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6년 1월 27일,오스트리아 찰츠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1761년 5세 최초로 미뉴에트를 작곡하였지요. 1762년 6세 빈으로 연주여행을 떠났습니다. 쇤브룬 궁전에서 왕과 여왕앞에서 연주를 하였습니다.
1763년 7세 유럽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을 모은 <클라비어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라는 악보를 펴냈습니다 1766년 10세 잘츠부르크 대사교에게 곡을 써 주고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때 천연두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지요.
1769년 13세 오페라 부파<거짓 바보 아가씨>라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교황에게 '황금박차 훈장'을 받았습니다.
1770년 14세 음악가의 최고 단체인 '아카데미 피라프모니카'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1772년 16세 세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사육제용 음악극을 만들었습니다. 1777년 21세 어머니와 잘츠부르크를 떠나 아우크스부르크와 만하임을 거쳐 파리로 갔습니다. 1778년 22세 새로 작곡한 <파리교향곡>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779년 23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다시 궁정 연주가가 되었습니다. 1782년 26세 오페라<후궁으로부터의 도주>를 빈의 부르크 극장에서 상연하여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슈테판 성당에서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1783년 27세 첫아들 라이문트 레오폴트가 내어났으나 2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1987년 31세 프라하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상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프라하 국립극장에서 오페라<돈 죠반니>를 상연하였습니다. 1788년 32세 생활이 더욱 쪼들리게 되었습니다. '3대 교향곡'을 작곡하였습니다.
1789년 33세 베를린 여행하며 <미뉴에트 주제에 의한 9개의 변주곡>을 작곡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부탁으로 <현악 4중주곡 라장조>등 6곡을 작곡 하였습니다.
1791년 35세 빈의 시카네더 극장에서 <마술피리>를 공연하였습니다.
프란츠 발제크라는 귀족으로부터<레퀴엠> 작곡을 의뢰받고 작곡하다가 12월 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악 4중주곡 제 17번 ≪사냥≫ (STRING QUARTET 'HUNTING' K. 458) 이 곡은 모차르트가 1782년에서 1785년 사이에 하이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만든 여섯 곡의 현악 4중주인
≪하이든 4중주곡≫에 포함되어 있는 곡이다.
대선배 하이든의 작품을 본보기로 하여 작곡한 이 곡은 제1악장 첫머리의 제1주제가 사냥의 뿔피리 소리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사냥'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약동 적인 주제,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아름답고 유쾌한 율동으로 인해 행복감에 넘치는 이 작품 을 들으며 잔혹한 총소리는 없고 뿔피리 소리만 들리는 사냥터를 상상하면 토끼와 사슴이 뛰어 노는 숲 속의 전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네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곡은 제1악장이 알레그로 비바체 아사이, 6/8박자, 소나타 형식 을 가지고 있어서 진행 방식이 하이든의 음악을 연상케 한다.
제2악장은 모데라토, 3/4박자인데 세도막 형식으로 유유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제3악장은 아다지오, 4/4박자인 소나타 형식이고 우수에 차면서 근심 어린 빛이 보이는 부분이다. 론도 풍의 마지막 악장은 어디까지나 기쁨에 찬 분위기로 인해 테마의 모티브가 발전하는 묘미도 느끼게 해준다.
이렇게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에 큰 영향을 준 음악 선배 하이든은 일찌감치 모차르트의 천재성 을 인정하고 아낀 사람들 중 하나였다.
별다른 재능도 없이 아첨이나 연줄로 명성을 이어가는 음악꾼들을 노골적으로 비웃은 탓에 당시 음악계에 적이 많았던 모차르트였지만, 음악도 인격도 훌륭했던 하이든만은 모차르트에게도 경배의 대상이었다. 이런 모차르트가 어느 날은 하이든을 위해 작곡한 현악 4중주곡들을 모아 발표하는 '현악 4중주 파티'를 열었고 이 연주회에서 그의 곡들을 모두 감상한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에게 "하느님 앞에서 정직하게 말하지만, 당신의 아들은 인격적으로나 명성으로나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감식력이 뛰어난데다가 작곡에 대한 최고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며 극찬을 했다고 한다. 역시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24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음악 세계를 깊이 이해하는 지음(知音)이였다. 베토벤을 연구하는데는 모차르트의 작품을 세밀히 음미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모차르트를 연구 하는 데는 하이든을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의 증거가 되는 곡이 바로 이 ≪현악 4중주곡 '사냥'≫이라 할 수 있다.
피아노 협주곡 제 20번 (PIANO CONCERTO NO. 20 K.466) 18세기는 음악사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에는 '피아노'라고 불리는 '피아노 포르테'의 탄생은 이 악기 특유의 풍부하고 깊이 있는 표현으로 인해 후세의 음악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피아노를 주역으로 사용한 낭만파 시대가 시작됨도 물론이다.
이러한 장르의 하나인 피아노 협주곡은 모차르트의 손에 의해 피아노 독주의 섬세한 부분과 다 른 악기와의 조화라는 틀이 완성이 되게 된다.
그의 30여 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 1783년 이후 빈에서의 예약 연주회를 위해 작곡된 곡들은 이 장르의 고전적인 완성을 보여주는 명곡들임과 동시 에 K. 466, 467, 482는 요즘에도 가장 빈번하게 연주되고 있는 곡이다.
1785년에 빈의 한 시립 집회소에서의 예약 연주회를 위해 작곡되고 초연된 이 곡은 단조로
만들어진 첫 피아노 협주곡일 뿐 아니라 여러 가지 특기할 만한 면들이 있는 곡이다.
저음의 꿈틀거리는 듯한 분위기에서 어둡고 비극적으로 시작하는 제1악장에서는 4/4박자, 알레그로의 속도로 짧은 저음이 엉키는 제1주제와 사랑스런 제2주제가 대화식으로 번갈아 가며 연주된다. 제2악장에서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로맨틱함은 2/2박자와 세도막 형식이라는 구성 양식으로 인해 화려함마저 느껴진다. 눈부신 중간 부와 강렬한 대조, 격한 상승의 피날레, 론도 주제의 이 곡은 작곡가 자신이 지금까지의 여러 작품들과는 다른,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며 자신의 뒤를 잇는 또 한 명의 대가 베토벤의 등장을 예견하는 듯도 하다.
사실 이 곡은 모차르트의 협주곡들 중에서도 낭만파 음악가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고, 베토벤이나 브람스도 즐겨 연주하여 카덴차까지 적어 넣은 것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 곡을 초연하던 날,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빈에 도착해 아들의 음악 활동 중 가장 훌륭했던 이 연주회에 참석을 했고, 그는 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날의 감격을 표현했다. "음악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악보를 쓰는 사람이 일을 늦게 끝내는 바람에 동생은 연습 을 못했지만 너의 동생이 무대에서 사라질 때 황제께서는 모자를 들고 고개를 흔들며 '브라보 모차르트'를 외치셨다." 어릴 때부터 아들의 천재성을 보호하기도, 이용하기도 한 그의 아버지로서는 생애 최고의 감격스러운 날이었을 것이다. 피아노 협주곡 제 24번 (KONZERT FUR KLAVIER & ORCHESTER K. 491) 이 협주곡은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창작하던 1786년 예약 음악회(당시의 음악가들이 지원금을 받기 위해 귀족들을 모아 놓고 신곡을 발표하던 음악회)를 위해 작곡된 곡인데 그가 내 용이 전혀 다른 이 두 곡을 거의 동시에 만들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리고 이 곡과 거의 때를 같이 해서 ≪제 23번 피아노 협주곡≫도 작곡되었다는 점을 보면 모차르트가 얼마나 비범한 천재인지를 알 수 있다. '샘처럼 한없이 솟아난다'라는 비유로밖에 설명이 안 되 는 그의 악상의 풍부함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한 해 전에 만든 ≪피아노 협주곡 제 20번≫과 함께 단 두 곡뿐인 단조 협주곡 중 하나인 이 곡 은 20번과 마찬가지로 무겁고 깊숙하면서도 로맨틱한 내용인데다가, 악기의 뛰어난 사용법과 관 현악의 충실함에 있어서는 20번 이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모차르트의 협주 곡을 들을 때는 우선 ≪제 20번≫과 ≪제 24번≫부터 먼저 듣기를 권한다. ≪피아노 협주곡 24번≫을 듣노라면 어둡고도 극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알레그로의 4/4박자인 제 1악장과 라르게토의 속도로 서정이 넘치는 피아노와 현악기가 대화를 하는 듯한 로만스풍의 2/2 박자인 제2악장에서는 마음을 찌르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전편에 걸쳐 관악기를 크게 부각시키고, 협주곡으로서는 색다르게 알레그레토, 2/4박자의 제3악장에 변주곡을 두는 등 의 새로운 시도도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치밀한 계산이 눈에 띄는 모차르트의 다른 작품들과 달 리 기교적인 연주들을 즉흥적으로 이끌어 내도록 만든 점 또한 이 곡을 모차르트의 음악 생활 중 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라 평가하게 만든다. '내용적으로 더 이상 능가할 수 없는 모차르트의 창작 활동의 높은 경지'라고 일컬어지는 이 작 품에 대한 아인쉬타인의 평가는 이렇다. "이 협주곡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지 베토벤도 감탄하여 자신의 ≪C단조 협주곡≫중에서 두세 개의 작품을 모차르트에게 공물로 바칠 정도였다. 서곡 ≪피가로의 결혼≫ (OVERTURE TO LE NOZZE DI FIGARO K. 492)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은행원 앤디의 20년에 걸친 탈옥 준비 이야기가 깔끔하게 다루어졌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이 교도소 방송을 통해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틀어 주는 장면이었다.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던 죄수들의 얼굴 에 나타났던 평화로운 표정은 영화를 보던 사람들에게도 잠시 현실을 벗어나 안락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마술 같던 음악은 바로 이 ≪피가로의 결혼≫중에서 '편지의 이중창'이었다.
이 오페라는 18세기의 프랑스 극작가 보마르셰가 쓴 희곡을 다폰테라는 사람이 고치면서 동시에 모차르트가 계속 음악을 붙여 가며 6주만에 모두 완료한 음악이다. 이 곡의 초연은 1786년 빈의 부르크라는 극장에서 황제까지 참석하여 거행됐지만 이렇게 상연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까닭은 보마르셰의 원작이 프랑스 혁명 전야의 부패하고 타락한 지배층을 통렬하게 비판, 조소하는 내용의 희곡이어서, 본국 프랑스는 물론이고 빈에서도 기피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의 오페라가 그대로 상연될 수 있었던 것은 다폰테의 뛰어난 솜씨와 정치적 역량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삭제하고 재치 있게 대 본을 만들어 황제의 허가를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희곡은 얼마후 일어나는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 중 하나가 되는 역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오페라의 배경은 보마르셰가 쓰고 로시니가 작곡한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같은 17세기 스페인의 알마비바 백작의 집이다.
바람둥이 백작 알마비바와 로지나라는 소녀가 재치 있는 이발사 피가로의 힘을 빌어 결혼을 한다는 내용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속편 격인 이 ≪피가로의 결 혼≫은 백작의 시종이 된 피가로와 하녀 스잔나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이다. 방탕한 백작이 스잔나에게 마음이 쏠리게 되고 첫날밤이라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초야권'이 라는 옛날 관습을 부활시키고 이로 인해 여러 문제들이 일어난다. 스잔나를 유혹하려는 백작과, 백작 부인을 스잔나 대신에라도 유혹하려는 피가로를 보다 못한 백작 부인과 스잔나는 꾀를 내고 결국은 두 어리석은 남자들로부터 사과를 받고 용서해 준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이다. 오페라의 기분을 잘 표현해서 단독으로 연주를 자주 하는 서곡은 프레스토, 4/4 박자로 소나타 형식이다. 그 뒤에는 4개의 막으로 나뉘는데 배경은 주로 백작의 집이 된다. 이 오페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생동감에 넘치고 매력적이다.
특히 스잔나는 서민적인 매력을 지닌 캐릭터로 모차르트가 그의 아내 콘스탄체의 처녀 시절의 모습을 그리며 작곡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모차르트가 22세 때 사랑 에 빠졌던 일로지아라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고, 그녀 의 동생인 콘스탄체가 상심한 모차르트를 위로해 준 계기로 둘은 서로에게 끌리기 시작했다고 한 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와 누이는 이들의 결혼을 반대했고,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고 결혼한 커플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다. 콘스탄체가 무능하고 사치스러운 주부여서 모차르트가 요절을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가 결혼 생활 을 하는 동안 명곡을 많이 쓴 것을 보아 그녀가 소크라테스의 악처처럼 모차르트의 창작의 원동력이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도 있다.
모차르트의 4대 오페라는 모두 한결같이 음악이란 얼마나 강력하게 극적 형식을 만들 수 있는가 를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피가로의 결혼≫과 ≪마술 피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와 같은 극적인 형식이 얼마나 감동적인 표현 도구인가를 웅변해 주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드라마로서의 오페라'형식의 완성은 그가 우리에게 남겨 준 또 하나의 값진 유산이라 하겠다. 교향곡 제 41번 ≪주피터≫ (SYMPHONY NO.41 'JUPITER') 주피터', 그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최고의 신이며,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에 해당 하는 신이다. 물론 이 '주피터'라는 명칭은 모차르트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라 베토벤의 ≪월광 ≫이나 ≪운명≫처럼, 후세 사람들이 붙인 것이라지만(낭만주의 시대의 교향곡들은 작곡가가 제 목을 정해 만든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곡의 성격을 간파하고 달아 준 이름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곡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좋은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모차르트 최후의 교향곡이 자 그의 모든 교향곡들 중 가장 웅대하고 장려한 이 곡은 바로 전 작품인 ≪제 40번 G단조≫가 쓰여진지 불과 2주일 만인 1788년 8월 10일에 완성이 되었다. 그가 참으로 천재라는 사실을 실감 하게 하는 또 하나의 놀라운 이야기이다. 베토벤 이전의 최대의 교향곡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곡 '주피터'는 모차르트가 그의 궁핍한 생활 을 돕기 위해 맡아 작곡한 곡이었다. 하지만 궁핍하고 구질구질한 현실은 전 곡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반면, 오히려 지극히 순수하고 고전적인 형식과 기교의 원활함은 물론 마음의 조화나 안정감에서 그가 절정에 도달했다는 감이 느껴진다. 서주 없이 돌연 남성적인 호쾌함으로 시작되는 제1주제가 매우 인상적인 이 곡의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에 알레그로 비바체, 4/4박자의 구성을 가지고 있다. 곡 전체를 통해 가장 감명을 준다 는 제2악장은 안단테 칸타빌레, 3/4박자의 소나타 형식이고, 다 카포 형식의 제3악장은 반음계 적으로 매끄럽게 하행하는 독특한 테마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 악장에서는 소나타 형식이지만 푸 가의 기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힘찬 대위법 적인 전개로 ≪마침 곡에 푸가를 가진 C장조 교향 곡≫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박진감'이라는 구태의연한 용어가 딱 어울리는 부분이 다. 악기의 편성 역시 팀파니와 트럼펫까지 포함되어 있는 당시로는 매우 거대한 구성이었는데, 이 점 또한 이 곡의 특징을 살려준다. 모차르트의 곡을 즐겨 지휘하던 발터라는 사람은 오케스트라 단원들 앞에서 이 곡의 연주에 대 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울고 싶을 정도로 밝게 연주해야 하고, 또 밝아지지 않으면 안된다. 세레나데 제 13번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직≫ (SERENADE NO.13 'EINE KLEINE NACHTMUSIK' K.525) '세레나데'라고 하면 흔히 저녁에 연인의 창밖에서 사랑을 고백하며 노래를 한다거나 악기로 연 주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18세기에 유행했던 세레나데는 이 같은 낭만적인 소품들과는 다른 개념이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시대인 18세기의 세레나데는 디베르티멘토와 교향곡의 중간쯤의 성향인 다악장의 기악곡을 일컫는 용어였다. 보통 4악장 정도 길이의 악곡인 세레나데는 부호들의 행사가 있을 때나 귀족들의 살롱과 정원에서 즐겨 연주되었다.
모차르트는 13개의 세레나데를 썼는데, 이 곡은 명랑하고 우아한 멜로디로 인해 널리 알려지고 인기가 높은 작품이다. 그가 31세이던 1787년 작곡된 이 곡의 제목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뮤 지크≫는 '작은'이라는 뜻의 '아이네 클라이네'와 야곡(夜曲)의 뜻인 '나하트뮤지크'가 합쳐진 독일어로 '소야곡', '세레나데'를 일컫는 말인데, 또한 현악 5부로 구성되었다는 다른 세레나데 들과 좀 다른 점 때문에 '현악 세레나데'라고도 불려진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작품 목차를 보면 이 곡의 작곡 당시에는 세레나데의 원칙대로 5악장 구성이었다고 추측되는데 현재 전해 오는 이 곡의 구성은 교향곡 적인 4악장의 구성이다. 분실이 된 3 악장의 부분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이 우연한 소실인지 또는 누군가에 의해 고 의로 생략된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이 작품은 극히 간결한 서법으로 쓰여져 있고, 제1악장의 주제가 전체의 구성을 통일시켜 주어 일반인들에게도 쉽게 친숙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아름다운 선율과 세레나데다운 개방적 이고 명쾌한 곡조도 이 곡을 빛내 주는 요소이다. 전 악장을 통해 명랑하고 우아한 멜로디로 일관하는 이 곡의 제1악장은 알레그로의 속도로 4/4박자의 세도막 형식이다. 힘찬 제1테마와 귀여 운 제2테마가 응답을 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제2악장은 로만체 안단테로 4/4박자, 세도막 형식이고 달콤한 선율로 인해 가장 인상적인 악장이다. 제3악장은 미뉴에트 알레그레토, 3/4박자, 겹세도막 형식으로 간결하고도 전형적인 미뉴에트로 독일의 옛 무곡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마지 막 악장인 제4악장의 제2테마는 유창한 멜로디가 피날레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품이라는 평이다. 피아노 협주곡 제 26번 ≪대관식≫ (KONZERT FUR KLAVIER & OCHESTER NO.26 'KRONUNG' K.537) 1781년부터 빈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모차르트는 예약 음악회를 통해 활발하게 피아노 협주곡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도 12곡의 걸작이 쓰여진 1784년에서 1786년까지가 그에게는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생애 최후의 5년간에는 오페라, 교향곡, 실내악 등 다른 장르에서 는 많은 걸작을 남겼으나 피아노 협주곡은 갑자기 줄어든다. 이 이유는 그의 관심이 다른 장르로 옮겨진 것도 있겠지만, 빈 시민들이 점차 모차르트에게서 눈을 돌려 예약 음악회를 중지할 수밖 에 없었던 상황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경제적인 타격도 심해지기 시작했다. 30 여 평생 동안 1,000여 곡을 작곡할 정도로 열심히 창작 활동을 한 모차르트였지만 작곡의 대가로 받는 것은 적었고, 빈의 왕후 귀족은 모차르트의 음악에 만족은 했지만 물질적인 원조를 하려고 는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이러한 인색함이 모차르트에게는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가져 다주었을 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1787년 ≪피가로의 결혼≫과 ≪돈 지오반니≫가 대 성공을 거두고 황제로부터 '황실 궁정 실내 작곡가'의 칭호를 받은 모차르트는 이를 계기로 빈에서 인기를 되찾게 되리라는 기대에 가득 차 서 이 곡을 완성하였다. 하지만 이 곡의 예약 음악회도 개최할 수 없었고, 결국 이 곡이 초연 된 것은 완성된지 2년이 지난 1790년,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 축전기간 중이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 로 이 곡은 '대관식'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이 협주곡은 알레그로, 4/4박자의 제1악장의 유명한 독주 피아노 부분이 펼쳐 나가는 가운데, 축제 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려한 작품으로 되어 있다. 대관식과 관계없이 만들어진 곡임에도 불구하고 '대관식'이라는 이름이 신기하게도 어울리는 것은 모차르트의 혜안 때문일까? 그리고 로만스풍의 라르게토, 2/2박자의 제2악장에는 상쾌함과 아름다움에 넘치는 분위기가 있어 언제 들어도 즐겁다. 순진 무구함과 기쁨의 경지에 이른 이 음악은 어린애 같이 천진난만했다는 모차르트의 웃는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의 인상적이었던 그의 웃음소리도 함께 말이다. 제3악장은 2/4박자의 론도 성격을 지닌 경쾌한 곡으로, 형식상으로는 소나타 형식 을 보이지만 피아노의 눈부신 기교로 하여금 쉽게 잊지 못할 부분으로 만들어 준다. 이 곡은 그의 이전의 협주곡들보다는 단순해진 감이 있어서 내용적으로 좀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하지만 이러한 점들이 ≪피아노 협주곡 26번 '대관식'≫을 오히려 누구에게나 알기 쉬운 곡으로 받아들여지게 하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지게 만든 듯 싶다. 서곡 ≪마술 피리≫ (OVERTURE TO DIE ZAUBERFLOTE K. 620) 오늘날 모차르트의 4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여자는 다 그런 것≫, ≪마술 피리≫-는 세계의 모든 극장에서 매년 공연되는 레퍼토리이다. 그리고 이 네 편의 오페라 에 의해 모차르트는 새로운 오페라의 극작술을 완성시키고 오늘날까지 모범이 되는 오페라적 드라마의 본보기를 세웠다는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빛나는 이 오페라≪마술 피리≫의 원작은 빌란트의 동화집에 있는 회교도의 전설 '마적 룰루'를 번안한 것으로 고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곡은 모차르트가 극도의 가난 속에서 세상을 뜬 해에 만든 곡인데, 초연 당시에는 대단한 평판도 없이 실패작이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사후, 차츰 인기를 얻어 파산에 직면했던 상연 극장을 소생시키고, 괴테와 베토벤의 극찬까지 받았다. 이탈리아 어로 상연이 되던 당시 오페라로는 흔하지 않게 독일어로 만든 이 오페라는 19세기 독 일 오페라의 출발점이 되었다. 독일 풍의 화성과 대위법에 이탈리아의 선율, 프랑스 풍의 우아함 이 결합된 특징을 지닌 이 작품은 모차르트의 최후를 장식하는 명작이다. 이 오페라의 줄거리는 밤의 여왕의 딸 파미나가 고승 짜라스트로에게 유폐 당했지만, 이집트의 왕자 타미노와 새 잡는 사람 파파게노가 마법의 피리와 마법의 방울의 힘으로 파미나를 구해 내 고 많은 시련을 거쳐 경사스러운 결혼까지 한다는 내용이다. 고승 짜라스트로의 등장을 나타내는 소나타 형식의 서주로 시작하는 이 곡은 서곡에서 교묘한 수완을 보이며 상징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그리고 제1막에서는 울창한 수풀에 싸인 바위산을 배경으로 푸가 형식의 제1주제가 제시되면서 다음의 제2주제가 오보에에와 플루트로 나타난다. 그 리고 이 오페라의 전체 줄거리 전개를 나타내는 듯한 여러 가지 음악의 진행 뒤에 승리의 환희를 고하는 찬연한 코다로 들어가 곡을 마친다. 뿐만 아니라 이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들은 모두 개성이 넘치면서도 한데 어우러져 놀라운 동화의 세계를 이룬다. 또한 우리에게는 소프라노 가수들 의 주요 레퍼토리로 불렀던 밤의 여왕의 아리아가 친숙하게 다가온다. 음악적 스타일과 액션, 음조, 기분 등의 다양한 요소가 단 하나의 극적 종말을 향해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는 이 오페라는 작품의 주제와 모차르트의 특수한 천재성의 '마술적 결혼'이라 일컬을 만 하다. ≪마술 피리≫는 흥행 지배인 겸 연출가인 시카네가 한 곡에 100카트씩 모차르트와 계약한 오페라였다.
곤궁한 처지의 그가 기꺼이 작곡에 착수했고 초연 당시의 관객들의 냉대에 관련된 파란 만장한 사연이 있었지만, 모차르트의 천재성과 정열은 이런 상황을 극복해 냈고 훌륭한 오페라로 상연시켰다. 그리고 비극과 희극의 경계가 무너지는 그의 오페라는 모든 점에서 연극의 최고봉인 세익스피어를 연상시킨다. 그만큼 극적인 구성과 생생한 인물 묘사, 작곡자의 인간 세상을 감싸 안는 철학이 너그럽고 깊다는 뜻일 것이다.
레퀴엠 (REQUIEM K.626) 대체로 모차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웃기 좋아하고 조그만 일에도 재미있어 하는 어린이' 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이는 모차르트에게는 심오한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그릇된 편견을 낳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 그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밀러스 포만 감독의 '아마데우스'라는 영화에서도 모차르트에 대한 편견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평생 진정한 고민과 반성이 담긴 교회 음악들을 작곡했고, 죽음에 대한 깊은 탐구가 담긴 ≪레퀴엠 ≫까지 작곡한 사람이었다.
그가 어느 날 병석에 누운 아버지에게 죽음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죽음이란, 우리가 그걸 아주 가깝게 생각한다면 우리 존재의 참다운 목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최근 몇 해 동안에 인류의 가장 좋은, 가장 진실한 친구인 이 죽음과 대단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어요. 죽음의 영상이 제겐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퍽 부드럽고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죽음이 참다운 행복으로 통하는 문의 열쇠라는 것 을 터득할 기회를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합니다."
≪레퀴엠≫이나 ≪메이슨 장송곡≫같은 음악을 창조할 수 있었던 그의 영혼은 피조물인 우리 인 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초월할 수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레퀴엠≫은 보통 진혼곡이라 불리며, '죽은 자의 혼을 달래기 위한 노래'로 풀이되는 카톨릭 교회의 예식용 음악이다. 제8부로 구성되는 이 곡은 아다지오, 4/4박자인 제1부에서 입제창이, 제2부에서는 알레그로, 4/4박자의 합창이, 제3부에서는 '진노의 날'에서부터 '그의 날과 눈물의 날'로 나뉘어 속창이 이루어진다. 제4부는 안단테, 4/4박자의 봉헌문이 담겨져 있다. 제5부에서는 아다지오, 4/4박자의 상크투스가, 제6부에서는 안단테, 4/4박자의 베네딕투스가 선을 보이고, 야누스 데이의 제7부는 3/4박자이고, 마지막 콤무니오는 아다지오, 4/4박자의 구성을 갖추고 엄 숙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그리고 이 모차르트의 ≪레퀴엠≫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1791년 전혀 알지 못하는 이상한 풍채 의 회색 옷을 입은 사나이가 모차르트를 찾아와 서명이 없는 편지 한 통을 그에게 전달하였다. 편지의 주인공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말고 ≪레퀴엠≫을 작곡해 달라는 정중한 부탁을 한 것이다. 적지 않은 사례를 받은 모차르트는 병이 악화되는 가운데서도 생계를 위해 이 곡을 쉬지 않고 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 곡은 나를 위해 쓰는 것이다." 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는 그는 불행히도 자신의 말에 책임이나 지듯 그해 12월에 세상을 뜨고 만다. 곡은 모차르트의 유언대로 제자 쥐스마이어에 의해 완성이 됐고, 그 정체불명의 사나이에게 전달이 되었다.
이러한 모차르트의 죽음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붙어 다닌다.
≪레퀴엠≫을 의뢰한 사람이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질투한 선배 작곡가 살리에리였고, 모차르트는 그가 가져온 죽음에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은 모차르트에게 많은 돈을 주고 작품을 부탁해 그것을 자기가 작곡한 곡인 양 행세하려던 어떤 귀족이 보낸 심부름꾼이라는 이야기가 현재는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음악에 대한 모차르트의 강한 정열과 집념이 떠올리며 듣다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레퀴엠≫ 은 빈에서 해마다 '모든 성인의 날'이면 황실의 예배당에서 정기적으로 연주되는 오랜 전통이 세 워졌고, 이는 20세기에 들어와 겪게 된 다양한 정치적인 변혁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받지 않고 계 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