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원기의 마지막즈음에 뉴에이지 특강을 듣고 '신과나눈 이야기'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것은 그에대한 수필형식의 감상문이자 레포트이다.
일단은 뉴에이지에 대한 특강을 들었고 그것의 연장이기 때문에 뉴에이지 사상을 짚어내는데
그 초점을 두며 영화를 봤다. 영화는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대표적인 뉴에이지
영화답게 그 사상은 많이 녹아 있었다. 여기서는 인상 깊었던 3가지만 다뤄보기로 하겠다.
첫째는, 주인공이 교회에서 설교하는 장면인데 여기서 주인공은 이런 설교를 한다.
"하느님을 따르는 것과 부는 상충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설교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이들은 재화를 더욱 많이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영적기쁨을 주는 이들은 더욱더 많이 받아야 하는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어느 부분은 맞고 어느 부분은 틀리지만, 여기서는 틀린 부분만 얘기하겠다.)
그럼 이말이 무엇이 잘못됐는지 성경말씀을 보자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 루카 18,25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 루카 6,20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 루카 20.25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 요한 15,18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수 없다." - 마태 6,24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세상과 재물은 함께 였으며 그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했다.
깊이 생각해야 할부분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광야의 유혹이다.
사탄은 말한다.
"내가 저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 루카 4,6
여기서 세상의 재물과 영광이 누구의 것인지 분명하게 나온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얻었으며,
이스카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버리고 은돈 서른 닢을 얻었다.
우리는 무엇 하나는 버려야 한다.
물론 예외도 있다. 구약의 시대에는 아브라함이, 다윗이, 솔로몬이 그랬고 신약에서는
베타니아의 라자로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께서 한계가 없으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시고 또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즉,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더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을 듣고 놀라하는 제자들에게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런 예외적인 경우일지라도 그들이 먼저 찾는 것은
재물이 아닌 '하느님 나라'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소유했던 재물은 '곁들여 받은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마태 6,33)
주제에서 다소 벗어나지만 갑자기 걱정이 되는것은, 이런 말을 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책감을 갖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필요해 의해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을 탐욕이라 생각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남의 밭에서 밀이삭을 뜯어먹은 제자들을
고발하는 바리사이들 앞에서 오히려 제자들을 변호 하셨다는 것이다. 자기 배만 불리고 매일 풍족하게
먹기 때문에 여유롭고 거룩하게 안식일을 보내는 이들과 피로와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밀이삭
한줌을 탐한 이들중 누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겠는가?
두번째는, 현재의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물론 맞는말이다. 사도 바오로도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필리 4,9)라고 말했으며, 신앙인이 되는 것이 결코 메조히스트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쁨의 대상이 주님의 말씀과 같지 않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27) 라고 말씀하셨듯이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대신덕의 하나인 '희망'에 근거한다.
우리 모두가 죽을 운명이지만, 하느님이시며 어린양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과 영원한
삶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이 그 기쁨의 원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세상에서 어떤 고난과 역경을 겪게 되더라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들과 성인 성녀들 처럼...
그러나 주인공 '닐'의 가르침은 현재의 기쁨에 그 포커스가 놓여있다.
현재 내가 느끼는것, 현재 나의 삶...
그것은 결과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게 한다.
'지금 내가 불행한데 하느님 나라가 뭔소용이냐?'
'하느님은 내가 지금 이순간을 더욱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실 것이다.'
'내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희생하며 살아야 하는가? 다른 이들은 저렇게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이 단락의 결론은 성경말씀으로 대신하겠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1)
세번째는, 주인공이 서점에서 독자들과 만나는 장면이다. 이부분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주인공이 서점에서 소그룹의 청중을 앞에 두고 강연을 하는데 한 여성이 불쑥 찾아와 대체
당신의 그 잘난 하느님이 어딨냐며 항의를 한다. 그 사연은 여인이 입양한 아이가 12살 되던 때에 아이에게 입양한
사실을 알렸고 아이가 급속도로 삐뚤어지자 18살이 되면 친엄마를 찾아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18살이 되던
해에 음주운전자에 의해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들은 주인공은 가만히 있다가 이렇게 얘기한다.
"당신의 아들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었습니다. 그 아이의 친엄마는 6년전에 죽었습니다."
이말을 듣고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모든것이 잘된것 같아 보이지만 이부분에서 내포하고 있는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주인공 '닐'의 말대로라면
음주운전자가 술을 마신것도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한것도 그리고 학생 한명을 치어 숨지게 한것도 모두 하느님의 뜻이다 .
즉 이사건에 어떤 악도 잘못도 없다. 단지 선하신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 그렇게 된것 뿐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 악이 없음을, 죄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도 육화도 의미가 없어진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희생되셨기 때문이며, 바로 그것 때문에 육화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원죄도 없어지고 부활도 없어지고 하늘 나라도 없어지고 예수그리스도도 없어진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를 부정하는 핵심 논리가 된다.
뉴에이지가 무서운 것은 아무래도 이런 부분일 것이다.
처음엔 좋은 말로 시작하지만 그 끝은 모든 진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 요한 8,44
첫댓글 성경 구절을 인용한 고찰이 돋보입니다. 글을 읽으면서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준비하느라고 고생 많이 했네요. 성경 구절들을 일일이 찾아서 인용한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어느 장면들의 내용들을 요약해서 비판한 방법도 좋네요. 특히 세 번째 장면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서 깊이 있게 분석했네요. 준비하느라고 고생 많이 했고, 앞으로 뉴에이지에 대해서 충분한 대비책을 갖추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