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적는 내용은, 극히 주관적인 겁니다. 이전 꼬리말등에서 몇 번 지나가며 언급한 적은 있는데, 별로 호응이 좋지 않더라는...
일상을 최대한 활용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정]에 요구되는 소위 수행력을, 우리의 어리석음에 따라 이미 함께 하는 형성력으로 대치하는 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만, 혹시 동의하는 분들도 있지 않을까 싶어 적는 겁니다. 뭐...화엄행자는, 일체의 어리석음을 알려는 마음을 일으킨 불자입니다. 어리석음이 아니라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요. 그러니 어리석음을 잘 활용하려는 시각도 가질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알아차림은, 어리석음을 아는 기법이거든요. 어차피 일상이라는 어리석음을 활용하는 거라구요... 따라서 일상의 최대한 활용은, 기본적으로 알아차림의 성격을 띈다고 하겠습니다.
위와 같은 방식에 동의한다면, 이는 여러가지로 유용합니다. 구체적 이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사실을 발견하거나 형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 이해 없이는 모호함을 벗어날 수 없거든요. 그리고 혜, 정, 계의 3학에서 [정]은...그러한 구체성을 구현해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소위 [정]과 관련하여서는, 개인적 차이가 많습니다. 아주 울퉁불퉁합니다. 또한 현실적으로, 바쁜 분들이 많습니다. 수행한답시고, 별도의 시간을 내기 어려운 분들도 많아요. 울퉁불퉁함과 이러저러한 현실적 여건의 문제는, 알아차림과 삼매 중 특히 삼매에서 두드러집니다. 삼매수행은, 알아차림보다 그 기법상의 위험성이 크고, 대단히 울퉁불퉁하며, 현실 생활을 영위하며 제대로 해내기가 어렵습니다. 단순히 성실함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장기간 전력 매진할 수 있는 별도의 시간이 요구되는 편입니다. 상대적으로, 알아차림은 평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소위 뚜리야와 관련한 내용만 적겠습니다. 뚜리야는 평범한 일상과도 관련 되고...유용성이 보다 강하게 긍정되는, 삼매와 관련한 사항이 되거든요.
어쨌든...어리석음을 활용하는 방법은 다양할테니...그러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얼마든지 적당한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일상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의식상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수면에서 깨어난 상태, 꿈꾸는 수면상태, 꿈이 없는 수면상태... 그리고 이러한 세가지 의식상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긍정할 수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다 알아요...
요가는, 위의 세가지에 하나의 의식상태를 덧붙여 '뚜리야'라고 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의식상태를 덧붙여 '뚜리야띠따'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뚜리야와 뚜리야띠따는 같다고 하는 계열도 있고, 다르다고 하는 계열도 있죠. 또한 뚜리야 내지 뚜리야띠따를 차별화해서, 의식상태 내지 상태가 아니라고 하는 계열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가지 의식상태와 뚜리야 내지 뚜리야띠따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도 갈라지겠죠? 여하간 무지 다양해요... 전부 외우지는 못하는데, 모든 경우의 수가 모두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여러가지 사실들이 알려질 때, 그 사실들을 연관시켜 이해하는 방식은 참으로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경우의 수에 따른 이해방식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불교는, 원칙적으로 그러한 사실들을 연관시켜 이해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사실 하나 하나 자체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불교는 희론을 잠재운다"고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여러가지 사실들을 연관시키는 다양한 이해방식의 무조건적 부정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다양한 이해방식이 가능함을 전제로 하기에, 그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가는, 세가지 의식상태를 '명료함(명료한 의식)'으로 관통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명료함으로...수면이 깨어난 상태로부터 꿈꾸는 수면상태로 나아가고, 꿈꾸는 수면상태로부터 꿈이 없는 수면상태로 나아가는 방식이죠. 그리고 이러한 명료함의 이름이, 뚜리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즉 뚜리야는, 그러한 명료함만이 남은 상태인 거죠... 뚜리야띠따는 뭐가 되겠어요? 그러한 명료함을 넘어 있는 상태죠... 명료함을 넘어 있는 상태를 긍정하면, 뚜리야띠따라는 이름을 쓸 거예요. 부정하면, 쓰지 않겠죠? 그리고 뚜리야만 긍정하는 계열과 뚜리야띠따도 긍정하는 계열이 있었을 때, 뚜리야와 뚜리야띠따는 같다는 계열도 나올 수 있을 것이고, 나옵니다...
어쨌든...이상에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행방법에서 필연적으로, 뚜리야는 늘 있는 상태라는 견해가 나올 겁니다. 그러니 뚜리야는 상태가 아니라는 견해도 나와요. 왜 그런가? 세가지 상태에 늘 있는 것이 뚜리야기 때문입니다. 수면이 깨어난 상태등에 뚜리야가 부가적으로 함께 하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수면이 깨어난 상태등에 이미 뚜리야는 있다는 겁니다. 수행하지 않은 이는, 뚜리야를 망각한 거와 비슷합니다. 요가수행으로 뚜리야를 알면, 그러한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주장인 겁니다. 뚜리야는 세가지 의식상태의 단절 없는 연속성을 담보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위 인도구루풍의 설명이죠?
불교는 어떨까요? 불교에서 "세가지 의식상태" 각각과 "명료함과 함께 하는 세가지 의식상태" 각각은, 서로 다른 의식상태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여섯가지의 의식상태가 나옵니다. 그리고 "명료함과 함께 하는 꿈꾸는 수면상태"가, 욕계 내지 색계 선정입니다. "명료함과 함께 하는 꿈이 없는 수면상태"는, 원칙적으로 무색계 선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무색계 선정이 아님에도, 경험적으로 "명료함과 함께 하는 꿈이 없는 수면상태"라 이름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지적하겠습니다.
어쨌든...위와 같다면...꿈에서 명료함을 갖추는 경우, 꿈에서 색계 내지 욕계 선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잠이 드는 과정을 알아차림함으로써, 선정에 이르게 하는 삼매에 준하는 힘을 갖출 수 있습니다. 다만 무색계 선정과 관련하여서는, 명료함을 갖춘 꿈에서 무색계선정을 성취하기에 적절한 행위를 해야 합니다. 명료함을 갖춘 꿈의 징표 중 하나는, 1인칭 시점입니다. 몸이 형상등을 갖추고 있지 않아야 하는 거죠...
소위 "24시간 깨어있음 즉 명료함"을 이야기하는 우리나라 고승도 있는데요. 꿈이 없는 수면상태에서도 깨어있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명료한 꿈이 없는 수면상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명료함과 함께 하는 꿈이 없는 수면상태는, 꿈이 없는 수면상태가 아닙니다.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명료함과 함께 하는 꿈이 없는 수면상태"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암흑과 함께 하는 명료함"과 "무색계 특히 우선적으로 공무변처"입니다. 암흑과 함께 하는 명료함에서...암흑은, 빛의 또 다른 발현형태입니다. 그리고 빛은 꿈의 질료이므로, 꿈이 없는 수면상태라는 이름에 보다 충실하기 위해서는 무색계이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이든..."암흑과 함께 하는 명료함" 혹은 "무색계 특히 우선적으로 공무변처"가, 꿈이 없는 수면상태라고 판단할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꿈이 없는 수면상태는, 기억에 없어요... 그러니 주관적으로 비교할 그 어떠한 기준도 가질 수 없습니다. 즉 명료함과 함께 하는 꿈이 없는 수면상태란, 의제에 지나지 않아요... 아무런 근거도 없는 무조건적 믿음인 거예요... 여타의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꿈이 없는 수면상태... 기억이 없는 상태... 이것은, 소멸이라고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없음이라고 보는 거죠... 기억이 없다는 특징은, 오직 소멸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멍청하게 있는 것...그거, 기억이 없지 않습니다. 꿈을 꿨는데 망각한 거...그거와도 다릅니다. 꿈이 없는 수면상태는, 꿈이 없는 거니까요... 그런즉 기억이 발생할 수 없는 거예요... 꿈이 없는 수면상태가 없음이라면, 그것은 의식상태가 아닙니다. 없음에서는, 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좌불교에서 긍정되지 않습니다. 상좌불교에서 바방가는 끊임이 없거든요... 대승불교에서도 긍정되지 않습니다. 알라야식은 원칙적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더구나 꿈이 없는 수면상태가, 없음이라면...수행하지 않아도, 누구나 일상을 기준으로 최소한 하루 몇 시간동안은 소멸하잖아요... 이러한 점을 수용하기 힘든 거예요...
하지만 어떤 상태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과보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한발 더 나아가 열반을 추구하지 않는다면...수용하기 힘든 까닭은 뭡니까? 어차피 없음이 알려지더라도, 금생의 기억은 굳건합니다. 소멸의 증득이 있다고, 소멸의 증득 이전의 기억은 사라지는게 아니란 말이죠... 마찬가지로...꿈이 없는 수면상태가 없음이라도, 금생의 기억은 굳건한 겁니다.
우리는 무언가 파랑새를 만드는 습관이 있습니다. 욕망 때문에 그래요... 열반은, 욕망의 투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차적 의미의 열반 즉 없음은, 사실입니다. 평범한 사실이예요... 우리가 매일 하루 몇 시간씩 머물게 되는 사실인 겁니다. 꿈이 없는 수면상태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꿈이 없는 수면상태가 알려지듯, 없음이 알려지는 겁니다. 여기에 그 어떤 복잡한 설명도 필요 없어요... 꿈이 없는 상태를 검토함으로써, 없음과 관련한 여러가지 난제가 복잡한 설명 없이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 이해가 성립하게 되는 거죠...
위와 같이 접근해 나갈 때, 없음등 경계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와 같이 마음을 일으키고 거두는 일에서의 능통함"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열반은, 파랑새가 아니라, 드러난 바로 그 법에서의 문제가 되는 거죠... 여기서 "무조건 뭐를 한다"는 아닙니다... 위와 같이 알기에, 그에 적절한 행위를 하는 겁니다. "무조건 뭐를 한다"는 것은, "취"의 특징입니다. "왜 그러는지등도 모르면서,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취의 특성 중 하나입니다.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뭔 짓을 하는지, 왜 그 짓을 하는지, 그 짓은 어떻게 있고 없는지... ... 이러한 앎의 바탕에서, 능통함에 초점을 맞추는 거예요...
첫댓글 동대 김성철 교수님의 책 [백문백답]에 보니까, 꿈이 없는 잠은 없다고 하셨더라구요. 단지 꿈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라고요. "꿈이 없는 것"과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구별하죠?
제가 알기론, 찰스 타트 같은 초심리학자도 현재의식도 일종의 변성의식상태의 하나로 상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옛 사람들이 말하듯이 꾸지도 않은 꿈을 꿨다면서 용하다는 점쟁이를 시험하려고 찾아가서 말했는데, 아니 어떻게 된 것인지 그 점쟁이 말대로 됐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나중에 사실 그 꿈을 꾸지 않았다고 점쟁이한테 실토하면서 그런데 어떻게 당신의 예언이 적중했는지 물어보니, 사실 당신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꿈이고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 도 있고요. "누구나 일상을 기준으로 최소한 하루 몇 시간동안은 소멸하잖아요" 이 말씀이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군요...
본글의 [수면에서 깨어난 상태, 꿈꾸는 수면상태, 꿈이 없는 수면상태... 그리고 이러한 세가지 의식상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긍정할 수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다 알아요...]는,
[수면에서 깨어난 상태, 꿈꾸는 수면상태, 꿈이 없는 수면상태... 그리고 이러한 세가지 의식상태는,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긍정하고 있습니다.]정도로 고쳐져야 할 듯...
["꿈이 없는 잠"은, 하나의 사실인가? 아니면 하나의 가정인가?]
역시 요가 이야기인데요...특히 관조기법을 해보면, 꿈이 멈추는 시점이 있습니다... "보통 말해지는 꿈"이 진행되다가, 본글에서 "흑암"이라고 표현된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 상태가 나옵니다.
물론 ["명료함과 함께 하는 꿈꾸는 잠"이기에,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건데요... 오히려 스스로 일으킨 명료함을 유지하려는 힘에 따라...[소멸]이 아닌, ["흑암"이라고 표현된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 상태]가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거죠...
위에 적었듯...상좌불교도 대승불교 특히 유심론도, 수면상태에서 멈춘다는 주장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좌불교와 유심론 모두에서 긍정하듯, 어차피 찰나생멸한다면...잠자는 상태만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난 상태에서조차...소멸이 없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상좌불교와 유심론의 찰나생멸 모두가, 이미 소멸은 말하고 있어요. 잠에서 깨어난 상태에서조차,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잠자는 동안...현실을 기준으로 몇 시간 가량 소멸에 머물렀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어떤 교학상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위의 본글과 같이 "꿈이 없는 잠"을 "소멸"로 주장한 이유는, 소멸을 가능한한 구체적으로 와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소멸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에도, 소멸이 구체적으로 와닿을 수 있는 상태가 뭐냐? 찾아 본 즉, "꿈이 없는 잠"이었다는 거죠... 그냥 그렇게 주장하면, 너무 엄어 보이니까...나름 설득력을 갖출려고 한 거란 말이죠... 그리고 관조기법을 해보니, "꿈이 없는 잠" 자체는 알려진 적이 엄다는 결론에 이르렀거든요. 관조기법의 결론은, 잠은 걍 자야 된다는 거예요.
꿈이 엄는 잠을 관조하는 것은, 제대로 잠을 자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믿고 있습니다. 확신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 언어적 사유를 통해서도, 특정 체험에 준하는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 해당 체험자가 가질 습관을 형성하면 된다. ]
그리고 이에서...대승의 본지를 찾았고, 수 많은 선배 대보살들이 힘들게 구축한 교학의 본지를 찾았습니다. 그냥 체험하는 것만이 길이라면...타 유파와 경쟁하는 것도 아닌 부분에서, 그처럼 공을 들일 필요는 없거든요... 저는 교학을, 체험에서의 울퉁불퉁함을 평등하게 구현하게 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그 많은 설법 역시, 마찬가지란 거죠..
물론 현재 제가 보기에는, 그처럼 표면적이라고 평가될 일상적 습관만으로는 힘을 쓰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충분히 강한 신심만으로는 부족한 경우가 있다는 거죠... 그러니 스스로 힘을 기르는 연습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위의 본글이, 수면을 이용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평소에는 그런 연습이 힘들어요... 피곤합니다. 직접 선정에 드는 연습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수면을 건드리는 일은 피곤한 거예요. 하지만 평소에는 걍 일상에서 꾸준히 알아차림하면서 좀 힘을 기르다가...내일이 쉬는 날이거나 휴가기간이라면, 좀 피곤해도 상관 엄잖아요? 그럴 때마다 꾸준히 시도하는 거죠.
그러다가 스스로의 몸이 형상이 없고 1인칭인 꿈의 상태도 형성하고, ["흑암"이라고 표현된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 상태]도 알려지는 일도 생길 겁니다. 그렇게 되면, 꿈에서 색계 4선의 형성등 제반 선정수행도 할 수 있어요... 요가도 선정을, 자발적으로 일상에서 꿈으로 들어가는 일로 봅니다. 불교라고 짜다리 다르지도 않습니다. 삼매수행 자체가, 불교에서 수용한 거예요.
꿈을 꿨는데, 기억 몬할 수도 있지 않는가? 그럴 수 있습니다. 완벽하려고 할 필요는 엄어요... 완벽이라는게 가능한 것 같지 않아요... 제 수준에서는 그래요... 그러니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고, 목적한 바에 적합하고 유용한 일을 하면 되는 겁니다.
물론 선정이 꿈이라고 하면, 폼이 안나긴 하죠...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예요... 우리가 스스로 취하고 있는 어리석음은, 일체 선정을 포함하는 겁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이미 무량한 소위 선공덕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그게 제가 보는 관점이죠... 수행이라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알아 우리의 어리석음을 평등하게 구현해 내는 일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화엄종의 취지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행자는, 본글 말미에 적었듯, 열반을 찾아 헤메지 않습니다. '일차적 의미의 열반' 내지 소멸도, 어리석음의 하나일 뿐이라고 봅니다. 없음은 조건으로서의 없음입니다. 스스로의 조건에 종속된 없음일 뿐이라는 거죠...
밝음과 어둠이 의식되는 것은, 욕계 내지 색계의 일입니다. 밝음과 (밝음의 또 다른 발현형태로서의) 어둠은, 색온이거든요...
[의식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일]과 같이 복잡한 작업은...무색계 선정 전체를 포함하여, 어느 정도 깊은 선정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일상에서도 어느 정도 깊은 층계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당장 이곳에서 이야기된 바 있는 호흡연습이 어느 정도 나아갔어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겁니다.
없음은,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의 상태는...멍청한 상태는 아닙니다. 멍청한 상태는 기억에 있어요... 위의 본글 바로 밑의 [찰라생 찰라멸-간단한 실험]에서도 지적했듯, 마음의 유무를 말하는 거죠.
인식자 자체가 푹 쉬고 있는 부재가 아니라, 인식자라고 칭해진 것 자체가 없는 겁니다.
꿈 없는 잠을 없음으로 의제한다는 것은, "잠자는 나는 있었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경험을 말하는 겁니다. 언젠가 적은 적이 있는데, 어떤 기억도 없이 잠에서 깨어나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일은 아주 신기한 일입니다. 자신이 잠자고 있었다는 기억이 없잖아요... 그냥 잠이 와서 잤고, 잠이 깨었을 뿐입니다. 잠이 안들고 깨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와 같이 아무런 기억도 없이 여러 시간이 지났다면...당황하지 않겠습니까? 당황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비정상이죠... 문제가 심각하죠... 하지만 유독 잠과 관련하여서만은, 아무도 당황하지 않아요...
넷에서 오래 활동하다 보니, 하지 않았던 말이 별로 없는데요... 지금 적는 것도, 다 과거에 했던 말이예요... 저는 없음이 경험적으로 알려졌을 때, 당황했습니다. 언어적 사유로 없음이 있어야 한다고 확신에 이를 정도였는데도, 당황했습니다... 없음이 그러한 것인 줄 몰랐거든요... 언어적 사유로 생각한 없음은, 그냥 상상력의 끝일 뿐이거든요... 더 이상의 생각을 진행할 수 없게 하는 종착점 같은 거죠... 하지만 경험적으로 알려진 없음은 그런게 아니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정말 뭔가 잘못된 줄 알았어요... 요가수행 중 명료함을 놓친 것이 아닌가 의심까지 했었습니다. 제가 경험했다고 주장하려고, 이런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없음을 알아야, 대승불교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말하는 거예요... 그것도 그냥 막연하게 알아서는 너무 모호해서, 대승의 언명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어려워요. 어느 정도 이상의 구체성을 획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체성을 획득할 수록...대승의 구체적 이해가 가능해져 깊이 있는 이해의 출발점에 설 수 있습니다.
자꾸 자극적인 말이 나올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까...불교에서는 어떤 의식상태든, 설령 없음이라도...본질적으로 우월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잠이 안들고 깨어 활동할 때를 기준으로 별도의 노력이 필요한 경우, 그 필요한 노력의 정도에 따라...노력이 많이 필요할 수록, 좀 상층부 의식상태로 쳐주는 거죠...
어쨌건...위에 적은 [잠이 안들고 깨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와 같이 아무런 기억도 없이 여러 시간이 지났다면...당황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지적을 눈여겨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당황하라는게 아니고... 최소한 [우리가 믿는 바들이 얼마나 형평성 없이 자의적으로 적용되는 것인가?]를 점검해 볼 기회는 될 수 있다는 거죠...
[찰라생 찰라멸-간단한 실험]에서도 알 수 있지만, 찰나생멸이라는 문자로 아는 것과 교학상 말해지는 찰나생멸이 같은 것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없음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적당한 다른 표현이 없어요. 의식의 소멸이 알려지면, 잠에서 깨어나 당황하지 않듯, 의식의 소멸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됩니다...
그야...자면서도, 없음은 당연히 알려질 수 있죠... 무색계 선정으로 나아갈 수도 있으니, 소멸도 알려지죠... 그러한 일과 관련하여 본글에서는...[다만 무색계 선정과 관련하여서는, 명료함을 갖춘 꿈에서 무색계선정을 성취하기에 적절한 행위를 해야 합니다]라는 정도로만 적고 지나갔습니다. 소멸 내지 없음은, 고의로 언급하지 않았죠...
왜 그랬냐 하면요... 당장 우선적으로 목적한 바가, 꿈 없는 잠을 소멸로 의제하여 소멸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구요. 다음으로 혹 꿈을 이용할 분인 경우...우선 꿈을 꿀 때, 꿈꾸는 줄 알고 명료한 꿈을 꾸려고 노력해야 하구요. 그리고는 잠에 들어가는 과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야 하거든요...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닌 한, 어려운 순서가 그럴 거예요. 용 빼는 사람 엄거든요. 저한테 어려우면, 십중팔구 넘한테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쉬운 것부터 하려고 해야 합니다. 무색계에는 그냥 들 수 없습니다. 따로이 뭔가 별도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쓸데 엄이 뭔가 많이 제공되고 의욕이 과도한 경우, 잠을 안자려는 무모한 사람이 나옵니다. 저는, '24시간 깨어있음' 즉 '잠 안자는 일'을 이야기하는거 싫어합니다. 잠은 자야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을 안자려고 하면, 악몽이예요. 24시간을, 자는 것도 아니고 안자는 것도 아닌 상태에 있게 됩니다. 물론 다이어트는 확실히 되구요... 극에 이르면 몸무게 30킬로 대로 진입합니다.
===
신심이 확고하고 교학에 어느 정도 능통하면, 힘은 호흡연습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를 나눠 이야기하지만...진입에서의 어떤 장벽을 제외하면, 힘을 다스리는 거는 비슷해요. 그런데 사람이 아는게 많으면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아집니다.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누구는 이게 땡기고, 누구는 저게 땡기고 그러거든요. 또 기왕에 화엄행자라면, 어리석음을 많이 알수록 좋죠... 노느니 이거라도 한다고... 그런 거와 비슷한 거라는... 또 법을 드러내려면, 아는게 많아야 되요. 큰 그물을 만들어서, 그물을 넓게 던져야 되거든요. 그럴 수 있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할 필요성도 강해지구요.