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1월 25일
말씀: 롬9:19-24
제목: 하나님 되심의 증거
사람들이 대부분 기독교의 의문을 크게 요약한다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세상이 이렇게 어렵고 힘들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잘 사는 사람은 잘 살고 못사는 사람은 못 살고 건강한사람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구별되어 있느냐, 세상은 여러모로 참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언제는 경기가 좋다고 한 적이 있습니까마는 요즘은 누구나 위기의식을 느낄 만큼 참 어렵습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라 더욱 난감한 사안입니다마는 중국 같은 경우는 설날을 계기로 실직자들이 폭동사태로 비화될 조짐을 보일 것 이라는 전망을 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월의 위기설이 나돌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가 피해 갈 수 없는 길목에서 참 어려움을 격고 있습니다. 올 해 저희나라 같은 경우도 ‘마이너스 성장 쇼크’가 현실도 드러났습니다. 작년 4분기 성장률이 -3.4% 랍니다. 수출이 -11.9%로 설비투자가 -16.1%로 소비가 -4.8%로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성그룹도 4분기에는 9400억원이 손실을 보았고 지금 구조조정으로 삼성도 어수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용산 재개발지역에 경찰 특공대를 투입해서 철거민들을 과잉진압 했다는 논란 속에 정치권이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화재로 인해서 6명의 사상자를 낸 이번 사건은 더군다나 어려운 경제상황과 정치적 논란 속에서 국민들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정치적 권위자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권위에 불신으로 까지 이어져서 세상과 하나님을 원망하는 분위기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불신에 대한 문제를 하나의 구원문제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원문제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심판하는가? 하는 것인데 물론 구원문제를 다루는 것이지만 여기에 모든 권위의 불신을 푸는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인 19절에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창조 자체를 누구는 죄인으로 누구는 복 받을 사람으로 미리 정해 놓은 것이 아니며, 심판의 자리에 이른 것은 인류가 자초한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무엇이 불공평하냐하는 것부터 냉정하게 따져보시면 예를 들어 못산다하는 문제도 혹시 자기가 공부를 하지 않아서, 게을러서 못산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못사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서 게으르고 공부도 하지 않고 말썽만 피우는 사람도 동일하게 잘 사는 세상이 된다면 이것이 불공평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사고, 자연재해, 질병 등을 따져보아도 사람이 잘 못해서 나타난 현상들이라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누구에게 핑계될 부분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변명이나 핑계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면 감사한 것이지 어찌 이것이 불의한 일이나 불공평한 것이냐 하는 것이 일차적인 답이었습니다.
반론을 하기를,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 심판을 여태껏 하시지 않고 보류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22.23절에 암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고 구원하시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을 유보했다는 것이 성경의 답입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때문에 심판은 유보되고, 인내와 기다림으로 일관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누구길래 하나님께 힐문하느냐’하는 지위와 권위에 대한 반문을 먼저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우리의 징벌을 자초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두 번째 이어지는 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가장 중요한 궁극적인 답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시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느냐하는 문제, 그리고 왜 심판은 유보되느냐 하는 질문을 합쳐서 그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표현이요, 설명이요, 사랑이시다는 것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묻고 싶은 질문, ‘하나님이 기왕 은혜를 베풀려면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고 심판을 하시려면 빨리 심판을 하시지 ’하는 질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와 심판과 의를 드러내실 때도 하나님이십니다.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베푸실 때도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노아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바로의 군사들을 홍해 속에 함몰시킨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그 지극한 권세를 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의 내용이요, 표현이요 설명입니다.
그러나 22-23절을 보면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진노의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준비는 하고 계시지만 오래 참으사 관용하시며 심판과 진노와 의로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에 대한 설명과 증표로 삼지 않으시고 유보하셨다는 것입니다. 대신 23절에 있는 바와 같이 긍휼과 자비와 구원을 베푸시는 것으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설명하고 있고 표현하고 계시며 나타내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와 사랑 쪽으로 하나님이 표현되시느냐하면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시키고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불평하고 불만으로 토로하는 하나님의 불공평하심에 대한 이유가 근본적으로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죄악 된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신이라고 만든 것은 절대로 인간보다 못합니다. 일본에 신들이 굉장히 많은데 가정에 신당을 차려 놓고 모신 신이 있는데 지진이 나면 신이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을 보호해서 그 신을 가지고 밖으로 피신을 한답니다. 인간이 만든 신중에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신을 설명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그리스 신들을 보면 하나같이 편협하고 변덕스럽고 괴팍합니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는 바람둥이고 그 부인 헤라는 질투의 화신입니다. 비록 능력은 인간보다 많이 갖고 있어야 인간이 섬기니까 그렇게 설정을 했다 하더라도 그 인격과 덕성에 있어서는 인간만도 못하게 그려진 것이 인간이 요구하는 신의 모습입니다. 왜요 타락자체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과 모든 신들에 대하여 반발하는 죄악 된 성품의 본질이 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사탄이 와서 뭐라고 하면서 그들을 무너트렸습니까? 이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못 먹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의 편이 아니란 말이지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갖는 신에 대한 죄안 된 본성으로 말미암은 굴곡 된 시각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하나님을 보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갖지 않은 힘만 가지게 해 놓고 사리분별이나 공평함과 일관성에 있어서는 결여 되어 화를 잘 내고 괴팍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들이 만든 신에 동일하게 그런 시각으로 보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 중에 제일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하시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시느냐 왜 이렇게 일을 하시느냐?’우리를 그렇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봐라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도 결국은 편협하고 괴팍한 분이 아니겠느냐?’하고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안 하고 누구는 잘 살고 누구는 못살고,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하고 하는 그런 불공평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나는 안 믿겠다’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은 아무도 심판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심판하고 누구를 벌 주고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에게도 심판내리는 것을 가능하면 보류하시고 미루시는 분이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아브라함이 숫자를 자꾸 깎아내립니다. 50명에서 나중에 10명까지 숫자를 줄이면서 의인 10명만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하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의인 10명이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목적으로 오셨다기보다도 그들의 죄가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은 저들의 만연된 추악한 죄 때문입니다. 의인이 없는 세상, 하나님의 자녀가 없는 세상은 결코 무의미한 세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성경의 맥락은 하나님이 진노와 공포와 두려움으로써가 아니라 자비와 사랑과 긍휼로 나타내기를 기뻐하는 분이시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본문 23절에서 하나님의 품성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하는 표현에서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도 누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고 안 받고 그것으로 감격과 행복을 따집니다마는 그러나 사실 구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가 잘 설명되어진 관점에서 이해해야 됩니다. 나에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이 설명되어지고 있고 그 하나님 앞에 믿음과 항복이 있는 것이 바로 구원에서 찾아야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엡2:1-7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위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한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계속 강조해 왔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조건과 환경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구원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성경이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크신 하나님이시기에,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죄인 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불의하시다. 누구는 구원하시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으시는가?’하는 내용입니다. 지금 성경의 이야기는 모든 자들이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지금도 인내하고 기다리며 심판을 보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공평하시려면 율법대로 하면 됩니다. 율법을 지키면 의롭다고 하고 지키지 않으면 정죄하여 죽이면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 살아남을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의를 드러내면 살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그런 것을 택하지 않으시고 대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드려내셨습니다. 우리가 지킬 수없고 우리가 씻을 수 없는 문제이기에 죄에 대한 부분을 우리가 책임지거나 사할 권세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으면 방법이 없기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대신 죄를 없애는 방법 외에 어떤 방법이 없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란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일들에 대해서 다만 입을 가리고 항복하며 놀랄 뿐이지 ‘하나님은 왜 일을 이렇게 하셨습니까?’라고 물을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아담 범죄 이후에 인간이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없었습니다. 죄가 유전되고 그 죄가 가면 살수록 잔인하고 추악해 졌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수령에서 우리 모두를 구원해 내는 이 기이한 일을, 이 놀라운 일을, 이 은혜와 긍휼과 지바와 능력의 일을 이루사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설명하고 표현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에서 가장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잘 표현되고 설명되어지기 때문에 지금까지 장황하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번 주가 명절입니다. 고향으로 발길을 이미 옮긴 사람들도 있고 예배를 마치고 나서 고향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대전에서 형제들을 맞이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부모 형제자매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고 세상의 불평과 원망이 쏟아질 수 있습니다. 특히 정치이야기로 인해서 원망과 비판을 쏟아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 모든 것의 내면적 원인은 하나님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시느냐하는 것이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숨겨져 있습니다.
세상적 원망, 정치적 원망, 이 모든 것이 절대권위자에 대한 원망으로 돌리려는 심리적인 불안감이 어느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있습니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 입에 담지 못할 불신과 원망과 하나님에 대한 저주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 만큼 사회가 불안하고 실존주의적 삶의 근거에서 나타난 이기적인 성향이 팽배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이 공평치 못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마저 공평치 못하다는 인식으로 무신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 앞에 우리가 어떻게 서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심판과 징계의 하나님의 쪽에서 하나님 되심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 되심을, 그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사랑과 인내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드려내는 일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공의롭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하면 씩 웃으세요. 하나님에 대해 부인하거나 믿음에 대해 조롱을 해도 씩 웃으세요. 그 방법 이외에 어떻게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사람들은 다 어떻습니까? 인생을 살아오면서 인생살이에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다 자기 자신편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아무도 남의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누가 남의 편을 든다면 이익이 있을 때이지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자기편만 드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다릅니다. 신자가 무엇이 다르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드신다는 관점에서 다릅니다. 얼마큼 우리 편을 드시느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보내주실 만큼 우리의 편을 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드시는 것을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가 아낄 것이 없습니다. 있는 것에서 넉넉히 베푸십시오. 그저 베풀고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자존심상하는 말을 하더라도 포용과 사랑의 말로 답하고, 억지를 쓰더라도 넉넉히 받아주십시오. 여기에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와 인자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지금 우리가 설명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사실 우리가 희생이라고 하는 것이 따지고 보면 희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은 아까운데’라고 얘기할 것도 없습니다. 뭐든지 좋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갖고 계시는 사랑과 우리의 편을 드시는 열심을 본다면 우리가 내어놓은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아낄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없을 만큼의 놀라운 것을 시시때때로 공급받고 있는 우리입니다. 고갈 될 수 없는 사랑의 힘을 어디에다 발휘하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놀라운 사랑을 공급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는데 어찌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인내하시고 긍휼하시고 자비하시며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풍부하심이 우리의 구원을 통해 계속 설명되어지고 있고 하나님 되심을 우리가 체험하고 있다면 세상을 그리 옹졸하게 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영광과 기쁨과 영원함과 보화가 우리 것인데 이 땅의 것으로 이기적이고 인색하고 분을 내고 조급하고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복음으로, 미련한 방법인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함으로 설명이 되어져야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심판 때가 아니고 무서운 공의와 진노의 때가 아니라 긍휼과 인내와 사랑의 때라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냐 하면 우리에게 복음의 기회며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입은 백성들이 맡은 사명의 기간입니다. 지금이 구원을 이룰 때며, 지금이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구원할 때라 이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명절이 기회이며 사랑으로 은혜를 공급할 때입니다.
엡3:8-12‘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사도바울이 가진 복음의 사명, 복음의 책임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갖고 계신 사랑의 풍성입니다.
12절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담대함과 당당함을 우리 인간 쪽에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당당함과 담대함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느냐를 알 때 나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비유 중에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집에 손님이 왔는데 손님을 대접할 음식이 없습니다. 친구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립니다. ‘야, 우리 집에 친구가 왔는데 너, 음식 좀 내놔라’‘이제 옷 다 벗고 자려고 누웠는데 또 언제 일어나서 음식을 챙겨주고 또 눕고 하냐 귀찮다 다른데 가서 알아봐라’그 다음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친구 됨을 인하여 들어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으로 인하여 들어 주었느니라’여기서 간청한다는 것은 떼를 썼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간청은 때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떼씀은 이런 뜻입니다. 친구란 내가 부탁할 대상이라는 것이 아니고 떼를 쓸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한데 ‘please’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친구라면 ‘내놔’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무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친구란 그런 것입니다. 서로 친구가 된다는 것을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친구는 그 친구가 원하는 것이 혹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라도 친구가 원하는 것을 곧 내가 원하는 것같이 취급하는 그것이 친구입니다.
이 개념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초청하고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내가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 됩니다. 내 소원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되고 이 것이 신앙 상에 가장 중요한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그 이전에 내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시고 내가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즐거움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그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를 보십시오.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를 주지 아니하겠느냐’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은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물며 온 우주만물에 무엇이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편이십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에 대한 내용이요 설명이요 표입니다. 이 원리를 가슴에 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우리가 이웃을 사랑함으로 표현되어야할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이번 설은 여러모로 어려운 현실입니다. 실직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구조조정의 위기감을 가지고 계신분도 있을 수있습니다. 사업에 희망이 보이지 않아 불안한 상태에 있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원망이 있고 누구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이 난무할 그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로우심과 사랑이심을 드러내어야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해답이 있고, 해결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축복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고, 안식이 있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기에 넉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복된 명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