 축조하였는데 모벌군성이라고도 하고 관문성이라고도 하였다. 이곳은 울산 방면에서 경주에 이르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관문성에 이어 좌우에 장성(長城)과 대점산성(大岾山城) 등이 있어서 동해 방어의 거점이 되었다. 지금은 허물어져 성문지로 추정되는 석축, 창고지, 병사지 등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 권8 성덕왕 21년 | ≪삼국사기≫ 권34 지리2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
註 126
≪삼국사기≫ 권 8 성덕왕 21년 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
≪삼국사기≫ 권 8 성덕왕 30년 日本國兵船三百艘,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삼국사기≫ 권 34 지리지 신라 臨關郡, 本毛火(一作蚊化)郡, 聖德王築城以遮日本賊路의 기록으로 관문성 수축이 일본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과의 무력 충돌도 확인할 수 있다(井上秀雄, 「三國遺事와 日本關係」 ≪삼국유사의 종합적 고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註 127
이외에 우리나라의 경우는 尺과 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鐵盤以上 高☐☐ 以下高30步3尺 (신라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
刹柱記云 鐵盤以上 高42尺 以下183尺 (≪삼국유사≫ 권3 탑상 황룡사구층탑)
人比智休波日幷工人抽兮下干支徒作受 長4步5尺1寸.....合 高10步 長14步3尺3촌(경주 명활산성비)
開元十年 壬戌十月 始築關門於毛大郡 今毛火村屬慶州東南境 乃防日本塞垣也 周迴六千七百九十二步五尺 (≪삼국유사≫ 권2 효성왕)
金京元千毛主作 北堺 受作5步5尺 (관문성 석각)
註 128
이로 보아 당시에 5尺 1步가 아닌 6尺 1步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6尺이 1步가 되고, 300步(1800尺)가 1里가 되는 里制는 당대 이전까지 통용되다가 당대에 이르러서는 1步가 6尺이 아니라 5尺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후 청대 말까지 5尺 1步가 사용되었다(이우태, 「古代 度量衡制의 발달」, ≪강좌 한국고대사≫ 6,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2).
凡天下之田 5尺爲步 (≪구당서≫ 식화지)
起度則5尺爲步 360步爲里 (≪淸會典≫)
1步가 6尺에서 5尺으로 바뀌고 이에 따라 1里는 300步에서 360步로 조정되어 1里가 1800尺 임은 변함이 없었다. 당대에 이르러 1步가 6尺에서 5尺으로 바뀌게 된 이유는 전대에 비해 약 20% 신장된 尺度가 쓰이게 되었는데 이를 흔히 唐大尺이라고 한다. 唐大尺의 길이는 약 30cm정도인데 이렇게 尺의 길이가 늘어나게 되자 토지면적도 따라서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단위 면적당 조세를 조정하여야 하는 불편을 덜기 위해 토지 측량의 기본 단위인 步를 6尺에서 5尺으로 줄였던 것이다. 즉 1步의 길이를 전시기와 동일하게 함으로써 尺度의 변화에 따른 불편을 더는 것이 5尺1步의 목적이었다. 唐大尺의 길이는 약 30cm이므로 당대 1里는 약 540m가 된다.
중국에서는 당 이전에 6尺1步가 사용되었고 당대 이후에는 5尺1步로 하였으며 이 제도는 청대 말까지 계속되다가 民國 18년(1929) 도량형법에서 步를 없애고 里도 고쳐 150丈(1500尺)으로 하였다.
註 129
신라의 경위(京位) 17관등 중 최상의 관등인 이벌찬(伊伐湌)의 다른 명칭으로 이벌간(伊伐干), 우벌찬(于伐湌), 각찬(角湌), 서발한(舒發翰), 서벌감(舒伐邯)이라고도 한다. 각간이라는 관등이 생기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1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조에 기록되어 있다.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관등으로 중대에 이르러 그 위에 대각간·태대각간 등의 상위 관등을 두어 김유신처럼 국가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였다(서의식, 「신라 상대(上代) ‘간(干)’층의 형성·분화와 중위제(重位制)」,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4| 김철준, 「고구려 신라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註 130
여기서의 북적은 渤海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일은 성덕왕 32년의 일로 효성왕 때의 일이 아니다. 신라는 당의 청병으로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삼국사기≫ 권8 성덕왕조에는 三十二年 秋七月, 唐玄宗以渤海·靺鞨越海入寇登州, 遣太僕員外卿金思蘭歸國.
≪구당서(舊唐書)≫ 권199 열전 제149에는 渤海靺鞨 (개원)二十年, 武藝遣其將張文休 率海賊攻登州刺史韋俊. 詔遣門藝往幽州徵兵以討之, 仍令太僕員外卿金思蘭 往新羅發兵以攻其南境. 屬山阻寒凍, 雪深丈餘, 兵士死者過半, 竟無功而還.
≪구당서(舊唐書)≫ 권199 열전 제149 신라 (개원)21년에는 渤海靺鞨 越海入寇登州. 時興光族人金思蘭 先因入朝留京師, 拜爲太僕員外卿, 至是遣歸國發兵以討靺鞨, 仍加授興光爲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
≪신당서(新唐書)≫ 권219 열전 제144에는 渤海 後十年, 武藝遣大將張文休 率海賊攻登州, 帝馳遣門藝發幽州兵擊之, 使太僕卿金思蘭使新羅, 督兵攻其南. 會大寒, 雪袤丈, 士凍死過半, 無功而還.
≪신당서(新唐書)≫ 권220 열전 제145에는 新羅 初渤海靺鞨掠登州, 興光擊走之, 帝進興光寧海軍大使, 使攻靺鞨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군사>군사시설>군사기지
정치>외교>사신>파견·영접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徳王·忠談師·表訓大徳) >경덕왕이 충담을 만나다(765년 (음))
경덕왕이 충담을 만나다 ( 765년 (음) )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당나라에서 보낸] ≪도덕경(德經)≫ 등을 대왕[경덕왕]註 131131 신라 제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성은 김씨 이름은 헌영(憲英)이다.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고 효성왕의 동생이다. 747년 중시를 시중으로 개칭했고 국학에 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757년에는 주군현의 명칭을 759년에는 중앙관부의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757년에는 내외관의 녹봉(祿俸)을 없애고 녹읍(祿邑)을 부활시켰다(≪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경덕왕).닫기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註 132132 ≪삼국사기≫ 孝成王 二年 四月 '唐使臣刑璹 以老子道德經等文書獻于王'의 기록으로 보아 이는 효성왕대의 일로 보인다.닫기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三山)註 133133 오악(五岳)은 동악으로는 토합산, 남악으로 지리산, 서악으로 계룡산, 북악으로 태백산, 중악으로 부악(현 대구의 팔공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삼산은 나림(奈林)(奈歷, 경주시 보문동의 명활산), 골화(骨火)(영천시 완산동의 금강산), 혈례(穴禮)(영일군 신광면의 어래산)로 보인다. (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300~302쪽).닫기의 신들이 때로는 혹 대궐 뜰에 나타나 [왕을] 모셨다.
3월 3일(765년)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 위에 나가서 좌우의 측근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승려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위의가 깨끗한 고승 한 분註 134134 본래 부처님을 일컫던 말인데, 뒤에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의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승과에 급제하면 대선(대선(大選))이 되고, 이어 대덕, 대사, 중대사, 삼중대사로 승진되었다. (한국불교대사전편찬위원회, ≪불교대사전≫ 1, 명문당, 1993).닫기이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측근들이 그를 보고 데려다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승려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납의(衲衣)註 135135 승려가 입는 법의(法衣)의 한가지로 낡은 헝겊을 모아 꿰매어 만든 옷이다.닫기를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서 또는 삼태기를 졌다고도 한다. 남쪽에서 왔다. 왕이 그를 보고 기뻐하면서 누 위로 맞아서 그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왕이 묻기를, “그대는 누구요?”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충담(忠談)註 136136 생몰년 미상의 신라 경덕왕대 승려이다. 그가 지은 향가로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와 안민가(安民歌)가 유명하다.닫기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어디서 오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소승은 3월 3일(重三)과 9월 9일(重九)에는 남산(南山)註 137137 경상북도 경주시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북쪽의 금오봉(金鰲峰)과 남쪽의 고위봉(高位峰)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60여 개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계곡 곳곳에는 신라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노천 박물관을 이루고 있다. 수많은 불교 유적들은 물론이고, 나정(蘿井), 남산신성(南山新城), 그리고 포석정(鮑石亭)과 같은 유적들이 유명하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남산≫, 2002).닫기삼화령(三花嶺)註 138138 ≪삼국유사≫ 권5 효선9 빈녀양모(貧女養母)의 孝宗郎遊南山鮑石亭(或云三花述)의 기록으로 보아 삼화술은 삼화령으로 남산의 고개로 추정된다(김택규, 「삼국유사의 민속체」, ≪삼국유사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590~591쪽).닫기의 미륵세존(彌勒世尊)註 139139 승려 생의는 경주 남산 골짜기 땅속에서 석미륵을 파내어 삼화령으로 옮기고 그곳에 절을 지어 생의사라고 하였다. 선덕왕 13년(644)의 일로 이 불상이 훗날 충담이 차를 공양한 미륵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삼국유사≫ 권4 탑상 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 善德王時 釋生義常住道中寺 夢有僧引上南山而行 令結草爲標 至山之南洞 謂曰 我埋此處 請師出安嶺上 旣覺 與友人尋所標 至其洞掘地 有石彌勒出 置於三花嶺上 善德王十二年甲辰歲 創寺而居 後名生義寺(今訛言性義寺 忠談師每歲重三重九 烹茶獻供者 是此尊也).닫기에게 차를 다려 공양하는데,註 140140 차는 불전의 중요한 공양물 중의 하나로 보인다. 충담이 미륵삼존에게 차를 공양하듯이 보천(寶川)과 효명(孝明)도 오대산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하고 있다(≪삼국유사≫ 권3 탑상4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 또 경덕왕이 승려 月明에게 차를 하사한 기록도 보인다(≪삼국유사≫ 권5 감통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닫기 지금도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에게도 차 한 잔을 줄 수 있소?”라고 하니, 승려가 곧 차를 다려 왕에게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는 특이한 향이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듣기로는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註 141141 향가의 한 형태로 향가에는 사구체(서동요(薯童謠), 풍요(風謠), 허놔가(獻花歌), 도솔가(兜率歌))· 팔구체(처용가(處容歌),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십구체가 있는데, 이 중 십구체는 영탄구(詠嘆句)로 시작된 종장(終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곧 사뇌가(詞腦歌)이며, 십구체 가(歌)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뇌가는 사뇌야 지방에서 기원하여 유행하는 노래인데 후에 신라 시가 전체를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다고 보는 경우(정병욱, ≪한국고전시가론≫, 1982, 78쪽)와 향가 중에서 내용이 깊고 고상한 노래에 대한 특별한 명칭이라는 견해(최철, ≪향가의 문학적 해석≫, 연세대출판부, 1990, 7쪽)가 있다.닫기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하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 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다스릴 노래를 지어주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즉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그를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니, 승려는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안민가
안민가(安民歌)는 이렇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찬기파랑가
기파랑을 찬미한 노래는 이렇다.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쫒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가를 쫓으려 하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
註 131
신라 제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성은 김씨 이름은 헌영(憲英)이다.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고 효성왕의 동생이다. 747년 중시를 시중으로 개칭했고 국학에 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757년에는 주군현의 명칭을 759년에는 중앙관부의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757년에는 내외관의 녹봉(祿俸)을 없애고 녹읍(祿邑)을 부활시켰다(≪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경덕왕).
註 132
≪삼국사기≫ 孝成王 二年 四月 '唐使臣刑璹 以老子道德經等文書獻于王'의 기록으로 보아 이는 효성왕대의 일로 보인다.
註 133
오악(五岳)은 동악으로는 토합산, 남악으로 지리산, 서악으로 계룡산, 북악으로 태백산, 중악으로 부악(현 대구의 팔공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삼산은 나림(奈林)(奈歷, 경주시 보문동의 명활산), 골화(骨火)(영천시 완산동의 금강산), 혈례(穴禮)(영일군 신광면의 어래산)로 보인다. (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300~302쪽).
註 134
본래 부처님을 일컫던 말인데, 뒤에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의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승과에 급제하면 대선(대선(大選))이 되고, 이어 대덕, 대사, 중대사, 삼중대사로 승진되었다. (한국불교대사전편찬위원회, ≪불교대사전≫ 1, 명문당, 1993).
註 135
승려가 입는 법의(法衣)의 한가지로 낡은 헝겊을 모아 꿰매어 만든 옷이다.
註 136
생몰년 미상의 신라 경덕왕대 승려이다. 그가 지은 향가로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와 안민가(安民歌)가 유명하다.
註 137
경상북도 경주시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북쪽의 금오봉(金鰲峰)과 남쪽의 고위봉(高位峰)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60여 개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계곡 곳곳에는 신라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노천 박물관을 이루고 있다. 수많은 불교 유적들은 물론이고, 나정(蘿井), 남산신성(南山新城), 그리고 포석정(鮑石亭)과 같은 유적들이 유명하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남산≫, 2002).
註 138
≪삼국유사≫ 권5 효선9 빈녀양모(貧女養母)의 孝宗郎遊南山鮑石亭(或云三花述)의 기록으로 보아 삼화술은 삼화령으로 남산의 고개로 추정된다(김택규, 「삼국유사의 민속체」, ≪삼국유사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590~591쪽).
註 139
승려 생의는 경주 남산 골짜기 땅속에서 석미륵을 파내어 삼화령으로 옮기고 그곳에 절을 지어 생의사라고 하였다. 선덕왕 13년(644)의 일로 이 불상이 훗날 충담이 차를 공양한 미륵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삼국유사≫ 권4 탑상 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 善德王時 釋生義常住道中寺 夢有僧引上南山而行 令結草爲標 至山之南洞 謂曰 我埋此處 請師出安嶺上 旣覺 與友人尋所標 至其洞掘地 有石彌勒出 置於三花嶺上 善德王十二年甲辰歲 創寺而居 後名生義寺(今訛言性義寺 忠談師每歲重三重九 烹茶獻供者 是此尊也).
註 140
차는 불전의 중요한 공양물 중의 하나로 보인다. 충담이 미륵삼존에게 차를 공양하듯이 보천(寶川)과 효명(孝明)도 오대산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하고 있다(≪삼국유사≫ 권3 탑상4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 또 경덕왕이 승려 月明에게 차를 하사한 기록도 보인다(≪삼국유사≫ 권5 감통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
註 141
향가의 한 형태로 향가에는 사구체(서동요(薯童謠), 풍요(風謠), 허놔가(獻花歌), 도솔가(兜率歌))· 팔구체(처용가(處容歌),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십구체가 있는데, 이 중 십구체는 영탄구(詠嘆句)로 시작된 종장(終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곧 사뇌가(詞腦歌)이며, 십구체 가(歌)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뇌가는 사뇌야 지방에서 기원하여 유행하는 노래인데 후에 신라 시가 전체를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다고 보는 경우(정병욱, ≪한국고전시가론≫, 1982, 78쪽)와 향가 중에서 내용이 깊고 고상한 노래에 대한 특별한 명칭이라는 견해(최철, ≪향가의 문학적 해석≫, 연세대출판부, 1990, 7쪽)가 있다.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문화>문학>문학형식>가송·향가
이름 :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충담,기파랑,기파랑,파랑,낭
서명 : 도덕경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徳王·忠談師·表訓大徳) >경덕왕이 표훈의 깨우침을 듣지 않고 아들을 얻다
경덕왕이 표훈의 깨우침을 듣지 않고 아들을 얻다
왕은 옥경(玉莖)의 길이가 8치註 142142 척(尺) 보다 짧은 길이로는 촌(寸), 분(分) 등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10촌이 1척이 되고 10분이 1촌이 되는 십진법으로 되어 있다. 尺 보다 긴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중국 주나라시대 이전에 사용된 것으로 인(仞)(4尺), 심(尋)(8尺), 상(常)(16尺)이 척의 보조단위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척의 열배인 丈을 보조단위로 사용하였는데 장(丈)은 척의 4배, 8배, 16배의 길이를 가진 仞, 尋, 常 보다 진법에 있어 유리하였다. 또한 토지의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에서 전용되어 길이의 단위로 쓰이게 된 步, 里를 단위로 한 것이 있는데 보(步)와 리(里)는 우리나라 고대 삼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길이의 단위이다. 이외 특수한 용도로 사용된 길이의 단위로 포면(布帛)의 길이를 나타내는 단(端), 필(匹), 필(疋) 등이 있으나 이는 특수한 용도에만 쓰인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이 불분명한 圍, 肘, 舍 등도 일부 사용되었다(이우태, 「古代 度量衡制의 발달」, ≪강좌 한국고대사≫ 6,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2).닫기나 되었다. 아들이 없으므로 왕비를 폐하여 사량부인(沙梁夫人)註 143143 왕력표에 '先妃三毛夫人 出宮無後'라는 내용이 있다. 삼모부인은 이찬 순정의 딸로 출궁된 후 사량부인으로 봉해졌고 경덕왕 13년(754)에 황룡사종을 주조할 때 시주하였다. (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경덕왕 | ≪삼국유사≫ 권3 탑상4 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鐘).닫기으로 봉하였다. 후비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시호는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의충(依忠)註 144144 권8 신라본기 성덕왕 34년(735)에 賀正使로 입당한 義忠과 동일 인물로 생각된다. 효성왕 원년(737) 중시가 되었다가 3년 정월에 사망하였다. ≪책부원구≫에도 개원 23년 정월에 김의충이 입당사실이 기록되어 있다(≪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성덕왕 32년, 효성왕 원년, 3년, ≪책부원구≫ 권971 외신부 조공).닫기 각간의 딸이었다.
왕이 하루는 표훈(表訓)註 145145 생몰년 미상의 신라 경덕왕대 화엄종 고승이다. 의상(義湘)의 10대제자 중 1인이며, 흥륜사금당에 십성으로 봉안되기도 하였다. 불국사에서 화엄경을 강하였고, 동문인 능인(能仁)·신림(神琳)과 함께 금강산에 表訓寺를 창건하여 초대주지가 되었다. 김대성에게 화엄교학을 강의하기도 하여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에 영향을 미쳤다(김상현, ≪신라화엄사상사연구≫, 민족사, 1991, 56~57쪽).닫기대덕(大德)註 146146 (梵語 Bhadanta 婆檀陀) 본래 부처님을 일컫던 말인데, 뒤에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의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승과에 급제하면 대선(大選)이 되고, 이어 대덕, 대사, 중대사, 삼중대사로 승진되었다(한국불교대사전편찬위원회, ≪불교대사전≫ 1, 명문당, 1993).닫기을 불러 말하기를, “짐이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께서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표훈이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가능하나 아들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길, “원컨대 딸을 바꿔 아들로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표훈이 다시 하늘에 올라가 청하니, 상제가 말하기를, “될 수는 있지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상제가 다시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데, 지금 스님은 마치 이웃 마을처럼 왕래하면서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후로는 다시 다니지 말라”라고 하였다. 표훈이 돌아와 천제의 말로써 왕을 깨우쳤으나, 왕은 말하기를, “나라는 비록 위태로울지라도 아들을 얻어서 뒤를 잇는다면 족하겠소”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태자가 8세 때에 왕이 돌아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註 147147 신라 제3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65~780년이다.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만월부인이 섭정하였다. 4년에 대공과 대렴(大廉)의 난이 있었고 16년에 김지정의 난으로 죽게 된다(≪삼국사기≫ 권9 권9 신라본기 혜공왕조).닫기이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가 조정에 나섰으나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미처 막을 수가 없었으니, 표훈스님의 말이 맞았다. 어린 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날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언제나 여자들이 하는 장난을 하고,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며,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였다. 그러므로 나라에 큰 난리가 있어 마침내 왕은 선덕왕(宣德)註 148148 신라 제 37대 왕인 선덕왕 김량상(金良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경덕왕 23년에 시중이 되었고 혜공왕 10년에 이찬으로 상대등이 되어 동왕 13년 시국 정치에 대한 글을 올렸다. 동왕 16년 김지정(金志貞)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위에 올랐다.닫기과 김양상(金良相)註 149149 김량상(金良相)은 왕이 되기 전 선덕왕(宣德王)의 이름이다. 여기서는 김량상과 함께 거병한 아찬 김경신(金敬信:원성왕)의 오기인 듯하다(≪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혜공왕 16년).닫기에게 살해되었다. 표훈 이후로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註 142
척(尺) 보다 짧은 길이로는 촌(寸), 분(分) 등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10촌이 1척이 되고 10분이 1촌이 되는 십진법으로 되어 있다. 尺 보다 긴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중국 주나라시대 이전에 사용된 것으로 인(仞)(4尺), 심(尋)(8尺), 상(常)(16尺)이 척의 보조단위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척의 열배인 丈을 보조단위로 사용하였는데 장(丈)은 척의 4배, 8배, 16배의 길이를 가진 仞, 尋, 常 보다 진법에 있어 유리하였다. 또한 토지의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에서 전용되어 길이의 단위로 쓰이게 된 步, 里를 단위로 한 것이 있는데 보(步)와 리(里)는 우리나라 고대 삼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길이의 단위이다. 이외 특수한 용도로 사용된 길이의 단위로 포면(布帛)의 길이를 나타내는 단(端), 필(匹), 필(疋) 등이 있으나 이는 특수한 용도에만 쓰인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이 불분명한 圍, 肘, 舍 등도 일부 사용되었다(이우태, 「古代 度量衡制의 발달」, ≪강좌 한국고대사≫ 6,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2).
註 143
왕력표에 '先妃三毛夫人 出宮無後'라는 내용이 있다. 삼모부인은 이찬 순정의 딸로 출궁된 후 사량부인으로 봉해졌고 경덕왕 13년(754)에 황룡사종을 주조할 때 시주하였다. (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경덕왕 | ≪삼국유사≫ 권3 탑상4 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鐘).
註 144
권8 신라본기 성덕왕 34년(735)에 賀正使로 입당한 義忠과 동일 인물로 생각된다. 효성왕 원년(737) 중시가 되었다가 3년 정월에 사망하였다. ≪책부원구≫에도 개원 23년 정월에 김의충이 입당사실이 기록되어 있다(≪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성덕왕 32년, 효성왕 원년, 3년, ≪책부원구≫ 권971 외신부 조공).
註 145
생몰년 미상의 신라 경덕왕대 화엄종 고승이다. 의상(義湘)의 10대제자 중 1인이며, 흥륜사금당에 십성으로 봉안되기도 하였다. 불국사에서 화엄경을 강하였고, 동문인 능인(能仁)·신림(神琳)과 함께 금강산에 表訓寺를 창건하여 초대주지가 되었다. 김대성에게 화엄교학을 강의하기도 하여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에 영향을 미쳤다(김상현, ≪신라화엄사상사연구≫, 민족사, 1991, 56~57쪽).
註 146
(梵語 Bhadanta 婆檀陀) 본래 부처님을 일컫던 말인데, 뒤에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의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승과에 급제하면 대선(大選)이 되고, 이어 대덕, 대사, 중대사, 삼중대사로 승진되었다(한국불교대사전편찬위원회, ≪불교대사전≫ 1, 명문당, 1993).
註 147
신라 제3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65~780년이다.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만월부인이 섭정하였다. 4년에 대공과 대렴(大廉)의 난이 있었고 16년에 김지정의 난으로 죽게 된다(≪삼국사기≫ 권9 권9 신라본기 혜공왕조).
註 148
신라 제 37대 왕인 선덕왕 김량상(金良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경덕왕 23년에 시중이 되었고 혜공왕 10년에 이찬으로 상대등이 되어 동왕 13년 시국 정치에 대한 글을 올렸다. 동왕 16년 김지정(金志貞)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註 149
김량상(金良相)은 왕이 되기 전 선덕왕(宣德王)의 이름이다. 여기서는 김량상과 함께 거병한 아찬 김경신(金敬信:원성왕)의 오기인 듯하다(≪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혜공왕 16년).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사회>인구>생로병사>출산
정치>왕실>왕족>태자·태자비
정치>왕실>왕위계승>계위
이름 : 만월부인,경수태후,의충,표훈,대덕,대덕,표훈,표훈,표훈,표훈,만월왕후,혜공대왕,태후,표훈,선덕왕,김양상,표훈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혜공왕(惠恭王) >표훈의 염려대로 혜공왕 재위 초반 천재지변과 반란이 자주 일어나다(766년 (음))
표훈의 염려대로 혜공왕 재위 초반 천재지변과 반란이 자주 일어나다 ( 766년 (음) )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註 150150 당 대종(代宗)의 연호로 766~779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초년에 강주(康州)註 151151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 일대이다. 거열성(居列城)·거타주(居陁州)·청주(菁州)로도 불렸다.닫기 관서(官署) 대당(大堂)의 동쪽 땅이 점점 가라앉아 못을 이루니 어떤 책에는 대사(大寺) 동쪽의 작은 연못이라 하였다, 세로는 13자이고 가로는 7자였다. 홀연히 잉어 대여섯 마리가 서로 계속하여 점점 커지더니 못도 따라서 커졌다. 2년 정미(767)에 이르러서는 또한 천구성(天狗星)註 152152 유성(流星)의 하나로 떨어질 때 소리를 낸다고 한다.닫기이 동루(東樓)의 남쪽에 떨어졌다. 머리는 항아리 같았고 꼬리는 3자 가량이었으며 색은 뜨겁게 타는 불과 같았는데 천지가 또한 진동하였다. 또 같은 해에 김포현(金浦縣)의 5경(頃) 정도 되는 논의 모든 쌀 낟알이 모두 이삭이 되었으며, 7월에는 북궁(北宮)의 정원 가운데 먼저 두개의 별이 떨어지고 또 한 개의 별이 떨어져, 세 개의 별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대궐의 북쪽 측간 속에서 두 줄기의 연(蓮)이 나고 봉성사(奉聖寺)註 153153 경주시 동성동에 있었던 사찰로 신문왕 5년(685) 3월 혜통(惠通)의 청으로 왕이 신충(信忠)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하였다. 봉성사에는 성전이 설치되어 있었다.닫기의 밭 가운데에서도 연이 났다. 호랑이가 궁성 안에 들어와 추격하여 찾았으나 놓쳤다. 각간(角干)註 154154 신라 17관등 중 제1위이다.닫기대공(大恭)註 155155 혜공왕 4년(768) 동생 대렴(大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닫기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셀 수 없이 많이 모였다. 안국병법(安國兵法)註 156156 병서(兵書)일 것으로 추측되나 현전하지 않아 저자나 저술 연대 등을 알 수 없다.닫기 하권에 이르기를 “[이러한 변괴가 있으면] 천하에 커다란 병란이 일어난다.” 하였는데, 이에 왕은 죄수를 사면하고 [정사를] 살피고 반성하였다. 7월 3일에 각간 대공이 적도(賊盜)가 되어서 일어나고, 왕도(王都)와 5도 주군(州郡)의 96각간이 서로 싸워 대란이 일어났다.註 157157 각간은 신라의 17관등 중 제1관등인 이벌찬을 가리키므로, 동시에 96각간이 있었다기보다는 여러 족장(族長)이 다툰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김철준, 「신라 귀족세력의 기반」,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245쪽).닫기대공각간의 집안이 망하였고 그의 재산과 보물 비단 등은 왕궁으로 옮겼다. 신성(新城)의 장창(長倉)註 158158 문무왕 3년(663) 경주 남산의 신성에 설치하였던 곡물창고이다.닫기이 불에 타므로 사량(沙梁)·모량(牟梁) 등의 마을 안에 있던 역당들의 재물과 곡식들을 역시 왕궁으로 운반해 들였다. 난리는 석 달 만에 그쳤는데, 상 받은 사람도 자못 많고 목 베어 죽은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표훈(表訓)註 159159 의상의 제자로 불국사에 주석하였으며, 흥륜사의 금당10성 중에 포함되어 그 서벽에 소상(塑像)이 모셔져 있었다.닫기의 말대로 나라가 위태롭다는 것이 이것이었다.
註 150
당 대종(代宗)의 연호로 766~779년에 사용하였다.
註 151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 일대이다. 거열성(居列城)·거타주(居陁州)·청주(菁州)로도 불렸다.
註 152
유성(流星)의 하나로 떨어질 때 소리를 낸다고 한다.
註 153
경주시 동성동에 있었던 사찰로 신문왕 5년(685) 3월 혜통(惠通)의 청으로 왕이 신충(信忠)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하였다. 봉성사에는 성전이 설치되어 있었다.
註 154
신라 17관등 중 제1위이다.
註 155
혜공왕 4년(768) 동생 대렴(大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註 156
병서(兵書)일 것으로 추측되나 현전하지 않아 저자나 저술 연대 등을 알 수 없다.
註 157
각간은 신라의 17관등 중 제1관등인 이벌찬을 가리키므로, 동시에 96각간이 있었다기보다는 여러 족장(族長)이 다툰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김철준, 「신라 귀족세력의 기반」,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245쪽).
註 158
문무왕 3년(663) 경주 남산의 신성에 설치하였던 곡물창고이다.
註 159
의상의 제자로 불국사에 주석하였으며, 흥륜사의 금당10성 중에 포함되어 그 서벽에 소상(塑像)이 모셔져 있었다.
정치>군사>반란>모의·作亂
정치>신이>자연현상>땅·산·돌·물·바다
정치>신이>자연현상>천문
정치>신이>생물>식물
정치>신이>생물>동물
정치>법률>형법>석방·사면
서명 : 안국병법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원성대왕(元聖大王) >각간 김경신이 꿈을 꾸고 아찬 여삼이 해몽하니 왕이 될 징조였다
각간 김경신이 꿈을 꾸고 아찬 여삼이 해몽하니 왕이 될 징조였다
원성대왕(元聖大王)
이찬註 160160 신라 17관등 중 제2관등이다.닫기김주원註 161161 선덕왕이 죽고 왕위를 계승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비로 불어난 북천(北川)을 넘지 못해 왕위를 김경신(金敬信)에게 빼앗기고 강릉으로 물러났다.닫기(伊飡 金周元)은 처음 상재(上宰)註 162162 상재상(上宰相)의 생략형이라고 해석하며 신라의 재상은 대재상(大宰相, 상재상(上宰相))·차재상(次宰相)·제삼재상(第三宰相)의 서열이 존재했다고 한다(木村誠, 「新羅の宰相制度」, ≪人文學報≫ 118, 東京都立大, 1977).닫기가 되고 왕은 각간으로 두 번째 재상이 되었는데 꿈 중에 복두(幞頭)註 163163 귀인이 쓰던 모자로 후주(後周) 무제(武帝) 때 처음 만들어졌다.닫기를 벗고 소립(素笠)을 쓰고 12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天官寺)註 164164 김유신이 창건한 절로, 사지(寺址)가 경주시내의 오릉(五陵) 동쪽에 남아있다.닫기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자 사람을 시켜 그것을 점치게 하니, 말하기를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형틀을 쓰게 될 조짐이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이 말을 듣자 심히 근심스러워 두문불출하였다. 이때 아찬註 165165 신라 17관등 중 제6관등으로 아척간(阿尺干)으로도 표기되었다.닫기여삼 혹은 다른 본에서 여산(餘山)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로 하여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재차 청하여 말하기를 “한번만 뵙기를 원합니다.” 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자, 아찬이 물었다. “공께서 근심하는 것은 어떤 일입니까?” 왕이 꿈을 점쳤던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니 아찬은 일어나 절하며 말하기를 “그것은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약 대위(大位)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 꿈을 풀어 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좌우를 물리치고 해몽하기를 청하자 아찬은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거하는 다른 사람이 없다는 뜻이요, 소립을 쓴 것은 면류관(冕旒冠)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손까지 왕위를 전한다는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찌 왕위에 오를 수 있겠소?” 왕이 말하자 아찬이 대답하기를 “청컨대 은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지내면 될 것입니다.” 하자 [왕은] 이에 따랐다.
註 160
신라 17관등 중 제2관등이다.
註 161
선덕왕이 죽고 왕위를 계승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비로 불어난 북천(北川)을 넘지 못해 왕위를 김경신(金敬信)에게 빼앗기고 강릉으로 물러났다.
註 162
상재상(上宰相)의 생략형이라고 해석하며 신라의 재상은 대재상(大宰相, 상재상(上宰相))·차재상(次宰相)·제삼재상(第三宰相)의 서열이 존재했다고 한다(木村誠, 「新羅の宰相制度」, ≪人文學報≫ 118, 東京都立大, 1977).
註 163
귀인이 쓰던 모자로 후주(後周) 무제(武帝) 때 처음 만들어졌다.
註 164
김유신이 창건한 절로, 사지(寺址)가 경주시내의 오릉(五陵) 동쪽에 남아있다.
註 165
신라 17관등 중 제6관등으로 아척간(阿尺干)으로도 표기되었다.
정치>군사>반란>모의·作亂
정치>왕실>왕족>태자·태자비
정치>왕실>왕족>왕자·공주·왕제·왕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