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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막성당. 원주 8경 중 제7경이며 1986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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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막 성당의 내부. 아치형 천장에 소박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져 있다. |
뾰족한 첨탑과 아치형 통로, 채색 유리가 있는 작고 오래된 성당이었다. 비(非)신자의 눈과 마음에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양식이라는 것이 그렇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백색의 성모상, 부속 건물들의 붉은 벽돌과 박공형 지붕들, 적막한 ‘십자가의 길’에서 만나는 ‘십자가를 진 채 쓰러진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성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성당은 절실함도 없었다. 그러나 근거없는 믿음과 단순하나 맹목적인 용기가 생겨났다. 기다리는 것도 없는데 기다리던 것이 올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당이라는 공간이 그랬다.
龍 형상을 한 용소막 마을…용 발위에 지은 성당
천주교 초기 산골 들어가 세운 세번째 신들의 숲
6·25때 인민군 식량창고 사용·총탄 맞은 성모상
◆신림면 용소막 마을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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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막성당 뒤쪽 언덕에 있는 ‘십자가의 길’. |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창기 모진 박해의 시대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강원도에 처음 세워진 성당은 횡성의 풍수원 성당이다. 두 번째는 원주성당(현 원동주교좌)이며 세 번째가 용소막 성당이다. ‘신들의 숲’이라는 신림면(神林面),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신들이 내려와 관리하던 땅에 용의 형상을 한 용소막 마을이 있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살던 신자들이 하나 둘 용소막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93년 무렵이었다. 그들은 용소막에서 원주본당 소속 공소(公所)로 모임을 시작했고, 1904년에는 독립된 성당이 되었다. 용소막성당이다. 처음에는 용의 발 위에 초석을 놓은 10칸 규모의 초가집이었다.
신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새로운 성당을 짓기로 했다. 신자들은 장마 때 물길을 이용해 주변 배론산, 학산, 치악산 등지에서 목재를 옮겼고 지역의 흙으로 벽돌을 구웠다. 그렇게 1915년 현재의 모습과 같은 벽돌조 양옥 성당이 완성되었다. 1941년에는 지역 주민들의 문맹 퇴치와 전교를 위해 4년제 학교인 명덕국민학원을 설립했다. 1943년 대동아전쟁 때 일제는 성당에 있는 쇠붙이를 모두 빼앗아 갔다. 종은 물론 제대와 회중석을 구분하던 난간까지. 6·25전쟁 때 피해는 더 컸다. 성당은 인민군들의 식량창고가 되었고, 성당 내부의 성모상이 총탄을 맞아 목과 전신이 파손되었으며 성당 천장도 총탄의 세례를 받았다. 명덕국민학원 교사와 본당의 문서도 모두 불에 탔다. 그러나 신자들은 성당만은 끝까지 지켜냈다.
신발을 벗고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매끄러운 마루, 서늘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소박한 스테인드글라스로부터 은은한 빛이 퍼져 있다. 제단 한쪽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 있다. 팔각의 가느다란 기둥 14개가 받치고 있는 아치형 천장은 총탄의 자국없이 높고 깨끗하다. 부드러움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성당의 과거도,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세계의 모든 악도, 이 공간 속에서는 생각나지 않는다. 부드러움 때문에 온갖 엄격함과 갖은 이기심이 다 걸러진다. 소소한 걱정거리부터 깊은 고통까지 모조리 사라지는 기적을 무심하게 맞는다.
◆라우렌시오와 루르드의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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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동산 가는 길의 예수상. 아래 성당 경역을 굽어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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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옆 언덕 아래 조성된 성모동굴과 성모상. |
성당의 좌측에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의 유물관이 있다. 용소막성당에서 평생을 보냈다는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히브리어와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의 원문을 번역한 성경학자다. 1962년에 폐회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논의된 내용 중에는 자국어를 사용한 미사의 허용과 분리된 개신교를 형제로 인정하는 교회의 연합 등이 있었다. 이때부터 세계 가톨릭교회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한국에서는 선종완 신부가 이미 10년 전부터 한국어로 단독 번역을 하고 있던 중이었고 최초로 창세기가 출판된 것이 1958년이었다. 한편 그는 1960년에 수녀회를 설립했는데 당시 수녀원 지원 시 필수 조건이었던 ‘학력’에 대한 제한을 없앴다고 한다. 그의 이념은 노동에 근거한 철저한 자립과 봉사였다.
히브리어 구약성경 국내 첫 번역 선종완 신부 유물관
용의 머리 부분 언덕 오르면 십자가의 길·성모동산
150년된 느티나무 다섯 그루가 성당 수호하듯 우뚝 서
1968년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한국가톨릭교회와 갈라진 형제인 개신교들과의 일치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일환으로 성경을 공동번역하게 되었다. 구약을 번역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 즉 고고학·히브리어·희랍어에 능통한 이는 가톨릭 측에서는 유일하게 선종완 신부였고 개신교 측에서는 문익환 목사였다. 1968년 11월부터 1976년 7월 초까지 9년 동안의 번역 작업이 끝나갈 무렵 선종완 신부는 간암 말기임을 알게 된다. 그는 성모병원에 입원해 1주일동안 하루 1시간 잠을 자면서 교정을 하였고 마지막 교정을 마친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의 유언은 합심, 인내, 겸손, 가난, 봉사, 그리고 겸손이었다. 유물관에는 그가 사용하던 낡은 책상을 비롯한 유품 380여점과 각종 서적류 300여권이 보관되어 있다.
선종완 신부의 또 다른 이름은 ‘라우렌시오’다. 초기 기독교 성자였던 라우렌시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건을 나누어 주는 이였다. 탐 많은 로마의 집정관이 그에게 교회의 보물을 달라고 요구하자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 이들이 바로 교회의 진정한 보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체포되어 뜨거운 석쇠 위에서 고문을 받았다. 라우렌시오는 고문을 지켜보던 로마 황제에게 외쳤다. “보아라. 한쪽은 잘 구워졌으니 다른 쪽도 잘 구워서 먹어라!”
유물관 뒤쪽으로 피정의 집과 교육관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십자가의 길’이 이어지고 성모동산이 펼쳐진다. 언덕은 용의 머리 부분이다. 살금살금 용의 머리를 밟고 ‘슬픔의 길’ 혹은 ‘고난의 길’로 불리기도 하는 ‘십자가의 길’을 지나 성모동산으로 오른다. 환하고도 고적한 숲길이 일단의 마루에 올랐을 때 너른 숲 광장 한켠에 선 성모상을 만난다. 용소막성당의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다.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한 기적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라는 공간이 주는 믿음과 용기와 치유의 감정은 성모의 기적일지도 모른다.
기적일까. 성당 마당에 다섯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다. 150년이 되었다는 나무는 성당보다 먼저 이곳에 서 있었고, 성당과 함께 참혹한 시대를 살았고, 이제 성당을 수호하듯 건강하게 서 있다. 기적일까. ‘보아라. 한 쪽은 잘 구워졌으니 다른 쪽도 잘 구워서 먹어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그렇게 외칠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기적이겠지. 뾰족한 첨탑과 무성히 빈 가지가 부드럽다. 아픈 가운데 행복한 것이 기적이라는 것은 알겠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중앙고속도로 원주방향으로 가다 신림IC로 나간다. 제천방향 88번 국도를 타고 가다 신림삼거리에서 좌회전 해 조금 가면 용암삼거리다. 이곳에서 우회전 해 작은 다리를 건너면 성당의 첨탑이 바로 보인다. 유물관 관람시간은 오전 10~11시, 오후 2~5시며 월요일은 휴관이다. 유물관 견학은 수녀님께 연락해 부탁을 드려야 한다. 유물관 입구에 안내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